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풍경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作 <겨울> (Eislauf), 1906년, 목재펄프판 위 검정 판지에 템페라, 49.4 x 65 cm. 소장: 스위스 베른 미술관(Kunstmuseum Bern). 1979년 2월 니나 칸딘스키 기증

추운 겨울철 어느날 공원 내 야외 빙상장에서 사람들이 스케이트 타기를 하고 있다. 하늘은 구름이 낮게 깔려 마치 먹구름이 낀듯한 전형적인 알프스 이북 유럽의 우중충한 잿빛이다. 화면의 후경 양옆에는 나무숲이 펼쳐져 있고 그 사이에는 공원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보이는 건물이 서있다. 폭설 후 추운 날들이 계속됐는지 건물의 지붕 위에는 눈이 솜뭉치처럼 수북하고, 벽돌 굴뚝은 난방과 요리로 생긴 뜨겨운 연기가 추운 대기와 충돌하며 뿌연 뭉게구름처럼 내뿜는다. 건물 주변에 성탄절 실내 장식에 쓰이는 크리스마스 트리용 침엽수가 진열돼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때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하순 즈음 같다.

<겨울(Winter)>로 이름된 이 회화 작품은 러시아의 아들이자 오늘날 서양미술사에서 유럽 근대기 순수추상 회화의 창시자의 핵심 일인으로 평가되는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Vasily Vasilyevich Kandinsky, 1866.12.4 ~1944.12.13)가 서른 살 되던 1906년에 실존하던 독일 뮌헨 시 교외의 한 겨울철 공원 풍경을 묘사한 작품으로 오늘날 ‘스케이트 타기(Eislauf)’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청년 칸딘스키는 모스코바에서 경제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한 후 교수직을 제안을 물리치고 화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 미술을 공부했다. 뮌헨미술아카데미를 졸업하던 해인 1900년부터 직업적 화가로서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던 화가는 2016년 겨울 그가 거주하던 뮌헨 교외의 부촌 슈바빙에 위치한 영국 공원(Englischer Garten)의 꽁꽁 얼어붙은 클라인헤세로헤 호수(Kleinhesseloher See)의 풍경을 한 장의 낭만적인 우편엽서처럼 묘사했다.

칸딘스키의 <겨울>과 유사한 관점에서 본 영국정원 내 클라이헤세로헤 호수와 제하우스 레스토랑 건물 광경을 담은드로잉. 자료: 1895년 엽서

지금도 뭰헨이 자랑하는 영국 정원에 자리한 그 유서깊고 우아한 ‘가스트슈테테 제하우스(Gaststätte Seehaus)’ 카페 겸 레스토랑은 본래 1882년 보트창고로 건축가 가브리엘 폰 자이들(Gabriel von Seidl)이 설계한 건물을 레스토랑으로 개축한 것으로, 뮌헨의 유명인들이 유쾌하고 우아한 식사를 즐기고 칸딘스키를 비롯한 당대 근대 미술인들이 모여 사교와 토론을 벌이던 지역 명소였다. 이 작품이 그려졌을 1906년 당시는 화가가 목판화와 리토그라피 인쇄기법에 매료돼 그 당시 유럽 미술계를 휩쓸던 상징주의, 아르누보(유겐스틸), 인상주의, 신인상파 점묘주의, 독일 표현주의, 프랑스 야수주의 양식을 템페라 매체로 실험하던 시기였다. 여기에 고향 러시아의 민속미술풍 요소를 가미해 색-선-점-도형으로 단순화시킨 초기 칸딘스키의 ‘시각 언어’가 담긴 <겨울>은 1910년 <첫 추상 수채화>라는 분수령적 음악적 추상회화가 탄생하기 전 준비작중 하나다.

이 동화같은 서정적 겨울풍경화의 주인공은 화면 우측의 남녀 한쌍이다. 꽁꽁 얼어붙은 공원 호수 위에서 잘 차려입은 성인들과 어린 아이들이 스케이팅을 즐기고, 흰 눈을 좋아하는 애완견들도 신나게 빙판을 누빈다. 동양의 유교식 남녀칠세부동석에 못지 않은 빅토리아 시대적 보주주의가 지배하던 20세기초 유럽에서 아이스 스케이팅은 선남선녀들이 샤프롱의 감시 없이 이성과의 자연스러운 신체적 접촉과 최신 유행 패션 과시가 허용된 연애와 사교활동의 통로였다.

큰 실크 모자, 자주색 모피 외투, 녹색의 풍성한 벨벳 스커트 차림을 하고 관객을 향해 뒷자태 만을 보이는 여인은 당시 20세기 초 유행한 에드워드 시대풍 ‘깁슨 걸’ 스타일로 차려입었다. 모피로 만든 원통형 모피 손토시는 유럽에서 16세기부터 남녀 모두 애용된 겨울 패션으로 20세기 초까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스케이트를 탈 때 만은 치마가 스케이트 날에 걸리지 않도록 긴 드레스를 발목 위까지 들어올려 입는 것이 허용됐는데, 그로부터 치맛 속에 가려져있던 여성의 발목은 민감하고 매력적인 신체부위로서 주목받았다. 여인의 곁에 바짝 선채 여인을 향해 아련한 시선을 보내는 파랑색 외투와 흰 실크해트 차림의 신사의 자세로 볼 때 두 사람은 로맨틱한 스케이팅 데이트를 나온 연인 사이라 짐작된다.

약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남녀 연인들의 동절기 데이트 코스였던 아이스 스케이팅은 본래 썰매타기와 더불어 어린시절의 ‘순진무구함’의 심벌이자 사회적 지위고하와 성별과 연령에 차별 없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누릴 수 있던 스포츠여가활동이었다. 이미 기원전 1천 년부터 스케이트는 스칸디나바이와 러시아에서 폭설과 얼음 위의 교통수단이었고, 네덜란드인들은 강과 운하가 많은 지형 덕분에 이미 중세부터 17세기까지 약 400 년에 걸친 小빙하기의 혹독한 겨울철을 썰매와 빙상 스케이트 타기로 유쾌하고 건강하게 이겨냈다. 썰매타기와 아이스 스케이팅은 1850년 미국에서 앞톱니가 달린 강철날을 구두 밑창에 고정시킨 스케이트가 개발되며 ‘스케이팅 마니아’ 시대가 열렸다. 1876년 런던에서 세계최초의 인공빙상링크가 개장된 이래 이제 아이스 스케이팅은 사철 레스포츠가 됐지만 아직도 현대인들의 천진난만한 동심과 낭만적 향수을 한껏 자극한다.

*이 글은 본래 농수산식품유통 공사 사내보 『aT』 2020년 12월 호 At the Playground | aT Gallery 칼럼에 실렸던 글이 편집되기 전 원문입니다.

헨드릭 아베르캄프(Hendrick Avercamp, 1585–1634)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이 있는 겨울 풍경(Winter landscape with skaters)>, 1608년 경, 판넬에 유채, 77.3 X 131.9 cm. 소장: Rijks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