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세계대전 시대 오스트리아 미술
“AND YET THERE WAS ART! – AUSTRIA 1914-1918”
손님으로 여기를 왔더니 당신네는 나를 폭탄으로 환대하누나! –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1914-1918년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은 근대기 급속히 진보한 무기 및 전투 기술에 힘입어서 그 이전 그 어떤 전쟁 보다도 잔인했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그야말로 ‘20세기 거대한 원초적 재앙 (great seminal catastrophe)’ 이었다. 비참과 혼란으로 범벅된 이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미술은 계속되었다. 구체제식 제국주의, 글로벌리즘, 다인종∙다언어가 뒤섞인 다문화가 농익고 곪아터지며 서서히 구체제 종말을 맞고 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느 미술가들의 눈과 손을 통해서 어떤 미술이 전개되고 있었을까? 비엔나에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에서는 『그래도 미술은 계속되었네! (And Yet There was Art! – Austria 1914-1918)』 전을 9월 15일까지 열어 점검한다.
올해 20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100년이 되는 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중이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합스부르크 황실 황태자와 소피 폰 호헨베르크 황태자비가 열렬 보즈니아-세르비아계 해방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칩에 의해 저격당한 사건은 미술가들의 운명까지도 뒤흔들었다.
전쟁이 터지자 갑자기 미술 시장은 덩달아 침체되었다. 미술가들은 전쟁터로 징집돼 나가야 하는 슬픈 운명에 처했는데, 에곤 실레(Egon Schiele), 알빈 에거-린츠(Albin Egger-Lienz), 안톤 콜릭(Anton Kolig)은 바로 그런 미술가들이었다. 이탈리아, 루마니아, 러시아, 세르비아 국경으로 배치되어 최전방에서 누구는 전투 병사로서 또 누구는 종군화가로서 그림 그리기를 계속했던 이들의 눈과 손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제1차 세계대전의 파멸과 광기가 기록되었다.
전쟁 포고와 징집 선전
1912년 2월부터 1913년 11월까지 근 2년 동안 총 7부를 찍어 남성 인구로부터 징병을 호소하기 위해 출판되었던 『소집(Der Ruf)』 지는 전쟁이란 “파괴적인 재앙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카타르시스적인 기회”라고 전쟁의 의미를 재정의했다. “전쟁은 피를 통해서 세상에 온다”고 외치며 전쟁을 선동하고 징집을 독려하는 이 잡지 속 기사들은 종종 강렬한 원색과 격정적 필치가 주특성인 표현주의 미술을 활용하기를 좋아했다. 나태와 게으름에 빠진 중산층들을 백일몽에 빠진 정신상태로부터 흔들어 깨우는데 전쟁 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고 외쳤으며, 미술가들은 보는이의 감정을 건들고 뒤흔드는 그림으로 이 안일에 빠진 인구를 일깨우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전쟁에 동원되기에 이른다.

»병든 러시아 군 (Kranker Russe)«, 1915년, 43,6 × 30,4 cm, Black chalk, gouache on brown paper, mounted on Japanese paper. Leopold Museum, Wien
전쟁은 죽음의 무도회(Danse Macabre)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다” – 프란츠 카프카는 충격에 쌓여 소리 높여 절규했고, 극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는 “세계 전쟁. 세계 파멸.”이라고 응축했다.
보통 예술가들이란 대체로 전쟁 같은 죽음과 처참의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 민감한 감성의 족속들이지만, 알빈 에거-린츠(Albin Egger-Lienz)는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 직전인 1915년에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자진 지원해 입대했다. 전쟁을 “운명의 무자비한 행보”로 보았던 그는 심장 건강이 좋지못해 입대 면제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입대를 고집해 황실 지정 전쟁 홍보실 미술단(Kunstguppe der k.u.k. Kriegspressequartier)에 정식 회원이 되어 1916년 오스트리아 남단 이탈리아 국경에서 근무하며 전투 장면을 프레스코풍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을 했다.
적군에 대한 연민, 인류 보편에 대한 동정
“나는 이제 군인이 되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14일을 보냈다네.” 1915년 군대 징집되어 훈련을 받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에곤 실레에게 전쟁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운 경험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였던 점이 참작되어 실레 역시 황실 전쟁 홍보실 미술단으로 편입되어 전투 최선전으로 내몰리지는 않았다.
그가 미술단에서 주로 담당했던 임무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적군 러시아 포로들의 초상과 생활상을 두루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복무중 쓴 편지에 보면 러시아 포로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과 평화주의로 그득했던 실레의 심성을 엿볼 수가 있다. “아뭏든, 나는 적군 쪽에 훨씬 더 마음이 간다네. 그들의 나라는 우리나라 보다 월등히 흥미롭더군. 진정한 의미의 자유도 있고, 여기선 찾아보기 어려운 생각 깊은 사람들도 더 많다구. 매 시간 마다 이곳에서 그런 사람들이 썩고 있다니, 이얼마나 손실이란 말인가. …”

『원칙 “자유, 평등, 형제살상” (Das Prinzip (»Liberté, Egalité, Fratricide«), 1918년, 41,2 × 31,2 cm / Color lithograph on paper Leopold Museum, Wien © Fondation Oskar Kokoschka/Bildrecht, Wien 2014
그렇게 실존적으로 힘들었던 전쟁기가 실레에게는 예술적인 돌파력을 안겨줬는지, 특히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던 1917-18년이 되자 그의 작품들은 과거와는 달리 인생, 공포, 좌절, 죽음 같은 멜랑콜리적이고 위태로운 요소를 한결 제거하고 한결 조형적이고 기하학적 위주로 그림을 그리며 작품성을 한결 드높여 미술계의 총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꿈도 잠시.
전쟁이 막 끝나기 전 실레는 1918년 2월 클림트의 임종을 지키며 임종 초상을 그렸고, 그 자신 전쟁이 끝나자마자 같은 해 가을 유럽에서 창궐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28세라는 때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존재의 고통, 전쟁의 트라우마
그런가하면 독자적인 표현주의 그림을 그리던 오스카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최전방에서 기갑군으로 싸우면서 육체적 부상과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고 돌아와 전쟁의 참혹함을 되새기는 격렬한 그림을 계속해 그렸지만 끝내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전쟁통의 우울을 미술로 표현한 또다른 화가 안톤 콜릭(Anton Kolig)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마자 전쟁을 피해 망명하려 애쓰다가 어렵사리 이탈리아를 경유해 남 프랑스로 피신했지만 결국 1916년 전쟁 기록 화가로 일하게 되었다. 그가 특히 많이 그린 그림은 포로 수용소에 감금된 적군 지휘관들의 초상화였으나 그의 그림은 너무도 솔직했던 나머지 전쟁 홍보용 그림으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대신 콜릭는 전투 장면이 담긴 최전방 풍경화를 잘 그려서 1917년 황실 전쟁 홍보실 전속 화가로 위촉되어 전쟁 기록화를 다수 그려 남겼지만, 전쟁통 내내 “나는 막중한 고통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고통스러워 했다.
20세기를 연 전 세계적 글로벌 전쟁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되었던 미완의 전쟁 –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에서 참혹하고 무지막지한 혁명의 고비였다. 그러나 현재의 눈에서 본다면 구체제 절대주의를 청산한 유럽의 체재 변혁기이자 전 인류를 계급의 ‘감옥’으로 해방시켜준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미술은 평화기이든 전쟁기이든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This post was originally written in September 2014. 이 글은 20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한 해 2014년에 쓰인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