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21세기 보헤미언?

파리 인상주의 회화 예술사회학적으로 바라보기

ESPRIT MONTMARTRE – Bohemian Life in Paris Around 1900.

“예술가촌으로서의 몽마르트르 구역”은 초대형 메트로폴리스 파리가 지닌 여러 단면들중 중대한 한 면모를 차지한다. 파리 몽마르트에서 활동하던 한 평론가는 1890년에 이렇게 논평했다. “파리 몽마르트. 이 구역은 하나의 거대한 아텔리에를 닮았다. 에드가 드가, 파블로 피카소,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 빈센트 반 고흐는 모두 한 때 여기서 살며 작업했다.

키이스 반 동겐(Kees Van Dongen), 「몽마르트 르 사크르쾨르 대성당(Montmartre, Le Sacré-Cœur)」 1904년.
키이스 반 동겐(Kees Van Dongen), 「몽마르트 르 사크르쾨르 대성당(Montmartre, Le Sacré-Cœur)」 1904년.

파리 몽마르트 – 근대 유럽의 대 창조 작업실 파리의 예술가 동네 몽파르나스의 역사가 시작된 때는 1885년경 유럽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30년 전 무렵이었다. 몽파르나스 남쪽 구역에서부터 꿈틀대기 시작해 이 구역에 자리잡기 시작한 예술가들의 자기정체성과 생활상은 일찍이 앙리 뮈르제(Henri Murger)가 쓴 책 『보헤미언 삶의 현장(Scènes de la vie de Bohème)』(1847-1849년)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 1890년도 무렵이 되자 보헤미언의 일상과 예술적 삶은 평상생활에 권태를 느끼거나 불만족을 느낀 신사나 아녀자들도 배끼거나 동참하고 싶어하던 20세기 초 보편적인 유럽적 사회문화 현상이자 신 라이프스타일이 되어버렸다.

파리 몽마르트가 픽션에서 처럼 마냥 아름답고 낭만적이기만 했던 곳이었으리라는 신화와 고정관념으로부터 이제 대중 관객은 긴 잠을 깰 때가 되었다. 실상, 파리 인상주의 회화는 실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유럽의 세기 전환기의 급변하던 세상만사와 세태를 잘 기록해 놓은 사실주의 풍경화다. 흔히들 인상주의는 바라보기에 부담없고 분위기 달콤한 그림으로 여기지만, 실은 휘황찬란했던 파리 벨레포크(Belle Époque) 시대 어두웠던 세태를 가차없이 기록해 놓은 컬러사진과 다름없는 1차적 시각자료이자 보고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블라우스 차림의 여인(Femme à la chemise)」 ca. 1905년 경.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블라우스 차림의 여인(Femme à la chemise)」 ca. 1905년 경.

위풍당당한 불르바르드와 아뷔뉴 대로들 위로 도시설계사 조르쥬-외젠느 오스망(Georges-Eugène Haussmann)풍 오뜨부르주아지용 호화 아파트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상류층 구역과는 정반대로, 몽마르트 구역은 일명 ‘마르키(Marquis)”로 불리며 버려진 부두, 방앗간, 정원, 공터로 널부러진 슬럼 구역이었다.

값싼 아파트 임대료, 저렴한 생활비, 거리마다 빨래방과 이발소가 많아 살기 편하다는 이유로 근대기 유럽 여러나라에서 몰려온 미술가, 시인, 문학작가, 음악작곡가들이 하나둘씩 입주하면서 형성되었다. 예술가들이 임대해 모여살던 대표적인 아파트 건물로 지금도 유명한 ‘바토-라부아르’에서는 폴 베르렌느, 쟈크 오펜바흐, 에릭 사티 등이 밤무대 댄서들, 첩과 창부들, 빨래하는 여인네들, 재봉질 하는 여인들과 나란히 이웃해 살았다.

부유한 가정 또는 귀족적 배경에서 태어나 성장해 좋은 교육을 받고서도 가난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택한 자발적인 아웃사이더, 사회이탈자 혹은 예술가의 생을 택한 사람들이 안락과 평온이 보장된 가정과 제도권을 내던지고 독립해 나와 모여 살며 예술을 하던 곳 – 몽파르나스. 여기서 작업했던 어떤 미술가는 살아 생전과 사후 커다란 영광과 명성을 얻고 미술사 속에 기록되었는가 하면,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미술가는 미술사에 크고작은 영향력를 남기고도 오늘날 주류 미술사나 대중의 뇌리에선 잊혀졌다.

앙리 에브느푈(Henri Evenepoel) 「파리에 있는 르 카페 다르쿠르(Le Café d’Harcourt à Paris)」 1897년.
앙리 에브느푈(Henri Evenepoel) 「파리에 있는 르 카페 다르쿠르(Le Café d’Harcourt à Paris)」 1897년.

그런가하면, 예술가가 된다함은 보잘것없는 출신배경이나 과거를 지우고 보다 나은 삶을 갈구하던 자에게는 자신을 승격시킬 수 있는 일종의 계급상승의 기회이기도 했다.

예컨대 수잔느 발라동은 한낱 르노아르와 툴루즈-로트렉의 모델 겸 뮤즈 생활서 시작했지만 매일밤 몽마르트서 벌어지는 카페모임과 파티를 돌며 미술가들 사이 대화를 주워들은 통찰에서 착상해 보헤미언 화가로 변신했다. 다른 화가의 화실에서 도자기 화공 조수로 시작했지만 기욤 아폴리네르의 눈에 띈 마리 로랑생은 아폴리네르의 후원을 받는 화가로 도약해 몽마르트에서 살며 작업했다.

파리 화랑계의 파워딜러 암브로아즈 볼라르, 베르트 와일, 거트루드 스타인은 그림이 모자라 못팔 정도로 전에없이 호황기를 맞은 미술시장에 정신없이 공급해댈  새 작품을 발굴하기 위해 수없이 몽마르트를 오가며 화가들의 화실을 들락거렸다.

라몬 카사스(Ramon Casas) 「보헤미언, 몽마르트의 시인 (에릭 사티의 초상(Le Bohème, poète de Montmartre (Portrait d’Erik Satie)」 1891년.
라몬 카사스(Ramon Casas) 「보헤미언, 몽마르트의 시인 (에릭 사티의 초상(Le Bohème, poète de Montmartre (Portrait d’Erik Satie)」 1891년.

하루하루의 생존에 위협을 받을 정도의 가난 속에서 결코 쉽지 않은 창조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해 나가기 위해서 그 많은 예술가들은 어떤 마음가짐과 정신적 무장을 하고 살았을까?

당시 화가들의 그림이나 문학인들의 책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듯, 이들 예술가들은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보헤미언’이라는 자기정체성을 부여하고 그에 준하는 인격과 태도를 실천하는 ‘자유인’이라 자부했다.

비록 주머니는 늘 비어있을 지언정 개인주의와 독창성에 대한 강한 자긍심, 누구로부터 제재받지 않을 예술적 자유, 자기만이 가진 고유한 미적 관점과 취향을 소유한 고고한 ‘아티스트’라는 자긍심이 보헤미언들한테 영혼의 지팡이처럼 지탱해줬다.

예술인들이 모여 살면서 사랑하고 생활하고 창조활동하고 상호견제하던 이 구역은 흔히 “아웃사이더와 사회변혁을 꿈꾸는 자들의 구역”이기도 했다. 대다수 무명 신세의 미술인들은 안료냄새와 먼지 속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깎으며 당시 번창하던 미술시장에 미술작품을 공급하며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꿨다. 그 사이 일일 노동자, 거리의 구걸인, 거렁뱅이 배회자, 세탁하는 여인네들이 낮거리를 수놓았고, 어둑어둑해지는 이른 저녁부터는 창부, 모델, 밤무대 댄서들이 카페나 골목마다 북적댔다.

낮동안 힘든 육체노동을 한 사람들이 하루 시름을 풀기위해 저녁이면 찾아드는 버라이어티 쇼 무대, 캬바레, 서커스, 사창가, 부두아르 등은 갑갑했던 현실로부터 잠시나마의 탈출을 약속하던 속된 오락제도였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경박하고 기약없는 오락의 뒤안길에는 늘 피곤, 공허, 안하무인격 질둔함 만이 남아있다. 그 흔적은 카페나 바에서 눈초리가 멍해진채 맥없이 앉아있는 창부들이나 무희들의 표정과 몸가짐에 잘 드러나있다. 그런가 하면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생전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해 평생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 몽마르트 보헤미언의 전형이 되었지만 평론가 루드비히 마이드너에 따르면 “최후의 진정한 보헤미언” 화가로 최근 재평가 받으며 국제미술시장에서도 다시금 관심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Henrie de Toulouse-Lautrec) 「스타킹을 신는 여자(Femme tirant son bas)」 1894년.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Henrie de Toulouse-Lautrec) 「스타킹을 신는 여자(Femme tirant son bas)」 1894년.

몽마르트가 탄생한 후 무려 8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 1920-30년대가 된 유럽, 근대기적 사고는 무르익었고 근대인들은 전통과의 단절, 도시화, 고독이라는 근대적 숙명을 기어이 받아들이기 시작했지만 경제는 침체를 더해가기만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미국발 경제 대공황,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는 반 세기에 걸쳐, 이 기근기를 모조리 목도하며 몸소 살아갔던 작가 조지 오웰이 쓴 자서전적 소설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1928년)에 보면, 여전히 파리에서 가난하고 힘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는 예술가들과 제도 바깥 주변인들의 형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런던에서는 일자리와 집 없이 떠도는 처지 속에서도 인간적 자존심과 체면을 잃지않고 살아가려 필사노력하는 처량한 시민들의 생활고가 절절히 묘사되어 있다.

그로부터 또 근 100년이 지난 오늘날, 인류의 사정은 과연 100년 전 파리 몽마르트의 예술가들의 생활보다 나아졌을까? 하긴, 경제 체제가 불안해 고용률이 낮아지고 개인의 생계가 위태해질수록 어느 사회에서나 예술가 집단 혹은 더 넓게는 창조 계급이 커지는 법이다. 예나지금이나 예술가 정신은 개인의 존재적 위태로움을 무정한 외부세상으로부터 다소나마 무장해 주기 때문이다. 『몽마르트 예술정신(Esprit Montmartre: Bohemian Life in Paris Around 1900)』 전시는 독일 프랑스푸르트 시른 쿤스트할레에서 [2014년] 2월7일부터 6월1일까지 열린다. Images courtesy: Schirn Kunsthalle, Frankfu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