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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건축론

FRANK LLOYD WRIGHT AND ORGANIC ARCHITECTURE

유기적 건축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경외심에서 빚어지는 것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생애와 작품 세계  20세기 건축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이 지대했던 건축가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 거장 건축가로 길이 기억되고 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 , 1867-1959년)는 살아생전부터 개인사로나 작품 세계로나 시끌벅적한 논쟁과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다.

라이트는 위스컨신州에서 태어나서 스프링그린 (Spring Green)이라는 소도시 근처의 한 농가에서 이모와 삼촌이 들끓는 친척들 사이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음악가였던 아버지가 라이트가 열여덟살 되던 해에 가족을 버리고 떠나자 라이트는 위스컨신 대학에 등록하여 잠시나마 공학 공부를 했다.

낭만적인 천재, 예술적 우상타파자, 영웅적 개인주의자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더 큰 도시 시카고를 가서 당시 경제 부흥과 신건축 건설붐에 힘입어 나날이 팽창하며 시카고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수놓고 있던 시카고 건축학파 (Chicago School of Architecture)의 아들러와 설리번 건축 사무소에서 조수로 일하기 시작하게 된 것을 계기로 건축계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아들러와 설리번 건축 사무소에서 닦은 실무 경험은 라이트가 별다른 대학 학위나 훈련없이도 방년 26세의 나이로 독립 건축 사무소를 차릴 수 있게 해준 귀중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라이트의 개인생활은 연속된 결혼 실패와 비극이 겹친 질풍노도로 점철되다시피 했다. 실제로 불안정한 결혼생활과 연이은 사생활 스캔들은 무시할 수 없이 많은 수의 클라이언트들이 그를 건축가로 고용하길 회피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정도였다. 라이트는 20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6명의 자녀를 낳아준 조강지처 캐터린을 버리고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로 프랑스로 건너가서 당시 한 클라이언트의 부인과 살았다.

그는 애인과 함께 버젓이 고향인 위스콘신 스프링그린으로 돌아와서 둘이서 살 개인주택 겸 작업실을 지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탈리에신 (Taliesin: 웨일즈어로 ‚반짝이는 눈썹’이라는 뜻) 하우스였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도 잠깐, 라이트가 데리고 있던 관리인이 애인, 애인의 두 자녀와 손님 4명을 모조리 살해하고 집을 불살라 버리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그 모든 비극을 뒤로 하고 라이트는 두 번이나 화재로 타 없어진 이 집을 재건해서 스프링그린 방문객들은 지금도 언덕 귀퉁이에 붙어있는 아름다운 자태의 탈리에신 하우스를 감상할 수 있다.

위스콘신 스프링그린에 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거주용 개인주택이자 작업실 탈리에신 하우스는 첫 결혼, 두 차례의 화재, 가족의 비극을 뒤로 한 채 원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지금도 남아 있다. Photo courtesy of the 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35살 되던 해인 1922년, 라이트는 드디어 정식 이혼을 하고 미리암 노엘 (Miriam Noel)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지만 여러 우여곡절 끝에 5년후에 이혼했다. 같은 해에 라이트는 세번째 부인인 올기바나 밀라노프 (Olgivana Milanoff)와 결혼하면서 드디어 그가 항상 꿈에도 그리던 자연을 벗한 환경 속에서의 안정된 결혼생활을 꾸리게 되었다고 한다.

라이트는 탈리에신 하우스에서 살면서 건축 설계일과 후학 양성에 정열적인 힘을 쏟았고 시간이 나는대로 농사일도 하였는데, 그가 젊어서부터 착상해 온 ‚유기적’ 건축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생활 환경을 누린 셈이 되었다. 그는 남서부의 아리조나州의 스코츠데일 (Scottsdale)에다가 두번째 개인 주택인 탈리에신 웨스트 (Taliesin West)를 지어 중서부의 혹독한 겨울 날씨로부터 피해 지내면서 강의와 저술 활동까지 활발하게 펼쳤다.

1930년대부터 꾸준히 해온 그의 강의와 집필 활동을 한 권의 책으로 모아 놓은 책 『건축의 미래 (The Future of Architecture)』(1953년 출간)는 라이트의 건축 철학을, 그가 직접 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자서전 (An Autobiography)』(1932년 초판 발행)은 유명 연예인에 못지 않은 격동의 사생활과 작업 세계에 대한 이 건축가의 고백이 담겨있다.

자연 + 인간 = 유기적 건축 …자연을 관찰하라, 자연을 사랑하라, 자연과 가까이하라. 자연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그의 후학들에게 한 말.

겨울철을 피해 남부에 지은 로이드 라이트의 탈리에신 웨스트 주거용 주택 겸 아텔리에. Photo courtesy of the 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유기적 건축론 (organic architecture)의 원칙을 깊이 신봉하며 한평생 추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그 어떤 특정의 개인 양식을 구축했다거나 고집하지 않았다고 자평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건축을 업으로 삼기 시작한 1890년대 이후부터 모더니즘 철학과 미학에 근거한 다양한 건축적 실험을 단행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건축에 ‚유기적 (organic)’이라는 개념을 그의 건축 철학에 도입한 때는 20세기가 갓 출발한 때인 1908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기적 건축 철학은 그의 스승인 루이스 설리번 (Louis Sullivan)이 모더니즘 건축을 일컬어 즐겨 사용했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이라는 그 유명한 슬로건에 라이트가 개인적으로 깊이 동경하며 추구하고자 했던 ‚자연 (nature)’의 개념을 한데 버무린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모든 건축물은 모름지기 주변의 자연적 환경과 조화롭게 어울려야 한다. 건축물은 그 자체로 단지 부동하는 상자 같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실내가 외부 환경 사이의 공간이 서로 넘나드는 열려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기초 원리에 충실했다. 그 결과 라이트의 건축 세계를 좀 더 가까이 들어다보자면 뚜렷한 양식이 판독가능하지 않으면서도 매 작품들에마다 공동적으로 흐르는 형식적인 특징들을 추려낼 수가 있다.

예컨대, 그는 ‚유기적’ 공간 창조를 위해서 건축물 전체를 직사각형, 다이아몬드형, 또는 육각형 같은 여러 단위 (module)의 규칙적인 모양의 기하학적 부분들로 구성 조합하는 것을 기본으로 여겼다. 또 공학도 출신이라는 훈련 배경 덕택에 그가 매우 즐겨 사용했던 건축 구조적 요소로는 캔틸레버 (cantilever)라는 긴 막대 기본형태의 구조물은 예컨대 발코니 처럼 방침대 구조물 없이 공중에 붕 뜬채 양 끝자리 만을 건축 본체에 매달리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1909년 프랭크 로이트 라이트가 설계하여 완공된 로비 하우스 (Robie House)는 프레리 하우스 양식의 대표적인 예다.

이같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적 특징들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된 경우는 일명 ‚프레리 하우스 (Prairie house’ (들판 위의 집이라는 뜻)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주거용 개인 주택들일 것이다.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미국 중서부의 광활하면서도 완만한 자연적 풍광에 특히 잘 어울린다고 평가되는 그의 프레리 하우스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꼽는다면, 1) 수평적인 선을 강조하고, 2) 대체로 1층을 유지하는 건물 본체와 나트막하고 깊에 드리워진 지붕을 채택했으며, 3) 실내 공간과 외부 자연 공간이 두절되지 않도록 넉넉하게 열린 공간을 지향해서 완만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서부 지역의 지형을 아늑하게 감싸안은 듯한 감흥을 안겨준다는 것일테다.

그는 땅 속에 박혀 있는 지하실 공간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1894년 독립 건축 사무소를 차린 이후로 수주받아 설계한 개인 주택들의 설계도에는 대부분 지하실이 없다. 집건물이란 땅 속에 박혀 있을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땅 위에 서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믿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신념이 잘 반영한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주거용 주택의 실내 공간 또한 이전까지 미국에서 널리 일반화되어 있던 실내 공간 설계사의 관습에서 과감하게 탈피했다. 예컨대,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의 주거용 집 실내는 거실, 침실, 주방, 식당 등 기능별로 두터운 벽으로 뚜렷하게 구분된 방들로 구성된 영국 빅토리아 시대풍의 실내장식이 지배적이었다.

라이트는 그같은 폐쇄형 공간 뿐만 아니라 평균적인 인간의 신체 규모에 부응하는 아담한 ‚휴먼 스케일 (human scale)’의 열렬한 옹호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예컨대 개인의 주문으로 1901년에 일리노이州 하이랜드 파크에 지은 워드 윌리츠 하우스는 집안의 벽들을 거의 제거하고 그 대신에 거실 중간에 벽난로를 설치하여 입구와 거실 공간을 자연스럽게 분리시켰다. 그는 공간이 한정된 개인 주택을 설계할 경우, 공간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입구를 보통 남성의 평균 신장을 넘지 않는 나트막한 입구와 지붕으로 설계한 다음 일단 실내에 들어서면 집안의 1층과 반2층 공간 전체로 시야가 확 트이도록 설계함으로써 기대이상의 공간확대 효과를 주는데도 명수였다.

그가 주문받아 설계한 프레리 수많은 하우스 프로젝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백미白尾로 꼽히는 예는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 위치한 로비 하우스 (Robie House)다. 1906년에 착공하여 1909년에 완공된 이 개인 주택은 긴 장방형 건평 위에 3층으로 올린 개인 주택이다. 캔틸레버 구조를 활용해 얹어진 지붕의 길이는 무려 6.4미터에 이르며 그 지붕 밑에는 같은 길이로 펼쳐진 서향 베란다가 설치되어 있다. 3층 짜리 집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2층집 높이도 채 안될 만큼 나트막한 천정을 지니고 있지만 집 곳곳을 돌아가며 설치된 대형 유리창과 출입구와 얕게 드리워진 지붕 구조 덕분에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태양광을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클라이언트 에드거 카우프만의 주문으로 설계된 폴링워터는 캔틸레버 건축의 대명사가 되었다. 1936년 완공.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연륜이 보다 무르익은 30여년 후, 미국 동부 펜실바니아州의 한 갑부 상점주인인 에드가와 릴리앤 카우프만 부부의 의뢰로 1939년에 베어 런 (Bear Run)에 지어진 폴링워터 (Fallingwater)는 폭포수 위를 가로지르며 주변의 사암 위에 콘크리트 캔틸레버 공법을 사용해 지어진 드라마틱하기로 유명한 대표적인 개인 주거용 건축물이다.

벌써 수년째 현재까지 구미권 언론들은 본래부터 아슬아슬하게 지어져서 콘크리트 균열 및 누수 등 틈틈히 구조적 결함을 보여온 이 폴링워터 하우스가 아니나 다를까 곧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보도해 오고 있다.

쏟아지는 폭포수 위에 걸터앉은 집을 짓는다는 착상 자체부터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사자같은 자존심의 표현이었다고 평가되어 온 데다가 그같은 자연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연 풍광과 건축, 외부와 실내, 원대한 컨셉과 실용적인 생활이 한데 잘 조화된 주택이 구현체라고 불려온 만큼 폴링워터는 미국인들에게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버금가는 미국인의 꿈, 신기술, 자유, 아름다움의 집약결정체이기도 했다. 지금은 미국 웨스턴 펜실바니아 보존소가 관리하고 있는 이 폴링워터 하우스의 보존관리 및 수리 예산액은 15만5천 달러 가량 된다고 한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주로 돈많은 개인 갑부들이나 사업가들을 주 클라이언트로 상대하며 주문 주택 설계를 했다. 라이트가 요구하는 설계비 외에도 값비싼 고급 건축 자재 구입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던 고객들은 돈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생전 건축가로서 이루고 싶었던 꿈은 ‚유에소니안 하우스 (Usonian House)’를 짓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인의 집’ (US + -onian, 라이트는 미국을 유에소니언 (Usonian)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이 조어가 뜻하듯 그의 유에소니안 주택은 평생 미국인들을 위한 저렴하고 민주적인 집을 지어 보급하고 싶다는 그의 한평생 꿈을 반영했다.

특히 그가 유에소니안 하우스로 제시했던 주택 디자인은 주로 ‚ㄴ’자 모양을 한 평면 구도 위에 콘크리스, 벽돌, 목재 합판, 창문용 유리 소재를 채용한 단순한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흔히 시끌벅적한 거리에 위치해 있는 이들의 주택에 조용한 침실 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ㄴ’자 평면도를 고집했고, 시공의 편의를 고려해서 표준화된 정사각형 콘크리트 벽, 상하수도 파이프, 난방용 파이프, 목재 실내벽과 뒷뜰로 난 유리창을 고집했다. 라이트의 그같은 이상이 담긴 유에소니안 하우스들은 지금도 위스콘신州의 매디슨市와 캘리포니아 곳곳에 50여군데 남아있다.

낭만적인 정신과 혁신과 합리적인 이성의 거장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70년에 걸친 건축가 일평생에 걸쳐 설파한 ‚유기적 건축’의 이상이란 인간의 지적 정신 세계를 통해서 걸러진 자연과 조화롭게 결합시킬줄 아는 건축을 이룩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이상주의적이었다.

클라이언트의 키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건축 칫수를 자신의 몸칫수에 기준을 삼아 설계한 그만의 특유의 ‚휴먼스케일’에 대한 신념과 목재와 같은 자연적인 재료 외에도 건축 신소재와 건축 기술에 대한 강한 옹호 태도는 인본중심적인 르네상스적 예술 정신과 모더니즘적 신사고의 결합이라해도 좋을 것이며 그는 바로 그같은 정신에서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찾았다.

클라이언트가 저급 취향의 집을 원할 때 어떻게 타협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프랭크 로이드는 이렇게 단언했다. „그의 취미가 아무리 모자랄지라도 유기적 이상에 기초하여 설계하면 반드시 탁월한 취향의 건축이 탄생하게 되어있다.“ 진정한 건축미란 주어진 공간과 특정 순간이 빚어 내는 것이지 보는자 개인의 취향으로 결정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Photos courtesy: Frank Lloyd Wright Foundation.

* 이글은 본래 『공간사랑』 LG화학 사보 2005년 6월호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 둡니다.

화려한 바로크 도자기의 세계

BAROQUE LUXURY PORCELAIN

미술 시장은 회화와 조각을 시대를 넘어서 공예 미술로 관심
미술 애호가들과 컬렉터 사이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미적 감상과 수집 대상이 흥미진진한 관심사다. 작년 연말부터 올초에 걸쳐 구미권의 유명 미술 경매장에서 커다란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는 미술 거래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서양 고전 도자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작년 연말경인 2005년 12월 중순에 파리에서 열린 크리스티 미술 경매소의 경매 매출 실적에 따르면 17-18세기 유럽 고전 가구 공예품과 도자기들이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낮게는 1백80여억원에서 최고 4백7십억원이라는 가히 천문학적 가격에 팔려 나갔다는 소식이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紙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올초에는 영국의 고전 미술 전문 학술지인 『아폴로(Apollo)』는 17-18세기 바로크 시대 도자기가 미술적 감식안을 자랑하는 컬렉터들 사이에서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하는 컬렉팅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지적하는 기사를 실어 고전 미술 애호가는 물론 학계의 관심을 환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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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쵸치 (Antonio Cioci)가 1732–1792년경에 그린 도자기 그릇이 있는 정물화. Museo dell’Opificio delle Pietre Dure, Florence.

두 말 할 것 없이 미술 시장을 오가는 미술품 컬렉터들과 경매소의 관심사 변동은 잇따른 미술계 학자들의 연구를 부추기고 또 역으로 학계의 관심사가 미술 시장으로 옮겨져 미술품 거래 당사자들 사이의 새로운 구매 관심을 부추기는 것은 상례다.

과거의 미술품 애호가들과 개인 컬렉터들이 유럽의 19세기말 인상주의 회화나 20세기초 표현주의 회화와 조각품들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었던 덕분에 이미 기하학적인 작품 가격을 구축하게 된 나머지 이제 너도나도 웬만큼 돈많은 갑부들이 하나씩 갖고 있다고 알려진 그같은 유명 회화 및 조각 작품들은 재차 미술 경매 시장으로 떠밀려 나와 더 비싼 가격을 주고 사갈 새주인을 찾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미술 시장의 한 구석에서는 미술품에 대한 남다른 감식안을 자랑하며 그동안 미술 시장의 뒷전에 밀려 있던 도자기 공예에 관심의 손짓을 내던지는 컬렉터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크 도자기 – 새롭게 떠오르는 미술 시장의 핫 아이템
과거 십여년 특히 1990년대에 구미권 미술 시장에서 도자기 공예 분야가 그다지 커다란 인기를 끌지 못한 이유는 능히 짐작할 만 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영미권의 보수주의적 정권이 부추긴 과거 전통과 노스탤지아에 대한 미적 향수풍의 유행은 인터넷을 위주로 한 신경제 붐과 전에 없는 경제 호황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한 미니멀리즘 인테리어 디자인의 유행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났던게 그같은 원인이었다. 백색 위주의 실내 벽면과 단순간결한 직선 위주의 미니널리즘풍의 실내 환경에 고전적인 형샡과 장황한 장식을 특징으로 한 바로크풍 도자기 용품은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3-4년 동안 변동을 겪어온 구미권의 보수적 정치적 분위기와 패션계의 장황하고 화려해진 유행 경향은 최근에 새롭게 불붙기 시작한 서양 고전 도자 예술에 대한 관심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집안 구석구석에 진열해 놓은 예술품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미술 컬렉터들의 집을 방문한 친구들과 파티 손님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 및 담소거리로 더없이 안성마춤이기도 하다.

게다가 최근 17-18세기 도자기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 미술품 컬렉터들은 주로 미국와 중유럽권에 살고 있는 사업가 출신의 부유한 남성들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흔히 도자기 하면 식탁용 식기라는가 거실 및 침실용 장식품으로 여성들과 더 가까운 것이라고 여겨져 온 도자기 용품들이 갑작스럽게 남성 컬렉터들 사이에서 미술품에 대한 감식안을 과시할 수 있는 매개체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 역시 여간 재미있는게 아니다. 최근들어 유난히 미국의 대형 박물관들이 앞다투어 유럽 17-18세기 바로크 도자기 작품들 구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도 ‚도자기 소장은 고도의 감신안의 표시’라는 새로운 미술 시장내 추세에 크게 힘입고 있음을 증명한다.

작년 연말부터 올 2월말까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리히텐슈타인 박물관에서 『바로크 시대의 호사 도자기 (Barocker Luxus Porzellan)』 展은 그런 점에서 최신 구미권 미술계의 움직임을 잘 반영하고 있는 전시회가 아닐 수 없다.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Liechtenstein Museum)은 약 1년전에 소더비 경매소를 통해서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일명 ‚배드민턴 장롱(Badminton Cabinet)’이라고 불리는 18세기풍 바로크 흑목 자개장을 무려 영화 1천9백만 파운드(우리돈으로 약 3백5십억원)을 주고 구입하여 화재가 된 바 있는 거부의 개인 소장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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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에서 생산한 작은 도자 찻주전자, 1730-35년경 제작, 뚜껑 포함 높이 14,2 cm, Sammlung Rudolf von Strasser.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요즘들어 도자기 수집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중유럽권의 핵심국가. 이미 17세기부터 우수한 도자기 제품을 생활의 일부분을 삼아 사용해 오던 리히텐슈타인 군주 가문이 대대로 사용하고 보관해 오던 진품 바로크 도자 식기들과 장식용품들을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대중에게 공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크 시대의 진품 도자품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동방에서 온 진기한 신소재 도자기
당시 빈의 합스부르크 황실 정권기 동안에 합스부르크 제국내 영토 중에서도 빈과 프라하를 오가며 중유럽 북동부 지역에서 막대한 권력을 자랑했던 리히텐슈타인 군주 가문은 황실과 여타 고위급 귀족 가문들과의 경쟁에 뒤쳐질 새라  유럽권에서 드높이 찬양받던 바로크식 호화 도자기 용품들을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에 특별 주문하여 사용했고 여타 귀족들도일부 유명 도자기 화가들을 시켜 각 가문 만의 독특한 지위와 고귀한 취향을 반영하기 위한 특수 디자인이 담기 도자기들을 만들어 썼다.

지금도 서양 고전 도자 전문가들과 미술 시장에서 최고로 꼽히는 도자기들은 독일 작센 지방의 마이쎈 (Meissen) 도자기와 프랑스의 세브프 (Sèvre) 도자기를 꼽지만, 빈의 뒤 파키에 (Du Paquier) 도자기 공장 (1718년 설립-1744년 폐쇄)은 유럽에서 두번째로 오랜된 유서깊은 도자기 생산소였다는 점 때문에 최근 미술 경매장에서 높은 인기를 끌며 초고가를 홋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려 청자를 두고 그 유려한 자태와 색채 감각의 비법 전수와 변천을 둘러싼 숨은 이야기가 많듯이 유럽의 몇몇 도자기 공장들과 명장들 사이에서 쉬쉬하며 돌던 도자기 제작 기법과 극비 유출에 관한 야사는 웬만한 탐정소설을 방불케 할 만큼 흥미진진하고 구구한 설도 많다. 예컨대 빈의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의 총책임자였던 클라디우스 이노첸테 뒤 파키에는 도자기 비법을 누출했다간 죽음 당했다던 마이쎈의 도자기 장인들과 화학자들을 몰래 꼬득여 빈으로 데려와 일을 시키는등 우수한 도자기 생산을 위해서라면 여간한 모험도 서슴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혼신의 노력과 황실 주문을 받은 바쁘고 벅찬 생산활동에도 불구하고 뒤 파키에를 비롯한 온 도자기 공장은 막대한 금액에 이르는 만성적인 적자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다가 1944년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황제의 관리 하에 들어갔지만 1864년에 결국 폐쇄되었다가 다행히도 오늘날까지 비너 포르첼란 마누팍투르 아우가르튼 (Wiener Porzellan Manufaktur Augarten)이라는 명칭으로 계승되어 도자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도 빈 도심부 근처의 제9구역 파사우 (Passau) 구에 가면 리히텐슈타인 성과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 (Du Paquier Porzellan Manufaktur)은 포르첼란거리 (Porzellangasse) 상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있는데, 이 둘의 지리적은 가차움만 보더라도 당시 리히텐슈타인 가(街)와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의 남다른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를 위한 전시품 정리 과정에서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에서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리히텐슈타인 궁전 소장의 도자기들은 대체로 궁전내 은제품 보관 창고와 다과 주방에 수두룩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서 이번 전시에 포함되었다.

18세기 초부터 귀족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심을 모으며 인기 사치품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도자기 (porcelain)는 본래 중동을 거쳐 멀리 중국과 일본에서 도자기 용품들이 수입되어 유럽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만족할 줄 모르고 항상 새로운 외래 유행과 희귀한 진품 수집에 탐욕스럽던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각광받았다.

18세기까지도 금은 식기나 주석으로 된 금속재 식기가 일반적이던 지체 높고 부유한 유럽의 귀족 식탁 문화에서 도자기는 그 특유의 희고 윤기있는 표면 때문에 이른바 ‚하얀금 (white gold)’이라고 불릴 정도로 ‚진귀한’ 신소재로 여겨지며 소재의 혁명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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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뒤파키에 도자 공방에서 생산된 음료수 주전자, 1730/35년경 제작, 높이 7,9 cm, Sammlung Rudolf von Strasser.

당시 귀족들이 사용하던 도자기 용품들은 주로 거나한 식사상을 한껏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기 위해 활용된 식탁용 식기와 성내를 꾸며주는 실내 장식용 미술품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리히텐슈타인 가문에서 그들의 거주용 성내 보물 보관소인 ‚가다로바 (Guardaroba)’실(室)을 그득하게 메운 보배들의 대부분은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해 온 도자기들이었는데, 이들 도자기들은 너무 귀중하게 다뤄진 나머지 실제로 음식을 담는 식기로 기능하기 보다는 식탁을 풍성하고 호화롭게 돋보이게 해 주는 장식품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빈 바로크 도자기 – 정치적 격변에 대한 평화적 외교 수단
건축, 조각, 회화 등 미술 분야에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했던 이탈리아 미술가들을 통해서 특히 16세기 이후부터 남부 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이 급격히 북부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18세기초엽부터 이탈리아 피렌체 근방에서는 유럽을 통틀어서 최고의 제작 기술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도자기 공장이 설립되어 도자기 주문생산식으로 도자기를 전유럽의 소수 고객들에게 공급했다.

도자기 용품을 흠모한 여러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유독 리히텐슈타인 가 (家)가 오늘날까지 값진 도자기 수집품들을 보유하고 있게 된 데에는 이 가문이 지금까지도 가문의 맥과 재산을 운좋게 유지해 올 수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이 이미 15세기 유럽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 가문의 조상들이 지녔던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18세기에 피렌체-빈 합스부르크 황실 사이에서 빚어진 유럽의 정치사적인 인연에 기인한 바가 크다.

르네상스의 요람 피렌체는 이 국가도시를 호령해 오던 메디치 가문이 몰락하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의 통치 하로 굴복해야 하는 굴욕적인 정치적 입장에 처하자 피렌체의 귀족이자 토스카나 (피렌체 시가 소속해 있는 지방) 대표 외교사신이던  카를로 지노리 (Carlo Ginori) 후작은 외교적 묘안을 착안해 냈다. 처세술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상술에 정통했던 귀족 출신 지노리는 고향 피렌체가 자랑하는 유럽 최고의 도자기 제품들을 북동 유럽 합스부르크 황실과 귀족들에게 제공함으로써 피렌체는 경제적인 이득을 챙기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양국 사이의 정치적 동요 없이 정치적인 통합을 성취할 수 있었다.

역으로 유럽 북동부의 합스부르크 문화권은 피렌체 도자기 공장에 그들의 시각 문화가 담긴 도자기 용품을 주문함으로써 이탈리아 피렌체로 합스부르크의 시각 문화를 역전파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피렌체의 지노리의 능숙한 상술과 빈 합스부르크 황실의 문화적 지배 전략이 만난 문화 외교의 승리였던 것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도자 기술과 빈 합스부르크 황실의 취향이 반영된 바로크 시대 도자기 제품들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들로는 인도풍 꽃문양과 ‚시누아제리 (Chinoiserie)’로 불리는 중국풍 이미지들이었다. 어느것이 어느것이라고 구분짓기 어려울 정도로 인도풍과 중국풍적 요소들이 교묘하게 뒤섞여 유럽화된 동양풍 도자기 표면에는 대체로 화련한 색상, 비대칭적인 식물 문양,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인물 섞인 풍경화들이 즐겨 그려져 제작되곤 했다.

그런가 하면 17-18세기 바로크 유럽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특유의 패턴들도 발견되는데, 예컨대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널리 애용되던 이른바 ‚그로테스켄베르크 (Grotesenwerk)’는 상상의 동식물 문양이나 신화적인 형상들을 양식화한 정교한 문양을 뜻하는데 이후 도자기 제작을 통해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으로 전파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유럽풍 꽃문양 (European flowers)’으로 불리는 꽃, 들딸기, 곤충 패턴도 네덜란드의 정물화의 유행과 새롭게 대두된 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서 부상한 문양이었는데, 특히 빈 뒤 파키에 공장에서 생산한 강열한 적색과 자주색 안료로 그려진 유럽풍 꽃문양 도자기들은 바로크 시대 도자기 중에서도 핵심 감상 포인트로 꼽힌다. 바로크 도자기는 그 어느 미술품이나 그렇듯이 작품과 관련된 배경과 소유자 및 출처가 그 작품의 진가를 더해주는 미술품이다. § All Images courtesy © LIECHTENSTEIN MUSEUM. Die Fürstlichen Sammlungen, Wien. Photo: Coppitz.

* 이 글은 본래 『오뜨』지 2006년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임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