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과 미술의 해후

ART MEETS FASHION, FASHION MEETS ART

과거 그 어느때 보다도 오늘날 만큼 패션과 미술이 동등한 위치를 점하며 사람들의 관심과 동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때는 없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요즘의 수많은 패션 추종자(fashion victim)들이 매년 매계절 마다 거리와 백화점 매장을 메우며 신유행을 정신없이 뒤쫏고 있고, 미술은 더이상 소수의 가난하고 고뇌하는 숨은 천재들과 난해한 말장난을 즐기는 평론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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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Poiret in Vienna, 1911 ©Getty Images.

전에 없이 잦아진 국제 미술경매 거래와 미술품 박람회에 가보면 백화점을 거닐며 옷을 구경하고 사가듯 미술품을 구경하고 맘에 드는 작품을 사들고 집에 가는 ‚미술품 쇼핑객’들로 붐빈다. 이젠 사회의 상류층들 뿐만 아니라 웬만큼 소비능력이 있는 중상층 고객들과 유명 연예인들 사이에서는 독특한 감식안과 고고한 취향을 드높이 과시하는데 최신 유행 디자이너 패션 챙겨입기와 미술품 수집하기는 당연한 관행이 되었다.

미술과 패션은 전세계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도 어느새 친숙한 옆집 이웃 같은 사이가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해외 대도시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유구한 역사와 숭고미를 잔뜩 머금고 있는 고전 미술품과 유물 전시장 바로 옆 켠에 조르죠 아르마니(2000년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쟈니 베르사체(2002-2003년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마놀로 블라닉 구두전(2003년 런던 디자인 박물관)에 이어서 올 봄 5월초부터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코코 샤넬의 패션전이 열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같은 열기에 한술 더떠서 전세계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패션과 미술을 연결하여 함께 고찰하는 특별전시회가 열려 화재를 모으고 있으니 21세기 현재 시점에서 패션과 미술은 전에 보지 못한 퓨전의 시대를 맞고 있는듯 하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행하던 세기전환기 근대기, 패션디자인과 미술은 공유 영역이 더 컸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순수미술과 공예를 차별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는데 그래서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일과 천조각에 문양을 그려 넣는다거나 가구 장식을 새겨 넣는 일을 똑같이 예술적인 활동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패션사 최초의 유명 패션디자이너 폴 포아레(Paul Poiret)는 처음으로 모더니즘 미술과 패션을 접목킨 20세기 여성 패션의 아버지다.

당시 파리에서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던 모더니즘 미술 사조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인상주의 화풍을 옹호했을 뿐만 아니라 피카비아, 블라밍크, 드랭, 마티스, 뒤피, 루오 같은 야수파 미술가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모더니즘 미술을 패션으로 재소화해 냈다. 이다 루빈스타인, 이사도라 던컨, 사라 베른하르트 같은 당대의 아름다운 유명 여성인사들의 몸을 호사스럽게 장식해 준 날개는 바로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과 편안한 착용감을 자랑하던 포아레의 쿠튀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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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클림트의 <에밀리에 플뢰게> 초상화. 패션 디자이너였던 에밀리에 플뢰게는 클림트의 연인이자 반려자이기도 했다. © Wien Museum Karlsplatz, Vienna, Austria

순수 미술가들이 패션 디자인과 희롱하는 그같은 추세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예컨대 스코틀랜드의 글라스고 디자인 학파(Glasgow School)라든가,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 아방가르드 미술가 바크스트(Leon Bakst), 빈 공방(Wiener Werkstätte)의 미술공예 운동에서 활동하던 미술가들은 패션을 포함한 장식미술과 디자인 분야에 참여하였다.

빈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도 틈날때 마다 패션 디자인과 직물 문양 디자인을 하여 반려자이던 에밀리에 플뢰게(Emilie Flöge)가 운영하던 부티크점 운영을 도왔다고 하는데, 클림트는 원단을 통자(tubular) 가운을 연상시키듯 헐렁하고 넉넉한 품으로 재단하고 유겐스틸 양식풍의 평면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을 넣는 스타일을 소개함으로써 모더니즘의 이상을 패션 디자인으로 선언해 보였다.

사회상류층 여인들이 그네들의 개성과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려 걸었던 초상화들을 보면 근대기로 이행하는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의 변화와 선호되던 유행 경향을 미루어 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예컨대 19세기 후반기까지만해도 영국과 미국의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개인 양재사가 만든 당시 최신 유행 의상을 차려입은 모습을 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같은 인기 여인초상화가를 시켜 고결한 품위를 초상화로 간직하는 것이 널리 유행했다. 그런가 하면 오스트리아 빈의 신흥 부유층 여성들은 화려하면서도 감미로운 여인초상의 대가인 클림트가 그린 초상화를 그려갖는 것으로써 고귀한 취향과 급진적인 신사고의 소유자임을 과시하려 했다.

여성의 몸을 꽉 조이는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켜서 발목길이의 통자 드레스와 대담한 색상을 위주로 한 심플한 쿠튀르로 대변되는 포아레의 시대가 저물고 나자, 1920년대 후반기 부터는 이른바 „플래퍼(Flapper)“로 불리는 귀밑 길이의 짧은 삼고 머리 스타일과 한결 스포티한 패션이 파격적인 등장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미술과 공예 분야에서 아르데코 양식으로 불리는 이 양식은 1920년대부터 1930년까지 계속되면서 화려와 허영을 오가는 사치미,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절충미, 숨가쁘게 돌아가는 ‚스피디한’ 근대적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가부장적 전통으로 부터의 여성해방을 표현했다.

17394resize아르데코 시대에 여성들을 사로잡으며 패션계를 풍미한 아나와 라우라 티로키 자매(Anna & Laura Tirocchi)의 티로키 부티크숍과 패션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 1890-1973), 그리고 가브리엘르 코코 샤넬(1883-1971)은 파리 상류층과 사교계 여성들이 전세계 패션 트렌드를 리드하는데 공헌했고 이후 입생 로랑(Yves Saint Laurent),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과 같은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심어줬다.

유럽의 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점철된 1930-40년대를 딛고 경제 재건과 소비주의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한 1950년대, <보그>와 <하퍼스 바자> 같은 여성 패션잡지 속의 이미지들은 더이상 선택된 소수의 여성들 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 여성들도 보고 따라할 수 있는 패션 지침서로 자리잡았다.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다이아나 브릴랜드(Diana Vreeland)도 지적했듯이 1950년대의 패션은 낙관주의가 낳은 로큰롤과 청소년 문화를 반영하듯 밝고 발랄한 색상과 무릎밑 길이의 스커트와 청바지의 물결로 가득했다. 한편 미술은 주도적 원동력이 전후 유럽에서 미국 뉴욕으로 옮겨온 이후로 새롭게 정착하는데 한창이었다.

여전히 순수 미술가들이란 패션과는 거리가 먼 지독하게 촌스럽고(unfashionable)심각한 기인들이라는 통념이 만연해 있던 1950년대 말엽, 미술과 패션 디자인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장본인이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팝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Andy Warhol)이다. 여성 구두와 광고를 만드는 광고 디자이너로 뉴욕에 데뷔한 워홀은 패션 디자인에서 배운 자기홍보 기술과 집요한 야심 끝에 1960년대 말경에 이미 뉴욕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패션 디자이너로 알려졌으며 그같은 명성과 경력을 바탕으로 뉴욕 화단에서 팝아트로 본격적인 미술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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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앤디 워홀이 디자인한 여성 구두 일러스트레이션.

앤디 워홀의 팝아트는 패션 디자인에 있어서는 이제까지 패션을 주도해 오던 오트쿠튀르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술가는 더 이상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리며 창조에 고뇌하는 은둔자가 아니었으며, 마찬가지로 패션 디자이너는 더이상 돈과 명성과 부질없는 유행이나 쫏는 깊이 없는 재단사로 여겨지길 거부했다.

미국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최고급 디자이너 패션으로 미국인들의 선망을 받던 1960년대에는 매리 콴트(Mary Quant)의 스트리트 스타일,앙드레 쿠레쥬(André Courrèges)의 우주 시대 스타일, 피오루치(Fiorucci)의 안티-패션 캐쥬얼 스타일이 패션을 장악하자 고급 디자인 패션의 명가 입생 로랑(Yves Saint Laurent)과 발렌시아가(Balenciaga)는 ‚미래의 패션에 더 이상 오트쿠튀르가 설 자리는 없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심한 위기를 맞기에 이르렀다. 입생 로랑은 스스로를 언제나 그림그리기 대신 패션 디자인을 하는 민감하고 고뇌하는 ‚예술가’로 비춰지길 원했지만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미술가의 고정관념을 고집하는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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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뭇 뉴튼의 사진. Vogue Italia, 1980년 9월호.

1970년대로 이어지면서 패션은 한결 정교해진 마케팅 전략으로 소비자의 욕망과 소비욕을 한껏 자극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샤넬, DKNY, 아장 프로보카튀르(Agent Provocateur), 베르사체(Versace)를 비롯한 디자이너들이 패션이 민감한 여성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현대 미술 분야에서 1970년대는 패션 사진 분야의 혁명기라고 불릴 만큼 패션 사진의 혁신이 두드러졌던 시대로 평가되고 있다.

헬뭇 뉴튼(Helmut Newton), 기 부르댕(Guy Bourdin), 아터 엘고트(Arthur Elgort) 같은 패션 사진가들은 어느새 낸 골딘(Nan Goldin)이나 신디 셔먼(Cindy Sherman) 같은 사진예술가들과 동등한 대열에서 평가받기 시작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1980년대로 이어지면 현대 미술가 제니 홀쩌(Jenny Holzer)와 낙서화가 키스 헤링(Keith Haring)의 작품 이미지들이 티셔츠, 운동화, 쟈켓 등과 같은 패션 아이템을 장식하는 장식 요소로 응용되곤 했다.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였던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의 패션 디자인은 미술이 지닌 고귀한 요소들을 한껏 활용하여 미술의 패션화와 패션의 미술화를 꾀한 시기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들어, 유명 건축가들의 설계로 매장 공간을 연출한 뉴욕 소호의 콤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 매장이나 프라다(Prada) 매장은 고객들로 하여금 고귀한 패션 예술품들이 세심하게 진열 연출된 한 편의 화랑 공간을 거니는 듯한 감흥을 자아내고자 했다.

artbasel37_sm또 그런가 하면 1990년대는 현대 미술가들과 패션 디자이너들의 공동 작업이 전에 없이 활발하고 두드러지게 전개된 때이기도 한데, <보그>지가 주도한 미술가-디자이너 컬래버레이션 특집(모델 케이트 모스,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 마크 퀸, 제이크 앤 다이노스 챕먼 형제, 사라 모리스 참여), 현대 미술가 제러미 블레이크(Jeremy Blake)와 디자이너 오시 클락(Ossi Clark)의 합작 비디오 작품, 쥴리언 오피(Julian Opie)의 비주 게츠(Bijou Gets) 드로잉, 패션지 <더 페이스(The Face)>의 단골 사진가 데이빗 라샤펠(David Lachapelle)의 패션 사진, 다카시 무라카미(Takashi Murakami)의 루이비통(Louis Vuitton) 핸드백 디자인 등은 미술은 고귀하며 패션 디자인은 응용예술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정면 도전한다.

* 본 내용은 노블레스 Noblesses 지 2005년 6월호에 출판된 “Art Meets Fashion, Fashion Meets Art” 기사 중 필자가 조언 기고한 부분만을 발취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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