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라봐!

LOOK A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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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에서 활동하던 초상화가 프란츠 호바니에츠 (Franz Howanietz)가 그린 에리히 훌라 (Erich Hula)의 초상. 훌라는 20세기 초엽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정치학자로 1930년대에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간 후 큰 명성을 누렸다. 1928년 작. Copyright: Wien Museum.

날 보러 와요!  – 초상화 속에 숨겨진 내면 세계의 포착
“모름지기 유능한 화가란 초상화를 그릴적에 두 가지를 그릴 줄 알아야 한다. 인물의 외모와 내면적 상태가 그것인데, 첫 번째의 것 – 인물의 외모- 은 달성하기 쉽지만 두번째 – 내면적 상태 – 는 어렵다 …”고 이탈리아 르네상의 거장 미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말한 적이 있다.

아일랜드의 대문호 겸 시인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 – 은 문학적 재능을 연마하며 자기의식적이고 성숙된 문학가로 성장하는 한 젊은 문학인의 내면적 성장 과정을 묘사한 자서전적인 문학작품이다.

이처럼 한 인물의 내면 세계와 일생 과정을 은유적으로 “초상 (portrait)”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이는 초상이라는 어휘가 인물의 외모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시각적인 재현 (representation)을 뜻하는 것 못지 않게 그의 내면 세계와 업적에 대한 언어적인 기술 (description in words)까지도 담고 있는 때문이다.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 –  죽음에 대한 저항
한 도시의 역사는 그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설명해 준다는 말이 있다. 한 편의 초상화를 통해서 관객은 한 사회의 변천 발달해 온 흔적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 국립 초상화 미술관을 별도로 운영하는 영미권 국가들과 달리 대륙권 유럽 국가에서는 국시립 미술관이나 역사 박물관들이 초상화 소장 관리 기능을 대신해 왔다. 초상화 미술관의 견해에서 볼 때,  초상화는 미술품의 높은 예술성 보다는 그 나라가 배출한 초상화 속 주인공의 역사적 중요성에 따라서 미술관 소장 가치 여부가 결정된다.

예컨대 현재 빈 시립 미술관에는 역사적 인물 및 유명 인사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 평범한 과거 인물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고 있는 초상화들이 10만 점이 넘게 소장되어 있다. 빈 박물관 부설 헤르메스빌라 (Wien Museum Hermesvilla)에서는 올 4월부터 『나를 바라봐! (Schau mich an – Wiener Porträts)』(2006년 4월6일-2007년 1월7일)라는 제목으로 과거 빈에서 살았던 역사적 인물들에게 바치는 흥미로운 초상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서 빈 시립 박물관은 과거 400여년에 걸쳐 빈에서 살았던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담긴 초상화 300여 점을 선별하여 관객들에게 선보인다.

“감성이 담긴 모든 초상화는 결국 모델의 초상화가 아니라 화가의 초상화이다”라고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라고 한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 전시를 찾는 관객들은 전시장에서 들어서면 우선 에서 활동했던 과거 유명 화가들의 모습이 담긴 화가의 초상화를 보러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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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가 모리츠 미하일 다핑거 (Moritz Michael Daffinger)가 그린 마리에 폰 슈몰레니츠 (Marie von Smolenitz)의 초상. 1827년 제작된 이 초상화는 19세기 메테르니히 재상 통치시대에 한창 유행하던 비더마이어풍 여성상과 패션을 잘 보여주는 작품. Copyright: Wien Museum.

19세기 오스트리아 빈의 아카데미풍 고전화가로 유명했던 한스 마카르트 (Hans Makart, 1840-1884)와 페르디난트 게오르크 발트뮐러 (Ferdinand Georg Waldmüller, 1793-1865), 과거 치체 높은 귀족이나 부유한 중산층들의 초상을 그렸던 비더마이어풍 화가 프리드리히 폰 아메를링 (Friedrich von Amerling, 1861-1945)은 고전미에 준한 전통적 초상화을 그렸다.

체코 아방가르드의 동인이자 이후 에곤 실레 (Egon Schiele)와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같은 20세기초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줬던 막스 오펜하이머 (Max Oppenheimer), 20세기 초엽 근대적 긴장과 정신적 강박증을 자화상으로 구현한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 여성 초상과 누드를 즐겨 촬영한 20세기 여류 사진가 트루데 플라이쉬만 (Trude Fleischmann)의 초상화는 초상화 예술의 대가들의 초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하일라이트라 할 만하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가족 초상화와 前 빈 시장의 초상에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부모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지위고하와 빈부를 초월하여 수많은 과거인들은 초상화를 그려 그들의 모습을 남겼다. 초상화란 조상에 대한 후손들의 “망각에 대한 저항을 위한 그림”이며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영원히 포착해 두고 싶어 하는 “허영의 기록물”이기도 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작품 제작 당시의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사회적 통념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문화의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정치가 메테르니히 (Metternich), 라데츠키 (Radetsky) 장군, 극작가 그릴파르쳐 (Grillparzer), 빈 대중교통망 설계자 게가 (Ghega), 월츠의 왕 요한 스트라우스 2세 (Johann Strauss Sohn), 국립 극장의 전설적인 스타 여배우 샬로테 볼터 (Schalotte Wolter) 등과 같은 19세기 빈의 사회상류층 및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를 바라 보고 있자면 흡사 오늘날 서점과 거리 가판대에 즐비한 연예 화보 잡지를 뒤적이는 것과 유사한 감흥까지 불러일으킨다.

엘리트층의 명망을 향한 경쟁
팝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 (Andy Warhol)은 이미 1960년대부터 줄곧 생전 정치인에서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유명인사들 (celebrities)과 그들을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부(副)와 명성(名聲)과 호화로운 삶(glamour)에 깊은 매료를 느꼈고, 그 결과 당대 유명인들의 얼굴을 실크스크린과 스텐실로 대량 제작 묘사한 초상화 시리즈들을 남겼다.

흔히 초상화란 불멸의 욕망을 지닌 인간이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기 위하여 사용하는 미적 수단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초상화 속의 주인공들은 흔히 그들이 비춰지기 원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모습과 분위기를 연출한다. 정치가나 군인들은 범할 수 없는 위세와 권력, 여성은 이상화된 아름다움과 젊음, 그리고 종교인이나 지성인은 고매한 도덕성이나 드높은 학식이 우러나는 포즈와 표정으로 초상화 속에 묘사되는 것은 그 때문일 테다.

예나 지금이나 초상은 역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들의 얼굴 생김새를 기록하는 미술 쟝르로 여겨지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초상화의 예는 고대 이집트 시대의 파라오와 여왕의 모습을 그린 매장용 초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정치 우두머리나 웅변가들의 흉상이나 전신상을 본모습 그대로 조각으로 표현한 사실주의적인 초상 조각이 공공 장소에서 널리 발견되었고 귀족들 사이에서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집집마다 가족 사진을 진열해 놓듯이 가족들의 초상을 실내 장식용 프레스코화로 그려 넣는 것이 성행하였다.

기독교 교권이 정치와 문화를 장악했던 중세 시대의 미술은 온통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화(理想化)된 신성성을 표현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중세 시대로부터 전해 오는 초상화만으로는 실제의 역사적인 인물의 외모를 어떠했는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서양미술사에서 초상화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게 된 때는 르네상스 시대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를 계기로 해서 서양의 초상화는 비로소 죽은자나 신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문주의 (humanism)와 자연 세계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자 르네상스인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유행했던 갖가지 초상화 형식 및 매체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흉상 초상 조각이라든가 고대 원형 메달이나 카메오에 인물의 두상을 조각해 넣는 초상화 공예품이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았다.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티치아노 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익명의 모델의 실제 모습으로부터 도출한 매우 자연스럽고 현실적이면서도 우아한 초상화 기법을 발휘했다. 비슷한 시기 북유럽의 알브레히트 뒤러, 얀 반 아이크 등과 같은 르네상스 화가들은 이후 앤소니 반 다이크, 폴 루벤스, 렘브란트로 이어지는 거장 바로크 초상화가들이 탄생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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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출신의 고전주의 화가인 한스 마카르트 (Hans Makart)가 빈 국립 극장의 디바 여배우 샤를로테 볼터 (Charlotte Wolter)를 극적 여주인공 “메살리나 (Messalina)”로 분한 모습을 초상화로 그린 작품. 1875년. Copyright: Wien Museum.

절대주의 정치와 카톨릭 교권이 지배하던 유럽 바로크 시대에는 귀족과 종교인들의 진지하고 내면탐색적인 면을 부각시킨 근엄장대한 풍의 초상화들이 주로 그려졌다.

역사화를 가장 높은 회화 쟝르로 평가했던 서양 고전 화단 속에서 초상화가들은 일편 자신들의 작품을 자화자찬하고 또 한편 초상화를 주문자들에게 아부하기 위한 수단으로 역사화에 흔히 사용되는 알레고리 기법과 복잡한 상징을 초상화에 구성해 넣곤 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로코코 시대에 오면 귀족들의 향락적이고 희희낙락적인 유희 광경이나 사교계의 아름다운 남녀들의 모습이 담긴 감각주의적인 개인 초상화들이 널리 유행했다. 19세기 중엽 프랑스를 중심으로 과거의 귀족 절대주의가 무너지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신이 널리 번지기 시작하자 이제 초상화는 고관대작과 귀족 뿐만 아니라 평민들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신문과 잡지 같은 대중매체에는 커리커쳐 (caricature)라는 풍자만화가 값비싸고 제작하기에 번잡한 유화나 드로잉을 대신하게 되었고, 인상주의 화가들에 따라서는 중산층 남녀, 농군, 심지어 무희나 거리의 여인네들에 이르기까지 대상의 빈천에 상관하지 않고 미술의 주제로 삼아 그렸다. 동북 유럽권에서는 특히 빈을 중심으로 격렬한 필치와 도발적인 태도로 진동하는 표현주의 초상화와 자화상이 “인간 내면의 진실”을 표출하는 예술적 분출구 역할을 했다.

초상화를 그려 남기는 것이 엘리트층의 명성의 전당 (Hall of Fame)에 등록되는 것과 같았던 과거를 뒤로 한 오늘, 현대인들은 굳이 유명한 화가가 그려낸 초상화가 아니더라도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사이트와 디지털 사진술을 이용한 대중적 현대적 기술의 이기만 활용하면 앤디 워홀이 예견했던 이른바 “15분의 명성 (15 minutes of fame)”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과거 역사 속 인사들의 초상화를 다시금 감상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갈구했던 불멸의 욕망이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보편적인 인간적 욕구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All images courtesy: Wien Museum Hermesvilla.

* 이 글은 본래 『HAUTE』 2006년 6월호 Art News 연재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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