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와 환상세계 속으로

IN MEMORY OF FRIEDENSREICH HUNDERTWASSER

훈더트바써의 건축 세계

hundertwasser-218x300건축 감시관, 기발한 딜레탕트, 아마츄어 건축 전문가, 가우디 (Antoni Gaudi) 건축의 계승자, 장식가, 건축가 지망생, 헛가다 건축가 – 기인 건축가 겸 화가로 항상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활동했던 생전의 훈더트바서 (Hundertwasser)를 일컫는 별명들이다. 그는 공포의 집, 공중 정원, 키치 궁전, 공포의 성, 전원 정원등 기이한 아이디어로 기인적인 일평생에 못지 않은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빈 중심부 근처 도나우 강가 제3구역에 위치한 쿤스트하우스 빈 (Kunsthaus Wien) 미술관은 오늘날 빈을 방문하는 해외 관광객들과 빈 시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유명하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색 안료를 입혀 구운 도자 타일과 황금색 구형 장식, 대담한 곡선과 회오리 문양으로 안팎을 장식한 이 미술관은 훈더트바서의 주도로 1986년에 착공하여 1991년에 완공, 처음 대중관객들에게 문을 열었다.

옛 토넷 (Thonet) 가구 공장을 개조한 이 전시공간에는 작가가 생전 작업해 남긴 작품들과 개인 기록물들이 소장 전시되고 있다. 미술관 내부 곡선적인 벽면과 바닥 장식,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상상력이 건물 안팎을 빼곡히 들어차 있어 좌우상하는 두리번 거리던 방문객은 어느새 출입구를 잃어버리고 만다.

동시대 예술인들과 언론에 의해 ‘쓰레기 건축 (architectural junk)’이라는 사정없는 질타을 받기도 했던 훈더트바서의 미술과 쿤스트하우스 빈 미술관이 오늘날 대중관객들의 관심과 인기를 끄는 것은 작가의 기인적인 기질, 예술철학, 그리고 독특한 표현양식이 큰 몫을 하고 있다.

쿤스트하우스 빈은 이 훈더트바서 타개 1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건축예술을 총정리하고 재조명하는 건축 회고전 『혐오-건축-애정 : 유토피아에서 현실로 – 훈더트바스 건축 예술 회고전 (GEHASST-GEBAUT-GELIEBT)』을 올 2월 25일까지 계속한다.

작년인 2000년 2월 19일 뉴질랜드에서 유람선 항해도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명을 달리한 그는 현재 평생 소원대로 햇살 따쓰한 뉴질랜드 생가 정원의 튤립나무 아래 자연과의 조화 속에 잠들어 있다. 인간과 자연의 친화성을 옹호한 환경주의자였던 동시에 이성보다는 감성과 직관을 예술 창작의 원천으로 삼았던 반모더니스트 훈더트바서는 그래서 대중을 위한 예술가로 평가되며, 오스트리아 내에서보다는 독일, 미국, 일본 미술계에서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질곡의 어린시절에서 잉태된 자연에 대한 애착
프리든스라이히 훈더트바서 (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2000)는 1928년 12월 15일 오스트리아인 아버지와 유태인 어머니 사이에서 프리드리히 슈토바서 (Friedrich Stowasser)라는 본명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다. 1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성장해 5세때 부터 그림그리기를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어머니는 초등교육만을 마친 평범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1936년 8세 접어든 어린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빈 몬테소리 학교에 보내는 진보적인 일면을 지닌 여성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비싼 학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어린 프리드리히는 결국 이 영재학교를 1년만에 그만 둬야 했다. 그로 얼마 안있은 1938년, 독일 나치군과 오스트리아의 합방되어 제3제국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유태인의 피를 절반 이어받은 그는 독일군의 유태인 사냥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잠시나마 히틀러 청년군단에서 교육받기도 했다.

freienatur
“자유로운 자연은 우리의 자유” 훈더트바서가 디자인한 우표.

정치적 격변 속에서 암울하고 불안한 십대시절을 숨죽이며 생존해 온 청년 프리드리히가 자연에서 큰 감동을 받고 자각적으로 그림 습작을 하기 시작한 때는 그가 15세나던 1943년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연필, 그리고 점차 크레이용과 수채물감을 활용해 자연의 다채로움과 생명력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그리기는 어두운 유년시절을 이겨내려 애썼던 작가의 내면적인 저항의 표시였던 듯하다.

나치군의 감시를 피해 한 농가에서 숨어 지내던 1946년, 그는 은인 농부의 농사일을 거들면서 녹색의 식물생태, 갈색 대지, 계절의 생명력을 발견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표현하는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전 생애를 걸쳐 자연발생적인 식물성 (spontaneous vegetation)이라는 개념을 들어 ‘규칙 속의 무규칙적인 미’를 추구했던 배경에는 청년기 경험한 농촌생활이 기여한 바 컸다.

청년기 자기 양식의 모색과 구축
제2차 대전 후 고등학교를 마친 스무살의 프리드리히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기 위해서 1948년 빈 미술 아카데미 (Vienna Academy of Fine Arts)에 입학했다. 로빈 크리스티안 안더센 교수 밑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나 제도 교육의 한계에 실망해 입학한지 3개월만에 자퇴하고 만다. 생전 훈더트바서는 누누히 빈 미술 아카데미의 교육이 자신의 예술세계에 미친 영향력을 거의 없었다고 진술했던 한편 에곤 실레 (Egon Schiele)와 발터 캄프만 (Walter Kampmann)이라는 두 선배 화가들로 부터 빚을 졌다고 밝혔다.

1948년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열린 에곤 실레의 작고 30주년 기념 회고전을 보고 실레가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조형적인 표현력으로 승화시킨”(훈더트바서의 회고 중에서) 것에서 특히 감명받았다고 한다. 한편 독일출신 화가 겸 디자이너 발터 캄프만의 작품에서 “자연의 생명력과 투명성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훌륭하게 재현”한 것을 보고, 자연과 식물에 대한 애착을 재확인하는 계기를 맞았다.

1949년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훈더트바서에게 이탈리아식 도자 타일예술의 녹아드는 듯한 선명한 색채효과는 인상적이었다. 이듬해 그는 토스카나 지방을 여행하던 중 프랑스인 화가 들을 만나 남부 이탈리아와 파리를 함께 여행한 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갖는 행운을 출발로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시기 그는 본명인 스토바서 (슬라브어로 스토는 100을 의미)를 훈더트바서 (독일어로 100개의 물이라는 의미)로 처음 바꾸었고, 환경과 심경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 별명을 지어 부르는 관행을 시작했다. 60년대 초 일본에서 활동하던중 비오는 날의 선명한 색채효과에 감동받고 ‘레겐탁 선장’-레겐탁 (Regentag)은 독일어로 ‘비오는 날’을 뜻함-이라는 별칭을 지어 부르는 취미로 그의 인해 기인적인 인상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했던 듯 하다.

환경주의와 반모더니즘의 옹호자
훈더트바서는 “나는 화가, 건축가, 환경론자다. 이 모든 역할을 하기에 이름 한개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한 말대로 별명수 만큼이나 활동도 다양했다. 특히 그는 창작 말고도 환경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열렬한 환경주의자였다. 25세 이후 그가 즐겨 그리던 소용돌이 혹은 나선형 문양은 다름아닌 끝없이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를 표현한 것이었다.

“자연에 악은 없다. 오로지 인간의 악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한 그의 발언 속에는 자연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존경 한켠으로 인간 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실망과 불신감을 느끼게 한다. 인간이 조작해 낸 종교, 도그마, 정치가 자족적이고 평화로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다고 믿었던 그는 식물처럼 살아가는 것 (vegetation)이야말로 인간 사회를 환상과 마술의 천국으로 이끄는 첩경이라고 주장했다.

KUNST_HAUS_WIEN_outside_sm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 훈더트바서 미술관의 외관 모습. © KUNST HAUS WIEN. Photo by W. Simlinger.

그런 훈더트바서가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초한 모더니즘 건축에 열렬히 저항한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한낯 짧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자연의 대섭리와 맞바꾸고 자연을 제맘대로 변형하고 파괴하는 인간의 우둔함을 비판했다.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지어진 모더니즘 건축은 인간을 숨을 조이고 다른 생명체의 조화를 깬다고 믿었던 그는 그래서 자신의 건축을 곡선과 나선문양 그리고 다채로운 원색으로 장식했다.

일찍이 1958년의 ” 합리주의 건축에 대항한 모울드 선언”을 비롯해 , 1968년 “로오스로부터 해방 (Los von Loos)” 모더니즘 건축 보이콧 선언, 1981년의 훈더트바서 미술학교 가이드라인 책 출간 등은 합리주의 건축과 미술에 대한 도전활동이었다. 특히 합리주의 건축에 대한 모울드 선언 (Mould Manifesto against Rationalism in Architecture) 선언문에서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자와 그것이 창조하는 직선은 비도덕적이고 양심없는 죄악이라고 규정하면서,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르 로헤, 노이트라, 바우하우스, 그로피우스, 로오스 같은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들을 싸잡아 무책임한 파괴자들이라고 정면 비난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아르누보의 곡선미와 휴머니즘을 옹호했다.

그런 맥락에서 볼때 『근대미술의 역사 (History of Modern Art)』에서 저자 애너슨이 훈더트바서의 미술을 두고 클림트의 오스트리아 아르누보 양식과 에곤 실레의 표현주의적 전통에 폴 클레의 강렬한 색감을 결합시킨 장식적인 표현주의와 환상주의라고한 것은 무리없는 정의라고 보여진다. 건축의 의사를 자처하던 프리드리히 훈더트바서. 오는날 그의 건축은 오스트리아, 독일, 미국 캘리포니아, 일본에서 모더니즘 미학에 지친 대중 감상자들에게 신선하고 환상적인 경험을 안겨주고 있다.

전시제목 : 유토피아에서 현실로 – 훈더트바서 건축 예술 회고전
 | 전시장소 : 오스트리아 쿤스트하우스 빈 (Kunsthaus Wien)
 | 전시기간 : 2000년 11월 30일부터 2001년 2월 25일까지.

* 이 글은 세종문화회관 회원지 『문화공간』 誌 2001년 3월호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