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화가 발투스의 거리

Mitsou (40 dessins),1919 encre sur papier, 15 x 17 cm collection particulière

Balthus: His Streets and Interiors

전시 제목: 신비의 장막 뒤 20세기 화가 발투스„Balthus“ 회고전 | 전시 기간: 2001년 9월 9일부터 2002년 1월 6일까지 | 전시 장소: 이탈리아 베네치아 팔라쪼 그라씨(Palazzo Grassi, Venice) 미술관

Balthus, La rue, oil on canvas, 195 x 240cm, 1954.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 2024 Balthus/Artists Right Society (ARS) New York/ADAGP Paris. Photo: MoMA

올초인 2001년 2월 18일 93회째 생일까지 열흘을 앞두고 신비의 20세기 사실주의 화가 발투스(Balthus, 1908.2.29*-2001.2.18✝)는 스위스 자택에서 지병이던 호흡기 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발투스의 장례식에서 팝그룹 U2의 리드싱어 보노가 애도가를 불렀고, 세상을 뜨기 두어 개월 전인 2000년 12월, 그는 20년 넘게 우정을 나눠 온 헐리우드 배우 리쳐드 기어와 만나 예술에 대한 대담을 갖기도 했다(The Art Newspaper 2001년 9월호 참고).

1960년대에는 로마에 살면서 이탈리아의 명감독 페데리코 펠리니를 비롯한 20세기의 거장 예술가, 작가, 시인들은 물론 요즘의 헐리우드 연예계 유명인사들과도 친분을 쌓아오기도 한 사교계 속의 „무명의 유명인“ 발투스. 일명 회화미술계의 „돈키호테“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는 오늘날 20세기 모더니즘 운동과 그 주변의 온갖 „이즘(ism)“에 휩쓸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고전주의적 형식성과 사실주의적 이미지 창조에 몰두한 외톨이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작년 이맘때 고고학 전시 <에트루스칸 미술>전을 비롯해서 대형 스케일의 블록버스터 문화전시를 연 바 있는 팔라쪼 그라씨에서 올 9월초부터 문을 연 <발투스>展은 발투스의 미술세계를 총정리한 최초의 회고전이다. 앙드레 말로(André Malreaux)가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던 60년대, 발투스는 在로마 프랑스 문화 아카데미 건물 빌라 메디치(Villa Medici)를 재건하여 이탈리아 문화 보존가로서도 일익을 담당했었다. 그런 점에서 베니스 팔라쪼 그라씨에서의 이번 전시는 이탈리아(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미술관의 現소유주인 피아트 자동차사)가 화가에게 선사하는 기념행사이기도 하다.

발투스는 이 전시의 기획과 진행 과정에 일일이 관여하면서 90곳이 넘는 해외 여러 소장 미술관과 개인 소장가들을 설득해가며 자신의 작품을 대여하는데 적극적인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자신의 최초 회고전을 목도하지 못한채 생을 마감하여 지인들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현재 이 전시에서는 발투스 유화 작품 제1호 <기타 수업(La Leçon de Guitare)>에서 사망 직전 완성한 최후작 <기다림(The Wait)>에 이르는 그의 작품 총 250여점이 그라씨 궁 내부 36개 갤러리에 시대순으로 정리되어 그의 미술 전개 과정을 종합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2월 29일 생이란 이유로 4년에 한 번씩 생일을 맞았던 발투스가 생전 „늙지 않고 평생 아이로 살고 싶다“고 고백했던 것은 단지 우연이었을 뿐일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논쟁작 소설 <롤리타(Lolita)>를 연상시키듯, 사뭇 에로틱하면서도 수수께끼같은 묘한 분위기 속에 미소녀들이 등장하는 실내풍경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발투스의 미술세계에 대한 해석은 이번 전시 기획자인 쟝 클레어(Jean Clair) 파리 피카소 미술관 관장의 학술적 연구 외에도 가장 최근 2000년 가을 니콜라스 폭스 웨버(Nicholas Fox Weber)의 다소 미화(美化)된 발투스 전기 등을 통해서 상당부분 해명된 바 있다. 하지만 그의 회화가 자아내는 금기적 요소들-성에 눈을 뜨기 직전 10대초 어린 소녀들의 실내 누드와 그들이 취하고 있는 도발적인 포즈-은 그의 유년기 성장배경과 채 규명되지 않은 개인사에 못지않게 손쉽지 않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는게 사실이다.

Balthus, Thérèse Dreaming, oil on canvas, 149.9 × 129.5 cm, 1938. Courtesy: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남편과 결별한 후 여류 시인 겸 예술인 살롱 여주인공 역할을 하던 모친 발라디네가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와 연인관계를 맺기 시작한 1920년부터 어린 발투스는 릴케의 보호와 위시 아래 파리에서 일찌기 모네, 모리스 드니, 보나르, 앙드레 드렝 등으로부터 그림 사사를 받았다. 청년기의 발투스는 어머니의 파리 살롱을 드나들던 조르주 바타이유, 쟈크 라캉, 알베르 카뮈, 앙드레 지드, 뽈 발레리, 쟝 콕토 등과 같은 근대 지성인과 예술인들 사이에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코스모폴리탄적 예술환경에 흠뻑 젖어 성장한 거만하고 특권의식에 가득찬 젊은 엘리트주의자였다. 은밀한 반(反)유태주의자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 그는 그래서 친어머니가 이어받은 유태인 혈통은 줄곧 묵인했던 한편으로 영국의 시인 바이런과 친척관계임을 강조하며 발타자르 스타니슬라스 클로소우스키 드 롤라 백작(Balthazar Stanislas Klossowski de Rola)이라는 폴란드계 귀족명으로 불릴 것을 고집했던 기인이기도 했다.

1934년 파리에 있는 갤러리 피에르에서 가진 발투스 최초의 개인전은 스캔들의 소용돌이였다.

<기타 레슨>(1934년)을 비롯해서 어린 소녀를 모티프로 한 출품작들은 기이한 분위기와 금기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이내 미술계를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특히 이번 회고전에서는 미술관 내부 1층 그랜드 살롱에 1934년 당시 최초 개인전을 그대로 재현한 특별전시장을 마련하여 특히 당시 전시에서 스캔들에 휘말렸던 6점의 작품들-<거리(La Rue)>(뉴욕 모마 소장) <캐시의 화장대(La Toilette de Cathy)>(퐁피두 국립근대미술관) <알리스(Alice)>(퐁피두 국립근대미술관) <창문(La Fenêtre)>(인디애나대 미술관) <기타 레슨(La Leçon de Guitare)>(개인소장) <아마존 의상을 입은 어린 소녀 초상(Portrait de Jeune Fille en Costume d’Amazone)>(스타니슬라스 크로소우스키 드 롤라 개인소장)-을 한자리에서 원래 전시 분위기 그대로 재경험할 수 있도록 해 방문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 하던 30년대 파리의 근대미술계는 발투스의 양식을 당시 유행하던 30년대 형이상학적 회화 및 마술적 사실주의와 연관된 초현실주의로 ‚잘못’ 규정하기도 했다. 한편 작품이 지닌 도발성에 구미를 느낀 미국의 뉴욕 근대미술관(MOMA)은 즉시 발투스 작품 구입에 나서는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고 그 결과 발투스의 명성은 미국에서 더 일찌기 알려졌다.

스캔들과 모욕적 평가 속에 마무리된 그의 첫 전시는 한편 미술평론가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와 이탈리아인 조각가 알베르토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와의 평생 우정이 시작된 계기이기도 했다. 아르토는 <라누벨르 르뷔 프랑세즈(La nouvelle Revue Française)>(1934년 간)에 기고한 전시리뷰에서 발투스 회화세계의 시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를 칭찬하면서 특히 <캐시의 화장대>에서 나타난 소녀의 도상을 쿠르베의 <화가의 아틀리에(l’Atelier)>의 그것과 비견하기도 했다. 추상주의에 편도되어 있던 20세기 전반기 근대미술계에서 고전적인 인체 형상을 고집하며 외롭게 초현실주의에 대항한 쟈코메티가 그의 작품에서 고무받은 것도 발투스가 형상을 옹호한 화가라는 점 때문이었다.

Balthus, Vue de Montecalvello, 1977-1980, Casein paint and tempera on canvas, 130 × 162 cm. Private collection

미술이 큐비즘과 초현실주의 사이를 방황하는 사상적 주의와 운동의 춘추전국 시대를 맞고있던 당시 쟈코메티가 고대 이집트 미술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에서 미의 원형을 모색하고 있었을 즈음, 미술 아카데미라는 제도권 예술 교육기관에 대한 냉소가 짙던 당시 유럽에서 18세의 청년 발투스는 1926년 이탈리아 여행 동안 마사치오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그림 모작을 시작하는 것으로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이 두 고전 거장 외에도 푸생, 카라바죠, 다비드의 형식미는 화가의 양식적 구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발투스 전문가 싱 샤오슝은 어릴적 화가가 동양 미술 서적을 통해서 중국의 전통 화가들이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모작하는 것으로 독창적인 개성과 표현 양식을 창조했던 작업방식을 답습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몬테칼벨로 풍경(Paysage de Montecalvello)>(1979년) 같이 덜 알려진 야외 풍경화 작품들은 세잔느의 형태의식과 동양 회화에서의 여백의 정신이 엿보이기까지 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대여된 최대 규모의 회화 작품은 1952-54년에 걸쳐 완성된 <생-앙드레 상가 거리(Passage du Commerce-Saint-André)>(가로294x세로 230cm, 개인소장)로 캔버스 총 면적이 10평방미터에 이르는 대형작이다. 1929년판과 1933년판 <거리(La Rue)>라는 제목으로 완성된 두 점의 후속판으로 제작된 이래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정신분석학, 실존주의 철학, 기호학 이론 등을 빌어 해독 논쟁을 벌여 온 문제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한 거리, 그리고 거리에 감도는 슬픔, 멜랑콜리, 절망감은 소년기에서 성인으로, 동물이나 괴물은 인간으로 변신하는 „인생 행로“로 흔히 해석되어 왔으며, 그래서 인간, 동물, 괴물을 혼동하는 아동의 혼란스런 세계는 곧 화가의 심리와 동일시된다.

Balthus, Passage du Commerce-Saint-André, 1952-54. oil on canvs, 294 x 230cm. Private collection

왜 도발적인 자세의 미소녀들을 그리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동기에 대한 낭만과 노스탈지어라는 어휘로 그가 아동애자가 아닐까라는 주변인들의 의구심어린 시선을 교묘히 피해왔던 발투스. 그래서 화가는 회화의 소재와 형식이 외설적이라는 비판이 나올때마다 자신의 회화 세계에서 어린 소녀는 형식적 소재에 불과하며 센세이션을 조장하기 위해 미소녀를 소재로 삼았다는 진술로 얼버무렸다. 90년대초 발투스의 작품세계를 순수 형식적 관점에서 연구한 사비네 레발트(Sabine Rewald)는 소녀들이 등장하는 실내풍경화들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도상학적 형식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헌데, 발투스 스스로 유일하게 외설적인 작품이라 시인한 <기타 수업>은 <피에타>의 구도를 본 딴 형식적 실험이었다고 한 그의 진술이 신성모독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왜일까? 과연 발투스는 개인적 아동애 성향을 미술이라는 장막을 뒤에 숨어 표현한 변태 은둔자였는가 아니면 20세기 근대 모더니즘가 맞섰던 고전주의자였는가? 이 어떤 의문에 대한 확답이나 입증을 불허한채 명을 달리한 발투스 회화세계는 지금과 다름없이 미래에도 오묘한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 이 글은 본래 월간미술 2021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