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과 대중 시장이 만나는 접점 – 1990년대의 인테리어와 제품 디자인 [제2부]

High Brow Meets Low Brow, Low Brow Meets High Brow

이미 1960년대말경부터 건축과 제품 디자인 분야에서 불거져 나온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논쟁은 특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성주의 엘리트 디자이너들과 이론가들의 예술적 실험정신과 극소수의 부유한 문화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제품 디자인 업체 알레시(Alessi)를 비롯해서 가구 디자인 업체인 카시나(Cassina)와 카르텔(Kartell) 등은 1980년대부터 유명 건축가 및 디자이너들의 명성을 약싹빠르게 상업화시킨 이른바‚ 거장 시리즈’ 디자인 제품들을 개발해 지갑 사정이 좋은 중상층 시장에 크게 어필했다.

그런가 하면, 1960년대의 팝 문화와 청년 문화에 이어서 1970년대와 1980년대로 이어진 경제 불황에 허덕이고 있던 영국에서는 장기화된 실업, 보편화된 마약 문화와 그와 수반된 청년 범죄, 지저분하고 너덜너덜한 옷차림과 공격적인 헤어스타일을 한 펑크족들로 대변된 ‚하위 문화(sub-culture)’가‚ 노동계급의 좌절의 표현’이라든가, 사회적 일탈자’라는 오명의 딱지를 벗고 주류 도시 문화의 일부분으로 영입되기 시작하여 ‚스트리트 스타일(street style)’이라는 새이름을 달고 최고급 하이 패션에서 잡지 디자인과 광고에 이르기까지 영국 대중문화를 선도하기에 이르렀다.

1979년도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의 주도로 결성된 스튜디오 알키미아(Studio Alchimia)는 20세기 모더니즘의 비판적인 수용과 역사주의와 키치라는 진부한 미적 개념을 풍자적으로 재해석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험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현대 디자인의 행로를 전격적으로 뒤바꾸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스튜디오 알키미아의 미학은 웬만한 철학가나 문화 이론가가 아니고서는 여간해서 접근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일반인들에게 난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이디어는 제품화되기 보다는 드로잉 전시회나 무대 퍼포먼스를 통해서 소개되었기 때문에 예술 운동적 성향이 더 강했다.

멘디니의 지나친 관념주의와 이론 편향 성향에 답답함을 느꼈던 에토레 솟사스(Ettore Sottsass)는 알키미아를 박차고 나와 1981년도에 밀라노에서 멤피스(Memphis)라는 디자인 그룹을 형성했다. 유럽 여러나라 출신들은 물론 멀리 미국과 일본에서 모여든 유명 건축가 및 디자이너들이 동참했던 멤피스 그룹은 제품 디자인의 ‚신 국제 양식(New International Style)’을 추구하되 제품 생산 업체와 협력하여 생산과 상업적 유통을 적극 모색함으로써 다가올 1990년대에 디자인을 통한 ‚문화의 국제화(cultural globalization)’를 미리 예견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New Economy, New Design
1980년대까지 계속되던 전세계의 경제 불황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완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클린턴 정부 하의 1990년대 중엽 이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인터넷 문화와 신경제(New Economy)의 물결로 인해서 전세계는 전에 없는 경제 호황과 사회문화적 낙관주의적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문화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아방가르드의 주류화(mainstreaming of avant-garde)’요 경제경영학적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제품 수명기의 생노병사(Product Life Cycle)’라고도 부를 수 있는 현상은 1990년대의 디자인 시장을 특징지을 수 있는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20세기 후반기부터 놀라운 가속도로 발전한 과학 및 공학 기술력은 1990년대의 건축 분야에서 볼 수 있었던 기상천외하고 미래주의적인 건축의 신형태 또는 신조형(New Form) 실험을 가능하게 했는데, 경우는 인테리어 및 제품 디자인 분야로도 이어져서 현대인들의 생활 공간과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나날이 새로 개발된 새로운 생산 공정 기술 및 소재를 이용하여 디자이너들은 보다 가볍고, 보다 절묘하고 보다 새로운 형태의 제품을 생산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제품이 개발-생산-시판되어 유행하기까지의 제품 수명 기한은 갈수록 숨가쁘게 짧아지기 시작하였고 나날이 다양해질 뿐만 아니라 쉽게 싫증을 느끼는 소비자들의 취향 변화와 유행의 속도에 부응하기 위하여 업체들과 디자이너들은 보다 새롭고 보다 기상천외한 형태을 한 제품을 속속 개발해 시장에 내보내는데 정신이 없었다. 특히 1990년대는 가구 디자인과 제품 디자인 분야에서 이른바 ‚보락스(Borax)의 시대’라고도 불리었는데, 보락스란 본래 거품이 많이 나는 세척 및 세탁용 세제를 뜻하는 광고계 전문 용어로서 세제 거품을 연상시키듯 유행적이고 상업적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기괴하고 과장된 듯한 대량 생산 디자인 용품들을 두루 일컫게 되었다.

1990년대는 기능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혁신적인 신 제품 디자인(New Product Design)이 극도로 글로벌화된 제품 시장에 동시다각적으로 소개된 시대이기도 하다. 이미 자동차 디자인은 기하학적으로 변형된 달걀을 연상시키는 듯한 타원형의 유기적 곡선과 유동적 형상이 돋보였는데, 예컨대 다임러-클라이슬러 PT 크루저(Daimler-Chrysler PT Cruiser), 신형 폴크스바겐 비틀(The New Beetle), 포드 카(Ford Ka) 등은 그런 좋은 예들인데 특히 PT 크루저와 뉴 비틀은 현대 소비자들의 과거에 대한 노스탈지아를 자극하되 현대적이고 미래적인 형태로 재해석 변형시켜서 성공한 경우이다.

미국의 사무용 가구 업체인 허먼 밀러(Hermann Miller)는 20세기 후반기 서구 오피스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큐비클(cubicle) 칸막이식 책상 사무실 시대에 막을 내리고 인체공학과 미래주의적 형태와 재활용 신소재를 특징으로 하는 신사무 환경을 제시하는 리솔브 오피스 시스템(Resolve Office System)과 에어론 사무용 의자(Aeron chair)를 소개했다.

1990년대에 널리 보편화되기 시작한 미래적 테크놀러지 지향적 이미지는 사무용 가구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사무용 통신 기기 분야로도 번지기 시작했다.특히 핀란드의 국가 대표급 이동전화기 생산업체인 노키아(Nokia) 사가 선보인 5100 시리즈 디지틀 무선 전화기는 5가지 색상으로 출시되어 전자제품의 소형화와 패션화를 한데 결합함으로써 미국의 모토롤라 무선 전화기가 고수해 오던 검정색 일색의 워키토키풍의 딱딱한 기존 무선 전화기 디자인에 정면 도전했다. 무선전화기의 대중화는 곧 핸드헬드(handheld) 초소형 디지틀 사무기기 시장에도 자극을 주어 통신용 전자 제품의 소형화와 디자인은 매출신장을 위한 더없이 중요한 부가가치로 인정받게 되었다.

보다 새로운 시각적 효과와 사용 경험을 원하는 소비자들은 따분하기 그지없는 회색 상자와 덩치 큰 모니터로 구성된 PC 데스크톱 컴퓨터 대신에 한결 부드럽고 유기적인 형태와 형형색색의 알사탕을 연상시키는 선명한 색상을 자랑하는 애플 아이맥(Apple iMac) 컴퓨터를 사무실과 가정 서재에 들여 놓기 시작했다. 한때 욕실 용품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이 있는 애플의 아트 디렉터 조나단 아이브스(Jonathan Ives)의 혁신적인 디자인 아이디어를 전자제품 상품화로 과감하게 연결시킨 스티브 잡스(Steve Jobs) 애플 회장의 비젼과 과감성은 20세기말에서 21세기를 잇는 현대 디자인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디자인 아이콘의 탄생으로 이어진 고전적인 성공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Design for All – 디자인 상품의 대중화에 기여한 첨단 플라스틱 소재
애플 컴퓨터 미학은 이 상품이 출시된 지 1-2년 만에 웬만한 가정용 디자인 일용품과 사무용품들이 너도나도 할 것없이 추종하기에 이르렀다. 금속성 광택을 머금은 미래주의 분위기와 은은한 색상을 발하는 반투명(translucent) 폴리카보네이트(polycarbonate)와 폴리프로필린(polypropylene) 신소재 플라스틱을 채용해 생산된 유기적이면서도 심플한 애플 컴퓨터 미학은 곧 카림 라시드(Karim Rashid)가 디자인한 움비나 가르보(Umbina Garbo trash) 휴지통, 마이클 그레이브스(Michael Graves)가 타겟(Target) 할인 체인 매장을 위해 디자인 한 변기청소용 솔, 그리고 주방용품 업체인 옥소(OXO)의 굿 그립스(Good Grips) 주방용품 시리즈 같은 수많은 제품들로 번져 1990년대 일반 대중의 가정 실내를 장식했다.

1990년대의 경제 부흥과 더불어 구미에서는 대도시에 거주하는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업인들의 수가 더 급증하게 되자 디자인은 남들과 차별화된 라이프스타일의 선언이자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심볼로 폭넓게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디자인은 더이상 20세기초 뉴욕 근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같은 지명도 높은 미술관의 영구 전시실에서만 관람할 수 있는 고미술품이 아니라 돈만 있으면 구입하여 집에 놓고 감상할 수 있는 부(副)와 남달리 탁월한 취미(taste)의 상징이 된 것이다.

자기집에서 파티를 여는 주인은 친구들에게 과시할 만한 유명 디자이너 의자 몇 대와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쥬시 살리프(Juicy salif) 레몬즙 짜기대 하나 정도는 진열하고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사교를 즐기는 젊은이들이나 사회지도층들은 유명 건축가나 디자이너가 설계했다고 알려진 레스토랑이나 바에 초대받아 가는 것을 대단한 사교적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마돈나와 브래드 피트 같은 헐리우드의 유명 연예인들은 거금을 들여 거장 디자인 제품들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으며 역으로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디자인 아이템들은 광고 효과를 얻어 디자인 시장에서 더 희귀 가치를 발휘하며 고가에 거래되기도 하였다. 뉴욕, 런던, 파리 등과 같은 국제 대도시에는 디자인 화랑들이 성행해 오고 있으며 그같은 추세는 경제가 침체된 최근에 와서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좋은 품질과 우수한 디자인을 갖춘 제품은 여전히 고가(高價)를 홋가할 수 밖에 없고 대다수의 일반 대중 소비자들은 저렴한 가격과 때로는 매우 저급한 디자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품을 구입해 쓸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아주 최저 가격대는 아니지만 대중 소비자들이 보다 접근하기에 쉬운 가격대의 대형 가구 및 디자인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예컨대 영국의 하비타트(Habitat) , 스웨덴의 이케아(IKEA), 미국의 블루 닷(Blu Dot) 등은 합리적이고 대체로 보기 좋은 양질의 디자인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대에 판매하는 그같은 디자인 소매업체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포장, 유통상의 합리화를 통해서 가격을 떨어뜨림으로서 양질의 디자인 제품을 대량 생산하여 대중에게 보급하는 이같은 소비의 ‚민주적 이상’은 미국의 거장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 겸 디자이너인 마이클 그레이브스가 1990년대 중엽부터 타겟 할인체인매장을 위해 디자인 한 마이클 그레이브스 컬렉션의 컨셈을 통해서도 실현되었는데, 특히 그레이브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찻주전자(Tea kettle)는 타겟 매장에서 34달러 99센트에 판매되기 시작한 이래 전세계에가 가장 많이 팔린 찻주전자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보다 전통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1990년대 구미권의 중상층대의 소비자들을 겨냥한 대중적 인테리어 및 제품 디자인 매장들도 호황을 누렸다.보다 보수적인 성향의 소비자층에서는 현대 디자인이 줄 수 없는 전통적 실내 분위기의 안락함과 친근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이탄 앨런(Ethan Allen)의 고전풍 가구나 격조높은 인테리어와 가사를 제안하는 토털 홈디자인 회사 마타 스튜어트 리빙(Martha Stewart Living), 그리고 인터넷붐을 타고 20세기 모더니즘 디자인과 최신 스타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온라인상으로 매매하는 뉴욕의 모스(Moss) 디자인 스토어 등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20세기적 양식은 물론 근대 이전기의 역사주의풍이 반영된 전통 양식에 이르기까지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가구 디자인과 제품들을 선호한 1990년대의 다양한 소비자들의 취향을 잘 반영한다.

인터넷 붐에 힘입은 경제 호황, 글로벌화의 가속화, 낙관적인 사회 분위기가 지속된 1990년대라고 해서 숨가쁜 대량 생산과 분에 넘치는 소비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심리학자인 도널드 노먼(Donald Norman)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일상품들의 디자인(The Design of Everyday Things)』(1998년 간행)에서 „… 나날이 복잡화 세련화되는 현대 소비 상품들 속에서 인간은 점점 문손잡이, 전기 스위치, 수도꼭지 같은 아주 단순한 것들 조차 제대로 사용하거나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치닫게 되었다 …“고 한탄한 바 있다.

친환경주의 디자이너 겸 이론가인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은 『진정한 세상을 위한 자연적인 디자인(The Great Imperative: Natural Design for the Real World)』(1995년 간행)에서 지구의 지속적인 생존(sustainability)를 위해서는 환경친화적인 소재와 생산 공정을 디자인에 적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같은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쟁점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일부 디자이너들은 천연 소재나 재활용된 소재를 제품에 활용하거나 디자인 제품 자체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분해되도록 고안된 녹색 디자인 제품을 제안하였으나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까지도 녹색 디자인 제품의 일반화는 개발의 여지를 많이 남겨두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이 글은 본래 LG 데코빌 사보 『공간사랑』지 2005년 12월호 “History of … exterior + interior” 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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