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2월에 시작된다.

성 발렌타인스 데이에 담긴 2월의 의미

Februalia – The Origin of St. Valentine’s Day

2월에 접어든 우리나라는 전국이 영하 온도의 한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때인데 음력달력은 올해 경자년(庚子年) 2월 4일이 절기상 입춘(立春)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는 음력 1월 15일 정월 대보름은 음력으로 설날이 지나고 새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날로서 풍년과 다산을 기원하는 놀이와 축제를 벌인다. 매년 양력으로 2월 4일 또는 5일주 하루에 찾아오는 입춘과 정월 대보름은 모두 음력 달력 상으로는 정월(1월)에 쇠지만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얼었던 강산의 물이 녹고 야생생명들이 겨울잠에서 깨는 봄 계절과 실질적인 한 해 농사의 시작이다.

그런가하면 지금부터 약 1,200여 년 전, 고대 영국의 앵글로-색슨 달력에 따르면 봄은 2월 7일에 시작됐다. 전년 11월 7일 시작된 겨울은 2월 6일을 끝으로 92일 간의 길고 어둡고 추운 시절을 마감하고 2월 7일부터 봄으로 접어들어 5월 8일까지 계속된다고 여겼다. 동서양과 문명권을 막론하고 풍성한 추수가 공동체의 무사한 생존과 평화를 좌지우지하는 중대사였던 과거 농경시대, 인류는 2월이 되면 봄 농사 채비를 위해 논밭을 확인하고 긴 동면을 취하던 나무와 덤불의 가지치기를 해주는 작업으로 새 생명체가 건강하고 활력있게 한 해의 생장과 번식을 시작할 수 있게 도왔다.

오늘날 전세계인들이 낭만적 로맨스와 사랑을 선언하고 축하하는 발렌타인 데이의 기원을 역사학자들은 고대 로마 시대 매년 2월 중순경 거행됐던 페브루알리아 축제에서 찾는다. 페브루알리아는 곧 다가올 3월 1일 로마 새해와 봄을 준비하며 지난해를 마감하고 봄맞이 참회, 기도, 정화를 하는 축제였다. 고대 로마시대에도 한 해의 시작인 봄철은 산천에 새싹이 돋고 세상만물이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계절인 동시에 남녀간의 사랑, 생식, 번식의 시절을 의미했다. 이 때가 되면 특히 사랑과 결혼을 준비하는 혼인 적령기의 성인남녀들은 이 때면 마음의 정화와 반성을 통한 정신적・영혼적 정화 외에도 목욕제계와 봄맞이 집안 대청소를 하는 것으로써 송구영신(送舊迎新)을 다짐했다.

로마인들은 매년 2월 13부터 15일까지 3일 동안 페브랄리아(Februalia)라는 축제를 열었다. 영어로 2월을 뜻하는 ‘페브루어리(February)’는 이 축제에서 유래했다. 1월과 2월이 아직 탄생하기 전 당시 초기 고대 로마 공화국에서 2월에 해당하는 시기는 12월 부터 새 해의 첫 달인 3월(March) 사이에 끼인 약 3개월간의 겨울철로 사실상 ‘죽은 시간’이었다. 로마 행정가들은 농사, 장사, 외출이 어려운 이 2월달을 죽은 조상과 저승의 신 플루토를 기리며 기도, 명상, 희생, 정화 등 종교적 의식을 거행하는 달로 제정했고 로마인들은 이를 따랐다.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된 페브랄리아 축제는 축제감독 임무를 맡은 루페르치(Luperci)라 불린 종교 사제들의 철저한 감시 하에 거행됐다. 행사는 언제나 루페르치 사제들이 염소와 개 한 마리씩을 제물로 바치는 제례의식으로 시작했다. 제물단 앞으로 끌려나온 염소와 개를 칼로 희생시킨 후 우유에 적신 모직천으로 핏자국을 닦아내는 의식이 끝나면 연회를 열어 잔치객과 음식을 나뭐 먹는 것으로써 청결과 정화의 의례를 마감했다. 연회가 끝나면 젊은 남성 사제들은 나체에 염소가죽 천 하나를 요부에 두르고 희생 동물들을 묶었던 염소가죽끈을 풀어 들고 팔라타인 언덕으로 올라갔다. 젊은 여성들과 임신을 고대하는 유부녀들은 몸과 손을 내밀어 사제들이 휘두르는 염소가죽 채찍을 맞으며 다산을 기원했는데, 이는 당시 루페르치 사제의 채찍에 몸을 맞으면 신체가 정화되고 번식력이 좋아진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른 의식이었다. 이렇게 해서 매년 2월 15일 열리는 페브랄리아 축제는 정화의 축일(Feast of Purification)로 정착됐다.

안드레아 카마세이(Andrea Camassei), <루페르칼리아 축제(Lupercalia)> Ca. 1635. Oil on canvas Museo del Prado.

보통 로마 시대의 축제 때 희생 동물로 돼지가 많이 사용됐던 것과 달리, 루페르칼리아 축제에 염소와 개가 제물용 동물로 사용됐던 이유는 무엇일까? 루페르칼리아가 몸과 마음의 정화를 앞세워서 남녀 간의 사랑, 성애, 그리고 생식과 번식을 장려한 축제였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재물로 사용된 염소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반인반염소 또는 반인반양(半人半羊) 형상을 한 로마 신화 속의 관능과 호색의 신 파우누스(Faunus, 그리스의 사티르와 대등)에 대한 은유라는 설이 유력하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신화 속에서 염소(또는 산양)는 왕성한 성욕과 지치지 않는 스태미너를, 서양 전통 사회에서 개는 변함없는 정절과 충성을 각각 상징하며 이후 기독교 가치가 지배한 서양 미술 작품 속에서도 반복해 등장한 휴머니즘 미덕의 심벌이다.

페브랄리아 축제는 훗날 루페르칼리아(Lupercalia) 축제로 통합됐다. 루페르칼리아 축제는 루페르(Luper) 즉, 로마의 건국 신화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게 젖을 물려 키워준 암늑대 ‘루프리칼(Luprical)’을 기리는 축제였다. 늑대가 로물루스와 레무스 두 형제에게 젖을 줘 키워준 것이 로마 공화국의 시초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2월 중순에 거행된 루페르칼리아 축제는 로마 정부가 로마 시민들에게 풍성하고 번성하는 한 해 시작을 알리고 한 해 농사 채비에 임할 것을 통보하는 기능을 했다.

기원후 5세기 그리스도교 체제 하 로마 제국의 교황 젤라시오 1세는 로마 사회에서 이교사상과 문화를 제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매년 열리던 다신교 축제 루페르칼리아를 폐지하고 그대신 2월 14일을 성 발렌타인의 날(St. Valentine’s Day)로 대체했는데, 이게 바로 오늘날까지 우리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발렌타인 데이의 시초다. 성 발렌타인은 로마에서 기독교가 박해받던 때인 기원후 3세기경에 병들고 가난한 자를 돌보고 사랑하지만 결혼이 금지된 연인들을 몰래 결혼시켜 줬던 로마의 성인이다. 성 발렌타인의 지극히 자비롭고 로맨틱한 업적과 배경 스토리를 참작해서 로마 교회의 로마 순교록은 발렌타인이 사형당한 2월 14일을 성 발렌타인을 기리는 축제일로 제정했고 지금까지도 영국성공회, 루터교회, 기독교정교회는 이 날을 발렌타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식 규정하고 있다.

기독교 로마 시대에 들어서도 로마인들의 역사적 기억에서 루페르칼리아가 본래 다신교적 축제였음은 잊혀지지 않고 근엄한 기독교 축제에 이교도적 요소가 가미됐다.예컨대, 성 발렌타인 축제일이 되면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성미의 로마인들은 축제 속의 흥분과 광적 분위기에 휩쓸려 옷을 벗고 음주를 즐기면서 남녀 짝짓기 추첨(lottery) 행사에 참가했다. 봄의 출발을 축하하고 선남선녀들의 사랑과 다산을 촉진한다는 취지로 출발한 이 행사를 통해 남성들은 쪽지에 자기가 흠모하는 여성의 이름을 적어 항아리에 넣은 후 무작위로 뽑아 당첨된 여성과 축제 기간 동안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즉석 중매 풍습처럼 보이지만 남녀간의 결합, 즉 결혼이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보다는 종족번식 또는 가족 간 이해가 앞선 사회적 합의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고대 유럽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로마의 패망 이후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유럽과 특히 영국에서 성 발렌타인의 날은 과거 로마시대의 광란적 축제의 잔재는 사라지고 한층 순하고 애교스럽게 변화했다.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시인 제프리 초서의 (Geoffrey Chaucer)의 설화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회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유럽인들에게 남녀 간의 사랑과 결합을 바라보는 시점의 전환을 제시했다.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낭만적인 사랑의 개념을 일깨워 중세시대 기사도적 사랑을 제도화시키는데 기여했고,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통해서 전통 사회의 가문과 공동체 이해관계를 우선하던 결혼관에 담긴 반인간중심적 제도에 의문을 던졌다.

⟨브로큰하트(Broken Heart)를 들고 있는 사랑의 신 큐피드⟩ 마이쎈 도자기 장식품. 19세기 제작. 높이 27 cm.

이후 17세기 계몽주의, 18세기 미국의 독립,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오늘날 발렌타인의 날은 전세계 여러나라에서 구애하는 연인, 친한 친구, 소중한 가족과 카드와 선물을 주고 받으며 기념하는 날로 진화했다. 19세기 말부터 미국에서 대량 종이 인쇄술이 발달하고 카드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디자인의 다양화, 가격의 저렴화, 카드소비의 증가로 이어져 발렌타인 카드는 큰 카드산업에 큰 상업적 성공을 제공했다. 그 결과 통통하고 앙증맞은 아기 또는 미소년으로 묘사되는 고대 로마 신화 속 사랑의 신 큐피드와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 두근대는 심장은 사랑을 뜻하는 오늘날 대중문화의 보편적 시각어휘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연인들은 발렌타인 데이에 사랑의 징표로 꽃다발, 장신구, 초컬릿을 사랑의 징표로 교환하며 구애하고 애정을 확인한다. 물론 그같은 현대적 발렌타인 데이 의식이 사랑의 상업화와 상술이 만들어낸 상업주의에 불과하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성 발렌타인의 날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되돌이켜 보건대 21세기 지금, 사랑은 개인의 자유의사와 선택으로 쟁취할 수 있는 엄연한 개인의 권리이자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귀한 자유의 지위를 쟁취했다. 하지만 큐피드의 어머니 비너스가 말했듯 사랑의 화살을 맞은 인간은 순간적인 사랑의 희열 못지않은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사랑의 선택하는 남녀 인구 못지 않게 사랑과 결혼 대신 독신의 생을 선택하는 선남선녀들의 증가추세는 사랑이란 가치에 내재된 결함 때문일까, 아니면 축제가 부족해진 현대 문명의 증후일까?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