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October 2012

Forget Me Not

서양 묘지 디자인에 나타난 추억의 흔적

코르넬리아 그릴(Cornelia Griehl)이 디자인한 <카사니마 꽃문양 유골 단지> 테라코타로 수공 제작 Photo © Simon Marti.

흔히들 말하듯 죽음이란 삶의 일부이자 연장일까?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여간해서 감히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 주제인 것이 사실이지만 죽은자의 몸을 묻는 매장 의식(burial) 또는 장례식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화사의 일부분이었다. 인류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지금부터 약 2백5십만년에 살았다던 네안데르탈인들은 죽을자를 기리고 모시는 장례문화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역사를 통틀어서 인류는 묘지를 사자의 막대한 권력과 지위를 죽어서까지도 과시하기 위한 영혼과 불멸의 대표적인 상징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고대 서양과 아랍세계의 교회나 성전의 석관과 마우솔레움 등은 영혼불멸의 본능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구체화한 물리적 증거이기도 하다.

전세상을 하직한 자가 마침내 편히 쉬는 곳이라는 인생 최종의 지점이기도 하지만 또 달리보면 살아 남은 자들이 방문하고 간 자를 기리며 추억의 사물들로 장식하는 전환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덤은 인류 최고(最古)의 디자인 공간이어 왔다. 죽은자를 기억하는 가족이나 지인들은 의미있는 묘비를 설치하고 사진, 조각품, 꽃, 단지 등과 같은 묘지용 장식품들로 자칫 차갑고 외롭게 외면당하기 쉬운 묘지 공간을 장식하곤 한다.

그렇다면 죽은자를 모셔두는 묘지는 결국 산자들을 위한 생활 공간들의 일부라는 뜻일까? 그같은 다소 실존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유명 서구 근현대 건축가들과 미술가들이 묘지 공간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여 미술 및 디자인 작품으로 구현한 사례들을 한 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묘지 디자인 전시회가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벨러리브 뮤지엄 (Museum Bellerive)에서 계속되고 있다.

스위스 출신의 건축사무소인 포그트 조경 건축사 (Vogt Landscape Architects)와 역시 스위스 출신의 여류 비디오 설치 미술가인 피필로티 리스트 (Pipilotti Rist)가 공동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벨러리브 뮤지엄의 안뜰 공간에 제작한 나무로 된 묘지 설치물은 인상적이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출신의 건축가 클로드-니콜라 르두 (Claude-Nicolas Ledoux) 설계로 특유의 공모양 돔으로 화재를 모은 바 있는 미래주의 양식의 빌 드 쇼 묘지 (Cimetière de la Ville de Chaux)는 곧 완공을 앞두고 있다.

러시아 모스코바에 있는 노보예비치 공동묘지 내의 마르샬 파벨 리발코의 묘지 디자인, 1992년 설계 Photo © Xavier Voirol.

스위스 다보스에 있는 발트프리트호프 공동묘지 (숲의 묘지라는 뜻)는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가베렐 (Gaberel)이 설계했으며, 바르셀로나에 자리하고 있는 유명한 이구알라다 묘지 (Cemeterio Igualada) (엔리크 미랄레스 (Enric Miralles) & 카르멘 피노스 (Carmen Pinos) 공동 설계)의 원본 청사진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묘지 세부 공간을 장식하는 다양한 세부적인 디자인적 요소들도 눈에 띈다. 비석, 금속 십자가와 목재 조각품 등은 스위스가 자랑하는 조각가인 헤르만 오브리스트 (Hermann Obrist)의 조각 원품은 물론 스위스 현대 조각가들이 디자인한 것들이다.

미술관 2층에는 여러 종류의 관 디자인 가운데에서는 특히 독일 근대 건축의 명인인 에곤 아이어만 (Egon Eiermann)의 관 디자인 드로잉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팽배하던 서양 19세기 관 모형들, 그리고 각가지 유골 단지 디자인들이 전시되어 있다. 묘지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플라스틱 꽃다발, 꽃병, 촛대, 장례용 화환, 그리고 심지어는 묘지와 관련된 문학작품과 놀이감을 전시해 놓은 광경도 눈에 띈다.

그렇다면 결국 묘지란 죽은자 보다는 산자를 위한 공간이지 않은가? 영국의 현대 미술가 쥴리언 오피 (Julien Opie)가 제작한 그래픽 작품과 묘지 노동자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임을 입증한다. 『묘지 디자인: 영원과 과거 사이』 전은 취히리 시내 아우슈텔룽스스트라세 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벨러리브 뮤니엄에서 [2005년] 4월 1일까지 계속된다.

눈부신 은공예의 재발견

THE SPLENDOR OF SILVERWARE

“그 [귀족의 자손 쟝 데세쌍트] 는 박태자기 (薄胎磁器)라고 부르는 이 중국제 도자기 찻잔에 액체 향수 [중국산 차]를 마셨다. 이 박태자기란 얼마나 얇고 투명한가. 그리고 이 사랑스러운 찻잔과 함께 그는 금도금된 순은제 티스푼을 사용했다. 은숟가락을 살짝 덮고 있는 닳은듯해 보이는 도금 표면은 세월로 인해 지치고 삵아드는 듯한 색조를 내뿜는다.” – 조리스-칼 위스망스 (Joris-Karl Huysmans)의 탐미주의 소설 『거꾸로 (À rebours)』 중에서.

살라 테레나 연회실에 작센-테셴 군주가 소유했던 은제 테이블웨어로 차려져 있는 연회상 모습. 황실 은세공장인 이그나츠 요제프 뷔르트가 디자인과 세공을 담당했다. 파리 개인소장 © Liechtenstein Museum. Die Fürsten Sammlungen, Wien.

우아하게 먹고 마시는 다이닝 문화는 인류 문화사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18세기 바로크 시대 유럽의 귀족들은 누가 얼마나 더 화려하고 거나한 연회와 잔치를 연출하는가를 두고 각축을 벌였다. 연회 절차는 복잡하고 수선스러울수록 연회를 주최한 주인과 초대받은 손님들의 신분이 드높이 빛났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은 손님에 대한 도리와 경의, 접대 주인의 식견과 취향은 물론이려니와 은근하게 압도하는 사교적 위력의 표현이다.

귀한 손님을 초대한 잔치 주인은 은으로 된 갖가지 식기와 연회상 장신구로 장식하는 것이 기본예의였다. 또 잔치 주인은 사려깊은 고려 끝에 초대객들의 앉을 자리를 결정했고, 전체적인 연회의 흐름에서 테이블 냅킨이 접힌 귀퉁이까지 세심하게 지휘했다. 그런 잔치를 연출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장황한 연회상의 하일라이트는 단연 금은제 다이닝 서비스 (dining service)라 할 수 있다.

그같은 전통은 오스트리아의 옛 합스부르크 황실과 귀족층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특히 독일 작센-테셴의 알베르트 공과 합스부르크의 마리 크리스틴 공주가 살았던 18세기 말은 유럽의 “예식의 황금시대 (Golden Age of Ceremony)”라고까지 불렸다. 예컨대 작년 4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렸던 ‘황실 은제의 재발견’ 전에 이어 올 봄 빈 리히텐슈타인 미술관으로 옮겨와 열린 ‘작센-테셴 알베르트 공의 은제 식기’ 전은 그 때 모습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재연출해 보였다.

이 전시에서 재현된 위풍당당했던 빈 바로크 귀족의 연회 테이블은 19세기 말 이후도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던 것들로, 안타깝게도 나폴레온 전장 때 무기로 제련되는 바람에 지금은 다수가 소실되어 버렸고 그나마 현재 흩어져 잔존하는 것들은 프랑스의 한 개인소장가가 보유하고 있다. 올해 4월 런던 서더비 옥션에서는 이 은제 다이닝 서비스를 구성했던 접시 수 점이 경매에 부쳐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컬렉션으로 낙찰됐다.

이 황실 연회용 은제 서비스는 본래 독일 작센-테셴의 알베르트 카지미르 공과 합스부르크 황실의 왕녀 마리 크리스틴(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의 결혼피로연에 쓰였던 혼수품이었다 한다. 이 은식기 세트 디자인과 수공을 맡았던 금은공 장인은 빈에서 살던 이그나츠 요제프 뷔르트 (Ignaz Joseph Würth)였는데, 만찬에 필요한 각종 순은 식기류와 테이블 장식품 일체 350점을 수공 했다. 장식미술 역사가 에드문트 브라운 (Edmund W. Braun)에 따르면 작센-테셴 은식기 서비스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금제 조식용 테이블웨어 다음으로 뜻깊은 신고전주의풍 세공예술의 결정판이라고 평가된다.

유럽 귀족들의 은에 대한 애정은 언제나 특별했다. 은은 이미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흰 금’ 또는 ‘달의 금속’이라고 불렸다. 달빛 아래서 물에 비치면 차갑고 하얗게 발광하는 은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은 장신구를 걸친 사람의 모습을 각별히 화사하게 돋궈주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 부유한 귀족들은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살균효과까지 있다는 이 은으로 동전과 가정용 식기를 만들어 썼다. 불어서 만든 유리 식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5세기까지만 해도 귀한 사람들의 술잔은당연 은컵이었다.

16-17세기 인도와 남미를 향항 동방 항해로 개척도 바로 은에 대한 유럽인들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테이블 위를 화려하고 품위있게 장식해 주는 것도 역시 은제 테이블위어와 서비스가 되었다. 보는 사람의 시각을 즐겁게 자극하는 광채와 빛깔 때문에 가문있는 집안에서는 실내장식품, 아가용 식기, 그림을 담는 액자에 즐겨 썼다.

18세기 독일에서 활동하던 은세공 장인 요한 카스파르 3세 겔프 (Johann Caspar III Gelb)가 영국의 존 윌리엄 이거튼 제7대 브리지워터 백작 가족을 위해 이 은제 펀치 보울을 제작했다. 이 용기는 제작된 1708년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이 가문 내 친척끼리 선물로 주고받던 가보였다. © The European Fine Art Foundation.

유독 은이 그 의기양양하고 고귀한 지위를 누렸던 이유는 도자기, 목재, 유리와는 다르게 그 자체로 금전적 가치가 있는 실용적인 재료이기 때문이다. 유행이 지난 은제품을 녹여 새유행에 맞는 물건으로 개조하기 쉬웠고, 금속공예 장인들도  유동적이고 부드러워 다루기 좋은 은을 사용하기를 즐겨했다.

나라의 경제위기 시에는  응급용 화폐로도 사용되었는데, 예컨대 17-18세기 프랑스에서는 루이14세와 15세는 은 수거 포고령을 내리고 나라의 은을 모조리 거둬들여서 적자가 난 국고를 보충했다. 18세기 섭정시대 영국에서도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극도로 화려한 은제장식용품이 많이 만들어졌고, 이어 빅토리아 여왕도 은 장신구를 좋아해서 대중적 유행으로 번졌다한다.

은세공 기술과 은제 가구와 식기류 유행의 선도자는 단연 프랑스다. 17세기 후반기 루이14세 치정기 동안 베르사이유 궁 실내를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콘솔 테이블, 대가 높은 장촛대, 거울 같은 가구가 은으로 만들어졌고 점점 은을 연회상 위에 놓을 테이블웨어로 만들기 시작했다. 갖가지 음식 접대용 용기, 접시, 한 짝이 되도록 어울리게 디자인된 나이프, 포오크, 숫가락 세트가 일체로 품격있는 다이닝 테이블의 기본조건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세르비스 알 라 프랑세스 (service à la française)’ 즉, 프랑스식 테이블 서비스가 바로 루이14세 때 17-18세기에 도입된 새로운 궁중 연회 상차림 방식이다. 테이블 위에서 가장 육중하고 값비싼 식기는 이른바 튜린 (tureen)으로 불리는 뚜껑달린 수프 그릇이다. 그릇을 떠받치고 있는 동물발 모양의 받침다리는 주로 권력의 상징인 사자발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요리의 내용물을 암시하기 위해 사슴, 생선, 또는 가재나 게 같은 갑각류 형상을 따서 만들어지기 했다.

또 그런가하면 한적한 오후 홍차나 커피를 즐겼던 귀족들 사이에서 우아하고 정교하게  디자인 세공된 은제 티와 커피 서비스(주전자, 잔과 받침대, 스푼, 찻잎걸름망, 설탕단지 포함)를 누구나 갖고 있던 필수품이었다. 특히 18세기 말 로로코 시대가 되어서는 당시의 퇴폐적 문화가 반영되어 기상천외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을 한 은제품들이 크게 유행했다.

존 싱어 사전트의 회화작품 「한 밤중의 저녁 식사 (A Dinner Table at Night)」 1884년 작 © Fine Arts Museums of San Francisco, de Young.

은세공 비용이 한결 저렴해져 대중화되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전기 은도금 기술이 발명되면서 부터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고급보석상 티파니 (Tiffany & Co) 사는 1850년대 이후부터 금속합급에 은을 입힌 은제 테이블웨어와 쥬얼리 용품을 선보여서 이른바 미국적 고전주의기라 할 수 있는 20세기 초 도금시대 (Guilded Age)에 앤드류 카네기와 J.P. 모건 같은 신흥갑부들의 대저택 식사실을 눈부시게 장식했었다. 런던의 귀족 알버트 비커즈 부부의 모습을 그린 미국화가 존 싱어 사전트의 「한 밤중의 저녁 식사(A Dinner Table at Night)」에는 신고전주의풍 은제품이 놓인 우아한 저녁식사 테이블이 등장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엿보게 해 준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영국 미술과 공예운동, 파리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빈 베르크슈테테 운동을 통해 생산된 근대주의 은공예를 끝으로, 20세기를 걸쳐 하이테크 산업사회가된 오늘날에 은의 금적적 가치와 장식공예적 인기는 많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은이 지닌 유달리 탁월한 신축성과 전기 및 열에 대한 탁월한 전도력 때문에 현대인들의 필수 개인용 전자제품 (노트북 컴퓨터, 이동전화기, 디지틀 카메라 등) 부품 원료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귀금속의 맞형뻘이자 영원한 가치의 보루라는 금보다 가격변동이 심하고 투기에 쉽게 노출될 우려가 있다는 점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탁월한 디자인적 비젼과 세공기술로 만들어진 옛 은세공거장들의 은제품이 내뿜는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다. ■

※ 이 글은 본래 『크로노스』 코리아 (CHRONOS Korea) 지 2012년 9/10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70살 펭귄 북스

Penguin Books – High-Quality Books for All

펭귄 북스의 ‘표지 디자인은 이른바 표지 그 자체가 책의 진정한 스타’라는 컨셉을 주장하고자 한다. 앙드레 모로아(André Maurois)가 디자인한 『아리엘(Ariel)』은 펭귄 출판사가 출판한 펭귄북 제1호다.

영국 서적과 지성의 대명사 펭귄 북스(Penguin Books) 출판사가 올해 [2005년]로 탄생 70주년을 맞았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출판업자라는 높은 칭송을 받고 있는 출판가 앨런 레인 (Allen Lane)이 1935년에 창설한 출판사 펭귄 북스는 저렴하면서도 가치성 높은 출판물을 제작해 온 20세기 출판업계의 거물이기도 하지만, 특유의 펭귄 로고, 고유의 길 상스(Gill Sans)서체와 주황색 표지 디자인으로 출판과 서체 디자인의 역사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 디자인 아이콘으로 자리잡아 왔다.

지난 70년 동안 전세계 특히 영국권 독자들에게 지식과 영감의 샘이 되어 주었으며 영국 지성 문화의 변천사의 거울이 되어준 펭귄 북스의 책 표지 50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서 보여주는 <펭귄 디자인 70년사 (70 Years of Penguin Design)> 전시가 [2005년] 6월3일부터 11월13일까지 영국 런던의 유서깊은 장식예술 박물관인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에서 한창 전시중이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서 쉽게 휴대하고 다니며 펴볼수 있어서 실용적인 규격으로 일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포켓 펭귄 시리즈 (Pocket Penguin Series)를 처음 세상에 내 보인 출판사는 다름아닌 영국의 펭귄 북스였다. 20세기 후반 서구인들의 독서 행위와 행동 양태에 근원적인 변혁을 가져왔다고도 평가되고 있는 이 포켓북 판형이 처음 등장하게 된 순간은 이 출판사의 창설자 앨런 레인이 일찌기 학교를 그만두고 16살에 보들리 헤드(Bodley Head)라는 출판사에서 일하던 때였다.

작가 아가다 그리스티를 만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기차역 서점에서 매우 싼 가격에 책들이 무더기로 팔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가격이 저렴하고 휴대하기에 편한 책을 만들어야 겠다는 착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책이란 덩치가 커서 가지고 다니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비싼 소재비와 제작비 때문에 일반 대중들이 쉽게 사보는 일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출판사 설립 당시 펭귄 로고와 책 디자인 전략
뭔가 “위엄있으면서도 재기발랄한 이미지”가 없을까하고 고심하던 중에 앨런 레인의 비서는 곧바로 펭귄을 떠 올렸고 그는 “바로 그것야!”라며 무릎을 쳤다. 값싸고 가지기 다니기 좋고 보기에도 좋은 책의 대명사가 된 주황생 타원 바탕 속의 펭귄 로고는 이렇게 탄생했다. 펭귄 북스의 설립 이상은 담배 열개비를 살 수 있을 돈(당시 펭귄 북스의 초기 책 판매 가격은 영국화 6펜스)으로 살 수 있는 이전까지 웬만한 대중들이 여간해선 접하기 어렵던 고전서와 고급 문학을 그 속에 담아 인쇄해 내는 일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원저자 앤소니 버제스 (Anthony Burgess)의 책 『오렌지 시계(Clockwork Orange)』

이때 채택된 영국 서체 디자인사의 전설적인 인물 에릭 길 (Eric Gill)이 었는데 그가 고안한 길 상스 세리프 (Gill Sans Serif)  서체는 그 후로도 약 20년 동안인 1950년대까지 친근한 펭귄 로고와 더불어서 펭귄 북스의 아이콘으로 영원히 자리잡았다. 이후 1947년부터 1년 반 동안 펭귄의 서체를 디자인했던 전설적인 디자이너 얀 치홀트 (Jan Tschichold)의 업적도 펭귄 북스를 통해서 빛을 발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저자 앤소니 버제스(Anthony Burgess)의 책 『오렌지 시계(Clockwork Orange)』의 펭귄 원서는 책내용의 완성도와는 별도로 표지 디자인 그 자체 만으로도 높은 그래픽 예술의 경지를 이룩한 책표지 그래픽 디자인의 백미라고 인정받고 있다.

이번 펭귄 북스 70주년을 기념해서 최근 출간을 본 『디자인으로 본 펭귄출판사 : 1935-2005년까지 표지 디자인 이야기(Penguin By Design: A Cover Story 1935-2005)』 (필 베인스(Phil  Baines) 저, 2005년 5월 발행, 국내 번역판 『펭귄 북디자인』북노마드 출판)는 과거 70년에 걸쳐서 출판계의 변화하는 트렌드, 도서 시장의 요구, 출판 기술의 발달이 어떻게 펭귄사 책들의 표지 디자인과 서체 디자인에 영향을 끼치며 변천해 왔는가를 일목요연하게 기술하고 있어서 출판 디자인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고전 서적류와 책 표지 디자인은 지부하고 따분하다고 생각해 온 디자이너나 관람객들에게 펭귄 북스의 표지 디자인 전은 책 표지 디자인의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온고이지신의 영감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펭귄 북스 디자인이 말하는 70년 동안의 성공 디자인 노하우
한 타이틀을 여러 판의 표지 디자인으로 출판한다 – 외국의 경우, 음반의 경우와 달리 페이퍼백(paperback)류의 서적물은 한 제목으로도 여러 출판사에서 다수 발행되는 일이 흔히 있다. 특정 출판사와 계약 관계가 성립되어 있지 않는 필자의 글일 경우에 그런데 이때 다른 출판사와 뚜렷이 구별될 만큼 눈에 띄고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표지 디자인은 동일 타이틀의 타 출판사 책들과 경쟁하는데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강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새롭게 등장하는 타 출판사의 신간들과 경쟁하려면 주기적으로 표지를 새로 디자인하는 것이 판매에 도움을 주는데 펭귄 북스의 고전 타이틀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는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수차례 변천해 오면서 한 권의 책이 세월의 변화와 함께 변천하는 대중적 취향의 변천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특히 한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출판되어 온 스테디 셀러일 경우, 끊임없이 새롭게 등장하는 타 출판사의 신간들과 경쟁하려면 주기적으로 표지를 새로 디자인하는 것이 판매에 도움을 주는데 펭귄 북스의 고전 타이틀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는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수차례 변천해 오면서 한 권의 책이 세월의 변화와 함께 변천하는 대중적 취향의 변천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펭귄 로고를 이용한 자매 시리즈들의 세분화로 로고의 통일감을 구축한다 – 펭귄은 지난 70년 동안 점진적인 변천을 겪었다. 가장 초기의 로고는 당시 펭귄 북스의 초대 제작 매니저였던 에드워드 영(Edward Young)이 직접 손으로 스케치한 것을 정교화하여 만들어 졌는데, 당시 출간되던 얄팍한 소형 단행본에 맞게끔 제작되었다.

이후 펭귄의 자매 서적 시리즈 중에서 어린이 서적인 퍼핀 (Puffin), 전문 분야 시리즈인 펠리컨 (Pelican), 그리고 작은 판형에 두꺼운 표지를 장정한 킹 펭귄스 (King Penguins) 시리즈 등 자매 시리즈 서적용 전문 로고를 별도로 제작하여 사용했다.

펭귄은 1947년부터 최근까지 1년 6개월 동안 얀 치홀트의 서체를 고집해 오다가 지난 2003년에 펜타그램의 디자인 리뉴얼 작업을 통해서 한층 더 정제되었다. 현재 펭귄 북스에서 나오는 시리즈들은 색상별로 구분되고 있는데, 예컨대 주황색은 일반 소설류, 초록색은 범죄 소설류, 파랑색은 펠리컨 시리즈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헌(Marshall McLuhan)이 최초로 생물학과 전기 과학기술을 집결하여 미래의 미디어 시대를 점친 문제작 『미디어는 맛사지다 (The Medium is the Massage』는 1967년에 출간되었다.

인류의 영원한 고전 문학 서적과 시집 출판을 포기하지 않고 번역서는 우수한 번역자에게 맡긴다 – 펭귄 북스가 처음으로 출판한 펭귄 고전서는 호머의 『오디세이』였다. 당시 이 책은 고전 그리스어에서 영문 번역본이 이미 다수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복된 헛수고라고 경고했지만 펭귄은 고집스럽게 재번역한 책을 출판해서 오늘날까지도 『채털리 부인의 사랑』(펭귄 출간, 1960년)은 최고의 변역 고전서로 남아 있다. 펭귄의 고전서는 갈색 코드로, 시집은 메달모양의 디자인으로 구분해서 제품화한 것이 특징적이다.

컴퓨터 그래픽 시대에도 표지 디자인의 세부는 수작업으로 마무리 한다 – 매킨토시 컴퓨터 하나면 웬만한 그래픽 디자인을 거의 완벽하게 제작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도 펭귄 북스의 표지 및 레이아웃 디자인을 담당하는 디자이너들은 초창기 펭귄 북스의 이미지가 숨쉬는 예술적인 미학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 특유의 ‘거친 필치(roughs)’가 보이는 ‘룩’을 고수하는데 고삐를 놓치 않는다. 또한 펭귄 북스는 초기의 1색 또는 2색 인쇄가 풍기는 고풍스럽고 대중적 포켓북다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 지금도 총천연판 사진이나 인쇄법을 사용하지 않고 1색 및 2색 인쇄를 버리지 않고 있다.

뉴미디어 디자인 – 디지틀과 예술의 하이브리드

REVIEW

뉴미디어 아트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요?

오늘날 현대 미술과 디자인은 일반인들이 따라잡기에 그다지 쉽지 않기에 충분할 만큼 빠르고 때론 난해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가고 있다. 뉴미디어 아트는 비디오, 애니메이션, 모션 그래픽, 디지틀 필름 등 한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미술과 디자인 매체와 대응되는 매체를 사용하는 분야로 보면 된다. 전통미술의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과 디자인 분야의 그래픽 및 인쇄 디자인 등은 뉴미디어의 반대 개념인 올드미디어(old media)인 셈이다.

디지틀 아트와 디자인도 예술인가요?

오스트리아 빈 퀸스틀러하우스 (Kuenstlerhaus)에서 열린 “눈동자를 훔쳐라” 전시 광경. Photo ⓒ Christian Wachter, 2001.

미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이 요즘처럼 테크놀러지를 매체로 열심히 실험했던 때는 없었다.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은 작년 10월 현대 „디지틀 아트“의 현주소를 탐색하는 『비트스트림(BitSteams)』전을 열어 30여명의 예술가들이 각종 디지틀 기술을 활용해 제작한 작품들은 모아 전시했다. 테크놀러지를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험하는 제1세대식 디지틀 미술은 이미 그 명을 다했다.

테크놀러지를 미술에 도입하는 최근 현대 미술가들은 미디어를 기술적으로 마스터한지 오래. 그 기술을 인간 근원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예술적 용도로 자우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된 현재는 제2세대 디지틀 미술 시대로 접어든 상태라고 한다. 창조의 도구를 제외하면 기술적인 숙련을 연마한 창조적인 미술가이어야 한다는 „구식“ 전통 미술의 원칙과 크게 변한 것도 없어 보인다.

곧이어 [2001년] 11월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뉴미디어 아트 전시를 계기로 이른바 신기술 전자 매체를 이용해 창조한 결과물이 „진정한 의미“의 현대 미술작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비가 오간 바 있다. 팜 탑 컴퓨터로 조작해 만든 디지틀 그림, 매킨토시 컴퓨터의 포토샵을 이용해 그린 이미지를 프린터나 컬러복사기로 출력하고 복사해 만든 이른바 „회화“작품이 과연 예술적 가치를 지닌 미술품일 수 있는가? 물론 작가들은 전자매체라는 새로운 도구를 활용했을 뿐 예술적 의도와 창의성을 지닌 순수 미술이라고 자기옹호했고, 이를 바라본 일부 관객과 언론은 테크노-페티시(techno-fetish)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뉴미디어 아트와 디자인은 차가운 테크놀로지의 산물인가요?

뉴미디어와 디지틀 테크놀러지는 특수 효과와 기술적 위력을 자랑하는 외형 위주의 작품을 양산할 뿐이라고 하는 일반인들의 선입관을 떨쳐주길 미술관은 호소한다. 뉴미디어는 가슴없는 컴퓨터만 지배하는 공상과학 영화 쯤으로 여기기 보다  현대 우리 문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접근해 볼 것을 이 전시는 요청한다. 붓과 물감대신 프로그램과 픽셀로 작업하는 것이 달라졌을 뿐일지도 모른다.

뉴미디어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은 사고하는가?

서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는 경력이 탄탄한 전문 디자이너의 경우 고소득 창조직에 속한다. 이론적으로 그래픽 디자인은 인간과 그래픽 디자인 사이의 매개체이며, 그 둘을 창조적이면서도 명료하게 연결하는 작업은 그다지 단순한 작업이 아닌 때문이다. 뉴미디어 아티스트들과 디자이너들은 분명 여러분야에 두루 관심을 갖고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이번 전시의 참가가인 슈테판 자그마이터는 „”대부분 디자이너들은 특정한 신조나 신념이 없다. 정치, 종교, 기타 중요한 이슈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그토록 양심이 빈약해서는 강력한 디자인을 창조할 수 없다”고 했다. 미술과 디자인을 포함한 현대 뉴미디어는 결국 인간의 추, 인상, 감정과 같은 인간생활의 요소를 새로운 미디어로 기록하고 반영한 거울이기 때문이다.

전시의 의미

„눈동자를 훔쳐라(Stealing Eyeballs)“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게 된 곳은 다음 아닌 인터넷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뉴이코노미가 전세계 인터넷 업계를 열병을 몰아 넣은 가운데 월드와이드웹에는 온갖 인터넷 사업과 사이트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그같은 시각적 홍수 속에 인터넷 사회에서는 인터넷 이용자들의 „시선을 잡아라“라는 의미에서  „Stealing Eyeballs“는 유행어가 돌기 시작했다. 특히 인터넷 디자인의 경우, 최첨단 기술(state-of-the-art)에 대한 활용지식과 더불어 인터넷 상의 수많은 다른 사이트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시선“을 순간적으로„훔치는“ 능력은 결정적인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이 전시는 뉴미디어 시대의 디자이너는 독특한 사회문화적 위치를 담당한다고 하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뉴미디어 디자이너는 최첨단 컴퓨터 기술과 수많은 소프트웨어를 통달한 전문 기술인(technician)이라는 점, 그리고 인터넷과 인터랙티브 미디어의 언어를 창조하는 커뮤티케이션 창조자라는 점 때문에 뉴미디어 디자이너는 순식간에 개발자, 아트디렉터, 작가, 이론가, 컨설턴트 같은 여러 전문 분야를 두루 섭렵한 달인이라는 개념정의에서 출발한다.

미술관 실험 전시

오스트리아 빈 퀸스틀러하우스(Kuenstlerhaus)에서 열린 „눈동자를 훔쳐라“전은 바로 그런 디지틀 시대에 뉴미디어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인터넷 이용자들과 디지틀 테크톨러지를 효과적으로 연결하고 있는지 10명의 국제적 뉴미디어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의 통해서 살펴보았다.

뉴미디어 페스티벌 겸 전시회라는 동시행사로 조직된 이 행사는 4월 20일부터 5워 20일까지 한 달 동안의 전시 외에도 참가한 10인의 디자이너들의 초청 강연과 토론행사와 겸해 치뤄졌다. 그래픽 디자인, 미술, 건축, 과학, 비즈니스 분야에서 뉴미디어와 연관된 관심 이슈를 다뤘다.

오스트리아 빈 지하철 내 설치된 인포스크린에 주목하는 승차객들. Photo courtesy: Infoscreen Austria GmbH

행사 기간중 미술관은 일반 대중들의 폭넓은 관심을 자극하기 위한 방법으로 『슈탄다르트(Der Standard)』 일간지에 각 디자이너들이 디자인과 관련하여 제기한 디자인 이슈를 기사화하거나 공개 아이디어 수집 운동을 하는 한편으로, 빈 지하철 일부 역내와 열차 실내 50여 군데에 „인포스크린(Infoscreen)“이라는 임시 액정 모니터를 설치하여  뉴미디어 디자인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도를 실험하기도 했다

사회학에서 거론되는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라는 개념 대로, 지하철 열차 내부란 많은 수의 낯선 군중들이 비정상적으로 비좁은 공간 속으로 떠밀려 들어 찬 공간이다. 사회적 거리가  불편하게 좁아진 열차 속 공간에서 평상시라면 어색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시선들이 인포스크린으로 모여드는 것을 발견했다. 시선처리가 일시 해소된다는 안도감과  군중의 시선을 이시적으로 사로잡는 스크린 매체의 위력에 위협감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2000년대 초 뉴미디어 디자이너 10

리쳐드 펜윅(Richard Fenwick)은 영국 출신의 뉴미디어 디자이너.  현대 디자인에서 심심찮게 거론되는 패러다임 유희라는 개념을 인터넷 디자인에 적용하여 비교적 짧은 경력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된 신진 디자이너다. 그래픽 디자이너와 타이포그라피 필름 디렉터라는 두가지 역할을 동시에 충족시킨 1인2역급 디자이너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펜윅이 직접 감독과 제작을 맡은  비디오 클립과 팝 프로모션 비쥬얼들은 웹사이트 www.richardfenwick.com에서 볼 수 있다.

포오크-언스테이블 미디어(Fork-Unstable Media)는 독일 함부르크, 베를린, 뉴욕 삼개 도시에서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는 독일계 뉴미디어 그룹으로 상업 분야와 순수 실험예술 분야에서 활동한다. 독일 항공 루푸트한자와 다임러-크라리슬러 같은 대형 크라이언트들을 상대로 복합 정보 설계를 개발 디자인하는 치밀성 위주의 작업을 해 오고 있다. 포오크는 또 „다이아나 공주 터널 경주(The Princess Di Tunnel Racer)“를 비롯한 미디어-비판조의 온라인 게임을 제작하기도 했다. www.fork.de

이매지너리 포시스(Imaginary Forces)는 각종 뉴미디어를 활용해 작업하는 독립 디자인 프로덕션 스튜디오. 하이테크의 본산 실리콘 밸리와 미국 연예산업의 중심지 헐리우드의 중간지점인 로스앤젤레스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www.imaginaryforces.com

리드 크램(Reed Kram)은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인터랙티브 미디어 디자이너. MIT 미디어 랩 산하 „미학과 전자계산 그룹(Aesthetics & Computation Group)의 창설 동인이며, 현재는 존 마에다(John Maeda, <Design by Numbers>의 저자)와 협동 디자인 프로젝트 및 연구를 한창 진행중이다. 시애틀 센트럴 퍼블릭 도서관, 최근 렘 코올하스의 디자인으로 새로 개조한 프라다 패션 매장(뉴욕, 로스엔젤레스, 샌프란시스코)의 인터랙티브 미디어 애플리케이션 프로젝트를 담당한 장본인이다.

레알라(Realla)는 아동적이면서도 괴팍한 매력을 지닌 만화같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으로 유명한 스톡홀름 출신의 2인 디자인 그룹이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전통의 간결명료하고 절제된 미학을 철저히 거부하고  기존 디자인 대가들의 영향력을 전면 부정하는 독창적인 뉴미디어 그래픽 디자인을 추구한다. www.reala.se

슈테판 자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면서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특히 인쇄와 패키징 디자인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그래픽 디자인을 현대적인 뉴미디어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에 특히 관심을 지니고 있다. 전시 기간중 『슈탄다르트』 일간지에 그는 아프리카에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식수병을 전달할 수 있는 식수병 패키징 아이디어 공모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의 루 리드와 데이빗 번의 앨범 디자인은 혁신적인 디자인을 대중에게 소개하여 큰 성공을 거둔 실례로 꼽힌다.

스핀(Spin)은 런던에서 활동하는 뉴미디어 디자인 그룹이며 기존 전통 그래픽 인쇄, 웹디자인, CD-ROM, 디지틀 필름을 제작하며  데이빗 보위의 앨범 디자인에서 독일 도이취 은행(Deutsche Bank)의 웹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www.spin.co.uk

알렉세이 틸레비치(Alexei Tylevich)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다분야 디자이너로 모션 그래픽의 특수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룬다. 채널 원 뉴스를 비롯해서 현재 구미에서 잘 알려진 매스미디어 텔레비젼 매체에서 중요한 디자이너로서 위치를 구축했다. www.hellologan.com

벡토라마닷오그(Vectorama.org)는 뛰어난 벨터 그래픽 툴을 개발한 스위스 루쩨른 출신 멀티미디어 디자이너 그룹. 외르크 레니 프로그램 개발자, 디자이너 라파엘 코흐와 우르스 레니 3인의 합작인 이 툴은 최대 10명까지의 사용자들이 웹사이트 상에서 동시에 협동으로 이미지를 창조해 낼 수 있는 게임이다. 벡토라마 툴은 차후 shared location에 의존하지 않고도 여러 사용자가 함께 다자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의 원형으로 인정방고 있다. www.vectorama.org

마리우스 바츠(Marius Watz)는 노르웨이 오슬로 출신의 디자이너 겸 프로그래머로 3-D 그래픽과 애니메이션에 인터랙티브적 요소를 가미한 디자인을 전문적으로 작업한다. 그의 웹사이트 www.evolutionzone.com은 비상업적인 순수 디자인 예술 실험의 장을 제공하여 이 분야에서 이미 상당한 웹커뮤니티를 형성했다.

„눈동자를 훔쳐라!“  디자이닝 미디어전 | 2001년 4월 20일-5월20일까지| 오스트리아 빈 퀸스틀러하우스 전시장(Kuenstlerhaus)

서브컬쳐 개론

글로벌 시대를 읽는 문화이론 101 

고급문화(high culture)와 저급문화(low culture)가 공존하는 현대사회. 그 가운데 고급문화는 저급문화로, 저급문화는 고급문화로 상호영향을 끼치며 서구 후기산업 사회 체제 속 문화의 여러 양상을 형성해 나가고 있는 가운데 이 두 문화현상 간의 경계는 나날이 모호해 지고 있다. 이른바 하위주변문화 집단으로 여겨져 오던 서브컬쳐는 언제부터인가 대중매체의 각종 이미지를 통해서 트렌디(trendy)한 첨단 유행 스타일로 어필하기 시작하며 문화의 주류로 유입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등장하기 시작한 테드족(teds), 스킨헤드족(skinheads), 펑크족(punks), 보위족(Bowie-ites), 히피(hippies), 드래드족(dreads)…이전 시대에 보지 못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라이브스타일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서브컬쳐 집단들을 일컫는 이름들이다. 다른 국가나 사회에서 보지 못한 이들 “서브컬쳐”가 탄생한 곳은 영국 런던.

그 가운데에서도 노동자출신들이 모여사는 이스트 엔드(East End)가 서브컬쳐의 발원지이다. 복잡하고 다단적인 전통적 계급구조가 지배하는 영국사회는 양차세계대전 이후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계급적, 사회적 사회질서와 세대차를 극복한 선진사회국가임을 자부해 왔다. 그렇다면 그런 영국사회에서 서브컬쳐가 탄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70년대말 “서브컬쳐”(subculture)에 관심의 눈을 뜨기 시작한 영국학계는 이 유별난 주변문화 집단들을 일컬어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저항 혹은 사회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문화적 기제로써 탄생한 사회적 부조리의 산물이라고 분석했다. 서브컬쳐는 과연 사회체제의 기존 사회체제에 대한 헤게모니에 대항한 저항문화(anti-culture 또는 counter-culture)인가?  더구나 90년대 들어 급부상하기 시작한 고스족(Goths)과 인종주의 스킨헤드족의 등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최근들어 등장한 트레키족(Trekkies), 레이브족(raver), 그리고 축구팬 등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이 각양각생의 서브컬쳐 집단들이 속속 사회를 구성하면서 서브컬쳐가 주류문화로 전환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1979년 출간된 『서브컬쳐: 스타일의 의미(Subculture : The Meaning of Style)』라는 이 분야 최초 연구서가 문화학에서는 입문서로 통한다. 영국의 문화학자인 이 책의 저자 딕 헤브디지(Dick Hebdige)는 그람시 문화이론의 개념을 빌어, 서브컬쳐란 후기산업사회 내 존재하는 사회적 긴장을 분출・해소하기 위한 저항적 헤게모니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0년후인 1988년 헤브리지는 다시 그의 새로운 저서 『Hiding in the Light』을 통해서 서브컬쳐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 즉, 서브컬쳐란 사회의 하층계급을 구성하는 소외된 노동계층 인구들의 자아정체성을 부여하고 소속감을 제공한다는 저항문화적인 기능보다는 이미지 위주의 물질주의와 상업주의가 일부 젊은이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미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현대사회 속의 서브컬쳐 집단을 재정의했다.

헤브디지는 그래서 최근 발표한 연구에서 서브컬쳐의 발단과 전개의 주요 요인으로 상업주의 문화를 꼽는다. 바늘처럼 곳추세워 색색으로 물들인 헤어스타일과 공격적인 가죽의상 차림으로 유명한 펑크족들은 그 좋은 예다. 펑크족은 경제적으로 유복하지 못한 하층노동계급 출신 청소년들이 독자적인 저항의식을 표현하는 동시에 자기표현이라는 만족감을 자체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창조한 일종의 아방가르드 문화전략이라는 주장이다.

서브컬쳐 – 영국 노동계급의 산물 

영국의 서브컬쳐 탄생지는 런던의 흑인사회와 백인 노동계급 출신 청소년들의 접점지인 런던 이스트 엔드(East End) 구역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특히 흑인사회의 주요 문화적 표현수단인 음악은 서브컬쳐 스타일의 발전에 핵심 요소로 꼽힌다.

여성적이고 세련된 패션 스타일을 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60년대 모드족(mods)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풍성한 헤어스타일에 신체에 밀착된 의상을 특징으로 하는 테드족(teds 혹은 teddyboys)들이 그들의 시각적 이상으로 삼은 대상은 팝음악의 우상들이었다. 록스타 데이빗 보위를 추종하여 형성된 보위족(Bowie-ites) 족 역시 록스타 데이빗 보위의 여성적이고 야릇한 분위기와 양성애적 라이프스타일을 본받아 탄생한 것이었다.

유럽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전통적인 사회구조가 와해되면서 영국은 이전까지 유지해 오던 계급체제도 완화되어 평등주의 사회로 이행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후기 산업사회에 이른 영국사회는 매스미디어, 핵가족화, 교육제도, 노동환경, 여가문화에서 두루 급속한 변화를 경험했지만 사회적 상승이동이 제한된 전통적 계급제도는 변화시키지 못했다.

후기산업 사회 속 노동계급 가정은 핵가족화를 경험하는 동시에 전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해 졌다. 1944년 브틀러 법안 제정으로 영국의 교육제도는 평준화되고 청소년들의 자각의식은 향상되었다. 각종 매스미디어와 언론매체를  통해 정보와 지식의 분배는 전에 없이 민주화되었다. 하지만 영국의 뿌리깊은 계급구조만은 변화하지 않았고 그로 인한 1차적 피해자들은 노동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이었다. 사회문화적 환경의 변화와 구태의 계급 사이의 양분화(polarization) 현상이 심화되면서 도시의 노동계급 청소년들의 서브컬쳐가 잉태하게 이른다.

그러나 영국사회의 계급문제는 의미있는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채, 노동계급 청소년들은 청소년 문화를 위시하여 청소년들로 구성된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는 60년에 이르러서였다. 영국에서 처음 서브컬쳐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을 당시 학계는 19세기에 제기된 바 있는 도시학 연구결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메이휴(Henry Mayhew)와 토마스 아쳐(Thomas Archer)의 사회학 이론에서 챨스 디킨스(Charles Dickens)와 아더 모리슨(Arthur Morrison)의 사회소설들이 그런 전통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1920년에 이르러서야 미국 시카고 학파의 사회학 및 범죄학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청소년 갱 범죄집과 사회일탈집단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27년 프레데릭 드래셔(Frederick Thresher)가 실시한 거리 갱단 연구에 이어 이후 윌리엄 풋 화이트(William Foote Whyte)는 <거리 모퉁이 사회(Street Corner Society)>라는 저술서에서 거리의 청소년 갱단들의 문화적 절차와 사례연구를 상세히 보고해 놓았다.

1950년대에는 앨버트 코헨(Albert Cohen)과 월터 밀러(Walter Miller)는 지배체제와 복종체제 속의 가치관이라는 개념을 빌어 청소년 하위문화에 대한 한층 이론적이 설명을 시도했다. 코헨은 청소년 갱 집단의 기능을 두고 “학교에서 성적이 부진한 노동계급 출신 청소년들이 여가시간을 활용해 갱단에 참여함으로써 자신감과 자아성취감을 대체적으로 만족시킨다”고 정의했다. 반듯한 정신태도, 의욕, 복종을 요구하는 학교교육의 가치관과는 정반대의 가치들, 즉 쾌락주의, 권위에 대한 불복종, 반항(kicks)은 이들의 가치체계 속의 핵심어휘들이다.

1960년대에 이르러 피터 윌못(Peter Willmott)은 런던 이스트 엔드에 거주하는 노동계급 가정 출신 청소년들에 대한 연구에서 청소년 서브컬쳐가 기존 사회체제 속의 계급체제에 대항한 독자적인 신계급이라는 설에 반기를 들었다. 특히 이스트 엔드를 중심으로 등장한 청소년 서브컬쳐는 가족체제의 모순과 청소년의 자율성 욕구 사이의 갈등의 외면화라고 하는 주장이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계급 부모세대로 부터의 유산 : 청소년과 가족체제의 갈등은 청소년과 성인 노동계급 문화간의 갈등으로 확대해 볼 수 있다. 노동계급 부모 밑에서 성장한 자녀세대는 동일한 가정환경에서 생활함에도 불구하고 사회문화적, 세대적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사고와 행동을 취함으로써 해결책을 찾고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바라본다면 서브컬쳐를 구성하는 청소년들은 부모세대를 전면 거부하고 저항한다기 보다는 부분적으로 긍정 흡수하면서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는게 합당할지도 모른다. 이스트 엔드 출신이면서 파티가 열리는 주말이면 ‘다른 동네’ 즉, 웨스트 엔드(West End)에서 모인다든가 하는 모드족 서브컬쳐는 그런 예이다. 부모세대들이 즐겨 찾던 노동자 동네의 허름한 맥주집, 클럽, 상점 등의 공간을 부유층 거주지인 웨스트 엔드로 장소를 이동하여 그들의 문화를 ‘거행’한다.

펑크 서브컬쳐는 집단이 표방하는 정신적 심리적 상태에서 그들 부모세대를 반영하고 있다. 공격적이고 요란한 외양 뒤로 숨은 그들의 내면세계는 노동자 사회의 고도로 조직화되고 결속화된 집단의식 이면의 개인적인 소외감과 심적 공허감으로 가득차 있다.

50년대 흑인이민자 사회에 대한 인종적인 차별의식과 혐오의식에서 처음 비롯된 테디 보이 서브컬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의 우상으로는 서부 인디언 생활양식을, 페션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복고룩을 추종했다.

이들의 자녀세대들은 1970년대에 이르러 테디보이 리바이벌을 불러 일으켰다. 50년대 엘비스, 에데 코크란, 제임스 딘을 모방한 남성사회의 의리, 폭력성, 배드보이적 성향이 사라진 대신 펑크족, 헤비메탈 로커족, 축구열광팬족 등과 같은 70년대 여타 서브컬쳐 집단과 자기차별화하기 위한 서브컬쳐로 부활한 것이다.

서브컬쳐는 사회상의 거울

서브컬쳐는 한마디로 영국사회의 도시 노동자 가정의 청소년상을 반영한다. 엄격한 계급주의가 지배하는 영국사회에서 서브컬쳐란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다지 영광스러운 형태는 아니며, 더구나 현대 영국사회 전반을 대변하는 형태도 아니다.

그러나 여려 형태의 서브컬쳐들이 제창하는 사고방식과 태도는 현대 영국사회의 여러 단면을 암암리에 암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각각 1964년과 1968년에는 경제난에 따른 실업률 증가로 모드족과 스킨헤드족이 서브컬쳐로 급성장했다. 실업, 도덕적 가치관의 변화, 빈곤, 경제적 심리적 우울감이라는 증세를 띤 ‘영국의 침몰’ 현상은 곧 70년대말 펑크족들에 의해 자행된 노팅힐 카니발, 그런윅, 레이디우드에서 연이은 폭력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펑크족들의 폭력행위는 영국사회 전반에 만연하던 암울함과 공포심리의 단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동성애주의가 새로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기 시작한 60년대말과 70년대 일부 젊은이들은 록스타 데이빗 보위 컬트를 유행시켰다. 보이아이트족은 전형적인 노동계급 중심의 서브컬쳐라기 보다는 동성애 혹은 양성애적 라이프스타일의 주장과 옹호를 우선적으로 내세웠다는 점 외에도 스켄헤드족처럼 폭력적이기 보다는 현대사회의 일상생활의 문제를 이슈로 내세웠다는 사실이 특징적이다.

여러 서브컬쳐 집단들이 내세운 주장과 이슈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이 미덕으로 여기던 청교도적 노동윤리에 도전한 게 사실이다. 미디어와 언론매체의 발달은 서브컬쳐의 이미지, 스타일,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이 등장한 패션, 영화, 예술, 라이프스타일에 영감적 원천이 되어 주기도 했다.

특히 70년대초 복고적 향수주의에 대한 컬트 유행은 텔레비젼과 영화의 주제로 심심찮게 재활용되었다. 대중 매체로 인해 고급문화가 저급문화로, 저급문화가 고급문화로 유입되고, 상업주의 마케팅 전략에 따라 소비자의 취향과 의식을 좌우하는 오늘날 서브컬쳐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는 영국의 현대사회를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 이 글은 본래 SK Telecom 사외보 『열린세계』2000년 11/12월호(통권 제46호)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100년 후 되돌아 온 근대기 빈 공방

비너 베르크슈테테 (Wiener Werkstätte, 1903-1934)
유럽 절대귀족주의 체제가 붕괴의 일로를 계속해가고 있는 가운데 상인계층의 부르조아지들이 신흥 사회  지배층으로 떠오르는 경제사회적 변화 속에서 전에 없이 파격적인 신사고와 예술적 기운이  유럽의 대기를 휘감고 있던 19세기 말엽.

근대 유럽의 예술의 도시 빈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의 주도로 전개되기 시작한 유겐트스틸 (Jugendstil) 비엔나 아르누보  운동과 ‚비너 베르크슈테테 (Wiener Werkstätte)’ 또는 빈 공방이라는 비엔나 공예 운동이 나란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서양 미술사에서 빈 공예 운동은 19-20세기로 넘어가던 세기 전환기 근대 빈 분리파 미술 운동이 공예 분야로 가지치기한 미술 운동의 한 맥으로 평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인들 특히 비엔나 시민들에게 빈 공예 운동이 안겨주는 의미와 국민적 자존심은 자못 크다.

비슷한 시기 19세기 후반기 근대 유럽에서 프랑스 파리에 아르누보(Art nouveau), 영국에 미술과 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에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 네덜란드의 유겐스틸(Jugendstil), 벨기에에 빅토르 호르타(Victor Horta)의 아르누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가 있다면 빈에는 빈 공방 (Wiener Werkstätte)이 있다고 할 정도로 빈 공예 운동은 전 유럽을 가로질러 서양 미술 및 공예 사조와 호흡을 같이 한  근대  유럽의 보편적인 국제 양식의 하나였다.

지금도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 양식의 궁전 건물과 건축물들이 도시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고도시이자 수도 빈 시내를 거닐다 보면 20세기로 접어들기 바로 직전1890년대 말에 세워진 유겐트스틸 양식의 건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빈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의 오랜 단골 순례지가 되어 버린 빈 분리파 미술관 제체시온 (Secession, 죠세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blrich)가 건축 디자인하여 1897-1898년에 지어져 현재 빈 제4구역 프리드리히 슈트라세 거리에 위치), 나쉬마르크트 (Naschmarkt) 재래 시장을 사이에 두고 뻗어 있는 링케-빈차일레(Linke Wienzeile) 거리와 레히테-빈차일레(Rechte Wienzeile) 거리 상의 상가 및 거주용 건물 마욜리카하우스(Majolikahaus, 1899년), 그리고 제체시온 미술관과 나쉬마르크트 시장에서 가까이 위치해 있는 칼스플라츠(Karlsplatz, 오토 바그너 설계) 옛 철도역 외장 디자인 등은 빈 유겐스틸 건축 양식과 빈 공예 운동 양식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로 꼽힌다.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칼스플라츠 옛 철도역은 빈 유겐스틸 양식을 잘 대변한다. Photo: Fotostudio Otto, Copyright: Wien Museum.

빈 공예 운동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전 시대의 대중적 인기를 독차지했던 비더마이어 양식에 대한 반발과 부분적 계승이라는 비판적 전통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빈 분리파 미술의 주도자 클림트와 빈 공예 운동의 대가들은 모더니즘 시대에 걸맞는 신사고와 그에 맞는 미술을 창조해야 한다는 철학적 원칙을 공유했다.

그렇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전시대 양식을  전적으로 배격만 한채 새로운 근대주의 미학만을 과격하게 추종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기에 빈 중산층들을 사로잡았던 비더마이어 양식에 비하면 빈 공예 운동이 한결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예술 정신에서 비롯되었음은 사실이다. 1815-1848년에 이르는 약 30여년 동안 신흥 부르조아 부유층 사이에서는 비더마이어 양식 건축, 실내 장식, 공예, 미술 등이 널리 사랑받았다.

비더마이어 양식 (Biedermeier)이란 절대 귀족들이 위풍당당 양식이라며 선호한 바로크풍의 화려사치한 양식과 대조되는, 말하자면 소시민적 건축 및 장식 스타일이라고 보면 된다. 대체로 나트막한 천정, 아담한 방 크기, 오밀조밀하게 배치한 실내 가구와 간결검소한 분위기를 풍기는 실내 장식 용품을 특징으로 하는 비더마이어 양식은 그래서 규율을 중시하고 가족중심적인 소시민적인 생활과 근대기 시민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며 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보통사람들의 위한 건축 공예 사조였다.

신흥 부유층들을 위한 절충주의적 생활 공예
산업 혁명과 대량 생산 체제가 가속화되어 가는 가운데 신흥 부르조아지들은 나날이 부유해졌고, 특히 옛 전통 귀족들이 모여 살던 빈 제13구역과 신흥 부유층들 사이에서 인기 거주 동네로 부상한 빈 제19구역에서는 언덕낀 숲과 자연을 가까이 한채 널찍한 정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지리적 장점을 활용해 이탈리아식의 거주용 저택과 맨션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니 돈많고 새로운 미를 향유하길 갈구하던 신흥 부유층들의 취향에 적절히 부합하면서도 근대적인 미적 이상이 표현된 건축과 공예 창조는 당시 주요 건축디자인 거장들에게 요구되던 중요한 능력일 수 밖에 없었다.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본사 오스트리아 우체국 은행 건물의 실내. Photo courtesy: Österreichische Postsparkasse.

빈 공예 운동을 이끈 거장 건축가 오토 바그너 (Otto Wagner)는 빈 분리파풍이 잔뜩 느껴지는 단순간결한 곡선미 위주의 초대형 호화 빌라를 즐겨 설계했다.

현재 빈 시내 순화도로(Ringstrassen) 상에 오스트리아 국방부 건물 맞은 켠에 그 자체로 한 편의 박물관이 되다시피 한 채 서 있는 오스트리아 우체국 은행 건물 (Österreichische Postsparkasse(1904-1906년))은 도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오토 바그너 건축의 진수이다.

따지고 보면 바그너의 건축 디자인은 여러사람을 두루 만족시키려 한듯한 절충적인 면이 없지 않다. 대체로 장중한 규모의 건축물을 즐겨 설계했던 그는 전체적인 분위기면에서는 유럽 지중해 지방에서 널리 유행하던 저택풍을 도입하되 신고전주의에서 따온 절제되고 엄격한 직곡선과 복잡한 꽃문양을 적절히 혼합하는 것으로써 전체적으로 완벽한 대칭과 균형이 이루어진 명쾌한 건축 양식을 이룩했다. 바그너의 제자이자 제체시온 미술관 돔을 양배추 모양으로 설계해 빈 건축계의 빈축과 호평을 한 몸에 받았던 올브리히의 건축 양식은 스승이 가르쳐준 양식적 전통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여러편의 논고와 설계도를 통해서 “장식은 범죄(Ornament is Crime)” (출처: 『장식과 범죄 (Ornament und Verbrechen), 1908년 출간)라는 명제로 유명한 체코 출신 건축가 겸 장식가 아돌프 로오스 (Adolf Loos, 1870-1933)의 기능주의 개념과 근대 미학관은 아직도 해명되어야 할 구석이 많이 남겨져 있는게 사실이지만 로오스는 빈 근대 건축과 비너 베르크슈테테 운동과 반드시 연관시켜 거론되는 핵심 인물이다.

로오스가 남긴 건축 디자인은 고전주의 건축과 공예에서 영감받아서 초호화 희귀 대리석, 목재, 귀금속품 등 값비싼 고급 건축 자재와 장식품을 활용하되 일체의 군더더기 장식을 제거한 엄격하고 간결한 양식을 자랑한다. 흔히 로오스의 건축물을 두고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당시 빈에서 활동중이던 언어 철학자)적 경지의 철학적 엄격성이 담긴 건축 양식을 이룩했다고 평가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아돌프 로오스가 설계한 로오스하우스 라이파이젠란데스 은행 건물. 1910년 완공. Photo courtesy of the late Kitty Goldmann/moessmer.at/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 Bildarchiv, Wien/Wien Museum, Wien.

분석적인 사고의 소유자, 미국 여행을 통해 혼자서 건축을 공부한 독학 건축가, 근대 미술과 건축을 면밀히 관찰하며 당시 『신자유언론 (Die Neue Freie Presse)』 紙에 고정적으로 글을 기고했던 예술평론가, 다재다능했던 건축가 겸 이론가 아돌프 로오스는 오토 바그너와 더불어 빈에서 전개된 근대 건축 공예 디자인 운동을 선구자였으나 그 자신은 빈 공예 운동에 공식적으로 기여할 것을 극구 거부했다.

그렇다고 해서 구시대의 지배계층인 귀족들에 대한 혐오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던 그는 그래서 주로 신흥부유층 고객들을 상대로 개인 주택 설계와 실내 장식품 디자인을 담당했다.

현재 빈 중심부 옛 오스트로-헝거리 제국의 집무실이던 호프부르크 (Hofburg) 맞은편에 미하엘러프라츠 (Michaelerplatz) 광장에는 로오스가 설계한 대표작 건축물이 자리잡고 서있다. 라이파이젠란데스 은행 (Reiffeisenlandesbank)의 주문으로 설계되어 완공된 라이파이젠 은행 본점 건물과 골드만 & 잘라치 패션 아텔리에 (로오스하우스 (Looshaus) 내 Atelier Goldmann & Salatsch) 전시장은 1911년 완공을 마치고 대중에게 공개되자마자 뜨거운 찬반논쟁에 휩싸였던 문제작이기도 했다.

로오스가 건축 수주를 받아 1899년에 실내 장식을 마친 카페 무제움 (Café Museum, 현재 빈 오페른링 순환도로 근처 오페른가쎄와 프리드리히슈트라세 교차점에 위치)은 수년간의 실내 개조 공사 끝에 올초 [2004년] 다시 문을 열고 1830년대 그대로의 카페 모습과 분위기를 일반 카페 손님들에게 개장했다.

직선 위주의 단순간결하고 엄격한 벽면과 천정, 널찍하고 탁트인 상위 공간을 특징으로 한 이유로 해서 ‚허무주의 카페 (Café Nihilism)’라는 우스개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카페 무제움은 빈 공예 운동의 건축가들은 물론이고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당대 유명 화가들이 즐겨 드나들던 예술가들의 사교장 역할도 톡톡이 했다.

종합 예술로서의 비너 베르크슈테테 공예
빈 공예 운동을 거론하는데 왜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는가라고 하실지 몰라도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흔히 이곳 오스트리아에서 미술 애호가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비너 베르크슈테네 공예 운동을 가리켜서 ‚종합 예술 (Gesamtkunstwerk)’ 이라고 부른다.

빈 공예 운동에서 다룬 공예 분야는 건축과 실내 장식용 가구 및 악세서리는 물론 금은 세공, 금속 세공, 그래픽 및 포스터, 서적 제작, 가죽 세공, 의자와 책상을 포함한 사무용 가구 제작, 유리, 도자기, 패션 및 직물 등을 포함한다. 그로 인해서 이 모든 공예 분야 작품들이 한 자리에 구현된 종합 프로젝트들이 다수 이루어졌다. 특히 극장 실내 및 무대 장식, 유명한 플레더마우스 캬바레 (Cabaret Fledermaus, 요제프 호프만 감독), 푸르커스도르프 요양원 건축과 실내 장식, 벨기에 브뤼셀의 스토클레 궁전 (Plais Stoclet, 1905-1911년) 등은 그같은 대표적인 예들로서 단순간결미, 난해한 건축 설계 구조, 호화로운 자재가 유난히 눈에 띈다.

요제프 호프만이 디자인해 1925년경 생산한 놋쇠 쿠페. Photo courtesy: MAK, Wien.

특히 요제프 호프만 (Josef Hoffmann)은 이전 세대의 단촐한 비더마이어 양식에다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따 온 은은미와 호프만 특유의 개인적인 위트와 유머 감각을 발휘한 개인용 저택 설계를 다수 담당했다. 푸르커스도르프 요양원 (Purkersdorf Sanatorium, 1904-1906년)은 오늘날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호프만의 대규모 건축 작품이다.

빈 도심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떨어져 빈 숲 근처에 자리해 있는 푸르커스도르프 요양원은 건물 외부 설계 그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건물 내부 세부 장식과 실내 장식용 가구까지 혼연일체로 통일된 호프만식 디자인 양식을 자랑하며 보는이에게 빈 공예 운동의 ‚종합 예술’ 경험을 제공한다. 주로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양차대전기 사이 동안 완성된 호프만의 건축물들은 대체로 가족을 위한 거주용 주택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다지 비싸지 않은 시멘트나 흙을 주재료로 한 안락성과 기능성을 우선시 한 직사각형 모양의 전통적인 건물들이 주를 이룬다.

공방 장인과 디자이너는 동등한 예술인

본래 ‚빈 공예 공방(비너 베르크슈테테란 영어로 비엔나 워크숍으로 옮길수 있겠다)’이라는 의미의 비너 베르크슈테테는 유난히 깔끔하고 환한 공방 분위기와 평등한 조직 구조로 유명했다고 한다. 공방 장인들은 일개 쟁이의  열등한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건축가나 디자이너들과 동등한 전문 기술인으로 인정받았으며 안정된 생계 보장이라는 배려 측면에서 장인들은 넉넉한 휴가와 휴가중 임금 지급을 받았다.

아름답고 완벽한 공예 디자인이란 미술가와 건축가의 훌륭한 컨셉과 착상 외에도 탁월한 수공력과 기술적 기량이 합세해야 한다는 비너 베르크슈테테의 공예 창조 원칙 때문이었다. 공방의 설립 초기인 1903-4년 비너 베르크슈테테는  호프만의 총지휘하에서 전에 없는 고품질의 우수한 공예품을 제작했고, 생산된 각종 공예품들은 주로 빈의 중상층 고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공방 조합을 경유해 팔려 나갔다.

오토 프루처(Otto Prutscher)가 디자인한 빈 공방풍 유리 제품은 고전적인 형태에 근대적이고 기하학적인 단순간결한 디테일이 특징적이다. Photo courtesy: MAK, Wien.

빈 공예 운동의 영향력은 빈을 벗어나서 주변 유럽 대도시로 급속하게 파급되기 시작했다. 1904년 독일 베를린, 1905년 체코 브르노, 그리고 1906년 독일 하겐에서의 전시회에 이어서 1914년 독일 쾰른에서의 베르크분트 공예 전시와 1925년 파리 박람회에서 큰 성공을 거둬가고 있던 비너 베르크슈테테의 전성기 당시의 공방 소속 고숙련 장인들의 수만도 100여명에 다달았다고 한다.

오늘날같이 대량생산 산업화된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치 않아 보이는 규모라고 여겨질지 몰라도 곳곳에 분산된채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운영되던 공예 생산체제가 일반적이었던 근대기 정황에서는 분명 막강한 규모의 공예 운동이었다.

빈 공방의 쇠퇴

미술 분야에서 클림트가 주도한 빈 분리파 운동 (Wiener Secession)의 주도로 ‚새로운 빈 창조’라는 기치하에 근대 건축 및 공예 운동은 벌써 1890년대부터 널리 행해지고 있었지만, 그 정식 출범은 1903년 6월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과 그래픽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 (Koloman Moser) 두 빈 분리파 디자이너들의 빈 공예 운동 선언이 선포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유명한 미술가 건축가 공예가들이 모였다 한들 그들의 창작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재정적 후원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법이다.

비너 베르트슈테테의 탄생 배경에는 빈 출신의 돈많은 은행업자 프라츠 베른도르퍼 (Fritz Wärndorfer, 1869-1939) 재정 후견인의 공로는 결정적이었다. 천재 미술가 클림트의 경우만 보더라도, 작업실을 마련해 주고 안정된 경제 환경 속에서 작품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 겸 패션사업가 에밀리에 플뢰게 (Emilie Flöge)가 없었더라면 클림트는 그토록 안란하고 편안하게 예술 인생을 펼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빈 공예 운동은 공방 장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였했을 뿐만 아니라 전에 없이 많은 수의 디자이너를 배출하게 된 분수령기이기도 했다. 근대기 이전까지만해도 디자인이라는 개념적인 창조 작업은 공방에서 장인의 임무여서 이른바 ‚착상(디자인 컨셉)과 수공 (handycraft)’이 채 분리분업화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빈 공예 운동을 계기로 제품이나 공예품의 형상을 착상하고 고안하는 일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종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창립년인 1903년부터 해체되던 해인 1932년까지 약 30년 동안 운영된 비너 베르크슈테테 공방을 거쳐간 디자이너들의 수는 200여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다고베르트 페셰가 1920년대에 디자인한 은제 과일 소쿠리. Photo courtesy: MAK, Wien.

흔히 근대기 유럽의 대다수 예술 운동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빈 공예 운동 역시 영원한 성공을 지속시키지는 못했다. 오스트로-헝거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총격 암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2년부터 줄곧 빈 공예 운동은 만성적인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빈 공방의 창립 위원이자 재정 후원자 프라츠 베른도르퍼가 전쟁을 피해 191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면서 역시 은행가 출신의 오토 프리마베지 (Otto Primavesi)가 재정 후원자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프라마베지는 다고베르트 페셰 (Dagobert Peche) 같은 기괴하고 과장된 절충주의 양식을 매우 좋아해서 빈 공방 말년에는 페셰 풍의 공예품들이 다수 생산되었다. 프리마베지 하의 빈 공방은 활발한 재정 순환을 위해서 1921년 뉴욕, 이어 1929년 베를린에 빈 공방 해외 영엄점을 개설하기도 했으나 결국 재정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1932년 빈 공방은 파산신고를 하고 공식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오늘날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빈에서는 비너 베르크슈테테에 버금가는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공예 운동을 또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비너 베르크슈테테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올 겨울 빈 여러 박물관과 전시장에서 분산되어 전시되고 있는 이번 <빈 공방 운동 100년> 展에서는 과거 빈 공방 소속의 전통적인 공예 업체들이 생산했던 옛 명품들과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최근의 공예품들을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종합전시여서 공예와 미술 애호가들은 진품을 보고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고 있다.

전시명: 빈 공방 운동 1903-2003년 – 빈 디자인 (Wiener Werkstätte 1903-2003 Design in Wien) 展 | 전시 장소: 오스트리아 빈 시내 여러 전시장에서 분산 전시 | 전시 기간: 2003년 9월 23일-2004년 1월4일

* 이 글은 본래 『문화공간』 세종문화회관 회원지 2004년 2월호에 실렸던 글이었음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