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빛의 화가 빌헬름 함머쇠의 그림 속으로

Vilhelm Hammershøi – Danish Painter of Solitude and Light

빌헬름 함머쇼이 <실내 광경 – 피아노와 검정 드레스의 여인이 있는 거실> 1901년 작, 캔버스에 유채 © Ordrupgaard, Copenhagen.

바로크풍 로열 코펜하겐(Royal Copenhagen) 도자기, 1960년대풍 환상적인 가구 디자이너 베르너 판톤(Verner Panton), 레고(Lego) 어린이용 지능 장난감과 칼스베르크(Carlsberg) 맥주에 이르기까지 북구 유럽 나라 덴마크는 일상생활에 기능적인 실용주의 제품을 생산하여 전세계로 수출해 온 디자인과 무역의 강국이어 왔다.

이웃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인 스웨덴과 핀란드와 더불어서 공예와 산업 디자인 분야에서 보기좋고 품질이 우수한 디자인을 잘 만드는 나라로 알려져는 있지만 이 나라에도 국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순수 미술 전통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덴마크는 대륙권 유럽에서 떨어져 멀리 북구 유럽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단점 때문에 수 백년 동안 이른바 유럽 문화의 중심지라고 여겨져 온 이탈리아와 이웃하지도 직접적인 연결통로도 지니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해서 17세기에는 네덜란드와 북독일을 통해서, 그리고 북유럽 이웃 강국 스웨덴을 경유하여 간접적으로 주류 미술을 흡수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18세기말과 19세기 초엽, 신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덴마크는 독자적인 민족적 미술 정체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때는 이른바 전 유럽이 모더니즘이라는 신시대의 도래로 잔뜩 전율하던 문화적 대격변기였다. 이 때에 이르러서 에커스베르크(C.W. Eckersberg), 크리스텐 쾹케(Christen Købke), 빌헬름 마스트란트(Wilhem Marstrand), 룬드비 (J. Th. Lundbye), 스코브고르(P. C. Skovgaard) 같은 화가들은 덴마크의 거리풍경과 일상적인 생활상을 풍경화나 조각작품으로 재현하곤 했는데, 그래서 덴마크인들은 이 때를 가리켜서 이 나라가 전후후무하게 미술을 통해 국가적 정체성을 재발견한 “문화의 황금 시대” (1790년부터 1850년까지 약 반세기 여에 걸쳐 지속)라고 부른다.

고독과 빛의 화가 빌헬름 함머쇠 19세기에서 20세기로 옮아가던 세기전환기의 근대인의 고립과 불안감이라는 시대적 증후를 덴마크적 정서로 구현한 미술이란 어떤 것일까? 비교해 보건대, 과거 미술계에서는 20세기 근대 회화 분야에서 덴마크가 한때 식민지로 호령했던 이웃나라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아성에 대적할 만한 국보급 화가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고 여겨져 왔던게 사실이다.

빌헬름 함머쇠 <편치 음료를 담는 용기가 있는 실내 광경> 1904년 작, 캔버스에 유채 © Her Royal Highness Princess Benedikte of Denmark Foundation.

그러던 와중에 덴마크를 벗어나 국제 화단에서숨겨져 있던 덴마크 출신 화가 빌헬름 함머쇠(Vilhelm Hammershøi)에 대한 재발견은 스칸디나비아 대륙권 특히 덴마크의 화단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게 만드는 신선한 바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뭉크(Edvard Munch)가 근대의 고립과 불안감을 들뜨고 동요하는 빨강과 녹색 물감과 격렬한 필치로 ‘절규’했다고 한다면, 덴마크의 함머쇠는 흑과 백을 오가는 침잠된 회색 물감과 정밀한 사실주의적 필치로 ‘서늘한 한숨’의 미술을 구현했다고 말할수 있겠다.

북구 유럽으로 눈돌리는 미술계
되돌이켜 보건대, 함머쇠는 덴마크의 미술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일명 “덴마크 미술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던 19세기 덴마크 신고전주의 미술 운동 속에서 지나쳐간 여러명의 화가들 중의 하나 정도로 여겨져 왔을 뿐 동시대 덴마크 화단에서 조차 제대로 인정도 이해받지도 못했던게 사실이다.

함머쇠가 스무살 나던 해인 1885년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선보였던 <소녀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한 누이의 초상 그림은 전통에 너무 어긋났다는 점 때문에 혹평을 받았고, 이후 지금까지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아내 이다를 모델로 한 고독한 분위기의 실내 풍경화는 ‘그림 속의 내용이 결여’되어 있어서 뭔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해서 화가 생전 고국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 대신 이웃 나라 스웨덴에서 그의 그림들을 몇 점 구입해 갔다.

덴마크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의 미술을 잘 모른다고 손을 내저을 미술 애호가들이나 대중들이 많을 테지만 실은 이 지역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35년에 시작되었다. 함머쇠가 구미권 미술계에 얼굴을 내민 것은 지금보다 약 35년 전인 1982년.

미국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의 故 커크 바네도(Kirk Varnedoe) 큐레이터가 기획한 <북극광 : 1880-1910년 동안의 스칸디나비아 미술의 사실주의와 상징주의 (Northern Lights Realism and Symbolism in Scandinavian Painting 1880-1910)> 展이 미국에서는 최초로 1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 이르는 20세기 초엽의 북구 회화를 점검하는 전시가 미국의 여려 대도시에서 순회전으로 열렸다. 이어서 1986년에 런던으로 옮겨와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한 여름 밤의 꿈 – 세기 전환기 스칸디나비아의 미술>이라는 전시로 이어져서 영국에서도 소개된 이래,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테이트 두 곳에 각각 한 작품씩 함머쇠의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최근들어 스칸디나비아권에서도 유독 덴마크의 회화에 대하여 새롭게 불붙은 국제 미술계의 관심은 코펜하겐에 자리하고 있는 오르드룹고드 미술관 (Ordrupgaard Museum)에서 열린 전시를 출발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의 <덴마크 화가 빌룸젠 (Wilumsen)의 상징주의에서 표현주의로> 展 (2006년 6월-9월)과 뉴욕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연이어 개최된 덴마크 회화 전시회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본격화되고 있다.

그 결과 북구 유럽 스칸디나비아의 미술에서도 유독 최근 국제 미술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덴마크 출신의 화가 빌헬름 함머쇠(Vilhelm Hammershøi, 1864-1916)는 덴마크의 국립 미술관들은 물론 일부 헌신적인 컬렉터들 사이에서 수 억 달러라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앞다투어 사들여 가는 인기 미술 품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빌헬름 함머쇠 <높은 유리창> 1913년 작, 캔버스에 유채 © Ordrupgaard, Copenhagen.

그토록 이 나라 국경 밖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무명의 19세기 화가 함머쇠가 샛별 처럼 새로운 미술계 총아로 떠오르기 시작한 데에는 남몰래 그의 작품들을 사모은 소수의 해외 미술 컬렉터들의 영향도 컸다.

예컨대 막대한 재산가 겸 미술애호가였던 미국의 존 롭 2세  (John Loeb, Jr)는 지난 1980년대에 在 덴마크 미국대사로 코펜하겐에서 재직하던 중 당시만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함머쇠의 그림들에 매료되어 사설 미술품 딜러와 경매장을 경유하여 그의 작품을  저렴한 가격으로사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존 롭 2세의 함머스호이 그림 소장품들은 30여점이 넘는 큰 컬렉션 규모로 불어나서 지금은 뉴욕 그리니치에 자리하고 있는 브루스 뮤지엄(Bruce Museum)에 영구 소장 전시되고 있다.

북구 유럽의 베르메르, 집 안에 갖힌 에드워드 호퍼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로 넘어가는 근대기 유럽인들이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간해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던 실존적인 쟁점이었다. 당연히 이를 그림을 통해서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함머쇠의 미술은 보수적인 당대 덴마크 화단에서 이해받기 어려웠다. 그가 쉰 한 살의 나이로 암으로 세상을 뜬 해  1916년에 이를 때까지 그림을 통한 화가의 시대적 논평은 사회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미술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채 잊혀 있었던 것은 바로 그래서 였을 것이다.

빌헬름 함머쇠의 그림을 보고 첫 눈에 반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뭉크의 그림이 자아내는 고함치는 요란한 외침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20세기 초 미국의 국민적 정서의 정수를 그려서 대중 관객을 단순에 사로잡았다는 앤드류 와이어드 (Andrew Wyeth)나 노먼 락웰 (Norman Rockwell)의 실감나는 대중적 이미지도 아니다.

그러나 아내 이다 (Ida Ilsted)를 모델로 하여 적막하고 고요하고 서늘함이 가득한 화가 자신의 아파트 실내 공간을 반복적으로 그려가며 안절부절 못하는 근대인의 정신적 상태를 정적인 미학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함머쇠는 덴마크 화단을 신고전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이끈 장본인으로 꼽힌다.

고요하고 적말해 보이는 함머쇠의 그림 속에는 뭔지 알 수 없지만 보는이의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묘한 매력과 신비감이 감돈다. 그래서 함머쇠를 가리켜서 한 프랑스의 미술 평론가는 “북유럽의 베르메르”라는 별명을 붙였고, 영국의 한 평론가는 ‘네덜란드 풍속화가 베르메르와 고독의 대가인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묘한 융합’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미술사가는 그가 연출한 묘한 분위기를 상징주의로 해석하기도 한다.

함머쇠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검정과 백색 사이의 절묘한 조절을 통해서 극적인 명암의 효과를 혼자 터득한 빛의 귀재였다. 스물두살 되던 해에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의 거장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고 실내 광경 속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적(靜的)인 인물들을 통해서 웬지 알 수 없는 신비로움과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면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89년, 당시 구미권의 최첨단 미술 문화가 한 자리에 모인다는 문화 최전방 전시장 파리 세계 국제 박람회를 방문한 함머쇠는 여인초상화 속의 여성의 팔뚝 핏줄까지도 튕겨나올 듯 생생하게 묘사한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휘슬러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의 그림을 보고 그 속에 구사된 능수능란한 채색수법과 절묘한 명암처리법을 배워 갔다.

빌헬름 함머쇠 <독서하는 여인> 1908년작, 캔버스에 유채 © Kunstmuseet Brundlund Slot, Aabenraa, Dinamarca.

친구가 많지 않고 수줍음을 잘 타던 성격의 소유자 빌헬름 함머쇠는 주변에 많은 화가 동료들과 널리 교류하거나 친분을 맺지 않은채 홀로 그림그리기를 한 외톨이였으나 그의 고향 수도 코펜하겐은 대체로 아늑하고 편안한 거주지 겸 작업실 역할이 되어 주었다.

어릴적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서 8살부터 부모의 지원하에 그림 사사를 받았고, 청년기 한창 덴마크의 황금 시대의 대표 주자이던 사실주의 화가 페더 세베린 크뢰에르(Peder Severin Krøyer)의 사사 아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별다른 어려움없이 중산층적 생활을 영위하며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근대인의 고독과 공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머쇠의 실내 풍경화 속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얼어붙은 듯한 슬픔과 멜랑콜리로 그득하다. 그의 회화 캔보스 속에는 흑색과 백색을 오가는 침잠된 회색톤 일색인데다가 텅 빈 중산층 아파트 가정 실내 풍경 속에는 늘 관객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우울한 표정과 검정색 드레스 차림의 여성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림 속의 실내는 화가가 생전 평생 거주했던 코펜하겐의 크리스티안하븐 구역 스트란트가데 街 상의 아파트이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채 등장하는 여인네는 화가의 아내 일다였음은 이미 미술사가들에 의해 오래전 확인된 바 있다.

안타깝게도 함머쇠와 아내에 대하여 짐작할 만한 친필 기록이나 출판물이 거의 남아 있질 않아 화가의 일생에 대해  확인할 만한 일화는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여러 간접 자료에 미루어보아 화가는 주로 집에서 지냈고 조용한 사생활을 매우 중시한 소심가였다. 그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었던 아내는 유전성 정신질환을 고질적으로 앓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두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었던 원인이 아니었을까로 추측되고 있다.

화창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태양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눈이 따갑지 않을 만큼 은은한 일광, 서늘한 기후 만큼이나 고독의 냉기가 감도는 북구인들의 기질, 텅 비었으면서도 괴벽스러울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된 실내 공간 – 단지 북구 유럽의 모더니즘기 근대적 징후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섬뜩할 정도로 오늘날까지도 덴마크는 함머쇠가 화폭 속에 구현한 바로 그 서늘함과 공허가 서려있다.

그렇다면 진정 함머쇼이는 가장 덴마크적인 국민화가라 불릴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결론은 이 전시를 보는 관객들의 판단에 맏겨야 할 것 같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있는 오드룹고드 미술관에서 1월초까지 전시된 바 있는 함머쇼이 전시는 이어 스페인 바르셀로나 현대 문화 센터(Centre de Cultura Contemporània de Barcelona)에서 5월1일까지 계속된다. Photos courtesy: Centre de Cultura Contemporània de Barcelona.

* 이 글은 <오뜨> 지 2007년 3월호의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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