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라 고통과 죽음의 꽃이여!

MUNCH BY HIMSELF AT MODERNA MUSEET STOCKHOLM

에드바르트 뭉크의 자화상을 통해 본 근대 여명기

올해 2013년, 20세기의 거장 에드바르트 뭉크를 낳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는 이 화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특별전시와 문화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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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 화가의 모습을 담긴 <자화상> 1886년도 작. Nasjonalmuseet for Kunst/Najonalgalleriet, Oslo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뭉크 미술관에서 도난 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뭉크 그림 밖에 없습니다.
“이건 아주 비싼 밍크 코트예요. 절대 도난당하는 일 없이 잘 보관해 줘야 해요.” 한 돈많아 보이는 몸집 큰 노여인이 외투를 벗고 미술관 전시장을 입장해 달라는 미술관측 지시를 받고는 뭉크 미술관 입구 물품보관소 직원을 향해서 모피 코트를 건데며 불평을 토로했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뭉크 미술관의 한 고위 직원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쏘아 붙였다. “부인, 이 미술관에서 도난 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뭉크 그림 밖에는 없답니다.”

화가 뭉크에 대한 노르웨인 국민들의 크나큰 자부심이 느껴지는 이 짤막한 농담은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에서 일한 적 있는 한 미술관 직원으로부터 들은 잊지 못할 일화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지날달 3월 6일 [2005년], 노르웨이 남부 지방에 있는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뭉크의 진품 그림 석점이 도난을 당해 홀연히 사라졌다가 하루만인 이틀만에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 온 사건이 벌여져서 전세계 미술애호인들을 놀라게 했다. 뭉크 그림 도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뭉크는 고가 미술품 도난 사건 목록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단골 손님이다.

이미 1994년에는 전문 미술품 도둑 두명이 사다리를 타고 오슬로 국립 갤러리 창문을 통해서 침입해 『절규 (The Scream)』를 훔쳐 간 일이 있었고, 그보다  일찌기 1990년에도 같은 박물관에서 『마돈나 (Madonna)』가 도난당했다가 경찰의 추적 끝에 오슬로 국립 갤러리 품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발생했었다. 그리고 또다시 작년[2004년] 8월 말에는 평상복 차림의 도난꾼 둘이서 환한 대낮에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 느긋하게 걸어 들어가 뭉크 그림 2점을 버젓이 훔쳐 도망친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뭉크 미술관의 보안 수준은 뭉크 작품에 대한 미술관 측의 드높은 자부심과 애정이 무색할 정도로 크게 뒤떨져 있었음이 또다시 노출된 셈이 되었다.

작년 발생한 이 사건이 남긴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도난당한 두 작품이 뭉크의 가장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그 유명한 『절규』와 『마돈나』라는 것과, 범인들은 아직도 잡힐 낌새없이 범행의 실마리조차 묘연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들의 가격은 이미 돈으로 살 수 없는 국보급이 된지 오래다. 현재 미술 시장의 시세로 추정하자면 『절규』는 9천만 달러 (유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9백억원) 그리고 『마돈나』는 1천8백만 달러 (약 1백8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뭉크 작품 도난 사건은 노르웨이의 국가적 체면이라는 면으로 보나 작품 시세 면으로 보나 막대한 손실을 안겨준 안타까운 사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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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속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Hell)』 1903년 작. Munch-museet, Oslo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비록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모양새가 되긴 했어도 미래의 또 다른 도난 사건을 방지하겠다는 차원에서 뭉크 미술관은 현재 미술관 건물 개축 공사에 한창이며 올 가을에 새로운 모습과 강화된 보안 체계로 무장한 후 뭉크 미술관을 재개관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유럽 최북단 대륙인 스칸디나비아 땅의 맨 왼쪽에 자리해 있는 북극광과 절묘한 피요르드 해안 경치를 자랑하는 나라 노르웨이가 가장 아끼는 국가대표급 문화재는 단연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년)이다.

뭉크는 노르웨이 특유의 감성과 기질을 표현한 가장 노르웨이적인 화가임과 동시에 서양 근대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가장 세계적인 예술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1963년에 처음 문을 연 이래 오늘날까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명물로 남아 있는 뭉크 미술관 (Munch Museet)은 1944년 화가가 사망하기 직전에 오슬로 시에 그가 수중에 보관하고 있는 작품들 일체를 기증한 것들을 모조리 소장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 뭉크 미술관이 건물 개축 공사를 하고 있는 기회를 이웃나라 스웨덴에서는 이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뭉크의 여러 대표작들과 특히 화가의 자화상들을 대거 대여해 와 이번 『뭉크 자신이 그린 뭉크 자화상 (Munch by Himself)』 展을 기획했다. 2월19일부터 오는 5월15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국립 근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에서 대형 전시로 올려지고 있는 이 전시는 뭉크의 자화상이라는 주제로는 최대 규모로 열리는 특별전이라는 점 때문에 미술관객들과 언론의 관심도 잔뜩 불러 모으고 있다.

절망, 고통 그리고 죽음 – 뭉크의 영원한  영감의 원천
화가 뭉크의 작품 세계를 총집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작 『절규』 만을 보더라도 화가의 내면에 들끓고 있던 경련하는 내적 심리와 공포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으리라.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가 근대 예술 철학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예술 작품이란 모름지기 소리쳐 절규 (Das Geschrei)하지 못하면 더 이상 예술 작품으로서의 표현에 실패한 것고 다름없다”고 한 지적을 뭉크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작품이 삼아야 할 핵심 모티프로 삼았다. 뭉크의 『절규』(1893년)가 20세기 근대 시대에 사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감과 고통을 그림으로 분출시킨 가장 폭발적인 표현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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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1892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Thielska Galleriet, Stockholm.

서른살 무렵의 화가 뭉크는 친구 2명과 나란히서 저녁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저녁 일몰 시간, 오슬로 시내 하늘과 피요드르 해안 수평선은 갑자기 검푸른 색으로 변하고 바다물과 수평선은 온통 시뻘건 피와 혓바닥처럼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다리 위를 걷던  뭉크는 갑자기 피로와 구토감을 느끼면서 쓰러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다리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화가는 자신의 신체를 관통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고 동시에 자연 속에서 절규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1892년 뭉크의 자화상 『절망 (Despair)』과 이듬해인 1893년에 완성된 불후의 명작 『절규』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두 손으로 파랗게 질려 길게 늘어진 머리통을 붙잡고 괴성을 질러대는 그림 속의 주인공은 고뇌하는 근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뭉크 자신의 모습인데, 강렬한 색과 진동하는 듯한 곡선을 통해 표현된  절규의 음파는 서양 미술사에 기리남을 ‘청각의 시각화’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이미 알만한 미술 애호가들은 알고 있으시겠지만 『절규』라는 제목으로 화가가 그려 남긴 진품 회화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 지는 것들로는 현재 2점이 남아 있는데 한 점은 뭉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가 작년 도난당한 것이며 나머지 한 점은 지금도 오슬로 국립 갤러리에 영구소장되어 있다.

“… 인생이란 폭랑이 불어치는 광활하고 광폭한 바다에 홀로 표류하는 한 척의 낡은 배…배가 난파하면 모조리 네 탓이며 그에 대한 죄로 지옥에서 영원히 불탈 지어다. …”

화가 뭉크에게 인생이란 나약한 신체와 영혼이 헤쳐가야할 무력하고 불안하며 외로운 여정이었다. 19세기 후반기 유럽의 대기를 온통 휩쓰고 있던 낭만주의 (Romanticism)나  감상주의 (sentimentalism)적 체취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화가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격동하는 유럽의 정황 속에서 어딘가 감상적이고 낭만적이며 내면적 환상을 외부로 강렬하게 표현할 것을 사명을 삼았던 이른바 표현주의 계열을 미술을 추구한 화가들로는 뭉크 뿐만 아니었다.

예컨대, 네덜란드 출신이면서 젊은 시절 성직자로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표현주의 미학의 계보를 일으킨 반 고흐 (Van Gogh)라든가, 기괴하고 으스스한 가면 이미지로 고전적 표현주의 회화 세계를 새롭게 개척한 벨기에 출신의 제임스 앙소르 (James Ensor),  그리고 니체의 ‘질풍노도 (Sturm und Drang)’로 대변되는 낭만주의와 허무주의 철학을 질병, 공포, 죽음이라는 주제로 승화시킨 스위스 출신의 페르디난트 호들러 (Ferdinand Hodler) 등은 저무는 구시대를 뒤로 하고 근대라는 신시대를 대비하며 불안에 떨던 세기전환기 근대인들의 집단적인 노이로제 상태를 표현한 동시대 화가들이다.

같은 시기, 미국의 대문호 에드가 앨런 포우 (Edgar Allen Poe)와 빈의 낭만주의 작곡가 바그너 (Richard Wagner)도 세기 전환기의 긴장을 유사한 감성으로 표현했고,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근대인들의 억압된 무의식과 성의 세계를 탐구하는데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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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가면 아래에 서있는 화가 자화상 (Self-portrait Beneath a Female Mask)』 1893년 경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80년이라는 짧지 않은 예술 인생을 불태운 화가의 일평생은 극적이라면 극적이라 할 수 있는 시련과 절망을 경험했는다고 한다. 그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친 이미저리와 상징들은 화가의 매우 개인적인 성장 경험과 내면적인 트라우마의 결정체들이다.

특히 뭉크는 자신을 그토록 평생 동안 고뇌로 몰아 넣었던 내적 갈등과 고통의 근원을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비극적인 가족사에서 발견했던듯 하다.

그는 “성직자와 바닷사람은 농담을 불허하는 심각한 사람들”이라고 꼬집었는데, 여기서 성직자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농부 출신의 모친을, 바닷사람이란 해군 군함의 의료장교 겸 지휘관으로 일했던 부친을 각각 지칭하는 것이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폐결핵으로 앓던 농가집 출신의 23세 하녀와  44세난 중산계층 출신의 중년 남성의 결혼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결합이었던 만큼 계급적 격차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 긴장의 관계였다. 그나마도 뭉크의 부모는 기독교라는 정신적 영혼적 유대감으로 결혼 생활과 가족을 이끌어 나갔는데,  청교도적 윤리를 유독 강조했던 기독교식 집안 교육은 이후 화가 뭉크의 사생활 속의 정신적인 억압과 성적인 죄책감으로 이어져 그림으로 표현되곤 했다.

특히 여성을 향한 화가의 내면적 갈등은 그의 그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 신비스럽고 광채가 나는 흰색 드레스 차림을 한 젊은 여인은 순결한 처녀,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있거나 붉은 안색을 한 여인은 정욕과 파멸을 부르는 성숙한 여인, 그리고 검정색 드레스와 창백한 안색을 한 초쵀한 여인은 인생과 남성관계 끝에 인생의 쓴맛과 비탄을 경험한 닳고닳은 여인으로 해석되곤 한다.

예컨대 그 유명한 뭉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사춘기 (Puberty)』(1894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나체의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 덧없이 사리지고 말 사춘기 소녀의 가녀리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소녀 옆 켠에 도사리고 있는 짙은 회오리 덩어리는 이 가련하고 청순한 소녀를 뇌살적이고 파괴적인 성숙한 여성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893년 작인 『여인 가면 아래에 서있는 화가 자화상』이라든가 1894년부터 무려 4년에 걸쳐 그려진 『살로메 장절』은 살로메=파멸의 여인이라고 말하려는 화가의 자신의 공포감을 표현한다. 이것은 당시 수많은 근대기 남성들을 공포로 몰아 놓었던 신여성 사상과 파멸을 부르는 여인 (팜므 파탈, femme fatale) 혹은 거세 공포증에 대한 불안감을 아동애 (pedophilia)적인 이미지를 빌어서 현실 속의 여성 관계로부터 도피해 보려던 남성 심리의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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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죽음 II > 1907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뭉크 그 자신도 실제로는 어린 처녀를 향한 동경과 애욕을 느꼈지만 동시에 성숙하고 요염한 여인으로 부터는 긴장과 공포를 느꼈고, 모친과 자매의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불행했던 성장과정을 한탄하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은 기피했으며, 그당시 다른 재능있는 미술가들과는 달리 생전 어지간한 명성과 부를 누렸으면서도 내적 고뇌와 병치레로 두문불출 거의 실내에 갇혀 지냈다.

비극의 인연으로 끝난 중년의 매혹녀 툴라 라르센 (Tulla Larsen)과의 결별을 표현한 그림 『마라의 죽음II (The Death of Marat II)』(19907년)에 보면, 화가는 이제 고통과 무기력을 초월하여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어쨋거나 결국 그는 그 모든 내적 갈등과 불안감을 화폭을 통해서 표현한 소심한 샛님 화가 선생이었던 게다.

16살난 청년 뭉크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해인 1880년. 당시 노르웨이는 어딘가 두서없어 보이지만 놀라운 천재적 잠재력을 잔뜩 품은 이 화가 지망생의 재능을 발굴하기에는 너무 좁고 지엽적이었다. 보다 큰 세상에서 미술을 배워보자는 생각에 청년 뭉크는 우선 독일로 건너가서 엄격한 독일식 아카데미 미술 교육을 접하지만 곧 표현적인 한계를 느끼고는 파리로 건너갔다. 이렇게 뭉크는 20대 중반부터 미술의 중심 도시 파리에서 보고 들은 새로운 사상에 ‘자연을 묘사하는 그림이란 화가의 내면이 표현되어야만 가치가 있다’고 한 화가 고유의 표현주의 철학이 버무려진 화풍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화가는 자기가 넓은 세상에서 배워온 미술 세계를 개인전을 통해서 노르웨이 화단에 꾸준히 소개하곤 했지만 모국의 화단은 선구적이고 무서울 정도로 솔직대담한 뭉크의 표현주의 미학을 이해해 주질 못했다고 한다. 특히 1890년대에 뭉크는 그같은 좌절감을 반영이라도 하듯 어린 시절 경험한 모친과 누나 그리고 부친의 오랜 병고와 죽음이 남긴 충격을 반복해서 그림으로 남겼다. 당시 유럽에서는 병자의 침실을 묘사한 그림들이 심심치 않게 그려질 정도로 병실 및 임종 광경 그림이 유행을 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 멜랑콜리와 신비의 전율을 강도높게 전달한 화가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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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Vampire)』 1895년 작 © Munch-Museet/Munch-Ellingsen gruppen/BUS 2013. Photo: Prallan Allsten /Moderna Museet.

1910년대, 뭉크는 특히 독일 화단과 화가 집단에서 깊이 선망되는 외국인 화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미술사에서 뭉크를 유럽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가 당시 여러 독일 표현주의파들에 끼친 영향력 때문이다.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는 이미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높이 칭찬했으며, 또 그런가하면 뭉크는 역시 독일 표현주의자인 프란츠 마크 (Franz Marc)로부터 보다 강렬한 색채 감각을 배워왔다.

뭉크가 독일 화단에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때는 1892년 베를린 화가 연합의 주최로 열린 뭉크 개인전을 통해서 였는데, 이 전시는 일명  ‘스캔들 전시’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베를린 화랑계를 찬반의 논란으로 몰아 넣었다. 저자세 일관의 얌전한 품성의 뭉크의 주변에도 남몰래 도사리고 있던 숙적이 있었는지라 독일의 보수주의파 고전 화가로 부터 뭉크의 그림은 타락스런 프랑스적 취향으로 푹 젖은  ‘퇴폐미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 소동은 프랑스-독일간의 프로이센 전쟁을 끝으로 유난히 첨예해진 당시 프랑스와 독일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던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전시를 둘러싼 ‘스캔들’은 뭉크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안겨주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논란과 화재를 몰고 다니는 전시회는 뭇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법인지, 뭉크는 이 전시를 끝으로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지만 불티나게 팔려나간 입장권 매출 덕분에 전에 어느새 돈주머니 두둑해진 ‘성공한’ 화가가 되어 있었다.

진정 베를린은 뭉크가 화가로서 성공하는데 분수령적인 순간을 마련해준 행운의 도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뭉크가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정붙이며 살았던 독일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든 운명의 도시이기도 했다. 어느새 베를린에서 떨친 뭉크의 명성은 고국에까지 알려져서 19세기말 노르웨이 근대 극문학의 기수 입센 (Henrik Ibsen)의 상징주의 문학에 불을 치폈으며 그 결과 입센의 희곡대본 『유령들』과 『헤다 가블러』를 위한 연극 무대 장치 디자인까지 했던 것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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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1906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특히 뭉크의 10여년 동안의 독일 체류기는 그로 하여금 초상화라는 회화 쟝르를 실험하는 기회를 제공해준 값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뭉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돈많은 독일 미술애호가들과 후원자들은 뭉크에게 개인 및 가족 초상화를 주문해 그려가곤 했는데, 특히 그들은 뭉크 만이 포착해 낼 수 있는 심리적 깊이와 통찰력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를린에서의 독신생활과 과중한 주문 작업에 밀려 지내던 뭉크는 점차 억누를 수 없는 정신불안증을 이겨내기 위해서 싸구려 와인과 독한 환각주인 압생트에 의존해 보지만 결국 심각한 정신분열증과 알코홀 중독으로 몸과 영혼이 피폐해진 나머지 코펜하겐의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에 이르렀다. 1906년도에 그려진 『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Bottle of Wine)』 속 화가는 주변 환경 속에 눌리고 지쳐서 시린 고독과 무기력으로 시름하고 있다.

전유럽이 제1차대전이라는 격동과 비극의 시대를 항해하고 있을 1910년대, 뭉크는 입체주의나 미래주의 처럼 당시 파리에서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던 미술 신사조에 접하면서 피카소와 더불어 거장 화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와서 작업을 하고 있던 50대의 뭉크는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젊고 아름다운 여성 모델에 빗대어 그림으로 그리는 것으로써 또다른 제2의 자아를 탐구하고 있었다. 중년을 넘어선 화가는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천착해 오던 시대적 불안감, 고통, 불안감이라는 주제를 더이상 즐겨 다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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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 밤에 배회하는 자 (Self-Portrait. The Night Wanderer)』 1923년부터 제작 미완성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마라의 죽음』 시리즈에는 젊은 여성 모델이 꽃다발 속에 숨겨둔 칼로 화가를 찔러 죽일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암시가 넌지시 담겨 있다. 특히 뭉크는 생애 말년 동안 그 어떤 다른 쟝르의 그림 보다 자화상을 즐겨 그리곤 했는데, 그의 자화상들에는 어김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든 남성과 가혹하고 음산한 기다림이 서려있음이 느껴지곤 한다.

『자화상 – 밤에 배회하는 자』 속에 나타난 주인공은 창문으로 대변되는 지독한 고독감과 불안감으로 잠 못이루는 나이든 남자의 모습으로 은밀하게 묘사했다. 화가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에 완성된 『시계와 침대가 있는 자화상』(1942년)에는 시계와 침대 사이에 서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을 임종 침대 옆에서 죽음의 순간을 대기하는 노인네로 묘사했다.

노르웨이는 지금도 이 나라를 뿌리채 사로잡고 있는 ‘뭉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뭉크가 세상을 뜬 1944년 이후로 노르웨이는 뭉크에 필적할 만한 천재 미술가의 탄생은 다시 보지 못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가 미술사에 남긴 시각적 전율과 위력은 대단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가르침 그대로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예술인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존재와 죽음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불안과 실존적 문제를 탐구하는데 바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Images coutersy: 스웨덴 스톡홀름 모데나 무제에트 근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 in Stockholm, Sweden).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2005년 3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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