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건축론

FRANK LLOYD WRIGHT AND ORGANIC ARCHITECTURE

유기적 건축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경외심에서 빚어지는 것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생애와 작품 세계  20세기 건축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이 지대했던 건축가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 거장 건축가로 길이 기억되고 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 , 1867-1959년)는 살아생전부터 개인사로나 작품 세계로나 시끌벅적한 논쟁과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라이트는 위스컨신州에서 태어나서 스프링그린 (Spring Green)이라는 소도시 근처의 한 농가에서 이모와 삼촌이 들끓는 친척들 사이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음악가였던 아버지가 라이트가 열여덟살 되던 해에 가족을 버리고 떠나자 라이트는 위스컨신 대학에 등록하여 잠시나마 공학 공부를 했다.

낭만적인 천재, 예술적 우상타파자, 영웅적 개인주의자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더 큰 도시 시카고를 가서 당시 경제 부흥과 신건축 건설붐에 힘입어 나날이 팽창하며 시카고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수놓고 있던 시카고 건축학파 (Chicago School of Architecture)의 아들러와 설리번 건축 사무소에서 조수로 일하기 시작하게 된 것을 계기로 건축계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아들러와 설리번 건축 사무소에서 닦은 실무 경험은 라이트가 별다른 대학 학위나 훈련없이도 방년 26세의 나이로 독립 건축 사무소를 차릴 수 있게 해준 귀중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라이트의 개인생활은 연속된 결혼 실패와 비극이 겹친 질풍노도로 점철되다시피 했다. 실제로 불안정한 결혼생활과 연이은 사생활 스캔들은 무시할 수 없이 많은 수의 클라이언트들이 그를 건축가로 고용하길 회피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정도였다. 라이트는 20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6명의 자녀를 낳아준 조강지처 캐터린을 버리고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프랑스로 건너가서 당시 한 클라이언트의 부인과 살았다.

그는 애인과 함께 버젓이 고향인 위스콘신 스프링그린으로 돌아와서 둘이서 살 개인주택 겸 작업실을 지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탈리에신 (Taliesin: 웨일즈어로 ‚반짝이는 눈썹’이라는 뜻) 하우스였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도 잠깐, 라이트가 데리고 있던 관리인이 애인, 애인의 두 자녀와 손님 4명을 모조리 살해하고 집을 불살라 버리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그 모든 비극을 뒤로 하고 라이트는 두 번이나 화재로 타 없어진 이 집을 재건해서 스프링그린 방문객들은 지금도 언덕 귀퉁이에 붙어있는 아름다운 자태의 탈리에신 하우스를 감상할 수 있다.

위스콘신 스프링그린에 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거주용 개인주택이자 작업실 탈리에신 하우스는 첫 결혼, 두 차례의 화재, 가족의 비극을 뒤로 한 채 원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지금도 남아 있다. Photo courtesy of the 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35살 되던 해인 1922년, 라이트는 드디어 정식 이혼을 하고 미리암 노엘 (Miriam Noel)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지만 여러 우여곡절 끝에 5년후에 이혼했다. 같은 해에 라이트는 세번째 부인인 올기바나 밀라노프 (Olgivana Milanoff)와 결혼하면서 드디어 그가 항상 꿈에도 그리던 자연을 벗한 환경 속에서의 안정된 결혼생활을 꾸리게 되었다고 한다.

라이트는 탈리에신 하우스에서 살면서 건축 설계일과 후학 양성에 정열적인 힘을 쏟았고 시간이 나는대로 농사일도 하였는데, 그가 젊어서부터 착상해 온 ‚유기적’ 건축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생활 환경을 누린 셈이 되었다. 그는 남서부의 아리조나州의 스코츠데일 (Scottsdale)에다가 두번째 개인 주택인 탈리에신 웨스트 (Taliesin West)를 지어 중서부의 혹독한 겨울 날씨로부터 피해 지내면서 강의와 저술 활동까지 활발하게 펼쳤다.

1930년대부터 꾸준히 해온 그의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한 권의 책으로 모아 놓은 책 『건축의 미래 (The Future of Architecture)』(1953년 출간)는 라이트의 건축 철학을, 그가 직접 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 (An Autobiography)』(1932년 초판 발행)은 유명 연예인에 못지 않은 격동의 사생활과 작업 세계에 대한 이 건축가의 고백이 담겨있다.

자연 + 인간 = 유기적 건축 …자연을 관찰하라, 자연을 사랑하라, 자연과 가까이하라. 자연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그의 후학들에게 한 말.

겨울철을 피해 남부에 지은 로이드 라이트의 탈리에신 웨스트 주거용 주택 겸 아텔리에. Photo courtesy of the 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유기적 건축론 (organic architecture)의 원칙을 깊이 신봉하며 한평생 추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그 어떤 특정의 개인 양식을 구축했다거나 고집하지 않았다고 자평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건축을 업으로 삼기 시작한 1890년대 이후부터 모더니즘 철학과 미학에 근거한 다양한 건축적 실험을 단행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건축에 ‚유기적 (organic)’이라는 개념을 그의 건축 철학에 도입한 때는 20세기가 갓 출발한 때인 1908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기적 건축 철학은 그의 스승인 루이스 설리번 (Louis Sullivan)이 모더니즘 건축을 일컬어 즐겨 사용했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이라는 그 유명한 슬로건에 라이트가 개인적으로 깊이 동경하며 추구하고자 했던 ‚자연 (nature)’의 개념을 한데 버무린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모든 건축물은 모름지기 주변의 자연적 환경과 조화롭게 어울려야 한다. 건축물은 그 자체로 단지 부동하는 상자 같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실내가 외부 환경 사이의 공간이 서로 넘나드는 열려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기초 원리에 충실했다. 그 결과 라이트의 건축 세계를 좀 더 가까이 들어다보자면 뚜렷한 양식이 판독가능하지 않으면서도 매 작품들에마다 공동적으로 흐르는 형식적인 특징들을 추려낼 수가 있다.

예컨대, 그는 ‚유기적’ 공간 창조를 위해서 건축물 전체를 직사각형, 다이아몬드형, 또는 육각형 같은 여러 단위 (module)의 규칙적인 모양의 기하학적 부분들로 구성 조합하는 것을 기본으로 여겼다. 또 공학도 출신이라는 훈련 배경 덕택에 그가 매우 즐겨 사용했던 건축 구조적 요소로는 캔틸레버 (cantilever)라는 긴 막대 기본형태의 구조물은 예컨대 발코니 처럼 방침대 구조물 없이 공중에 붕 뜬채 양 끝자리 만을 건축 본체에 매달리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1909년 프랭크 로이트 라이트가 설계하여 완공된 로비 하우스 (Robie House)는 프레리 하우스 양식의 대표적인 예다.

이같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적 특징들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된 경우는 일명 ‚프레리 하우스 (Prairie house’ (들판 위의 집이라는 뜻)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주거용 개인 주택들일 것이다.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미국 중서부의 광활하면서도 완만한 자연적 풍광에 특히 잘 어울린다고 평가되는 그의 프레리 하우스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꼽는다면, 1) 수평적인 선을 강조하고, 2) 대체로 1층을 유지하는 건물 본체와 나트막하고 깊에 드리워진 지붕을 채택했으며, 3) 실내 공간과 외부 자연 공간이 두절되지 않도록 넉넉하게 열린 공간을 지향해서 완만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서부 지역의 지형을 아늑하게 감싸안은 듯한 감흥을 안겨준다는 것일테다.

그는 땅 속에 박혀 있는 지하실 공간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1894년 독립 건축 사무소를 차린 이후로 수주받아 설계한 개인 주택들의 설계도에는 대부분 지하실이 없다. 집건물이란 땅 속에 박혀 있을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땅 위에 서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믿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신념이 잘 반영한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주거용 주택의 실내 공간 또한 이전까지 미국에서 널리 일반화되어 있던 실내 공간 설계사의 관습에서 과감하게 탈피했다. 예컨대,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의 주거용 집 실내는 거실, 침실, 주방, 식당 등 기능별로 두터운 벽으로 뚜렷하게 구분된 방들로 구성된 영국 빅토리아 시대풍의 실내장식이 지배적이었다.

라이트는 그같은 폐쇄형 공간 뿐만 아니라 평균적인 인간의 신체 규모에 부응하는 아담한 ‚휴먼 스케일 (human scale)’의 열렬한 옹호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컨대 개인의 주문으로 1901년에 일리노이州 하이랜드 파크에 지은 워드 윌리츠 하우스는 집안의 벽들을 거의 제거하고 그 대신에 거실 중간에 벽난로를 설치하여 입구와 거실 공간을 자연스럽게 분리시켰다. 그는 공간이 한정된 개인 주택을 설계할 경우, 공간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입구를 보통 남성의 평균 신장을 넘지 않는 나트막한 입구와 지붕으로 설계한 다음 일단 실내에 들어서면 집안의 1층과 반2층 공간 전체로 시야가 확 트이도록 설계함으로써 기대이상의 공간확대 효과를 주는데도 명수였다.

그가 주문받아 설계한 프레리 수많은 하우스 프로젝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백미白尾로 꼽히는 예는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 위치한 로비 하우스 (Robie House)다. 1906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된 이 개인 주택은 긴 장방형 건평 위에 3층으로 올린 개인 주택이다. 캔틸레버 구조를 활용해 얹어진 지붕의 길이는 무려 6.4미터에 이르며 그 지붕 밑에는 같은 길이로 펼쳐진 서향 베란다가 설치되어 있다. 3층 짜리 집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2층집 높이도 채 안될 만큼 나트막한 천정을 지니고 있지만 집 곳곳을 돌아가며 설치된 대형 유리창과 출입구와 얕게 드리워진 지붕 구조 덕분에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태양광을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클라이언트 에드거 카우프만의 주문으로 설계된 폴링워터는 캔틸레버 건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6년 완공.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연륜이 보다 무르익은 30여년 후, 미국 동부 펜실바니아州의 한 갑부 상점주인인 에드가와 릴리앤 카우프만 부부의 의뢰로 1939년에 베어 런 (Bear Run)에 지어진 폴링워터 (Fallingwater)는 폭포수 위를 가로지르며 주변의 사암 위에 콘크리트 캔틸레버 공법을 사용해 지어진 드라마틱하기로 유명한 대표적인 개인 주거용 건축물이다.

벌써 수년째 현재까지 구미권 언론들은 본래부터 아슬아슬하게 지어져서 콘크리트 균열 및 누수 등 틈틈히 구조적 결함을 보여온 이 폴링워터 하우스가 아니나 다를까 곧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보도해 오고 있다.

쏟아지는 폭포수 위에 걸터앉은 집을 짓는다는 착상 자체부터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사자같은 자존심의 표현이었다고 평가되어 온 데다가 그같은 자연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연 풍광과 건축, 외부와 실내, 원대한 컨셉과 실용적인 생활이 한데 잘 조화된 주택이 구현체라고 불려온 만큼 폴링워터는 미국인들에게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버금가는 미국인의 꿈, 신기술, 자유, 아름다움의 집약결정체이기도 했다. 지금은 미국 웨스턴 펜실바니아 보존소가 관리하고 있는 이 폴링워터 하우스의 보존관리 및 수리 예산액은 15만5천 달러 가량 된다고 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주로 돈많은 개인 갑부들이나 사업가들을 주 클라이언트로 상대하며 주문 주택 설계를 했다. 라이트가 요구하는 설계비 외에도 값비싼 고급 건축 자재 구입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던 고객들은 돈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생전 건축가로서 이루고 싶었던 꿈은 ‚유에소니안 하우스 (Usonian House)’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인의 집’ (US + -onian, 라이트는 미국을 유에소니언 (Usonian)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이 조어가 뜻하듯 그의 유에소니안 주택은 평생 미국인들을 위한 저렴하고 민주적인 집을 지어 보급하고 싶다는 그의 한평생 꿈을 반영했다.

특히 그가 유에소니안 하우스로 제시했던 주택 디자인은 주로 ‚ㄴ’자 모양을 한 평면 구도 위에 콘크리스, 벽돌, 목재 합판, 창문용 유리 소재를 채용한 단순한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흔히 시끌벅적한 거리에 위치해 있는 이들의 주택에 조용한 침실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ㄴ’자 평면도를 고집했고, 시공의 편의를 고려해서 표준화된 정사각형 콘크리트 벽, 상하수도 파이프, 난방용 파이프, 목재 실내벽과 뒷뜰로 난 유리창을 고집했다. 라이트의 그같은 이상이 담긴 유에소니안 하우스들은 지금도 위스콘신州의 매디슨市와 캘리포니아 곳곳에 50여군데 남아있다.

낭만적인 정신과 혁신과 합리적인 이성의 거장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70년에 걸친 건축가 일평생에 걸쳐 설파한 ‚유기적 건축’의 이상이란 인간의 지적 정신 세계를 통해서 걸러진 자연과 조화롭게 결합시킬줄 아는 건축을 이룩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이상주의적이었다.

클라이언트의 키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건축 칫수를 자신의 몸칫수에 기준을 삼아 설계한 그만의 특유의 ‚휴먼스케일’에 대한 신념과 목재와 같은 자연적인 재료 외에도 건축 신소재와 건축 기술에 대한 강한 옹호 태도는 인본중심적인 르네상스적 예술 정신과 모더니즘적 신사고의 결합이라해도 좋을 것이며 그는 바로 그같은 정신에서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찾았다.

클라이언트가 저급 취향의 집을 원할 때 어떻게 타협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프랭크 로이드는 이렇게 단언했다. „그의 취미가 아무리 모자랄지라도 유기적 이상에 기초하여 설계하면 반드시 탁월한 취향의 건축이 탄생하게 되어있다.“ 진정한 건축미란 주어진 공간과 특정 순간이 빚어 내는 것이지 보는자 개인의 취향으로 결정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Photos courtesy: 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 이글은 본래 『공간사랑』 LG화학 사보 2005년 6월호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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