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클림트의 영원한 에로스

Klimt and Women

클림트와 연인들 전 | 2000년 9월20일-2001년 1월7일 |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클림트와 여인들 전〉은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언젠부턴가 클림트는 모네, 반 고호, 피카소 등과 함께 미술상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작가의 대열에 서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에 대해 잘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Gustav Klimt Judith I, 1901 Öl auf Leinwand 84 x 42 cm
구스타브 클림트 <유디트 I (Judith I)> 1901년 작, 캔버스에 유채, 84 cm × 42 cm Courtesy of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Wien.

196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첫 구스타브 클림트 회고전에 이어, 1986년 뉴욕 모마(MoMA)에서 비엔나 모더니즘 미술을 총정리한 〈비엔나 1900전〉을 계기로 19-20세기 전환기 비엔나 모더니즘 운동은 다시금 미술사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그에 힘입어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는 금빛찬연한 장식성과 관능성 짙은 회화작품으로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을 맞아 갤러리 벨베데레는 근대 비엔나의 간판적인 화가이자 세기전환기 빈 분리파 (Wiener Sezession) 운동의 선두지휘자 클림트의 작품들을 한데 모은 〈클림트와 여인들 전〉(2000.9.20∼2001.1.7)을 기획했다. 클림트 미술의 평생 핵심주제는 여성이었다. 콧대높은 상류계급 귀부인에서 청순한 시골 소녀에 이르기까지 클림트 미술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들은 금색찬연한 장식과 화사한 색채를 한 몸에 받으며 캔버스 위에 재현되곤 했다.

방년 14세되던 해인 1876년, 비엔나 미술공예학교 (Kunstgewerbeschule, 현재의 빈 응용미술대학 (Universität Angewandte Kunst Wien)의 전신)에 입학할 만큼 일찌기 특출난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특이하게도 작가 자신이나 작품에 관한 문서상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았다. 문자언어에 대한 병적 거부감을 지녔던 구스타브 클림트의 미술인생은 그래서 오늘날까지 상당부분 규명되지 못한채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체코계 중하급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모친과 친여동생들의 집에서 동거했다고 알려진다. 또 평생 미혼이었으면서도 14명이 넘는 사생아를 낳은 아버지였다는 사실에서 그가 여성을 향한 오묘한 애증과 긴장으로 갈등했던 인물이었을 것임도 짐작케 해 준다.

동시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분석학을 빌어 클림트의 창조적 성과는 개인사적 배경과 성(性)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예술적 통로로 대리 충족되어 발현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클림트가 즐겨 사용한 여성 도상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에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가부장적 부르조아 비엔나 사회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여권의식이 크게 기여했다. 자아의식이 강해지는 신여성을 바라보던 당대 남성들이 여성혐오증과 거세강박증을 토로했던 시대현상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 겸 후원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들도 여성이었다. 클림트가 <철학>(1900), <의학>(1901), <법학>(1903∼7)이란 제목으로 비엔나 대학에 제시한 천정벽화들이 선정성 시비에 휘말렸을 때 여류 언론인 베르타 추커칸들 (Berta Zuckerkandl)과 패션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 (Emilie Floege)는 클림트의 충직한 후견인 겸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전시는 1900년도 전후기 모더니즘 전개와 더불어 여성 후원자와 클림트의 관계를 고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수 없다.

1901년 비엔나 대학 천정벽화 논쟁은 여성의 누드와 도덕성이라는 이슈를 겉으로 내세워 시작된 정치적인 논쟁이었다. 클림트의 근대적 미학을 지지하는 빌헬름 폰 하르텔과 미술사학자 프란츠 비코프 대(對) 보수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요들이 불붙인 미학적 논쟁은 곧 사회주의 대 보수 및 우익주의자들 간의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다. 예술가적 자존심과 독립성에 크게 상처입은 클림트는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후퇴하여 자신의 입지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른바 클림트 미술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동안에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양식화된 장식성으로 중화된 작품이 주목할만 하다. 빈 분리파 운동과 발맞추어 공예분야에서 전개중이던 비엔나 공예운동 (Wiener Werksttaete)에 참여하면서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습득한 금속공예 기술을 환기하게 되었던 한편, 이탈리아 라벤나를 여행하면서 산 비탈레 교회당의 비잔티움 미술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유딧 II>(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178×46cm, 1909, 베네치아 근대미술 갤러리아)는 기하학적 문양의 아르데코 양식이 유난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4.1.1
구스타브 클림트의 <다나에(Danaë)> 1907년 작, 77 x 83 cm Courtesy of Galerie Würthle, Wien.

그보다 이미 8년전 완성된 <유딧 I (유딧와 홀로페르네스)>(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84×42cm, 1901년 경.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뼈가 앙상한 얼굴과 올가쥔 손아귀를 한 살로메는 쾌락을 선사한 댓가로 파멸과 죽음을 몰고오는 공포의 에로스로 정교하게 묘사된 한편, 인물 주변에 양식화되어 나타난 기하학적 장식은 금속공예와 비잔틴 양식의 산물이다.

한편 <다나에>(1907)의 여성상에는 복수심과 남성혐오적 이미지는 오간데없이 사라진 대신 사랑과 온기에 목말라하는 감미로운 젊은 여성으로 형상화됐다. 클림트가 드디어 여성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칼 E. 쇼스케는 해석한다. 이를 더 뒷바침이라도 하듯, 클림트의 말년작인 <아담과 이브>(캠버스에 유채, 1917-1918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는 에로스, 고통, 죽음을 향한 화가의 공포가 일시에 해소된 듯 평온하고 아늑한 분위기만을 풍기며 2차원적으로 처리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의 1890년대 고전적 도상과 포즈로 그려진 여성 초상 작품과 동시대 마네, 마카르트, 쉴레, 호들러, 뭉크, 코코시카의 대표적 여인 초상을 나란히 한자리에 전시하는 이번 전시는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 의의를 내걸고 있다. 인기 화가의 미술전시회를 찾는 일반 대중 관객들 못지않게 모더니즘 시대의 여성 예술후원인과 예술인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미술사학도들에게도 영감을 제공할 만하다.  박진아 | 미술사 2001.1.

* 이 글은 본래 《월간미술》 2001년 1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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