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회화의 대창고

LEOPOLD MUSEUM – LEOPOLD COLLECTION

레오폴트 컬렉션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트 재단 미술관

무지움스쿼르티에서 재개관 무지움스쿼르티에(MQ) 레오폴트 미술관 (Leopold Museum-Privatstiftung)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이행되던 시기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야릇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탄생하여 근대 지성계를 뒤흔들기 시작하는가 하면, 아놀드 쇤베르크의 근대 음악 이론, 아돌프 로오스 (Adolf Loos)와 오토 바그너 (Otto Wagner)의 유겐트스틸 (Jugendstil)의 근대 건축 양식이 등장하고 문학과 비판적 언론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세기말 빈 (Fin-de-Siècle)”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이 때는 지적 창조적 에너지가 곳곳에서 분출하던 빈 모더니즘 (Wiener moderne) 시대는 세기말 특유의 종말적 비관주의와 새시대에 대한 이상주의가 공존하던 시대였다. 19세기 산업혁명과 낭만주의로 향한 회귀적 욕망이 잔존하는 가운데 20세기 근대주의가 표방하는 개인주의가 충돌하던 이 시기, 오스트리아 빈의 근대 미술은 스캔들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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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미술관 내 실러 전시장 광경.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19세기 후반기까지 줄곧 화려하고 장대한 바로크 회화 양식이 보편화되어 있던 빈에 장식적인 고전주의를 배격한 새로운 회화 양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스 마카르트를 위시로 하여 빈 분리파 운동 (Wiener Secession)을 이끈 구스타브 클림트,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에곤 쉴레와 오스카 코코시카 등이 외부 시대의 혼돈과 내면적인 감성과 갈등세계를 표현한 그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이는 같은 시기 파리에서 일던 상징주의, 독일과 북구 유럽의 표현주의 운동과도 맥을 함께하는 당대의 보편적인 사조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표현주의가 세계적인 미술사조로 정식 인정을 받기 시작한 때는 20세기 후반에 접어 든 이후, 한 개인 미술 수집가의 공헌이 크게 기여했다.

루돌프 레오폴트라는 한 개인 컬렉터가 50년대 중엽부터 오스트리아 근대 표현주의 회화 분야에 걸쳐 수집해 온 작품수는 오늘날 5,266점에 이르며,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의 컬렉션이 지니는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1994년 개인재단 설립은 지원해 주어 오늘날 레오폴트 재단 미술관으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오스트리아인들의 수집욕은 전통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옛 합스부르크 왕국 시절, 황실은 영토 수집과 박물관 진귀품 수집에 열을 올렸었고 개인들은 크게는 이름 앞에 붙는 신분 타이틀을 작게는 실내를 장식하는 악세서리와 우표수집에 집착했을 정도였다. 안과의사에서 국립 미술관 관장으로 변신한 루돌프 레오폴트 (Rudolf Leopold, 1925 * -2010 ✝) 박사는 그 가운데에서도 전설적인 실례로 꼽힌다.

부모님에게서 받은 고등학교 졸업 자격 시험 응시료를 평소 눈여겨 두었던 에곤 쉴레의 그림을 사는데 몽땅 써버린 것이 개인 미술 컬렉터로서의 생을 택한 첫출발이었다고 레오폴트 관장은 회고한다. 이후 의과 대학 2년차 되던해인 1947년 도로테움 미술품 경매장과 빈 미술사 박물관을 처음 방문하게 되면서 회화에 대한 애정과 전문가적 안목을 키우기 시작했다. 공부를 마친 해인 1953년부터 레오폴트 관장은 틈틈히 빈 대학 미술사학과 강의를 청강하고 전세계 미술관을 기행하면서 감식안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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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컬렉터 루돌프 레오폴트 내외.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레오폴트 미술관을 구성하고 있는 간판 소장목록은 두말할 것 없이 에곤 쉴레 컬렉션이다. 20대초 청년기부터 쉴레에 대한 혼신의 연구와 작품 수집을 해 온 레오폴트 관장은 그래서 쉴레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임을 자처하며 쉴레 연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우선 레오폴트 미술관을 거쳐가야 한다는 미술계 내 암묵적 원칙을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1950년대까지만해도 터무니없이 평가절하되어 온 쉴레가 세계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때는 60년대 이후부터. 19세기초 빈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화랑이던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를 운영하다가 제2차대전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오토 칼리르 니렌스타인 (Otto Kallir-Nirenstein)이 일찌기 미국 대도시 여러곳에서 클림트와 쉴레를 비롯한 빈 표현주의 회화를 소개했으나 미술계의 반향을 얻지 못한채 였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가 쉴레의 주요 작품들을 이미 다수 소장하고 있었으나 50년대 중반까지 대중 관람을 할 수 없었던 것도 빈 표현주의의 대중화에 걸림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미롭고 탐미주의적인 클림트의 여성 이미지에 반해 거칠고 우울한 에곤 쉴레의 작품은 국내외 미술사가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가혹한 평가를 면치 못했다. 적나라한 포즈와 신체묘사에 관객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주제 (예를 들어 『신부와 수녀 (Kardinal und Nonne)>』는 남녀 성직자의 성적 욕망과 갈등을 표현한 작품)를 묘사한 그의 작품은 외설 퇴폐라는 혹평을 받고 있었으나 레오폴트 관장은 바로 그 점에서 쉴레 회화의 예술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빈을 비롯한 해외 미술경매장을 다니며 쉴레의 작품을 구입할 때마다 주변인들의 조롱과 비웃음도 감수해야 했다. 그 덕분에 쉴레의 작품이 평가절하되던 1950년대초 쉴레의 『은둔자들 (Die Eremiten)』(1912년 작)은 오스트리아화 3만실링 (현재 우리돈 약 300만원 가량)이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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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레의 『은둔자들 (Die Eremiten)』1912년 작품.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요한 슈트라우스가 어린시절 떠오르는 악상을 침대보에 적어 작곡을 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에곤 쉴레 (Egon Schiele, 1890-1918)도 어린나이에 식탁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신동 화가로 알려져 있다.

툴루즈 로트렉이 매춘부를 소재로 그린 그림들을 보고 하층계급 여성들을 모델로 삼아 그리기 시작한 그는 한때 미소녀 스케치를 한 혐의로 감방 생활을 하는 고충까지 감수하며 성으로 갈등하는 그의 내면세계를 줄기차게 표현했다.

그의 수집 열정은 곧 클림트로 이어져 현재 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작품 『죽음과 삶 (Tod und Leben)』(1911/1915년)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빈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져 있는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 1883-1908)의 작품은 그가 쉴레 전문 컬렉터로소의 악명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그의 소장목록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순수 빈 출신으로 에드바르트 뭉크와 반 고흐를 결합한 오스트리아식 “야수주의”를 추구했던 게르스틀은 아놀드 숀버그와 절친한 친구사이였고 쇤베르크의 아내와의 불륜의 사랑으로 갈등하다 때이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였다. 게르스틀은 평생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한 작품도 팔지 못하는 불운에 시달렸던 반면 쉴레는 1914년부터 약 5-6년간 활발히 작품 매매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빈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프로이드의 성심리학의 유행과 전통적 성윤리의식의 붕괴에 어느정도 덕을 본 때문이라고도 해석되고 있다.

현재 가치있는 게르스틀의 작품 26점 가운데 15점이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이 미술관이 또 자랑하는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는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 비해 부와 인기를 누리다 간 반근대적 화가여서 세기전환기 근대적 사고에 반발하는 오스트리아의 부패한 부르조아적 구세력을 대변한 화가여서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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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의 『상반신을 벗은 자화상 (Selbstbildnis als Halbakt)』 1904/05년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특히 코코슈카는 당시 유태인 지성인과 문학인들의 사교모임을 이끌던 여류 언론인이자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아내 알마 말러-베르펠 (Alma Mahler-Werfel)의 문화서클에서 맴돌며 오스트리아 예술인 특유의 퇴폐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그래서인지 이 보헤미언 화가의 작품들은 오스트리아의 바로크적 허장성쇠 뒤에 숨은 공허감과 허무주의로 가득하다.

해가 거듭해 가면서 레오폴트 소장품의 범위는 나날이 넓어져서 화가 오제프 도브로브스키 (Josef Dobrowsky), 알프레트 쿠빈 (Alfred Kubin), 헤르베르트 쿠빈 (Herbert Boeckl), 안톤 파이스타우어 (Anton Faistauer),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안톤 콜릭 (Anton Kolig), 빌리암 퇴니 (William Toeny)를 포함하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컬렉션을 형성해 나갔다.

그는 또 빈 모더니즘기의 회화 분야 말고도 오브제로도 관심의 폭을 넓혀 오토 바그너 (Otto Wagner)와 콜로몬 모저 (Kolomon Moser)의 유겐스틸 가구와 빈 베르크슈테테 공예품, 골동 카페트, 아프리카와 동양 조각품도 소장하고 있어 현재 레오폴트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고 있다.

레오폴트 관장이 개인적인 쉴레 애호가 겸 컬렉터로 출발하여 국립 미술관 과장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그다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외설 퇴폐 화가의 작품들을 사 모으는 과정에서 미술계로 부터 받은 수모는 차치하고라도, 미술의 문외한이면서 개인적인 노력으로 감식가의 안목을 키우고 연구 및 저술 활동을 계속해 오면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회화의 권위자로 변신하기까지 그는 그래서 집요한 자기광적인 퍼스낼리티로 악명적인 명성(?)을 굳혀 온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개인의 문화적 열정과 노력이 국가와 미술사적 유산을 지키고 알리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영광스럽게 감수할 수 있는 악명이 아닐까. All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 이 글은 본래 세종문화회관 월간회원지 『공간사랑』 지 2001년 10월호에 실렸던 것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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