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순수 이상 공간 미학

 20세기 국제건축 양식 –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쏘아올린 순수 이상(理想)을 향한 공간 미학

아들러 설리번 건축사무소가 설계해 1894년 완공한 시카고 주식거래소 빌딩. Courtesy: The Art Insitute of Chicago.
아들러 설리번 건축사무소가 설계해 1894년 완공한 시카고 주식거래소 빌딩. Courtesy: The Art Insitute of Chicago.

모더니즘 건축 제1강령: 장식을 제거하라.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 – 미국의 건축가 설리번 (Louis Sullivan)은 선언했다. 흔히 건축사를 거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더니즘 건축 세계의 핵심적 특징을 기능주의 (functionalism)라  정의한다. 하지만 20세기 초엽 1920-193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휩쓸었던 이 모더니즘은 소수의 사상적, 예술적 선구자들이 주도해 대중화시키고자 했던 상의하달 (top down)의 지극히 엘리트주의적 예술 사조였다해야 더 옳다. 그리고 모더니스트들이 앞세워 칭송했던 기능은 단순함 (simplicity)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송이었다.

근대 이전기 구시대 역사주의풍의에 대한 저항 전통적인 건축물 안팎과 내부 장식품들의 표면은 온통 저마다 시대적으로 유행하던 장식 문양들로 꾸며지곤 했다. 이같은 장식성은 20세기 전후로 등장한 여러 급진적인 모더니즘 건축가 및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반드시 배격해야 할 악취미 내지는 비윤리적인 것으로까지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건축가 아돌프 로오스 (Adolf Loos)는 ‘장식은 범죄 (Ornament is crime.)’라고 규정했고,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로 코르뷔지에 (Le Corbusier)는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1923년 출간)에서 장식적인 군더더기 없이 순수한 건축물에서 고귀한 정신성을 발견했다고 썼다.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의 선구자 페터 베렌스 (Peter Behrens)와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에게 있어서도 모더니즘 건축 정신은 이상 사회 건설과 인류의 진보를 의미했다. 젊은 몽상가들의 백일몽 같이 들릴수도 있는 이들 근대 건축가들은 분명 20세기 초 유럽 곳곳의 대기에 팽만해 있던 모더니즘 사고를 새로운 건축 및 주거 문화로 실현시킨 장본인들이다.

모더니즘 건축 제2강령: 대중에게 봉사하는 디자인이 되어라.
 ‘근대적인 신건축은 탁트이고 텅빈 열린 실내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건축 실내에는 구시대의 건축적 잔재들 즉, 공간내부의 장식물이나 부착물을 일체 제거할 것’은 모더니즘 건축의 공간 개념의 핵심이다. 그와 같은 양식적 특성은 특히나 독일에서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던 정부주도의 공공 주택 건설 프로젝트와 도시 및 조경 설계 프로젝트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마가레테 슈테-리호스키가 디자인한 프랑크푸르트 근대식 주방. 사진은 『다스 베르크(Das Werk)』 지 1927년호에 실렸던 자료사진. Courtesy: Schütte-Lihotzky Archive, University of Applied Arts, Vienna.
마가레테 슈테-리호츠키가 디자인한 프랑크푸르트 근대식 주방. 사진은 『다스 베르크(Das Werk)』 지 1927년호에 실렸던 자료사진. Courtesy: Schütte-Lihotzky Archive, University of Applied Arts, Vienna.

산업 디자인과 더불어서 건축의 표준화에 유독 열성적인 관심을 보였던 나라는 독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패배끝에 효율적이고 단일화된 경제 재건을 하루 빨리 이룩해야 했던 경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비교적 제한된 공간을 이용, 가능한한 많은 수의 주거민들을 쾌적한 환경과 저가로 수용할 수 있는 주거 건축물을 제공한다는 그같은 노력은 곧 건축물의 대량 건축 기술과 표준화 규정의 체계적인 정착에도 기여하였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 주거 생활 속에서도 널리 일반화된 현대식 주방배치는 오스트리아 여성 건축가 마가레테 슈테-리호츠키 (Margarete Schütte-Lihotzky)가 ’20세기적 신생활 환경에 맞는 표준화되고 편리한 주방 환경 창조’라는 기치 아래 1926년 디자인해 에른스트 메이 (Ernst May)가 설계한 프랑스푸르트 공공지원 주택단지 아파트용 주방에 응용한 이래 대중화된 ‘프랑크푸르트 주방 (Frankfurt Kitchen)’*이 그 원형이다.

국제 건축 양식 첫 물결은 실험주의
 오늘날 건축사에서 흔히 일컬어지는 ‘국제 건축 양식 (The International Style)’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탄생한 때는 1932년 미국 뉴욕의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이하 MOMA)에서 ‘인터내셔널 스타일’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유행중이던 최첨단 건축 전시회들이 연달아 부쳐지면서 부터였다. 1920년대에 유럽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여 순식간에 도시간 및 건축가간 보편적이고 통일화된 건축 이념과 양식이 형성되었던 만큼 국제 건축 양식이라는 명칭을 얻을만도 하였다.

근대주의 국제건축양식의 아이콘이 된 피에르 쟈네레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사보아는 1928년 착공해 1931년 완공되었다.
근대주의 국제건축양식의 아이콘이 된 피에르 쟈네레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사보아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활용해 1928년 착공 1931년 완공되었다.

특히 국제 건축 양식의 본고장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난 1920년대 무렵이 되자, 건축가들은 서로 매우 긴밀한 관계와 정보 교환 체체를 구축하며 근대 건축 이념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긴박하게 전개된 양식적 전파와 상호 영향력은 너무도 긴밀했던 나머지 개별 건축가들의 지엽적인 건축 이념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평준화 표준화될 정도였다. 자연히 그들의 관심은 보다 급진적인 사상과 양식을 건축 설계와 건축에 직접 실험으로 옮기는 일로 속히 불붙었다.

그렇지만 근대 국제 건축 양식 보편성과는 대조적으로 이를 주도했던 건축 거장들의 성격과 개성은 참으로 저마다 각양각색이었다고 한다. 독일 바우하우스와 바이마르 미술과 공예 학교의 지도자였던 발터 그로피우스는 자나깨나 건축 디자인의 사회적 측면을 고심했던 진지한 이상주의자이자 성실한 스승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스위스 출신으로서 벨기에 출신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 (Auguste Perret)와 더불어서 파리에서 건축가 활동을 시작한 르 코르뷔지에는 널리 소문난 딜레탕트 취미 건축가이자 허풍쟁이였다.

그런가 하면 흡사 수도사 혹은 고독한 철학자를 연상시킬 만큼 근엄과 강직한 근성으로 일관했던 독일의 미스 반 데어 로헤 (Mies van der Rohe)는 사생활 면에서나 미학적 신념 면에서나 절대적인 경지의 순수 형태 (pure form)의 신봉자였다.

1928년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건물을 위한 시카고 트리뷴 타워 설계 스케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발터 그로피우스. 1922년 화재의 건축공모전 안타깝게도 그의 안은 채택되지 않아 끝내 실현되지 못한 설계안으로 남아있다. © BAUHAUS-ARCHIV BERLIN.
1928 년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건물을 위한 시카고 트리뷴 타워 설계 스케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발터 그로피우스. 1922년 그는 이 화재의 건축공모전에 참여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안은 채택되지 않아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 BAUHAUS-ARCHIV BERLIN.

오늘날까지도 20세기 국제 건축 양식 하면 우선적으로 꼽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는 그 수많은 건축 프로젝트를 해 오면서도 스스로를 국제 건축 양식 계열의 건축가가 아니라고 줄곧 부인했었다. 기복이 심한 한 평생을 살면서도 언제나 비싼 양복 차림에 망토와 지팡이를 잊지 않았던 멋쟁이 댄디였든 로이드 라이트는 스스로를 몇 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 건축가라고 떵떵거리기까지 했다.

새로운 건축 재료가 가능케 해준 조형의 자유 
당시 모더니즘 건축가 및 디자이너들을 또한 깊이 매료시켰던 것들로는 산업 발달과 함께 새로 소개된 강철, 철근 콘크리트, 유리 등의 건축 신소재들이었다. 이들 신소재는 이전 건축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모양과 구조로 건축물을 지어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안겨줬던 만큼 건축디자이너들에게는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신소재가 안겨주는 건축 설계 및 시공상의 자유는 건축물 안팎 및 주변에서의 활동과 공간 활용도는 물론 빛이 모자른 북반부 유럽 지방에서는 곧 신건축 주거 문화로 이어짐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히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을 이끌었던 근대 건축의 선각자 발터 그로피우스는 「파르구스 구두 공장 (Fargus Shoe Factory)」(1911-16년)과 「쾰른 모델 공장」(1914년), 그리고 미국 시카고에 있는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건물 (Chicago Tribune  Building)」(1922년) 같은 대표적 건축 설계물을 통해서 철골 구조와 유리 재료를 단아하고 맵시있게 활용해 보였다.

1920년대에 근대 건축의 제2세대 선구자이자 건축을 시작하기 전부터 발휘해 오던 화가, 비평가, 이론가로서의 다재다능한 재주와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르 코르뷔지에(본명: 샤를르-에뒤아르 쟈네레, Charles-Éduard Jeanneret)가 유럽 곳곳을 여행한 끝에 근대 건축에 관한 가장 감명받았던 요소도 바로 철근 콘트리트라는 새로운 건축 재료였다.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스타인 드 몬치(Villa Stein de Monzie)의 실내 공간. 1926년. Photo: Charles Gérard(?).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스타인 드 몬치(Villa Stein de Monzie)의 실내 공간. 프랑스 가르슈(Garches) 소재. 1926년. Photo: Charles Gérard(?).

르 코르뷔지에가 근대 건축에 기여한 가장 큰 업적을 열거하라고 한다면, 첫째, 막이나 벽이 없는 탁트인 실내 공간에 기둥을 설치하고, 둘째, 건물 골조와 벽은 건축물을 지탱하는 기능 이외에서 그 자체로 미적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며, 셋째, 자유롭고 트인 실내 공간과 내외부 공간 간의 자연스럽고 막힘없는 연결을 위해서 벽을 가능한 한 없애도록 하며, 넷째 건물 앞면은 더이상 건물 지탱 기능을 하지 않고 오로지 겉표면 역할 만을 담당하도록 하며, 끝으로 다섯째, 지붕을 평평하게 설계하여 지붕 위에 옥상 정원을 만들어 생활 공간으로 확장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의 다섯가지 건축 건설 원칙은 오늘날까지도 서구는 물론 우리 주변에서 거주용 건축 설계에서 널리 보편화된채 활용되고 있는 이른바 국제 건축 양식의 공식 규격이 된지 오래다. 안타깝게도 르 코르뷔지에의 여러 혁신적인 안목과 비젼은 설계도 그림으로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생전 이 건축가의 탁월한 지성과 비평능력은 저서 『건축을 향하여』를 통해서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제3세대 국제 건축 양식의 여명  앞서 그로피우스와 르 코르뷔지에가 남긴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근대 건축의 순수 형태를 더 한층 정교화한 장본인은 바로 국제 건축 양식의 제3세대 거장 미스 반 데어 로헤라고 오늘날 건축사는 평가한다. 초기 독일 근대 공예 운동의 아버지 페터 베렌스의 공방에서 3년 동안 목공예 사사를 받고 1910년 베를린 박람회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 세계에 접하고 깊이 감명을 받은 것을 결정적인 계기로 삼아서 미스 반 데어 로헤는 평생을 건축물의 열린 공간과 공간의 수평적 흐름을 창조하는데에 바쳤다.

1920년대 창조적 폭발로 전성기를 누리던 베를린은 그에게 창조적 영감을 안겨주었지만, 1930년대 독일 나치 정권기는 바우하우스의 폐교와 정치와 사생활의 갈등 속에서 엄격하고 순수한 건축 미학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간 인고의 시기였다.

미스 반 데어 로헤, 필립 존슨, 루이스 칸 & 제이콥스 건축 사무소의 공동 설계로 1958년 완공된 시그램 빌딩. 현재도 뉴욕 파크애비뉴 375번지에 자리해 있는 이 철골구조 고층건물은 20세기 후반기 대도시에 보편화된 마천루 풍경을 선도한 예다.
미스 반 데어 로헤, 필립 존슨, 루이스 칸 & 제이콥스 건축 사무소의 공동 설계로 1958년 완공된 시그램 빌딩. 현재도 뉴욕 파크애비뉴 375번지에 자리해 있는 이 철골구조 고층건물은 20세기 후반기 대도시에 보편화된 마천루 풍경을 선도한 예다.

미국에서 고층 마천루로 거듭난 국제 건축 양식
 독일이 나치주의 정권과 광란의 우익 대중 영합주의로 본격적으로 접어든 1937년, 미스 반 데어 로헤는 미국 여행을 하던중 방문하게 된 광활한 미국 중서부를 보고 미국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월스트리트 증권시장의 폭락과 그로 인한 경제 대공황으로 허덕이고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를 거치면서 미국은 전에 보지 못한 번영기를 맞으리란 새싹을 보이고 있었다.

미스 반 데어 로헤에게도 새로운 건축 프로젝트와 돈벌이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독일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매우 뼈아픈 경험이었던 터라 이제 미스 반 데어 로헤는 파시즘, 공산주의, 볼세비즘, 나치즘 그 어느것도 아닌 미국의 국제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위한 국제 건축 양식을 실천할 것을 결심했다. „미스 반 데어 로헤=돈“이라는 주변인들의 바늘 섞인 농담도 바로 당시 그의 신념적 변화를 은근히 비꼬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뉴욕에 굳건히 서있는 시그램 타워 건물은 마치 미스 반 데어 로헤가 미국 자본주의를 영광화라도 하듯 극도로 모던하고 세련되게 설계된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국은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리쳐드 노이트라(Richard Neutra)에게도 행운의 나라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서 빈 모더니즘 건축가인 오토 바그너(Otto Wagner)에게서 사사를 받고 일찌기 미국으로 이미을 떠났던 노이트라는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에 국제 건축 양식을 널리 확산시키는게 공헌한 장본인이었다.

노이트라이 건축 양식은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 반 데어 로헤의 양식과 거의 유사하지만 건축물 바깥에 철근 콘크리트로 된 대형 발코니나 수영장을 매달아 부유시키는 식의 건축공학적으로 도전적인 건축 설계를 즐겨 했던 것이 특징적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러벨 건강원 건물이라든가 카우프만 가족의 사막 주택 등 개인 주문자들을 위한 설계가 주요 작품들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으로 망명온 건축가 리햐르트 노이트라가 에드거 J. 카우프만 가족의 건축 수주를 받아 설계 완공한 카우프만 사막 주택. 미 북동부의 극심한 추위를 피해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스에서 겨울철을 날 수 있도록 지어진 이 가족 별장은 1946-47년 경에 완공되었다. Photo courtesy: Wikiarquitectura.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으로 망명온 건축가 리쳐드 노이트라가 에드거 J. 카우프만 가족의 건축 수주를 받아 설계 완공한 카우프만 사막 주택. 미 북동부의 극심한 추위를 피해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스에서 겨울철을 날 수 있도록 지어진 이 가족 별장은 1946-47년 경에 완공되었다. Photo courtesy: Wikiarquitectura.

자칭 세기의 천재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경우도 주요 건축 의뢰인들은 개인 갑부들이었다. 피츠버그의 돈많은 사업가 집안인 카우만家를 위해 필라델피아에 지은 「폴링워터 (Fallingwater)」 하우스도 그가 설계한 수많은 개인 주택 프로젝트들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폴링워터」가 시냇물 낙하수와 바위에 걸쳐져 아슬아슬하게 지어졌다는 점 때문에 보존상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최근의 보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미국인들에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못지 않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메리칸 드림의 본고장 뉴욕에서는 기업들이 그들의 비상하는 기업적 포부와 이상을 마천루 건물을 통해서 표현했는데, 무려 40년에 걸쳐 1973년에 완공된 로커펠러 센터 빌딩, 데일리 뉴스 빌딩, 매그로-힐 빌딩이 오늘날까지도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수놓고 있다.

신을 향해 드높이 치솟았던 서양 중세의 교회당 건축처럼, 20세기와 21세기의 마천루는 자본주의의 전당이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정치적인 이상에서 출발한 20세기 국제 건축 양식은 21세기 오늘날 경제적인 부와 위상을 과시하는 가장 국제적인 건축 양식이 되었다.

* 또는 프랑크푸르트 주방 디자인 창시자 겸 바우하우스 여성 멤버 베니타 오테 (Benita Otte).

** 이 글은 본래 2005년 2월호와 3월호 『공간사랑』지 “History of …- 건축 & 디자인 역사” 연재 컬럼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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