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프로이트-미술

달리는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카탈루냐 동북부의 소도시 피게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앙드레 부르통과의 불화로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 당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초현실주의 자체이니까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못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말이다. 그의 초현실주의는 자신이 이미 천재로 태어났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도무지 현실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스스로 ‘편집광적·비판적 방법’이라 부른 그의 창작수법은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환각을 객관적·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삶 자체가 예술이었고 초현실이었던 살바도르 달리의 생애를 살펴보자.

Salvador Dalí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년, 캔버스에 유채, 24.1 x 33 cm, 소장: Museum of Modern Art (MoMa), New York. © 2020 Salvador Dalí, Gala-Salvador Dalí Foundation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문학과 미술 운동으로 출발한 초현실주의 만큼 일반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미술 사조가 또 있을까? 본래 초현실주의 운동은 제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20년대 초엽 프랑스에서 다다운동(Dadaism)의 곁다리로 파생한 자못 진지하고 철학적인 사색에서 출발한 예술사조였지만, 양차세계대전 사이 동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망명한 후 ‘고급미술’로 여겨지던 유럽 초현실주의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간 후 저변적 대중미술이 되는데에 달리가 기여했다.

초현실주의 미학은 1960~70년대 사이키델릭 문화의 유행을 타고 LA 언더그라운드 로우브로(Lowbrow) 운동, 코믹스, 거리낙서미술, 비치패션 등에 침투하며 일명 미국판 ‘팝초현실주의(Pop Surrealism)의 탄생에 자양분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달리는 일개 광고판 그림쟁이에 불과하던 무명화가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를 팝아티스트로 거듭나게 해준 은인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초현실주의 이미지는 ‘대중 시각문화의 꽃’이라는 광고에서 즐겨 차용되는데, 가장 최근 폴스크바겐 폴로 자동차의 블루모션 광고 캠페인도 그 유명한 달리作 <기억의 지속>을 영감으로 삼았다.

폴스크바겐 폴로 자동차의 블루모션 광고 캠페인. 광고에이전시: DDB Germany. 일러스트레이션: Kirill Chudinskiy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가 사망한 1989년 이후 지난 30년에 걸쳐 축적・재평가된 연구와 전시회 결과, 오늘날 미술사학자들은 대체로 1920~30년대를 달리 미술의 최절정기라 평가한다. 20세기 초 수많은 근대 예술인들이 그러했듯 달리 또한 당시 새로운 사조가 각축하고 미술후원자들이 모여있는 유럽의 대도시를 오가며 유명 화가가 될 기회를 노렸다. 22세난 청년 달리는 보다 큰 세상에서 미술을 배울 결심으로 고향 피게레스를 떠나 파리로 건너가 피카소를 직접 만나고 초현실주의 동인으로 가담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경사는 떼지어 찾아온다 하던가. 1929년 달리는 파리에서 평생 뮤즈 겸 반려자가 될 갈라(Gala)를 만나 1934년 결혼을 하자마자 본격적인 국제적 유명세가 찾아왔다. 1934년 뉴욕 쥴리언 레비 화랑과 근대미술관(MoMA)에서의 개인전과 초현실주의 전시회는 달리를 모국출신 화가 파블로 피카소를 제치고 미국에 진출한 최초의 유럽 화가로 만들어줬다. 이 때 전시된 루이스 브루넬과의 합작 35mm 단편영화 <안달루시아의 개>, <위대한 마스터베이터>, <기억의 지속>은 이 파리 시절 프로이트 심리학을 빌어 화가의 성에 대한 집착, 기묘한 상상력, 애인 갈라에 대한 욕망을 탁월한 붓솜씨로 기록한 초현실주의의 아이콘이다.

Salvador Dalí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 단편영화 중 스틸 사진, 1928년, 소장: Museum of Modern Art (MoMA), New York

대중과 매스컴의 주목 말고도 화가 달리에게 중요한 또하나는 돈이었다. 달리 전기의 저자 베릴 세크레스에 따르면 생전 화가는 돈에 향한 광적인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유럽으로 돌아온 후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할 당시 달리는 런던에서 국제 초현실주의 전시회와 성공적인 첫 개인전을 마쳤다. 때를 맞춰 그는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을 발표하며 피카소의 <게르니카> 보다 앞서 공포, 폭력, 기아로 시달릴 스페인 내전을 예견했다고 과시했다. 이 시기 화가는 영국으로 피신해 런던의 부유층 메세나들의 사교클럽인 조디악(Zodiac)의 관대한 후원을 받아서 초현실주의와 대중문화 사이를 횡단하며 창조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이때 완성된 <바닷가재 전화>와 <메이 웨스트의 입술 소파>는 귀, 입, 성기, 엉덩이 등 은밀한 신체부위와 접촉하는 디자인 사물 간의 프로이트식 병치를 실험한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결정체로서 미술사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Salvador Dalí, <욕망의 순응(Les accommodations des désirs)>, 1929년, 캔버스에 유채, 22.5 x 35 cm © Salvador Dalí, Fundació Gala-Salvador Dalí, Figueres © 198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살바도르 달리는 일평생을 거칠것 없는 자기 홍보와 세상을 놀래키는 센세이셔니즘에 헌신했다. ‘벨라스케즈나 라파엘로에 비할 수는 없지만, 모든 동시대 화가들과 비교하면 근대 최고의 화가는 단연코 나’라고 한 점 주저없이 떵떵댔던 그는 자극적인 이미저리의 그림과 그에 못잖은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논란과 물의를 연출하며 언론과 대중의 이목을 끄는 행동에서 말초적 쾌감을 추구한 기인이었다. 맹렬한 창의력에 못지않은 거침없는 쇼맨십에 불타던 달리에게 어쩌면 1940~1955년 사이 미국 거주기는 더없이 안성마춤의 예술과 인생의 무대였는지 모른다. 여성을 향한 에로티즘, 신비, 공포, 죽음을 형상화한 이른바 ‘핵 신비주의(Nuclear Mysticism)’로 이름한 이 시기 그는 『라이프』나『보그』지 등 대중문화매체를 통해 미국 대중의 심연을 자극했다.

1950~60년대, 그는 특유의 길고 뾰족하게 다듬은 콧수염을 트레이드마크로 이색대담한 댄디(dandy)적 외모를 내세워서 프랑스와 미국 TV에서 랑방 초컬릿, 알카셀처 소화제, 베테라노 브랜디주, 항공사 광고에 등장했다. 2003년 월드 디즈니 피쳐 애니메이션 개봉작 <운명(Destino)>은 1945년 달리가 월트 디즈니와 기획했다 무한기 보류됐던 미완의 단편 영상 프로젝트였다 지금은 2020년 1월부터 디즈니플러스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되고 있으니 이 정도면 가히 그는 ‘돈을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라 했던 앤디 워홀을 앞선 팝아트의 선구자라해도 좋으리라.

Lobster Telephone 1936 Salvador Dal? 1904-1989 Purchased 1981 http://www.tate.org.uk/art/work/T03257

이후 달리의 자기홍보 전략은 20세기 대중문화 속에서 유효하게 통했다. 판화그림을 대량 판매하고 미술관 전시회 러브콜이 끊이지 않을 만큼 그의 대중적 인기는 고희의 노년까지 지속됐지만 달리 사후 미술제도권의 평가는 가혹했다. 명성과 돈을 밝히는 예술가를 못마땅해 하는 제도권의 불문율은 예나지금이나 변함이 없는지라 달리의 예술 커리어는 기괴하고 천박하다 평가되며 생전 그가 발휘했던 예술적 비젼과 집요한 직업정신에 담긴 진가까지 싸잡아 평가절하된 면도 없지 않다.

달리가 자서전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에서 썼든 겸손은 그의 특기가 아니었다. ‘나는 여섯살 때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일곱살엔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다. 그 후로 내 야심은 계속 커졌다.’ 자궁 속 시절을 기억하고, 칠세로 죽은 형의 천재적 조숙성과 섬세한 얼굴을 그대로 타고난 ‘나는 내가 천재임을 단번에 알았다’고 한 그는 두 말 할 것 없는 에고티스트, 자아도취자, 뻔뻔한 헝풍쟁이였다.

Salvador Dalí <메이 웨스트 입술 소파(Mae West Lips sofa)>, 1937-1938년 디자인, 1938년 생산, 소장: Victoria & Albert Museum, London

관객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호불호를 판단할 권리가 있듯, 미술가는 작품의 독창성과 획기적인 비전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폭력과 해골과 죽은 동물에 대한 판타지에 심취한 치기의 기인, 스페인 프랑코 정권에 심적 동조한 의심스런 캐릭터의 소유자란 비난에도 불구하고 살바도르 달리는 두말 할 것없이 20세기 다양한 양식을 섭렵한 탁월한 기량과 왕성한 다작가(多作家)였다. 이후 그의 인생과 미술은 제프 쿤스의 후기 팝아트와 데미어 허스트의 현대영국 컨셉츄얼 아트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며 시선 끄는 작품, 매스컴 선전, 명성, 부 사이 절묘한 줄타기를 해야하는 현대미술가의 숙명을 예견했다. 결국 미술의 기능이자 사명은 대중의 식상한 고정관념과 타성에 충격을 던지고 새 비젼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던가.

* 이 글은 본래 삼성생명 『WEALTH』 Magazine 2020년 9/10월 호(WEALTH – Samsung Life Insurance, Sept/Oct 2022, vol. 46)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Salvador Dalí <기억 지속성의 븡괴(The Disintegration of the Persistence of Memory)>, 1952-1954년, 캔버스에 유채, 25.4 cm × 33 cm. 소장: Salvador Dalí Museum, St. Petersburg, Flori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