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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 20세기 영국 표현주의 회화의 거장

FRANCIS BACON AND THE TRADITION OF ART

2013년 11월12일 화요일 뉴욕 크리스티 미술경매소에서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루시안 프로이트를 모델로 한 습작 3부작(Three Studies of Lucian Freud)』이 1억4천2백4십만 달러(우리돈 약  1천5백2십여억원)에 낙찰되어 미술경매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에 낙찰된 미술작품이 되었다. 작품 보기

82세까지 승승장구하던 프란시스 베이컨이 마드리드를 방문하던 중 평생 지병이던 천식이 폐렴으로 악화되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며 미술계를 놀라게 했던 1992년. 특히 영국 미술계 인사들과 언론계에서는 생전 베이컨이 활동 말기 20여년 동안 작품제작을 했던 런던 작업실에 대한 뒷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고희가 넘어서도 베니스 비엔날레와 전세계 유명 미술관을 통한 전시회를 통해서 예술성을 인정받고  명성을 누리며 성공한 미술가의 인생을 살았던 그는 사적으로는 공개적인 동성연애자였으며, 별난 캐릭터를 가진 기인이자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 또 동료 미술가와 미술계 인사들 사이서는 너그럽고 인심좋은 인물로 소문난 사교계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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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앵그르의 외디푸스와 스핑크스에 바침』 1983년,  캔버스에 유채 The Berardo Collection, Sintra Museum of Modern Art, Lisbon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프란시스 베이컨 – 20세기 영국 표현주의 회화의 거장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설가, 작가, 평론가인 알베르토 망겔 (Alberto Manguel)에 따르면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의 그림들이 그토록 일반 관객들에게 깊이 감명을 안겨주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유는 작품의 독창성 외에도 남다르게 정열적이고 극단적이었던 화가의 성격과 일대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모름지기 관객들은 화가의 성격과 생애를 알고 나서 작품을 대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작품에 대한 친밀감과 묘한 애착까지 키우게 되는 때문이다.

1909년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 1992년 스페인 마드리드 사망. 비밀스러운 작업실의 소유자이자 유럽 곳곳을 떠돌며 다채로운 애정행각을 서슴치 않았던 정열의 동성연애자. 인간의 고독, 잔혹, 공포를 주제 삼아서 주로 인간의 신체나 인물화로 표현한 영국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이 20세기 서양 미술에 기여한 독창성과 미술사에서 점하고 있는 위상과 작품세계는 유난히 기인적인 한 평생을 살고 간 그의 일생에 못지 않게 별나고 흥미롭다.

그의 사후, 이전까지만해도 신비로 둘려싸여 있던 그의 작품 세계와 작업실에 대한 비밀이 하나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혹은 화가에 의해 직접 찢겨 망가뜨려진 캔버스 조각들, 여러 고서적과 잡지에서 오려져 흩어진 사진들과 책갈피 스크랩, 물감으로 덕지덕지한 작업실 벽 등 화가의 창조 공간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작업실 사물들과 산만함은 물론이려니와, 생전 그림을 그려 판 수입의 상당에 대한 세금 납부의 의무를 상습적으로 피해 온 탈세자였음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해 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은 화가가 태어난 도시 더블린에 가면 런던에 있던 그의 리스 뮤스 스튜디오 (Reece Mews Studio)는 이제 휴 레인 갤러리 (Hugh Lane Gallery)로 이전되어 예전 모습 그대로 재현된 채 전시되고 있어 그의 옛 작업실 분위기를 경험해 볼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공포, 잔혹, 고독을 표현한 외톨이 화가
근현대 미술사를 되돌아 보건대, 20세기는 전에 없이 다양한 사조 (ism)와 화파들 (schools)이 각축을 벌이며 이념적∙미학적 실험을 거쳤던 시절이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태어나 성장한 청년기 유럽은 양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격동의 세월이었으며 이를 배경으로 우후죽순 등장한 미술 운동이 각축을 벌이던 창조적 폭발기이기도 했다. 베이컨도 예외없이 그같은 전유럽적 창조적 기운에 영향을 받았다.

사춘기의 화가는 – 역사적 추측에 따르면 화가의 동성애적 기질을 문제 삼았던 – 부모와의 갈등과 충돌 끝에 1925년 16살 나던 해 고향 더블린을 떠나 런던으로 떠났다. 이듬해 베이컨은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매료를 느껴 베를린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독일 바우하우스 (Bauhaus) 전통의 가구 디자인과 장식 미술을 배워와 런던에서 잠시나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베이컨의 예술적 감성을 뒤흔든 당시  미술은 뭐니뭐니해도 1920년대 초현실주의 (Surrealism)와 피카소 (Pablo Picasso)의 회화 세계였다. 베이컨은 특히 초현실주의에 영감받았던 1920년대말경 피카소의 그림을 매우 아끼고 흠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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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실내 풍경 (Studio Interior)』 1934년경, 종이에 파스텔, Marlborough International Fine Arts, Photo: Herbert Michel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베이컨이 그린 1934년경 작 『작업실 실내 풍경 (Studio Interior)』(말보로 인터내셔널 파인 아트 갤러리 소장)은 그보다 약 15년전인 1928년에 피카소가 그렸던 『탈의실 문을 열고 있는 여인 (Bather opening a Beach Hut)』(파리 피카소 미술관 소장)의 유기적 형상에서 직접 영향 받아서 베이컨식으로 해석한 초기작이다.

20세기초 유럽 화가들은 흔히들 제각각의 미적 이념과 이론적 정당화를 위해서 비슷한 생각과 주장을 공유하는 동료 예술인들과 화파를 형성해 활동하곤 했다. 하지만 독불장군, 외톨이 화가 베이컨은 독학 화가였다. 호주에서 영국으로 온 무명 화가 로이 드 메스트르 (Roy de Maistre)로 부터 잠시 받은 그림 사사가 베이컨이 화가가 되기까지 받은 미술 교육의 전부였을 뿐 단 한번도 정식 미술 교육 기관이나 학교 신세를 지거나 그 어떤 화파에도 소속된 적 없는 외톨이 화가였다.

흔히 베이컨 미술 전문가들은 베이컨의 미술 경력에서 1920년대를 베이컨 양식 형성의 출발기라고 규정하며, 제2차 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를 넘어서야 비로소 양식의 완성단계를 이룩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캔버스와 물감을 갖고 실험을 거듭하던 젊은 화가 지망생 베이컨은 습작 대다수를 스스로 찢어 버리거나 불태워 없앴던 이유로 해서 오늘날 그의 초기작품은 거의 확인해 볼 길이 없는게 안타깝다.

비록 미술 학교에 발을 디뎌본 적 없는 독학 화가 베이컨이지만 미술 이외에도 문학, 영화, 음악 등 예술 다방면을 넘나드는 왕성한 예술 향유가였다. T.S. 엘리엇 (T.S. Eliot),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같은 근대 문호들의 문학 세계에 익숙해 있었으며, 영화에도 조예가 깊어서 에이젠슈타인에서 비스콘티에 이르는 근현대 거장 영화인들과 개인적인 친분까지 맺으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젊은 시절부터 널리 여행해 본 경험 덕택에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와 스페인어도 할 줄 알았다. 미술 분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베이컨이 열정을 바쳤던 과거 거장들은 스페인 바로크 미술이 거장 벨라스케즈 (Velázquez), 렘브란트 (Rembrandt), 앵그르 (Ingres), 반 고흐 (Van Gogh), 수틴 (Soutine) 등 이었으며, 고대 이집트 미술과 그리스 미술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제2차 대전 이후 유럽 개인주의 미술의 최전선
20세기에 범람했던 온갖 이즘과 사조의 홍수 속에서 모든 미술인들이 화파나 동인을 형성해서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2001년도에 작고한 신비의 화가 발투스 (Balthus), 이탈리아의 조각가 쟈코메티 (Alberto Giacometti), 아르브뤼 (Art bru)의 쟝 뒤비페 (Jean Dubuffet) 등은 모두 유행하던 미술 사조와 상관없이 개인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한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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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벨라스케즈의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을 본딴 습작』 1953년, 캔버스에 유채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20세기 전반기 유럽을 뒤흔든 양차 세계 대전과 각종 미술 운동에 이어 20세기 후반 뉴욕에서 이어 숨가쁘게 전개된 전후 추상표현주의 운동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마크 로드코 등 포함)과 개념주의 미술 사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이컨은 런던에 남아 거주하면서 아무런 미술 운동이나 화파에 소속되지 않은채 홀연히 작업했다. 그래서 베이컨은 추상주의, 기학주의,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또 스스로를 어떤 특정한 화풍을 대변하는 화가로 규정하거나 지칭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영국 BBC 라디오 대담(1962년)이나 『타임스』 紙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터뷰 기사(1963년)를 돌이켜 보면, 그는 고전주의 화가도 그렇다고 추상 화가도 아닌, 화가 내면에 지닌 개인적인 공포와 강박관념을 폭력적이고 보기 불편스러운 이미지로 들추어 표현하는 아마츄어 집착적 망상가가 직업적 화가 (畵家)로 화신 (化身)한, 말하자면 ‚20세기 시대정신 (Zeitgeist)’이었다.

1950년 이집트 카이로 여행에서 젊고 패기넘치는 미술 평론가 데이빗 실베스터 (David Sylvester)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베이컨은 특히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평론가 실베스터를 통해서 자신의 미술세계를 해명하곤 했으며,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에서 초대작가로 작품을 선보인 것을 계기로 국제 화단에 본격적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당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된 베이컨의 12점 작품들 가운데 『벨라스케즈의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을 본딴 습작 (Study after Velàs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1953년 작)은 커다란 반향과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다.

베이컨이 묘사한 이노센트 10세 교황은 17세기 살았던 복싱 링을 연상시키는 노랑색 우리에 갖힌채 얼굴 가득이 보라색 히스테리에 질려 절규하고 있다. 기독교 교권이 패권을 잃은 후 종교적 방향을 상실하여 세속화된 근대 사회라는 새 철창 안에 갇힌 20세기 근대인의 자화상이다. 미술평론가 실베스터와 가진 몇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서 마치 뭉크의 『절규 (Scream)』 처럼 20세기의 공포의식, 고독, 인류의 절박감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베이컨을 설명한 바 있다.

이 그림에서 노랑색 세로줄로 표현된 강박적인 분위기는 티치아노 (Titian)가 16세기에 그린 『필립포 아르킨토 추기경 초상 (Portrait of Cardinal Filippo Archinto)』(1551-62)에서 영감받은 요소로, 티치아노가 그린 아르킨토 추기경 얼굴을 가리막이로 반쯤 가려놓고 묘사한 데에서 따 온 것임을 미뤄볼 수 있다. 아르킨토 추기경은 르네상스 시대에 밀라노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정치적인 음모에 휘말려 권좌에서 실추된 바 있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교황이라는 막강한 종교적 정치적 권위의 인물조차 편지풍파와 운명 앞에서는 가녀린 한 인간에 불가함을 말해 주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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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반 고흐 초상화를 위한 습작 제6번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VI)』 1957년, 캔버스에 유채, London, Arts Council Collection and Hayward Gallery © The Estate of Francis Bacon/VBK, Wien, 2003

벤 니콜슨 (Ben Nicholson)과 루시안 프로이트 (Lucian Freud)와 더불어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 화가로서 인정을 받은 베이컨은 1956년 생애 최초로 자화상 그리기를 시작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이컨은 책에 실려 인쇄된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그림인 『타라스콘의 거리 화가 (The Street Painter of Tarascon)』(1888년 작)를 발견하고 자화상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반 고흐의 『타라스콘의 거리 화가』 자화상은 제2차 대전중에 독일에서 소실되어서 더 이상 진품을 확인해 볼 길이 없는 아쉬운 작품이 되버렸지만 인쇄판이나마 베이컨에게는 자화상 제작에 촉매제가 되어 준 요작이 되어 주었다. 『반 고흐 초상화를 위한 습작 제6번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VI)』(1957년 작)은 반 고흐의 자화상에서 영감받아 그린 총6편의 자화상 연작들 가운데 마지막 6번째 작품이다.

육신 살덩어리 그리고 죽음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베이컨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던 1962년에 완성된 문제작 『십자가에 못박힘 3부작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1962년 작)은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되어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전시장 디스플레이를 위해 운반되었고, 전시가 끝나자 마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구입해 가져갔다던 그 화재의 그림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도살장과 동물의 살덩어리 그림에 매료되고 했다…아! 죽음의 냄새…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에 목박힌다 함은 전혀 다른 [종교적] 의미 를 띠고 있음을 알지만 무신론자에게 도살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행위의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베이컨은 이 작품의 제작 동기를 설명했던바 있다. 이 작품은 차임 수틴 (Chaim Soutine)이 한창 도살장 그림 작업에 매료되어 있을 즈음인 1925년에 파리 작업실에서 그린 『도살된 숫소 (Slaughtered Ox)』 그림과 창작 동기를 함께 하고 있지만, 베이컨은 사진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겼고 수틴은 도살장에 직접 가서 관찰한 것을 그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1962년 런던 테이트 회고전, 1963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1967년 미국 피츠버그 세계박람회 카네기 미술대상 수상 [베이컨은 이 상 수상을 거절했다.], 루벤스 미술상, 1968년 런던과 뉴욕에서 말보로 갤러리 전시회, 1971년 프랑스 그랑 팔레 (Grand Palais) 개인전 등 베이컨의 커리어 행보는 그야말로 숨가쁜 속도로 상향행진을 계속했고 전세계 미술계는 프란시스 베이컨을 20세기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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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십자가에 못박힘 3부작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 1962년, 캔버스에 유채와 모래 가루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그는 주로 작업실에 밝고 선명한 자연광이 들이치는 아침 시간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오후와 저녁 시간에는 맥주집과 바에서 동료 미술가와 친구들과 만나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충직한 미술 친구 쟈코메티와 프로이트 외에도 베이컨의 친구 겸 초상화 모델이 돼 주었던 피터 레이시 (Peter Lacy), 조지 다이어 (George Dyer) ,미셸 레리 (Michel Leiris), 친구이자 『보그 (Vogue)』 誌 사진가였던 존 디킨 (John Deakin), 친구 존 에드워즈 (John Edwards) 등은 다 60년대에 만난 보물같은 친구들이었다. 정말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세월이었다.

초상화 – 불멸을 향한 몸부림 그러던 1971년 봄, 조지 다이어가 베이컨이 머물던 파리의 한 같은 호텔방에서 자살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봄 사진가 존 디킨이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베이컨은 전에 없이 자화상을 주력해서 그렸다. 사진가 역할을 해 주던 존 디킨이 사라진 후 베이컨은 거리의 즉석 사진자동 판매기에서 여권 사진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어 자화상으로 옮겼다. 왜 70년대 이후로 유독 자화상을 즐겨 그리기 시작했느냐는 평론가 실베스터의 질문에 „주변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사라져 갔기 때문“이라고 화가는 대답했다.

1973년의 초상화 3부작 『3편의 초상 – 조지 다이어 초상, 자화상, 루시안 프로이트 (Three Portraits – Posthumous Portrait of George Dyer, Self-Portrait, Portrait of Lucien Freud)』>은 이렇게 해서 그려진 초상화 연작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보다 3년후에 그려진 『미셸 레리의 초상 (Portrait of Michel Leiris)』는 프랑스인 지성인 소설가 미셸 레리를 모델로 해 그려진 초상화로서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한  얼굴 모양을 일부러 비대칭적으로 일그러뜨려 표현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위대함과 무의미함 사이의 간격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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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미셸 레리의 초상』 1976년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자화상의 대가 렘브란트는 생전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현재 빈 미술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1657년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생애 말년기 경제적  수난으로 일그러지고 흉칙해진 화가 자신의 얼굴을 기록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이 베이컨을 매우 감명시켰던게 분명하다.

과제로 남아있는 베이컨 신화 풀기 일단 미술사 교과서에 거장으로 거론된 화가의 이름은 웬만해서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미술평론가 데이빗 실베스터가 1962년부터 1986년까지 베이컨을 상대로 한 마라톤 인터뷰를 펼쳐가며 베이컨의 미술 세계에 대한 화가의 해명을 기록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프란시스 베이컨의 창작 동기, 영감의 원천, 재료 활용 방식과 테크닉 등에 관한 비밀은 거의 규명이 되었지만, 정작 과거 서양 미술의 대가들의 작품 세계와 베이컨의 회화 세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은 아직도 해결을 기다리는 중대한 연구과제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베이컨 사후 10년여년이 흐른 지금,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술의 전통 (Francis Bacon and the Tradition of Art)』 展이 겨냥하고 있는 바는 베이컨 미술이 과거 거장들의 작품 세계로 부터 받은 영감이 어떻게 재해석 창조되었는가를 조명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베이컨이 과거 서양 미술의 거장 화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모 (模)하고 재해석한 작품만을 만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독학 화가로서 과거 거장들과 동시대 주변 예술인들의 그림, 조각, 사진, 영화 등을 부지런히 모으고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 영감을 찾았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세계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다.

1987년 파리 르롱 갤러리에서 열였던 베이컨 전시회를 두고 프랑스 언론이 “베이컨 신화 (Bacon Myth)”라고 부르며 의문을 제기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술의 전통”전은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서 내년 1월 18일까지 전시를 계속하며, 이어서 스위스 바젤 근방 도시 리헨 (Riehen)에 있는 바이얼러 재단 갤러리(2004년 2월7일-6월20일)로 옮겨 전시를 계속할 예정이다. Images courtesy: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 지 2003년 1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시간에 쫒기는 손님은 들어오지 마세요

VIENNESE COFFEE HOUSE

여유와 사색의 공간 비엔나 커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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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제 6구역에 있는 카페 슈페를 (Café Sperl).

바쁜 사람들과 할 일 없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곳
„비엔나 카페하우스에 앉아 있기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시간..“ –도심 속의 섬 비엔나 카페하우스는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만나서 사사로운 토론을 나눌 수 있는 착상과 영감의 공간이 되어주는가 하면, 사무실 동료들의 눈을 피해 비즈니스 상대를 만나 사업을 구상할 수 있는 전략의 공간이기도 하며, 별달리 할 일 없이 이웃 테이블의 익명의 고객들이 만들어 내는 웅성대는 목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그날 신문이나 시사 잡지들을 뒤적이는 한량(閑良)들이 나른한 여가를 보내는 낭만의 공간이자 부유한 중장년 여성들이 모여 사교계 가십거리로 수다를 떨던 정보 교환소이기도 하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21세기 오늘, 눈코뜰 새 없이 바쁜 현대인들이 잊고 살았던 무위 (無爲)와 낭만적인 여유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는 곳이 바로 비엔나 커피하우스 (Wiener Kaffeehaus)일 것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남미 지방에서 커피는 바쁜 오후 졸음을 쫏고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한 각성제이다. 높다랗고 좁은 커피 바에서 진한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들이키고 에너지를 재충전한 후 바쁜 일상으로 재돌진하는 커피 고객들을 흔히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며, 느긋이 앉아 커피를 즐기는 카페하우스에 비해 카페 바가 더 성행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비엔나의 카페하우스는 그와는 사뭇 다른 곳이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마 벗어나 아무의 방해도 받지않고 홀연히 독서를 즐기거나  사색의 시간을 갖는 곳이며, 친구나 애인 혹은 지인들과  삼삼오여 모여 담소를 나누는 대화의 공간이다. 그리고 바쁜 직장인들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경험하기 위해서, 양복을 빼입고 오후 외출을 단행한 노인들이 한 잔의 멜랑쥬 커피와 애플슈투루들(Apfelstrudel, 사과 파이의 일종)을 맛보기 위해서, 그리고 정말 할 일 없이 매일 드나드는 단골 손님이 간단한 아침 식사와 커피를 즐기기 위해서 카페하우스를 찾는다.

„카페란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옆자리 벗들이 있어야 하는 곳“ – 문화 창조의 대폭발기 20세기초엽 비엔나 모더니즘 시대에 살았던 비엔나 출신 지성인 알프레드 폴가르 (Alfred Polgar)는 당시 비엔나에서 번성한 카페하우스를 두고 이렇게 정의했다. 카페 안 구석구석마다 테이블과 의자에 홀로 섬처럼 앉아 있는 손님들이 동시에 함께 카페 군중을 형성하는 역설의 공간, 비엔나 카페하우스. 그래서 폴가가 그가 즐겨 드나들던 카페 센트랄을 일컬어 „시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죽여야 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고 한 기담은 유명하다.

비엔나 카페하우스의 유래와 오늘
비엔나에서 커피하우스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때는 17세기말경, 비엔나가 터어키 군의 공격을 받아 거의 점령될 위기를 맞았다가 폴란드군의 군사 원조 덕택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비엔나를 재탈환한 1685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급히 쫏겨난 터어키군이 미쳐 챙기지 못하고 버려두고 간 커피콩 자루를 콜시츠키 (Georg Franz Kolschitzky)라는 이름의 폴란드 군인이 발견해 커피음료를 처음 비엔나인들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비엔나인들은 커피콩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커피콩을 낙타똥인줄 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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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쥬 커피를 주문하면 제공받게 되는 전형적인 커피 세트. 은쟁반 위의 커피 한 잔, 물 한 잔, 그리고 각설탕.

지금도 그렇듯이 당시 콜시츠키는 터어키식 커피는 커피콩을 볶은 후 갈아서 주전자에 끓는 물과 커피 가루를 한데 섞어 우려내는 제조법을 사용했는데 너무 진하고 쓴맛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한다. 곧이어 이듬해인 1868년, 아르메니아계 이민자 요한 디오바토 (Johann Diobato)는 커피 가루가 잔 밑에 가라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특수 필터 방식을 새로 고안하고 커피에 우유를 첨가하여 맛을 부드럽게 개선한 커피를 소개해 커피의 대중화를 본격화하는데 기여했다.

17세기말 합스부르크 황실 사업인증허가소가  „터어키식 음료를 커피라는 형태로 조리해 파는 곳“이라고 한 최초의 비엔나식 카페하우스는 지금의 비엔나 제1구역 중심부 돔가세 거리에서 문을 열였다. 얼마안가서 비엔나 도심에는 여러 카페하우스들이 우후죽순 뒤따라 문을 열었다. 당시만해도 때는 절대주의 시대였던 만큼 귀족 남성들만이 카페하우스에 출입할 수 있었고, 신문을 읽거나 카드 놀이, 당구, 체스 놀이를 하는 놀이공간 겸 커피와 당과류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사교 클럽 역할을 했다. 지금도 유서깊은 비엔나 카페하우스에 마다 비치되어 있는 신문잡지들은 바로 옛 귀족 신사들이 드나들던 카페하우스로부터 전해져 온 전통의 흔적 가운데 하나다.

오늘날 비엔나에서 옛 카페하우스의 실내 장식과 분위기를 가장 원형 가까이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카페 슈페를 (Café Sperl, 현재 비엔나 제6구역 소재)에 가면 현란한 바로크식 대리석과 금박 장식으로 찬란한 실내 장식과 골동 당구대들이 널찍한 카페 실내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19세기 초엽부터 여성들의 카페하우스 출입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자취를 감춘 카페 밀라니가 그같은 최초의 카페였다. 구스타브 말러 같은 19세기 비엔나 음악계의 큰별들도 카페하우스에서 착상에 열중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비엔나를 찾은 관광객들이 들러가는 카페 데멜 (Café Demel, 호프부르크 입구 바로 앞 콜마르크트 (Kohlmarkt) 거리에 위치)은 1786년 처음 문을 연 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2세기반 여 동안 황실 전속 당과류 공급업자로서 현재까지 오스트리아 최고의 당과생산자로서의  자부심을 이어가고 있으며, 역시 황실 당과류 공급에 기여했던 하이너 (Heiner)의 아담한 실내는 달콤한 당과류를 찾는 여성 노인들로 항상 북적댄다.

비엔나 카페하우스가 문화 제도로 정착하기까지 그러니 비엔나 카페하우스는 단순히 커피 마시는 곳이라는 의미 훨씬 이상의 문화 제도라고 하는 이유는 능히 짐작이 간다. 특히 카페하우스는 주머니 사정이 그다지 넉넉지 못한 보헤미언들과 예술가들에게  매서운 겨울 날씨와 허기에서 잠시나마 실내의 온기, 대화의 상대, 휴식처, 따뜻한 차와 요기거리 음식을 제공해 주는 안식처였다. 해서 예술가, 문학인, 근대 정치적 격동기를 헤쳐가야 했던 무명 정치가들 중에는 단골로 드나들며 일과를 보내곤 했던 카페하우스의 주소를 사무실 겸 업무용 주소로 활용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웨이터들은 단골 손님이 평소 주문하는 커피의 종류를 일일이 기억할 뿐만 아니라 손님의 직업과 직함까지 잊지 않고 정중하게 모셨으며, 손님이 돈이 떨어져 찻값을 지불하지 못하면 아무런 조건없이 기꺼이 외상도 그어 주었다. 하루종인 커피 한 잔 시켜 놓고도 추가 주문을 강요하는 사람 없으며, 안면있고 빠릿하기까지 한 웨이터라면 빈 커피잔 옆에 놓인 작은 크리스탈 물잔이 빌 때마다 눈치있게 새 잔을 놓아주고 간다.

비엔나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작은 은쟁반 위에 놓은 커피 한 잔 옆에 반드시 작은 유리 물잔이 켵들여 나온다. 커피맛 전문가들은 1) 커피맛을 배가하기 위해서, 2) 비엔나 북부 산꼭대기에서 받아 온 천연 산수의 맛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3) 커피 속의 카페인을 중화하고 소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커피와 물을 나란히 함께 제공하는 관습이 탄생했다고 하나, 비엔나 커피 문화 연구가들의 의견은 좀 다르다. 즉, 커피를 여러잔 주문할 경제적 형편이 못되는 고객들이 주문한 커피를 다 마신 후 또 주문하지 않고도 편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한 카페하우스의 자상관대한 인심과 매너 때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덕분에 월츠의 아버지 요한 스트라우스는 카페 하우스에서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카를 크라우스는 카페에서 그의 유명한  문화 비평지 《횟불 (Die Fackel)》을 출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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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전환기, 문필가, 언론가, 지성인들이 커피 한 잔씩 시켜 놓고 하루종일 독서와 토론을 하던 그린스타이들 카페 (Café Griensteidl). Graphic: Reinhold Völkel, 1896년 작 Source: Stadtchronik Wien, Verlag Christian Brandstädter p. 360.

비엔나 카페하우스가 비엔나 사회문화 속에서 독특한 제도 공간으로서 유명해 지기 시작한 때는 20세기초 모더니즘 발흥기. 당시 문화게를 주도하던 소설가, 언론인, 음악가, 화가, 그리고 예술 후원가들과 정치인들이 모여 지적인 토론과 독서 활동을 위한 장場으로 애용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비엔나 제1구역의 프라이융 (Freyung)  궁전 건물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세양식 건물 외장으로 유명한 카페 센트랄 (Café Central)은 20세기 초 유명한 독설가 언론인 카를 크라우스 (Karl Kraus)와 그의 벗이자 문장가 페터 알텐베르크 (Peter Altenberg)의 단골 카페였다. 또 바로 이 카페 센트랄에서 러시아에서 비엔나로 갓 이민 온 젊은 혁명사상가 트로츠키가 독서와 착상에 골몰하였다고 당시 일간지는 적은 바 있기도 하다.

지금은 옛 실내장식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을만큼 실내공간이 개조되었지만 그린스타이들 카페 (Café Griensteidl)에 가면 의례 소설가 헤르만 바 (Hermann Bahr), 아르투르 슈니츨러 (Arthur Schnitzler), 후고 폰 호프만스탈 (Hugo von Hofmannsthal)이 커피 한 잔씩 시켜 놓고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에는오스트리아 근대 문학의 대문호인 로베르트 무질(Robert Musil), 헤르만 브로흐 (Hermann Broch), 프란츠 베르펠 (Franz Werfel) 등이 하루가 멀다하고 헤렌호프 (Café Herrenhof) 카페를 드나들었으며, 구스타브 클림트 (Gustav Klimt), 에곤 실레 (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같은 화가들은 물론이고 오토 바르너 (Otto Wagner)와 아돌프 로오스 (Adolf Loos) 등 근대 거장 건축가들이 무지움 카페 (Café Museum)와 카페 슈페를 (Café Sperl)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런가 하면 카페 란트만 (Café Landtmann)은 신흥 부유층 인사들과 연예인들이 즐겨 출입하는 곳으로 지금도 이곳을 가면 어딘가 떠들썩하면서도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비엔나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다? 흔히 비엔나인들은 스스로를 조예깊은 커피 애호가들이라고 여긴다. 해서 개개인마다 가장 선호하는 커피가 있고 또 저마다 고집하는 커피 하우스도 있다. 지금까지 비엔나 커피하우스들이 인정하는 전통 비엔나식 커피 종류만도 34종이 알려져 있다. 해서 비엔나 커피하우스에 들어가 테이블을 골라 잡아 앉아 있노라면 한참 후에 주문을 받으러 다가오는 웨이트에게 „커피 한 잔 주세요“고 했다가는 „어떤  커피?“라며 웨이터는 허리를 곧추 세우고 오른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되물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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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란트만(Café Landtmann)의 실내 공간 모습. Photo courtesy: Café Landtmann. 부르크링 순환도로 상에 자리잡고 있는 카페 란트만은 브루크테아터 (Burgtheater) 국립극장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이유로 해서 예로부터 연예인들이나 신흥부유층 고객들이 즐겨 드나들었다. 이 카페의 웨이터들은 유난히 제각기 개성이 강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비엔나 커피의 국가 대표로 꼽히는 멜랑쥬 (Mélange, 프랑스어 식으로 발음한다)는 커피와 뜨겁게 데운 우유를 반반씩 섞은 커피, 모카 (Mokka)는 아무것도 섞지 않은 아프리카산 모카 블랙 커피를 의미하며, 브라우너 (Brauner)는 우유를 아주 약간 섞은 커피를, 카푸치너 (Kapuziner)는 블랙 커피에 우유와 휘핑크림을 넣은 커피를 말한다. 일부 커피 전문가들은 멜랑쥬 같이 우유를 첨가한 커피는 커피의 제향을 파괴하기 때문에 그 대신 블랙 커피에 오렌지향 리커 (liquor)를 넣은 마리아 테레지아 커피 (Maria Theresia)나 약간의 물을 탄 블랙 커피에 럼주와 휘핑 크림을 넣은 피아커 (Fiaker)를 권하기도 한다.

사람들 속에 휩사여도 고독한 섬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때론 능청스럽고 때론 퉁명스러운 카페하우스 웨이터들의 곤조에 매력적으로 맞상대할 자신이 있으다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사로부터 한발짝 비껴 서서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을 경험해 보고 싶다면, 비엔나의 카페하우스에 가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가장 취향에 맞는 커피 한 잔과 전통 초컬릿 토르테 (Torte)나 제철 과일로 만든 케이크 한 조각을 맛보는 것도 잊지 마시기를.

* 이 글은 본래 『오뜨』2003년 11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