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 있는 풍경

빵장수가 제방소 앞 가판대에 서서 커다란 황소뿔피리를 불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빵장수들은 뿔피리를 요란하게 불어서 갓 구어져 나온 신선한 빵을 사가라고 장터 손님들에게 알렸다. 제빵작업소는 화덕으로 인해 인근 건물에 화재의 위험 요인으로 여겨져서 제빵사 가족은 석조 건물에서만 거주하며 빵가게를 운영할 수 있었는데, 이 그림을 액자처럼 둘러싸고 있는 건축이 이를 반영한다.

얀 스테인(Jan Havicksz. Steen), <빵장수 부부(제빵사 아렌트 오스트베르트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 카이저스바르트의 초상)> 1658년, 목판에 유채, 37.7cm × 31.5cm. 소장: Rijksmuseum, Amsterdam

선홍색 빨강색 웃옷 밑에 받쳐 입은 흰 셔츠를 가슴팍까지 풀어헤친 빵장수의 모습에서 화덕이 활활 타는 그의 작업실 안은 꽤나 더울 것이라 짐작된다. 뒷켠 검정색 드레스 차림을 한채 작고 동글동글하게 구워낸 할제스(halsjes) 빵을 내오는 차분한 자태의 여인은 제빵사의 아내일 것이다. 빨강과 검정은 당시 섬유업과 인쇄업의 중심도시 레이던(Leiden)의 상징색이었다는 점에 미루어 볼 때, 이 부부는 레이던에서 빵 장사를 하는 것 같다. 이 작품 보다 2년 정도 앞서 그려진 얀 스테인(Jan Steen)의 <빵장수 부부>도 레이던을 배경 삼아 그려진 것이다.

화면 오른켠에 방패처럼 세워져 있는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빵은 보기만해도 인상적이다. 뒤베카터(duivekater)라 불리는데 곱게 정제한 밀가루, 달걀, 우유를 넣어 구운 잔치용 빵으로 주현절(1월 6일)이나 부활절처럼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던 빵 중의 빵이다. 독특하게 고안된 목재 빵걸이에는 현대인들에게도 익숙한 프레첼(pretzel)이 걸려있다. 당시 저렴하고 대중적인 빵으로 팔렸던 프레첼은 달큰하고 물컹하게 씹히는 식감이 특징이다. 매듭을 묶어놓은 것 같은 모양 때문에 네덜란드 사회에서 변치않는 사랑과 정절을 상징했는데, 인생과 사업 동반자로서 엮인 이 빵장수 부부의 운명을 넌지시 암시한다.

프레첼 걸이 아래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호밀빵이 놓여 있는데 메취의 또다른 회화 작품인 <창가에 앉은 여인>(1660년 초엽 작) 속에 등장한 성경책을 연상시킨다. 빵장수의 머리와 뿔피리 위로 드리우진 청색 포도넝쿨 이파리는 성서 『시편(詩篇, Psalm)』 128편 3절의 ‘복된 집의 풍성한 포도나무’ 구절과 빵와 포도주가 있는 성찬(Eucharist)을 연상시키며 이 빵 가게의 사업 번창과 행복한 가정을 기원한다. 프레첼 걸이에 사뿐이 앉은 나비를 통해 근면과 정절로 뭉친 빵장수 부부의 구원을 기약하면서 화가는 한 편의 장터 그림을 17세기 네덜란드 시대 개신교가 가르치던 근면정신과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미덕을 상기시키는 교훈그림으로 승화시켰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 그림을 화가 가브리엘 메취의 자화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빵장수 뒤켠에 보이는 화덕 문짝 아래에 새겨진 메취의 서명도 이 설을 뒷받침한다.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급성장하는 경제 못지않게 급변하는 네덜란드의 미술시장 유행과 컬렉터들의 취향의 변덕 속에서 화가의 업이 늘 성업하는 빵장수의 장사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4백 년 전 네덜란드 사람들이 쓰던 속담만 보더라도 당시 빵이 얼마나 중요한 일상의 일부였는지 상상이 간다. ’빵이 모자라면 파이 부스러기라도 먹자’란 우리 속담 ‘목구멍이 포도청’에 해당한다. 쪼들리는 살림 형편을 ‘빵 바구니를 높이 걸어둔다’,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지면 ‘이제 도마에 빵 깨나 놓고 산다’고 표현했다. 그런가하면 부유층이 즐겨 먹던 달콤푹신한 흰빵에 빗대어 버릇없는 응석받이로 자란 부유한 집 자손을 ‘흰빵 자식’, 깨가 쏟아지는 신혼기 첫 몇 주간을 ‘흰빵 위크’라 불렀다.

욥 베르크헤이데(Job Berckheyde), <빵 굽는 사람(The Baker)> (1681년 경), 캔버스에 유채. 소장: Worcester Art Museum, Massachusetts.

17세기 유럽인들은 하루에 평균 2,500~3,000 칼로리를 빵에서 취했을 정도로 탄소화물 위주의 식생활을 했다. 그만큼 빵은 하루 세끼니마다 빠지지 않고 식탁에 오른 주식이었던 한편으로, 집집마다 화덕이 없었기 때문에 신분고하와 빈부를 막론하고 누구나 매일 빵집에서 빵을 사 먹어야 했다. 예를 들어 동시대 델프트에서 활동한 화가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경우, 아내가 매일 새벽이면 빵가게에 가서 외상을 긋고 빵을 사왔는데 그 영수증 기록은 지금도 델프트 자료실에 남아있다.

빵은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의 공공 서비스를 대변하는 심벌이었다. 지배층부터 일하는 자와 사회 최고의 취약 계층에 이르기까지 만인의 주식 빵을 만들어파는 제빵사는 대중의 영양과 건강을 책임지는 특수전문기술자 겸 성실고액납세자로서 17세기 황금기 네덜란드 경제를 지탱해준 상인계층으로 존중받았다.

깐깐한 견습과정과 자격시험을 통과 한 후 길드에 소속된 제빵사 만이 빵을 만들어 팔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댓가로 네덜란드 정부는 원활하고 넉넉한 빵 공급을 위해 빵 제조에 관여되는 모든 재료 공급망 확보와 무역관리에 그토록 막대한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빵의 무게, 숙성, 가격에 대한 표준을 제정하여 자칫 약삭빠른 상혼(商魂)에 빠질 수 있는 제빵사를 견제하고 품질을 유지하는 식품제조품질 감독기관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인기 TV 셰프가 쓴 레시피 책을 책장에 진열해 두거나 TV나 유튜브 방송을 시청하며 식욕과 영감을 자극받듯,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에 다채롭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빵과자들은 당시 네덜란드의 음식 문화에 대한 시각적 기록이다. 활발한 상공업과 국제무역으로 윤택해진 17세기 네덜란드 신흥 중산층에게 빵장수 모티프가 담긴 풍속화는 빵이 안겨주는 시각적 풍성함과 심리적 만족감을 통해서 나날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과 사업번창 기원을 가다듬는데 더 없이 안성마춤의 생활예술이었다. 가브리엘 메취의 <빵장수>는 빵을 둘러싼 식량-영양-무역이라는 복잡다단한 인류의 보편적인 경제 기본원리를 재고해 보게 한다.

*이 글은 본래 농수산식품유통 공사 사내보 『aT』 2020년 5월 호 At the Playground | aT Gallery 칼럼에 실렸던 글의 편집되기 전 원문임을 밝혀둡니다. /This column has been originally appeared in the May 2020 issue of aT, corporate journal published monthly by Korea Agro-Fisheries Trade Corpor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