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후 되돌아 온 근대기 빈 공방

비너 베르크슈테테 (Wiener Werkstätte, 1903-1934)
유럽 절대귀족주의 체제가 붕괴의 일로를 계속해가고 있는 가운데 상인계층의 부르조아지들이 신흥 사회  지배층으로 떠오르는 경제사회적 변화 속에서 전에 없이 파격적인 신사고와 예술적 기운이  유럽의 대기를 휘감고 있던 19세기 말엽.

근대 유럽의 예술의 도시 빈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의 주도로 전개되기 시작한 유겐트스틸 (Jugendstil) 비엔나 아르누보  운동과 ‚비너 베르크슈테테 (Wiener Werkstätte)’ 또는 빈 공방이라는 비엔나 공예 운동이 나란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서양 미술사에서 빈 공예 운동은 19-20세기로 넘어가던 세기 전환기 근대 빈 분리파 미술 운동이 공예 분야로 가지치기한 미술 운동의 한 맥으로 평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인들 특히 비엔나 시민들에게 빈 공예 운동이 안겨주는 의미와 국민적 자존심은 자못 크다.

비슷한 시기 19세기 후반기 근대 유럽에서 프랑스 파리에 아르누보(Art nouveau), 영국에 미술과 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에 찰스 레니 매킨토시(Charles Rennie Mackintosh), 네덜란드의 유겐스틸(Jugendstil), 벨기에에 빅토르 호르타(Victor Horta)의 아르누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가 있다면 빈에는 빈 공방 (Wiener Werkstätte)이 있다고 할 정도로 빈 공예 운동은 전 유럽을 가로질러 서양 미술 및 공예 사조와 호흡을 같이 한  근대  유럽의 보편적인 국제 양식의 하나였다.

지금도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 양식의 궁전 건물과 건축물들이 도시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고도시이자 수도 빈 시내를 거닐다 보면 20세기로 접어들기 바로 직전1890년대 말에 세워진 유겐트스틸 양식의 건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빈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의 오랜 단골 순례지가 되어 버린 빈 분리파 미술관 제체시온 (Secession, 죠세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blrich)가 건축 디자인하여 1897-1898년에 지어져 현재 빈 제4구역 프리드리히 슈트라세 거리에 위치), 나쉬마르크트 (Naschmarkt) 재래 시장을 사이에 두고 뻗어 있는 링케-빈차일레(Linke Wienzeile) 거리와 레히테-빈차일레(Rechte Wienzeile) 거리 상의 상가 및 거주용 건물 마욜리카하우스(Majolikahaus, 1899년), 그리고 제체시온 미술관과 나쉬마르크트 시장에서 가까이 위치해 있는 칼스플라츠(Karlsplatz, 오토 바그너 설계) 옛 철도역 외장 디자인 등은 빈 유겐스틸 건축 양식과 빈 공예 운동 양식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로 꼽힌다.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칼스플라츠 옛 철도역은 빈 유겐스틸 양식을 잘 대변한다. Photo: Fotostudio Otto, Copyright: Wien Museum.

빈 공예 운동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전 시대의 대중적 인기를 독차지했던 비더마이어 양식에 대한 반발과 부분적 계승이라는 비판적 전통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빈 분리파 미술의 주도자 클림트와 빈 공예 운동의 대가들은 모더니즘 시대에 걸맞는 신사고와 그에 맞는 미술을 창조해야 한다는 철학적 원칙을 공유했다.

그렇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전시대 양식을  전적으로 배격만 한채 새로운 근대주의 미학만을 과격하게 추종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기에 빈 중산층들을 사로잡았던 비더마이어 양식에 비하면 빈 공예 운동이 한결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예술 정신에서 비롯되었음은 사실이다. 1815-1848년에 이르는 약 30여년 동안 신흥 부르조아 부유층 사이에서는 비더마이어 양식 건축, 실내 장식, 공예, 미술 등이 널리 사랑받았다.

비더마이어 양식 (Biedermeier)이란 절대 귀족들이 위풍당당 양식이라며 선호한 바로크풍의 화려사치한 양식과 대조되는, 말하자면 소시민적 건축 및 장식 스타일이라고 보면 된다. 대체로 나트막한 천정, 아담한 방 크기, 오밀조밀하게 배치한 실내 가구와 간결검소한 분위기를 풍기는 실내 장식 용품을 특징으로 하는 비더마이어 양식은 그래서 규율을 중시하고 가족중심적인 소시민적인 생활과 근대기 시민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며 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보통사람들의 위한 건축 공예 사조였다.

신흥 부유층들을 위한 절충주의적 생활 공예
산업 혁명과 대량 생산 체제가 가속화되어 가는 가운데 신흥 부르조아지들은 나날이 부유해졌고, 특히 옛 전통 귀족들이 모여 살던 빈 제13구역과 신흥 부유층들 사이에서 인기 거주 동네로 부상한 빈 제19구역에서는 언덕낀 숲과 자연을 가까이 한채 널찍한 정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지리적 장점을 활용해 이탈리아식의 거주용 저택과 맨션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니 돈많고 새로운 미를 향유하길 갈구하던 신흥 부유층들의 취향에 적절히 부합하면서도 근대적인 미적 이상이 표현된 건축과 공예 창조는 당시 주요 건축디자인 거장들에게 요구되던 중요한 능력일 수 밖에 없었다.

오토 바그너가 설계한 본사 오스트리아 우체국 은행 건물의 실내. Photo courtesy: Österreichische Postsparkasse.

빈 공예 운동을 이끈 거장 건축가 오토 바그너 (Otto Wagner)는 빈 분리파풍이 잔뜩 느껴지는 단순간결한 곡선미 위주의 초대형 호화 빌라를 즐겨 설계했다.

현재 빈 시내 순화도로(Ringstrassen) 상에 오스트리아 국방부 건물 맞은 켠에 그 자체로 한 편의 박물관이 되다시피 한 채 서 있는 오스트리아 우체국 은행 건물 (Österreichische Postsparkasse(1904-1906년))은 도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오토 바그너 건축의 진수이다.

따지고 보면 바그너의 건축 디자인은 여러사람을 두루 만족시키려 한듯한 절충적인 면이 없지 않다. 대체로 장중한 규모의 건축물을 즐겨 설계했던 그는 전체적인 분위기면에서는 유럽 지중해 지방에서 널리 유행하던 저택풍을 도입하되 신고전주의에서 따온 절제되고 엄격한 직곡선과 복잡한 꽃문양을 적절히 혼합하는 것으로써 전체적으로 완벽한 대칭과 균형이 이루어진 명쾌한 건축 양식을 이룩했다. 바그너의 제자이자 제체시온 미술관 돔을 양배추 모양으로 설계해 빈 건축계의 빈축과 호평을 한 몸에 받았던 올브리히의 건축 양식은 스승이 가르쳐준 양식적 전통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여러편의 논고와 설계도를 통해서 “장식은 범죄(Ornament is Crime)” (출처: 『장식과 범죄 (Ornament und Verbrechen), 1908년 출간)라는 명제로 유명한 체코 출신 건축가 겸 장식가 아돌프 로오스 (Adolf Loos, 1870-1933)의 기능주의 개념과 근대 미학관은 아직도 해명되어야 할 구석이 많이 남겨져 있는게 사실이지만 로오스는 빈 근대 건축과 비너 베르크슈테테 운동과 반드시 연관시켜 거론되는 핵심 인물이다.

로오스가 남긴 건축 디자인은 고전주의 건축과 공예에서 영감받아서 초호화 희귀 대리석, 목재, 귀금속품 등 값비싼 고급 건축 자재와 장식품을 활용하되 일체의 군더더기 장식을 제거한 엄격하고 간결한 양식을 자랑한다. 흔히 로오스의 건축물을 두고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 당시 빈에서 활동중이던 언어 철학자)적 경지의 철학적 엄격성이 담긴 건축 양식을 이룩했다고 평가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아돌프 로오스가 설계한 로오스하우스 라이파이젠란데스 은행 건물. 1910년 완공. Photo courtesy of the late Kitty Goldmann/moessmer.at/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 Bildarchiv, Wien/Wien Museum, Wien.

분석적인 사고의 소유자, 미국 여행을 통해 혼자서 건축을 공부한 독학 건축가, 근대 미술과 건축을 면밀히 관찰하며 당시 『신자유언론 (Die Neue Freie Presse)』 紙에 고정적으로 글을 기고했던 예술평론가, 다재다능했던 건축가 겸 이론가 아돌프 로오스는 오토 바그너와 더불어 빈에서 전개된 근대 건축 공예 디자인 운동을 선구자였으나 그 자신은 빈 공예 운동에 공식적으로 기여할 것을 극구 거부했다.

그렇다고 해서 구시대의 지배계층인 귀족들에 대한 혐오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던 그는 그래서 주로 신흥부유층 고객들을 상대로 개인 주택 설계와 실내 장식품 디자인을 담당했다.

현재 빈 중심부 옛 오스트로-헝거리 제국의 집무실이던 호프부르크 (Hofburg) 맞은편에 미하엘러프라츠 (Michaelerplatz) 광장에는 로오스가 설계한 대표작 건축물이 자리잡고 서있다. 라이파이젠란데스 은행 (Reiffeisenlandesbank)의 주문으로 설계되어 완공된 라이파이젠 은행 본점 건물과 골드만 & 잘라치 패션 아텔리에 (로오스하우스 (Looshaus) 내 Atelier Goldmann & Salatsch) 전시장은 1911년 완공을 마치고 대중에게 공개되자마자 뜨거운 찬반논쟁에 휩싸였던 문제작이기도 했다.

로오스가 건축 수주를 받아 1899년에 실내 장식을 마친 카페 무제움 (Café Museum, 현재 빈 오페른링 순환도로 근처 오페른가쎄와 프리드리히슈트라세 교차점에 위치)은 수년간의 실내 개조 공사 끝에 올초 [2004년] 다시 문을 열고 1830년대 그대로의 카페 모습과 분위기를 일반 카페 손님들에게 개장했다.

직선 위주의 단순간결하고 엄격한 벽면과 천정, 널찍하고 탁트인 상위 공간을 특징으로 한 이유로 해서 ‚허무주의 카페 (Café Nihilism)’라는 우스개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카페 무제움은 빈 공예 운동의 건축가들은 물론이고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당대 유명 화가들이 즐겨 드나들던 예술가들의 사교장 역할도 톡톡이 했다.

종합 예술로서의 비너 베르크슈테테 공예
빈 공예 운동을 거론하는데 왜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 놓는가라고 하실지 몰라도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흔히 이곳 오스트리아에서 미술 애호가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비너 베르크슈테네 공예 운동을 가리켜서 ‚종합 예술 (Gesamtkunstwerk)’ 이라고 부른다.

빈 공예 운동에서 다룬 공예 분야는 건축과 실내 장식용 가구 및 악세서리는 물론 금은 세공, 금속 세공, 그래픽 및 포스터, 서적 제작, 가죽 세공, 의자와 책상을 포함한 사무용 가구 제작, 유리, 도자기, 패션 및 직물 등을 포함한다. 그로 인해서 이 모든 공예 분야 작품들이 한 자리에 구현된 종합 프로젝트들이 다수 이루어졌다. 특히 극장 실내 및 무대 장식, 유명한 플레더마우스 캬바레 (Cabaret Fledermaus, 요제프 호프만 감독), 푸르커스도르프 요양원 건축과 실내 장식, 벨기에 브뤼셀의 스토클레 궁전 (Plais Stoclet, 1905-1911년) 등은 그같은 대표적인 예들로서 단순간결미, 난해한 건축 설계 구조, 호화로운 자재가 유난히 눈에 띈다.

요제프 호프만이 디자인해 1925년경 생산한 놋쇠 쿠페. Photo courtesy: MAK, Wien.

특히 요제프 호프만 (Josef Hoffmann)은 이전 세대의 단촐한 비더마이어 양식에다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따 온 은은미와 호프만 특유의 개인적인 위트와 유머 감각을 발휘한 개인용 저택 설계를 다수 담당했다. 푸르커스도르프 요양원 (Purkersdorf Sanatorium, 1904-1906년)은 오늘날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호프만의 대규모 건축 작품이다.

빈 도심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떨어져 빈 숲 근처에 자리해 있는 푸르커스도르프 요양원은 건물 외부 설계 그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건물 내부 세부 장식과 실내 장식용 가구까지 혼연일체로 통일된 호프만식 디자인 양식을 자랑하며 보는이에게 빈 공예 운동의 ‚종합 예술’ 경험을 제공한다. 주로 1910년대부터 1930년대에 이르는 양차대전기 사이 동안 완성된 호프만의 건축물들은 대체로 가족을 위한 거주용 주택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다지 비싸지 않은 시멘트나 흙을 주재료로 한 안락성과 기능성을 우선시 한 직사각형 모양의 전통적인 건물들이 주를 이룬다.

공방 장인과 디자이너는 동등한 예술인

본래 ‚빈 공예 공방(비너 베르크슈테테란 영어로 비엔나 워크숍으로 옮길수 있겠다)’이라는 의미의 비너 베르크슈테테는 유난히 깔끔하고 환한 공방 분위기와 평등한 조직 구조로 유명했다고 한다. 공방 장인들은 일개 쟁이의  열등한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건축가나 디자이너들과 동등한 전문 기술인으로 인정받았으며 안정된 생계 보장이라는 배려 측면에서 장인들은 넉넉한 휴가와 휴가중 임금 지급을 받았다.

아름답고 완벽한 공예 디자인이란 미술가와 건축가의 훌륭한 컨셉과 착상 외에도 탁월한 수공력과 기술적 기량이 합세해야 한다는 비너 베르크슈테테의 공예 창조 원칙 때문이었다. 공방의 설립 초기인 1903-4년 비너 베르크슈테테는  호프만의 총지휘하에서 전에 없는 고품질의 우수한 공예품을 제작했고, 생산된 각종 공예품들은 주로 빈의 중상층 고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며 공방 조합을 경유해 팔려 나갔다.

오토 프루처(Otto Prutscher)가 디자인한 빈 공방풍 유리 제품은 고전적인 형태에 근대적이고 기하학적인 단순간결한 디테일이 특징적이다. Photo courtesy: MAK, Wien.

빈 공예 운동의 영향력은 빈을 벗어나서 주변 유럽 대도시로 급속하게 파급되기 시작했다. 1904년 독일 베를린, 1905년 체코 브르노, 그리고 1906년 독일 하겐에서의 전시회에 이어서 1914년 독일 쾰른에서의 베르크분트 공예 전시와 1925년 파리 박람회에서 큰 성공을 거둬가고 있던 비너 베르크슈테테의 전성기 당시의 공방 소속 고숙련 장인들의 수만도 100여명에 다달았다고 한다.

오늘날같이 대량생산 산업화된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치 않아 보이는 규모라고 여겨질지 몰라도 곳곳에 분산된채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운영되던 공예 생산체제가 일반적이었던 근대기 정황에서는 분명 막강한 규모의 공예 운동이었다.

빈 공방의 쇠퇴

미술 분야에서 클림트가 주도한 빈 분리파 운동 (Wiener Secession)의 주도로 ‚새로운 빈 창조’라는 기치하에 근대 건축 및 공예 운동은 벌써 1890년대부터 널리 행해지고 있었지만, 그 정식 출범은 1903년 6월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과 그래픽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 (Koloman Moser) 두 빈 분리파 디자이너들의 빈 공예 운동 선언이 선포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유명한 미술가 건축가 공예가들이 모였다 한들 그들의 창작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재정적 후원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법이다.

비너 베르트슈테테의 탄생 배경에는 빈 출신의 돈많은 은행업자 프라츠 베른도르퍼 (Fritz Wärndorfer, 1869-1939) 재정 후견인의 공로는 결정적이었다. 천재 미술가 클림트의 경우만 보더라도, 작업실을 마련해 주고 안정된 경제 환경 속에서 작품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 겸 패션사업가 에밀리에 플뢰게 (Emilie Flöge)가 없었더라면 클림트는 그토록 안란하고 편안하게 예술 인생을 펼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빈 공예 운동은 공방 장인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에 기였했을 뿐만 아니라 전에 없이 많은 수의 디자이너를 배출하게 된 분수령기이기도 했다. 근대기 이전까지만해도 디자인이라는 개념적인 창조 작업은 공방에서 장인의 임무여서 이른바 ‚착상(디자인 컨셉)과 수공 (handycraft)’이 채 분리분업화되지 않은 상태였으나, 빈 공예 운동을 계기로 제품이나 공예품의 형상을 착상하고 고안하는 일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종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창립년인 1903년부터 해체되던 해인 1932년까지 약 30년 동안 운영된 비너 베르크슈테테 공방을 거쳐간 디자이너들의 수는 200여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다고베르트 페셰가 1920년대에 디자인한 은제 과일 소쿠리. Photo courtesy: MAK, Wien.

흔히 근대기 유럽의 대다수 예술 운동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빈 공예 운동 역시 영원한 성공을 지속시키지는 못했다. 오스트로-헝거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총격 암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2년부터 줄곧 빈 공예 운동은 만성적인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빈 공방의 창립 위원이자 재정 후원자 프라츠 베른도르퍼가 전쟁을 피해 191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면서 역시 은행가 출신의 오토 프리마베지 (Otto Primavesi)가 재정 후원자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프라마베지는 다고베르트 페셰 (Dagobert Peche) 같은 기괴하고 과장된 절충주의 양식을 매우 좋아해서 빈 공방 말년에는 페셰 풍의 공예품들이 다수 생산되었다. 프리마베지 하의 빈 공방은 활발한 재정 순환을 위해서 1921년 뉴욕, 이어 1929년 베를린에 빈 공방 해외 영엄점을 개설하기도 했으나 결국 재정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1932년 빈 공방은 파산신고를 하고 공식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오늘날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빈에서는 비너 베르크슈테테에 버금가는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공예 운동을 또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비너 베르크슈테테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올 겨울 빈 여러 박물관과 전시장에서 분산되어 전시되고 있는 이번 <빈 공방 운동 100년> 展에서는 과거 빈 공방 소속의 전통적인 공예 업체들이 생산했던 옛 명품들과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최근의 공예품들을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는 종합전시여서 공예와 미술 애호가들은 진품을 보고 감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고 있다.

전시명: 빈 공방 운동 1903-2003년 – 빈 디자인 (Wiener Werkstätte 1903-2003 Design in Wien) 展 | 전시 장소: 오스트리아 빈 시내 여러 전시장에서 분산 전시 | 전시 기간: 2003년 9월 23일-2004년 1월4일

* 이 글은 본래 『문화공간』 세종문화회관 회원지 2004년 2월호에 실렸던 글이었음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