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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on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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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예술가들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나요? 한낱 직업일 뿐인데요.” – 앤디 워홀

“Why do people think artists are special? It’s just another job.” -Andy Warhol

 

현대 미술 왜 다시 1980년대를 되돌아 보는가?

앤디 워홀과 키스 헤링

개와 네 발로 기는 아기는 키스 헤링의 낙서그림에 즐겨 나타나는 트레이드마크 <무제> 1980년 © Keith Haring Foundation.

미술 – 비즈니스와 대중주의 사이에서 오늘날 일반 대중들도 웬만한 유명 연예인 이름만큼 유명해진 현대 미술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년 생-1987년 사망). 그래서인지 앤디 워홀은 유명한 미술가라기 보다는 미술을 한 유명인(celebrity) 같다.

“앤디 워홀에 대하여 알고 싶은가? 그러면 내 그림, 영화, 내 모습 겉표면만 보라. 그 이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워홀은 길거리와 대중매체 속의 상품 광고, 텔레비젼이나 영화 속의 연예인과 유명인사, 저급 신문지나 잡지에서 오려낸 선정적 사진을 배껴 유화로 그리거나 실크스크린 판화로 찍어내고 사진으로 찍어 만든 자신의 작품들을 가리켜서 1960년대 미국의 대중 문화 미학을 반영한 팝 아트(Pop Art)라고 불렀다.

최근 패션계에서 다시 불고 있는 1980년대 거리 스타일 유행 때문이기도 하지만,  2008년 헤링의 탄생 50년을 기념하여 키스 헤링 재단(Keith Haring Foundation)이 전세계로 순회전을 부치고 있기 때문이다. 낙서화(Graffiti Art)로 불리는 그의 미술은 본래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중심으로 펼져진 언더그라운드 미술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어릴적부터 텔레비젼 만화 보기와 그림 그리기를 하며 컷던 헤링은 자서전에서도 자기의 영감 3대 요소를 월트 디즈니 만화, 앤디 워홀, 매스미디어라고 밝혔었다. 미술평론가 칼로스 맥코믹이 정의했듯이 그의 미술은 1960년대가 낳은 대중소비문화, 대중매체 키치, 저급한 이미지가 고급 아방가르드 미술 정신이 결합된 절충의 산물이다. 그래서 헤링의 미술은 단순하고 친근하며 대중적인 어필이 특징이다.

1980년대 뉴욕 화랑계 속의 워홀과 헤링

전후 뉴욕의 화랑계는 어퍼 맨해튼 구역 57번가와 소호 구역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화랑들로 이우어져 있었다. 이 시대 화랑 주인들은 베티 파슨즈(Betty Parsons) 나 시드니 재니스(Sidney Janis) 처럼 부잣집에서 자라서 유럽에서 교육받고 돌아온 상류층 미국파와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나 앙드레 에메리히André Emmerich) 같이 2차 대전을 피해 이민온 유럽파가 주를 이루었다. 또 일리아나 소나벤트(Illeana Sonnabend)는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한 뉴욕 최신 미술을 유럽으로 알리고 역드로 전쟁중에 살아남은 20세기 유럽 모더니즘 미술품들은 미국으로 속속 들여와 미국 컬렉터들에게 판 대표적인 딜러였다.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서 뉴욕으로의 미술계 중력 대이동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난 후 미국에서는 1950년대 이후부터 이른바 대중소비문화로 경제부흥을 이끌었다. 공장들은 제품을 대량으로 쏟아내고, 일자리가 흔해진 호경기 속 소비자들은 쉽게 대출을 받아 내 집 마련과 갖고 싶은 물건을 뭐든 사 가질 수 있었다. 이른바 물질 풍요와 편의의 문화가 도처에 넘치던 이 낙관적 분위기 속에서 어느덧 1940-50년대 뉴욕에서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이 주도한 추상표현주의 미술은 지나치게 진지하고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위기는 미술인들 사이에서도 불거졌다. 50년대까지 최신 미국 미술의 바로미터임을 자처하던 뉴욕 남부의 텐스 스트리트(10th Street) 미술인 공동체는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 미술 공동체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몰려든 자격미달급 예술인들이 속속 이주해 오면서부터 이 일대 부동산 가격은 치솟았고 전반적인 미술 수준은 급격히 떨어졌던 것이 이유였다. 급기야 1962년에 텐스 스트리트 미술가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미술가들은 미술을 고귀와 심오의 고층탑 속에 간직하고 싶었던 것일까? 진지한 미술을 추구하던 일부 토종 텐스 스트리트 미술인들은 1960년대는 팝 아트와 멀리 거리를 두고 전위적이고 예술적인 미술을 추구한다는 기치 아래 회화 쟝르를 창 밖으로 내버리고 그대신 퍼포먼스, 신체 미술, 설치, 대지 미술, 프로세스 미술 같은 개념주의(Conceptualism)로 흘렀다. 미술이 일반 대중이 언접하기 어렵게 난해해 지기 시작한 때도 바로 1960년대다.

앤디 워홀 <포장 라벨이 찟긴 캠벨 수프 캔(야채 소고기 수프)> 1962년작 Photo courtesy: Kunsthaus Zürich.

바로 이때 난데없이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주인공이 바로 앤디 워홀이었다. 고향 피츠버그에서 상업 미술과 디자인을 전공한 후 본래 구두 광고와 비닐 레코드판 표지 일을 하던 상업 디자이너이던 그는 어느날 순수 미술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1962년 뉴욕으로 오자마자 스테이블 갤러리(Stable Gallery)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서 마릴린, 캠벨 수프 캔, 100달러 지폐 실크스크린 작품을 통해 이제 미국의 대중 소비문화는 고급 순수 미술의 일부라고 선언했다.

워홀의 등단은 언론의 화재거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단 성공이었다. 그러나 의미탐색적인 심각한 미술에 익숙해 있던 기성 뉴욕 미술계와 비평가들은 워홀의 팝 아트를 미술로 인정하길 거부했고, 언론은 이를 한껏 부풀려 스캔들화 시켰다.

말솜씨가 어눌한데다가 자기 작품을 논리정연히 설명할줄 몰랐던 워홀은 인터뷰 질문을 받으면 “음… 암…”하며 말을 머뭇거려서 언론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되곤 했는데, 그래서 그후론 아예 자기 작품에 대해서 거의 설명하지 않거나 침묵으로 일관하게 되었고, 그의 태연작약한 태도를 신비롭다며 언론과 대중은 오히려 더 열광하기 시작했다. 대중매체의 위력을 한껏 활용할 줄 알았던 워홀은 미술이 대중 문화의 일부가 되었음을 입증한 것이었다.

워홀이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미드타운 맨해튼의 동쪽 47번가 자리 한 건물 5층에 얻은 작업실은 팩토리(Factory)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일 년에 100달러도 안되는 아주 싼 임대료로 이 작업실을 유지하면서 낮에는 동료들을 불러 함께 미술작품을 만들고 밤이면 밤마다 멋지고 전위적인 파티를 열었다. 그가 연 팩토리 저녁 파티에는 뉴욕과 미국 전역에서 몰려든 보헤미언, 사교계  명사, 여장남자, 예술가 지망생들로 항상 북적거렸다. 이 이후로 미술계에서 성공하고 싶은 미술가는 파티에서 능숙하게 사교해야 한다는 미술계내 암묵적인 법칙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해서 유명한 미술가가 되려면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참석하는 파티에 가서 함께 어울려야 한다 했다. 허나 실제로 워홀의 팩토리오 파티를 거쳐간 야망차고 젊은 예술가 지망생들 대다수는 부와 명성을 거머쥐기 보다는 언더그라운드계 무명 예술가로 머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 팩토리에서 맴돌며 사교녀이자 여배우였던 이디 세지윅(Edie Sedgwick)의 불꽃같은 일생을 그린 2006년 영화 『팩토리 걸(Factory Girl)』은  일약 미술 스타가 되길 꿈꾸며 모든 것을 불사른 예술가 지망생들의 뒷이야기를 잘 보여준다. 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품들은 팩토리에서 ‘아티스트 일꾼(art worker)’으로 불리는 조수들의 손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그러던중 1980년대의 뉴욕 미술계에서는 뉴욕 남동쪽에 자리한 이스트 빌리지 (East Village)를 중심으로 새로운 창조적 분출이 한창이었다. 때는 대서양 건너편 독일의 신표현주의, 이탈리아의 트랜스아방가르드라는 신 회화 운동이 주목을 받던 순간이었다. 뉴욕의 젊은 예술인들은 이스트 빌리지의 싼 임대료를 틈 타 이곳으로 속속 몰려들어 작업실을 차리고 대안공간을 직접 운영하며 숨가쁘게 돌아가는 최신 미술을 발표에 한창이었다.

워홀과 바스키아의 합작 회화 , 1984-85년경 작.

워홀의 유명세는 1970-80년대를 거치며 굳건히 자리를 잡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사실상 1960년대 이후 별다른 혁신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평가된다. 워홀은 미국 사회 속의 유명인으로써 확고한 자리를 잡았으나 그의 미술은 여전히 피상적이고 상업 위주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대중적 상업 이미지와 유명인 초상화나 그린 가벼운 팝 아티스트로 저물어가기 전, 말년의 워홀은 세계 미술사에 길이 남기 위해선 뭔가 새로운 창조적 영감과 에너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워홀은 독일의 거물급 화랑업자 브루노 비쇼프베르거와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하다가 직접 그린 엽서를 팔러 들어온 무명의 거리 낙서화가 쟝-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를 계기로 지치고 노후해진 워홀의 미술 세계는 잠시나마 바스키아와의 공동 작업을 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 둘의 만남의 결과, 무엇보다도 무명의 젊은 바스키아는 일약 미술계 스타덤으로 도약하여 그의 혁신적인 천재성을 더 부각시킬 수 있었다.

워홀과 헤링의 만남

워홀의 레이더에 잡힌 또다른 이스트 빌리지 미술계의 유망주 낙서화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키스 헤링(Keith Haring, 1958 생-1990 사망)이다. 워홀은 헤링보다 30년이나 선배뻘이었느나 둘은 1980년대를 공유한 동시대 작가들이며, 두 사람이 처음 만난 1983년 이후 곧바로 매 주 한 번씩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워홀은 지명도와 미술계 인맥으로 헤링이 미술계 스타덤에 빨리 뛰어오르게 도와줬고, 특히 말년기 워홀은 헤링을 통해서 아방가르드 청년 문화와 활기를 빨아들일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헤링은 화랑 딜러 토니 샤프라지(Tony Shafrazi)의 눈에 띄어 전속 작가로 재빨리 영입되었고 이어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 작가가 될 정도로 큰 도약을 맞았다.

키스 헤링의 <앤디 마우스>는 화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앤디 워홀과 미키 마우스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다.

헤링은 1980년대 뉴욕에서 벌어지던 언더그라운드 사교계의 바지런한 꿀벌이자 워커홀릭 미술가였다. 옛말로 하자면 주경야독을 했다고나 할까. 그는 밤이면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서 열리는 온갖 예술 발표회와 파티에서 사교활동을 하고 그외 모든 시간은 그림 그리는데 전력했다.

당시 뉴욕의 아방가르드 예술은 다문화주의, 힙합 댄스, 뉴 웨이브 음악이 주도한 이스트 빌리지의 나이트 클럽에서 이루어졌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수많은 고급  및 대중 예술도 여기서 영감 받아 비롯되었다. 미국의 여가수 마돈나, 보이 조지, 동료 낙서화가 바스키아도 이 때 클럽을 오가다 사귄 친구들이었으며, 전설적 사진가 헬뭇 뉴튼(Helmut Newton)도 『배니티 페어(Vanity Fair)』 지에 실릴 사진으로 황금색 넥타이를 맨 이 시절의 헤링을 촬영해 갔다.

과거 1980년대에 미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의 보수적인 정권 하에서 동성 연애자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것은 사회적 타부였다. 워홀과 헤링은 둘 다 동성애자였으나 워홀은 사생활을 비밀스럽게 관리했던 반면 헤링은 공공연한 동성연애자였다. 뉴욕 미술계 또한 언제나 성(sex)에 관해서는 보수적이던 터에 실제로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팝 아트 사이의 교량 역할을 했던 로버트 라우셴버그와 재스퍼 존스 조차 동성 연인 관계였지만 미술계 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로 쉬쉬되었지 않은가. 이후 워홀도 한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동성애자라고 밝혔지만 대중 언론은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길 기피했다. 게다가 이 때는 갑자기 번진 에이즈(AIDS)로 인해서 뉴욕 예술계는 수많은 예술인들를 잃기도 했다.

미술 창작 동기에 과한 워홀과 헤링의 태도

그럼에도 뉴욕의 동성애자 클럽과 언더그라운드 파티의 왕성한 감초이자 예술 퍼포먼스 기획자였던 헤링은 특히 작품을 통해서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다. 매직펜을 연상시키는 굵직한 선, 네온광처럼 강렬한 색채, 만화같은 단순한 스타일, 그리고 때때로 등장하는 노골적인 성 묘사(어린이들 관람전 부모의 주의가 필요하다)는 겉잡을 수 없이 분출한 화가의 생명력과 에너지의 표현이었을 뿐이다.

반면, 워홀은 “비즈니스를 잘 하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라고 했다. 하지만 헤링에게 미술이란 대중과 소통을 뜻했다. 무명 시절 경찰을 단속을 피해 도망다니며 거리와 지하철역에서 몰래 낙서를 하고 경찰에 체포돼 구치소 신세를 져가면서도 퍼포먼스를 계속했던 이유도 바로 지나가던 행인들의 반응과 사소하나마 미술이 익명의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에서 감명받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헤링은 자기의 이름이 유명해지자마다 낙서 그림들이 거리 공공시설물로부터 뜯겨나가 미술시장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것을 목격하고 거리 낙서 퍼포먼스를 그만뒀다. 자기의 미술이 화랑과 미술시장 같은 닫힌 제도권으로 유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헤링은 초기 무명 시절 뉴욕 맨해튼 지하철역 빈 광고판에 낙서 퍼포먼스로 미술활동을 시작했다. Photo: Tseng Kwong Chi © The Keith Haring Foundation.

1986년에 맨해튼 소호에서 개점한 팝 샵(Pop Shop)은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진품 미술을 파는 곳이자 미술의 대중화라는 사명을 내 건 실험소였다. 그러나 역시 미술의 가치는 희소성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결국 팝 샵 소매점은 경영난으로 2005년 문을 닫았고, 현재 키스 헤링 재단은 자금 조성을 위해  전세계 순회전시로 부쳐오고 있다. 예컨대 작년 9월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는 옛 팝 샵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여 그의 작품과 머천다이즈를 전시해 화재를 모으기도 했다.

워홀은 최후까지 팝 아티스트였고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를 호가하고 있다. 반면, “대중은 미술에 대한 권리가 있다. 미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듯 헤링은 최후까지 공공미술가였다. 1990년에 서른한 살 때이른 나이에 에이즈로 요절할 때까지 헤링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공공 장소와 행사에 사회참여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형 그림 프로젝트 그림을 그렸다. 그를 사회운동가로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거리 낙서 퍼포먼스로 시작한 그의 미술가 기질은 흰 벽으로 둘러싸인 화랑과 미술관에서 잠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살아생전 헤링은 제도권 미술계의 인정을 받는데 고전했지만 오늘날  그의 미술은 1980년대의 대표적인 미술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만일 그가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는 자기의 그림들이 고귀한 미술관 보다는 모든 사람이 지나치다 볼 수 거리와 공공 공간에 걸려 있기를 더 바랬을 것이다. 가장 최근 헤링의 전시는 오스트리아 빈의 쿤스트할레에서 [2008년] 9월19일까지 계속된다.

* 이 글은 본래 『오뜨』2010년 9월호 아트뉴스 섹션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