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베이컨 – 20세기 영국 표현주의 회화의 거장

FRANCIS BACON AND THE TRADITION OF ART

2013년 11월12일 화요일 뉴욕 크리스티 미술경매소에서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루시안 프로이트를 모델로 한 습작 3부작(Three Studies of Lucian Freud)』이 1억4천2백4십만 달러(우리돈 약  1천5백2십여억원)에 낙찰되어 미술경매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에 낙찰된 미술작품이 되었다. 작품 보기

82세까지 승승장구하던 프란시스 베이컨이 마드리드를 방문하던 중 평생 지병이던 천식이 폐렴으로 악화되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며 미술계를 놀라게 했던 1992년. 특히 영국 미술계 인사들과 언론계에서는 생전 베이컨이 활동 말기 20여년 동안 작품제작을 했던 런던 작업실에 대한 뒷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고희가 넘어서도 베니스 비엔날레와 전세계 유명 미술관을 통한 전시회를 통해서 예술성을 인정받고  명성을 누리며 성공한 미술가의 인생을 살았던 그는 사적으로는 공개적인 동성연애자였으며, 별난 캐릭터를 가진 기인이자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 또 동료 미술가와 미술계 인사들 사이서는 너그럽고 인심좋은 인물로 소문난 사교계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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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앵그르의 외디푸스와 스핑크스에 바침』 1983년,  캔버스에 유채 The Berardo Collection, Sintra Museum of Modern Art, Lisbon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프란시스 베이컨 – 20세기 영국 표현주의 회화의 거장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설가, 작가, 평론가인 알베르토 망겔 (Alberto Manguel)에 따르면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의 그림들이 그토록 일반 관객들에게 깊이 감명을 안겨주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유는 작품의 독창성 외에도 남다르게 정열적이고 극단적이었던 화가의 성격과 일대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모름지기 관객들은 화가의 성격과 생애를 알고 나서 작품을 대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작품에 대한 친밀감과 묘한 애착까지 키우게 되는 때문이다.

1909년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 1992년 스페인 마드리드 사망. 비밀스러운 작업실의 소유자이자 유럽 곳곳을 떠돌며 다채로운 애정행각을 서슴치 않았던 정열의 동성연애자. 인간의 고독, 잔혹, 공포를 주제 삼아서 주로 인간의 신체나 인물화로 표현한 영국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이 20세기 서양 미술에 기여한 독창성과 미술사에서 점하고 있는 위상과 작품세계는 유난히 기인적인 한 평생을 살고 간 그의 일생에 못지 않게 별나고 흥미롭다.

그의 사후, 이전까지만해도 신비로 둘려싸여 있던 그의 작품 세계와 작업실에 대한 비밀이 하나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혹은 화가에 의해 직접 찢겨 망가뜨려진 캔버스 조각들, 여러 고서적과 잡지에서 오려져 흩어진 사진들과 책갈피 스크랩, 물감으로 덕지덕지한 작업실 벽 등 화가의 창조 공간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작업실 사물들과 산만함은 물론이려니와, 생전 그림을 그려 판 수입의 상당에 대한 세금 납부의 의무를 상습적으로 피해 온 탈세자였음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해 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은 화가가 태어난 도시 더블린에 가면 런던에 있던 그의 리스 뮤스 스튜디오 (Reece Mews Studio)는 이제 휴 레인 갤러리 (Hugh Lane Gallery)로 이전되어 예전 모습 그대로 재현된 채 전시되고 있어 그의 옛 작업실 분위기를 경험해 볼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공포, 잔혹, 고독을 표현한 외톨이 화가
근현대 미술사를 되돌아 보건대, 20세기는 전에 없이 다양한 사조 (ism)와 화파들 (schools)이 각축을 벌이며 이념적∙미학적 실험을 거쳤던 시절이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태어나 성장한 청년기 유럽은 양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격동의 세월이었으며 이를 배경으로 우후죽순 등장한 미술 운동이 각축을 벌이던 창조적 폭발기이기도 했다. 베이컨도 예외없이 그같은 전유럽적 창조적 기운에 영향을 받았다.

사춘기의 화가는 – 역사적 추측에 따르면 화가의 동성애적 기질을 문제 삼았던 – 부모와의 갈등과 충돌 끝에 1925년 16살 나던 해 고향 더블린을 떠나 런던으로 떠났다. 이듬해 베이컨은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매료를 느껴 베를린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독일 바우하우스 (Bauhaus) 전통의 가구 디자인과 장식 미술을 배워와 런던에서 잠시나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베이컨의 예술적 감성을 뒤흔든 당시  미술은 뭐니뭐니해도 1920년대 초현실주의 (Surrealism)와 피카소 (Pablo Picasso)의 회화 세계였다. 베이컨은 특히 초현실주의에 영감받았던 1920년대말경 피카소의 그림을 매우 아끼고 흠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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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실내 풍경 (Studio Interior)』 1934년경, 종이에 파스텔, Marlborough International Fine Arts, Photo: Herbert Michel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베이컨이 그린 1934년경 작 『작업실 실내 풍경 (Studio Interior)』(말보로 인터내셔널 파인 아트 갤러리 소장)은 그보다 약 15년전인 1928년에 피카소가 그렸던 『탈의실 문을 열고 있는 여인 (Bather opening a Beach Hut)』(파리 피카소 미술관 소장)의 유기적 형상에서 직접 영향 받아서 베이컨식으로 해석한 초기작이다.

20세기초 유럽 화가들은 흔히들 제각각의 미적 이념과 이론적 정당화를 위해서 비슷한 생각과 주장을 공유하는 동료 예술인들과 화파를 형성해 활동하곤 했다. 하지만 독불장군, 외톨이 화가 베이컨은 독학 화가였다. 호주에서 영국으로 온 무명 화가 로이 드 메스트르 (Roy de Maistre)로 부터 잠시 받은 그림 사사가 베이컨이 화가가 되기까지 받은 미술 교육의 전부였을 뿐 단 한번도 정식 미술 교육 기관이나 학교 신세를 지거나 그 어떤 화파에도 소속된 적 없는 외톨이 화가였다.

흔히 베이컨 미술 전문가들은 베이컨의 미술 경력에서 1920년대를 베이컨 양식 형성의 출발기라고 규정하며, 제2차 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를 넘어서야 비로소 양식의 완성단계를 이룩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캔버스와 물감을 갖고 실험을 거듭하던 젊은 화가 지망생 베이컨은 습작 대다수를 스스로 찢어 버리거나 불태워 없앴던 이유로 해서 오늘날 그의 초기작품은 거의 확인해 볼 길이 없는게 안타깝다.

비록 미술 학교에 발을 디뎌본 적 없는 독학 화가 베이컨이지만 미술 이외에도 문학, 영화, 음악 등 예술 다방면을 넘나드는 왕성한 예술 향유가였다. T.S. 엘리엇 (T.S. Eliot),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같은 근대 문호들의 문학 세계에 익숙해 있었으며, 영화에도 조예가 깊어서 에이젠슈타인에서 비스콘티에 이르는 근현대 거장 영화인들과 개인적인 친분까지 맺으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젊은 시절부터 널리 여행해 본 경험 덕택에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와 스페인어도 할 줄 알았다. 미술 분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베이컨이 열정을 바쳤던 과거 거장들은 스페인 바로크 미술이 거장 벨라스케즈 (Velázquez), 렘브란트 (Rembrandt), 앵그르 (Ingres), 반 고흐 (Van Gogh), 수틴 (Soutine) 등 이었으며, 고대 이집트 미술과 그리스 미술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제2차 대전 이후 유럽 개인주의 미술의 최전선
20세기에 범람했던 온갖 이즘과 사조의 홍수 속에서 모든 미술인들이 화파나 동인을 형성해서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2001년도에 작고한 신비의 화가 발투스 (Balthus), 이탈리아의 조각가 쟈코메티 (Alberto Giacometti), 아르브뤼 (Art bru)의 쟝 뒤비페 (Jean Dubuffet) 등은 모두 유행하던 미술 사조와 상관없이 개인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한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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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벨라스케즈의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을 본딴 습작』 1953년, 캔버스에 유채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20세기 전반기 유럽을 뒤흔든 양차 세계 대전과 각종 미술 운동에 이어 20세기 후반 뉴욕에서 이어 숨가쁘게 전개된 전후 추상표현주의 운동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마크 로드코 등 포함)과 개념주의 미술 사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이컨은 런던에 남아 거주하면서 아무런 미술 운동이나 화파에 소속되지 않은채 홀연히 작업했다. 그래서 베이컨은 추상주의, 기학주의,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또 스스로를 어떤 특정한 화풍을 대변하는 화가로 규정하거나 지칭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영국 BBC 라디오 대담(1962년)이나 『타임스』 紙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터뷰 기사(1963년)를 돌이켜 보면, 그는 고전주의 화가도 그렇다고 추상 화가도 아닌, 화가 내면에 지닌 개인적인 공포와 강박관념을 폭력적이고 보기 불편스러운 이미지로 들추어 표현하는 아마츄어 집착적 망상가가 직업적 화가 (畵家)로 화신 (化身)한, 말하자면 ‚20세기 시대정신 (Zeitgeist)’이었다.

1950년 이집트 카이로 여행에서 젊고 패기넘치는 미술 평론가 데이빗 실베스터 (David Sylvester)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베이컨은 특히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평론가 실베스터를 통해서 자신의 미술세계를 해명하곤 했으며,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에서 초대작가로 작품을 선보인 것을 계기로 국제 화단에 본격적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당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된 베이컨의 12점 작품들 가운데 『벨라스케즈의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을 본딴 습작 (Study after Velàs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1953년 작)은 커다란 반향과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다.

베이컨이 묘사한 이노센트 10세 교황은 17세기 살았던 복싱 링을 연상시키는 노랑색 우리에 갖힌채 얼굴 가득이 보라색 히스테리에 질려 절규하고 있다. 기독교 교권이 패권을 잃은 후 종교적 방향을 상실하여 세속화된 근대 사회라는 새 철창 안에 갇힌 20세기 근대인의 자화상이다. 미술평론가 실베스터와 가진 몇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서 마치 뭉크의 『절규 (Scream)』 처럼 20세기의 공포의식, 고독, 인류의 절박감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베이컨을 설명한 바 있다.

이 그림에서 노랑색 세로줄로 표현된 강박적인 분위기는 티치아노 (Titian)가 16세기에 그린 『필립포 아르킨토 추기경 초상 (Portrait of Cardinal Filippo Archinto)』(1551-62)에서 영감받은 요소로, 티치아노가 그린 아르킨토 추기경 얼굴을 가리막이로 반쯤 가려놓고 묘사한 데에서 따 온 것임을 미뤄볼 수 있다. 아르킨토 추기경은 르네상스 시대에 밀라노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정치적인 음모에 휘말려 권좌에서 실추된 바 있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교황이라는 막강한 종교적 정치적 권위의 인물조차 편지풍파와 운명 앞에서는 가녀린 한 인간에 불가함을 말해 주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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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반 고흐 초상화를 위한 습작 제6번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VI)』 1957년, 캔버스에 유채, London, Arts Council Collection and Hayward Gallery © The Estate of Francis Bacon/VBK, Wien, 2003

벤 니콜슨 (Ben Nicholson)과 루시안 프로이트 (Lucian Freud)와 더불어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 화가로서 인정을 받은 베이컨은 1956년 생애 최초로 자화상 그리기를 시작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이컨은 책에 실려 인쇄된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그림인 『타라스콘의 거리 화가 (The Street Painter of Tarascon)』(1888년 작)를 발견하고 자화상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반 고흐의 『타라스콘의 거리 화가』 자화상은 제2차 대전중에 독일에서 소실되어서 더 이상 진품을 확인해 볼 길이 없는 아쉬운 작품이 되버렸지만 인쇄판이나마 베이컨에게는 자화상 제작에 촉매제가 되어 준 요작이 되어 주었다. 『반 고흐 초상화를 위한 습작 제6번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VI)』(1957년 작)은 반 고흐의 자화상에서 영감받아 그린 총6편의 자화상 연작들 가운데 마지막 6번째 작품이다.

육신 살덩어리 그리고 죽음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베이컨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던 1962년에 완성된 문제작 『십자가에 못박힘 3부작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1962년 작)은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되어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전시장 디스플레이를 위해 운반되었고, 전시가 끝나자 마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구입해 가져갔다던 그 화재의 그림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도살장과 동물의 살덩어리 그림에 매료되고 했다…아! 죽음의 냄새…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에 목박힌다 함은 전혀 다른 [종교적] 의미 를 띠고 있음을 알지만 무신론자에게 도살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행위의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베이컨은 이 작품의 제작 동기를 설명했던바 있다. 이 작품은 차임 수틴 (Chaim Soutine)이 한창 도살장 그림 작업에 매료되어 있을 즈음인 1925년에 파리 작업실에서 그린 『도살된 숫소 (Slaughtered Ox)』 그림과 창작 동기를 함께 하고 있지만, 베이컨은 사진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겼고 수틴은 도살장에 직접 가서 관찰한 것을 그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1962년 런던 테이트 회고전, 1963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1967년 미국 피츠버그 세계박람회 카네기 미술대상 수상 [베이컨은 이 상 수상을 거절했다.], 루벤스 미술상, 1968년 런던과 뉴욕에서 말보로 갤러리 전시회, 1971년 프랑스 그랑 팔레 (Grand Palais) 개인전 등 베이컨의 커리어 행보는 그야말로 숨가쁜 속도로 상향행진을 계속했고 전세계 미술계는 프란시스 베이컨을 20세기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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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십자가에 못박힘 3부작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 1962년, 캔버스에 유채와 모래 가루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그는 주로 작업실에 밝고 선명한 자연광이 들이치는 아침 시간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오후와 저녁 시간에는 맥주집과 바에서 동료 미술가와 친구들과 만나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충직한 미술 친구 쟈코메티와 프로이트 외에도 베이컨의 친구 겸 초상화 모델이 돼 주었던 피터 레이시 (Peter Lacy), 조지 다이어 (George Dyer) ,미셸 레리 (Michel Leiris), 친구이자 『보그 (Vogue)』 誌 사진가였던 존 디킨 (John Deakin), 친구 존 에드워즈 (John Edwards) 등은 다 60년대에 만난 보물같은 친구들이었다. 정말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세월이었다.

초상화 – 불멸을 향한 몸부림 그러던 1971년 봄, 조지 다이어가 베이컨이 머물던 파리의 한 같은 호텔방에서 자살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봄 사진가 존 디킨이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베이컨은 전에 없이 자화상을 주력해서 그렸다. 사진가 역할을 해 주던 존 디킨이 사라진 후 베이컨은 거리의 즉석 사진자동 판매기에서 여권 사진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어 자화상으로 옮겼다. 왜 70년대 이후로 유독 자화상을 즐겨 그리기 시작했느냐는 평론가 실베스터의 질문에 „주변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사라져 갔기 때문“이라고 화가는 대답했다.

1973년의 초상화 3부작 『3편의 초상 – 조지 다이어 초상, 자화상, 루시안 프로이트 (Three Portraits – Posthumous Portrait of George Dyer, Self-Portrait, Portrait of Lucien Freud)』>은 이렇게 해서 그려진 초상화 연작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보다 3년후에 그려진 『미셸 레리의 초상 (Portrait of Michel Leiris)』는 프랑스인 지성인 소설가 미셸 레리를 모델로 해 그려진 초상화로서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한  얼굴 모양을 일부러 비대칭적으로 일그러뜨려 표현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위대함과 무의미함 사이의 간격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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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미셸 레리의 초상』 1976년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자화상의 대가 렘브란트는 생전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현재 빈 미술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1657년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생애 말년기 경제적  수난으로 일그러지고 흉칙해진 화가 자신의 얼굴을 기록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이 베이컨을 매우 감명시켰던게 분명하다.

과제로 남아있는 베이컨 신화 풀기 일단 미술사 교과서에 거장으로 거론된 화가의 이름은 웬만해서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미술평론가 데이빗 실베스터가 1962년부터 1986년까지 베이컨을 상대로 한 마라톤 인터뷰를 펼쳐가며 베이컨의 미술 세계에 대한 화가의 해명을 기록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프란시스 베이컨의 창작 동기, 영감의 원천, 재료 활용 방식과 테크닉 등에 관한 비밀은 거의 규명이 되었지만, 정작 과거 서양 미술의 대가들의 작품 세계와 베이컨의 회화 세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은 아직도 해결을 기다리는 중대한 연구과제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베이컨 사후 10년여년이 흐른 지금,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술의 전통 (Francis Bacon and the Tradition of Art)』 展이 겨냥하고 있는 바는 베이컨 미술이 과거 거장들의 작품 세계로 부터 받은 영감이 어떻게 재해석 창조되었는가를 조명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베이컨이 과거 서양 미술의 거장 화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모 (模)하고 재해석한 작품만을 만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독학 화가로서 과거 거장들과 동시대 주변 예술인들의 그림, 조각, 사진, 영화 등을 부지런히 모으고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 영감을 찾았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세계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다.

1987년 파리 르롱 갤러리에서 열였던 베이컨 전시회를 두고 프랑스 언론이 “베이컨 신화 (Bacon Myth)”라고 부르며 의문을 제기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술의 전통”전은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서 내년 1월 18일까지 전시를 계속하며, 이어서 스위스 바젤 근방 도시 리헨 (Riehen)에 있는 바이얼러 재단 갤러리(2004년 2월7일-6월20일)로 옮겨 전시를 계속할 예정이다. Images courtesy: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 지 2003년 1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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