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헬싱키 키아즈마 현대미술관

Kiasma Museum of Contemporary Art Helsinki

kiasma09_small1-300x223핀란드는 최근 들어 미술 문화 방면에서 핀란드 특유의 개방적 사고방식과 서늘한 미적 기질을 한껏 발휘해 핀란드 현대 미술을 국제 미술 지도상에 우뚝 세워놓고 있다. 가장 핀란드적인 현대 미술을 발굴하는 발전소는 바로 헬싱키 키아즈마 국립 현대미술관.

핀란드를 어떤 모습으로 떠올리는가? 올 초 국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 비교 시험인 PISA 평가제에서 우리나라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교육의 나라, 노키아 휴대폰으로 전세계 무선통신 산업을 장악하며 지난 10여 년 동안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부유한 나라, 야생 순록들이 누비는 광활하고 축축한 라플란드 토지와 여름 내내 계속되는 백야 현상이 인상적인 천연 자연의 나라, 루터란교적 노동 윤리와 높은 세율에 기초한 근검 윤리와 평등, 사회복지의 나라, 가장 이민 가고 싶은 나라 가운데 최우선 순위로 꼽히기도 한 살기 좋은 나라 핀란드. 핀란드는 최근 들어 미술 문화 방면에서도 핀란드 특유의 개방적 사고방식과 서늘한 미적 기질을 한껏 발휘해 자국의 현대 미술을 국제 미술 지도상에 자리매김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핀란드의 미술은 이웃인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와는 대조적으로 국제화 물결에 선뜻 합류하기보다는 핀란드적 특성(Finnishness)을 부각시키는 지역주의를 고집하기로 유명하다. 세계화와 글로벌리즘이라는 최근의 문화적 추세에 떠밀려 성급히 해외 작가들과 대형 전시를 국내로 가져와 소개하는 대다수 현대미술관 전시 추세와는 사뭇 대조되는 전시 기획 정책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미술관이냐는 정체성 질문에 주저 없이 ‘가장 핀란드적인 미술’을 전시하는 곳이라고 정의한다.

가장 최근 있었던 우리나라 부산 비엔날레,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호주 시드니 비엔날레 등 국제 현대 미술계에서 꼬리의 꼬리를 물고 전시 행진을 벌이고 있는 핀란드 미술계의 슈퍼스타 아이야 리이사 아틸라(Eija-Liisa Ahtila)를 비롯해, 사진작가 에스코 메니쾨 (Esko Mänikkõ), 화가 마리아나 우티넨 (Marianna Uutinen)은 키아즈마의 전시장을 거쳐간 후 국제 무대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가장 핀란드적인 현대 미술인 중 대표적인 인물.

키아즈마 현대미술관 (Kiasma Museum of Contemporary Art)은 국가 주도적 문화 사업이 체계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는 핀란드가 1990년대 초 자국의 현대 시각 문화와 미술을 한걸음 더 발전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탄생시킨 국립 미술관이다. 키아즈마 현대미술관이 탄생한 배경은 1990년대 불어닥친 전세계적인 미술관 건축 붐과 현대 미술의 대중화 물결이라는 국제적 맥락과도 무관하지 않다.

경제적 풍요와 다문화주의가 만연하던 1990년대에 현대 미술계와 미술관들은 전에 없이 다양한 출신과 배경의 미술인들이 혁신적인 주제, 매체, 표현 기법을 소개하며 시각 문화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키아즈마 현대미술관 역시 새로운 문화적 요구에 부응하고 현대 미술을 대중과 연결시키는 공공 제도체로서의 역할을 짊어진다는 취지로 설립됐다.

과거 10여 년을 포함해 현재까지 전세계 주요 도시에서 전개되고 있는 미술관 건축붐의 대체적인 추세가 그렇듯, 키아즈마 건축도 미술관 측의 남다른 철학과 미술품 전시와 관련된 공간 미학의 결정체임을 자부한다. 일군에서는 키아즈마 미술관 건축을 두고 20세기를 마무리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미술관은 단순하고 간결한 미니멀리즘을 기초로 하되, 실내외 공간의 실질적인 활용과 기능을 극대화한 핀란드 전통의 기능주의 건축 디자인 미학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다. 특히 햇볕이 귀한 나라인 만큼 실내에 탁 트인 밝은 공간과 일조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리 천장, 역시 유리가 풍부하게 사용된 벽도 인상적이다. 핀란드는 추운 나라라 실내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는 건축과 디자인이 발달했다고 했던가. 근대 핀란드의 대표적인 건축가 겸 디자이너 알바 아알토(Alva Aalto)가 보았어도 고개를 끄덕였을 이 미술관 건물은 이제 헬싱키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두 선이 만나는 교차점을 의미한다는 ‘키아즈마 (Chiasma 또는 Kiasma)’란 단어는 미술관 건물이 지니고 있는 건축 구조상의 특징과 의미를 집약한 최적의 이름인 셈이다. 옛 유리 궁전 천장, 북쪽으로 난 나무 공원, 입구 쪽으로 연결된 핀란드 국회 건물 등 이웃하고 있는 기존 옛 건물과 설치물들을 미술관 건물과 조화롭게 결합한 고금 (古今)의 융합체라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세계적인 건축사무소와 핀란드 국내외 건축가 및 건축사무소 300여 곳이 참여한 공모전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선된 뉴욕의 건축가 스티븐 홀 (Steven Holl)은 미술관이 헬싱키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이 나라의 주요 건물들과 유동선이 하나로 만나는 곳에 세워질 것을 표현하기 위해 키아즈마라는 설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지상층 (미술관 카페와 숍이 있는 층)으로 통하는 미술관 입구와 로비에 들어서면 모서리진 유리 천장이 시야에 들어오고, 유리 천장을 통해 들이치는 일광은 검은 로비 바닥과 대조를 이루며 2층 전시 공간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2층에서 4층까지는 매년 미술관이 국고의 보조를 받아 구입하는 영구 소장품을 전시하는 RoomX실, 사진과 그래픽 분야의 현대 미술품 전시에 적합한 프린티 (Printti)실, 그리고 비디오 등 뉴미디어 미술을 주로 전시하는 메디아테크 (Mediatheque)가 상설 전시 중이며, 5층에는 주요 개인전이나 굵직한 기획전을 여는 StudioK실이 있어 최신 핀란드 미술의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키아즈마가 핀란드 현대 미술의 총집산지로서 군림하게 되기까지 이 미술관의 선두지휘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마아레타 야우쿠리 (Maaretta Jaukkuri) 관장의 역할이 컸다. 노르웨이 트론트하임 미술 학교 교수직과 키아즈마 현대미술관 관장을 겸하면서 국제적 규모의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대표하는 큐레이터로서 해외 전시 기획에도 틈틈이 참여하고 있는 야우쿠리 관장. 가장 핀란드적인 현대 미술 작품과 미술인들을 발굴해 키아즈마 전시 경력을 그들이 세계적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도록, 다시 말해 핀란드 현대 미술을 홍보하는 데 적극적이다. 최근 핀란드 출신의 현대 미술인들이 이웃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등 스칸디나비아와 발틱권 국가들에 비해 폭넓은 활동을 보이고 있는 이유도 키아즈마 현대미술관의 그 같은 전략이 적절히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 같은 기세를 몰아,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키아즈마는 관람객들의 의견을 수렴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핀란드 현대 미술품 중 가장 인기 있는 작품과 인기 없는 작품들을 선정해 보여준 전시 로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무엇보다 키아즈마가 자랑하는 강점은 최근 부각되는 정치 사회적 이슈를 현대 미술로 다루어 현대 시각 문화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지적인 화두로 연결할 줄 아는 학제적 (cross-disciplinary) 전시 기획력이다. 오는 4월 초부터 늦은 가을까지 진행될 『키아즈마 컬렉션 선정 정치적 현대 미술』 展은 벌써부터 현대 미술에 관심 있는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모으고 있다. 키아즈마 현대미술관은 헬싱키 마너하이미나우키오 (Mannheimaukio) 거리에 자리해 있다.

* 이 글은 본래 『노블레스 (NOBLESS)』 2005년 4월호 122페이지에 실렸던 편집된 글에 대한 필자의 원문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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