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locking the World of Dreams
르네 마그리트와 현실 속의 환상 세계
맛좋고 종류가 다양하기로 유명한 맥주, 최고급 미식가들도 굴복하고 마는 구르메 초콜렛과 음식 문화, 17-18세기 바로크풍 그윽한 건축물과 고즈넉한 거리 풍경과 시골 경치, 카톨릭교 전통에 기반한 벨기에 왕가 – 북쪽으로는 네덜란드와 독일, 남쪽으로는 룩셈부르크와 프랑스를 이웃한채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나라 벨기에가 손꼽는 국민적 자랑거리는 또 있다. 그것은 바로 20세기 근대 화가 르네 마그리트다. 20세기가 막 통트기 직적인 1898년에 태어나서 격동의 20세기를 목격하면서 1969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를 기리는 대형 회고전은 이미 그의 살아 생전인 1965년에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서 열렸고, 가장 최근에는 199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00년 샌프란시스코 근대미술관SFMoMA 등에서도 개최된 바 있다. 지난 4월6일부터는 빈 쿤스트포룸 미술관에서 <르네 마그리트 – 꿈으로의 열쇄 René Magritte – Der Schlüssel der Träume> 전시를 7월24일까지 계속한다.
„ 내 그림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시각 이미지들이다. 내 그림은 신비감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그런 내 그림을 보고 ‚이게 무슨 의미이지?’라는 단순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 그림에는 아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비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르네 마그리트
우리는 우리 주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지하고 있을까? 내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옆사람이 보고 느끼는 세상과 어떻게 다를까? 보는이에 따라서 세상은 각기 다르게 인지되다면 나의 시각과 인지력은 믿을수 있을 것인가?우리가 세상을 바라 보고, 지각하며, 느끼고, 기억하고, 그것을 언어와 행위로 표현하는 행위 과정은 우리 내부 저마다 지닌 두뇌와 화학적 반응의 기능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는 신경 과학자들의 주장도 있듯이, 인간의 시각적 인지력은 상대적이고 다양무궁무진하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그의 그림들을 통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온 시각적 관습에 의문을 던졌다.
„…흔히 사람들은 입체주의든 미래주의든 어떤 주의라고 일컬어지길 원하지만..나는 초현실주의자도 입체주의자도, 그렇다고 해서 그 어떤 주의자도 아니다. …지성주의자라는 점에서, 그리고 어떤 사상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초현실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
‚초현실주의자surrealist’ ‚팝아트와 옵아트의 아버지father of pop-art and op-art’ ‚마술적 사실주의자magic realist’ 등등 20세기의 거장 화가 마그리트를 묘사하는 미술사적 명칭들을 다양하다. 미술사 분야를 넘어서 그의 회화 세계는 지성계에서도 해부의 대상으로 즐겨 언급되곤 했는데, 특히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를 비롯한 철학자들을 비롯해서 시인, 문학가들에게도 영감을 제공했다. 흔히 초현실주의 미술이라고 정의되어 오던 마그리트의 미술은 1960년대 이후 부터 갑자기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되기 시작해서 이른바 언어와 이미지, 어휘와 사물, 아이러니와 심리적 긴장, 대중적 이미지와 심오한 미적 효과가 교묘하게 버무려진 관념의 유희를 화폭으로 표현해서 이후 1960년대 팝아트와 1970년대 개념미술을 미리 예견한 선각자라고까지 평가되기도 했다.
혹자는 어딘가 모르게 엉뚱하고 괴짜다운 마그리트의 유머 감각과 아이러니를 두고 1910년대 프랑스에서 제작된 흑백 영화 <판토마스Fantomas>의 분위기에서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이야기를 담은 드릴러 시리즈인 이 영화 <판토마스>에서는 검정색 레이코트와 신사모 차림의 남자, 조각처럼 굳은 나체의 여인, 도무지 앞뒤 이야기를 짐작할 수 없이 수수께끼 처럼 얼어붙은 순간의 장면들이 계속 등장하곤 해서 마치 움직이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고 있는 감흥까지 준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최근 국제 미술시장과 미술관들이 앞다투어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요즘 벨기에 출신의 스타 현대 미술가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뤽 타이만Luc Tuymans이라는 화가는 마그리트 이후로 벨기에가 낳은 최고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사실 그도 르네 마그리트 이래로 특유의 기이하고 신비스러운 예술적 광기狂氣를 기꺼이 인정해 주는 벨기에의 화단 전통에 잔뜩 빚지고 있는 셈이다.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서양 미술사를 점검해 볼 때, 벨기에는 로지에 반 데어 바이덴Rosier van der Weyden,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등 기라성 같은 거장 고전 플랑드르 출신 화가들을 배출해 낸 것만 봐도 역사적인 미술 강국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마그리트는 고국 벨기에의 예술정신을 대표하는 국가 대표급 미술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명한 상업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미술 만으로 생계를 잇기 어려웠던 젊은 시절 그는 벽지를 그리거나 패션 광고 그림을 그려 판 한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고질적인 운영난 끝에 지난 2001년말에 결국 파산을 맞은 벨기에의 항공사 사베나Sabena가 1966년부터 1973년까지 7년 동안각종 광고 포스터와 전단에는 물론이고 이 항공사 소속 항공기 꼬리 날개 장식으로 썼던 그 유명한 하늘새 로고는 바로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회화 작품 <하늘을 나는 새L’Oiseau de Ciel>(1965년작)의 바로 그 새다. 가로 세로 크기 45 x 70센티미터 되는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의 이 그림은 본래 사베나 항공사 창업자가 벨지움의 국가적 자부심을 한껏 표현하기 위해서 마그리트를 시켜 창공을 박차고 나르는 새를 그려달라고 부탁한 끝에 완성된 상업적 주문작이었다.
당시 마그리트가 이 주문작을 그려주고 받은 수고비가 과연 얼마나 되었는지는 지금도 공식적인 기록이 남겨진 바가 없어서 알 길이 없지만, 당시 이 그림을 그려주고 난 후로 2년 만에 세상을 뜬 마그리트는 „시금치 요리에 얻을 버터를 살 수 있을 만큼“ 받았다고만 한 재미있는 대답으로 유명하다. 분명 얼마되지 않는 수고료로 그려준 그림있었던듯 하지만 화가 마그리트가 남긴 신비의 마력은 사베나 항공사의 파산 마지막까지도 여지없이 그 위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이 작품은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벨지움인 미술 애호가가 이 경매에서 무려 3,400,000유로 즉, 우리돈으로 하면 약 34억원에 이르는 돈을 주고 사갔는데, 그 결과 이 수익으로 사베나 항공사는 최종 파산 정리 과정에서 직원 파산 수당금을 단숨에 확보하는 수지(?)를 맞았다.
„… 내 그림에 보이는 것들은 상상의 이미지들이 아니다…그들은 모두 현실이다. 다시말해서 신비가 담긴 현실이지 신비로부터 동떨어진 그 무엇이 아니다.“ – 1962년 르네 마그리트
예술가들 중에는 남달리 스캔들과 화재를 몰고다니는 유별난 기인도 많고 다채로운 인생 살이를 거친 사람들도 많지만 마그리트의 한 평생은 공무원의 일생을 무색케할 정도로 대체로 평탄하고 무난했다. 그는 르네 프랑소아 기즐랭 마그리트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 1898-1967)라는 이름으로 벨기에 르씬느Lessines에서 태어났다. 열세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자살한 사건은 어린 화가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은 능히 짐작할만 하다.
열 여덟살되던 해에 마그리트는 미술을 공부하러 브뤼셀의 미술 아카데미Académy Royale des Beaux-Arts로 미술 유학을 떠나서 2년 동안 이 미술학교에서 수학을 했다. 지금도 브뤼셀인들 사이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그리트는 그림도 팔겸 체스 놀이도 할겸 브뤼셀 시내에 있는 타베른느 그리니치 주점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의 체스 실력은 워낙 불량해서 사람들은 그의 그림도 체스 실력 만큼이나 별볼일 없는 줄 알고 그의 그림을 사려들지 않았다고 한다.
때는 1916년, 제1차 대전이 전유럽을 휩쓸고 있던 격동과 혼란의 시대였는데 마그리트는 이를 배경으로 당시 파리에서 한창 유행하고 있던 아방가르드 큐비즘과 전통적인 아카데미풍 미술에 한꺼번에 접하게 되었는데, 전쟁으로 인한 피폐, 혼란, 불안감으로 가득하던 이 시대에 브뤼셀 미술 아카데미는 마그리트를 비롯한 수많은 당대 예술인들과 지성인들이 찾아드는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했다.
브뤼셀 미술 학교에서 알게 된 여러 예술가와 문학가 지인들 덕분에 화가는 1927년에 예술의 중심도시 파리로 건너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아방가르드 사조와 동인들로 북적되는 가운데 근대기 창조의 화산과도 같던 파리에서 마그리트는 우선 초현실주의자들과 친목을 다지게 되었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설자인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해서 화가 막스 에른스트, 호앙 미로, 한스 아르프를 만났다. 이때 형성한 초현실주의자들과의 인맥 덕택에 마그리트는 오늘날까지도 초현실주의의 가장 선구적인 기수의 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초현실주의 운동이 과거의 유산과 신흥 부르조아 물질문화를 비판하며 새로운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정치적 사상적 사명감을 띤 예술운동이었던 반면에 마그리트의 미술은 사회 변혁이나 정치적 이상주의를 찾아볼 수 없는 시각적 수수께끼였다. 그런 점에서 볼때, 엄밀한 의미에서 마그리트가 초현실주의 미술가였던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 사물들을 한 화면 속에 나열해서 우스꽝스럽고 동시에 기묘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보는이의 맘을 안절부적 못하도록 자극하는 마그리트 특유의 도발스러운 상상력은 관습과 습관에 젖어있는 당시 관객들에게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시각적 충격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예술인과 지성인 친구들 속에 둘려 싸여 당시 최신 유행의 아방가르드의 기운을 여한없이 맘껏 숨쉴 수 있게 해 준 파리에서의 생활은 마그리트에게 매우 긍적적이고 해방감을 느끼게 해 준 경험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 무엇보다 그에게 분수령적 순간은 1925년에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죠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그림 <사랑의 노래Song of Love>(1914년작) 를 직접 보게 되면서였는데, 이 순간을 가리켜서 마그리트는 자기 미술생애에 있어서 승리의 순간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젊은 마그리트에게 선배 화가 데 키리코의 그림은 „재능과 기술적 숙련과 자질구레한 미적 잔재주 속에서 습관적인 포로가 된채 권태에 젖어 있던 화가에게 정신적인 돌파구를 의미했으며 관객들이 드디어 한 편의 그림을 통해서 인간의 고독을 느끼고 세상의 적막을 들을 수 있게 해 준 정신적 각성제“와도 같았다.
당시 데 키리코가 연출한 을씨년년한 기이함은일명 형이상학주의 회회metaphysical painting라고 불리면서 이탈리아판 초현실주의 회화를 대변하고 있었다. 마그리트가 그 특유의 현실과 꿈, 고전적 사실주의와 당돌한 환상적 상상력을 넘나드는 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그림 양식을 구축하기까지는 분명 데 키리코의 공이 결정적이었던 게다. 마그리트는 데 키리코의 음침하고 불길한 느낌을 제거하고 그대신 장난기 느껴지는 위트를 표현했다. 또다른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로드 달리가 꿈 속에서나 나타날 법한 비현실적이고 환각을 보는 듯한 왜곡적인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할 수 한다면, 마그리트는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알고 보는 평범한 사물들을 기상천외하게 배치하고 비례를 변형시키는 기법을 이용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각에 기대하지 않은 충격을 던지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1927년-30년까지 3년 동안의 보람있고 흥미진진한 파리 생활을 마치고 고향 벨기에로 돌아온 마그리트는 브뤼셀에 있는 아텔리아에서 1954년까지 24년 동안을 살면 그림을 그렸다. 벨기에 출신의 지성인 겸 작가 폴 누제Paul Nougé와 루이 스퀴트네르Louis Scutenaire, 프랑스인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가 객식구로 자주 드나든 예술인 아지트 역할까지도 톡톡이 한 그의 브뤼셀 작업실 건물은 지금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René Magritte Museum으로 개축되어 그의 작품들과 옛 모습을 고스란히 보관 전시하고 있다.
격동과 수난을 거듭한 근대기 유럽의 정황 속에서도 마그리트의 예술 생애는 대체로 평탄하게 진행되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 또한 예술적 혼란과 두절 상태를 경험했다. 때는 지2차 세계대전중 독일 나치군이 벨기에를 점령하고 난 1940년대였는데, 이 때 화가는 암울한 정치군사적 정황에 설상가상으로 견디기 어려운 재정난과 정신적 우울증을 겪게 되면서 그동안 해 오던 수수께끼 그림을 잠시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화가 자신이 일명 ‚햇살풍 시기 sunlit period’로 명명한 이 위기의 시간 동안 마그리트는 잠시나마 화가를 위안해 주었던 그림은 아련하고 화사한 르누아르풍의 인상주의 여인화에서 영향을 받아서 푸른 하늘색을 배경으로 하여 연한 파스텔조가 주를 이루는 그림들을 즐겨 그렸다. 전쟁이 끝나고 난 1950년대부터 그는 인상주의풍 그림을 접고 이전에 했던 마그리트풍 그림으로 되돌아 갔지만 ‚햇살풍 시기’에 개척한 구름낀 푸른 하늘 이미지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의 그림 속에 멈추지 않고 단골요소로 나타났다.
일상 생활과 주변 환경이 따분하고 지루한가? 세상사가 온통 손바닥 보듯 뻔하고 진부한가? 그렇다면 마그리트가 선사하는 예상 밖의 기묘한 상상력과 내면의 숨은 신비와 수수께끼의 세계를 들여다 보라. 마그리트 미술 속의 이미지들이 선사하는 뜻밖의 배신감은 놀라운 청량제가 되어 줄 것이다. 한평생 한 여자와 살면서 평범한 중산층 가장으로 살면서 집 밖에도 나가지 않고 그림만 그리며 한 평생을 살다간 소시민 화가 르네 마그리트가 지금도 현대일들에게 선사하는 예측불허의 상상력은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Photo Credits : Kunstforum Wien © ADAGP, Paris, 2005/ ©VBK, Wien,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