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 풍경화가로 다시보기

GUSTAV KLIMT’S LANDSCAPES

올해[2002년]로부터 약 2년전인 2000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에 자리한 갤러리 벨베데레에서는 《구스타브 클림트와 여인들》展이 열려 이곳 국내외 미술애호가들의 큰 관심을 끌었던 바 있다. 벨베데레 갤러리가 있는 벨베데레  궁은 오스트로-헝거리 제국 시절 1714-22년 무려 8년에 걸쳐서 사보이의 오이겐 왕자가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바로크 양식 궁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립 미술관으로 지정되었는데, 클림트를 비롯해서 에곤 쉴레, 리햐르트 게르스틀, 오스카 코코슈카 등 19-20세기 전환기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오늘날 구스타브 클림트는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 못지않게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화가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흔히 그는 금빛 찬연한 장식적 후경을 배경삼아 신화적 상징성을 담은 에로틱한 여성 이미지를 그리는 여인 초상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하다 보니 기존 클림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들도 주로 그의 여인초상화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해 소개해 왔다. 하지만 그가 생전 여인초상에 못지 않게 풍경화가로서도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실제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클림트의 작품들의 절반수는 풍경화가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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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터제 호수에서의 풍경』 1900년. Leopold Museum, Vienna.

최근 〈아트뉴스페이퍼〉紙 11월호에 실린 데이빗 다씨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이번 《클림트 풍경화》전이 개막하기까지는 오스트리아와 미국 간의 정치적 줄다리기가 적잖이 관여했다는 후문이다. 이 전시는 당초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갤러리와 미국 메사추세츠주 윌리암스타운에 자리한 클락 아트 인스티튜트가 수년간의 공동 기획과 연구에 걸쳐 지난 여름 클락 인스티튜트에서 개막되기로 계획되었었다. 이 전시에 3점을 대여해 주기로 했던 벨베데레 갤러리는 클락 인스티튜트에서의 전시 개막 며칠 전 손상 우려를 이유로 들어 작품 대여 거절 통보를 보냈다.

그 결과 미국에서 가장 종합적인 클림트 풍경화 전시를 계획했던 클락 인스티튜트의 전시는 화가의 핵심작 3점이 빠진 미완성의 전시를 여는 안따까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기다렸다는듯 클락 인스티튜트 전시에 소장품 한 점을 대여해 줬던 뉴욕 아트딜러 제인 칼리르는 이번 오스트리아에서의 전시에 그녀의 소장품인 『아터제 호수 섬 (Insel am Attersee)』(1901년 작) 대여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작게는 벨베데레 갤러리에 크게는 오스트리아에 보복을 가하는 제스쳐인 셈이었다. 그 결과 이 벨베데레 전시에서는 이 대표적인 클림트 초기 풍경화를 구경할 수 없는 안따까운 사태가 벌어졌다.

품위 가득한 미술관 건물 뒤에서 벌어진 그같은 국가간 정치 줄다리기의 근원은 알고보면 제2차 세계대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치정권은 유태인 박해 과정에서 유태인 가족 소장의 수많은 명작 미술품들을 압수했다. 이에 최근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유태인 후손들이 미국법정을 통해서 제2차대전중 압수당한 미술품 반환요구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 오스트리아 영토를 벗어난 소송 걸린  미술작품은 언제든지 법정시비에 휘말릴 위험을 지니고 있다. 벨베데레가 클락 인스티튜트에 대여를 거절했던 소장품 석 점은 오스트리아계 유태인 블로흐-바우어 가족이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작품들인 것으로 추정되며 벨베데레 측이 작품을 대서양 바다 건너로 떠나보내길 꺼려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는 짐작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 전시는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갤러리의 자체 소장품 외에도 유럽, 미국, 일본 등지의 여러 미술관 및 소장가들로 부터 어렵사리 대여해 온 풍경화들 3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오스트리아 사상 최초 가장 종합적인 규모의 클림트 풍경화전이라고 자랑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인 칼리르의 뉴욕 세인트 에티엔느 갤러리 소장품 『아터제 호수』를 제외한다면 벨베데레 갤러리가 선보이고 있는 전시는 구성과 내용면에서 볼 때 클락 아트 인스티튜트의 그것보다 알차고 작품간의 공백을 잘 메꿔주고 있는게 사실이다. 클림트의 풍경화를 소장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내 개인 컬렉터들이 전시를 위해 적극 대여에 협조해 준 것이 무엇보다도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 미술 소장가들이 국가적 차원의 전시 기획의 질 향상에 얼마나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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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터제 호수가에 있는 슐로스 캄머, 제I번』 1908년. Národní Galerie v Praze, Prague.

그 모든 스캔들을 뒤로 한 채, 풍경화가로서의 클림트를 조명해 보는 이번 전시가 담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니 몇가지 의미가 눈에 띈다. 최근까지 클림트 전문가들이나 미술사학자들은 클림트를 여인 초상화가로 정의하고,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분석의 틀로 삼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성들을 사랑, 죽음, 욕망이라는 상징성으로 연관시켜 설명하는데 집중해 왔다. 하층 계급 소녀로부터 부유한 부르조아 여성, 감미롭고 사랑스러운 여인에서 파멸과 죽음을 몰고오는 요부 할 것 없이 그의 여인초상은 여성과 성 (性)을 향한 화가의 내면적 갈등과 예술적 승화를 이해하는데 열쇄가 되어 주었던 때문이다.

반면 그의 풍경화는 순수한 형식적 측면과 정신적인 해방 의지가 담겨 있어 화가 클림트의 사적인 이면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여성 초상이 고객을 의식한 주문작들었다고 한다면, 풍경화는 화가 스스로의 내면적 정신세계 수련과 실험주의를 우선 삼아 제작한 사적 창조물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특히 기법적인 측면에서 클림트는 석고로 아주 얇게 밑칠한 캔버스를 즐겨 사용하길 좋아한데다가 유성도 (油性度)가 매우 낮은 물감을 주로 썼고 그림 표면에 바니시를 바르지 않아 작품이 손상될 위험이 매우 높기로도 알려져 있다. 덕분에 전세계의 클림트 회화 소장자들이 유난히 과거 최근 십여년 동안 클림트 그림 보존처리에 유난히 신경을 써왔다는 소식도 미술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클림트가 풍경화에 열중하게 된 데에는 화가의 개인적 환경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체코계 하류계층 가정에서 태어나 줄곧 빈에서 성장한 이 도시 청년은 이미 14세되던 해인1876년에 남다른 손재주를 인정받아 빈 미술공예학교(지금의 빈 응용미술대학)에 입학하는 것으로 미술세계에 입문했다. 그는 20대에 걸쳐 당시 빈 미술계를 주도한 한스 마카르트 (Hans Makart) 계열의 역사주의 미술공예 운동에 가담해 활동하는 동안 당시 새로 건축된 빈 부르크테아터 국립극장의 실내 장식을 담당하는 것으로 첫 직업적 미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촉망받기 시작했다.

1891년, 남동생 에른스트가 빈 부유층 유태인 여성 헬레네 플뢰게와 결혼하는 것을 계기로 29세의 클림트는 비로소 빈 유태계 여성 상류 사교계에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를 통해 알게 된 에밀리에 플뢰게 (헬레네 플뢰게의 이모)는 이후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 겸 충직한 미술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이미 제작년의 《구스타브 클림트와 여인들》 전시회가 그 많은 여인 초상화를 통해 소개했던 것처럼, 세기전환기 빈 부르조아 사교계 여성들은 때로는 모델로서 또 때로는 고객으로서 클림트 미술의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이 독특한 현상은 그래서 오늘날 미술사학자와 역사학자들이 빈의 유태계 여성사교계와 화가후원 관행의 상호영향 관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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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가의 아침』 1899년. Leopold Museum, Vienna.

문맹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비롯해서 클림트가 문자언어에 대한 병적인 거부증세를 지녔다는 설을 뒷바침이라도 하듯 오늘날 클림트 연구에 필요한 관련 개인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로 인해서 학구적인 수준의 작가연구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클림트가 실제 비엔나 사교계서 인기 높은 주문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누린 시기는 1886년부터 1890년대초까지 불과 4,5년에 불과하다. 18세기 천재 작곡가 모짜르트가 재능에 비해 두 어 해에 불과한 극히 짧은 유명세의 달콤함을 맛 본 후 빈곤과 고난으로 예술인생을 마쳤던 것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특출한 예술가가 동료 예술인들의 질시 대상이 되어 정치적 희생양으로 사장되곤 하는 비엔나 특유의 예술계 메커니즘이 클림트의 수난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직업적으로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클림트는 빈대학 아카데미 위원회의 주문으로 이른바 《학과 그림 (Faculty Painting)》연작 중 그 첫 작품 『철학 (Philosophy)』을 1900년에 드디어 선보였다. 곧바로 클림트는 비난과 스캔들에 휩싸였고, 클림트를 빈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하자는 그제까지의 제안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01년 그는 《학과 그림》의 나머지 연작인 『의학 (Medicine)』을 완성했고, 이어서 1902년에 빈분리파 미술관 (Seccession)에 그 유명한 『베에토벤 벽화(Beethoven Frieze)』 연작을 완성해 발표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드높은 작품성과 혁신적인 아르누보적 양식성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다시 미술계의 혹한 비평에 또다시 부딪히고 말았다. 정치적 소용돌이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피해의식과 사회가 쏟아부은 쓰디쓴 비판에 가슴깊이 상처받은 클림트는 예술인생의 결정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다.

사회에 대한 분노와 반항감 속에서 갈등하던 클림트는 결국 사회를 등진채 전적으로 개인적인 세계로 후퇴하는 길을 택했다. 빈 대학 스캔들 이후로 클림트는 상징과 알레고리가 담긴 그림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 대신 풍경화와 상류층 여성초상화 그리기에 전념한다. 지금의 빈 요제프슈테터 가 21번지에 자리해 있던 그의 작업실에서 정신적 시련을 뒤로 한 채 그는 아늑한 은둔자 생활을 하며 그림그리기를 계속했다. 빈 비더마이어풍 가구로 장식된 그의 작업실은 언제나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과 수십명의 여성 누드모델들 그리고 고양이떼들로 북적거리는 그야말로 외부세계와 차단된 평화로운 소우주와도 같았다고 한다. 후견인이던 에밀리에 플뢰게의 비호가 자칫 빈곤이나 시련에 노출되기 쉬운 화가에게 아늑한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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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1900년. 개인 소장

한편, 14명의 여성들이 출산한 사생아의 아버지였던 동시에 평생 반려자였던 에밀리에 플뢰게와 끝내 결혼하지 않은 이유 (일설에 의하면 그가 매독에 시달렸기 때문이라고도 전해진다.) 등은 그가 창조한 에로틱한 여성 이미지들에 대한 해석에 시발점을 제공해 준다. 동시에 그가 풍경화를 그리며 내면세계의 재충전을 시도한 것은 어찌보면 혼탁한 속세를 벗어나 자연을 벗해 유유자적을 추구한 동양 선비의 은둔사상과도 흡사한 구석이 없지 않다. 안타깝게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400여 점의 여성초상 드로잉과 스케치들은 전체 결과물의 수량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할 만큼 당시 클림트는 매우 생산적인 창조활동을 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에밀리 플뢰게와 더불어 녹음이 우거진 여름철을 틈타 오스트리아에 있는 아터제 호수와 가스타인 호수를 비롯해서 이탈리아의 가르다 호수 등지에 체류하는 동안 클림트가 완성한 풍경화들은 제작 방식 면에서 동시대 프랑스 인상파의 야외 풍경화와 비교해 볼 때 크게 다르지 않다. 1899-1890년도 즈음에 그린 초기 클림트 풍경화들은 인상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풍긴다. 『연못가의 아침 (Ein Morgen am Teich)』(1899년 작)과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Bauernhaus mit Birken)』(1900년 작)는 인상주의 특유의 아련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초기작의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특히 이 즈음 그는 빈에서 열린 테오 반 리셀베르그와 폴 시냑의 전시회에서 처음 인상파의 점묘주의 화법에 큰 감명을 받고 반복적인 점묘적 요소를 도입하게 시작했다. 그는 점묘 기법과 자신 특유의 현란하고 장식적인 채색법을 결합하여 마치 정교하게 짠 직물디자인을 보는 듯한 감흥을 자아냈다. 예를 들어 1901년도에 제작된 『소나무 숲, 제1번 (Tannenwald I)』은 바로 그같은 초기작에 속하며, 이어 1905년에 완성된 『나무 밑의 장미 (Rosen unter Bäumen)』는 보석이 반짝이는 듯한 효과를 한층 상승시켜서 상류층 여성초상화에서 흔히 발견되던 현란한 색상과 모자이크적 장식성 효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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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숲, 제1번』 1901년. Kunsthaus Zug, Stiftung Sammlung Kamm.

클림트 전문가들은 이들 초기 작품들이 클림트가 나비파 (Nabis)의 고갱, 드니, 뷔야르, 보나르, 루셀, 마이욜 풍 색채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나비파는 회화의 대상 혹은 소재가 그림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일체의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순수한 회화적 구성을 미적 시각언어로 전달할 것을 미술의 목표로 삼았었다. 쇠라 식의 점묘주의 기법과 고갱 식의 원색 위주의 색면 및 평면성을 강조하여 자연을 형태와 색으로 환원시켜 재현한다고 하는 철학은 클림트의 자연 재현 의도와 맞아 떨어졌다. 내면세계의 정신성을 묘사하되 오묘한 색채의 세계를 탐구할 것에 골몰했던 그의 창조 동기와 일치했던 것이다.

클림트가 적극적으로 탐험한 이 색채 원리란 다름아닌 보색대비(補色對比) 기법이다. 이미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롸 (Eugène Delacroix)가 즐겨 썼던 것으로 이 색체 기법은 서로 대비되는 유채 물감을 섞으면 회색이 만들어지지만 섞지 않은 원색 물감을 대비색과 나란히 칠하면 오히려 화려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효과를 말한다. 보색대비 기법은 이후 19세기말 인상주의와 상징주의 화가들이 널리 애용한 기법이기도 했다. 이 전시는 벨베데레 갤러리가 직접 소장하고 있는 유젠느 들라크롸의 1834년작 『꽃 정물』을 클림트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하여 관객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예컨대, 보색 대비 기법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한 화가 반 고호는 특히 빨강-초록, 파랑-주황, 노랑-보라를 나란히 칠하는 것으로써 드라마틱한 색채 대비 효과를 거두었던데 반해서, 클림트는 대체로 그보다 한결 건조하고 은근하면서도 절제된 듯한 분위기를 선호했다. 클림트가 1907년 완성한 작품 『해바라기(Sonnenblume)』는 반 고호의 격렬한 『해바라기』에 비하면 훨씬 차분한 조화감이 감돈다. 그가 그림 표면에 광택용 바니시를 사용하길 꺼려한 이유도 둔탁하지 않고 투명해 보이는 색채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클림트에게 보색대비 기법은 강렬한 내면적 감정의 폭발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차분하고 조화로운 회화 구성을 위한 요소로 활용된 것이었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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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1907년. 개인소장.

그의 구도법과 화면처리법도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하던 파격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클림트의 풍경화들이 화면이 하나같이 정사각형 형태를 띠고 있음은 동시대 일반적인 회화적 관행과 구분되는 차이점이라고 하겠다. 그는 카드보드에 구멍을 뚫어 만든 정사각형 모양의 일명 ‚클림트 뷰파인더’를 즐겨 썼던 것으로 알려진다. 클림트 뷰화인더를 통해 경치를 감상하면서 맘에 드는 풍경의 일부를 선택해 정사각형 모양의 캔버스에 그대로 옮기는 방식을 사용했다.

인상주의 회화에서 처음 과감히 적용되기 시작한 파격적인 구도법은 클림트의 풍경화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수경이 포함된 호수 주변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 예컨대 『아터제 호수가에 있는 슐로스 캄머, 제 1번 (Schloß Kammer am Attersee I)』(1908년 작)이나 『쇤브룬 공원(Schönbrunner Park)』(1916년 작)은 정사각형 캔버스의 하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대담한 수면 묘사를 통해서 가히 명상적인 감흥까지 자아낸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2차원적 평평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망원경과 오페라 관람용 확대경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망원 렌즈를 통해서 먼거리에 있는 이미지를 들여다보면 3차원적 입체성이 사라지고 평평해 보이는 효과를 도입할 것인데 그 좋은 예는 『아터제 호수가 운터라흐에 있는 집들(Häuser in Unterach am Attersee)』(1916년경 작)에서 특히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한 여름철 기분전환 여행 (Sommerfrische)이 아니었더라면 클림트는 과연 클림트는 빈 미술계에서 시달려야 했던 정치적 사회적 낙망과 일상적 압력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었을까? 이 여름철 기분전환 여행을 통해 풍경화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에로스와 갈등으로 꿈틀대는 사교계 여성초상화들은 또 과연 그려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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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브룬 공원』1916년. 개인 소장.

흔히 클림트의 여성초상화들이 정교한 장식성과 거리감느껴지는 몽환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묘사된 인물의 진정한 성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사점과는 대조적으로, 풍경화는 훨씬 사적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화가의 진정한 내면과 더 일치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풍경화가 종종 여성초상화의 그늘에 가려서 대중에게 덜 알려져 있는 것같다“라고 이 전시의 기획을 맡은 슈테판 코야 큐레이터는 설명한다.

클림트의 여성초상이 프로이트 성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시점에서 즐겨 해석되어 온 반면, 풍경화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미학으로 언급되곤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미술은 인간의 지각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는 그같은 미술에 대한 신념은 ‚모든 고통은 아름다움을 통해 말소시킬 수 있다’는 클림트의 믿음과도 통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클림트로부터 결정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한 에곤 쉴레, 전쟁의 광기와 파란만장한 예술 생애를 살고 간 오스카 코코슈카, 그리고 무명화가로 고전하다가 단명한 리햐르트 게르스틀 등 빈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들이 내면세계에 대한 갈등과 모색을 자화상으로 승화시켰던 사실을 상기해 볼 때, 클림트의 미술 창작 동기와 미의식은 동시대 화가들과 사뭇 달랐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왜 자화상을 그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미술작품의 주제’로서 나 자신을 고려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다른 사람들, 특히 여인들 그중에서도 그네들의 외모에 더 관심이 많다. …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다면 내 그림을 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클림트의 풍경화를 바라보는 관객이라면 그가 진정 원한 것은 ‚빛 발하는 색채와 풍부한 감미로움으로 재창조된 아름다운 자연’이었음을 곧 알아차릴 것이다. ■

전시 제목 : 구스타브 클림트의 풍경화 展 | 전시 장소 : 오스트리아 빈 갤러리 벨베데레 | 전시 기간 : 2002년 10월 23일 – 2003년 2월 23일까지

* 이 글은 본래 월간 『문화공간』세종문화회관 회원지 2002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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