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Vienna

고로파 화랑과 신세대 화랑이 공존하는 현대미술 그린하우스

월간미술201501표지WOLGAN MISOOL Monthly Art Magazine, January Special Issue 월간미술 2015년 1월호 특집 “세계 미술현장의 새 지형도 빈 편” 기사 읽기는 여기를 클릭. 오스트리아 현대미술 화랑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박진아의 리포트와 오스트리아 현대미술계 기획자 겸 문필가 마르틴 프리츠(Martin Fritz)와의 인터뷰.

클림트 풍경화가로 다시보기

GUSTAV KLIMT’S LANDSCAPES

올해[2002년]로부터 약 2년전인 2000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에 자리한 갤러리 벨베데레에서는 《구스타브 클림트와 여인들》展이 열려 이곳 국내외 미술애호가들의 큰 관심을 끌었던 바 있다. 벨베데레 갤러리가 있는 벨베데레  궁은 오스트로-헝거리 제국 시절 1714-22년 무려 8년에 걸쳐서 사보이의 오이겐 왕자가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바로크 양식 궁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립 미술관으로 지정되었는데, 클림트를 비롯해서 에곤 쉴레, 리햐르트 게르스틀, 오스카 코코슈카 등 19-20세기 전환기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Continue reading

비엔나 고전음악 여행 가이드

“비엔나 – 세계 고전 음악의 수도” 

VIENNA – THE CITY OF MUSIC

18세기 바로크 시대 빈 거리에서 음악을 켜는 사람들. 당시 사람들은 기타 처럼 생긴 류트를 즐겨 다뤘다. 자료 사진.

18세기 바로크 시대 빈 거리에서 음악을 켜는 사람들. 당시 사람들은 기타 처럼 생긴 류트를 즐겨 다뤘다. 자료 사진.

…가난한 고학생들이 밤늦게 술에 취해 삼삼오오 모여 가곡을 합창하고 … 교회당을 지나치면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미사 오르간 소리가 흘러나오고 … 매주 일요일 호프부르크카펠레 예배당에서 비엔나 소년합창단의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고 … 골목에서 이름모를 거리의 악사들이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으로 흥겹게 자아내는 거친 헝거리 민속음악도 언제든지 들은 수 있는 도시 비엔나. 이 곳은 부유한 자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자나 상관없이 누구든 음악을 켜고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의 도시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거리 곳곳, 음악이 숨쉬는 대기 속에는 어딜가나 음악으로 흥건하게 젖어있다. 월츠와 오페레타는 비엔나에서 처음 탄생했고, 세계의 그 어느 나라와 도시를 합쳐서 비엔나 만큼 다수의 기라성급 음악가들을 배출한 곳은 없다. 고전 음악 뿐만 아니라 재즈, 팝, 록 음악은 물론이고 현대판 오페레타라고 불리는 뮤지컬 공연과 페스티벌도 일년 내내 열려서 국내와 해외 음악 청중들을 맞이한다. 비엔나에서는 일년 365일중 300일 동안 공연이 벌어지는데 대형 오페라 50편과 발레 공연 20편을 포함한 각종 규모와 쟝르가 망라된 음악 콘서트 행사는 무려 1만5천여 편에 이른다고 한다.

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Las Meninas, or The Family of Felipe IV, Ca. 1656, Oil on Canvas, 318 cm x 276 cm. © Museo Nacional del Prado.

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Las Meninas, or The Family of Felipe IV, Ca. 1656, Oil on Canvas, 318 cm x 276 cm. © Museo Nacional del Prado.

비엔나는 어떻게 세계 음악의 수도가 되었을까? 그 근원은 지금부터 약 3백여년 전 동유럽의 바로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문화사가들은 비엔나를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 끌어올린 장본인으로서 황제 레오폴트 1세를 꼽는다.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즈의 걸작 회화 『시녀들(Las Meniñas)』 속에 등장한 금발의 5살 박이 공주는 바로 레오폴트의 첫 아내이자 영원한 사랑이었던 마가리타 테레사(스페인 필립 4세왕의 딸)였다.

레오폴트 1세는 본래 예수회 교단 성직자가 될 계획으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황위후계자던 형 페르디난트 4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8살의 나이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됐다. 오토만 제국과의 대 터어키 전쟁, 헝거리 내전, 프랑스의 루이 14세와의 9년 전쟁 등 끊임없는 정치적 권모술수와 전쟁지휘에 바빴던 레오폴트 1세였지만 실은 부친 페르디난트 3세를 닮아서 사생활 면에서는 열렬한 문화애호가이자 아마츄어 작곡가였으며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작곡가들을 데려와 직접 후원하기도 했다.

18세기 전반기 정치경제적 번영을 거듭한 바로크 시대에 뒤이어서, 18세기 후반기 로코코 시대가 되자 요제프 2세 황제 치하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점차 계몽사상에서 영향받은 정치 분위기로 이행했고 문화적으로는 고전음악의 황금기로 이어졌다. 이 시기 활동한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는 빈에서 산 성인 시절 9년 동안 가장 훌륭한 명곡들을 창조해 냈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를 찾아서 독일 본에서 올라온 베에토벤은 빈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평생 활동했고, 수없이 많은 섬세한 멜로디의 낭만주의 악곡을 작곡한 가곡의 왕 슈베르트도 빈 출신이었다.

빈 중심부 슈타트파크 공원에 서 있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동상. 사진: 박진아.

빈 중심부 슈타트파크 공원(Wiener Stadtpark)에 서 있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동상. 사진: 박진아.

전형적인 19세기 낭만주의의 웅장한 교향곡의 대가 브루크너(Anton Bruckner)는 북부 오스트리아 출신이었으며, 북부 독일서 온 야심가득한 낭만파 작곡가 브람스(Johnanes Brahms)는 음악가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다지기 위해 비엔나로 건너와 활동하면서 월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와 경쟁했다. 세기전환기 대표적인 후기 낭만파이자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전설적인 지휘자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도 빈에서 세기말 근대기 ‘비엔나 악파’를 이끌었다.

오늘날도 변함없이 비엔나는 음악 감상에 조예있는 음악애호가와 미래 음악스타가 되고픈 열망 가득한 음악인이라면 꼭 방문하는 음악의 순례도시다. 특히 엘리트 음악 스타라면 꼭 한 번쯤은 서보고 싶어하고 또 거쳐간다고 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무대로라면 단연 빈 국립 오페라 극장(Staatsoper)을 꼽는다.

국립 오페라 극장이 전설적인 문화적 명소가 된 이유는 또 있다. 매년 연초 2월면 “오펀발(Opernball)” 오페라 무도회 행사를 위해 오페라 건물안 공연장 전체가 거대한 무도장으로 탈바꿈하여 사회고위인사와 유명인들이 팔꿈치를 부비는 화려한 사교장이 된다.

1778년에 일반 대중관객을 상대로 개관된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의 대본은 썼던 당대의 유명 리브레티스트 에마누엘 시카네더(Emanuel Schikaneder)가 관장을 맡았던 역사 깊은 오페라 극장이다. 이곳에서 베에토벤은 이 극장안에 있는 손님방에서 한동안 거처하면서 오페라 <피델리오(Fidelio)> 프리미어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오늘날 빈에서 가장 유서깊은 오페라 하우스로 자리잡은 이곳에서 지난 2009년에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의 서거 200주년 기념 페스티벌이 열렸다.  하이든이 남긴 가장 유명한 오페라극 <달의 세상(Il Mondo della Luna)>을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바로크 음악 전문가인 니콜라우스 하농쿠르(Nicolaus Harnoncourt)가 80회 생일을 자축하며 특별 지휘를 맡아서 큰 화재를 모은바 있기도 하다.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는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음악연주회가 열렸다. 사진: 박진아.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여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는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음악연주회가 열렸다. 사진: 박진아.

비너 무지크페라인(Wiener Musikverein)은 전세계 고전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가장 전통적인 고전 음악 콘서트 레파토리를 갖추고 세계적인 지휘자와 공연자들을 무대에 올리는 곳으로써 잘 알려져 있다. 현대적인 해석이나 혁신적인 연주 기법을 개척하기 보다는 과거 원 작곡가와 공연연주자들이 냈던 원음과 연주 테크닉을 가장 원형 가깝게 재현하는데 훌륭한 기여를 해왔다고 자부하는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Wiener Philharmoniker)가 상연하는 이 극장에서 특히 황금홀은 매년 특별 초대된 지휘자의 지휘로 연주되는 신년 연주회(Neujahrskonzert)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통 고전음악에서 다소 벗어나서 중세음악에서부터 클래식, 모던, 재즈, 해외음악 등 시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보다 폭넓은 레파토리와 연주자들을 만나보고 싶은 음악애호가들 사이에서 빈 콘체르트하우스(Wiener Konzerthaus)는 빈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국제적인 음악을 소개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13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명으로 개관되었고, 요한 슈트라우스가 이를 축하하기 위해 <프랠루디움> 행진곡을, 그리고 베에토벤은 그 유명한 심포니 제9번 ‘합창’을 작곡해 축하곡으로 선사했다. 오늘날 빈 콘체르트하우스는 빈 국립오페라하우스, 빈 무직페라인과 더불어 빈의 3대 주축을 이루는 음악 제도권이자 고급 공연문화의 미팅포인트임을 자처한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연하며 전통 고전음악을 가장 과거 원음에 충실하게 재현하는 무지크페라인. 사진: 박진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상연하며 전통 고전음악을 가장 과거 원음에 충실하게 재현하는 무지크페라인. 사진: 박진아.

음악이 곁들여진 연극, 오페라, 오퍼레타. 발레, 현대연극, 뮤지컬을 포함한 우수한 레파토리를 제공하는 그장으로 꼽은 만한 무대로는 빈 폴크스오퍼(Volksoper Wien) 극장을 놓치지 말  일이다. 조르쥬 비제(Georges Bizet)의 오페라 걸작 카르멘(Carmen)이 독일어로 일주일에 3-4회 공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 오락용 오페레타(프랑스식 휴머와 오스트리아식 위트를 혼합한 대중적 서민 오페라)의 대표적인 고전작들로 꼽히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박쥐(Die Fledermaus)>와 프란츠 레하르(Franz Lehár)의 <유쾌한 미망인(Die lustige Witwe)>도 폴크스오퍼에서 고정적으로 공연된다.

그 외에도 일반 대형 무대에서는 잘 공연되지 않는 회귀공연작들을 감상할 수 있는 소규모이나  유서깊은 공연장들도 있다. 예컨대 빈 카머오퍼(Wiener Kammeroper) 챔버 오페라단은 특히 바로크 시대와 근대기 작곡된 희귀 악곡들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여름철에는 대중 청중들을 위해 쇤브룬 궁전 극장(Schönbrunn Palace Theater)에서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유명 오페라 작품들을 야외에서 연주하는 행사도 연다.

슈타츠오퍼 국립 오페라 극장의 건물 서쪽 광경. 빈 도심에서 가장 붐비는 쇼핑거리 케른트너슈트라쎄 거리상에 위치해 있으며, 이 극장 공연을 보려는 관객들이 당일 공연 직전까지도 매표소에서 입석표를 구하는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사진: 박진아.

슈타츠오퍼(Staatsoper) 국립 오페라 극장의 건물 서쪽 광경. 빈 도심에서 가장 붐비는 쇼핑거리 케른트너슈트라쎄 거리상에 위치해 있으며, 거의 매일 저녁마다 이 극장 공연을 보려는 관객들이 당일 공연 개봉 직전까지도 매표소에서 입석표를 구하는 모습을 어렵지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사진: 박진아.

지금 비엔나의 고전음악팬들은 내년 2013년 바그너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기대로 한창 들떠있다. 바그너의 해 특별 행사에서는 글룩, 슈트라우스, 로시니, 바그너의 오페라와 심포니로 구성된 레파토리에 아나 네트렙코, 엘리나 가란챠, 요나스 카우프만,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오페라계의 수퍼스타들이 참가할 예정이다.

그렇다고해서 고전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 갑갑한 수트를 입고 경직된 자세로 극장 실내에 앉아 시간을 보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국립오페라는 음악을 사랑하고 감상하고 싶어하는 비엔나 시민과 관광객들을 위해 일 년중 날씨가 좋은 4, 5, 6, 9월이면 오페라 하우스 건물 맞은편 액 50평방 미터 면적의 헤르베르트-폰-가라얀 광장에서150편의 오페라와 발레 공연이 담긴 영상을 무료로 공연한다.

* 이 글은 본래 IBK 기업은행 사보 2012년 10월호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영원한 에로스

Klimt and Women

클림트와 연인들 전 | 2000년 9월20일-2001년 1월7일 |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클림트와 여인들 전〉은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언젠부턴가 클림트는 모네, 반 고호, 피카소 등과 함께 미술상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작가의 대열에 서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에 대해 잘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Gustav Klimt Judith I, 1901 Öl auf Leinwand 84 x 42 cm

구스타브 클림트 <유디트 I (Judith I)> 1901년 작, 캔버스에 유채, 84 cm × 42 cm Courtesy of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Wien.

196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첫 구스타브 클림트 회고전에 이어, 1986년 뉴욕 모마(MoMA)에서 비엔나 모더니즘 미술을 총정리한 〈비엔나 1900전〉을 계기로 19-20세기 전환기 비엔나 모더니즘 운동은 다시금 미술사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그에 힘입어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는 금빛찬연한 장식성과 관능성 짙은 회화작품으로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을 맞아 갤러리 벨베데레는 근대 비엔나의 간판적인 화가이자 세기전환기 빈 분리파 (Wiener Sezession) 운동의 선두지휘자 클림트의 작품들을 한데 모은 〈클림트와 여인들 전〉(2000.9.20∼2001.1.7)을 기획했다. 클림트 미술의 평생 핵심주제는 여성이었다. 콧대높은 상류계급 귀부인에서 청순한 시골 소녀에 이르기까지 클림트 미술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들은 금색찬연한 장식과 화사한 색채를 한 몸에 받으며 캔버스 위에 재현되곤 했다.

방년 14세되던 해인 1876년, 비엔나 미술공예학교 (Kunstgewerbeschule, 현재의 빈 응용미술대학 (Universität Angewandte Kunst Wien)의 전신)에 입학할 만큼 일찌기 특출난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특이하게도 작가 자신이나 작품에 관한 문서상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았다. 문자언어에 대한 병적 거부감을 지녔던 구스타브 클림트의 미술인생은 그래서 오늘날까지 상당부분 규명되지 못한채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체코계 중하급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모친과 친여동생들의 집에서 동거했다고 알려진다. 또 평생 미혼이었으면서도 14명이 넘는 사생아를 낳은 아버지였다는 사실에서 그가 여성을 향한 오묘한 애증과 긴장으로 갈등했던 인물이었을 것임도 짐작케 해 준다.

동시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분석학을 빌어 클림트의 창조적 성과는 개인사적 배경과 성(性)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예술적 통로로 대리 충족되어 발현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클림트가 즐겨 사용한 여성 도상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에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가부장적 부르조아 비엔나 사회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여권의식이 크게 기여했다. 자아의식이 강해지는 신여성을 바라보던 당대 남성들이 여성혐오증과 거세강박증을 토로했던 시대현상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 겸 후원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들도 여성이었다. 클림트가 <철학>(1900), <의학>(1901), <법학>(1903∼7)이란 제목으로 비엔나 대학에 제시한 천정벽화들이 선정성 시비에 휘말렸을 때 여류 언론인 베르타 추커칸들 (Berta Zuckerkandl)과 패션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 (Emilie Floege)는 클림트의 충직한 후견인 겸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전시는 1900년도 전후기 모더니즘 전개와 더불어 여성 후원자와 클림트의 관계를 고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수 없다.

1901년 비엔나 대학 천정벽화 논쟁은 여성의 누드와 도덕성이라는 이슈를 겉으로 내세워 시작된 정치적인 논쟁이었다. 클림트의 근대적 미학을 지지하는 빌헬름 폰 하르텔과 미술사학자 프란츠 비코프 대(對) 보수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요들이 불붙인 미학적 논쟁은 곧 사회주의 대 보수 및 우익주의자들 간의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다. 예술가적 자존심과 독립성에 크게 상처입은 클림트는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후퇴하여 자신의 입지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른바 클림트 미술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동안에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양식화된 장식성으로 중화된 작품이 주목할만 하다. 빈 분리파 운동과 발맞추어 공예분야에서 전개중이던 비엔나 공예운동 (Wiener Werksttaete)에 참여하면서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습득한 금속공예 기술을 환기하게 되었던 한편, 이탈리아 라벤나를 여행하면서 산 비탈레 교회당의 비잔티움 미술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유딧 II>(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178×46cm, 1909, 베네치아 근대미술 갤러리아)는 기하학적 문양의 아르데코 양식이 유난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4.1.1

구스타브 클림트의 <다나에(Danaë)> 1907년 작, 77 x 83 cm Courtesy of Galerie Würthle, Wien.

그보다 이미 8년전 완성된 <유딧 I (유딧와 홀로페르네스)>(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84×42cm, 1901년 경.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뼈가 앙상한 얼굴과 올가쥔 손아귀를 한 살로메는 쾌락을 선사한 댓가로 파멸과 죽음을 몰고오는 공포의 에로스로 정교하게 묘사된 한편, 인물 주변에 양식화되어 나타난 기하학적 장식은 금속공예와 비잔틴 양식의 산물이다.

한편 <다나에>(1907)의 여성상에는 복수심과 남성혐오적 이미지는 오간데없이 사라진 대신 사랑과 온기에 목말라하는 감미로운 젊은 여성으로 형상화됐다. 클림트가 드디어 여성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칼 E. 쇼스케는 해석한다. 이를 더 뒷바침이라도 하듯, 클림트의 말년작인 <아담과 이브>(캠버스에 유채, 1917-1918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는 에로스, 고통, 죽음을 향한 화가의 공포가 일시에 해소된 듯 평온하고 아늑한 분위기만을 풍기며 2차원적으로 처리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의 1890년대 고전적 도상과 포즈로 그려진 여성 초상 작품과 동시대 마네, 마카르트, 쉴레, 호들러, 뭉크, 코코시카의 대표적 여인 초상을 나란히 한자리에 전시하는 이번 전시는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 의의를 내걸고 있다. 인기 화가의 미술전시회를 찾는 일반 대중 관객들 못지않게 모더니즘 시대의 여성 예술후원인과 예술인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미술사학도들에게도 영감을 제공할 만하다.  박진아 | 미술사 2001.1.

* 이 글은 본래 《월간미술》 2001년 1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극장무대로 나들이 간 퍼포먼스 아티스트

Courtesy: Bruseum, Neue Galerie, Graz Photo: UMJ / N. Lackner.

Courtesy: Bruseum, Neue Galerie, Graz Photo: UMJ / N. Lackner.

EXHIBITION REVIEW

“Günter Brus – Excursions to the Stage” at BRUSEUM in WOLGAN MISOOL Monthly Art Magazine, May 2013, 2013, Issue No. 340.

World Topic |「귄터 브루스 – 극장 무대로의 외출」展 – “극장 무대로 나들이 간 퍼포먼스 아티스트” |《월간미술》 2013년 5월호 제340호.

월간미술 웹사이트에서 이 기사 읽기 / Read it here (user log-in required; for log-in info contact me here

※《월간미술》의 컨텐츠는 아이 디와 패스워드를 기입하고 로그인을 해야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음악의 도시 빈에서 한 편의 환타지아

유태인 이민자들이 건설한 백일몽 같은 근대 음악계 오늘날까지도 ’음악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19-20세기 전환기 – 빈(Wien, Vienna)은 시기 지성사적으로나 예술사적으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폭발적인 창조적 분위기로 가득했다. 때는 17세기 이후로 지속되어 온 귀족주의 절대왕권이 제 명을 다하여 쇠퇘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며 상업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지위까지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신흥부유층의 부르조아 사회가 자리잡기 시작한 격동의 변화기이기도 했다.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