나른한 오후의 점심 식사

A Summer Luncheon in a Villa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붉은 식탁(빨강색 속의 조화)> 1908~1909년 작,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내가 그림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표현이다. 여기서 표현이란 얼굴에 번뜩이는 정열이나 난폭한 붓동작이 아니라, 화폭에 담긴 구도 – 인물과 사물의 위치, 빈 공간, 비율 등 – 배치와 색채로 화가 개인의 기분(feelings)을 마음껏 표출하는 것을 뜻한다.”고 앙리 마티스는 <라그랑드르뷔(L Grande Revue)>誌의 한 평론가와 가진 대담에서 1908년 살롱도톤느 展에 출품한 그의 회화작품 <붉은 식탁>에 담긴 의도를 설명했다.

‘야수파의 왕초’, ‘추함의 사도’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프랑스 근대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 – 마티스(Henri Émile Benoît Matisse)는 유럽 근대미술을 이끈 선구자중 한 사람이다. 수많은 근대적 선언과 강령이 각축하던 20세기 여명기, 파블로 피카소와 마르셀 뒤샹 등 동시대 미술인들의 견제 속에서 마티스는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의를 계승한 야수파(Fauvism)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붉은 식탁>이 출품된 1908년 살롱도톤느 전시회는 마티스 미술인생의 분수령적 순간이었다. 그 후로 그는 격렬한 붓놀림과 공격적인 색채를 구사하는 야수파기(期)를 접고, 일상 속 실내 풍경을 고도로 평면화・단순화시킨 장식적 추상화 양식을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이로해서 마티스의 ‘장식 패널(decorative panel)’의 시대가 개막했다.

일군의 학자들 사이서 마티스의 최고 걸작이라 평가받기도 하는 이 작품은 완성까지 세 번의 수정을 거쳤다. 애초 그림 주문자인 러시아 출신 갑부 미술수집가 세르게이 슈킨(Sergei Shchukin, 1854~1936)은 모스코바에 있는 대저택 식사실 벽을 장식할 ‘파랑색 속의 조화’라는 그림을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작업에 들어간 마티스는 파랑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녹색으로 수정했다가 끝내 벽과 식탁을 붉은색으로 최종 마감하고 푸른 하늘과 녹색 전원이 보이는 창밖 풍경을 그려넣는 것으로써 화가의 표현적 자유와 주문자의 요구를 창조적으로 조율했다. 화가가 살던 파리 아텔리에서 수도원의 정원이 내려다 보였다고 하는데, 이 창 밖 풍경의 모델이 됐던 듯하다. 오늘날 이 작품은 러시아인들 사이서 <붉은 방(The Red Room)>이라 불리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영구소장돼있다.

<붉은 식탁>은 안락하고 넉넉한 가정의 실내 공간을 묘사했다. 이 즈음 마티스는 꽃병, 과일, 꽃 등 실내 장식물을 모티프로 한 그림을 다수 그렸다. 가정부로 보이는 여인이 식탁에 포도주 병과 과일을 세팅하고 있는데, 디캔터에 는 주 요리 코스가 끝난 후 제공될 디저트와인이 담겨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 일각에서 이 그림을 ‘후식(The Dessert)’이란 제목으로 부르는 단서다. 산딸기톤 빨강색으로 강렬하게 전율하는 테이블보와 벽을 배경삼아 푸른색의 꽃 바구니 문양이 패턴처럼 반복해 등장한다. 파격적이고 대담한 구도와 색채 처리로 화가는 3차원 실내 공간 그림을 한 편의 평평한 순수 장식 그래픽으로 탄생시켰다. 가정의 아늑함과 환희로 흥건한 찰나를 포착한 ‘감정의 시각화’의 탁월한 예다.

앙리 마티스 <붉은 실내: 푸른 테이블 위의 정물(Red Interior: Still life on a blue table)>, 1947년. 소장: K21뒤셀도르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미술컬렉션. 사진: © 2019 Succession H. Matisse/DACS, London/Bridgeman images.

다행히도 마티스는 1908년 살롱드톤느 전의 성공을 계기로 만난 슈킨이라는 새 후원자 덕택에 직업적 미술가가 된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재정적 안정을 맞았다. 파리의 비싼 생활비와 빡빡한 교습일에서 벗어나 가족을 데리고 파리 근교에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고 그림그리기에 전념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중산층 가정의 소박하고 아늑한 생의 환희’라는 주제 만큼 마티스의 본령(本領)이 또 있을까?

결국 마티스 자신이 유복한 양곡무역상 집안에서 태어나 법률가 교육과 고시를 거친 전형적 중산층 출신이었다. 그는 파리 시절 호주머니 사정에도 오렌지를 사서 식탁에 장식하곤 했는데, 과일값이 화대(花代)보다 비쌌다던 20세기초 파리에서 빠듯한 살림의 화가가 과일을 사는데 푼돈을 쓴다함은 호사취미였다. 이를 잘 알던 평생 예술친구이자 경쟁자 피카소는 매년 오렌지 선물 바구니를 새해 선물로 보내줬다는 야화가 전해진다.

마티스는 동시대 예술가와 지성인들로부터 중산층 가정의 안락과 나른한 단면을 취한 개념 없는 미술가라 비난 받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스페인 독감, 경제대공황이라는 혼돈과 비극의 19010~20년대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거듭 유린하던 격동의 20세기 전반기. 세상 밖 풍파와 변화에 아랑곳않고 마티스가 창조한 아늑하고 평화로운 가정 풍경은 실은 장식적 아름다움, 질서정연한 조화, 평화와 고요에서 기쁨과 위안을 찾고 싶어하는 인간 보편의 감성의 반영이었다.

생전 마티스는 자신의 그림이 ‘… 하루 일과에 시달리고 귀가한 비즈니스맨이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쉬며 즐길수 있는 미술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티스는 변혁과 개혁의 화가는 아니었다. 그의 그림을 사주고 감상한 고객은 사회혁명가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집에서 여가를 보내는 근면하고 교양있는 생활인과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본래 농수산식품유통공사 ⟪aT⟫ 2020년 6월호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This column has been originally appeared in the Une 2020 issue of aT, corporate journal published monthly by Korea Agro-Fisheries Trade Corpo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