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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살았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

MICHELANGELO AND HIS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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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보나로티(1475-1564) 『가운을 입고 왼쪽을 바라보고 서있는 세남자』 1492-1496년작, Pen and brown ink, 29,2 x 20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인류 문명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거론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불후의 걸작 미술“하면 의례 동의어처럼 나란히 등장하는 이름, 미켈란젤로 보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04).

그가 살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 중에서도 예술의 깊이와 완성도 면에서 최고조의 경지를 이룩했다고 평가되는 15세기 후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16세기 중엽 매너리즘이 널리 번지고 있던 1564년 까지였다.

2003년 봄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 추리소설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 저)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떠나줄 모르면서 전세계 독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 구미권 미술관들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 시대를 빛낸 천재 미술가들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들이 연달아 열리고 있다. 비정형과 기괴의 미가 주도하고 있는 최근 미술계에서 서양 미술사상 고대 그리스 고전기 이후로 미술이 구현할 수 있는 이상미(理想美)의 최절정을 달했다고 평가되는 르네상스 미술의 재조명은 퍽 신선한 환기가 되어줄만 하다.

올 여름 7월 9일부터 10월29일까지 오스트리아 빈에 자리한 알베르티나 (Albertina) 미술관에서는 『미켈란젤로와 그의 시대 (Michelangelo and seine Zeit)』(2004년10월26일-11월15일까지 전시)라는 제목을 단 전시가 열렸다. 미켈란젤로가 그의 조각과 회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착상을 끄적거리고  관찰을 기록해 두었던 드로잉 및 스케치 작품을 비롯해서 동판화, 채색 목판화, 기타 판화작들을 포함해서 종이 위에 남긴  작품들 100여점을 비롯해서,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당시 동시에 활동한 다른 거장들 ,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라파엘로 (Rafaelo), 그리고 라파엘로의 제자들인 쥴리오 로마노 (Giulio Romano), 페리노 델 바가 (Perino Del Vaga), 폴리도로 다 카라바죠 (Polidoro da Caravaggio)의 작품들이 나란히 함께 선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미켈란젤로는 물론이고 다 빈치와 라파엘로 3대 거장들의 양식을 두루 한데 절충결합하여 새로운 이상미를 구현했던 코레죠 (Correggio), 파르미쟈니노 (Parmigianino), 베르나르디노 뤼니 (Bernadino Luini) 등의 작품들과 그 이후로 전성기 르네상스가 진부해지고 퇴색하여 변태적인 양식으로 전환했다고 평가되는 매너리즘주의 계열의 작품들도 이 전시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해서『미켈란젤로와 그의 시대』 展은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전성기는 물론이고 매너리즘, 반종교개혁 시대, 바로크에 이어지며 그 이후로 계속된 나머지 서양 미술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는가를 폭넓게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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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보나로티 『죽은 그리스도 애도』 1530년경, Red chalk, 32 x 24,9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예나 지금이나 동과 서를 막론하고 특출난 예술가는 저마다 처해 있는 권력 간의 알력의 폭풍우 속에서 조심스럽게 일행일보에 신경써야 했던 법이어서, 그 역시 정치적 권모술수에 그다지 능하지 않은 성품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피렌체 도시 공화국의 메디치 가문 (The Medicis)을 비롯한 귀족 권력과 로마의 교황 권력 사이에서 빚어진 정치와 권력을 알력 속에서 갈등하면서도 능히 예술가로서의 커리어를 구축해 나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더불어서 르네상스적 천재적 예술가의 한 전형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 90년이 가까운 기나긴 예술 역정을 걸었던 그는 괴팍하고 고립을 좋아하는 자기도취적 성격 때문에 일평생을 한 두 명의 조수만을 둔 채로 혼자서 작업을 했던 외톨이 천재였다. 사적으로는, 60세가 넘어서 알게된 비토리아 콜로나 (Vittoria Colonna)라는 여성과의 정열적이면서도 지고순수한 사랑을 나눴던 일 외에는 단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색가라는 암암리의 풍문 속에서 처절하게 고독한 생을 살았던 기인 (奇人)이기도 했다.

천재에게 가해지는 갈등과 혹독한 환경은 오히려 창조의 자극제가 되어주는 법인지, 미켈란젤로는 철학적 경지의 ‚인간의 조건’을 폭넓게 섭렵하며 숭고하면서도 웅장한 아름다움과 강렬한 표현력 면에서는 동시대의 천재 미술가들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 같은 거장들을 능가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남들에게는 없는 신이 내려 준 유일무이한 독창적 창조력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눈부신 재능의 소유자이지만 바로 그처럼 선택받은 특권을 타고 났기 때문에 뼈 속까지 사무칠 정도로 고뇌하고 갈등해야 하는 천재 – 이 천재 (genius)의 개념은 바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 미켈란젤로는 그같은 전형에 그 누구보다 잘 부합하는 예술인이었다.

드로잉을 통해서 인체 누드의 완벽한 경지 도달
가장 이상적인 인체 묘사의 경지는 이미 고전기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구현되었다고들 말한다. 이번 알베르티나가 중점적으로 촛점을 맞춘 것은 미켈란젤로와 동시대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이룩한 인체 묘사과 누드화들인데, 그 중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걸작품들도 있고 아직 일반인들에게 널리 소개된 적이 없다가 이번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계기로 처음  빛을 보게 된 작품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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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보나로티 『누드의 남자상』 1501-1504년작, Pen and brown ink, 38,7 x 19,5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무엇보다도 빈의 알베르티나 그래픽 미술관이 오늘날 그토록 여러편의 미켈란젤로의 드로잉 및 판화작품들을 소장하고 있게된데에는 초대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소장주인이던 알베르트 작센-테셴 공국의 군주 부부 (합스부르크 제국 17세기 마리아-테레지아 여왕의 사위)가 플랑드르 바로크의 거장 페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를 애지중지하며 그의 그림을 사 모으게 된 것이 효자노릇을 했다.

알베르트 공은 루벤스의 그림을 사 모으던 중 루벤스가 소유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의 작품들까지 함께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인데, 이유는 루벤스도 과거 시대 그 어느 거장 선배 화가들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의 드로잉과 모작품들을 관찰연구한 미켈란젤로의 흠모자였던 때문이다.

오늘날 그림을 그리는 아마츄어 미술가들이나 직업적인 화가들 사이에서 드로잉이란 작품 착상과 구성 과정에서 필히 수반되는 창조과정의 일부다.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인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드로잉은 이전 화가들이 하지 않던 새로운 창작 과정이자 그 자체로 독자적인 완성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독립적인 미술 쟝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연필이나 목탄 같이 쉽게 그렸다 지울 수 있는 매체를 이용한 드로잉이 가장 흔했으나, 점차 거장들의 필치와 스타일을 보고 배우려는 후배 화가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동판이나 목판 등에 끌로 새겨 판화로 여러장 인쇄해 묶은 드로잉 지침서가 탄생했다.

조숙한 나이에 남다를 재능을 보여서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Domenico Ghirlandaio)의 화실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1년 만에 박차고 나온 미켈란젤로가 14세부터 깊숙이 품고 있던 열정은 인체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교회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서 시체공시장에 들어가 신체해부도 스케치에 골몰했다.

당시 미켈란젤로에 대한 평전을 썼던 평론가 죠르죠 바자리 (Giorgio Vasari)는 『위대한 미술가들의 생애 (Lives of the Artists)』에서„ 예술성의 극치에 다달은 미켈란젤로의 드로잉 인쇄물들을 보고 주변 미술가들은 경악과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림을 본 이들은 그 성스럽기 짝이없는 인체 묘사를 보고 그같은 것은 이전에 어디서도 본 적이 없으며 그에 필적할 만한 천재적 재능가도 알지 못한다며 극찬을 했다”고  적은 바 있기도 하다. 바자리가 이 책을 썼을 당시 미켈란젤로는 아직도 버젓이 살아 활동하는 생존 미술가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미켈란젤로는 살아서 이미 빛을 볼 만큼 본 인정받는 스타 미술가였음도 엿볼수 있다.

동시대와 후대 미술가들로부터 격찬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바로 『카시나의 전투 (Battle of Cascina)』였다. 흔히 그의 미술사가들은 인체 묘사 양식을 두고 ‚영웅적 (heroic)’이라고 표현한다. 영웅이란 본래 고대 근동과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초인간적 정신력과 육체적 강인성으로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여 신의 경지에 필적하는 위대한 업적이나 과업을 성취한 인간 또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을 뜻하는데, 미켈란젤로가 묘사했다고 하는 바로 그 ‚영웅적인 인간의 몸’은 강인하고 근육이 움찔거리듯 생동하면서도 마치 인물의 에너지와 열정이 스며나오는 듯 내면세계까지 표현해 냈기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가 고대 그리스 고전기 조각상에서 구현된 완벽한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한 단계 승화시켜서 내면세계의 표현력과 결합한 가장 완벽한 경지의 인체 누드화를 이 르네상스 시대에 완성시켰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레오나드로 다 빈치와의 앙숙 관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이의 앙숙적인 관계는 여러 편의 에피소드로도 전해질 정도로 유명하다. 피렌체에서 미술가로서의 명성을 굳힌 후 밀라노에 가서 더 유명해진 다 빈치는 자신의 재능과 명성에 의기양양해 져서 피렌체로 돌아왔지만 어느새 갓 스무살 난 청년 미켈란젤로라는 천재 조각가가 피렌체시의 귀족층으로부터 비호를 한 몸에 받으면서 그 유명한 『다비드』 상 (1501-1504) 조각 주문을 따낸 사실을 발견하고 분개하기도 했다. 동시대 어떤  화가가 전하는 한 일화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유별난 성격과 미술 주문자들과의 잦은 불화로 인해서 작품을 중간에 중단하거나 미완성으로 남겨두곤 했던 다 빈치를 비아냥거리기곤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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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반신 사도상』 1493-1495년작, Silverpoint, pen and brown ink, 14,6 x 11,3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이 『카시나의 전투』 그림과 연관시킬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도 바로 다 빈치와 떼 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경쟁자이자 30년뻘 선배인 다 빈치의 작품 『안기아리의 전투』의 정맞은 편에 그려져 경쟁한 그림으로서, 본래 피렌체에 있는 팔라쪼 베쿄 (Palazzo Vecchio) 시의회 집무실 실내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대형 프레스코 그림이었다.

당시 시의회에서는 미켈란젤로의 그림 반대편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시켜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주문을 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이때 다 빈치가 이룩한 누드 인체 묘사력은 인체해부학과 관상학으로 경륜이 쌓일대로 쌓인 손재주와 관찰력의 결과 탄생한 감성과 표정의 표현력의 극치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다 빈치의 『안기아리의 전투』는 이미 소실되어 지금은 원형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적어도 그가 남긴 인물 두상 스케치와 드로잉 기록은 그가 당시 접어든 새로우면서도 섬뜩하게 날카로왔음을 잘 보여준다.

미켈란젤로가 젊은 후배 라파엘로에게 끼친 영향
1504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이의 티격태격하는 두 천재의 경쟁 일화들과 그 둘이 나란히 팔라쪼 베쿄 시의회 집무실에 작업한 두 걸작 프레스코화 『카시나의 전투』와 『안기아리의 전투』를 둘러싼 자자한 명성을 듣고 피렌체 도시 공화국을 찾아 온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갓 20살난 라파엘로였다. 이번 알베르티나에서의 전시가 중점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점은 미켈란젤로가 이 시기 청년 화가 라파엘로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는가를 입증해 주었다.

미켈란젤로의 『카시나의 전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체 묘사를 보고 있노라면 개별 인물마다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서로 동떨어져 고립된 일련의 부조 조각을 보는 듯하다. 라파엘은 바로 그같은 점을 한층 개선하여 인체 표현을 한층 근육이 불거진듯 생동감 살린 질감을 더하고 곡선감을 한층 더 강조해 그렸다.

라파엘이 화면 구성상 전체적인 조화를 이룩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높이 평가했던 절대적인 이상미에 더 한층 근접했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그가 인물 얼굴과 신체 묘사를 할때 미켈란젤로 보다 한결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개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평가들에 따라서는  라파엘로를 유능한 절충주의자였다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또 혹자는 너무 완벽하고 조화로운 화면 구성과 양식을 구현한 나머지 오히려 따분한 형식주의자였다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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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1483-1520) 『석류를 손에 든 마돈나』 1504년경, Dark grey chalk, 41,2 x 29,5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어쨋거나 라파엘로는 타고난 재능 외에도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 두 선배들이 지니지 못했던 특유의 원만하고 외교적인 성격 덕분에 그로 부터 4년 후에 24살의 나이로 로마로 불려가 스탄자 델라 세냐투라 (Stanza della Segnatura)의 벽화 그리기 작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벽화 실력도 실은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3년 동안 그리다가 교황에게 살짝 공개한 로마의 시스틴 채플 (Cappella Sistina) 천정화를 엿보고 나서 크게 감명받은 결과였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채플 그림을 보고 자신이 그동안 해 오던 회화 양식을 전면 개편해서 인물 묘사를 한층 조형적이고 조각같은 느낌이 나도록 변형시켰다.

이 회화 작품 역시 안타깝게도 지금은 남아있질 않지만 현재 알베르티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디스푸타, 아테네 학파, 파르나수스 기록물 등에 스케치 그림들을 통해서 그가 이 회화 작품에 그려 넣었을 준비용 드로잉 습작들을 엿볼 수 있다. 그런 한편 4년 동안 400점이 넘는 대형 인물상을 교회당 천정에 누운 자세로 그리는 고역을 치뤘던 미켈란젤로는 그림이 완성되고 바깥에 나갔더니 „그동안 너무 늙어서 자기를 알아보는 자 하나 없었는데 당시 나이는 37살에 불과했다“고 그는 전기에서 고백했다.

영악한 라파엘로는 자신이 그려 둔 그 비범한 스케치 그림들을 로마에서 알게 된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Marcantonio Raimondi)에게 시켜서 일일이 동판화로 새겨 두도록 했던 덕택에 오늘날 우리는 라파엘로가 당시 이룩해 놓은 절정기 르네상스 회화의 세계를 드로잉과 스케치로 나마 짐작해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특히 그가 남긴 『베들레헴 유아살인 사건』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카시나의 전투』에서 보고 영향받은 흔적이 매우 짙게 나타나 있다.

로마 바티칸 교회에서 널리 촉망받은 라파엘로는 30살이 갓 넘은 나이로 교황 레오 10세의 의뢰로 바티칸의 스탄자 델린첸디오의 벽화를 그렸는데, 여기서 그가 묘사한 『노인을 등에 업은 젊은이』 (아에네아스가 안키세스를 구출하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대한 도해)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이룩해 놓은 인체 묘사법을 체득한 흔적이 다분히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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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노인을 등에 업은 젊은이』 1514년작, Red chalk, 30 x 17,3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후대 화가들에게 미친 미켈란젤로의 예술 정신
르네상스 전성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즈음, 라파엘로 화파 (School of Rafael)라는 화가 집단이 생길 정도로 라파엘로는 로마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의 미술계를 평정하다시피 했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카톨릭 교회와 교황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사이, 미켈란젤로는 1530년대, 그러니까 그가 50대 중반 라파엘로는 40대 중반이 된 나이가 될 때까지 피렌체에서 머물고 있었다.

라파엘로와는 달리 조수나 제자를 일체 두지 않고 혼자서 작업을 직접했던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미술 양식을 체계적으로 전수할 수 있는 후학 양성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수의 작품을 통해서 파급된 그의 영향력은 동시대는 물론 후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했다.

1527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각각 50대와 40대 중반일 무렵에 로마는 프랑스왕 샤를르  5세의 침략으로 도시 전체가 약탈당하는 고초를 겪어는데 이를 계기로 로마에서 프랑스로  도망친 수많은 화가들이 미켈란젤로로 부터 배운 미술을 이탈리아 지방 곳곳과 유럽의 다른 나라로 널리 전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로쏘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와 퐁텐블로에서 황실 전속 화가로 일을 하면서 미켈란젤로풍의 알레고리 프레스코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미켈란젤로의 걸작 그림들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시스틴 채플에 있는 최후의 심판 장면 스케치 습작과 예수의 죽음을 다룬 그의 말기 작품들을 놓치지 말 것이다. 현재까지 알베르티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습작 스케치 모음들은 당시 이 걸작 프레스코 회화작품들이 탄생하기까지 착상에서 부터 창작 과정을 일일이 보여주고 있다. 시스틴 채플에 남아 있는 최후의 심판은 8년에 걸쳐 제작된 역작으로 바쵸 반디넬리, 도메니코 베카푸미,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같은 동시대 신진 화가들이 양식을 구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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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바르톨로메오(1472-1517), 『공중의 천사』 1505-1507년작, Black chalk, heightened with white, 29,7 x 20,3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최후까지 조각가 미켈란젤로
회화와 드로잉 분야에서 발휘한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맞을 때가지 스스로를 조각가로 여겼다. 1550년, 미켈란젤로는 75세 되던 해부터 회화에서 손을 떼고 세상을 뜰 때까지 조각과 건축에만 전념했다.

„살아있는한 신이 내려주시는 미술 작업을 수행하는 나는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한탄했던 노쇄한 미켈란젤로는 가난, 고독, 고된 작업에 묻힌 여생을 건축과 조각에 전념하면서 보냈다.

17세기에나 와서 완공을 끝낸 캄피돌료 로마 국회당 건물 (Campidoglio)과 성베드로 성당은 각각 그가 63세와 71세 때 설계를 맡은 것들이다. 그는 손에서 망치와 정을 놓지 않고 조각일도 계속했다.

성모 마리아와 죽은 예수를 형상화한 피에타 조각들 중에서 플로렌틴 피에타는 조각가가 스스로 팔과 다리 부분을 깨부수어 버렸고, 론다니니 피에타는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다. 몸이 너무 노쇄해 버려서 잠도 자지 못했던 미켈란젤로는 늦은 밤 어두운 작업실에서 망치와 정을 든 양손으로 돌을 깨기 위해서 종이 헬멧에 촛불을 세워 만든 야간작업용 헬멧을 발명한 장본인기도 하다.

신비의 화가 다 빈치, 고전미 구현의 라파엘로와 더불어 황금률과 고귀한 정신성을 통일한 미켈란젤로의 미술세계는 고귀하고 웅장하다. 올 여름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미켈란젤로와 그의 시대』를 놓친 관객을 위해서 이 전시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옮겨져 내년 2월말까지 계속된다.

전시 제목: 미켈란젤로와 그가 살았던 시대 (Michelangelo and his Era) | 전시 장소: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Guggenheim Museum Bilbao) | 전시 기간: 2004년 11월15일-2005년 2월까지

* 이 글은 본래 세종문화회관 월간 회원지 『문화공간』 2004년 12월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왜 스승은 뛰어난 제자를 미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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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로 간 베네치아의 거장 화가
 보통 미술 전시회는 미술관에서 열린다. 그러나 때론 미술관에서 할 수 없는 미술 전시도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의 시대의 거장 화가 틴토레토의 전시회는 바로 그런 경우다. 그런데 미술관에서 하기 어려운 바로 그런 전시회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열리고 있으니 전세계 언론들은 보도하고 미술 애호가들은 마드리드로 속속 날아들고 있다.

자코포 틴토레토의 『젊은이 시절 화가의 자화상 (Self-portrait) 』 1546-1547년 경 작 © Philadelphia Museum of Art

올해 초인 1월말부터 스페인의 자부심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틴토레토 (Tintoretto)》 展을 열어 수많은 미술 애호가들과 대중 관객들을 손짓하며 올해 최고의 블럭버스터급 전시회가 오는 [2007년] 5월 13일까지 열린다. 1937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무려 70년 전에 베네치아에서 열렸던 적이 있는 틴토레토 전시회는 이 화가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프라도 미술관의 전시는 베네치아를 벗어나서 그동안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틴토레토의 작품들 중 60여점들이 간만에 한 자리에 모이는 뜻깊은 틴토레토 종합전시회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틴토레토》 전을 미술관에서 부치기 어려운 미술 전시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틴토레토의 대표적인 작품들중 대다수는 지금까지도 그가 태어난 고향이자 세상을 뜰 때가지 평생동안 작업했던 이탈리아 물의 도시 베네치아에 남아 있는 것이 그 첫째 이유다. 베네치아를 떠난 다른 곳에서 틴토레토의 전시를 연다함은 앙꼬가 빠진 찐빵과 같은 격이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베니스를 방문하는 문화 관광객들이나 미술사 학도들이 잊지 않고 밟는다는 답사 여정도 바로 틴토레토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베네치아에 있는 여러 교회당, 궁정, 빌라 천정과 벽에 꼼짝 않고 옛 자취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예컨대, 옛 베네치아 총독이 살던 팔라쪼 두칼레(Palazzo Ducale)에 보관되어 있는 『천국(Il Paradiso)』(1588-92년 작)은 규모 면에서 서양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큰 그림으로 여겨지는 초대형 작품이어서 한 눈에 다 보려다간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다.

베네치아 화파가 낳은 천재 반항아
화려한 빛과 감각적인 질감의 마술사, 초대형 캔버스로 관객을 압도하는 장대한 스케일, 쏘아 보는 듯 부리부리한 눈매와 난폭한 폭풍처럼 저돌적이고 고집불통의 사나이 – 그의 본명은 자코포 코민(Jacopo Comin, 1518-1594, 아명 자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였지만, 평생 ‘일 틴토레토 (Il Tintoretto)’라고 불렸다.

이탈리아어로 ‘ 작은 염색공’ 또는 ‘염색공의 어린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는 염색공으로 일하던 아버지의 직업 명칭에서 비롯된 애칭이었으나 곧 그의 예명이 되었다. 어린 틴토레토는 본래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받아서 비단을 염색하는 장인이 되었어야 했지만, 일찍이 벽에 그림을 그려대는 어린 아들의 남다른 재주를 간파한 아버지 죠반니 덕택에 당시 베네치아에서 가장 명성이 높고 기량이 우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티치아노(Tiziano) 밑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자코포 틴토레토 『노예를 해방시킨 성 마가의 기적(The Miracle of St Mark Freeing the Slave)』 1548년 작 © Gallerie dell’Accademia, Venezia

흔히 사회는 남달리 뛰어난 천재성을 지녔거나 개성이 강한 재능꾼을 격려해주기 보다는 그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두려워 하거나 질타하는 법이다. 특히 틴토레토처럼 저돌적인 성미를 가진 예술가들은 더더욱 제도로부터 비난의 표적이되기 쉽다.

그러하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를 바가 없는지라, 틴토레토가 활동했던 동시대 화가들과 미술평론가들은 그를 가리켜서 지나치게 성급하고 참을성이 없으며 폭풍우처럼 난폭한 자라고 수근댔다. 심지어는 베네치아의 그림을 보러 1541년에 피렌체에서 방문을 왔던 화가 겸 평론가 죠르죠 바자리(Giorgio Vasari) 조차도 틴토레토의 그림을 비평하는 일보다는 그가 앞뒤를 헤아릴줄 모르는 무모한 자라며 인격 비난에 더 신경을 썼다.

경우는 그림 스승이었던 티치아노도 마찬가지여서 혹시나 제자의 재능 때문에 스승의 명성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젊은 틴토레토는 티치아노의 작업실에서의 견습 생활 초기부터 감각주의 경도로 흐르는 스승의 그림에 공개적인 반발을 보였다고 한다. 제아무리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이라고는 하지만 남달리 번뜩이는 천재성 못지 않게 스승의 권위나 인습에 정면충돌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던 당돌한 견습생 틴토레토를 티치아노는 그다지 탐탁히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티치아노가 온화한 성품을 지녔던 파올로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생-1588사)를 더 아끼면서 훗날 공식적인 후계자로 지목했던 이유도 그래서 였다.

공개적인 안티-티치아노주의자임을 선언한 젊은 견습생 틴토레토는 그림이란 모름지기 로마와 피렌체에서 높은 명성을 구가하던 선배 거장 미켈란젤로풍의 조각성, 치밀한 구도력, 과학적이고 정교한 도제사적 기량이 두루 갖춰진 이른바, ‘디젠뇨(disengo)’ 개념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감성에만 호소하려드는 티치아노의 그림은 화려한 색채와 감각적인 분위기로만 치장되어 있을 뿐 지적 구성과 기획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입장은 현재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학교 갤러리에 보존되어 있는 『노예를 해방시킨 성 마가의 기적』(1548년 작)이라는 그림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그림은 베네치아의 수호 성인인 성 마가가 행한 성서 속의 기적 행적을 대담무쌍한 단축법과 조각 같은 입체감에 베네치아풍 특유의 현란색 색채가 한데 융합시킨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사실인즉, 틴토레토의 작품들도 그의 폭풍 같은 성미를 닮았다. 규모면에서도 그의 작품들은 이동이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 크다. 그런가하면 그의 양식은 걸작에서 졸작에 이르기까지 미술사가들 조차 의아심을 가질 정도로 양식상의 기복이 심한데, 이는 아마도 항상 새로운 비젼과 기법을 실험하기 좋아했던 그의 성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서를 해석한 『성 조지와 용의 결투』라든가 『목자들의 예배』 같은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베네치아에서 틴토레토 만큼 초상화와 풍경화가 한데 합쳐진 혁신적인 구성을 시도한 화가는 없었다.

당시 16세기 르네상스 화가들 사이에서는 달걀을 섞은 템페라 안료 고착제를 사용해서 캔버스 화면을 혀로 핥은듯 반들반들하게 표면 처리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의 회화작품들은 르네상스 그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붓칠이 거칠고 물감칠이 두껍게 마감된 것들이 많다. 훗날 17-18세기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와 렘브란트는 틴토레토의 그림들을 관찰하면서 드라마틱하고 낭만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자코포 틴토레토 『은하수의 기원(The Origin of the Milky Way)』 1577-1579년 작 ©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어디 그 뿐인가? 장대한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를 좋아하는 강한 저돌력의 사나이였던 그는 그림 주문 수주를 위해서라면 그림값을 파격적으로 깎아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경쟁 화가들을 철저히 물리치기 위하여 공짜로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당연히 당대 그와 경쟁하던 주변 화가들은 틴토레토를 염치없고 주제넘게 나서는 녀석이라며 미워했다.

그러나 학자들에 따르면 틴토레토의 가격파괴 작전은 돈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누구도 못말리는 열의와 에너지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한 작품을 붙들고 오랜 시간을 보내길 싫어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작업을 빨리 완성시킨 초스피드 화가로도 유명했다.

남다른 성격 못지않게 그림에도 혁신을 단행했던 틴토레토는 당시 르네상스 미술평론가들이 높이 평가했던 고상하고 시적인 아름다움을 쫏기 보다는 신화나 성서 이야기 조차도 인지상정(人之常情)의 위트와 휴머로 해석하기를 좋아했다. 본래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보유하고 있지만 이번 전시를 위하여 프라도로 대여해 온 틴토레토의 걸작 『은하수의 기원』(1575년경 작)은 폭발할 듯 넘치는 화가의 열정과 남성적 저돌성이 은유적으로 담겨 있는 대표적인 예다.

이 그림은 신인 아버지 쥬피터와 인간인 어머니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半申半人)의 헤르쿨레스를 영원히 죽지 않도록 불멸화시키기 위하여 쥬피터가 아기 헤르쿨레스를 잠자는 쥬노의 젓가슴에 물려 젓을 빨게 했다는 신화담을 묘사한 것이다. 갓난 아기 때부터 힘이 장사였던 영웅 헤르쿨레스가 너무 힘차게 쥬노의 젖을 빨았던 나머지 젓줄기가 하늘로 뻗쳐 나가서 우주의 은하수가 되었다는 것이 이 일화의 줄거리인데, 이 얼마나 남성적인 박력과 짖굳은 장난기 가득한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쾌활한 해석인가!

『불칸에게 들켜 놀란 비너스와 마르스(Venus Surprised by Vulcan)』(1545년 작)는 또 어떤가? 아름다움의 여신 비너스와 전쟁의 신 마르스는 혼외 연인 사이였다. 마르스는 전쟁에서 돌아오면 의례 유부녀 비너스를 찾아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르스가 비너스를 만나러 온 것을 알게 된 비너스의 남편 불칸은 아내와 마르스의 외도 행각 현장을 밟게 된다.

자코포 틴토레토 『불칸에게 들켜 놀란 비너스와 마르스(Venus Surprised by Vulcan)』 1545년경 작 © Bayerische Staatsgemäldesammlungen, Alte Pinakothek, Munich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맨 몸에 다리를 벌린채 헝클어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천연덕스러운 비너스의 자태하며, 난처한 상황을 피해 급히 몸을 숨긴 채 긴장한 채로 숨어 있는 마르스의 모습과 마르스를 향해 얄밉게 짖어대는 고발쟁이 개의 모습은 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게다가 아내가 정말 바람을 피웠는지 확인하려고 이불자락 안을 확인하는 불칸은 관객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관음적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화가의 음탕스러운 상상력과 휴머 감각을 한 편의 쾌활한 그림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구약성서 다니엘書 13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묘사한 『수잔나와 두 장로』(1555-56년 작)는 수잔나가 목욕하던중 음탕한 두 노인네가 몰래 훔쳐보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이 일화를 빌어서 틴토레토는 젊은 여성 나체의 육체적 아름다움과 나이든 남성의 음흉추함을 그림으로 해석했다.

베네치아 화파의 우두머리 자리를 고수하던 스승 티치아노가 죽고 나자 틴토레토의 그림은 전보다 더 없이 강력한 압도력과 아름다움으로 베네치아 최고의 화가로서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그 또한 세월의 힘에는 굴복하고 말았는지 말년에 치달아 가면서 젊은 시절의 불타는 열정과 위세 당당함을 뒤로 한채 한결 명상적인 주제의 그림들을 즐겨 그렸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성서를 그림으로 그렸다. 특히 현재 베네치아 산 죠르죠 마죠레 교회당에 걸려 있는 『최후의 만찬』(1592-94년 작)은 틴토레토가 세상을 뜨기 불과 몇 달 전에 완성시킨 최후작중 하나이다.

이 화가는 다가오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놓인 만찬상과 예수와 12제자들의 극적인 몸동작의 역동적 구도에도 불구하고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러나 대가의 정신은 잊혀지지 않고 후대로 이어지는 법. 틴토레토의 정신은 스페인에서 온 그리스인 화가 엘 그레코의 매너리즘으로 이어져서 16세기 베네치아의 화단을 다시 한 번 드높게 빛냈다. Photos courtesy: Museo del Prado, Madrid.

* 이 글은 『오뜨』 誌 2007년 5월호의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