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디 화가가 된 귀족남

닐스 다르델 – 근대 유럽의 민주적 댄디

“NILS DARDEL AND THE MODERN AGE” at Moderna Museet, Stockholm

닐스 다르델 ⟨숨져가는 댄디(The Dying Dandy)⟩ 1918년 © Nils Dardel.
닐스 다르델 ⟨숨져가는 댄디(The Dying Dandy)⟩ 1918년 © Nils Dardel.

근대기 유럽 미술계에서 하이소사이어티에서 기인 화가이자 개성 강한 댄디로 알려져 있던 닐스 다르델(Nils Dardel). 오늘날 스웨덴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국민 화가가 되었지만 그가 국민 화가 대접을 받기 시작한 때는 그다지 오래전이 아니었다. 남달리 개성이 강한 패션 감각, 기이한 성격, 인습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사생활을 고집했던 꾀짜라는 딱지에 가려 198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 덕택에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댄디(Dandy)란 본래 18세기 영국에서 인류 문명과 최고로 세련된 매너를 배우러 이탈리아로 유학여행을 떠나던 엘리트 교육과정, 이른바 이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하고 돌아온 귀족 남자 자제들을 뚯했다. 이렇게 이탈리아 여행 동안 선진문화를 숨쉬며 보고 배우고 돌아온 댄디들은 사교파티장에 등장해 남다른 최첨단 패션 감각과 세련된 사교 매너를 뽐내곤 했다. 허나 19세기가 되자 중산층이 늘어나고 신흥 부유층 자재들 사이서도 그랜드 투어가 한결 널리 대중화되자 이제 댄대이즘은 한결 대중적 문화현상으로 보편화되었다.

그같은 19세기 전형적인 중산층 출신의 대표적인 댄디로는 아일랜드 출생의 천재 문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였는데, “남자의 진정한 완성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인격의 사람이냐에 달렸다”고 선언한 것으로써 모든 개인은 어느 가문과 배경 출신에 따라 운명을 따르는 수종적인 개체가 아니라 노력에 따라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유와 선택의 근대시대를 앞두고 있음을 일찍이 예견했다.

Nils Dardel in Tokyo, 1917 © Riksarkivet, Thora Dardel Hamiltons.
Nils Dardel in Tokyo, 1917 © Riksarkivet, Thora Dardel Hamiltons.

이 시대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듯 좀 더 큰 세상에서 그림을 그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젊은 다르델은 파리로 건너갔다. 20세기가 막 출범하기 시작하던 1900년대 초엽, 유럽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덕택에 시골서 도시로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이 북적대며 형성하기 시작한 유럽 여러 대도시들 중에서도 특히 20세기 초엽 파리는 구시대 귀족주의가 완전 사라지고 신흥 부르조아지 중산층이 급부상하는 가운데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근대적 개념의 신시민, 예술가, 일용 노동자와 창부, 이민자들이 북적대는 한결 숨가쁘고 덧없는 거대한 코스모폴리스였다.

1920년대, 미술과 문화의 중심도시 파리로 건너와 작업실을 차린 다르델은 사회 상류층 유명인사들의 주문을 받아 초상화 그리는 일을 하면서 파리 미술계에서 고국 스웨덴에서 보다 좋은 평판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성공 비결은 초상화 주인공들을 실물 보다 한결 젊고 아름답게 미화시켜서 그려내는 것이었는데, 이를 시샘한 주변 화가들은 다르델의 아텔리에를 ‘미학적 성형실’이라며 비꼬아 불렀다 한다.

그가 그려낸 수많은 초상화들 중에서도 유독 눈여겨 볼만한 작품들은 다양한 옷차림과 표정으로 연출된 신비와 신화로 줄줄 흐르는 ‘댄디’로서의 자화상들일게다. 다르델은 본래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안락하게 성장했지만 구세대 귀족주의가 무너져가는 가운데 오스카 와일드 같은 신흥 중산층이 강한 자신감과 자기주장으로 도전해 오는 신시대 사회분위기 속에서 자기를 방어하고 거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술에 심취하면서 전통과 신사고가 모순적으로 갈등하는 특유의 성격을 발전시켰던 것 같다.

다르델은 평생 별다른 경제적 어려움이나 불편 없이 윤택한 생활을 누렸지만 1905년 17살 되던 해에 성홍열을 심하게 앓고 난 후로 죽을 때가지 늘 질병과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공포를 안고 살았다고 한다. 다르델은 외부적으로 누가 봐도 두드러진 남다른 패션 감각과 수근대기 좋아하는 세인들을 상대로 서슴치않고 날카로운 언쟁력을 발휘했던 걸출한 ‘캐릭터’였지만 사적으로는 극도로 민감하고 정처없는 마음의 소유자였다 한다.

오스카 와일드와 그토록 유명한 로맨스를 나누었던 ‘보우지’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1870년*-1945년†)의 경우에서도 미루어 볼 수 있듯이, 닐스 다르델이 표출했던 캐릭터는 몰락해가는 가문 환경과 빚더미 속에서도 돈이나 생계 같은 현실적인 사안은 극구 등안시 한채 허영과 퇴폐를 유별스럽게 연출하던 태도(attitude) 그 자체를 존재의 이유이자 목표로 삼은채 세기말적 몰락을 앞두고 서서히 붕괴해가던 유럽 귀족들의 전형적인 자화상이기도 하다.

닐스 다르델 ⟨치정범죄(Crime of Passion)⟩ 1921 © Nils Dardel.
닐스 다르델 ⟨치정범죄(Crime of Passion)⟩ 1921 © Nils Dardel.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는 폭소 대 눈물, 심각함 대 우스꽝스러움, 죽음 대 사랑, 망상 대 환상, 냉소함 대 진지함, 고급스러움 대 소박함, 천왕성적 기질(신체는 남성이나 내면적 사고방식과 성적 지향이 여성적인 성향) 등 정반대적 요소들이 나란히 등장하여 보는이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 애매모호함의 사고방식은 어쩌면 근대적 격변기 20세기 초엽을 특징지었던 시대적 현상이자 시대정신(Zeitgeist)이었던 것일까?

닐스 다르델(1888-1943)은 분명 유럽 근대기를 살며 시대의 격정과 변화를 목격한 근대인이었지만, 그의 미술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미학을 쫏지도 않았으며 그 자신 당시 유행하던 근대적 아방가르드 사조 어느 하나도 전적으로 포용한 적도 없었다. 그의 그림 속에는 언뜻 19세기 유행했던 앙리 루소풍의 나이비즘(Naivism)과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연상시키는 묘한 신비감이 담겨 있다.

애매모호한 성적지향성과 잘 타협하지 않는 기인적 성미 탓에 주변인들의 악성 소문에 자주 시달리며 동시대 주변 미술가들처럼 추상미술을 추구하지 않았던 이유로 해서 깊이 없고 진부한 화가라는 비판에 마음 깊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꿋꿋히 그림을 그려나갔다. 특히 제1차 대전기와 경제 대공황기를 유럽을 휩쓸던 1920-30년대 재즈 시대 그의 작품의 완성도가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고 미술평론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의 경계가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1980년대 이후부터 미술계에서 재발견되면서 그의 작품 ⟨숨져가는 댄디(The Dying Dandy)⟩(1918년 작품)은 쾌락추구지향적 1980년대 문화 속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부상해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되팔리는 미술시장 블루칩 작품으로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그의 그림 ⟨숨져가는 댄디⟩ 속 비관적 자화상과는 달리, 댄디는 20세기 후반기 포스트모더니즘을 타고 보다 화려한 모양을 갖춘채 되돌아왔다.

Nils Dardel, The Paranoiac, 1925 © Nils Dardel.
Nils Dardel, 〈피해망상자들(The Paranoiacs)〉 1925 © Nils Dardel.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화된 1970년대부터 영국의 가수 데이빗 보위(David Bowie)는 대중 팝문화와 하이패션 예술,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경계를 흐트리며 애매모호하고 환상적인 패션감각과 매너리즘으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보위는 오늘날 복장사에서 다르델의 근대기 댄디이즘을 가장 급진적이고 격렬하게 표현해 현대적 댄디이즘으로 재소화시킨 패션 아이콘이 되어 곧 휴먼리그, 스판다우 발레, 두란두란 같은 뮤직밴드의 패션에 영감을 주었다.

패션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적 해석에서 가르치듯 인간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이나 상황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믿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와 패션을 통제하고 눈에 띄게 꾸미고 물상화하는 습성을 지녔다. 바로 이점에 착안하여 댄디 혹은 오늘날의 힙스터는 대중 소비시장에 제공하는 소비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유별나게 치장한 외모로 표현하는 것으로써 외부세계를 향해 공격의 화살을 겨냥하는 즉 발터 벤야민이 이름한 ‘변증적 이미지의 표현 행위’라 보기도 한다.

과거 소수의 기인들이 추구하던 댄디이즘은 이제 일상 대중문화 속에서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자리잡았다. 1990년대부터 등장한 이른바 후기 댄디족인 ‘힙스터’의 탄생과, 이를 한결 자본주의 대중소비문화적으로 소화한 메트로섹슈얼 남성(metrosexual)들도 오늘날 패션에 열광하고 화장품을 바르는 남성 그루밍 트렌드를 일상화시키는데 기여했다. Images courtesy: Moderna Museet, Stockho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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