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Postmodernism

스타일과 대중 시장이 만나는 접점 – 1990년대의 인테리어와 제품 디자인 [제2부]

High Brow Meets Low Brow, Low Brow Meets High Brow

이미 1960년대말경부터 건축과 제품 디자인 분야에서 불거져 나온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논쟁은 특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지성주의 엘리트 디자이너들과 이론가들의 예술적 실험정신과 극소수의 부유한 문화 엘리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제품 디자인 업체 알레시(Alessi)를 비롯해서 가구 디자인 업체인 카시나(Cassina)와 카르텔(Kartell) 등은 1980년대부터 유명 건축가 및 디자이너들의 명성을 약싹빠르게 상업화시킨 이른바‚ 거장 시리즈’ 디자인 제품들을 개발해 지갑 사정이 좋은 중상층 시장에 크게 어필했다. Continue reading

신조형과 실험주의 – 1990년대의 건축 [제1부]

New Forms and Experimentalism – Architecture and Design of the 1990s

20세기 후반기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유산을 이어받아 전통과 혁신의 조화로운 공존
인본주의에 기반한 이상주의적 예술관에서 출발한 20세기초 모더니즘이 세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지나치게 따분하고 천편일률화된 자본주의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비판에 무릎을 꿇고 나자, 1960년대부터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운동이 등장하며 건축을 본령을 삼아서 현대인들의 시각 환경과 미적 감수성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Continue reading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정해진 규율이란 없다.

1980년대의 건축과 디자인 – 뉴아방가르드로서 포스트모더니즘 (제2편 – 디자인)

POSTMODERNISM AS NEW AVANT GARDES – Architecture and Design of the 1980′s (Part 2)

기능적인 건축은 자를 대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못지 않게 올바르지 못한 길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장족의 발전 끝에 우리는 드디어 비실용적이고, 쓸모없고, 주거가 불가능한 건축으로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 오스트리아 출신 생태 건축가 프리든스라이히 훈더트바서 (Friedensreich Hundertwasser)가 모더니즘에 대하여 남긴 평.

디자인은 창조적 혼란과 기발한 컨셉의 결정체 1980년대를 배경으로 활동하던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은 흔히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정신을 가리켜서 ‚창조적 혼란 (creative chaos)’ 상태라고 표현하곤 했다. 1980년대는 자연 과학 분야에서 ‚카오스 이론 (Chaos Theory)’가 처음으로 발표되어 자연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 뒤에 숨은 무작위적인 연쇄적인 인과관계와 인간의 이해불능력을 정의한 시대였다.

고도로 발전을 거듭하면 거듭할 수록 미지(未知)의 영역은 점차 커져만 가고 있음을 시인하는 과학계가 그러할진대 디자인 예술 분야라 하여 사정은 그다지 다를수 없었다. 디자인 제품이란 반드시 기능적 구실을 수행하는 사물의 결정체여야 한다는 과거 모더니즘의 강령을 과감하게 내던지고 이제 디자인은 창조자의 기발한 착상, 독창적인 컨셉, 사회문화적 이념이 담긴 이념적 의사소통의 매개적 창조물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Continue reading

일본적이어서 세계적인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

Arata Isozaki. Japan Architect 지, 제61호, July 1986년 7월호, 9쪽.

Arata Isozaki. Japan Architect 지, 제61호, July 1986년 7월호, 9쪽.

ARCHITECTURE OF ARATA ISOZAKI

동서가 만나는 공간
고희(古稀)가 넘는 나이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아라타 이소자키(Arata Isozaki 磯崎新,  1931년 7월 23일 생)는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가장 일본적인 생존 건축 디자인의 대가다. 이소자키는 뉴욕의 유명한 팔라디움 디스코텍 (Palladium, 1985년)와 같은 포스트모던풍의 현란한 공간에서부터 지극히 일본적 정적감이 감도는 스위드 파월 (Swid Powell) 가구사 본사 건물(1984년)과 1992년 바르셀로나 몽쥬익 올림픽 주경기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의 건축 디자인을 소화해 낸 바 있다.

또 그런가 하면 건축계에서는 깔끔하면서 단정하면서도 세심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아라타 이소자키의 건축 스타일이 가장 전형적으로 구현된 작품으로서1986년에 완공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컨템포러리 아트 미술관 (LA MoCA: Los Angeles Musuem of Contemporary Art)을 꼽는다. 적색 벽돌, 대형 유리, 금속을 주소재를 이용해 지어진 LA MoCA 건물은 그가 “…창조성, 형태와 색채의 대담성, 용의주도하게 계산된 디테일링”을 탁월하게 이룩해낸 일본 출신의 국제적 건축가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대중 사회를 위한 건축

Kitakyushu City Museum of Art (1972–4)

키타규우슈우 시립 미술관 (Kitakyushu City Museum of Art) 건물은 아라타 이소자키의 메타볼리즘 양식 시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 (1972–4년)

일본 큐슈에서 태어나서 동경 대학에서 겐조 단게 밑에서 건축을 공부한 그는 1954년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스승을 뒤이어 일본의 국가 대표급 건축 대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30대의 이소자키가 활동하던 1960년대, 미래에 본격화될 대중 사회를 대비하여 대규모의 융통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자생가능한 건축 및 도시 설계를 주창한 일본의 메타볼리스트 건축 운동 (Metabolist Movement)에 잠시나마 영향을 받았던 그는 1963년에 독자적인 건축 사무소인 아라타 이소자키 앤 어소시에이츠 (Arata Isozaki & Associates)를 개업하고 현대적인 첨단 건축 기술과 건축적 실용주의를 겸한 건축을 설계하는데 심취했다. 1966년에 일본 오이타 현(縣)에 완공된 시립 공공 도서관과 시립미술관 건물들은 바로 1960년대 메타볼리스트 건축 운동의 영향이 강하게 엿보이는 사례로 꼽힌다.

일본식 포스트모던 건축 구축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 이소자키는 일본 바깥으로 눈을 돌려 자신의 작업 반경의 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추구해 오던 일본적인 미감과 공간적 해법과 다소 정형화된 박스형 건물 형태를 내던지고 보다 불규칙하고 실험적인 형태를 실험하기 시작했는데, 적황회색의 자유분방한 형태를 자랑하는 도바타 소재 기타 큐슈 시립 미술관(1974년)과 중간이 불룩한 배럴형으로 설계된 오이타 현 후지미 클럽하우스 건물(1974년)은 첨단 건축 시공 기술에 힘입어 시도된 이소자키의 형태적 실험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들이다. 오카노야마 그래픽 미술관 (1982-84년)과 츠쿠바 시민 센터(1983년)는 각각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전을 현대화한 듯한 차용적 요소와 서양의 역사적 건축 양식을 두루 뒤섞은 듯한 절충주의가 두드러진 포스트모던풍 건축물들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자칫 이소자키의 건축은 장식이 절제되고 엄격한 미니멀리즘으로 느껴질는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의 건축 실물을 직접 접해 본 관객은 예상치 못한 친근감과 아늑함을 느끼곤 한다. 최대한의 공간감을 연출하기 위하여 높은 천정과 탁트인 실내 공중 공간을 확보하고 유리창을 활용하여 인공 조명등 보다는 외부로부터 자연광이 내부로 들이치도록 하여 따뜻하고 친근한 실내 분위기를 창조하기 좋아하는 이소자키 특유의 유희 감각 덕분이다.

아라타 이소자키가 설계한 미국 마이애미 시에 있는 배스 미술관(Bass Museum of Art) 건물. 2001-2005년. Image: Bass Museum of Art.

아라타 이소자키가 설계한 미국 마이애미 시에 있는 배스 미술관(Bass Museum of Art) 건물. 2001-2005년. Image: Bass Museum of Art.

이소자키가 자신의 건축 스타일을 가리켜서 스스로 명명한 ‘순수 양식화된 일본풍화 (japanesquization)’ 스타일이 그 특유의 유머 감각과 잘 어우러진 예는 1989-90년에 완공된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란도 소재 팀 디즈니 빌딩(Team Disney Building)을 꼽을 만하다. 초대형 원통형 건물 위에 해시계를 얻어 놓은 듯한 이 디자인은 대담한 색상과 형태는 물론 즉흥적인 유희 감각 면에서 포스트모던 건축의 대표작임에 틀림없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다시 태어난 건축가 이소자키
이소자키는 실내 디자이너 겸 제품 디자이너로서도 탁월한 색채 의식과 유머 감각을 발산하여 특히 구미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최근, 19명의 초국제급 스타 건축가 및 실내 디자이너들이 저마다의 공간 창조력을 무한대로 발휘한 “꿈의 호텔 프로젝트”로 화제가 된 스페인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아메리카 호텔 실내 디자인에 참여한 바 있는 그는 자신의 본령인 일본풍 현대 인테리어를 다시 한 번 실현해 보였다.

그가 담당한 이 호텔 10층의 객실 인테리어는 미묘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안겨주는 전통 일본식 실내를 환기시킨다. 특히 욕실은 전통 일본식 욕실에서 볼 수 있는 통나무로 된 욕조가 은근한 미색을 발휘하며 명상적인 분위기로 연출되었고, 침실 공간은 적백흑 3색 위주의 공간 및 액세서리와 쇼지(障子) 공간 분리대로 장식된 것이 인상적이다.

구미권 건축계를 일본에 교육시켜 온 건축 이론가 겸 사상가로서뿐만 아니라 건축 및 인테리어 디자인 프로젝트를 통해서 가장 일본적인 현대 건축을 구미권에 소개하고 있는 아라타 이소자키의 열정은 80세 산수(傘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댄디 화가가 된 귀족남

닐스 다르델 – 근대 유럽의 민주적 댄디

“NILS DARDEL AND THE MODERN AGE” at Moderna Museet, Stockholm

닐스 다르델 ⟨숨져가는 댄디(The Dying Dandy)⟩ 1918년 © Nils Dardel.

닐스 다르델 ⟨숨져가는 댄디(The Dying Dandy)⟩ 1918년 © Nils Dardel.

근대기 유럽 미술계에서 하이소사이어티에서 기인 화가이자 개성 강한 댄디로 알려져 있던 닐스 다르델(Nils Dardel). 오늘날 스웨덴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국민 화가가 되었지만 그가 국민 화가 대접을 받기 시작한 때는 그다지 오래전이 아니었다. 남달리 개성이 강한 패션 감각, 기이한 성격, 인습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사생활을 고집했던 꾀짜라는 딱지에 가려 198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 덕택에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댄디(Dandy)란 본래 18세기 영국에서 인류 문명과 최고로 세련된 매너를 배우러 이탈리아로 유학여행을 떠나던 엘리트 교육과정, 이른바 이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하고 돌아온 귀족 남자 자제들을 뚯했다. 이렇게 이탈리아 여행 Continue reading

모더니즘 도그마는 저리 비켜라!

1980년대의 건축과 디자인 – 뉴아방가르드로서 포스트모더니즘 (제1편 – 건축)

POSTMODERNISM AS NEW AVANT GARDES – Architecture and Design of the 1980’s

추상미술은 관객과 소통하는가? 관객은 추상미술로부터 무엇을 느끼는가? 추상미술은 종국에 누구를 위한 미술인가? 작품은 독일의 사진가 토마스 슈트루트 (Thomas Struth,  1954 생)의 「뉴욕 근해미술관 제1번 (The Museum of Modern Art I)」, 'The Museum of Modern Art I New York 1994년, 총 인화된 사진 10장중 10번째 사진, Thomas Struth 1994' 컬러 커플러 인화, 71½ x 94¾ in. (181.5 x 240.5 cm.)

형상과 스토리가 제거된 추상미술은 관객과 소통하는가? 관객은 추상미술로부터 무엇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추상미술은 종국에 누구를 위한 미술인가? 이 작품은 독일의 사진가 토마스 슈트루트 (Thomas Struth, 1954 생)의 「뉴욕 근대미술관, 제1번 (The Museum of Modern Art I)」, ‘The Museum of Modern Art I New York 1994년, 총 인화된 사진 10장중 10번째 사진, Thomas Struth 1994’ 컬러 커플러 인화, 71½ x 94¾ in. (181.5 x 240.5 cm.)

1980년대 미철학 – 규율과 기능주의의 교조주의를 접고 순수 이상과 조형의 유희를 추구하다. 진정 모더니즘은 실패한 예술 실험이었는가?
영국의 저명한 맑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조차도  그의 변치않는 모더니즘 이상(理想)에 대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아방가르드 모더니즘 예술과 미학은 대중들에게 호소하고 사랑받는데 철저히 실패했다’고 거침없이 지적했다. (참고: 에릭 홉스봄 저 『시간의 뒤안길에서: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의 쇠퇘와 몰락 (Behind the Times: The Decline and Fall of the 20th-Century Avant Gardes)』 (London, Thames and Hudson, 1998년) [이 책의 우리말 번역판은 조형교육에서 나와있다.]

그뿐 만이 아니다. 언어학과 진화 인류학 분야에서 현대 최고의 권위와 대중적 설득력을 인정받고 있는 미국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그의 최근 저서들인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나 (How Mind Works)』(1997년 간)과 『빈 서판 (The Blank Slate : 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 (2002년, 한국어판 사이언스북스 간)에서 모더니즘 미술은 출발부터 인간의 근원적인 미적 감지력과 취향에 거스르는 미학을 추구한 결과 대중들의 호감을 사기보다는 오히려 외면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결론지었다.

누구를 위한 모더니즘이었는가? 20세기 모더니즘은 인류 역사상 전 지구상의 국가와 언어와 문화권 할 것 없이 도처에 인간의 환경과 사고방식에 철두철미하고 전면적인 변혁을 불어 몰고 온 문명의 대(大)분기점 가운데 하나였다. 서구 역사 반세기 이상을 넘는 세월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같은 거창한 체제 영역으로부터 지극히 평범한 일상 생활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이루다 설명할 수 없이 파고든 모더니즘의 현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여간해서 요령부득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철학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건축계와 여론의 찬반논란을 일으켰던 뉴욕 AT&T 사 사옥건물 모형과 함께 한 건축가 필립 존슨. 1978년 설계. 2007년 이후 AT&T 빌딩은 소니 플라자 빌딩이 되었다. Photo: Bill Pierce/Time & Life Pictures/Getty Images.

치펜데일풍 지붕과 포스트모던한 몸체로 건축계와 여론의 찬반논란을 일으켰던 뉴욕 AT&T 사 사옥 건물 모형과 함께 한 건축가 필립 존슨의 모습. AT&T 건물은 1984년 완공되었다. 2007년 이후 AT&T 빌딩은 소니 플라자 빌딩이 되었다. Photo: Bill Pierce/Time & Life Pictures/Getty Images.

독일 바우하우스 학파를 비롯하여 20세기 전반기를 주름잡은 여의 건축 및 디자인 분야의 거장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만인의 생활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꾸며주는 보편적인 휴머니즘 미학을 이룩한다는 이상을 뒤쫒았음에도 불구하고, ① 건축과 디자인은 결국 한편으로는 권력과 부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대기업과 정부 관료 기관에 봉사하는 시녀로서 그 위력을 발휘했으며, ② 또 한편으로는 대중을 소비자라는 유행과 소비의 노예로 만든 대량 소비주의 지향적 마케팅 전략이 가장 즐겨 활용한 기업들의 부가가치 창출용 수단으로 변신변질 되었다.

1960년대말 서구 사회 곳곳에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돌발적으로 불거진 반문화 운동 (Counter-culture Movement)과 인문학계 내 지성인들 사이에서 전개된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과 비판도 모더니즘의 바로 그같은 변질을 지적하며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런 한편,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에 이르면서 서구 사회와 일본에서의 경제 성장은 계속되는 가운데 평범한 대중들은 여전히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사회가 안겨준 풍요와 안락을 누리고 있었다.

“No more ‚Less is more’ but ‚Less is a bore” 단순한 것이 더 심오하다고? 단순한 것은 따분한 것. – 건축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 경향
모더니즘 건축의 최고봉 미스 반 데어 로헤 (Mies van der Rohe)가 모더니즘 건축과 디자인의 미학적 근본 기치로 내걸었던 „Less is more.“(단순한 것이 더 의미있는 것이라는 의미)는 미학 모토는 어느새 부터인가 „Less is a bore“ 즉, ‘단순한 것은 따분한 것’이라며 빈정어린 비판의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그같은 분위기는 1980년에 접어들면서 이성 (rationality)보다는 감성 (emotion) ,보편적인 ‚고급 취향 (good taste)’ 보다는 대중문화와 저급 주변 문화에서 영감 받은 ‚저속 취미 (bad taste)’, 엘리트 취향의 규율 보다는 불특정의 다양성 및 재미 (fun)와 재치 (wit), 대량생산 (mass production) 보다는 소량창조 (small-scale creation)를 추구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의 시대의 출발을 고하는 것이었다.

예술계와 학계 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의 알파벳 앞의 두글자를 따서 줄인 ‚포모 (PoMo)’라는 속칭으로도 불리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분명한 정의와 정당성에 대한 담론은 이미 1960년대 중엽부터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1960년대말 부터 1980년대까지 전개된 새로운 건축 디자인의 유행을 통해서 더 구체화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연속인가 아니면 모더니즘과 단절인가? 학계는 논쟁을 멈추지 않으며 ‘포모’의 정체를 밝히려 애썼다.

미국의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 (Michael Graves)가 설계하여 1982년에 완공된 포틀랜드 빌딩. 현재 미국 오레건 주 포틀랜드 시 소재.

미국의 건축가 마이클 그레이브스 (Michael Graves)가 설계하여 1982년에 완공된 포틀랜드 빌딩. 현재 미국 오레건 주 포틀랜드 시 소재.

포스트모더니즘 미국 건축 제1세대 20세기 모더니즘 미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학계에서만 불거져 나온 것은 아니었다. 문화계 전반에서도 유럽과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도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특히 미국에서, 1950-60년대 대도시의 대기업 사무실 건물 설계를 맡았던 미국 마천루의 건축 제왕 필립 존슨 (Philip Johnson)은 이미 1970년대말에 근대식 건축 골조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과 영국 18세기 귀족풍 치펜데일 양식이 오묘하게 뒤섞인 AT&T 사 건물을 뉴욕에 지어 올리는 것으로써 판에 밖힌 모더니즘풍의 국제 건축 양식의 답습에 대항한 일탈의 제스쳐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1966년에 미국에서는 건축가 로버트 벤추리 (Robert Venturi)가 『건축에 있어서 복합성과 모순 (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라는 책을 써서 박스처럼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이며 일체의 장식성이나 의미가 제거된 무미건조하고 청교도적인 모더니즘식 건축의 시대는 이제 물러갈 시기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그는 1972년에 『라스 베가스의 교훈 (Learning from Las Vegas)』라는 책을 내고는 쇼비즈니스 오락과 도박의 인공인조 도시 라스 베가스의 거리 도처와 고속도로 주변에 널려있는 절충적인 상업 건축물과 저속한 빌보드 이미지에서 발견되는 미학이야 말로 다가올 미래의 신건축이 가야할 길이라고 선언했다.

또 콜린 로우 (Colin Rowe)와 프레드 쾨틀러 (Fred Koettler) 공저 『콜라쥬 도시 (Collage City)』(1973년 간)와 렘 코올하아스 (Rem Koolhaas)의 저서 『들뜬 도시 뉴욕 (Delirious New York)』(1978년 간)에서 마천루의 천국 뉴욕에서 급속히 출현하기 시작한 새로운 포스트모던풍 건축물과 거리 풍경을 지적하면서 과거의 건축 양식들의 복귀와 다양한 건축 요소들의 재출현을 높이 찬양했다.

그 기원과 발원지가 무엇이었든지 상관없이 1980년대의 건축가들이 하나같이 새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은 단순간결과 무장식성을 추구했던 ‚경직된 모더니즘 도그마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anti-thesis to Modernist aesthetics)’과 ‚과거 및 기존 이미지들의 재발견-혼합-절충’이었다.

로버트 벤추리가 어머니 바나 벤추리를 위해 설계한 가정집 (“Mother’s House”, Vanna Venturi House), Philadelphia, 1964 © Photo: Heinrich Klotz Bildarchiv der HfG Karlsruhe

로버트 벤추리가 어머니 바나 벤추리를 위해 설계한 가정집 (“Mother’s House”, Vanna Venturi House), 단순함과 모순성이 한데 결합된 포트스모던 건축의 아이콘으로 인정받고 있다. Philadelphia, 1964 © Photo: Heinrich Klotz Bildarchiv der HfG Karlsruhe

포스트모더니즘 미국 건축 제2세대 뒤이어서 1980년대 중엽에는 필립 존슨의 제자들이 대거 특히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주도했다. 로버트 스턴 (Robert Stern)과 존 버지 (John Burgee) 등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건축과 19세기 신고전주의 건물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을 가미한 건축물들, 예컨대, 텍사스 휴스턴 대학 건축 학교 빌딩(1982-85년 완공), 버지니아 대학 천체관측소 부설 식당 건물(1982-84년 완공), 캘리포니아 라 홀라 프로스펙트의의 오피스 빌딩(1983-85년 완공)을 통해서 과거 건축 양식과 현대적 요소들이 뒤섞인 절충적인 건축물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건축 설계를 시작한 198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던 건축가들 가운데에서 특히 마이클 그레이브스 (Michael Graves)는 강렬한 색과 과장되고 장식적인 요소들이 첨가된 건축물로, 그리고 리쳐드 마이어 (Richard Meier)는 한결 젊잖고 보수적인 경향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시기인 1970년대 말엽부터 1980년대 동안 대서양 건너편 유럽 대륙에서도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서 反모더니즘적 경향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포트스모더니즘 건축이 팝아트, 광고나 만화 같은 저급 대중 문화 이미지, 미국 건립 초기의 식민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 등과 같은 다양한 원천에서 두루 차용하여 절충 결합하는 전략을 취했다고 한다면, 유럽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한결 정치적・이념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는 추세였다.

“유럽의 미래는 과거에” – 유럽의 전통 복고주의 유독 유럽에서 포스트모던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계기는 1980년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사상 최초로 건축 비엔날레가 조직되면서 „현재 속에 잔존하는 과거 (The Presence of the Past)“라는 대제목으로 열린 건축 전시회를 통해서 불거졌다.

일찍이 1966년 이탈리아 마르실리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알도 로씨의 포스트모던 건축론 『도시 건축론』의 표지. 이 책은 지리학, 경제학, 인류학 같은 인문학을 건축과 도시토목설계에 반영시킨 기념비적 저서다.

일찍이 1966년 이탈리아 마르실리오 출판사에서 출간된 알도 로씨의 포스트모던 건축론 『도시 건축론』의 표지. 역사학, 지리학, 경제학, 인류학 같은 인문학을 건축과 도시토목설계에 반영시킨 기념비적 저서다.

이 전시에는 로버트 벤추리, 찰스 모어 (Charles Moore), 파올로 포르토게지 (Paolo Portoghesi), 알도 로시 (Aldo Rossi), 한스 홀라인 (Hans Hollein), 리카르도 보필 (Ricardo Bofill), 레옹 크리에 (Leon Krier) 등 당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이끌던 국제급 건축가들의 작품 세계가 소개되어 개인주의 (individuality), 친밀성 (intimacy), 복합성 (complexity), 유머 감각 (sense of humor)을 건축요소로 삼아 이전 모더니즘 건축과는 퍽 색다른 건축 정신을 선언했다.

무려 반세기가 넘게 승승장구한 제1차와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의 끝으로, 현대적인 건축과 도시 설계로 급격히 현대화된 주거 생활 환경을 경험한 이탈리아인들은 새삼 과거로 눈을 돌려서 19세기와 20세기초에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를 재발견하여 건축으로 재해석하려는 ‚역사주의 (Historicism)’ 운동을 되살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유럽 전역에 걸쳐 그동안 방치되어 왔거나 허물어져 가는 고건축물을 복원하는 고건축 재건축붐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 시기도  바로 1980년대 부터였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 알도 로씨 (Aldo Rossi)는 일찌기 1960년대에 과거 고전주의가 지닌 엄격한 건축 원칙을 높이 찬양하는 건축서 『도시 건축론 (L’architettura della città)』(1966년 간)을 발표하고 이탈리아 지방 마다의 맥락에 맞는 고전주의 건축을 제안하였다. 역사주의을 취한 유명한 건축 디자이너들 가운데에는 마이클 그레이브스, 로버트 벤추리 등이 대표적이며 디자인 회사들 가운데에는 크놀 (Knoll), 알레시 (Alessi), 포르미카 (Formica) 등이 그같은 계열 속에서 기능 보다는 과거의 시각적 장식성과 환상적인 이미지를 되살린 가구 및 가정용 제품 디자인에 주력했다.

또 1980년대는 이탈리아어권 스위스에서도 유난히 많은 건축디자이너들이 탄생하여 국제 무대로 명성을 펼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현대 건축계의 스타 마리오 보타 (Mario Botta)를 비롯해서 마리아 캄피 (Mario Campi), 브루노 라이흘린 (Bruno Reichlin), 파비오 라이하르트 (Fabio Reinhardt)는 모더니즘을 한단계 발전시킨 이른바 ‚신합리주의 (Neorationalism)’ 건축을 정착시킨 장본인들이다.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파리에 있는 조르쥬 퐁피두 센터는 1977년에 완공되었다. Photo: Michel Denancé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파리에 있는 조르쥬 퐁피두 센터는 1977년에 완공되었다. Photo: Michel Denancé

모더니즘의 무자비하다시피한 엄격주의와 규율에서 탈피하되 근대적인 소재와 건축 기술을 백분활용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인다는 모더니즘 건축의 휴머니즘적 장점을 그대로 수용하여 계승하자는 건축 디자인 철학을 골자로 하고 한 이 신합리주의는 곧이어서 독일의 오즈발트 마티아스 웅거스 (Oswald Matthias Ungers), 오스트리아의 한스 홀라인, 벨기에의 롭 크리에 (Rob Krier) 등과 같은 건축가들이 동참한 1980년대 유럽의 핵심적인 건축 경향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파리에서는 이미 1970년대말에 급속히 발전한 건축 기술과 소재의 발전을 한껏 환영한다는 의미에서 파리 퐁피두 센터 (렌조 피아노 (Renzo Piano)와 리처드 로저스 (Richard Rogers) 공동 설계)를 지어 선보였다. 건축사 최초로 건물의 철골 골조와 구조적 내부설치물이 바깥으로 있는 그대로 드러나 보이도록 설계된 퐁피두 센터 건물은 처음 대중에 공개되자마자 그 파격성과 도발성으로 비난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지만 결국 이 건물이 파리의 역사적 자리에 들어선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물로서 선언한 과감한 제스쳐와 유희적 유머 감각은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 맨 위 이미지 설명: 오즈발트 마티아스 웅거스 (Oswald Mathias Ungers)의 건축 설계 스케치, Deutsches Architekturmuseum, Frankfurt am Main, 1980년 (Coloured drawing, ca. 40,0 x 30,0 cm) © DAM

※ 이 글은 본래 LG 인테리어 『공간사랑』지 2005년 8월호 “History of …” 연재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1970년대 국제 건축 양식

소수의 걸작과 다수의 졸작의 시대

ARCHITECTURE OF THE 1970s – Masterpiece vs Mediocrity : The Second International Style

1970년대 제2차 국제 건축 양식
아방가르드가 주류로, 이상주의가 상업주의로
자본주의적 기성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이념적인 이상주의(idealism)가 사회와 예술문화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1960년대가 막을 내리고 1970년대가 출범했다.

1960년대 말, 유럽과 미국 사회를 한바탕 혼란과 자각적 환기로 몰아 넣었던 플라워파워 세대를 향해 반격의 일타를 가하기라도 하듯, 1970년대가 시작하자마자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죽었고 이어서 1960년대말 저항 록음악의 대명사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가 줄지어 그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으며 전설의 록밴드 비틀즈가 해체했다.

전세계의 냉전 구도는 팽팽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가운데 다국적 기업들은 나날이 대규모화되고, 지속적인 경제 부흥을 유지하기 위해서 광고와 마케팅은 그 언제보다 정교하고 세련되어 졌으며, 사람들의 일상 생활은 나날이 윤택하고 편리해 졌다. 우주 공상과학 영화 《스타워즈 (Star Wars)》와 TV시리즈 《스타 트렉 (Startrek)》은 정치적 냉전시대를 반영이나 하듯 선악(善惡) 모럴과 목적론적 낙관주의로 미국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 동안에, 전에 없이 많아진 공중파 라디오에서는 귀를 거스르는 60년대풍 록음악 대신 한결 듣기 편한 소프트록과 디스코가 대중들의 정서를 차분하게 길들이고 있었다.

1970년대, 저항 및 주변 세력의 주류화 (mainstreaming)와 아방가르드의 상업화 (commercialism)는 건축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20세기 전반기 구축된 모더니즘 건축을 주류 건축의 표본으로 삼아 대규모로 상업화하기란 건설업자들 측에서도 효율적이었다. 단순간결하기 때문에 측정 표준과 기준 치수를 표준화하기에 매우 쉬우며 따라서 무한대로 반복사용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 건축의 장점 때문이었다.

그 결과, 건축물 바깥 모습은 대체로 철골과 유리판으로 뒤덮힌 따분한 육방체 형태를 띠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고, 건축 실내는 상상력이나 변조적인 공간이 불가능한 천편일률적이고 뻔한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시대 건물들에서 발견되는 무미건조하고 커다락 상자 미학은 디자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는 20세기 초엽부터 1930년대까지지 무렵에 형성된 바우하우스 (Bauhaus) 건축 양식에서 비롯된 제1차 국제 건축 양식의 겉모양새를 본따서 쓰되 그 외형을 대중 주택 건설 프로젝트, 학교, 병원과 보건소, 도시 설계 등과 같은 공공 건축 건설 사업에 널리 두루 활용된 ‘모더니즘 건축의 무더기 대랑 생산의 시대’로 정의된다. 혹은 건축 디자인사에서 흔히 도는 평가에 따르면,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의 시대 특히 1970년대에 서구 구미 세계 도처에서 창궐한 모더니즘풍 건물과 고층 빌딩은 1930년대 즈음부터 서서히 보편화되기 시작한 ‘제1차 국제 건축 양식의 답습과 반복’의 결실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1970년대는 건축 사진의 조작과 연출의 시대이기도 하다. 《아키텍쳐럴 다이제스트 (Architectural Digest)》 (줄여서 《AD》라고 부른다.) 같은 건축 전문 잡지를 통해서 보여지는 건축 사진 이미지가 현실 속에서 실제 건축물을 보고 느끼는 일반인들의 시각적 판단력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AD》誌가 자랑하는 특유의 사진 촬영 기법과 편집 방식은 건축 실내외 공간에 활기차고 실험적인 느낌을 잘 부각시킨 예로 꼽힌다.

이 시대의 건축 연출 사진은 또 1960년대 말부터 서구 사회에 만연해진 다문화주의 (multi-culturalism)적이고 이국적 색채를 현대적 감각으로 각색해 다채롭게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로 부터 비롯된 미적 감각 곧 뒤이어 1970년대 말엽 부터 고개를 들어 1980년대를 호령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건축의 등장을 앞서 예고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으로도 부르는 1970년대의 모더니즘 건축은 보다 일찌기 세워진 거장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작품의 외형만을 이리저리 적당히 배끼고 변형해 대량으로 공급한 ‘모사 건물 (imitation architecture)’의 시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30년대 전후, 독일 바우하우스 건축가들을 주축으로 해 근대적 유토피아 세상 건설이라는 야심찬 이상(理想)이 건축을 통해서 단발적으로 지속되다가, 20세기 중엽에 이르자 이른바 ‘국제 건축 양식 (International Style in Architecture)’은 대학과 건설업계에서 점차 일종의 건축 관습의 하나로 굳어져 갔다.

특히 1970년대에 접어들자 전세계는 구미권과 제3세계권 할 것 없이 도처 구석구석에서 크고 작든 규모에 상관없이 온통 사각형 모양을 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없는 곳이 없게 되었다. 철근을 심은 콘크리트 벽과 강철 건물 골조에 유리나 금속판을 끼워 넣거나 매어 다는 시공 기법은 20세기 전반기만 해도 신소재와 형상의 잠재적 미학을 극한으로 밀어 부친다는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실험정신의 발현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혁신적인 사상도 세월이 지나면 타성의 산물로 변하는 법이던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그같은 요소들은 건물짓기의 표준 공식 내지는 표준 시공 요소로 보편일반화 되기에 이르렀다.

혁신적인 모더니즘 건축의 계승 그리고 타성화
사실상 따지고 보면 1970년대 즈음이 되어서 모더니즘 건축을 전보다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경지로 더 밀어붙이겠다는 야심은 그러나 말처럼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과거 20세기 전반기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건축 명인들은 모더니즘 건축이 이룰 수 있던 결실 면에서 이미 높은 성취도에 이르렀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1940년대 전후 이후로 본격화된 전세계 건축붐을 타고 전에 없이 많은 건설 주문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모더니즘풍 건물을 선호했던 때문이기도 했다.

또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의 1970년대는 유럽에서 온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들이 미국 유수의 건축 대학에 자리를 잡고 후배 건축가들을 키워낸 신세대 건축가 대거 배출의 시대이기도 했다. 1930년대 독일 나치 정권이 유태인들은 물론 예술가, 건축가, 과학자들을 대거 배척했던 이유로 해서 그 결과 다수의 재능있는 건축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오면서 미국은 단숨에 건축과 예술의 중심지로 탈바꿈하는 수지를 맞았던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나치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1934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1937년에 하버드 대학의 건축학과 학과장직을 임명받고 미국으로 가 정착했다. 독일의 건축가 디자이너인 마르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도 뒤따라 하버드에서 그로피우스와 나란히 대학 강단 생활을 했다. 20세기초 다다이스트 겸 초현실주의자 모홀리-나지 (Moholy-Nagy)는 새 바우하우스를 미국에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1937년에 미국 시카고로 건너갔으며, 요제프 알버스 (Josef Albers)는 브랙마운틴 칼리지(블랙 마운틴 칼리지는 라우셴버그, 재스퍼 존스 등 1940-50년대 전후 미국 추상 미술의 주도적인 미술가들을 배출했다)와 예일에서 미술과 디자인을 가르쳤다.

1970년대 건축계의 군계일학들
건축 구조 공학 전문가로서 더 빛을 발한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로베르 마이야르 (Robert Maillart), 프랑스의 외젠느 프레시네 (Eugéne Freyssinet), 이탈리아의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 (Pier Luigi Nervi)는 자칫 차갑고 무미건조한 모양으로 전락하기 쉬운 콘크리트 소재에다 상상력과 합리적인 감각을 결합한 독특한 미학적 인상을 남긴 건축가들로 꼽힐만 하다.

특히 네르비는 일찌기 1940년대 부터 이탈리아 투리노 전시장 건물(1948-49년), 파리 유네스코 빌딩(1953-58년, 마르셀 브로이어와 베르나르드 체르푸스 (Bernard Zehrfuss) 공동 설계), 호주 퍼스 뉴 노르시아의 교회당 건물(1960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육중한 콘크리트 안에 강철망을 심는 그만의 기법을 고안해서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마치 자유롭게 흐느적거리는 듯한 유연미끈한 곡선을 연출할 수 있었다.

호주 시드니의 명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Sidney Opera House, 건설 기간 1957-73년)는 덴마크의 간판급 모더니즘 건축가인 요른 웃존 (Jørn Utzon, 1918년 생)의 대표적인 역작이며, 핀란드 출신의 건축가 겸 디자이너인 에에로 사아리넨 (Eero Saarinen)은 1962년도에 완공된 미국 워싱턴 D.C. 덜레스 국제 공항 (Dulles International Airport)을 설계를 맡아서 전에 보지 못한 전격적으로 새로운 구조 공사 해법을 발휘해 건축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역시 핀란드 출신의 거장 모더니즘 건축가인 알바 아알토 (Alvar Aalto)는 20세기가 낳은 주류 모더니즘 건축가들과는 차별되는 색다른 모더니즘 철학을 고집한 것으로 유명하다. 1920년대 중엽 이후부터 1970년대로 접어들 때까지 40여년에 걸친 건축 생애를 살면서 여타 건축가들이 그토록 찬양해 마지 않았던 산업용 소재들 예컨대, 강철, 콘크리트, 대형 통자 유리판, 알루미늄 등을 건축물에 도입하는 것을 끝까지 부인했다. 그리고 그대신 아알토는 핀란드 특유의 광활하고 친자연주의적 미학과 공간 개념에 기초하여 친숙하고 감각적이면서도 과장이나 일편의 가식이 제거된 순수미의 신경지를 개척했는데, 그래서 그는 주로 자연석, 원목, 구리 이음새 만을 사용하여 실내 공간 전체에 햇빛을 최대한 들이고 분배할 줄 안 세련된 공간 창조의 명수로서 20세기 건축사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1970년대 건축계에서 빛의 조율사 라고 하면 또 떠올릴 수 있는 이름으로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 (Louis I. Kahn)을 들수 있는데, 미국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가로지르며 활약한 그는 루이스 설리번 (Louis Sullivan)이 선언한 그 유명한 모토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를 새롭게 해석하여 기능이 건축물의 모양을 결정짓는 건축을 추구했다. 특히 그가 설계하여 1972년에 완공을 본 텍사스 포트 워스의 킴벨 미술관 (Kimbell Art Museum)은 건물 내부의 긴 통로의 천정 공간에 빛을 오묘하게 조절하는 대들보를 설치하는 방법을 통해서 장대한 분위기를 연출한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에서 1970년대 국제 건축 양식이 널리 보편화되기까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건축가는 미국의 필립 존즌 (Philip C. Johnson)이었다. 하버드 대학 건축학교 발터 그로피우스의 제자이기도 했던 그는 모더니즘 건축계 최고의 카리즈마적 거장 미스 반 데어 로헤 (Mies van der Rohe)와도 친분을 나누었는데, 일찌기 1951년에 미스 반 데어 로헤와 함께 시키고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고층 아파트 건물 설계를 함께 담당하기도 했다. 곧이어 1956-7년, 존슨은 뉴욕 시그램 양주 제조사 본부 건물 설계 프로젝트를 따서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바우하우스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헤와 함께 공동 설계하는 영광을 누렸다.

올 2005년 1월에 98세의 나이로 타개한 것으로 보도된 필립 존슨은 독일 나치주의에 가슴 깊이 동조했다는 어두운 내면의 소유자로서 건축사 뒤안길에 남아 있지만, 또 한편으로 생전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을 뺨치는 적극적인 자기홍보가였으며, 유명 헐리우드 배우들을 능가할 만큼 명성과 글래머를 일관적으로 추구했던 맹렬한 건축계 커리어리스트로도 기억되며, 오늘날 프랭크 게리 (Frank Gehry)에서 자하 하디드 (Zaha Hadid)에 이르기까지 현대 건축계의 수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A급 건축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안겨준 인물이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20여년간 뉴욕 근대미술관 (MOMA) 의 건축담당 디렉터직을 맡으면서 바우하우스 건축 미학의 열렬한 옹호자로 활약했던 필립 존슨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천루의 본고장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창조하는데 큰 획을 그은 장본인이었다.

1950년대 이후 전후 미국 대도시에서 전격적으로 전개된 마천루 (Skyscrapers) 건설붐은 오늘날 1970년대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을 논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기념비적 건축물 건설을 가능케 했다. 1970년대보다 앞서 1950년도에 완공된 뉴욕 국제 연합 기구 빌딩 (United Nations Building)은 미국 빌딩붐을 선포한 최초의 전후 미국 건축의 르네상스를 예고한 상징물이다.

“Less is more” 라는 건축 철학을 토대로 본래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헤가 1930년대 초엽에 독일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학교에서 착상해 두었던 단순 간결한 실용주의적 기능주의 (utilitarian functionalism) 컨셉을 기초로 설계된 이 국제 연합 빌딩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헤가 제외된 국제 건축가 팀의 단체 협력으로 설계를 마쳤다. 그런가 하면 최근들어 건축계의 재조명을 받고 있는 브라질의 이상주의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 (Oscar Niemeyer)는 한 건축가의 비젼이 어떻게 유토피아 국가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놀라운 예로 꼽을 만하다.

흔히 1970년대의 모더니즘 건축은 대기업과 대형 정부 조직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일반인들로부터는 외면당한 반쪽의 건축 양식이었다고 평가되곤 한다. 20세기 전반기의 제1차 국제 건축 양식이 중소형 규모의 공공 건물이나 거주용 개인 주택을 통해서 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건축과 실내 공간을 실험했다면, 20세기 후반의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은 모더니즘의 모태와 뿌리로부터 단절되어 냉냉하고 비인간적인 한 편의 거대한 기념탑으로 변질되었다.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은 대기업이나 정부 조직체의 재력이나 행정력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적 아이콘이었으나 반면에 건축의 외형이나 실내 구조는 인간에 대한 배려(예컨대 핀란드 건축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휴먼 스케일 (human scale)은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1960년대 이후 건축 생애의 말년에 접어든 르 코르뷔지에가 유독 인간의 영혼과 건축의 조화에 관심을 두었던 사실이나, 벅민스터 펄러 (Buckminster Fuller)가 환경주의 건축과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그쳤던 점,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무자비한 고건물 건축붐에도 아랑곳 않고 건축물의 상징성을 일관적으로 표현했던 에에로 사아리넨의 건축 정신이 유독 소중하게 재검토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래서가 아닐까.

* 이 글은 본래 『공간사랑』 지 2005년 6월호 “History of …” 컬럼에 연재되었던 기사를 다시 게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본 1970-80년대 뉴욕 다운타운 문화

FROM ANARCHY TO AFFLUENCE

New York –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 1970년대 무렵 미국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 도시 뉴욕에서는 1960년대말에 불어 닥친 반문화 정치 활동을 끝으로 전에 없이 새로운 전자 매체 혁명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접어들자 미국은 국제 유류 파동과 그로 인한 경제 불황 중에서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대통령을 선출하여 보수주의적인 분위기로 몰입하기 시작했다. 공중파 케이블 텔레비젼을 통해서 MTV 방송국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 같은 수퍼스타 연예인들이 미국 내는 물론 전세계의 팝음악 팬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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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사(Morsa)가 디자인한 로프트 침대. Photo ⓒ Dan Wynn, lent by Joan Kron.

이 즈음 뉴욕의 미술계도 전에 없이 새로운 이른바 ‘다운타운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뉴욕의 금싸라기 땅이자 예술 구역으로 자리잡은 이스트빌리지 (EastVillage)는 바로 그 뉴욕 다운타운 문화의 발상지이자 예술인과 보헤미언들의 창조적 실험실이어 왔다.

맨하탄의 로뤄 이스트 사이드 (Lower East Side) 구역 내 옛 물류 창고가 모여있던 이스트빌리지는 한때 집없는 거리부랑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범죄가 빈번하는 빈민가로서 높은 악명에 시달렸지만 그런 이유로 해서 아주 싼 임대료를 찾아 살러온 가난한 예술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점점 많은 예술인들이 이 옛 공업지대를 주거용 아파트로 삼기 시작하자 소호 구역에서는 일명 ‘로프트 임대법 (Loft Law)’이라는 부동산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저가 임대료를 모색하던 예술인들은 물론 미술 화랑업자들, 대중 음악가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이 동네를 급속도로 채워나가기 시작했고 이를 간파한 부동산업자들이 1980년대 부터 본격적으로 이스트빌리지를 예술인의 구역으로 홍보하면서 지가 상승을 부추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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