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REVIEW »Schönberg, Kandinsky, Blauer Reiter und tim Russische Avantgarde — Die Kunst gehört dem Unbewußten« Arnold Schönberg Center, Wien | 쇤베르그, 칸딘스키, 청기사파, 그리고 러시아 아방가르드展 (2000.3.9 ~ 5.28 비엔나 아놀드 쇤베르그 센터)
고전음악의 반항아 아르놀드 쇤베르크 탄생 150주년
“전통의 정신을 추구하는 예술의 형식적 과정 은 의식적 행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은 무의식의 편이다.” – 아놀드 쇤베르그
20세기 초 12음조 체계를 구축한 ‘신음악’ 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쇤베르그 (Arnold Schoenberg, 1874~1951)의 예술관은 그의 주 활동기인 19세기 말~20세기 초 빈 모더니즘 (Wiener Moderne)’ 시대라는 세기의 전환기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공유하던 의식세계였다. 추상미술의 선구자를 자처하며 1911년 독 일 뮌헨에서 청기사파를 결성한 러시아 태생의 바실리 칸딘스키가 쇤베르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11년 1월 뮌헨의 한 콘서트홀이었다.
“단순한 재현에 만족하지 못하고 예술적인 내면세계의 표현을 갈구하는 화가로서 오늘날 가장 비물질적인 예술형태로 존재하는 음악을 어찌 흠모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음악의 방법론 을 미술에 도입할 수만 있다면…”이라고 자신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에서 고백한 칸딘스키에게, 감성적 · 직관적이며 화음과 불협화음이 공존하는 쇤베르그의 음악과 만난 것은 고무적인 사건이었음에 분명하다.
칸딘스키의 <인상 III)>(1911), 일명 <협주곡>은 콘서트에서 쇤베르그에게 받은 감흥을 표현한 작품이다. 피아노를 형상화한 검은색 면과 흰색 기둥, 검은색 곡선으로 형상화한 관객 등에서 아직 구상적 요소가 남아 있지만 이 작품은 이후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생동하는 점, 곡선, 색면 위주의 회화를 암시하고 있다. 칸딘스키와 쇤베르그의 서신교환을 출발로 두 사람의 예술적 교분은 칸딘스키가 사망할 때 까지 지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쇤베르그 센터(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1999년 개최된 쇤베르그 탄생 125주년 기념 행사의 연속선상에서 기획한 이번 특별전은 작곡가로서뿐만 아니라 화가로서의 쇤베르그를 보여주는 동시에 1912년 뮌헨의 <청기사파전>과 191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열린 <아놀드 쇤베르그와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의 의미를 환기시킴으로써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에 작곡가 쇤베르그가 끼친 영향을 재평가하고 있다. 이번 전 시에는 쇤베르그가 칸딘스키의 초대로 청기사파 활동을 함께 했던 1911년부터 1914년 사이 에 제작된 칸딘스키와 청기사파의 산물을 비롯하여 러시아 아방가르드 화가들 – 말레비치, 야블렌스키, 미하일 마추친, 니콜라이 쿨빈, 알렉산드라 엑스터, 이반 푸니, 마리아 엔더와 보리스 엔더 등의 예술적 표현에 반영된 결과를 2백여 점의 회화·조각· 문헌자료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출품작 중에는 50점에 가까운 쇤베르그의 유화와 수채화가 나란히 선보이고 있다. 쇤베르그의 작품은 칸딘스키와 러시아 아방가르드 화가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의식세계와 그가 강조했던 무의식의 세계를 제시한다. 칸딘스키는 당시 시각예술의 추상 문제에 집착하면서 음악의 진동하는 율동성과 리듬을 강렬한 색채를 통해서 순수한 형태와 색채로 정제하고자 했다.
한편 작곡가인 쇤베르그에게 추상이란 직관 적이고 무의식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자유’를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 중 널리 알려진 <붉은 응시(Red Gaze)〉(1910)는 동시대 빈 출신의 화가인 오스카 코코슈카가 흔히 묘사했던 육체적·심리적으로 고통받는 인간상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쇤베르그는 1901년 빈 분리파 미술관에서 전시되었던 뭉크의 절규(Scream)>(1893)에서 커다란 영향 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술에 관한 한 쇤베르그는 타고난 독학자였다. 쇤베르그, 칸딘스키, 그리고 러시아 아방가르디 스트들이 거론했던 색채의 음악 · 리듬 · 공간 그 리고 그것을 통한 내면세계의 표현이라는 개념을 되새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전시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가 처음 회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10년 무조주의(atonality)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작곡한 작품들이 연속적으로 대중과 음악 계의 저조한 반응을 얻으면서였다. 음악계에 서 활동하면서 생계가 막막해진 이 작곡가는 1905년 빈출신 화가인 리처드 게르스틀 (Richard Gerstl)에게 유화를 배우면서 초상화가가 될 꿈을 잠시 갖기도 했다.
쇤베르그의 음악세계와 칸딘스키의 미술세계는 1911년부터 1914년까지 매우 유사한 개념들을 놓고 평행적이지만 독립적으로 발달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법칙화된 서양음악의 위계적 음조 질서와 온음조 체계는 권위 · 안정·정체를 의미했다. 브람스와 바그너 계보의 낭만주의와 시적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불협화음이라는 역동적이고 표현적인 반음계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쇤베르그는 불협화음의 해방을 이룩했다고도 일컬어진다. 그의 <화음 이론>은 이미 1911년에 칸딘스키에 의해 러시 아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이는 동시대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한편 같은 시기에 러시아 예술인들도 불협 화음, 형태의 파괴 및 변화를 가하며 전통을 뒤집는 전위적인 음악을 창조했으며 그 물결이 미술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약 반 세기 전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지적했던 대로 음악이 미술로 전이 · 해석될 수 있는지, 더 나아가서 칼 달하우스(Carl Dahlhaus)가 비판했던 것처럼 음악의 무음조와 미술의 추상이 동의적 개념으로 소통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전시가 다소 작위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쇤베르그와 칸딘스키, 그리고 러시아 아방가르디스트들이 거론했던 색채의 음악 · 리듬 · 공간 그리고 그것을 통한 내면세계의 표현이라는 개념들을 되새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전시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박진아 | 미술사
- 이 글은 본래 월간미술 2000년 6월호 WORLD REPORT WIEN 칼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