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오후 차 한잔

보리스 쿠스토디에프, <차를 마시는 상인의 아내(Merchant’s Wife at Tea)>, 캔버스에 유채, 120X120 cm, 1918년. 소장: State Russian Museum, Saint Petersburg

한 묘령의 여성이 고급 목재 저택의 발코니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 짙은 보라색 바탕에 검정 패턴이 있는 드레스와 두건은 노출된 어깨로 드러난 흰 피부와 얼굴의 핑크빛 홍조를 한껏 강조한다. 젊은 여성의 체구는 제법 풍만해 보이고 찻잔 받침접시를 든 통통한 손가락과 자태에는 여성스런 미태가 어려있다. 육감적인 여성의 어깨에 머리를 부벼대는 고양이는 이 한가로운 티타임에 나른한 감미로움을 더한다. 테이블 위에는 러시아인들이 차를 우리는데 쓰는 사모바르(samovar) 주전자가 끓고 그 옆에는 여름철임을 시사하는 수박, 포도, 사과 등 제철 과일과 단과류가 놓여있다. 테이블 한켠에 자수천으로 덮힌 바느질 상자가 있는 것을 보아 여성은 아마도 티타임이 끝나면 자수로 남은 오후를 보내려나 보다.

20세기 초까지 옛 러시아의 농촌 중소도시의 전형적인 여름철 오후는 잠결처럼 평온하고 나른했다. 푸른 하늘을 따라 핑크색 구름이 뜬 화창하고 한가로운 여름날 오후, 이 즈음이면 상인계층은 의례 오전에는 고을 중심부에 출근해 업무를 보고 귀가해 점심식사와 낮잠을 취한 후 차를 마시는 것으로써 오후 일과를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그림 속 여성의 오른쪽 어깨 뒤, 청색 담장으로 둘려처진 이웃 부부도 발코니에서 오후 가족 티타임을 보내고 있다.

흔히 차(茶)를 국민음료로 즐기는 유럽 국가로 영국을 꼽는다. 그러나 러시아는 영국에 못잖은 차 애호국이다. 영국에서 1650년에 포르투갈 항해가들이 소개한 중국산 차가 처음 소개됐다면, 러시아에서는 그 보다 이른 1638년에 몽골 제국 지배자 알탄 칸이 러시아 제국 미하일 1세에게 차잎을 선물하면서 차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관통 차길(Tea Road)을 통한 러시아-중국 간 왕성한 차 무역을 통해서 18세기 말경부터 부유한 상인계층에서 평민 구분없이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마시는 국민음료가 됐다. 쿠스토디에프의 <차를 마시고 있는 상인의 아내> 에서 묘사된 것처럼, 테이블 위 작은 화염으로 보온되는 사모바르에서 차와 물을 찻잔 받침접시에 따른 후 섞어 마시는 러시아식 다도(茶道) 관습은 도자기 차 서비스에 담아 마시는 영국식 다도 문화와 가장 대조되는 특징이다.

오늘날 서양미술사에서 러시아 풍속화가, 인물의 심리를 꿰뚫는 초상화가, 재치와 풍자의 일러스트레이터, 무대 디자이너로 기억되는 보리스 마카일로비치 구스토디에프(Boris Mikhailovich Kustodiev, 1878~1927)는 생의 환희와 러시아의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갈구한 탐미주의자이자 뼈 속 깊이 자랑스러운 러시아인으로서 49년 예술 생애 동안 러시아적 영혼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일에 헌신했다.

그 중 <차를 마시는 상인의 아내>(1918년)는 현실과 환타지, 진솔한 아름다움과 호사가 융합된 쿠스토디에프 특유의 러시아 풍속화중 대표작이다. 영원한 애국자로서의 화가의 정체성을 암시하려는듯, 여주인공의 흰 도자기빛 피부색을 주축으로 여러 톤의 청색과 적색이 지배하는 색채 구도법은 러시아의 백청적 3색기를 환기시킨다. 러시아의 차 문화와 여성 모델은 상상 속 ‘모국(motherland)’이자 더 나아가 새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체성과 단일성을 상징한다.

<차를 마시는 상인의 아내(원제: Купчиха)>, 캔버스에 유채, 1920년, 개인소장

러시아 극작가 니콜라이 고골에서 소설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에 이르기까지 옛 러시아의 부유한 상인가정의 티타임은 19세기 러시아 고전 문학에서 즐겨 묘사된 소재였던 만큼, 혹 이 작품은 러시아 혁명 이전 자본주의 러시아 상인계층의 단조롭고 권태로운 일상을 꼬집은 반어적 조롱은 아니었을까? 이 작품이 완성된 1918년, 화가는 소비에트 무대지휘가 바실리 루즈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셰비키 혁명 직후 춥고 배고프고 볼품없는 생활 속에서 온통 음식거리 생각만으로 그림을 그린다’며 신세한탄 했다. 그럴 만하다. 당시 40살의 화가는 10년째 앓던 척추결핵이 악화돼 척수종양이 원인된 하반신 불구라는 개인적 비극과 싸우고 있었다.

실내에 구속된 화가는 15년 남은 여생을 고국 러시아에 대한 애정을 화가 고유의 상상력을 그림으로 승화하는데 불태웠다. 화가의 회고록에 썼듯, 어릴적 아스트라칸 마을의 부유한 상인 저택의 별채에 세들어 살며 보고 경험한 부자들의 풍요롭고 유복한 삶과 생활방식은 마치 오스트로브스키의 무대극에 나오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호사찬란했던 장면들처럼 길이 화가의 뇌리에 남았다. 그 기억은 침대와 휠체어에 몸이 묶인 처지에서도 화가가 긍정적 태도와 불굴의 창조의지를 잃지 않고 아름다운 추억과 환상이 중첩된 생의 환희를 축복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 영감의 원천이 돼줬다.

그리고 쿠스토디에프의 <차를 마시는 상인의 아내>는 20세기 이후 잊혀진 옛 러시아의 자취에 대한 민속적 기록이자 아련한 향수의 결정체다.

<차를 마시는 상인의 아내>, 캔버스에 유채, 81×99 cm, 1923년, 소장: 니즈니 노브고로드 국립 박물관

**이 글은 본래 농수산식품유통공사 ⟪aT⟫ 2020년 8월호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This column has been originally appeared in the August 2020 issue of aT, corporate journal published monthly by Korea Agro-Fisheries Trade Corpo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