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June 2013

일상 속 비범한 무명 디자인

NO NAME DESIGN – THE WUNDERKAMMER OF FRANCO CLIV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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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Name Design』 전시회. © Copyright: Franco Clivio Photo: Hans Hansen / G+A.

『무명 디자인 (No Name Design)』 전시회는 일상생활 속의 우리의 주변에서 늘상 널려있어 눈길도 주지 않을 만큼 당연히 여겨지는 사물들에 바치는 한 편의 찬가다.

현란한 모양새나 소리높여 외치는 색채, 종잡기 어려운 숨은 컨셉이나 철학으로 무장하고 수 초 간이나마  지나치는  이의 주목을 끌어잡으려 애쓰는 디자인 상품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요즘, 이 전시회는 요란을 떨지도 유혹하려들지도 않지만  누가 디자인했는지는 몰라도 조용한 미감과 기능성을 자랑하는 명품 무명 디자인을 재발견해 본다.

우리주변 속의 평범한 비범한 일상용품들을 찾아 모은 날카로운 심미안의 주인공이자 이번 전시회의 주인공은 프랑코 클리비오 (Franco Clivio, 1942년 생, 현재 스위스 취리히 거주). “바지에 주머니가 생긴 이래 나는 수집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정도로 골수 수집가임을 자처하는 클리비오는 일상 속의 진부하고 ‘비’예술적이라고 여겨지는 평범한 사물들을 향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밀라노 출신의 디자이너 겸 교육자다.

그에게 “발견 (to discover)하기는 곧 보고 (to see) 사고하는 것 (to think)”이다. 지난 수 십년 동안, 그는 수많은 백화점과 철물점은 물론 중고상, 벼룩시장, 고물상 등 할 것 없이 그의 호기심이 이끄는 곳이라면 어디든 아랑곳 않고 면빗으로 이 잡아 내듯 찾아다니면서 평범 속 비범함을 담은 최고 품질의 무명 디자인 용품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전시회의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관람을 하다보면 마치 수많은 보배들이 널려있는 알라딘의 보물섬 동굴을 걸어다는 듯한 감흥이 느껴진다. 프랑코 클리비오가 이번 전시 『무명 디자인』 전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상속의 디자인 명품들은 약 900여점. 접어다폈다 할 수 있는 휴대용 칼, 장식용품, 다목적 장비, 손잡이형 도구, 가위, 안경테, 각종 측정용 자 같은 대부분 작지만 규모있고 쓸모면에서 유용성 넘치는 일상용품들이다.

Gewerbemuseum Winterthur; No Name Design, Franco Clivio

디자인 수집가 프랑코 클리비오의 모습. Photo: Michael Lio.

그러나 보기에 “단순한 명품은 단순하지 않다.” 이 수많은 무명 디자인 제품들을 하나같이 일관적으로 관통하는 공통사항은 언제나 제품에 담겨 있는 디자인 상의 높은 수준과 품질이다.

여기서 클리비오가 정의하는 높은 수준의 디자인이란 가장 예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모양새나 형태미 보다는 탁월하게 잘 작동하는 기능성, 적합하고 고급스러운 재료 및 재질, 그리고 빈틈없고 탄탄한 제품 조립구조를 뜻한다.

프랑코 클리비오가 강조하는 일용품 디자인에 대한 5가지 스토리

일상 사물들 대다수는 조악한 모방품이다. – 인간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방한다. 하지만 남의 제품을 모방하는 행위는 해적행위이자 도둑질이다. 열심히 일하고 시간과 자금을 투자해 신제품을 만든 개발자는 제아무리 독창적이고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 놓고도 해적판 제품에 밀려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유명한 피스카르스 가위 (Fiskars Scheren)가 바로 그런 경우다. 짝퉁 피스카르스 가위는 겉모양만 피스카르스일 뿐 잘 잘리지도 않고 손잡이도 엉망인채로 대량생산돼 전세계로 팔려나갔다. 우수한 신제품 개발자나 업체는 미연에 형태나 기능의 저작권과 특허 관리를 해서 저질 모방품으로 대량생산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Gewerbemuseum Winterthur; No Name Design

핀란스 산 피스카르스 가위. Photo: Michael Lio.

안경 – 고대 로마의 문필가 가이우스 플리니우스(서기 23-79년 활동)에 따르면 일찍이 네로 황제는 햇볕에 나가기 전 녹색 에메럴드를 눈에 대서 자외선으로부터 눈을 보호했다고 한다. 물을 채운 유리구를 사물에 대면 실제보다 크게 보인다는 원리를 응용해 중세 유럽인들은 평면볼록(平凸)렌즈를 발명했는데, 14세기 살았던 후고 드 프로방스 추기경은 이렇게 만들어진 안경을 꼈다.

그로부터 500여넌 후, 에드워드 스칼렛(Edward Scarlett)이라는 영국의 안경사가 안경대 코받침을 개발해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착용하기 편해진 안경테는 시력교정을 도와주는 역할 말고도 우리의 얼굴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돕는 패션 악세서리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Gewerbemuseum Winterthur; No Name Design

손으로 잡고 사용하는 각종 손장비들 Photo: Michael Lio.

인체공학 – 인간과 장비 사이를 연결주는 매개는 다름아닌 인간의 손이다. 헌데 사람마다 손의 크기가 각양각색이다 보니 손장비는 모든 사람의 손에 잘 맞아 사용에 무리가 없어야 하는게 디자인 제1원칙이다.

그런가하면 인간은 경험과 반복을 통해서 매우 적응을 잘 할 줄 아는 촉각기억 능력을 지닌 존재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생산되고 있는 손장비 디자인에는 사용자들의 다양한 손 크기와 촉각기억력을 고려해 보기에도 좋으면서도 사용감이 우수하도록 인체공학이론을 널리 응용하고 있다. 이렇게 발달된 인체공학론은 최근들어 가구, 필기구, 의료기구 디자인에도 활용되고 있다.

세상만사를 연결하는 전선과 케이블 – 오늘날 전선 만큼 일상 주변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사물이 또 있을까? 금속 전선에서 신기술 섬유유리와 광합성 소재 전선까지, 나노입자 크기의 미세 케이블에서 지름 수백미터의 초두께 케이블까지 참으로 크나큰 형태적∙기술적 발전을 거듭해 온 케이블은 본래 기사 갑옷을 짜거나 꿰메고 쥐덫 같은 작은 일상용품을 만드는데 사용되던 부품의 일종이었다 한다.

Gewerbemuseum Winterthur; No Name Design

전선과 케이블을 응용해 만들어진 각종 일상용품들. Photo: Michael Lio.

오늘날 가정에서 DIY를 실천하는 현대 일반인들 사이에서 조차도 자전거를 수선하고, 정원을 가꾸고, 주방기구를 만들고, 크고작은 사물들을 서로 엮고 묶어 만들고 고치는데 갖가지 케이블과 철선은 필수품이 되었다. 최근 전선과 케이블은 특히 철도, 교량, 도로 건설 등에 필요한 토목용도와 전기 및 통신 기술 발달에 유독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변함없는 최고의 재료는 자연에서 온다 – 목재, 대나무, 가죽 등 예나지금이나 최고로 꼽히는 재료는 자연에서 온 것들이다. 예컨대 목재는 유연하지만 견고하고 에너지를 제공해 주며 물에 뜨고 비교적 빨리 자란다. 교량 건설에서부터 악기에 이르기까지 목재의 용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폭넓다. 재료의 유연성과 융통성 측면에서 대나무는 그 어떤 목재에도 뒤지지 않을만큼 우수해서 특히 과학자와 공학자 치고 대나무를 하이테크 해법으로 고려해 보지 않는 경우가 없을 정도다.

『무명 디자인』 전은 5월5일 부터 10월6까지 스위스 빈터투르 산업 박물관(Gewerbemuseum Winterthur)에서 계속된다. All Photos courtesy of Gewerbemuseum Winterthur.

두 젠준의 바벨탑 세상

DU ZHENJUN. BABEL WORLD

인류역사 속에서 전해지는 가장 오래되고 원초적 전설적 건축물중 하나 바벨탑(The Tower of Babel). 과연 바벨탑의 존재는 사실이었을까 허구였을까, 과거에 존재했을까 미래에 존재할 것인가, 역사적 기록일까 인간 상상력에서 비롯된 예견일까?

Du Zhenjun. Babel World - An exhibition at the ZKM | Media Museum. Europa, C-Print, 2010, 180x240cm © Du Zhenjun.

Du Zhenjun. Babel World – An exhibition at the ZKM | Media Museum.
Europa, C-Print, 2010, 180x240cm © Du Zhenjun.

중국 현대미술의 선두주자중 한 사람인 두 젠준(Du Zhenjun, 1961년 상하이 생)  교수가 독일 칼스루헤 미술과 비이어 센터(ZAM Karlsruhe – Center for Art and Media Karlsruhe)에서 『바벨탑 세상(Babel World) 』 전을 8월 4일까지 연다.

이번 전시회에서 전시중인 작품들은 사진미술가 두 젠준이 작업하고 있는 가장 최근작들. 초대형 인화지에 인쇄한 이 사진들은 세상을 고대 바벨로니아의 신화속 건축물인 바벨탑에 비유하여 디스토피아 상태에 빠진 현대 도시 풍경과 그 속에서 기괴한 행동모드 속에 허우적대는 현대군중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벨탑 전설은 현실 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처한 위험을 경고해주기 위해 역사와 함께 재구성되고 각색되고 업데이트되어 전해지는 한 편의 설화라고 본다.  바벨탑은 경고시스템이다. 본래 수많은 언어와 사람들이 서로 갈등하는 환경 속에서 실존적 위험에 처한 유일신 종교가 처한 상황을 경고하기 위한 이야기였을 것 같다. 두 젠준은 종교적 신화에 담긴 정치적 내용을 지극히 통속적인 이미지를 활용해 작품화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렇다고 두 젠준은 종교적인 선언을 하려지도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바벨이란 종교적 심볼이 아니라 인간 문명의 위기상태(crises of civilization)에 대한 경고이자 오늘날의 사회적 파멸 또는 아포칼립스(apocalypse)의 광경을 파노라마다.

컴퓨터를 활용해 구성된 그의 초대형 포토몽타쥬 사진작품들은 히에로니무스 보슈(Hieronymus Bosch)의 공포와 판타지 회화를  바라보는 듯한 감흥을 자아내기도 한다. “글로벌리즘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냉소적 타이틀을 붙여줘도 좋을 현대사회 불지옥 광경이다.

Du Zhenjun. Babel World - An exhibition at the ZKM | Media Museum Walls, C-Print, 2011 variable dimension, 160x120cm, 240x280cm © Du Zhenjun

Du Zhenjun. Babel World – An exhibition at the ZKM | Media Museum
Walls, C-Print, 2011 variable dimension, 160x120cm, 240x280cm © Du Zhenjun

중국 상하이 대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한 후 1990년대부터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창작활동을 해 오고 있는 두 젠준은 고국 중국을 떠난 직후부터 전통적인 회화 쟝르를 뒤로 하고 멀티미디어 인터랙티브 매체로  전향했다.

수퍼 터보 파워와 스피드로 전개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와 글로벌화 현상이 낳은 디스토피아적 사회 환경 이미지들을 빌어서 두 젠준은 물리적 정신적 정체적 감옥에 갖쳐 허우적대는 딱한 현대 군중의 모습을 무자비하게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표현한다.

사진가 두 젠준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 무슨 이야기 또는 예언를 전하려 하는걸까? “별다른 의도는 없다. 난 단지 내가 느낀 것 – 두려움, 흥분, 환상, 광란 등- 을 시각화하는 것일뿐이다.”

전시 제목: 두 젠준 – 바벨탑 세상 (Du Zhenjun. Babel World) | 전시 기간: 2013년 2월9일–8월4일 | 전시 장소: ZKM | Media Museum, Karlsruhe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 되었던 곳

FLEMISH LANDSCAPE PAINTING

플랑드르 지방의 풍경화 감상하기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인 지난 2002년 봄과 여름철, 빈에 있는 미술사 박물관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부설 전시장인 하라흐 궁 (Palais Harrach) 에서는 『플랑드르 정물화』 전시를 열어서 미술 애호가들과 관광 방문객들의 큰 호응을 모았었다. 역사적으로나 언어와 문화면에서나 플랑드르 지방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미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네덜란드의 일부 영토 내지는 주변적 문화권으로 두리뭉실 취급되어 왔던게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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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반 발켄보르흐의 『볏짚이 있는 여름철 풍경 (7월 혹은 8월)』 1585년 작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그같은 점에 착안해서 빈 미술사 박물관이 기획해 전시로 부쳤던 『플랑드르 정물화』 전을 통해서 일반 대중 미술 관객들은 물론 전문가들에게 네덜란드 회화와는 구분되는 플랑드르 회화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규명하고 거장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준 교육적 성격이 강한 전시였다.

2년전의 그같은 대중 관객들의 호응도와 전시 연구 성과의 여세를 몰아서 이번에는 『플랑드르 풍경화 (Flemish Landscape Painting)』를 주제로 빈 미술사 박물관은 과연 플랑드르 풍경화의 전형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 모색의 결과를 보여주는 전시에 한창이다. 전세계 유명 박물관들과 개인 소장처들로부터 대여해 온 대표적인 플랑드르 풍경화들의 수는 총 유화 작품 130점과 스케치 및 그래픽 작품 18점.

지난번 『플랑드르 정물화』 전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가 성사되기까지 빈 미술사 박물관의 회화 학예 원구원들은 독일 에쎈의 빌라 휘겔 박물관의 루르 문화 재단 (Kulturstiftung Ruhr in der Villa Huegel at Essen)과의 연구 협력과 소장품 전시 대여 공유 협의 끝에 이 전시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보다 일찌기 이미 1988-89년에 미술관 방문객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의 『17세기 프라하 미술 (Prague around 1600)』 展과 이어 1997-98년 『브뢰겔 형제의 회화 (Breughel-Breughel)』 展도 바로 그같은 공동 전시 기획 연구의 결과였으며, 특히 이번 『플랑드르 풍경화』 전시를 위해서는 플랑드르 회화 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벨기에 안트워프 왕립 미술관 (Koninklijk Museum voor schone Kunsten in Antwerp)까지 가세했다.

우선 플랑드르란 어떤 곳일까가 궁금해 진다. 1970년대에 어린이 만화 방송을 보고 큰 세대들은 만화 영화 시리즈 『플란다스의 개 (The Dog of Flanders)』를 기억하시리라. 천사처럼 맘 착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농촌 소년 네로와 늙은 개 파트라슈의 아름답지만 슬픈 이야기를 담은 만화 『플란다스의 개』가 배경으로 했던 곳은 바로 플랑드르였다. 나무 울창한 숲과 녹색 잔디 구릉, 포를러 나무가 늘어 선 농촌길, 옹기종기 모여 선 농가 마을 – 만화 속에서 정형화되어 버리다 시피한 플랑드르 지방 농촌의 전형화된 단편적 이미지들이지만 플랑드르의 자연 풍경을 어림짐작해 보는데 아주 쓸모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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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브뢰겔 (아버지, Jan Brueghel d.Ä.) 『한 강가의 생선시장 (Fischmarkt am Ufer eines Flusses)』 1605년 작 © München, Bayerische Staatsgemäldesammlungen, Alte Pinakothek.

플랑드르 지방 영토는 오늘날 벨기에가 차지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보자면 오늘날 네덜란드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유럽 중세기에 속하는 14-15세기에는 프랑스령 하에서 농업과 양모 수출로 번성했던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1830년 혁명이 터지기 전까지 벨기에는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나폴레옹 프랑스에 걸친 외부 열강들의 지배하에서 시달렸던 고난과 아픔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치적 격동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던 플랑드르 지방에서 17세기 이후부터는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외부 정권의 압력과 끊이지 않는 종교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서 15-16세기와 같은 미술 전성기를 다시는 경험하지 못했다.

플랑드르가 14세기 이후로 적어도 17세기까지 미술 문화의 절정기를 이룩하게 되기까지에는 중세 시대 플랑드르 영토의 프랑스 군주들이 일찌기 확립해 놓았던 황실 미술 후원 전통과 양모 무역이 가져다 준 재정적 번영의 덕이 톡톡이 차지했다. 지금도 벨기에가 자랑하는 옛 역사적 무역 중심지 하알렘 (Haarlem)에서는 조각가 클라우스 슐루터와 화가 멜키오르 브로덜람이 활동했고, 북부 유럽의 양모 무역의 중심 도시던 브루게 (Brugge)에서는 중세의 거장 화가 얀 반 아이크 (Jan van Eyck)가 프랑스 황실 전속 화가로 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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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브뢰겔 (아버지 Pieter Bruegel d. Ä.) 『소떼를 이끌고 귀향하는 길 (Die Heimkehr der Herde)』 1565년 작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플랑드르 지방 화가들의 혁신적인 창의력은 또 남다르기로 유명해서 선배 대가들의 양식을 추종하고 모방하기 보다는 저마다의 전문적인 특기를 발전시키는 재주를 발휘하곤 했다.

흔히 유화 물감의 발명가로 알려져 있는 얀 반 아이크는 유화의 풍부한 색채성과 질감을 개척했다고 한다면, 이어 16세기와 17세기에 피터 브루겔과 피터 폴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성숙된 화면 구도법과 육중하고 감각적인 바로크 미술의 고전미를 완성했다고 일컬어 진다. 『플란다스의 개』의 결말 부분에서 네로가 얼어죽기 직전 추운 겨울 교회당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바라봤던 대상은 바로 안트워프 성당 안에 걸려 있는 루벤스의 그림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였다.

또 15세기말 북유럽 고딕 시대를 마무리하던 시대에 인간의 욕망과 죄악을 환상적 상상력과 기괴한 알레고리로 표현했던 히에로니무스 보슈 (Hieronymus Bosch), 17세기 영국 황실 화가로 명성을 누렸던 신동 화가 안토니 반 다익 (Anthony van Dyck), 플랑드르 정물화의 귀재 프라스 슈나이더 (Frans Snyder)는 플랑드르 출신의 거장화가들이다.

피터 브뤼겔과 그의 두 아들 피터 브뢰겔 (Pieter Brueghel the Younger (성서의 최후의 심판을 즐겨 그려서 ‘지옥 브뢰겔 (Hell Brueghel)’이라는 별칭으로 불림)과 얀 브뢰겔 (Jan Brueghel (벨벳 천을 실감나게 잘 그려서 벨벳 브뢰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정물화가로 활동)도 풍경화라는 국한된 쟝르와 상관없이 이 지방이 배출한 걸출한거장 화가들이다.

이번 “플랑드르 풍경화” 전이 유독 촛점 삼고 있는 시기는 1520-1700년까지. 그러니까 플랑드르 지방이 자리해 있는 북서부 유럽에서는 바로크 시대가 지배하고 있던 16세기초부터 18세기까지가 되겠다. 플랑드르 지방의 회화,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풍경화가 북방 네덜란드의 그것과 본격적으로 분리되어 독자적인 쟝르로 전개되기 시작한 계기는 다름 아닌 반종교 개혁 운동 (Counter Reformation). 즉, 북부 네덜란드가 프로테스탄트 신교를 인정한데 반해서 플랑드르와 브라방 지방을 포함한 남부 네덜란드에서는 신교를 배척하고 카톨릭 스페인의 지배하에서 구 카톨릭교를 고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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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베르프의 한 화가 [약 1540년 경 활동했던 마티스 쿡 (Matthys Cook(?))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가 그린 『위대한 성녀 카타리나가 있는 풍경화 (Landschaft mit der Marter der Hl. Katharina)』 © Washington, National Gallery of Artm Samuel H. Kress Collection.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가 구 카톨릭 교회 권력의 지나친 권력과 부패를 비판하고 성서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리를 재해석하면서 돌발한 기독교 종교 개혁은 거듭된 반종교 개혁 운동 끝에 북부 독일을 포함한 그 이북 유럽에서는 성공했지만 플랑드르를 포함한 그 이남 유럽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적어도 미술 분야에 있어서, 플랑드르 지방을 지배한 카톨릭 교회 전통은 프랑스 궁정풍의 위풍장대한 바로크 미술 양식이 후원받으면서 발전할 수 있었던 자양분을 제공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한 셈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제를 빌어오거나 성서 속의 일화를 해석한 종교화와 역사화가 회화 미술의 주류를 이루던 서양 미술사에서, 정물화와 풍경화 장르는 흔히 네덜란드가 탄생시킨 고유의 발명품이라고 여겨져 왔던게 상식이다. 본래 풍경화란 북부 네덜란드에서 처음 도입해 온 것으로소, 실제로 이번 전시가 플랑드르식 풍경화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1520년경인 16세기 초엽만 하더라도 플랑드르에서 풍경화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한 낯선 그림 쟝르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미술 전문가들에 따르면 풍경화가 정물화 보다 약간 앞서서 독자적인 그림 쟝르로 독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종교화나 역사화 속 한 구석에 들러리처럼 끼워넣어진채 묘사되던 바깥 자연 풍경과 실내 인테리어나 야채, 과일, 먹거리 등이 확대경처럼 한 폭의 그림 속 그 자체로 묘사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플랑드르 정물화가 인생무상 (人生無常), 절제와 검소의 미덕, 기독 성서 내용 알레고리, 거리의 활기찬 시장 광경이나 음식거리와 식기가 널려있는 풍성한 식탁 묘사로 지속적인 가내 평안과 번영 기원 등을 묘사한 교훈용 그림이었다고 한다면, 풍경화는 기독교적 요소와 자연을 모티프로 삼은 화가의 판타지 그림의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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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 – 1640) 『숲 속의 연못 (Der Teich im Walde)』© Vaduz, Sammlungen des Fürsten von und zu Liechtenstein.

오늘날 일반인들에게도 어지간히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바로크 회화의 거장 피터 폴 루벤스 (Pieter Paul Rubens)라든가 피터 브뤼겔(아버지 Pieter Brueghel the Elder) 등은 플랑드르 회화 전통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거장들이다.

이들은 다름아닌 당시 플랑드르 지방의 중심 도시던 안트베르프 (Antwerp)와 브뤼셀 (Brussel)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플랑드르식 정물화와 풍경화 전통을 구축해 나갔던 장본인들이었으며, 그들의 기량과 재간은 가히 유럽 대륙 곳곳에서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피터 브뤼겔의 걸작 풍경화들과 드로잉들 중 일부는 현재 빈 미술사 박물관이 애지중지하는 대표적인 영구 소장품들이다. 당시 16-17세기 플랑드르 화단이 그 절정의 꽃봉오리들을 만개하도록 기여한 우수한 풍경화가들은 또 있다. 헤리 멧 데 블레스 (Herri met de Bles), 얀 반 암스텔 (Jan van Amstel), 코르넬리스 마시스 (Cornelis Massys), 루카스 가셀 (Lucas Gassel) 등은 비록 네덜란드-플랑드르 미술사 전문가와 학자들 사이에서나 알려져 있는 다소 생소한 이름들이긴 하지만 16-17세기 플랑드르 풍경화가 독립적인 쟝르로 자리잡기까지 없어서는 안됐을 일등공신들이었다.

또 1570-1610년대 즉, 16세기말과 17세기초에 이르는 시기 동안 안트베르프와 브뤼셀을 거점 삼아서 그림을 그렸던 화가 작업실들이 번성했다. 화가들은 저마다 조수 화가와 견습생들을 두고 신흥 부유층 고객들의 주문에 응해 그림을 그려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히 화가들 사이에서는 제나름마다의 특기를 부각시켜서 독자적인 양식을 고집하는 전문화 현상이 전개되었다. 16세기 동안만 해도 일명 “세속 풍경화 (world landscapes)”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인기를 끌었던 보편적인 풍경화는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그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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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브뢰겔 (Jan Brueghel d.Ä., 1568 – 1625)과 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 – 1640) 협동 제작한 회화작품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묘사한 세속적 천국(Das irdische Paradies mit dem Sündenfall von Adam und Eva)』1615년 경 작품 © Den Haag, Mauritshuis.

산수 풍경 약간, 숲과 강가 풍경 약간, 마을 풍경과 인물상 약간씩 골고루 섞은 절충무난한 세속 풍경화 대신, 이 시대에 들어서부터는 그림을 주문하는 고객들은 풍경화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 풍경 속의 요소들 가운데에서 한 두가지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킨 세부화된 풍경화를 원하기 시작한게 그 원인이었다.

그래서 이16세기말-17세기초 플랑드르 풍경화는 산수 풍경화, 마을 풍경화, 바다 풍경화, 조감도식 풍경 기록화, 사시사철 풍경을 묘사한 계절 풍경화, 성서나 상상 속의 천국 풍경화, 환상 풍경화 등 전에 없이 세분화, 환타지화되었다. 미술사에서 이 시기의 플랑드르 풍경화 유행 현상을 두고 “후기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다 빈치, 미켈란젤로, 이어서 라파엘로로 이르는 전성기를 이룩했다면, 플랑드르 정물화는 17세기초에 피터 폴 루벤스와 더불어 그 절정기에 다달았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때는 시기상 서양 미술사에서는 바로크 시대로써 루벤스는 풍경화 분야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대혁신을 이룩했다고 평가받는다. 루벤스의 손재주로 인해서 풍경화 속의 대기와 자연은 마치 살아있는듯 숨쉬기 시작했으며, 이탈리아풍의 세련된 구도법과 플랑드르 회화 전통의 육중하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이 프랑스 바로크 궁중 회화를 영광되게 드높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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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반 발켄보르흐의 『겨울철 풍경 (1월 혹은 2월) Winterlandschaft (Januar oder Februar)』 1586년 작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얀 빌덴스 (Jan Wildens), 루카스 반 우덴 (Lucas van Uden), 그리고 브뤼셀 화파 소속 화가들 (로데빅 데 바아더 (Lodewijck de Vadder), 자크 다르투아 )Jacques d’Artois), 루카스 아체링크 (Lucas Achtschellink), 다니델 반 하일 (Daniel van Heil), 코르넬리스 호이스만스 (Cornelis Huysmans)는 루벤스를 스승삼아 루벤스 회화 전통을 충실하게 추종한 후계 풍경화가들이다.

모름지기 풍경화 (landscape painting)라고 불리는 그림 쟝르는 동양의 산수화 (山水畵)나 서양의 풍경화 (風景畵)든 그 출발은 화가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된 이상화 (理想化)된 경치를 화폭에 담는 것에서 출발했다. 고대 로마의 프레스코 벽화, 중국 고대의 산수화, 15세기 서양 르네상스 미술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초상화나 기록화를 위한 배경 처리적 요소로 활용되다가 16-17세기에 와서야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화가들에 의해 비로소 독립적인 그림 주제로 인정받게 되었다.

풍경화는 19세기말에 접어들면서 가장 눈부신 발전을 했다고 평가되는데, 분명 터너, 콘스터블, 세잔느, 반 고흐 등 오늘날 일반인들이 즐겨 감상하는 19세기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 풍경화는 바로 그 대표적인 결과였으니 분명 서양 풍경화의 역사에서 플랑드르 풍경화는 분수령적인 공로를 했음에 분명하다.

*이 글은 본래 『오뜨』지 2004년 3월호에 실렸던 것으로 편집되기 이전의 글을 그대로 실은 것입니다

소비사회 속 원과 각이 만들어내는 하모니

ANDREAS GURSKY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눈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연상케 하듯 원거리에서 조망하듯 바라보는 파노라마식 시점 구성과 근엄한 분위기의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작품은 흡사 번쩍거리듯 미화된 건축풍경과 실내공간이라는 ‘원’을 배경으로 얼굴 없고 무기력한 미물로 전락한 인간 군상들이 ‘각’을 이루며 사진 속 선상을 맴도는 소비 사회를 다루고 있다.

Andreas Gursky. Paris, Montparnasse. 1993. Chromogenic color print. 6' 8 3/4"x 13' 1 1/4" (205 x 421 cm). Courtesy Matthew Marks Gallery, New York and Monika Sprüth Galerie, Cologne © 2001 Andreas Gursky.

Andreas Gursky. Paris, Montparnasse. 1993. Chromogenic color print. 6′ 8 3/4″x 13′ 1 1/4″ (205 x 421 cm). Courtesy Matthew Marks Gallery, New York and Monika Sprüth Galerie, Cologne © 2001 Andreas Gursky.

현대 사진예술계의 슈퍼스타로 전세계 화랑가에서 그 주가를 한창 올리고 있는 독일 출신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제프 월(Jeff Wall, 캐나다)와 더불어 구르스키가 초대형 컬러판 인화 사진 작품을 사진예술계에 편입시키기 시작한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일반 관객들은 사진 예술하면 의레 A4 크기 내외 소형 흑백사진을 예술이라고 알고 지내왔다. 작품의 규모와 예술성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술관을 찾는 일반 관객들은 언제부터인가 대형 회화 캔버스와 사진 인화지가 제공하는 규모적 압도감에 익숙해져 버렸다.

평균 폭 2.5미터 안팎, 크게는 가로세로 길이 미터에 이르는 구르스키의 초대형 컬러 사진 작품 앞에 선 관객은 작품 속 직선과 곡선에 흐르는 광택처리와 세심히 구성한 것처럼 보이는 기하학적 구도에 일종의 장대함을 느낀다. 흡사 번쩍거리듯 미화된 건축풍경과 실내공간이라는 ‘원’을 배경으로 얼굴 없고 무기력한 미물로 전락한 인간 군상들이 ‘각’을 이루며 사진 속 선상을 맴돌며 공간을 소비한다.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를 연상케 하듯 원거리에서 바라보는 파노라마식 시점 구성과 근엄한 분위기는 비(非)개인성과 익명성을 주축으로 하던 독일 1950년대 사진 미학의 유산이다.

Andreas Gursky. 99 Cent. 1999. Chromogenic color print. 6 ' 9 1/2" x 11' (207 x 337 cm). Courtesy Matthew Marks Gallery, New York, and Monika Sprüth Galerie, Cologne © 2001 Andreas Gursky.

Andreas Gursky. 99 Cent. 1999. Chromogenic color print. 6 ‘ 9 1/2″ x 11’ (207 x 337 cm). Courtesy Matthew Marks Gallery, New York, and Monika Sprüth Galerie, Cologne © 2001 Andreas Gursky.

기하학적이면서 개인을 압도하는 자연 경관이나 건축 내외 공간을 배경으로 배치된 인간상은 더없이 작고 고독한 개체로 묘사되곤 한다. 그래서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사진 작품을 두고 분위기는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를, 방안지처럼 반복되는 격자 이미지는 1960년대의 미니멀리즘을 언급한다. 도쿄, 뉴욕, 파리, 사울파울루, 카이로, 상하이, 로스앤젤레스, 스톡홀름, 홍콩 등을 부지런히 여행하며 작가는 현대 사회의 시대상을 모색한다.

호텔 로비, 아파트 건물, 대형 스토어, 증권거래시장에 이르기까지 하이테크 산업과 교활한 시장 논리가 오가는 곳을 색과 세부 묘사를 통해 현기증 날 만큼 생생하게 포착한다. 『파리, 몽파르나스』(1993년)와 『99센트』(1999년)에 보이는 격자 이미지에서는 판에 박힌 사각형 생활 공간에서 모여 사는 인간 개개인이, 대량 인쇄된 포장 상자에 담겨 슈퍼마켓과 편의점에 내다 팔리는 화학 세제와 크게 대를 게 없다는 씁쓸함을 자아낸다.

『상하이』(2000년)가 내뿜는 금색 찬연한 누부심과 층층으로 쌓인 아찍한 원형 복도 광격에서 공허감과 무기력감이 엄습해 오는 건 왜일까? 언뜻 보기에 호화 빌딩처럼 보이는 이 내부 공간에서 과장된 빛과 인공감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최근 10년간 활용해 온 디지털 기법 덕택이다. 대형 인화를 위해서 5 × 2.178 감광한 카메라만을 사용한다는 구르스키에게 스캐닝, 인화 작업 뿐만 아니라 컴퓨터를 이용한 디지털 이미지 편집과정은 중요한 기법이다. 특히 디지털 작업에서는 픽셀 하나 하나를 정성껏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가 수백만 개로 반복되는 미세한 사각형 픽셀들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며정리할 때 이미지 데이터 처리에 바쁜 마이크로 칩들 사이에는 전자 회로가 돌고 돌아 사격형 픽셀을 미묘하게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Andreas Gursky. Shanghai. 2000. Chromogenic color print. 9' 11 5/16"x 6' 9 1/2" (280 x 200 cm). Courtesy Matthew Marks Gallery, New York, and Monika Sprüth Galerie, Cologne © 2001 Andreas Gursky.

Andreas Gursky. Shanghai. 2000.
Chromogenic color print. 9′ 11 5/16″x 6′ 9 1/2″ (280 x 200 cm). Courtesy Matthew Marks Gallery, New York, and Monika Sprüth Galerie, Cologne © 2001 Andreas Gursky.

뉴욕 타임즈 스퀘어를 이미지화한 『타임즈 스퀘어』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금색 하이라이트와 번쩍이는 화려함은 상업화된 이미지 세계를 지나쳐 미래의 사이버 이미지 세계까지 넌지시 암시하는 듯하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가 시대정신을 대벼나는 사진작가로 주목받게 된 데에는 그의 사진이 상업사진의 기술적 세련성과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1990년대의 키워드가 결합된 결정체라는데 있다.

이미 어릴 적부터 유명한 광고 사진 작가이던 아버지 밑에서 상업사진의 기술을 연마한 그는 1970년대 말 에쎈에서 슈타이너 교수의 지도로 당시 서독 최고의 전통적인 사진교육을 받았고, 다시 1980년대 초에 뒤셀도르프 쿤스트아카데미에서 베른트 베허(Bernd Becher) 밑에서 문하생 생활을 하며 사진공부를 계속했다.

미국에서는 처음 열리는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전에서는 작가가 1984년부터 최근까지 작업한 사진 작품 45점이 전시되며, 뉴욕 근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에서 5월 15일까지 계속된 후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박물관, 파리 퐁피두 센터, 시카고 현대미술관에서 치례로 순회 전시될 예정이다.

※ 이 글은 SK Telecom 사보 《열린세상》 2001년 5/6월호에 실렸던 안드레아 구르스키 현대사진 전 리뷰를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상업 화랑에서 미술관 재단으로

FONDATION BEYELER IN BA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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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 Art 25`94 부스에서 곡객과 전화 통화중인 에른스트 바이얼러 (Ernst Beyeler, 1921 – 2010). 뒤켠에 서있는 사람은 평론가 파스캴 촐러(Pascale Zoller), June 16, 1994. Photo: Kurt Wyss, Basel.

바젤 바이얼러 재단 갤러리

매년 6월 중순경이면 미술 전문 딜러, 미술관 관계자, 큐레이터, 미술 애호가, 컬렉터들이 앞다투어 모여드는 중요한 행사가 하나 있다. 아트 바젤 (Art Basel)로 불리는 바젤 아트 페어가 바로 그것. 『뉴욕타임즈』 신문이 바젤 아트 페어를 두고 ‚미술계의 올림픽’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을 정도로 아트 바젤은 세계 미술 시장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는 국제 미술계 메카이자 최대 권위의 미술 견본 시장이다.

매년 페어 운영 위윈회의 철저한 심사과정 끝에 선정된 270여 안팎의 상업 미술 화랑들이 참여하게 되는데, 이들 화랑들은 그 자체로도 국제적인 지명도가 높은 화랑들이기도 하지만 또 그에 못지 않게 일단 이 행사에 참여한 화랑들은 행사중 적잖이 짭짤한 작품 매매 수입을 올리고 돌아가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마치 숨가쁘게 돌아가는 뉴욕 증시 시장을 연상시키기라도 하듯, 거장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고가로 전세계 미술관이나 개인 컬렉터들에게 팔려나가거나 기성 및 새로 각광받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들이 그럴싸한 가격에 매매되는 소식과 입소문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이곳은 거대한 그야말로 그림과 조각이 있는 장거리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매년 빠짐없이 현대 화랑과 국제 화랑 등이 참여하여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세계에 소개하는 일에 한 몫을 하고 있다.

작아도 귀중한 미술 문화로 가득한 도시 바젤 스위스 영토 북쪽 비르즈 (Birs) 강과 비제 (Wiese) 강이 만나는 지점인 라인강 (River Rhein) 상류 부근을 끼고 발달해 있는 도시 바젤 (Basel 또는 영어로 Basle라 표기)은 프랑스, 독일, 스위스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이들 유럽 3국의 주요 관통 도시이기도 하다. 본래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라인강가의 한 고요정막한 중세 도시에 불과했으나, 16세기 북유럽에 온통 불어닥친 기독교 개신교 종교 개혁을 피해 이민온 카톨릭파 장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장인 길드 (guild)와 무역이 번성한 경제의 중심 도시로 재탄생했다. 은행업, 제약업, 직물 무역, 정밀 기계 등 현재 스위스에서 벌어지는 무역 거래의 3분의 1 이상이 인구 고작 17만여에 불과한 이 작은 도시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강한’ 도시의 전형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역과 번영의 도시 바젤은 그런가 하면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도시이기도 해서 옛 고도시가 포함되어 있는 그로스바젤과 산업집중 지대인 클라인바젤 그리고 그 주변 소고을들 곳곳에 널려 있는 크고 작은 공립 및 사람 박물관과 미술관만도 40군데가 넘는다. 국립 바젤 쿤스트무제움 (Kunstmuseum Basel)을 비롯하여 고미술 박물관 (Antikemuseum), 역사 박물관 (Historische Museum), 문화 박물관 (Museum der Kulturen) 등은 바젤 시민은 물론 이 도시 방문객들이라면 한 번쯤은 둘러 보았을 고정 관람 코스가 되었다.

바젤이 자랑하는 이 대표적인 박물관/미술관 목록 윗켠을 차지하고 있는 또다른 대표 주자는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 (Fondation Beyeler / Galerie Beyeler)인데, 특히 평소에 20세기 근현대 미술에 관심있는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유럽 도시 관광이나 문화 기행을 하면서 방문지 목록에서 꼭 끼워넣으라고 권장할 만한 곳이다. 바젤 도심에 있는 SBB 스위스 중앙 철도역에서 내려서 노랑색 전차 2번이나 6번을 잡아 타고 동북 방향을 15분 가량 여행하다 보면 바젤-리헨 (Basel-Riehen)이라는 작은 교외 고을이 나타나는데 여기가 바로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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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초 피아노의 설계로 지어진 바이얼러 재단 갤러리 건물의 전경. Photo: Mark Niedermann.

사설 화랑 주인들이 만든 20세기 미술관
고급 적색 포르피리 대리석, 철골, 유리를 주재료로 삼아 지어진 긴 장방형 건물이 푸른 잔듸밭 위에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는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 파이 퐁피두 센터 건축 디자인을 맡았던 이탈리아 출신의 국제적인 스타 건축가 렌초 피아노 (Renzo Piano)가 설계를 맡아서 건축물 자체만으로도 화재가 되었던 바 있기도 하다.

이곳이 재단 형식의 미술관으로 출범한 때는지금부터 7년전이지만 미술관 건물 공사를 완결하여 본격적인 미술관 형태를 띠고 일반인들을 위한 미술 문화 공간으로 문을 연 때는 지금부터 4년전 가량 전인 2000년도 가을이다. 힐디와 에른스트 바이얼러 (Hildy and Ernst Beyeler) 부부가 개인적으로 모아두었던 20세기 근대 미술품 특히 회화 작품들 200여점 되는 소장품을 팔지 않고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 센터 (Centro de Arte Reina Sofia in Madrid)에 특별 전시로 대여해 줬다가 예상외의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관 건립을 고려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은 피카소, 세잔느, 마티스, 반 고흐, 클레 그리고 워홀 등과 같이 흔히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회화의 거장들의 작품들이 다수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의 수준도 매우 높다. 바이얼러 미술관의 장기 분야는 20세기 서양 근대 미술이며 그래서 자연히 그 출발점을 인상주의 회화로 삼는다.

미술관으로 탄생하기 전 화랑으로 운영되고 있던 당시 바이얼러 부부가 화랑 개업 기념 전시로 1940년대 근대기 일본 목판화 그림, 인상주의 드로잉, 후기 인상주의 회화, 툴루즈-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선정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던 중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가 1910년에 그린 그림 『즉흥, 제10번 (Improvisation 10)』을 구입하는 것을 계기로 바이얼러 갤러리는 단숨에 20세기 미술 분야에서 주도적인 화랑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피카소 같은 유명한 여럿 거장 화가들과 개인적인 친분과 우정을 구축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값진 근대 명작들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사적 통로와 노하우를 더 근본적으로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파키소와 클레 컬렉션은 이곳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명품들이라고 하는데, 이 미술관의 주 상설 전시실을 보면 이 두 부부의 화가들과의 개인적인 친분과 소장품 관리에 관한 취향과 안목을 한 눈에 확인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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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얼러 재단 갤러리 내 모네 전시실 광경. Photo: N. Bräuning.

철도역 노동자 아들에서 성공한 화랑 주인이 되기까지
힐디와 에른스트 바이얼러 부부가 그처럼 20세기 미술의 보물들을 다수 차지하게 되기까지는 그 두 사람이 지난 50년 넘도록 개인 화랑을 운영해 오는 가운데 미술계와 미술 시장에 직접적으로 접하면서 미술품 매매에 관여할 수 있었다는 개인적인 잇점이 크게 기여했다. 화랑업을 운영하다보면 외부 일반인들은 웬만해서 접촉하기 어려운 개인 소장자들이나 작품 매입 경로에 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유독 값지다고 판단되는 작품들은 화랑 고객들에게 팔지 않고 창고에 보관해 두었던 것이 모여 오늘날 바이얼러 미술관 컬렉션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바이얼러 부부는 고백한다.

그러니 미술 컬렉션을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잘 알고 지내면서 그림을 사고파는 사이의 화랑 주인들이 고객 모르게 창고 뒤켠에 숨겨두지 않았나 눈여겨 보시라고 권할만도 하다. ‚그 거장의 작품이 아직도 더 남은게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오늘날까지 세계 국제 미술 경매 시장에서 그 수요가 끊이질 않고 틈틈이 낙찰대 옆에 등장하는 것도 바로 비밀스런 미술품 유통 경로 속에서 돌고도는 미술품들의 생리 때문이다.

에른스트 바이얼러 씨는 바젤 철도역 노동자의 아들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키워온 예술에 대한 관심과 사업 수완을 일찌기 깨닫고 대학에서 미술사와 경제학을 공부했다. 학업중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고서 서점에서 일하던 그는 1945년 서점 주인이 갑자기 병사하자 고서점을 이어받아 운영하다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사업 수완을 동원해 1951년부터 상점 간판을 바이얼러 갤러리로 바꾸어 달고 본격적인 화랑업으로 뛰어 들었다고 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전흔으로 황폐한 유럽에서 20세기 거장들의 명품 회화 구입과 수집을 한 바이얼러 부부의 그같은 추진력은 당시 1950년대 초엽 상황으로 볼 때 분명 선견지명가적이었다.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과는 별도로, 지금도 바젤에 가면 옛 고서점이 있던 보임라인가쎄 거리 9번지에는 바이얼러 갤러리가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도 매년 아트 바젤 미술 박람회에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참여해 온 우량 사설 화랑이기도 한 그들의 바이얼러 갤러리는 20세기 근현대 회화는 물론이려니와 최근 유럽과 미국의 유력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거래해 가면서 그들의 재단 미술관의 소장 창고 살찌우기에 여념이 없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미술사 책을 장식하고 있는 여러 현대 미술가들 중에서도 유독 바이얼러 미술관이 집중적으로 수집한 분야는 1970년대 주류 일맥인 개념주의 미술과 그 이후 198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표현주의 계열 회화 와 소수의 조각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위아래가 전복된 (up-side-down) 캔버스 그림을 트레이드마크로 하는 옛 동독 출신 화가 게오르크 바젤리츠 (Georg Baselitz), 음울하고 황폐한 갈색 혹은 회색 물감을 거대한 규모의 캔버스에 두텁게 발라 그리는 독일의 안젤름 키퍼 (Anselm Kiefer) 그리고 1960년대에 이탈리아에 불어닥친 아르테 보베라 (Arte Povera) 운동의 기수로서 고대 그리스 신화를 모티프로 삼아 개념적인 작품을 구성한 루치아노 파브로 (Luciano Fabro) 등의 회화작들은 특히 바이얼러 부부가 아끼는 이 컬렉션의 대표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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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느 『노랑색 의자에 앉은 세잔느 아내 (Mme Cézanne au fauteuil jaune)』 1888-90, oil on canvas, 80,5 x 64,5 cm © Fondation Beyeler.

화랑업을 통해 얻은 바이얼러 부부의 미술 컬렉션 철학
바이얼러 미술관이 취하고 있는 20세기 및 21세기 미술에 대한 시각은 다소 보수적이라는 느낌이 들정도로 조심스러워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20세기 미술사가 이미 대체로 정리가 된 오늘날에 와서 볼때 바이얼러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20세기 작품들은 서양 근대 미술사 개론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작가 위주별로 구성된 컬렉션 구성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문적으로 다루는 분야가 20세기 근대 미술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가장 최근 벌어지는 현대 미술의 실험적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바이얼러 미술관이 최근 미술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 미술에 대해 취하고 있는 조심스러운 태도는 그들이 1년에 한 두회씩 전시로 부치는 특별전들과 미술관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잘 나타난다. 과거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회들로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아놀드 쇤베르크의 색과 음악의 만남』 전, 『로이 리히텐스타인』 전, 크리스토와 쟝 클로드의 『나무 포장』 전, 『세잔느와 모더니즘』 전, 『마크 로드코』 전, 『칼더와 미로』 전 등 소장품 위주의 작가별 주제 전시가 주를 이루었다.

지난 199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전세계에는 현대 미술계에는 젊고 활기넘치는 신진 미술인들을 양성하고 발굴하는 실험성 강한 미술 전시장과 대안적인 전시 공간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그같은 전지국적인 문화 현상은 바젤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보다 실험성 강한 최첨단 스위스 현대 미술계와 국제적인 특별 전시를 보려면 아무래도 바젤시가 운영하는 쿤스트할레 바젤 (Kunsthalle Basel)과 쿤스트할레 발젤란트 (Kunsthalle Baselland)와 바젤 출신의 금융계 거부인 에마누엘 호프만 (Emanuel Hoffmann)이 건립한 사설 바젤 현대 미술관 (Museum für Gegenwartskunst Basel) 을 방문해 볼 것을 권장할 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바이얼러 미술관이 현대 미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단정짓는 것은 섣부른 오해이다. 실제로 바이얼러 부부는 마르쿠스 브뤼덜린 (Markus Brüderlin) 큐레이터 겸 미술 평론가를 두고 기존 소장품 관리를 맡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떠오르는 유망있는 현대 미술 작품 구입에 관한 자문을 얻기도 한다.

다만 최근 현대 미술계에서 스타급으로 치솟으며 유명세를 누리는 젊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 선뜻 투자를 하기 보다는 기성 미술사와 이론에 기반하여 적어도 과거 20-30년에 걸친 학문적 검증과 시장적 가치를 인정받은 미술품을 구입하여 소장 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에 더 치중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실제로 바이얼러 부부는 현대 미술에도 관심을 두고 있으며 아직 소수이나마 현대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직 어느 작가의 무슨 작품을 갖고 있는지를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있는 상태이다. 요즘처럼 현대 미술가들의 명성과 시장적 가치가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에 자칫 현대 미술에 대한 투자는 투기로 변질될 위험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바이얼러 부부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능히 짐작을 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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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얼러 재단 미술관 건물 출입구.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이 건물은 아르헨티나에서 수입해 온 적색 포르피리 대리석, 대형 통판 유리, 통벽이 특징이다. 배경에 보이는 녹원은 베로버 공원 (Berower Park). Photo: T. Dix.

과거 1980-90년대에 걸쳐 지금까지 하강과 상승 곡선을 타고 전개된 경제의 파도 속에서 특히 영미 문화권에서는 기업 미술 소장붐이 전에 없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나라 재정이나 공관 지원으로 운영되는 것으로나 알았던 박물관과 미술관들 말고도, 초국가적 대기업들, 유명 법률 사무소, 광고 제작사에 이르기까지 문화 투자, 세금 환원, 기업 이미지 쇄신 등을 내세워서 미술 작품을 구입에 대거 투자한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학자들도 입을 모아 정의했던 것처럼 고래로부터 미술 작품이란 그 주인의 사회적인 신분과 권력 그리고 남다르게 탁월한 미적 취미를 한껏 뽐내기 위한 ‚신분 차별화 (status distinction)’의 수단이어 왔다. 고대 시대 전쟁에서 이긴 군대는 패배한 상대 나라의 값진 보물과 문화 유산을 약탈해 가져오는 것으로 권력자의 위세를 자랑했고,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메디치가가 그 고위한 가문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을 키우고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 미술가들은 다른 직업으로 연명하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누구나 메디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이얼러 부부의 미술 컬렉션 역사와 그들만의 소장 철학은 미술을 사랑하고 미술품 컬렉션에 관심있는 많은 이들에게 현명한 미술품 수집에 대한 첩경을 제시해 줄지도 모른다. All Photos courtesy: Fondation Beyeler.

* 이 글은 본래  『오뜨 ( HAUTE)』 지 2004년 7월호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영원한 에로스

Klimt and Women

클림트와 연인들 전 | 2000년 9월20일-2001년 1월7일 |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클림트와 여인들 전〉은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언젠부턴가 클림트는 모네, 반 고호, 피카소 등과 함께 미술상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작가의 대열에 서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에 대해 잘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Gustav Klimt Judith I, 1901 Öl auf Leinwand 84 x 42 cm

구스타브 클림트 <유디트 I (Judith I)> 1901년 작, 캔버스에 유채, 84 cm × 42 cm Courtesy of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Wien.

196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첫 구스타브 클림트 회고전에 이어, 1986년 뉴욕 모마(MoMA)에서 비엔나 모더니즘 미술을 총정리한 〈비엔나 1900전〉을 계기로 19-20세기 전환기 비엔나 모더니즘 운동은 다시금 미술사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그에 힘입어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는 금빛찬연한 장식성과 관능성 짙은 회화작품으로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을 맞아 갤러리 벨베데레는 근대 비엔나의 간판적인 화가이자 세기전환기 빈 분리파 (Wiener Sezession) 운동의 선두지휘자 클림트의 작품들을 한데 모은 〈클림트와 여인들 전〉(2000.9.20∼2001.1.7)을 기획했다. 클림트 미술의 평생 핵심주제는 여성이었다. 콧대높은 상류계급 귀부인에서 청순한 시골 소녀에 이르기까지 클림트 미술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들은 금색찬연한 장식과 화사한 색채를 한 몸에 받으며 캔버스 위에 재현되곤 했다.

방년 14세되던 해인 1876년, 비엔나 미술공예학교 (Kunstgewerbeschule, 현재의 빈 응용미술대학 (Universität Angewandte Kunst Wien)의 전신)에 입학할 만큼 일찌기 특출난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특이하게도 작가 자신이나 작품에 관한 문서상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았다. 문자언어에 대한 병적 거부감을 지녔던 구스타브 클림트의 미술인생은 그래서 오늘날까지 상당부분 규명되지 못한채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체코계 중하급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모친과 친여동생들의 집에서 동거했다고 알려진다. 또 평생 미혼이었으면서도 14명이 넘는 사생아를 낳은 아버지였다는 사실에서 그가 여성을 향한 오묘한 애증과 긴장으로 갈등했던 인물이었을 것임도 짐작케 해 준다.

동시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분석학을 빌어 클림트의 창조적 성과는 개인사적 배경과 성(性)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예술적 통로로 대리 충족되어 발현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클림트가 즐겨 사용한 여성 도상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에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가부장적 부르조아 비엔나 사회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여권의식이 크게 기여했다. 자아의식이 강해지는 신여성을 바라보던 당대 남성들이 여성혐오증과 거세강박증을 토로했던 시대현상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 겸 후원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들도 여성이었다. 클림트가 <철학>(1900), <의학>(1901), <법학>(1903∼7)이란 제목으로 비엔나 대학에 제시한 천정벽화들이 선정성 시비에 휘말렸을 때 여류 언론인 베르타 추커칸들 (Berta Zuckerkandl)과 패션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 (Emilie Floege)는 클림트의 충직한 후견인 겸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전시는 1900년도 전후기 모더니즘 전개와 더불어 여성 후원자와 클림트의 관계를 고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수 없다.

1901년 비엔나 대학 천정벽화 논쟁은 여성의 누드와 도덕성이라는 이슈를 겉으로 내세워 시작된 정치적인 논쟁이었다. 클림트의 근대적 미학을 지지하는 빌헬름 폰 하르텔과 미술사학자 프란츠 비코프 대(對) 보수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요들이 불붙인 미학적 논쟁은 곧 사회주의 대 보수 및 우익주의자들 간의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다. 예술가적 자존심과 독립성에 크게 상처입은 클림트는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후퇴하여 자신의 입지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른바 클림트 미술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동안에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양식화된 장식성으로 중화된 작품이 주목할만 하다. 빈 분리파 운동과 발맞추어 공예분야에서 전개중이던 비엔나 공예운동 (Wiener Werksttaete)에 참여하면서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습득한 금속공예 기술을 환기하게 되었던 한편, 이탈리아 라벤나를 여행하면서 산 비탈레 교회당의 비잔티움 미술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유딧 II>(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178×46cm, 1909, 베네치아 근대미술 갤러리아)는 기하학적 문양의 아르데코 양식이 유난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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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클림트의 <다나에(Danaë)> 1907년 작, 77 x 83 cm Courtesy of Galerie Würthle, Wien.

그보다 이미 8년전 완성된 <유딧 I (유딧와 홀로페르네스)>(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84×42cm, 1901년 경.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뼈가 앙상한 얼굴과 올가쥔 손아귀를 한 살로메는 쾌락을 선사한 댓가로 파멸과 죽음을 몰고오는 공포의 에로스로 정교하게 묘사된 한편, 인물 주변에 양식화되어 나타난 기하학적 장식은 금속공예와 비잔틴 양식의 산물이다.

한편 <다나에>(1907)의 여성상에는 복수심과 남성혐오적 이미지는 오간데없이 사라진 대신 사랑과 온기에 목말라하는 감미로운 젊은 여성으로 형상화됐다. 클림트가 드디어 여성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칼 E. 쇼스케는 해석한다. 이를 더 뒷바침이라도 하듯, 클림트의 말년작인 <아담과 이브>(캠버스에 유채, 1917-1918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는 에로스, 고통, 죽음을 향한 화가의 공포가 일시에 해소된 듯 평온하고 아늑한 분위기만을 풍기며 2차원적으로 처리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의 1890년대 고전적 도상과 포즈로 그려진 여성 초상 작품과 동시대 마네, 마카르트, 쉴레, 호들러, 뭉크, 코코시카의 대표적 여인 초상을 나란히 한자리에 전시하는 이번 전시는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 의의를 내걸고 있다. 인기 화가의 미술전시회를 찾는 일반 대중 관객들 못지않게 모더니즘 시대의 여성 예술후원인과 예술인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미술사학도들에게도 영감을 제공할 만하다.  박진아 | 미술사 2001.1.

* 이 글은 본래 《월간미술》 2001년 1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피어라 고통과 죽음의 꽃이여!

MUNCH BY HIMSELF AT MODERNA MUSEET STOCKHOLM

에드바르트 뭉크의 자화상을 통해 본 근대 여명기

올해 2013년, 20세기의 거장 에드바르트 뭉크를 낳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는 이 화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특별전시와 문화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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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 화가의 모습을 담긴 <자화상> 1886년도 작. Nasjonalmuseet for Kunst/Najonalgalleriet, Oslo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뭉크 미술관에서 도난 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뭉크 그림 밖에 없습니다.
“이건 아주 비싼 밍크 코트예요. 절대 도난당하는 일 없이 잘 보관해 줘야 해요.” 한 돈많아 보이는 몸집 큰 노여인이 외투를 벗고 미술관 전시장을 입장해 달라는 미술관측 지시를 받고는 뭉크 미술관 입구 물품보관소 직원을 향해서 모피 코트를 건데며 불평을 토로했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뭉크 미술관의 한 고위 직원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쏘아 붙였다. “부인, 이 미술관에서 도난 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뭉크 그림 밖에는 없답니다.”

화가 뭉크에 대한 노르웨인 국민들의 크나큰 자부심이 느껴지는 이 짤막한 농담은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에서 일한 적 있는 한 미술관 직원으로부터 들은 잊지 못할 일화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지날달 3월 6일 [2005년], 노르웨이 남부 지방에 있는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뭉크의 진품 그림 석점이 도난을 당해 홀연히 사라졌다가 하루만인 이틀만에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 온 사건이 벌여져서 전세계 미술애호인들을 놀라게 했다. 뭉크 그림 도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뭉크는 고가 미술품 도난 사건 목록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단골 손님이다.

이미 1994년에는 전문 미술품 도둑 두명이 사다리를 타고 오슬로 국립 갤러리 창문을 통해서 침입해 『절규 (The Scream)』를 훔쳐 간 일이 있었고, 그보다  일찌기 1990년에도 같은 박물관에서 『마돈나 (Madonna)』가 도난당했다가 경찰의 추적 끝에 오슬로 국립 갤러리 품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발생했었다. 그리고 또다시 작년[2004년] 8월 말에는 평상복 차림의 도난꾼 둘이서 환한 대낮에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 느긋하게 걸어 들어가 뭉크 그림 2점을 버젓이 훔쳐 도망친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뭉크 미술관의 보안 수준은 뭉크 작품에 대한 미술관 측의 드높은 자부심과 애정이 무색할 정도로 크게 뒤떨져 있었음이 또다시 노출된 셈이 되었다.

작년 발생한 이 사건이 남긴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도난당한 두 작품이 뭉크의 가장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그 유명한 『절규』와 『마돈나』라는 것과, 범인들은 아직도 잡힐 낌새없이 범행의 실마리조차 묘연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들의 가격은 이미 돈으로 살 수 없는 국보급이 된지 오래다. 현재 미술 시장의 시세로 추정하자면 『절규』는 9천만 달러 (유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9백억원) 그리고 『마돈나』는 1천8백만 달러 (약 1백8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뭉크 작품 도난 사건은 노르웨이의 국가적 체면이라는 면으로 보나 작품 시세 면으로 보나 막대한 손실을 안겨준 안타까운 사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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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속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Hell)』 1903년 작. Munch-museet, Oslo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비록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모양새가 되긴 했어도 미래의 또 다른 도난 사건을 방지하겠다는 차원에서 뭉크 미술관은 현재 미술관 건물 개축 공사에 한창이며 올 가을에 새로운 모습과 강화된 보안 체계로 무장한 후 뭉크 미술관을 재개관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유럽 최북단 대륙인 스칸디나비아 땅의 맨 왼쪽에 자리해 있는 북극광과 절묘한 피요르드 해안 경치를 자랑하는 나라 노르웨이가 가장 아끼는 국가대표급 문화재는 단연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년)이다.

뭉크는 노르웨이 특유의 감성과 기질을 표현한 가장 노르웨이적인 화가임과 동시에 서양 근대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가장 세계적인 예술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1963년에 처음 문을 연 이래 오늘날까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명물로 남아 있는 뭉크 미술관 (Munch Museet)은 1944년 화가가 사망하기 직전에 오슬로 시에 그가 수중에 보관하고 있는 작품들 일체를 기증한 것들을 모조리 소장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 뭉크 미술관이 건물 개축 공사를 하고 있는 기회를 이웃나라 스웨덴에서는 이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뭉크의 여러 대표작들과 특히 화가의 자화상들을 대거 대여해 와 이번 『뭉크 자신이 그린 뭉크 자화상 (Munch by Himself)』 展을 기획했다. 2월19일부터 오는 5월15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국립 근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에서 대형 전시로 올려지고 있는 이 전시는 뭉크의 자화상이라는 주제로는 최대 규모로 열리는 특별전이라는 점 때문에 미술관객들과 언론의 관심도 잔뜩 불러 모으고 있다.

절망, 고통 그리고 죽음 – 뭉크의 영원한  영감의 원천
화가 뭉크의 작품 세계를 총집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작 『절규』 만을 보더라도 화가의 내면에 들끓고 있던 경련하는 내적 심리와 공포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으리라.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가 근대 예술 철학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예술 작품이란 모름지기 소리쳐 절규 (Das Geschrei)하지 못하면 더 이상 예술 작품으로서의 표현에 실패한 것고 다름없다”고 한 지적을 뭉크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작품이 삼아야 할 핵심 모티프로 삼았다. 뭉크의 『절규』(1893년)가 20세기 근대 시대에 사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감과 고통을 그림으로 분출시킨 가장 폭발적인 표현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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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1892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Thielska Galleriet, Stockholm.

서른살 무렵의 화가 뭉크는 친구 2명과 나란히서 저녁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저녁 일몰 시간, 오슬로 시내 하늘과 피요드르 해안 수평선은 갑자기 검푸른 색으로 변하고 바다물과 수평선은 온통 시뻘건 피와 혓바닥처럼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다리 위를 걷던  뭉크는 갑자기 피로와 구토감을 느끼면서 쓰러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다리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화가는 자신의 신체를 관통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고 동시에 자연 속에서 절규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1892년 뭉크의 자화상 『절망 (Despair)』과 이듬해인 1893년에 완성된 불후의 명작 『절규』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두 손으로 파랗게 질려 길게 늘어진 머리통을 붙잡고 괴성을 질러대는 그림 속의 주인공은 고뇌하는 근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뭉크 자신의 모습인데, 강렬한 색과 진동하는 듯한 곡선을 통해 표현된  절규의 음파는 서양 미술사에 기리남을 ‘청각의 시각화’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이미 알만한 미술 애호가들은 알고 있으시겠지만 『절규』라는 제목으로 화가가 그려 남긴 진품 회화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 지는 것들로는 현재 2점이 남아 있는데 한 점은 뭉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가 작년 도난당한 것이며 나머지 한 점은 지금도 오슬로 국립 갤러리에 영구소장되어 있다.

“… 인생이란 폭랑이 불어치는 광활하고 광폭한 바다에 홀로 표류하는 한 척의 낡은 배…배가 난파하면 모조리 네 탓이며 그에 대한 죄로 지옥에서 영원히 불탈 지어다. …”

화가 뭉크에게 인생이란 나약한 신체와 영혼이 헤쳐가야할 무력하고 불안하며 외로운 여정이었다. 19세기 후반기 유럽의 대기를 온통 휩쓰고 있던 낭만주의 (Romanticism)나  감상주의 (sentimentalism)적 체취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화가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격동하는 유럽의 정황 속에서 어딘가 감상적이고 낭만적이며 내면적 환상을 외부로 강렬하게 표현할 것을 사명을 삼았던 이른바 표현주의 계열을 미술을 추구한 화가들로는 뭉크 뿐만 아니었다.

예컨대, 네덜란드 출신이면서 젊은 시절 성직자로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표현주의 미학의 계보를 일으킨 반 고흐 (Van Gogh)라든가, 기괴하고 으스스한 가면 이미지로 고전적 표현주의 회화 세계를 새롭게 개척한 벨기에 출신의 제임스 앙소르 (James Ensor),  그리고 니체의 ‘질풍노도 (Sturm und Drang)’로 대변되는 낭만주의와 허무주의 철학을 질병, 공포, 죽음이라는 주제로 승화시킨 스위스 출신의 페르디난트 호들러 (Ferdinand Hodler) 등은 저무는 구시대를 뒤로 하고 근대라는 신시대를 대비하며 불안에 떨던 세기전환기 근대인들의 집단적인 노이로제 상태를 표현한 동시대 화가들이다.

같은 시기, 미국의 대문호 에드가 앨런 포우 (Edgar Allen Poe)와 빈의 낭만주의 작곡가 바그너 (Richard Wagner)도 세기 전환기의 긴장을 유사한 감성으로 표현했고,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근대인들의 억압된 무의식과 성의 세계를 탐구하는데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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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가면 아래에 서있는 화가 자화상 (Self-portrait Beneath a Female Mask)』 1893년 경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80년이라는 짧지 않은 예술 인생을 불태운 화가의 일평생은 극적이라면 극적이라 할 수 있는 시련과 절망을 경험했는다고 한다. 그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친 이미저리와 상징들은 화가의 매우 개인적인 성장 경험과 내면적인 트라우마의 결정체들이다.

특히 뭉크는 자신을 그토록 평생 동안 고뇌로 몰아 넣었던 내적 갈등과 고통의 근원을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비극적인 가족사에서 발견했던듯 하다.

그는 “성직자와 바닷사람은 농담을 불허하는 심각한 사람들”이라고 꼬집었는데, 여기서 성직자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농부 출신의 모친을, 바닷사람이란 해군 군함의 의료장교 겸 지휘관으로 일했던 부친을 각각 지칭하는 것이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폐결핵으로 앓던 농가집 출신의 23세 하녀와  44세난 중산계층 출신의 중년 남성의 결혼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결합이었던 만큼 계급적 격차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 긴장의 관계였다. 그나마도 뭉크의 부모는 기독교라는 정신적 영혼적 유대감으로 결혼 생활과 가족을 이끌어 나갔는데,  청교도적 윤리를 유독 강조했던 기독교식 집안 교육은 이후 화가 뭉크의 사생활 속의 정신적인 억압과 성적인 죄책감으로 이어져 그림으로 표현되곤 했다.

특히 여성을 향한 화가의 내면적 갈등은 그의 그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 신비스럽고 광채가 나는 흰색 드레스 차림을 한 젊은 여인은 순결한 처녀,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있거나 붉은 안색을 한 여인은 정욕과 파멸을 부르는 성숙한 여인, 그리고 검정색 드레스와 창백한 안색을 한 초쵀한 여인은 인생과 남성관계 끝에 인생의 쓴맛과 비탄을 경험한 닳고닳은 여인으로 해석되곤 한다.

예컨대 그 유명한 뭉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사춘기 (Puberty)』(1894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나체의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 덧없이 사리지고 말 사춘기 소녀의 가녀리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소녀 옆 켠에 도사리고 있는 짙은 회오리 덩어리는 이 가련하고 청순한 소녀를 뇌살적이고 파괴적인 성숙한 여성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893년 작인 『여인 가면 아래에 서있는 화가 자화상』이라든가 1894년부터 무려 4년에 걸쳐 그려진 『살로메 장절』은 살로메=파멸의 여인이라고 말하려는 화가의 자신의 공포감을 표현한다. 이것은 당시 수많은 근대기 남성들을 공포로 몰아 놓었던 신여성 사상과 파멸을 부르는 여인 (팜므 파탈, femme fatale) 혹은 거세 공포증에 대한 불안감을 아동애 (pedophilia)적인 이미지를 빌어서 현실 속의 여성 관계로부터 도피해 보려던 남성 심리의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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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죽음 II > 1907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뭉크 그 자신도 실제로는 어린 처녀를 향한 동경과 애욕을 느꼈지만 동시에 성숙하고 요염한 여인으로 부터는 긴장과 공포를 느꼈고, 모친과 자매의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불행했던 성장과정을 한탄하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은 기피했으며, 그당시 다른 재능있는 미술가들과는 달리 생전 어지간한 명성과 부를 누렸으면서도 내적 고뇌와 병치레로 두문불출 거의 실내에 갇혀 지냈다.

비극의 인연으로 끝난 중년의 매혹녀 툴라 라르센 (Tulla Larsen)과의 결별을 표현한 그림 『마라의 죽음II (The Death of Marat II)』(19907년)에 보면, 화가는 이제 고통과 무기력을 초월하여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어쨋거나 결국 그는 그 모든 내적 갈등과 불안감을 화폭을 통해서 표현한 소심한 샛님 화가 선생이었던 게다.

16살난 청년 뭉크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해인 1880년. 당시 노르웨이는 어딘가 두서없어 보이지만 놀라운 천재적 잠재력을 잔뜩 품은 이 화가 지망생의 재능을 발굴하기에는 너무 좁고 지엽적이었다. 보다 큰 세상에서 미술을 배워보자는 생각에 청년 뭉크는 우선 독일로 건너가서 엄격한 독일식 아카데미 미술 교육을 접하지만 곧 표현적인 한계를 느끼고는 파리로 건너갔다. 이렇게 뭉크는 20대 중반부터 미술의 중심 도시 파리에서 보고 들은 새로운 사상에 ‘자연을 묘사하는 그림이란 화가의 내면이 표현되어야만 가치가 있다’고 한 화가 고유의 표현주의 철학이 버무려진 화풍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화가는 자기가 넓은 세상에서 배워온 미술 세계를 개인전을 통해서 노르웨이 화단에 꾸준히 소개하곤 했지만 모국의 화단은 선구적이고 무서울 정도로 솔직대담한 뭉크의 표현주의 미학을 이해해 주질 못했다고 한다. 특히 1890년대에 뭉크는 그같은 좌절감을 반영이라도 하듯 어린 시절 경험한 모친과 누나 그리고 부친의 오랜 병고와 죽음이 남긴 충격을 반복해서 그림으로 남겼다. 당시 유럽에서는 병자의 침실을 묘사한 그림들이 심심치 않게 그려질 정도로 병실 및 임종 광경 그림이 유행을 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 멜랑콜리와 신비의 전율을 강도높게 전달한 화가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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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Vampire)』 1895년 작 © Munch-Museet/Munch-Ellingsen gruppen/BUS 2013. Photo: Prallan Allsten /Moderna Museet.

1910년대, 뭉크는 특히 독일 화단과 화가 집단에서 깊이 선망되는 외국인 화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미술사에서 뭉크를 유럽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가 당시 여러 독일 표현주의파들에 끼친 영향력 때문이다.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는 이미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높이 칭찬했으며, 또 그런가하면 뭉크는 역시 독일 표현주의자인 프란츠 마크 (Franz Marc)로부터 보다 강렬한 색채 감각을 배워왔다.

뭉크가 독일 화단에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때는 1892년 베를린 화가 연합의 주최로 열린 뭉크 개인전을 통해서 였는데, 이 전시는 일명  ‘스캔들 전시’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베를린 화랑계를 찬반의 논란으로 몰아 넣었다. 저자세 일관의 얌전한 품성의 뭉크의 주변에도 남몰래 도사리고 있던 숙적이 있었는지라 독일의 보수주의파 고전 화가로 부터 뭉크의 그림은 타락스런 프랑스적 취향으로 푹 젖은  ‘퇴폐미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 소동은 프랑스-독일간의 프로이센 전쟁을 끝으로 유난히 첨예해진 당시 프랑스와 독일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던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전시를 둘러싼 ‘스캔들’은 뭉크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안겨주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논란과 화재를 몰고 다니는 전시회는 뭇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법인지, 뭉크는 이 전시를 끝으로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지만 불티나게 팔려나간 입장권 매출 덕분에 전에 어느새 돈주머니 두둑해진 ‘성공한’ 화가가 되어 있었다.

진정 베를린은 뭉크가 화가로서 성공하는데 분수령적인 순간을 마련해준 행운의 도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뭉크가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정붙이며 살았던 독일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든 운명의 도시이기도 했다. 어느새 베를린에서 떨친 뭉크의 명성은 고국에까지 알려져서 19세기말 노르웨이 근대 극문학의 기수 입센 (Henrik Ibsen)의 상징주의 문학에 불을 치폈으며 그 결과 입센의 희곡대본 『유령들』과 『헤다 가블러』를 위한 연극 무대 장치 디자인까지 했던 것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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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1906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특히 뭉크의 10여년 동안의 독일 체류기는 그로 하여금 초상화라는 회화 쟝르를 실험하는 기회를 제공해준 값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뭉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돈많은 독일 미술애호가들과 후원자들은 뭉크에게 개인 및 가족 초상화를 주문해 그려가곤 했는데, 특히 그들은 뭉크 만이 포착해 낼 수 있는 심리적 깊이와 통찰력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를린에서의 독신생활과 과중한 주문 작업에 밀려 지내던 뭉크는 점차 억누를 수 없는 정신불안증을 이겨내기 위해서 싸구려 와인과 독한 환각주인 압생트에 의존해 보지만 결국 심각한 정신분열증과 알코홀 중독으로 몸과 영혼이 피폐해진 나머지 코펜하겐의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에 이르렀다. 1906년도에 그려진 『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Bottle of Wine)』 속 화가는 주변 환경 속에 눌리고 지쳐서 시린 고독과 무기력으로 시름하고 있다.

전유럽이 제1차대전이라는 격동과 비극의 시대를 항해하고 있을 1910년대, 뭉크는 입체주의나 미래주의 처럼 당시 파리에서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던 미술 신사조에 접하면서 피카소와 더불어 거장 화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와서 작업을 하고 있던 50대의 뭉크는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젊고 아름다운 여성 모델에 빗대어 그림으로 그리는 것으로써 또다른 제2의 자아를 탐구하고 있었다. 중년을 넘어선 화가는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천착해 오던 시대적 불안감, 고통, 불안감이라는 주제를 더이상 즐겨 다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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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 밤에 배회하는 자 (Self-Portrait. The Night Wanderer)』 1923년부터 제작 미완성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마라의 죽음』 시리즈에는 젊은 여성 모델이 꽃다발 속에 숨겨둔 칼로 화가를 찔러 죽일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암시가 넌지시 담겨 있다. 특히 뭉크는 생애 말년 동안 그 어떤 다른 쟝르의 그림 보다 자화상을 즐겨 그리곤 했는데, 그의 자화상들에는 어김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든 남성과 가혹하고 음산한 기다림이 서려있음이 느껴지곤 한다.

『자화상 – 밤에 배회하는 자』 속에 나타난 주인공은 창문으로 대변되는 지독한 고독감과 불안감으로 잠 못이루는 나이든 남자의 모습으로 은밀하게 묘사했다. 화가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에 완성된 『시계와 침대가 있는 자화상』(1942년)에는 시계와 침대 사이에 서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을 임종 침대 옆에서 죽음의 순간을 대기하는 노인네로 묘사했다.

노르웨이는 지금도 이 나라를 뿌리채 사로잡고 있는 ‘뭉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뭉크가 세상을 뜬 1944년 이후로 노르웨이는 뭉크에 필적할 만한 천재 미술가의 탄생은 다시 보지 못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가 미술사에 남긴 시각적 전율과 위력은 대단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가르침 그대로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예술인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존재와 죽음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불안과 실존적 문제를 탐구하는데 바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Images coutersy: 스웨덴 스톡홀름 모데나 무제에트 근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 in Stockholm, Sweden).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2005년 3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