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눈으로 다시 본 독일 표현주의

THE SOUND AND FORM OF SOUL – GERMAN EXPRESSIONISM REVISITED

berlinstrassenzsene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가 그린 『베를린 거리 풍경 (Berliner Strassenszene)』, 캔버스에 유채, 47 7/8 x 35 7/8 in. (121.6 x 91.1 cm.) 1913-1914년경 작. 2006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로널드 로더에게 38,096,000 달러에 낙찰되었다.

감성과 영혼의 미술 표현주의 회화 (Deutsche Expressionismus)를 향한 새로운 주목  독일을 위시로 한 나치주의 정권의 반인륜적 행위와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라는 오명 때문에 특히 20세기 근대기 독일 미술은 여간해서 미술사학자들이나 컬렉터들이 기피해 온 분야로 남아 있었다. 특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 제1차 세계 대전 전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 유럽에서 불거져 나온 표현주의 미술은 거칠고 표현이 단도직입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오랜 세월 동안 주류 화단에서는 한낱 주변적인 미술 운동 정도로 여겨져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에는 독일의 표현주의 선구적인 화가로 꼽히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의 작품 한 점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며, 천재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인 에곤 실레 (Egon Schiele)의 미술 세계는 각각 1960년대와 1980년대에 와서야 비로서 영국과 미국의 미술관에서 처음 소개되었을 정도로 심한 외면을 받았다.

최근 구미권 유명 미술 경매장 매출 보고와 미술 박람회에서 들려 오는 미술 시장 소식에 따르면 세계적 미술관들과 미술 컬렉터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회화에 대하여 전에 없이 새로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을 향한 관심이 커졌다.

바로 지난 11월 8일 뉴욕에서 열린 인상주의 및 모더니즘 미술품 경매에서 키르히너가 그린 『베를린 거리 풍경 (Berliner Strassenszene)』 11점 연작 중 한 작품은 본래 1천8백-2천5백만 달러의 가격으로 낙찰될 것이라는 전망을 뒤엎고 그의 두 배에 가까운 가격인 3천8백만 달러  즉,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3백6십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되어 화장품 업계의 거물 인사 겸 유명 미술 컬렉터인 로널드 로더가 소유한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에로 넘겨졌다. 그런가 하면 미술 시장에서 계속되고 있는 실레의 인기는 경매장에서도 이어져서 그의 『단독 주택들 (Single Houses)』은 2천2백4십만 달러(2십1억2천 여만원)에 낙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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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의  『올덴부르크의 가을 풍경 (Herbstlandschaft in Oldenburg)』 1907년 작 © Museo Thyssen-Bornemisza 슈미트-로틀루프는 베를린에 다리파 미술관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 및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에 대한 구미권 미술계의 집중 현상은 최근 연거푸 국제 법정의 주요 기사거리로 오르내리는 나치 약탈 미술품에 대한 반환 소송건 소식이 큰 자극제 역할을 하는게 사실이다. 특히 미술사에는 기록이 되어 있으나 시장성 면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일부 20세기 화가들의 작품의 경우 국제 법정에서의 반환 소송건은 작품가격을 몇 배로 높일 수 있게 해 주는 최적의 홍보 역할을 한다.

예컨대 올 11월 뉴욕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키르히너의 『베를린 거리 풍경』은 최근 나치로부터 압수되었다가 반환된 유태인 소유의 미술 작품에 대한 법정 소송 사건으로 더더욱 유명해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이 작품은 이번 뉴욕 경매에서 8천7백9십만 달러 (우리돈 8백3십2억 여원)에 낙찰되었다.]과 더불어서 나치군에 의해 강제 압수되었던 것을 되찾은 한 유태인 후손이 경매에 내놓은 작품이어서 더 화재가 되었다.

이미 독일 표현주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나 개인들에게는 분명 좋은 소식이다. 그같은 추세에 덩달아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품에 대한 인기는 당분간 더 상승세를 구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술계의 그 같은 대세를 반영하듯 지난 [2006년] 9월28일부터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독일의 표현주의자들 (Deutsche Expressioninsten)』이라는 전시로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전시를 기획 전시중인 레오폴트 미술관 (Leopold Museum)은 뉴욕 노이에 갤러리와 더불어서 에곤 실레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서, 이번 전시를 통해서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티센-보르네미자 미술관 (Thyssen-Bornemisza Collection)이 대거 소장하고 있는 독일의 표현주의 회화 작품들과 나란히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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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헤켈 (Erich Heckel)의 『단가스트의 집 (Haus in Dangast)』 1908년 작 © Carmen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on loan at the Museo Thyssen-Bornemisza.

프랑스에 인상주의가 있다면 독일에는 표현주의가 있다. 때는 근대기 서양 미술이 새로운 창조적 폭발을 거듭하고 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근대적 신사고와 지성적 합리주의를 여러 미술 운동의 철학적인 기초로 삼았던 파리에서와는 반대로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의 화가들은 감정과 영혼에 호소하는 표현적인 미술이 전격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때는 에곤 실레가 뒤틀린 사지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듯한 인물 초상화와 누드화를 그려서 포르노 화가로 몰려 감옥 신세를 졌던 때이며, 저멀리 북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웨이에서는 에드바르크 뭉크 (Edvard Munch)라는 청년이 급변하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인들의 불안과 공포를 『절규』라는 충격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던 때이기도 했다.

흔히 서양 미술사에서는 세잔느의 정물화가 입체주의의 시초라고 보듯, 19세기 말엽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소용돌이치듯 강렬하고 격렬한 필치의 그림을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적인 양식이라고 추적한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는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거칠음을 뜻한 야수파 (Les fauves)라는 사조를 이끌며 강렬한 색채과 대담한 필치를 구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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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나무로 깎은 의자 앞의 프랜치의 초상 (Fränzi vor einem geschnitzten sessel』 1910년 작 ©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 VBK Wien 2006  다리파 초기 드레즈덴에서 활동중이던 키르히너의 작품 속의 여성상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성적 긴장감을 발산한다. 독일 표현주의의 잉태는 그 모든 외부적인 영향 보다는 독일 미술가들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자생적인 예술혼과 표현욕구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표현주의의 잉태는 그 모든 외부적인 영향 보다는 독일 미술가들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자생적인 예술혼과 표현욕구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다. 독일을 포함한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이미 중세 시대부터 급격한 사회 변혁의 시대마다 인간이 겪는 내면적 공포와 영혼적 위기감을 합리적인 이성주의로 소화하기 보다는 왜곡과 과장의 미학을 빌어 격정적이고 폭발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발휘해 왔다.

독일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표현주의 미술 운동은 20세기가 열리자 마자 표면화되었지만 그 잠재력은 이미 19세기 독일을 사로잡았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피트 프리트리히 (Caspar David Friedrich)가 특유의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풍경화에서 비극과 고독의 멜랑콜리를 잠잠하게 표현했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은 일찍이 19세기 독일을 뒤흔들었던 신 칸트주의 철학에서 이론적인 바탕을 삼았다.

특히 19세기 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쓴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는 개인의 내면 세계와 의지가 외부로 향한 표현의 창 (window)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는데, 그의 철학은 의지를 발휘하면 인간의 내면과 직관은 외부 세계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은 당시 젊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두 팔 벌려 환영받았다.

드레스덴의 다리파 – 비문명 상태로의 회귀 독일땅 동쪽 끝의 역사 도시 드레즈덴 (Dresden)에서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가 주도하여  1905년 다리파 (Die Brücke)가 결성되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나타난 아프리카 원시 미술, 북유럽의 뭉크의 절박함, 오스트리아의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의 실존적 고통이 표현된 그림을 본 후 독일만의 자체적인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이 필요함을 느낀 키르히너는 ‘문명 (civilization)’이라는 거름장치를 거치지 않은 인간 내면의 천연순수의 창조력을 외부로 표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다리파는 삐죽삐죽하고 각진 형태, 튜브에서 갓 짜낸 배색되지 않은 강한 물감 원색, 여과되지 않은 화가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그림들을 그렸다. 다리파 화가들은 그 때까지 주로 광고 인쇄물에나 사용되며 중세 시대 이후로 사실상 잊혀졌던 목판화를 부활시켰는데, 목판화가 자아내는 조악함은 거칠고 노골적인 감정 표현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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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놀데 (Emil Nolde)의 『여름 구름 (Sommerwolken)』 1913년 작 © Museo Thyssen-Bornemisza, Madrid. 덴마크 태생 독일 화가 에밀 놀데는 다리파와 잠시 인연을 맺으며 드레즈덴에서 그림을 그렸다.

다리파 동인들은 문명을 떠나 자연의 단순성과 원시성을 되찾자는 취지에서 모리츠부르크 호수가에서 난잡한 생활에 탐닉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있어 다시금 도시로 눈을 돌려 미술적 영감을 찾았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듯이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들 역시 신작대로가 뚫리고 나날이 인구가 늘어나며 상업과 활동이 번화해지던 근대 유럽의 도시화 현상에서 영감적인 매료를 느꼈던 때문이다.

급변하던 도시상을 그림으로 포착하기 위해 다리파 동인들은 1911년 독일 수도 베를린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급변하는 도시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베를린 거리 풍경, 버라이어티 극장가, 아텔리에 실내 풍경화 속에 표현된 남녀 간의 동물적이고 성적 기장, 언제 분출할지 알 수 없는 억눌린 감정은 키르히너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뮌헨의 청기사파 – 음악과 그림의 만남 한편 독일의 남쪽 도시 뮌헨에서는 곧 터질 제1차 세계 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없이 한결 조화롭고 시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는 젊은 화가들이 1911년에 청기사파 (Der Blaue Reiter)의 결성을 선언했다. 음악을 미술과 결합시켰다 하여 일명 ‘음악적 표현주의 (Musical Expressionism)’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청기사파 회화는 다리파 보다 감정을 절제하고 외부로의 거침없는 감정적 발산 보다는 내면적 조화와 균형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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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라트 펠릭스뮐러 (Konrad Felixmueller)의 『물랭 루쥬 앞의 밤거리 풍경 (Nacht vor dem Moulin Rouge)』 1925년 작. Lindenau Museum, Altenburg © VBK, Wien 2006.

청기사파의 결성 멤버였던 바실리 칸딘스키(Wasily Kandinsky)는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매우 심취했던 화가였는데, 그래서 칸딘스키가 빈 출신의 근대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 (Arnold Schönberg)와 남다른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다른 청기사파의 대표적인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는 가시적인 외부 세계에 대한 깊은 불신감을 청산하기 위하여 자연 속의 동물들의 영혼과 교감하면서 인간적 영혼에 대한 자기 성찰을 시도했다. 동물과의 교감 시도라니 심원난해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마르크의 ‘자연을 통한 자기 성찰 (Durchgeistigung)’은 이미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미술에서도 시도된 바 있는 어찌보면 매우 독일적인 전통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독일 표현주의와 그 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과 종전까지 독일 표현주의는 독일 내에서는 여전히 가장 주도적인 미술 사조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고된 전쟁과 패전 후의  독일인들의 경제적 사정과 일상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고, 그에 따라서 표현주의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전에 없는 냉소주의와 사회적 비판정신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전후 독일 사회 속에 팽배한 냉소주의, 고립과 소외, 환멸감은 보다 사실주의적인 그림으로 표현되었는데, 예컨대 게오르크 그로스 (Georg Grosz)와 오토 딕스 (Otto Dix) 등은 사실주의적 기법과 날카로운 사회비평적 시각이 담긴 이른바 ‘신즉물주의파 (Neue Sachlichkeit)’를 주도한 대표적인 화가들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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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크 그로스 (Georg Grosz)의 『쿠르퓌르스텐담 구역의 거리 풍경 (Strassenszene Kurfuerstendamm)』 © Museo Thyssen-Bornemisza, Madrid. 쿠르퓌르스텐담 (Kurfuerstendamm)은 독일 베를린의 부유한 고급 상가 구역. 화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로상을 오가는 사회 각층의 군상을 통해서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꼬집고 있다.

신즉물주의파의 그림은 다리파와 청기사파의 것에 비해 눈에 뛰게 사실주의적인 묘사 기법을 택하고 있지만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충격적 감흥과 위력 면에서 여전히 독일 표현주의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 같은 시각적 효과는 양차 대전 사이기 기괴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독일 표현주의 영화 운동으로 이어져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년)이라는 공포 영화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패전으로 끝낸 독일 사회에서 표현주의 미술은 1920년대를 고비로 하강 국면을 면치 못했다. 화가 개인의 감성을 앞세워 사회적인 주제를 외면하는 표현주의 미술은 자기도취적이고 목표가 불분명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주 원인이었다.

결정적으로 표현주의가 공식적인 종말을 맞은 때는 1933년. 나치주의 정권이 독일 표현주의 미술을 퇴폐 미술이라고 낙인한 이래 표현주의 화가들이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 흩어지게 되면서 독일 표현주의는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물론 구미 여러 나라들조차 기피하는 미술 사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이번 전시회는 다시금 독일 표현주의를 새로운 역사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독일 표현주의자들』 전은 내년 [2007년] 1월 10일까지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계속된다.

* 이 글은 본래 『오뜨』 지 2006년 1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One response to “21세기의 눈으로 다시 본 독일 표현주의

  1. 독일 표현주의 찾다가 방문하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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