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painting

기상예보에 따르면 2017년-18년 겨울은 매섭게 추울 것이라 한다.

옛 그림으로 보는 小 빙하시대 경치

MINI ICE AGE BY 2030

현대인들은 오늘날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고를 귀아프게 듣고 살고 있다. 하지만 향후 15년 지구상의 인류는 오히려 소 빙하시대를 맞게 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주장한다. 370년 전 지구가 마운더 극소기(Maunder Minimum)에 경험했던 것처럼 태양의 활동이 급속하게 줄어들어 2030년 경이 되면 태양의 활동이 지금보다 60%가 감소하게 되며 겨울은 더 추워지고 잘 얼지않는 작은 냇가도 꽁꽁 얼어붙을 것이란 전망이다. 지금부터 370년 전, 그러니까 마운더 극소기에 속하던 1650-1700년대 소 빙하기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사람들은 이 혹독한 기후 속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Pieter Bruegel the Elder, The Census at Bethlehem, c. 1566[1], Oil on panel, 116 cm × 164.5 cm (46 in × 64.8 in). 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 Brussels.

플랑드르 출신의 거장 풍속화가 피터 브뢰겔이 그린 일련의 겨울철 풍경화들은 소 빙하시대 북유럽의 겨울철을 잘 보여준다. 16세기 중엽은 이른바 소빙하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유럽에 극심한 한파가 휘몰아친 시기였다. 고기감을 구하기 위한 농군들의 사냥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인 듯해 보이지 않지만, 겨울철의 한 순간을 묘사한 이 그림 속에는 왠지 알 수 없는 영원불변의 겨울 경치의 아련한 추억을 자아내는 구석이 있다.

Continue reading

플랑드르 정물화 정체성 선언

플랑드르 정물화 감상하기

REVIEW FLEMISH STILL LIFES from the Kunsthistorische MuseumWien, from March 18 till July 21, 2002.

이제까지 미술사 학계와 미술 전시회 등은 “네덜란드의 정물화”라는 주제로 통칭해 온 연유로 해서, 정물화(still-life)라는 회화 장르의 본령은 네덜란드 미술이라는 광범위한 지리적 범주 속에 두리뭉실 포함되어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빈에서는 그처럼 널리 받아들여져 온 전제에 도전하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어 미술계와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플랑드르 정물화 전시가 열리고 있는 빈 미술사 박물관 하라흐 궁 입구. 사진: 박진아.

독일출신 미술사학자인 클라우스 에르츠(Klaus Erts)가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과의 협력으로 수년간의 학술연구 끝에 기획한 이 전시에서는 플랑드르 지방의 정물화는 기존 네덜란드 정물화로 알려져 있는 회화 장르와서는 차별화된 회화 쟝르라고 하는 대명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같은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전세계 유명 박물관들이 소장중인 플랑드르 정물화 12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규명보고 있는 이 전시는 그런 점에서 그동안 뒷켠에 물러서 있던 플랑드르 정물화의 정체성 선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플랑드르 정물화의 기원을 찾아서 정물화의 역사를 거슬러 보게 되면, Continue reading

[디자인 정글] 우리는 관광객인가 여행자인가?

21세기 크리에이티브는 미래를 향한 여행자

Why Creatives Must be Travellers, not Tourists

med_Page_03_Image_0003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지구 북반부에 사는 수많은 현대인은 직장일이나 평소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휴가를 떠난다. 특히 7월 말부터 8월 초, 여름 날씨가 가장 더워지면 직장과 일상을 벗어나 평소 가보지 못한 낯선 장소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과거 가본 곳이 좋아 되돌아 가기도 한다.

어떤 이는 매일의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고, 또 어떤 이는 틀에 박히고 따분한 일상으로부터 잠시나마 탈피하여 새로운 자극과 경험을 찾으러 여행을 떠난다. 『디자인정글』 FOCUS, 2016년 8월 5일 자 Future of Design: 디자인 현재 창조적 미래 칼럼 제10탄 전체 기사 계속 보기. Go to article in Design Jungle magazine

Happy Valentines Day!

CUPID THE HONEY THIEF

큐피드는 꿀 도둑 – 고대 전성기 그리스 시대 시인 테오크리수트가 쓴 시에서 큐피드가 꿀벌통에서 꿀을 훔치다가 벌들에게 쏘이며 아프다고 어머니 비너스(사랑의 여신)에게 불평하는 순간을 르네상스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펜과 수채화로 그린 작품. 큐피드: “아야 아야! 엄마! 어떻게 이 작은 벌레들이 그토록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거죠?” 비너스: “하하~ 내 귀여운 아들아, 이제 네 화살을 맞고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지? 순간적인 사랑의 희열은 얼마안가 고통과 가슴앓이를 가져오는 법이란다.”

Cupid the Honey Thief by Albrecht Dürer, 1514, Pen and ink and watercolour on paper,
22 cm (8.7 in) x 31 cm (12.2 in). Collection: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The scene is taken from literature, specifically the poem Cupid Stealing Honey by the classical Greek poet Theocritus. The poem tells the story of how Cupid complains to his mother, Venus (the goddess of love), of how the bees sting him because he has stolen their hive. He wonders that creatures so small can inflict so much pain. Venus laughs and tells him that their stings can be compared to the wounds that he himself inflicts on all those hit by his arrows. The brief ecstasy of love may soon be replaced by suffering and heartbreak.

런던 백 년 전과 지금 달라진게 있나?

막대그림 그림 거장 LS LOWRY – The Match stick master at the Tate

영국 화가 로렌스 스테븐 로리(Lawrence Stephen Lowry, 1887-1976)의 그림을 감상해보자. 일명 ‘성냥개피(matchstick)’ 그림으로 유명한 로리는 20세기 전반기 영국 수도 런던과 북구 영국에서 급속히 벌어지던 산업화, 도시화, 공장화 풍경을 그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다섯번이나 제영제국4등훈장과 기사작위를 받았지만 매번 거절했던 굳은 신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궁중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즈

VELÁZQUEZ IN VIENNA

작년 2014년 10월 말 비엔나의 미술사박물관에서는 바로크 시대 스페인 궁중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즈 전을 열어 스페인 합스부르크 황실가 가족들의 모습을 초상화로 다시 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오늘날 대중 미술사 서적 마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던 화가 겸 거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디에고 벨라스케즈. 19세기말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벨라스케즈를 가리켜 ‘화가중의 화가(painter of painters)’라며 프랑스 인상주의의 선구자라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재조명 받기 전까지 실은 서양 미술사에서 오래 잊혀져 있던 유럽 역사 속 궁중화가중 일인에 불과했다.

Workshop of Diego Velázquez 『King Philip IV of Spain』 c. 1653–1656/59, Oil on canvas, 47 x 37,5 cm ©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디에고 벨라스케즈 아텔리에에서 화가와 조수들이 합작해 완성한 펠리페 4세의 초상. Workshop of Diego Velázquez 『King Philip IV of Spain』 c. 1653–1656/59, Oil on canvas, 47 x 37,5 cm ©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20세기 근대주의 대두 이전까지 절대주의 귀족주의가 지배하던 유럽에서 미술을 포함해 각족 공예, 음악, 문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창조 예술 분야에서 먹고 살아야 했던 재능있는 예술가들 사이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귀족집안, 왕가, 황실, 교회에 전속돼 권력자를 섬기며 작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예스럽고 안정된 생계 수단이었다.

천재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서로 경쟁하며 메디치 가문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활동했고, 모차르트가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로 올라와 합스부르크 황실 음악가가 되길 그토록 갈망했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유럽이 배출한 걸출한 천재 예술가들은 소명적으로는 신이 내려준 재능을 한껏 발휘해 천상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구현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데 혼신을 바친 위대한 창조가들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생활인이었기 때문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즈(Diego Rodri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는 스페인 남부 도시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태생이나 포르투갈에서 이민온 유태인계 포르투갈 부모 밑에서 카톨릭 교회 세례를 받았으며 소귀족 출신이었던 이유로 해서 벨라스케즈는 당시 스페인을 한바탕 공포로 휘몰아 넣었던 스페인 종교 재판으로부터 수난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유복한 환경에서 일찍이 갓 열 살이 넘은 나이로 철학책을 보고 화가 프란치스코 파체코(Pacheco) 수하에서 그림그리기를 공부하며 화가 수련을 받기 시작했다.

Diego Velázquez 『The Waterseller』 c. 1622, Oil on canvas, 107,7 x 83,3 cm © London, Apsley House, The Wellington Collection English Heritage

벨라스케즈의 초기 작품 『물장수』는 허름한 연인숙, 주점, 주방 풍경을 묘사한 보데고네스 장르의 그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바로크 시대 화가 카라바죠의 영향이 엿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Waterseller』 c. 1622, Oil on canvas, 107,7 x 83,3 cm © London, Apsley House, The Wellington Collection English Heritage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 했듯, 스승 프랑치스코 파체코 보다 그림그리는 재능이 한층 특출났던 갓 스무살 넘긴 젊은 벨라스케즈는 스승의 딸 후아나와 결혼하자 마자 그 연줄로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산티아고 교회를 거쳐 곧바로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궁중으로 그 이름이 알려졌다. 때는 마침 1922년 겨울, 합스부르크 왕가 필리페 3세와 4세가 가장 아꼈다던 왕실전속화가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가 세상을 떠서 그 자리를 메꿀 새 궁중화가 물색작업이 한창이던 시기. 절묘한 시운과 스승이자 장인 파체코의 연줄의 축복을 한껏 받고 24세의 디에고 벨라스케즈는 초봉 50 두카트(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200-250 만원) 받는 궁중전속화가로 전격 발탁된 이후 예순살로 세상을 뜰 때까지 40년 넘게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궁중화가로 한평생을 봉사했다.

모든 궁중화가의 최우선 임무는 두 말 할 것 없이 왕과 왕가 가족과 친지들의 공식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다. 요즘과 달리 장거리 여행을 자주하기 어렵던 과거, 스페인 마드리드와 오스트리아 비엔나 두 곳에서 2중 왕실을 거느렸었던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황실은 멀리 떨어져 있던 유럽의 두 수도 사이 가문 친지들의 모습을 수시로 초상화로 그려서 주고받는 것으로써 안부를 확인했고 차후 서로 결혼하게 될 어린 새 후손들의 모습을 미리 확인했다. 오늘날 벨라스케즈의 명작 알려져 있는 작품들 다수는 마드리드의 합스부르크 왕실 가족 초상화이고 그러하다보니 그의 대표작 다수는 스페인의 프라도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Diego Velázquez 『Infante Baltasar Carlos with a Dwarf』 1631–1632, Oil on canvas, 128 x 101,9 cm © Boston, Museum of Fine Arts

펠리페 4세 왕과 이자벨 여왕 사이서 태어난 2살박이 발타자르 카를로스 왕자와 난장이 궁정광대가 있는 2인 초상화. 펠리페 4세는 이 귀한 아들 초상화를 벨라스케즈에게 특별히 맡겨 그렸는데 베네치아파 르네상스의 거장 화가 티치아노의 색감과 구도에서 영향받은 흔적이 뚜렸하다. Diego Velázquez 『Infante Baltasar Carlos with a Dwarf』 1631–1632, Oil on canvas, 128 x 101,9 cm © Boston, Museum of Fine Arts

지금도 비엔나 국립 미술사박물관에 남아있는 벨라스케즈의 합스부르크 왕가 초상화 작품들은 마드리드 왕실에서 선물로 보내왔던 가족 초상화들이다. 벨라스케즈를 궁중화가로 간택한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50대 초엽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비롯해서,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초상, 오늘날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펠리페 4세 왕의 딸 인판타 마가리타 공주의 성장과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초상화 연작들중 네 편을 통해서 벨라스케즈는 왕실 내 신하들간의 권모술수, 30년 전쟁과 경쟁 권력들로부터의 도전과 위헙, 병약하던 어린 왕자와 공주들의 건강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호사롭게 잘 다듬어지고 차밍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으로 왕가 일가족과 친지들을 그려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가 찬연하고 말끔하게 그려낸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초상화들의 이면엔 이 가문에 드리워질 암울한 미래가 감쪽같이 감춰져 있다. 벨라스케즈의 고용자 겸 후원자이던 펠리페 4세는 실은 스페인 왕국 최후의 왕이된 비운의 인물이었다. 포르투갈이 스페인 영토에서 분리독립해 나가고,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저마다 세력을 키워가자 한때 유럽의 주도 세력이던 스페인 왕국은 점차 군사적, 외교적, 문화적 권력 무대에서 종결을 순간을 맞고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가문은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후계자 생산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권력 분산을 막고 권력을 통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6백 여년 집권기 동안 가족친인척끼리만 결혼하는 근친혼인을 고집한 끝에 발생된 유전질환과 건강적 장애가 그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엄격한 위계체제와 근엄한 분위기라 내리누르는 궁정에서 해소 역할을 했던 궁정 광대. 벨라스케즈의 눈에 비친 광대란 실없음, 어리석음, 광기를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Buffoon Juan de Calabazas (Calabacillas)』 c. 1638, Oil on canvas, 106 x 83 cm ©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엄격한 위계체제와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가 내리누르는 궁정에서 긴장 해소 역할을 담당했던 궁정 광대. 벨라스케즈의 눈에 비친 광대란 실없음, 어리석음, 광기를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Buffoon Juan de Calabazas (Calabacillas)』 c. 1638, Oil on canvas, 106 x 83 cm ©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왕실 최후의 왕 펠리페 4세가 왕권 후계자 생산을 간절히 기다리며 새로 태어난 왕자와 공주들을 비엔나 합스부르크 왕실로 혼인시켜 대권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펠리페 4세와 첫 아내 이자벨 여왕과 오랜 노력 끝에 탄생한 첫아들 발타자르 카를로스는 안타깝게도 16살 나던 해에 갑작스럽게 죽었는데, 열 살 난 어린 소년의 발타자르 카를로스 초상화와 펠리페 4세가 간절히 기대했던 왕권후계자 아기 펠리페 프로스페로의 초상화는 비엔나 합스부르크 왕실에 보내 결혼을 제안하기 위해 특별히 벨라스케스의 손으로 그려졌다.

발타자르 카를로스의 누이이자 첫 딸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혼시키는 것으로서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을 잠재웠다. 펠리페 4세의 둘째 부인 마리아나 여왕과 낳은 인판타 마가리타의 2세, 5세, 8세 때의 초상화들은 장차 레오폴트 1세 황제가 될 비엔나 합스부르크 황태자에게 일찍부터 결혼을 제안하기 위해 보낸 맞선용 초상화였다.

번뜩이는 독창성과 독특한 스타일이 폭발했던 17세기 유럽문화 황금기 바로크 시대, 궁중화가 벨라스케즈는 과연 회화를 재정의한 거장 화가의 대열에 설 만한가? 비슷한 시기 로마에서 활동한 카라바죠의 격정과 파격적인 시각, 스페인 출신의 바로크 거장 주르바란의 강렬한 영혼성, 인간조건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표현한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의 깊이와 승화력, 베르메르의 고요하고 잠잠하되 애상적 시적 감성은 벨라스케즈의 회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허나 초기 시절 그가 즐겨 그렸던 ‘보데고네스(bodegones)’ 혹은 주방 정물화 그림들 중에서 『물장수(Waterseller)』 에 나타난 대담한 화면 구도라든가 유럽 미술사상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 여성 누드라 불리는 『화장하는 비너스(일명 로커비 비너스)』 같은 작품은 마네 같은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화면구성법을 구축하는데 영감을 주었을 만하다. 그런가하면 20세기 영국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벨라스케즈의 초상화 속 숨막히는 격식을 표현주의로 재해석해 초상 속 모델들을 해방시켰다.

Diego Velázquez 『Infanta margarIta』 (1651–1673) In a WhIte dress, c. 1656.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다섯살난 마가리타 공주. 이 초상화는 비엔나 합스부르크 황실에 사시는 할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 황제께서 보시라고 보내진 손녀 초상화였다. 거울에 반사되어 반대방향으로 서 있는 이 모습은 『시녀들』 그림에 재활용되었다. Diego Velázquez 『Infanta MargarIta』 (1651–1673) In a WhIte dress, c. 1656.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궁중화가 벨라스케즈의 평생 목표는 왕실 위계 속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작위를 받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독이 베네치아파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를 깊이 흠모했는데 특히 티치아노가 평생공로를 인정받아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 카를 5세로부터 작위 수여받은 것을 부러워했다. 실제로 벨라스케즈는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659년 필립 4세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고, 그 흔적은 그 유명한 그림 『시녀들(Las Meninas)』(프라도 박물관 소장)에 빼곡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화가 자신의 자화상에 빨강색 십자가로 기록되어 있다.

미셸 푸코의 책 『사물의 질서(Les Mots et Les Choses)』(1966년) 서론의 상세한 분석대상이 된 이래 무수한 학자들 사이의 논쟁의 주제가 된 그림 『시녀들』은 궁중화가로서 성취감에 찬 디에고 벨라스케즈의 자족한 자아를 한 폭의 그림으로 옮겨놓은 자랑스런 최종 이력서였다. 커리어리스트 디에고 벨라스케즈는 더도덜도 아닌 궁중 화가였고, 그의 그림은 오로지 그의 후원자 만을 위한 것이었다. 《벨라스케즈》 전은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에서 2014년 10월28일부터 2015년 2월15일까지 열린다. Images courtesy: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한 천재의 초상 – 렘브란트

REMBRANDT 400 in Amsterdam

화가, 데상가, 판화가 –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 시대(Dutch Golden Age)라고 불리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으로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거장 화가이다. 2006년은 거장 렘브란트가 태어난지 400년째가 되는 해로, 고국 네덜란드에서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세계적인 화가의 생일을 맞아 대대적인 전시회 및 문화 행사를 기획했다.

렘브란트의 작품들이 대거 소장되어 있는 암스텔담의 릭스무제움(Rijksmuseum)을 비롯해서 반 고흐 미술관, 렘브란트의 옛 거주집을 박물관로 전환한 렘브란트하우스(Rembrandthuis)는 물론이고 런던의 덜위치 갤러리, 베를린의 고전 미술관,  헝거리 부다페스트 미술관, 그리고 파리 주재 네덜란드 문화원인 커스토디아 재단(Fondation Custodia) 등 유럽 전역에서 거장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은 물론 그가 살던 17세기 네덜란드와 유럽의 정황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유익한 전시들이 올 한 해와 내년 초에 걸쳐서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는 신비와 마력으로 현대인들을 사로잡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그림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22세의 젊은이로서의 렘브란트 자화상. 1628년 작품. © Rijksmuseum, Amsterdam.

“세세한 것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지닌 화가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위대한 화가의 재능은 경이로운 것이다. 신은 위대한 화가에게 재능을 선사하여 그의 그림을 통해서 여느 사람들은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르네상스 시절 독일 출신의 회화의 거장이자 렘브란트의 선배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는 말한 적이 있다.

천재라는 개념에 대한 다분히 르네상스적인 정의로 들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신화 알레고리, 성서 해석, 역사화,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여러 장르는 넘나들며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한 렘브란트의 미술 생애는 끝없고 정처없는 탐험이었고 누가 뭐라해도 분명 탁월한 것이었다.

한 인간의 인성은 그가 타고난 여러 속성과 자질을 모두 도합한 것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말이 있다.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탁월한 기술적 재능 외에도 밝고 어두운 빛의 강한 대조를 통한 극적 분위기와 심오한 내면세계가 느껴지는 그림 속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오늘날까지도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적 조건(human condition)을 되돌이켜 보게 만드는 보편적 위력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패기 넘치는 22세의 곱슬머리 젊은이의 모습에서부터 삶의 무게와 내면적 고뇌를 머금은 60대의 노인의 모습까지 화가의 초상을 화폭으로 옮긴 자화상의 명인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렘브란트는 지금도 그의 삶과 작품 속에 깃든 신비에 매료를 느끼는 수많은 낭만파 회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사랑 받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네덜란드가 국가적으로 지정한 ‘렘브란트의 해’이다. 올[2006년] 여름 7월15일 토요일,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텔담과 화가의 고향 라이덴(Leyden)에서는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렘브란트의 400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내세운 국가적 문화 행사가 흔히 그렇듯 ‘렘브란트의 해’를 맞는 네덜란드에서는 렘브란트 스파게티와 초컬릿 등 렘브란트를 내세운 마케팅 홍보로 관광객 유치와 문화 상품 매출에 열을 올리는 상혼도 발휘되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어머니”(라이덴 라켄할 시립 박물관(Municipal Museum of Lakenhal), 올 3월19일까지 전시 마침) 展, “렘브란트와 카라바죠”(릭스무제움, 올 6월 18일까지 전시 마침) 展, 그리고 가장 최근 일반 관객에게 문을 연 “렘브란트-천재성을 향한 탐구”(현재 독일 베를린 고전미술 박물관(Gemäldegalerie Berlin)) 展을 통해서 미술계는 렘브란트에 얽힌 신비를 해독하고 이 거장이 예술 한 평생 동안 이룩해 놓은 미술사적 성과를 차분하게 종합 재평가 해 보는 기회로 삼고 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역시 네덜란드 출신의 동료 거장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의 경우와는 다르게 렘브란트의 일대기와 행적은 기록으로 잘 보존되어 있고 따라서 렘브란트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이미 많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의 일생과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도 속시원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은 남아 있다.

흔히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렘브란트는 그의 극적이고 신비로워 보이는 회화 작품들만큼 평생을 빈곤과 투쟁하며 그림을 그렸던 낭만적 화가였을까? 렘브란트는 유태인이었나? – 생전 화가는 유태인 출신의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와 랍비 메나세 벤 이즈라엘과 친하게 지냈으며 <유태인 신부(The Jewish Bride)> 같은 유태인 주제의 작품을 여러편 남겼다는 사실에 미루어 그가 유태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일각의 추측이 일기도 했는데, 이 같은 의문점을 화두로 삼아 네덜란드의 유태인 역사 박물관(Jewish Historical Museum)에서는 오는 11월부터 내년 초까지 “유태인 렘브란트(The Jewish Rembrandt)’라는 전시가 개장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렘브란트는 수많은 제자와 화실 조수들의 도움을 많이 본 화실 지휘자였다. 그로 인해서 ‘렘브란트의 작업실 (Rembrandt’s Laboratory)’로 불린 대규모 아텔리에를 운영하며 제자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밀려드는 그림 주문에 응했는데, 그 결과 지금도 렘브란트의 진품(眞品) 판정 기준을 세우는데 전문가들을 혼란케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in a Cap』 1630 Etching, 51 x 46 mm. Gift of J. P. Morgan, Jr.

눈을 끄게 부릅뜬 서른살 난 화가의 자화상 또는 원제 『모자를 쓴 화가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a Cap)』 1630
Etching, 51 x 46 mm. Gift of J. P. Morgan, Jr. © The Morgan Library & Museum.

그래서 렘브란트와 그의 작품세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단체인 램브란트 연구 프로젝트(Rembrandt Research Project)을 이끌고 있는 에른스트 반 데 벤터링(Ernst van de Wentering) 관장은 “그동안 대중 매체를 통해서 미화되어 오던 신비로운 인물로서의 렘브란트의 이미지를 접어두고 신선한 시각으로 이 화가의 예술적 창조력과 내면적 동기가 어떻게 작품으로 표출되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르멘조온 반 라인 렘브란트(Harmenszoon van Rijn Rembrandt)는 1606년 7월 15일 라인강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 라이덴(Leiden)에서 제분업을 하는 중산층 집안의 열 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강가 주변에 그림처럼 서 있는 풍차가 있는 전형적인 목가적 풍경 속에서 성장한 그는 학자가 되길 기대했던 부모의 바램에 따라 라틴어로 학습하는 인문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나 결국 맘 속에 품어왔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17세부터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반 쉬바넨부르흐 밑에서 기초 그림 수업을 받은 후 보다 더 큰 물에서 그림을 배우고자 마음먹은 그는 수도 암스텔담으로 가서 당대에 유명했던 역사 화가 피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 밑에서도 6개월간 수학했다. 렘브란트의 불후의 명작이자 현재 릭스뮤제움의 한 전시실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대작 단체 초상화 <야간 경비(The Night Watch)>는 이 때 배운 역사화 구성 능력이 렘브란트의 본령인 초상화술과 한데 어우러져 창조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군계일학을 짚어내는데 능했던 당시 눈썰미 좋은 귀족들 덕분에 젊은 렘브란트의 남다른 재주는 일찍이 발굴되었다. 방년 19세의 청년 렘브란트는 분명 놀라운 재능을 발휘해서 고작 3년 반 가량의 그림 수업을 마감하고 고향 라이덴으로 귀향하여 동료 화가인 얀 리벤스(Jan Lievens)와 동업하여 개인 화실을 열었다. 22세 되던 해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왕가의 눈에 띄어 헤이그 궁전의 실내 장식용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이는 직업적 화가 렘브란트가 수주한 그림 주문 제1호이자 동시에 암스텔담에서 온 헨드릭 윌렌부르크(Hendrick Uylenburgh)라는 유력한 초상화 딜러와의 인연을 맺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청춘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했던가. 환희 펼쳐질 성공한 화가로서의 미래를 앞두고도 <22세의 젊은이로서의 자화상>(1628년 작)은 젊은 렘브란트의 또다른 내면을 암시한다. 렘브란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극적인 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 효과 즉, 강한 명암의 대비 기법이 잘 나타나 있는데, 자유분방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앳되어 보이는 통통한 뺨과 대조적으로 어둡게 가려진 눈매는 젊음과 촉망 받는 미래를 앞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떨고 있던 화가의 내면 한구석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성공적인 직업 화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위하여 암스텔담에서 화실을 개업한 방년 25세의 렘브란트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634년에 그의 아트딜러인 윌렌부르크의 여사촌 사스키아(Saskia)와 결혼했다. 사스키아가 귀족 출신의 여성이라는 잇점 때문에 렘브란트는 결혼 후 상류층 고객들로부터 그림 주문을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수주한 그림 주문 덕택에 큰 돈을 벌기도 했다.

렘브란트가 1656-58년 경 그린 이 자화상은 50살을 갓 넘긴 화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 Kunsthistorischesmuseum. Wien.

허나 비싼 집을 구입하고 값비싼 골동품과 옷을 사들이는 일을 좋아했던 화가의 낭비벽 때문에 곤혹을 치루기도 했는데, 지금도 네덜란드 관청 자료실에는 과거 렘브란트가 가족, 채권자들, 미술 후원자들은 물론 모델들과 얽혀 들었던 수십 건의 금전적 분쟁 기록들이 남아 있어서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미 서른 무렵의 나이에 결혼, 직업적 성공과 유명세, 사치스러운 생활을 경험한 그는 <눈을 크게 뜬 자화상>(1630년 작)이라는 판화 속에서 놀람, 환희, 슬픔 등 모순적인 인생의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묘하게 뒤섞인 채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렘브란트의 개인사를 연구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의 사생활은 그다지 본받을 만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렘브란트는 갓 서른을 맞는 아내 사스키아를 폐결핵으로 때이르게 잃었고 그 이후로 10년 가까이 붓을 들지 못했을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를 앓았다. 혹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이 그 같은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하지만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스키아가 죽은 후 렘브란트는 아들의 보모로 집에 들인 게르체 디륵스(Geertje Dircs)라는 여성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전 아내 사스키아의 사촌이자 딜러 윌렌부르크가 렘브란트로부터 그림 주문을 끊은 것이 렘브란트가 일을 못하게 된 진짜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디륵스와 지내는 동안에 22세난 젊은 여시종 헨드리케 스토펠스(Henrickje Stoffels)와도 바람을 피워서 게르체에게 위자료를 물어주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치와 무분별한 돈관리로 곤경을 겪고 있던 렘브란트는 결국 50세 되던 해에 파산 신고를 내고 갖고 있던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말았다.

보수적인 청교도적 신앙이 지배하던 당시 17세기 네덜란드 사회는 제아무리 천재 화가라 할지언정 절제력이 부족한 렘브란트를 고운 눈으로 봐 주지 않았다. 30대 초엽 잠깐 맛 본 부와 명성을 끝으로 그는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빚쟁이들에 쫏기던 가련한 화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으며 덩달아서 생전 그의 미술 세계는 거의 이해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는 사생활 보다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

그가 죽고 난 후 100년 후 18세기 말엽부터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극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낭만주의(Romanticism) 사조가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렘브란트의 자화상 연작들은 인간 영혼 탐색과 심리적 여정의 미술적 자취로써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2006년 400회째 생일을 맞아 신화나 신비의 베일을 벗고 다시금 전시회를 통해 재점검 받고 있는 렘브란트는 숨가쁜 일상 속의 현대인들에게 자아 숙고의 순간을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Photos courtesy: Rijksmuseum Amsterdam/Gemäldegalerie Berlin.

*이 글은 원래 『오뜨』 誌 2006년 9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고대 로마 - 게르마니쿠스의 재를 갖고 로마로 돌아오는 아그리파 (Ancient Rome; Agrippina Landing with the Ashes of Germanicus) 1839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윌리엄 터너 『고대 로마 – 게르마니쿠스의 재를 갖고 로마로 돌아오는 아그리파 (Ancient Rome; Agrippina Landing with the Ashes of Germanicus)』 1839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윌리엄 터너의 후기 회화 세계

LATE TURNER – PAINTING SET FREE At the Tate

2013년 영화화되어 큰 화재를 모은 스웨덴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장편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The Hundred-Year-Old Man Who Climbed Out the Window and Disappeared)』(2009년)은 창조적 마인드와 끊임없는 호기심과 생을 향한 열정이 있는 자에게 나이란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 장수하는 노년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 속에 있는 요즘 세상에서 노후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한편,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노년에 치닫더라도 유연하고 개방된 사고를 키우며 자연을 관찰하고 경외하며 동시에 과학적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류 정신을 되세기게 해준다.

윌리엄 터너 『빛과 색채 (괴테의 이론) - 홍수 이튿날 - 모세의 창세기 (Light and Colour (Goethe’s Theory) - the Morning after the Deluge - Moses Writing the Book of Genesis)』 1843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윌리엄 터너 『빛과 색채 (괴테의 이론) – 홍수 이튿날 – 모세의 창세기 (Light and Colour (Goethe’s Theory) – the Morning after the Deluge – Moses Writing the Book of Genesis)』 1843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영국 화가 조세프 메일러드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년✝) 또한 작업 말년기인 1835-50년 약 15년 동안 유난히 폭발적인 창조적 활력과 발군의 시각적 혁신을 이룩했다. 1835년 윌리엄 터너는 환갑을 맞았다. 누가 뭐라해도 이미 ‘장년의 나이’가 된 이 화가는 나이와 노쇄해진 체력에도 아랑곳 않고 더 큰 세상을 보고 역사를 공부하고 외국의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럽 전역으로의 긴 그림 여행길에 오르곤 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터너는 정말 모와 마티스에게 표현적인 색채, 뿌옇고 아련한 대기 분위기 연출하는 법을 가르친 근대미술의 선구자였을까? 일부 서양 미술사 책에 보면, 특히 그가 그린 말기 그림들에 보이는 극도의 추상적이고 물감을 두텁게 입힌 임파스토 기법을 들어서 터너를 19-20세기로 넘어가던 근대기 프랑스 인상파의 선각자인양 가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실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자연의 영원불변성을 그림으로 기록해 두고자 했다는 점에서, 시시각각 빛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외부세상을 포착하려 했던 프랑스 인상주의 세계관과는 정반대 입장을 취했다.

터너는 실은 고대 유럽 역사주의와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던 18세기형 낭만주의자였다. 터너가 환갑의 나이에 인류역사를 배우기를 계속하며 그림 그리기 열정을 불태웠던 당시 19세기 유럽은 근대 모더니즘이 본격화하기 직전, ‘질풍노도 (Sturm und Drang)’ 자연의 위력에 경외를 바치고 고대 로마 그리스 시대를 되돌아보며 흘러간 역사주의의 향수 속에서 시름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터너는 당시 독일인들의 낭만주의 서정을 한껏 적셨던 작곡가 리햐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와도 정서적으로나 세계관적인 측면에서 아주 유사했던 바그너리언이었다.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푸른 리지에서의 일몰 (The Blue Rigi, Sunrise)』1842, Watercolour on paper, 297 x 450 mm. Tate collection.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푸른 리지에서의 일몰 (The Blue Rigi, Sunrise)』1842, Watercolour on paper, 297 x 450 mm. Tate collection.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이라는 지극히 조촐한 배경의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 네살의 어린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아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해 그림 공부를 한 후 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교수로 발탁되며 노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사회적 존경까지 받았던 그는 내면적으로는 전근대적 인물이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어느새 근대적 업적주의의 장점을 누렸던 시대운을 잘 타고난 운 좋은 미술가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미술컬렉터가 제시한 거금의 돈을 거부하고 자신의 작품 모두와 스케치 및 기록물을 간직해 두었다가 테이트 미술관에 기증할 수 있었다.

영국  2014년 개봉된 영화 『미스터 터너(Mr Turner)』(티모시 스폴(Timothy Spall) 주연)에서 묘사되었듯, 땅딸막하고 무뚝뚝했던 화가 터너 씨는 혁명적이고 위대한 미술을 창조했지만 사생활 면에서 조촐하다 못해 때론 인격적으로 의심스러운 면모까지도 지녔던 한 남자였다. 이 영화를 만든 마이크 리(Mike Leigh) 감독은 과연 화가 터너를 훌륭한 미술가로 보여주려했던 것일까 아니면 단점을 지녔던 한 인간에 불과함을 보여주려 했을까? 이 영화의 의도는 그다지 중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훌륭한 미술가는 오로지 불타는 창조적 열정과 그나 남긴 훌륭한 미술작품을 통해서 역사와 관객에게 평가받을 뿐이므로.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서 열리는 『터너의 후기 회화 – 회화를 해방시키다. (Late Turner – Painting Set Free)』 전은 2014년 9월10일부터 2015년 1월25일까지 테이트 브리튼 린버리 갤러리에서 전시된다. Images courtesy: Tate Britain, London.

그래도 미술은 계속된다.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1868–1926), 『죽음의 무도 (Der Totentanz (IV. Version)』, 1915 Danse Macabre (version IV), 202 × 244,5 cm / Casein on canvas, Leopold Museum, Wien.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1868–1926), 『죽음의 무도 (Der Totentanz (IV. Version)』, 1915년, 202 × 244,5 cm / Casein on canvas, Leopold Museum, Wien.

제1차 세계대전 시대 오스트리아 미술

AND YET THERE WAS ART! – AUSTRIA 1914-1918

1914-1918년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은 근대기 급속히 진보한 무기 및 전투 기술에 힘입어서 그 이전 그 어떤 전쟁 보다도 잔인했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그야말로 ‘20세기 거대한 원초적 재앙 (great seminal catastrophe)’ 였다. 비참과 혼란으로 범벅된 이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미술은 계속되었다. 구체제식 제국주의, 글로벌리즘, 다인종∙다언어가 뒤섞인 다문화가 농익고 곪아터지며 서서히 구체제 종말을 맞고 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느 미술가들의 눈과 손을 통해서 어떤 미술이 전개되고 있었을까? 비엔나에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에서는 『그래도 미술은 계속되었네! (And Yet There was Art! – Austria 1914-1918)』 전을 9월 15일까지 열어 점검한다.

손님으로 여기를 왔더니 당신네는 나를 폭탄으로 환대하누나! –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소집 (Der Ruf)« 지 1912년11월호 전쟁 특집호 표지로 선정된 에곤 실레의 자화상, 22,8 × 14,8 cm / Letterpress. Private collection.

»소집 (Der Ruf)« 지 1912년11월호 전쟁 특집호 표지로 선정된 에곤 실레의 자화상, 22,8 × 14,8 cm / Letterpress. Private collection.

올해 20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100년이 되는 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중이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합스부르크 황실 황태자와 소피 폰 호헨베르크 황태자비가 열렬 보즈니아-세르비아계 해방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칩에 의해 저격당한 사건은 미술가들의 운명까지도 뒤흔들었다.

전쟁이 터지자 갑자기 미술 시장은 덩달아 침체되었다. 미술가들은 전쟁터로 징집돼 나가야 하는 슬픈 운명에 처했는데, 에곤 실레(Egon Schiele), 알빈 데거-린츠(Albin Egger-Lienz), 안톤 콜릭(Anton Kolig)은 바로 그런 미술가들이었다. 이탈리아, 루마니아, 러시아, 세르비아 국경으로 배치되어 최전방에서 전투에 임하며 그림 그리기를 계속했던 이들의 눈과 손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제1차 세계대전의 파멸과 광기가 기록되었다.

전쟁 포고와 징집 선전
1912년 2월부터 1913년 11월까지 근 2년 동안 총 7부를 찍어 남성 인구로부터 징병을 호소하기 위해 출판되었던 『소집(Der Ruf)』 지는 전쟁이란 “파괴적인 재앙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카타르시스적인 기회”라고 전쟁의 의미를 재정의했다. “전정은 피를 통해서 세상에 온다”고 외치며 전쟁을 선동하고 징집을 독려하는 이 잡지 속 기사들은 종종 강렬한 원색과 격정적 필치가 주특성인 표현주의 미술을 활용하기를 좋아했다. 나태와 게으름에 빠진 중산층들을 백일몽에 빠진 정신상태로부터 흔들어 깨우는데 전쟁 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고 외쳤으며, 미술가들은 보는이의 감정을 건들고 뒤흔드는 미술로 이 안일에 빠진 인구를 일깨우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전쟁에 동원되기에 이른다.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 »병든 러시아 군 (Kranker Russe)«, 1915년, 43,6 × 30,4 cm, Black chalk, gouache on brown paper, mounted on Japanese paper. Leopold Museum, Wien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
»병든 러시아 군 (Kranker Russe)«, 1915년, 43,6 × 30,4 cm, Black chalk, gouache on brown paper, mounted on Japanese paper. Leopold Museum, Wien

전쟁은 죽음의 무도회(Danse Macabre)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다” – 프란츠 카프카는 충격에 쌓여 소리 높여 절규했고, 극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는 “세계 전쟁. 세계 파멸.”이라고 응축했다.

보통 예술가들이란 대체로 전쟁 같은 죽음과 처참의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 민감한 감성의 족속들이지만, 알빈 에거-린츠(Albin Egger-Lienz)는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 직전인 1915년에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자진 지원해 입대했다. 전쟁을 “운명의 무자비한 행보”로 보았던 그는 심장 건강이 좋지못해 입대 면제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입대를 고집해 황실 지정 전쟁 홍보실 미술단(Kunstguppe der k.u.k. Kriegspressequartier)에 정식 회원이 되어 1916년 오스트리아 남단 이탈리아 국경에서 근무하며 전투 장면을 프레스코풍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을 했다.

적군에 대한 연민, 인류 보편에 대한 동정
“나는 이제 군인이 되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14일을 보냈다네.” 1915년 군대 징집되어 훈련을 받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에곤 실레에게 전쟁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운 경험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였던 점이 참작되어 실레 역시 황실 전쟁 홍보실 미술단으로 편입되어 전투 최선전으로 내몰리지는 않았다.

그가 미술단에서 주로 담당했던 임무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적군 러시아 포로들의 초상과 생활상을 두루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복무중 쓴 편지에 보면 러시아 포로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과 평화주의로 그득했던 실레의 심성을 엿볼 수가 있다. “아뭏든, 나는 적군 쪽에 훨씬 더 마음이 간다네. 그들의 나라는 우리 나라 보다 월등히 흥미롭더군. 진정한 의미의 자유도 있고, 여기선 찾아보기 어려운 생각 깊은 사람들도 더 많다구. 매 시간 마다 이곳에서 그런 사람들이 썩고 있다니, 이건 손실이라구. …”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 『원칙 "자유, 평등, 형제살 (Das Prinzip (»Liberté, Egalité, Fratricide«), 1918년, 41,2 × 31,2 cm / Color lithograph on paper Leopold Museum, Wien © Fondation Oskar Kokoschka/Bildrecht, Wien 2014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
『원칙 “자유, 평등, 형제살상” (Das Prinzip (»Liberté, Egalité, Fratricide«), 1918년, 41,2 × 31,2 cm / Color lithograph on paper Leopold Museum, Wien © Fondation Oskar Kokoschka/Bildrecht, Wien 2014

실존적으로 힘들었던 전쟁기는 실레에게는 예술적인 돌파력을 안겨줬는지, 특히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던 1917-18년이 되자 그의 작품들은 과거와는 달리 인생, 공포, 좌절, 죽음 같은 멜랑콜리적이고 위태로운 요소를 한결 제거하고 한결 조형적이고 기하학적 위주로 그림을 그리며 작품성을 한결 드높여 미술계의 총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꿈도 잠시.

전쟁이 막 끝나기 전 실레는 1918년 2월 클림트의 임종을 지키며 임종 초상을 그렸고, 그 자신 전쟁이 끝나자마자 같은 해 가을 유럽에서 창궐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28세라는 때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존재의 고통, 전쟁의 트라우마
그런가하면 독자적인 표현주의 그림을 그리던 오스카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최전방에서 기갑군으로 싸우면서 육체적 부상과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고 돌아와 전쟁의 참혹함을 되세기는 격렬한 그림을 계속해 그렸지만 끝내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전쟁통의 우울을 미술로 표현한 또다른 화가 안톤 콜릭(Anton Kolig)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마자 전쟁을 피해 망명하려 애쓰다가 어렵사리 이탈리아를 경유해 남 프랑스로 피신했지만 결국 1916년 전쟁 기록 화가로 일하게 되었다. 그가 특히 많이 그린 그림은 포로 수용소에 감금된 적군 지휘관들의 초상화였으나 그의 그림은 너무도 솔직했던 나머지 전쟁 홍보용 그림으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대신 콜릭는 전투 장면이 담긴 최전방 풍경화를 잘 그려서 1917년 황실 전쟁 홍보실 전속 화가로 위촉되어 전쟁 기록화를 다수 그려 남겼지만, 전쟁통 내내 “나는 막중한 고통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고통스러워 했다.

20세기를 연 전 세계적 글로벌 전쟁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되었던 미완의 전쟁 –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에서 참혹하고 무지막지한 혁명의 고비였다. 그러나 현재의 눈에서 본다면 구체제 절대주의를 청산한 유럽의 체재 변혁기이자 전 인류를 계급의 ‘감옥’으로 해방시켜준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미술은 평화기이든 전쟁기이든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클림트 풍경화가로 다시보기

GUSTAV KLIMT’S LANDSCAPES

올해[2002년]로부터 약 2년전인 2000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에 자리한 갤러리 벨베데레에서는 《구스타브 클림트와 여인들》展이 열려 이곳 국내외 미술애호가들의 큰 관심을 끌었던 바 있다. 벨베데레 갤러리가 있는 벨베데레  궁은 오스트로-헝거리 제국 시절 1714-22년 무려 8년에 걸쳐서 사보이의 오이겐 왕자가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바로크 양식 궁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립 미술관으로 지정되었는데, 클림트를 비롯해서 에곤 쉴레, 리햐르트 게르스틀, 오스카 코코슈카 등 19-20세기 전환기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Continue reading

미술을 통해 본 결혼의 모습 어떻게 변했나

Rembrandt van Rijn 『The Jewish Bride』, 1667. Rijksmuseum Amsterdam

Rembrandt van Rijn 『The Jewish Bride』, 1667. Rijksmuseum Amsterdam

WEDDINGS THROUGH THE AGES

19세기 미국의 정치가, 과학자, 저자였던 벤자민 플랭클린 (Benjamin Franklin)에 따르면 모름지기 „결혼이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로 행복한 상태“라고 했다. 남남이 만나 평생 동안 함께 할 것을 맹세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계약 관계이기도 한 결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경험하기도 하는 결혼은 생노병사(生老病死)와 희노애락(禧怒愛樂) 인생살이에서도 빼놓은 수 없는 인생여정의 한 과정인 만큼 예식으로서의 결혼식이란 즐비한 먹거리로 손님을 대접하는 만찬 (feast)과 축제 (festival)를 열어 신랑과 신부의 미래를 한껏 축복해 주는 잔치이다.

After_the_Prom_norman-rockwell-1957

“나와 결혼해 주겠소?” 노먼 락웰 (Norman Rockwell)이 1957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The Saturday Evening Post)》誌 표지에 기고했던 일러스트레이션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 이후 (After the Prom).

개인주의 의식의 발현으로 두 남녀 [※2000년부터  네덜란드에서는 동성의 결혼도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개인이 구애와 연애 끝에 사랑과 신뢰라는 가치관을 주축으로 해서 결혼이라는 평생 언약식을 올리는 결혼식이란 20세기 후반기에 와서야 널리 보편화된 현상이었다.

허나 그 이전까지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에게 결혼이란 종교적 사회적 통합과 평화 유지, 경제적인 교환 가치, 자손 대잇기 같은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략 결혼, 신부 매매, 신부 도둑질 관습을 두루 지칭하는 인간사회 내 각종 형태의 부족간 혹은 가문간의 짝짓기 관행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결혼식이라는 의미로 널리 일반화된 웨딩 (wedding)이라는 단어는 본래 18세기 영국에서 신부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과 신랑을 결합을 알리는 공식 행사를 직접 주간해 딸자식의 보호와 책임을 다른 가족 출신 남성에게 이전하는 신부 이행 예식 (ceremony)을 일컫는  ‚비웨딩 (bewedding)’ 예식에서 유래했다지 않는가.

dionysusariandnewedding

이다산에서의 제우스와 헤라의 결혼.

인류의 역사 아주 오래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유태교 전통에서는 남녀 간의 성적·사회적 결합을 종교적이고 법적인 차원에서 인정하기 위해 결혼식이라는 예식을 중히 여겨 실시했다 한다. 그같은 전통은 예수가 살았던 초기 기독교 시대 기원 후 한 두 세기 그리고 이어서  고대 로마 시대로 계승되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신중의 신 제우스가 사랑의 여신 비너스와 이다산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은 고대 로마 시대 실내 장식용 벽화로 그려져 지금도 이탈리아 나폴리에 남아있다. 최고의 신과 여신이 결혼 서약을 하는 그 고결한 맹세에도 불구하고 사랑, 기쁨, 배신, 질투가 뒤섞인 인간의 모험 넘치는 격동의 결혼생활을 암시하는 듯 하다. 아틀란타와 히포메네스, 술의 신 디오니수스와 아리아드네도 결혼을 했는데 (그 장면을 그린 그림은 폼페이에 있는 빌라 데이 미스테리 프레스코 벽화에 남아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 로마 시대의 결혼식에서는 결혼의 신 히메나에우스 (Hymenaeus)를 기리는 결혼시(詩)가 읊어졌다고 한다.

ch_062sm

마르크 샤갈 『산보 (Promenade)』1917년 작, 캔버스에 유채, 170 x 164 cm (66 15/16 x 64 9/16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한편 유대교 신자들은 결혼식에서 온갖 다채로운 축하 무용을 발달시켜 온 것으로 유명한데, 그같은 흔적은 유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 (Fiddler on the Roof)』에 나오는 결혼식 장면이라든가, 화가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이 결혼과 결혼한 남녀를 주제 삼아 즐겨 그렸던 환상적인 분위기의 유화 그림들에서도 발견된다.

고대 유태인은 결혼식 만찬에서 신랑이 신부와 춤을 추는 것은 반려자를 향한 헌신 (devotion)의 표시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들의 문화권에서도 남녀칠세 부동석 원칙이 철저했던 중세시대에는 각각 신부와 신랑은 같은 성의 초대 손님들과만 춤을 출 수 있었지만 점차 그같은 규칙이 느슨해 져서 손과 손에 손수건을 대고 신랑신부와 남녀 객빈들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춤을 추는 풍습이 일반화되었다.

유대교 초기 기독교, 로마 카톨릭교, 불교 등 인류 초기 역사에서 번성했던 주요 종교들을 보면 언제나 성직자나 신앙인들의 종교적인 성생활 금지 원칙으로 인한 성적(性的) 긴장이 항존했던게 사실이다. 종교에 귀속한 남녀 수도승들이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수도원에 은적하며 수도에 전념하는 것을 신과 일대일의 상징적 결혼식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일반 신도들은 일부일처제의 결혼 서약을 통해서 부부의 화합을 고결하고 성스러운 평생의 헌신 행위로 발전시킨 것이다. 인류의 주요 종교가 결혼한 상태 혹은 기혼자를 미혼 상태나 미혼자들보다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게 된 기원도 바로 여기에서 기원하는 바가 크다.

예컨대, 고대 유대교 율법서 『탈무드 (Tamud)』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자(남성)는 살인자와 같으며 신의 형상을 짓밟는 자이다“라고까지 했으며, 조로아스터교에서 사용되는 성전인 아베스타 (Avesta)에서도 „결혼한 자는 결혼하지 않은 자보다 신분상 우월하다“라는 유사한 언급이 나타나있다. 그러니 결혼한 자는 지역사회와 가족친지들에게 책임감있고 독립적인 성인으로 인정받는 그같은 통념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인류 보편의 집단의식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Kulturgeschichte / Liebe / Hochzeit / Hochzeitsfeier

얀 스테엔 『농군의 결혼 피로연 (Country Wedding)』1670년, 57 x 68 cm.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Gemäldegalerie.

과거 시절의 결혼의 개념은  세월이 지나고 역사가 발전해 온 결과,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결혼이란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 행복, 그리고 미래를 향한 모험이라는 애정이 위주가 된 일부일처제 언약 관계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기 기독교 시대 예수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신약성서 계시록에 등장해 특히 일부다처제가 일반화되어 있던 고대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사실상 결혼이라는 제도는 기독교 교리에 의해 최초로 남녀의 관계 더 나아가 부부를 위주로 한 가족 관계와 자녀의 부양을 종교적이고 영적(靈的)인 단계로 격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다.

무릇 „…결혼식과 연회 잔치는 손님많고 먹을 것 많은 즐거운 생사이어야 하며 신랑신부의 첫날밤 침실은 선하고 성스러운 것이 될지어다…“라고 한 신약 에페지안서 5장 내용처럼 결혼식 잔치와 부부의 화합은 기독교의 축복을 잔뜩 내려 받은 인생 관례 행사가 되었다.

서양에서 신랑신부의 결혼식 복장과 첫날밤 침실을 흔히 아담과 이브의 형상, 생명의 나무, 금슬좋은 쌍쌍새 등과 같은 상징성 깊은 문양들로 장식해 성스러운 분위기로 연출하곤 했던 것이나 결혼하는 신부에게 값진 가구나 세공장식품을 선물해 보내는 풍습 등은 딸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오동나무를 심어 혼수가구를 준비하고 혼수품을 준비해 시집보내거나 혼인 첫날밤을 중요하게 여기는 옛날 우리나라 풍습과 아주 흡사하다.

marriagefeastvenice-300x205

쟈코포 로부스티 틴토레토(Jacopo Robusti Tintoretto)가 그린 『가나에서의 결혼 만찬』 1561년, 캔버스에 유채, 4.35m x 5.45 m. 베네치아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 (Sacristy of the Chiesa di Santa Maria della Salute, Venice)의 주문을 받아 그려 바쳐진 이 그림은 현재에도 이 교회의 성물안치소에 남아있다.

„양고기 저녁상에 초대된 자들이야말로 축복받은 자들일지어다“ [계시록 19장9절]라고 한 말에서 예수는 메시아 – 즉,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난 예수 자신 – 의 선택을 받아 구원받은 자들은 양고기가 있는 저녁 식사에 초대될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저녁 식사상을 두고 혼인 축하연 (Wedding Feast)이라고 비유하곤 했다.

여기서 예수는 구약성서 창세기 부분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과 사라 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해 하나의 육신이 된다고 설파함으로써 일부일처제의 정당성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서양 초기 기독교 시대와 중세기 이후로 르네상스기까지 카나에서의 결혼 만찬 (The Marriage Feast of Cana)이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기도 했던 인기 주제이기도 하다.

데이비드와 바드셰바의 결혼식 만찬 도중 초대석에 앉아 있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 잔치의 주인이 부끄러운 곤경에 처할 것을 우려하여 아들 예수를 시켜 잔치상을 포도주와 음식으로 가득채우는 기적을 행하게 한다는 성서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이 바로 『카나에서의 결혼 만찬』이다.

Raffaello, Spozalizio (The Engagement of Virgin Mary), 1504. Oil on round-headed panel, 170 x 117 cm. Pinacoteca di Brera, Milan.

라파엘로 (Raffaello), 《성처녀 마리아의 약혼식 (“La Spozalizio” (The Engagement of Virgin Mary)》 1504년. Oil on round-headed panel, 170 x 117 cm. Pinacoteca di Brera, Milan.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했는데 신부의 처녀성과 결혼과 가족의 성스러움을 중시했던 서양 기독교와 기독교 미술은 이같은 놀라운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성서에서도 흔히 발견되듯 마리아의 몸을 빌어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때어난 예수는 어머니를 향해 „여인이여, 나와 무슨 용건이 있는가?“ [요한서] 라고 했을 정도로 어머니 마리아와 거리를 두었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칭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에서 마리아 신앙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고대 지중해 지방에서 비기독교 이교도들이 급격히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기원후 400-500년도부터 비로소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성처녀“ 혹은 „성모“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숭배의 대상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예수의 생애를 묘사한 중세 기독교 미술과 르네상스 미술에서는 „마리아의 결혼식 장면(Wedding Procession 또는 Marriage of the Virgin)“  „수태고지 (Annunciation)“ „예수 탄생과 동방박사의 방문 (Adoration of Magi)“ „성처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 (Virgin Mary and Jesus)“상을 통해서 마리아는 하나님이 육신화한 예수를 낳아 준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으로 나타났고, 특히 [마리아의 결혼식 장면을 그림 작품]들은 서양 중세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결혼식 풍경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자료가 되어 준다.

arnofini_vaneyck-220x300

얀 반 아이크 『아르놀피니의 결혼』1434년, 떡갈나무판 위에 유채.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역시 르네상스 시대이지만 장소를 바꾸어 북구 유럽으로 잠시 눈을 돌려 보자. 네덜란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거장 화가 얀 반 아이크 (Jan van Eyck)의 걸작 『아르놀피니의 결혼(Arnofini Marriage)』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은 르네상스 미술사가들 사이에서 미술 속의 도상과 상징 연구에 즐겨 활용된 바 있는 의미심장한 작품이자 화가의 탁월한 묘사력과 손재주로 보는이의 감탄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귀족이자 난봉꾼으로 이름이 자자했던 아르르놀피니가 결혼 서약을 하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려진 이 그림 속의 두 신랑신부는 사랑 보다는 경제적 사회적 필요에 의한 계약으로써의 결혼이 널리 행해지던 당시 15,6세기 유럽의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충직과 헌신을 상징하는 개,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 평탄치 못할 결혼의 미래를 예견이나 하듯 고개를 삐딱이 기울이고 있는 신부의 모습 등에서 보는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묘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특히 국제 무역과 상업으로 경제적인 부흥을 한껏 경험했던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신흥 부유층의 높아가는 수요에 부응해 풍속화가 널리 유행했다. 그림을 주문한 고객의 희망사항에 따라서 가문의 넉넉함을 자랑하기 위한 과시용 장식품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 혹은 낭비, 방탕, 무절제의 악덕을 꼬집고 풍자하는 교훈 그림으로 그려져서 집안 거실이나 식당 벽에 걸어 장식되기도 했다.

Pieter_Brueghel_the_Younger_Peasant_Wedding_Dance_1623_320px

피터 브뢰겔 아들 (Pieter Bruegel the Younger), 『농군 결혼 잔치 (Peasant Wedding Dance)』1623년, 목판에 유채. 개인소장.

인물 초상화, 우리나라 조선 후기의 민화처럼 집안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정물화, 그리고 집주인이나 아녀자들의 생활상이나 농부나 시녀의 일상을 묘사한 풍속화 등 집안 장식용이나 게으름, 방탕, 낭비를 말라는 훈계용 그림들 가운데에는 농가나 하층계급자들이 모이는 주점이나 실내를 배경으로 한 결혼 피로연이나 춤잔치를 묘사한 작품들이 즐겨 발견된다.

일찍이 히에로니무스 보시 (Hieronymus Bosch)를 비롯해서, 페터 브뢰겔 (Peter Bruegel), 얀 스테엔 (Jan Steen) 같은 바로크 시대 풍속화가들이 그린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결혼식 장면 묘사는 초대된 수많은 하객들이 음(飮)과 주(酒)를 한껏 즐기며 진탕하게 노는 축제를 묘사했다. 이 그림들의 도상적 뼈대는 분명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에서 즐겨 등장하던 성서 속 카나에서의 결혼 연회 일화에서 빌어 온 것이다.

the-wedding-party-1904-henri-rousseau

앙리 루소 (Henri Rousseau) 가 그린 『결혼 잔치 (The Wedding Party) 』 1905년 경, 캔버스에 유채, 163.0 x 114.0 cm. Musée de l’Orangerie, Paris © Photo RMN – C. Jean.

18-19세기 서양 문명은 귀족주의 체제가 서서히 그 쇠퇴을 길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근대적인 사고와 과학의 발전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모더니즘과 개인주의 의식이 폭발적으로 번지기 시작한 19세기말-20세기초 세기전환기 유럽, 드디어 결혼이란 소수의 상류지배계층이나 평민족들에 할 것 없이 부족들 혹은 가문들 사이의 사회적 윤활과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 더이상 아니라 사랑의 결실이자 새인생 출발을 위한 두 자유로운 개인 간의 선택과 의지의 상징이라는 근대적인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란 사회적 약속이자 관례로 남아있다. 19세기 스페인 절대주의의 잔학성과 인간의 어두운 면을 그림으로 고발했던 고야 (Francisco de Goya y Lucientes)의 『결혼식 (The Wedding)』은 갓 결혼의 서약을 마친 행복한 신랑신부의 모습 보다는 특에 박힌 제도와 맹목적인 복종의 틀에서 맴도는 딱한 하층계급인들의 일상 속의 한 단면을 포착한다.

결혼이란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두 남녀가 평생을 함께 하리라는 맹세이자 의식적인 개인 의사 표시가 된 오늘, 미술은 점차 결혼식의 황홀감과 결혼 생활의 행복을 표현하게 되었다. 20세기초 프랑스의 에뒤아르 루소 (Eduard Rousseau)의 『결혼식 (The Wedding)』은 천진난만한 아름다움을 안겨주며, 마르크 샤갈의 『결혼식 (The Wedding)』이나 『산보 (The Stroll)』는 결혼식 혹은 결혼한 상태는 환상적이고 행복함을 넘어 성스럽기까지한 남녀의 화합임을 잔뜩 강조하는 그림들이다.

* 이 글은 본래 『오뜨 웨딩 (Haute Wedding)』 지 2003-2004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영원한 에로스

Klimt and Women

클림트와 연인들 전 | 2000년 9월20일-2001년 1월7일 |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클림트와 여인들 전〉은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언젠부턴가 클림트는 모네, 반 고호, 피카소 등과 함께 미술상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기작가의 대열에 서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에 대해 잘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Gustav Klimt Judith I, 1901 Öl auf Leinwand 84 x 42 cm

구스타브 클림트 <유디트 I (Judith I)> 1901년 작, 캔버스에 유채, 84 cm × 42 cm Courtesy of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Wien.

196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첫 구스타브 클림트 회고전에 이어, 1986년 뉴욕 모마(MoMA)에서 비엔나 모더니즘 미술을 총정리한 〈비엔나 1900전〉을 계기로 19-20세기 전환기 비엔나 모더니즘 운동은 다시금 미술사적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그에 힘입어 구스타브 클림트(1862-1918)는 금빛찬연한 장식성과 관능성 짙은 회화작품으로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2000년을 맞아 갤러리 벨베데레는 근대 비엔나의 간판적인 화가이자 세기전환기 빈 분리파 (Wiener Sezession) 운동의 선두지휘자 클림트의 작품들을 한데 모은 〈클림트와 여인들 전〉(2000.9.20∼2001.1.7)을 기획했다. 클림트 미술의 평생 핵심주제는 여성이었다. 콧대높은 상류계급 귀부인에서 청순한 시골 소녀에 이르기까지 클림트 미술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들은 금색찬연한 장식과 화사한 색채를 한 몸에 받으며 캔버스 위에 재현되곤 했다.

방년 14세되던 해인 1876년, 비엔나 미술공예학교 (Kunstgewerbeschule, 현재의 빈 응용미술대학 (Universität Angewandte Kunst Wien)의 전신)에 입학할 만큼 일찌기 특출난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특이하게도 작가 자신이나 작품에 관한 문서상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았다. 문자언어에 대한 병적 거부감을 지녔던 구스타브 클림트의 미술인생은 그래서 오늘날까지 상당부분 규명되지 못한채로 남아있는 형편이다.

체코계 중하급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예술적 재능이 풍부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성장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줄곧 모친과 친여동생들의 집에서 동거했다고 알려진다. 또 평생 미혼이었으면서도 14명이 넘는 사생아를 낳은 아버지였다는 사실에서 그가 여성을 향한 오묘한 애증과 긴장으로 갈등했던 인물이었을 것임도 짐작케 해 준다.

동시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의 심리분석학을 빌어 클림트의 창조적 성과는 개인사적 배경과 성(性)을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예술적 통로로 대리 충족되어 발현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클림트가 즐겨 사용한 여성 도상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에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가부장적 부르조아 비엔나 사회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여권의식이 크게 기여했다. 자아의식이 강해지는 신여성을 바라보던 당대 남성들이 여성혐오증과 거세강박증을 토로했던 시대현상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클림트의 평생 반려자 겸 후원인 역할을 했던 장본인들도 여성이었다. 클림트가 <철학>(1900), <의학>(1901), <법학>(1903∼7)이란 제목으로 비엔나 대학에 제시한 천정벽화들이 선정성 시비에 휘말렸을 때 여류 언론인 베르타 추커칸들 (Berta Zuckerkandl)과 패션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 (Emilie Floege)는 클림트의 충직한 후견인 겸 지지자가 되어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전시는 1900년도 전후기 모더니즘 전개와 더불어 여성 후원자와 클림트의 관계를 고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수 없다.

1901년 비엔나 대학 천정벽화 논쟁은 여성의 누드와 도덕성이라는 이슈를 겉으로 내세워 시작된 정치적인 논쟁이었다. 클림트의 근대적 미학을 지지하는 빌헬름 폰 하르텔과 미술사학자 프란츠 비코프 대(對) 보수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요들이 불붙인 미학적 논쟁은 곧 사회주의 대 보수 및 우익주의자들 간의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다. 예술가적 자존심과 독립성에 크게 상처입은 클림트는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후퇴하여 자신의 입지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이른바 클림트 미술의 황금기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동안에는 알레고리와 상징이 양식화된 장식성으로 중화된 작품이 주목할만 하다. 빈 분리파 운동과 발맞추어 공예분야에서 전개중이던 비엔나 공예운동 (Wiener Werksttaete)에 참여하면서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습득한 금속공예 기술을 환기하게 되었던 한편, 이탈리아 라벤나를 여행하면서 산 비탈레 교회당의 비잔티움 미술을 재발견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유딧 II>(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178×46cm, 1909, 베네치아 근대미술 갤러리아)는 기하학적 문양의 아르데코 양식이 유난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4.1.1

구스타브 클림트의 <다나에(Danaë)> 1907년 작, 77 x 83 cm Courtesy of Galerie Würthle, Wien.

그보다 이미 8년전 완성된 <유딧 I (유딧와 홀로페르네스)>(캔버스에 유채와 금박, 84×42cm, 1901년 경. 오스트리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뼈가 앙상한 얼굴과 올가쥔 손아귀를 한 살로메는 쾌락을 선사한 댓가로 파멸과 죽음을 몰고오는 공포의 에로스로 정교하게 묘사된 한편, 인물 주변에 양식화되어 나타난 기하학적 장식은 금속공예와 비잔틴 양식의 산물이다.

한편 <다나에>(1907)의 여성상에는 복수심과 남성혐오적 이미지는 오간데없이 사라진 대신 사랑과 온기에 목말라하는 감미로운 젊은 여성으로 형상화됐다. 클림트가 드디어 여성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칼 E. 쇼스케는 해석한다. 이를 더 뒷바침이라도 하듯, 클림트의 말년작인 <아담과 이브>(캠버스에 유채, 1917-1918년, 갤러리 벨베데레 소장)는 에로스, 고통, 죽음을 향한 화가의 공포가 일시에 해소된 듯 평온하고 아늑한 분위기만을 풍기며 2차원적으로 처리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의 1890년대 고전적 도상과 포즈로 그려진 여성 초상 작품과 동시대 마네, 마카르트, 쉴레, 호들러, 뭉크, 코코시카의 대표적 여인 초상을 나란히 한자리에 전시하는 이번 전시는 클림트의 여인 초상화의 도상과 상징의 변천사를 검토해 봄과 동시에 비엔나 모더니즘기에 묘사된 여성 이미지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모색한다는 의의를 내걸고 있다. 인기 화가의 미술전시회를 찾는 일반 대중 관객들 못지않게 모더니즘 시대의 여성 예술후원인과 예술인 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미술사학도들에게도 영감을 제공할 만하다.  박진아 | 미술사 2001.1.

* 이 글은 본래 《월간미술》 2001년 1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피어라 고통과 죽음의 꽃이여!

MUNCH BY HIMSELF AT MODERNA MUSEET STOCKHOLM

에드바르트 뭉크의 자화상을 통해 본 근대 여명기

올해 2013년, 20세기의 거장 에드바르트 뭉크를 낳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는 이 화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특별전시와 문화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6116sm-218x300

20대 초 화가의 모습을 담긴 <자화상> 1886년도 작. Nasjonalmuseet for Kunst/Najonalgalleriet, Oslo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뭉크 미술관에서 도난 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뭉크 그림 밖에 없습니다.
“이건 아주 비싼 밍크 코트예요. 절대 도난당하는 일 없이 잘 보관해 줘야 해요.” 한 돈많아 보이는 몸집 큰 노여인이 외투를 벗고 미술관 전시장을 입장해 달라는 미술관측 지시를 받고는 뭉크 미술관 입구 물품보관소 직원을 향해서 모피 코트를 건데며 불평을 토로했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뭉크 미술관의 한 고위 직원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쏘아 붙였다. “부인, 이 미술관에서 도난 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뭉크 그림 밖에는 없답니다.”

화가 뭉크에 대한 노르웨인 국민들의 크나큰 자부심이 느껴지는 이 짤막한 농담은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에서 일한 적 있는 한 미술관 직원으로부터 들은 잊지 못할 일화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지날달 3월 6일 [2005년], 노르웨이 남부 지방에 있는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뭉크의 진품 그림 석점이 도난을 당해 홀연히 사라졌다가 하루만인 이틀만에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 온 사건이 벌여져서 전세계 미술애호인들을 놀라게 했다. 뭉크 그림 도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뭉크는 고가 미술품 도난 사건 목록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단골 손님이다.

이미 1994년에는 전문 미술품 도둑 두명이 사다리를 타고 오슬로 국립 갤러리 창문을 통해서 침입해 『절규 (The Scream)』를 훔쳐 간 일이 있었고, 그보다  일찌기 1990년에도 같은 박물관에서 『마돈나 (Madonna)』가 도난당했다가 경찰의 추적 끝에 오슬로 국립 갤러리 품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발생했었다. 그리고 또다시 작년[2004년] 8월 말에는 평상복 차림의 도난꾼 둘이서 환한 대낮에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 느긋하게 걸어 들어가 뭉크 그림 2점을 버젓이 훔쳐 도망친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뭉크 미술관의 보안 수준은 뭉크 작품에 대한 미술관 측의 드높은 자부심과 애정이 무색할 정도로 크게 뒤떨져 있었음이 또다시 노출된 셈이 되었다.

작년 발생한 이 사건이 남긴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도난당한 두 작품이 뭉크의 가장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그 유명한 『절규』와 『마돈나』라는 것과, 범인들은 아직도 잡힐 낌새없이 범행의 실마리조차 묘연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들의 가격은 이미 돈으로 살 수 없는 국보급이 된지 오래다. 현재 미술 시장의 시세로 추정하자면 『절규』는 9천만 달러 (유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9백억원) 그리고 『마돈나』는 1천8백만 달러 (약 1백8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뭉크 작품 도난 사건은 노르웨이의 국가적 체면이라는 면으로 보나 작품 시세 면으로 보나 막대한 손실을 안겨준 안타까운 사건인 셈이다.

Munch self portrait in hell 1903

『지옥 속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Hell)』 1903년 작. Munch-museet, Oslo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비록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모양새가 되긴 했어도 미래의 또 다른 도난 사건을 방지하겠다는 차원에서 뭉크 미술관은 현재 미술관 건물 개축 공사에 한창이며 올 가을에 새로운 모습과 강화된 보안 체계로 무장한 후 뭉크 미술관을 재개관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유럽 최북단 대륙인 스칸디나비아 땅의 맨 왼쪽에 자리해 있는 북극광과 절묘한 피요르드 해안 경치를 자랑하는 나라 노르웨이가 가장 아끼는 국가대표급 문화재는 단연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년)이다.

뭉크는 노르웨이 특유의 감성과 기질을 표현한 가장 노르웨이적인 화가임과 동시에 서양 근대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가장 세계적인 예술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1963년에 처음 문을 연 이래 오늘날까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명물로 남아 있는 뭉크 미술관 (Munch Museet)은 1944년 화가가 사망하기 직전에 오슬로 시에 그가 수중에 보관하고 있는 작품들 일체를 기증한 것들을 모조리 소장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 뭉크 미술관이 건물 개축 공사를 하고 있는 기회를 이웃나라 스웨덴에서는 이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뭉크의 여러 대표작들과 특히 화가의 자화상들을 대거 대여해 와 이번 『뭉크 자신이 그린 뭉크 자화상 (Munch by Himself)』 展을 기획했다. 2월19일부터 오는 5월15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국립 근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에서 대형 전시로 올려지고 있는 이 전시는 뭉크의 자화상이라는 주제로는 최대 규모로 열리는 특별전이라는 점 때문에 미술관객들과 언론의 관심도 잔뜩 불러 모으고 있다.

절망, 고통 그리고 죽음 – 뭉크의 영원한  영감의 원천
화가 뭉크의 작품 세계를 총집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작 『절규』 만을 보더라도 화가의 내면에 들끓고 있던 경련하는 내적 심리와 공포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으리라.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가 근대 예술 철학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예술 작품이란 모름지기 소리쳐 절규 (Das Geschrei)하지 못하면 더 이상 예술 작품으로서의 표현에 실패한 것고 다름없다”고 한 지적을 뭉크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작품이 삼아야 할 핵심 모티프로 삼았다. 뭉크의 『절규』(1893년)가 20세기 근대 시대에 사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감과 고통을 그림으로 분출시킨 가장 폭발적인 표현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6127sm-216x300

『절망』 1892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Thielska Galleriet, Stockholm.

서른살 무렵의 화가 뭉크는 친구 2명과 나란히서 저녁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저녁 일몰 시간, 오슬로 시내 하늘과 피요드르 해안 수평선은 갑자기 검푸른 색으로 변하고 바다물과 수평선은 온통 시뻘건 피와 혓바닥처럼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다리 위를 걷던  뭉크는 갑자기 피로와 구토감을 느끼면서 쓰러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다리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화가는 자신의 신체를 관통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고 동시에 자연 속에서 절규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1892년 뭉크의 자화상 『절망 (Despair)』과 이듬해인 1893년에 완성된 불후의 명작 『절규』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두 손으로 파랗게 질려 길게 늘어진 머리통을 붙잡고 괴성을 질러대는 그림 속의 주인공은 고뇌하는 근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뭉크 자신의 모습인데, 강렬한 색과 진동하는 듯한 곡선을 통해 표현된  절규의 음파는 서양 미술사에 기리남을 ‘청각의 시각화’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이미 알만한 미술 애호가들은 알고 있으시겠지만 『절규』라는 제목으로 화가가 그려 남긴 진품 회화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 지는 것들로는 현재 2점이 남아 있는데 한 점은 뭉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가 작년 도난당한 것이며 나머지 한 점은 지금도 오슬로 국립 갤러리에 영구소장되어 있다.

“… 인생이란 폭랑이 불어치는 광활하고 광폭한 바다에 홀로 표류하는 한 척의 낡은 배…배가 난파하면 모조리 네 탓이며 그에 대한 죄로 지옥에서 영원히 불탈 지어다. …”

화가 뭉크에게 인생이란 나약한 신체와 영혼이 헤쳐가야할 무력하고 불안하며 외로운 여정이었다. 19세기 후반기 유럽의 대기를 온통 휩쓰고 있던 낭만주의 (Romanticism)나  감상주의 (sentimentalism)적 체취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화가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격동하는 유럽의 정황 속에서 어딘가 감상적이고 낭만적이며 내면적 환상을 외부로 강렬하게 표현할 것을 사명을 삼았던 이른바 표현주의 계열을 미술을 추구한 화가들로는 뭉크 뿐만 아니었다.

예컨대, 네덜란드 출신이면서 젊은 시절 성직자로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표현주의 미학의 계보를 일으킨 반 고흐 (Van Gogh)라든가, 기괴하고 으스스한 가면 이미지로 고전적 표현주의 회화 세계를 새롭게 개척한 벨기에 출신의 제임스 앙소르 (James Ensor),  그리고 니체의 ‘질풍노도 (Sturm und Drang)’로 대변되는 낭만주의와 허무주의 철학을 질병, 공포, 죽음이라는 주제로 승화시킨 스위스 출신의 페르디난트 호들러 (Ferdinand Hodler) 등은 저무는 구시대를 뒤로 하고 근대라는 신시대를 대비하며 불안에 떨던 세기전환기 근대인들의 집단적인 노이로제 상태를 표현한 동시대 화가들이다.

같은 시기, 미국의 대문호 에드가 앨런 포우 (Edgar Allen Poe)와 빈의 낭만주의 작곡가 바그너 (Richard Wagner)도 세기 전환기의 긴장을 유사한 감성으로 표현했고,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근대인들의 억압된 무의식과 성의 세계를 탐구하는데 한창이었다.

6115sm

『여인 가면 아래에 서있는 화가 자화상 (Self-portrait Beneath a Female Mask)』 1893년 경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80년이라는 짧지 않은 예술 인생을 불태운 화가의 일평생은 극적이라면 극적이라 할 수 있는 시련과 절망을 경험했는다고 한다. 그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친 이미저리와 상징들은 화가의 매우 개인적인 성장 경험과 내면적인 트라우마의 결정체들이다.

특히 뭉크는 자신을 그토록 평생 동안 고뇌로 몰아 넣었던 내적 갈등과 고통의 근원을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비극적인 가족사에서 발견했던듯 하다.

그는 “성직자와 바닷사람은 농담을 불허하는 심각한 사람들”이라고 꼬집었는데, 여기서 성직자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농부 출신의 모친을, 바닷사람이란 해군 군함의 의료장교 겸 지휘관으로 일했던 부친을 각각 지칭하는 것이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폐결핵으로 앓던 농가집 출신의 23세 하녀와  44세난 중산계층 출신의 중년 남성의 결혼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결합이었던 만큼 계급적 격차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 긴장의 관계였다. 그나마도 뭉크의 부모는 기독교라는 정신적 영혼적 유대감으로 결혼 생활과 가족을 이끌어 나갔는데,  청교도적 윤리를 유독 강조했던 기독교식 집안 교육은 이후 화가 뭉크의 사생활 속의 정신적인 억압과 성적인 죄책감으로 이어져 그림으로 표현되곤 했다.

특히 여성을 향한 화가의 내면적 갈등은 그의 그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 신비스럽고 광채가 나는 흰색 드레스 차림을 한 젊은 여인은 순결한 처녀,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있거나 붉은 안색을 한 여인은 정욕과 파멸을 부르는 성숙한 여인, 그리고 검정색 드레스와 창백한 안색을 한 초쵀한 여인은 인생과 남성관계 끝에 인생의 쓴맛과 비탄을 경험한 닳고닳은 여인으로 해석되곤 한다.

예컨대 그 유명한 뭉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사춘기 (Puberty)』(1894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나체의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 덧없이 사리지고 말 사춘기 소녀의 가녀리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소녀 옆 켠에 도사리고 있는 짙은 회오리 덩어리는 이 가련하고 청순한 소녀를 뇌살적이고 파괴적인 성숙한 여성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893년 작인 『여인 가면 아래에 서있는 화가 자화상』이라든가 1894년부터 무려 4년에 걸쳐 그려진 『살로메 장절』은 살로메=파멸의 여인이라고 말하려는 화가의 자신의 공포감을 표현한다. 이것은 당시 수많은 근대기 남성들을 공포로 몰아 놓었던 신여성 사상과 파멸을 부르는 여인 (팜므 파탈, femme fatale) 혹은 거세 공포증에 대한 불안감을 아동애 (pedophilia)적인 이미지를 빌어서 현실 속의 여성 관계로부터 도피해 보려던 남성 심리의 표현이기도 하다.

6158sm

<마라의 죽음 II > 1907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뭉크 그 자신도 실제로는 어린 처녀를 향한 동경과 애욕을 느꼈지만 동시에 성숙하고 요염한 여인으로 부터는 긴장과 공포를 느꼈고, 모친과 자매의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불행했던 성장과정을 한탄하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은 기피했으며, 그당시 다른 재능있는 미술가들과는 달리 생전 어지간한 명성과 부를 누렸으면서도 내적 고뇌와 병치레로 두문불출 거의 실내에 갇혀 지냈다.

비극의 인연으로 끝난 중년의 매혹녀 툴라 라르센 (Tulla Larsen)과의 결별을 표현한 그림 『마라의 죽음II (The Death of Marat II)』(19907년)에 보면, 화가는 이제 고통과 무기력을 초월하여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어쨋거나 결국 그는 그 모든 내적 갈등과 불안감을 화폭을 통해서 표현한 소심한 샛님 화가 선생이었던 게다.

16살난 청년 뭉크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해인 1880년. 당시 노르웨이는 어딘가 두서없어 보이지만 놀라운 천재적 잠재력을 잔뜩 품은 이 화가 지망생의 재능을 발굴하기에는 너무 좁고 지엽적이었다. 보다 큰 세상에서 미술을 배워보자는 생각에 청년 뭉크는 우선 독일로 건너가서 엄격한 독일식 아카데미 미술 교육을 접하지만 곧 표현적인 한계를 느끼고는 파리로 건너갔다. 이렇게 뭉크는 20대 중반부터 미술의 중심 도시 파리에서 보고 들은 새로운 사상에 ‘자연을 묘사하는 그림이란 화가의 내면이 표현되어야만 가치가 있다’고 한 화가 고유의 표현주의 철학이 버무려진 화풍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화가는 자기가 넓은 세상에서 배워온 미술 세계를 개인전을 통해서 노르웨이 화단에 꾸준히 소개하곤 했지만 모국의 화단은 선구적이고 무서울 정도로 솔직대담한 뭉크의 표현주의 미학을 이해해 주질 못했다고 한다. 특히 1890년대에 뭉크는 그같은 좌절감을 반영이라도 하듯 어린 시절 경험한 모친과 누나 그리고 부친의 오랜 병고와 죽음이 남긴 충격을 반복해서 그림으로 남겼다. 당시 유럽에서는 병자의 침실을 묘사한 그림들이 심심치 않게 그려질 정도로 병실 및 임종 광경 그림이 유행을 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 멜랑콜리와 신비의 전율을 강도높게 전달한 화가는 드물었다.

Munch_Vampyr_sm

『흡혈귀 (Vampire)』 1895년 작 © Munch-Museet/Munch-Ellingsen gruppen/BUS 2013. Photo: Prallan Allsten /Moderna Museet.

1910년대, 뭉크는 특히 독일 화단과 화가 집단에서 깊이 선망되는 외국인 화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미술사에서 뭉크를 유럽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가 당시 여러 독일 표현주의파들에 끼친 영향력 때문이다.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는 이미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높이 칭찬했으며, 또 그런가하면 뭉크는 역시 독일 표현주의자인 프란츠 마크 (Franz Marc)로부터 보다 강렬한 색채 감각을 배워왔다.

뭉크가 독일 화단에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때는 1892년 베를린 화가 연합의 주최로 열린 뭉크 개인전을 통해서 였는데, 이 전시는 일명  ‘스캔들 전시’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베를린 화랑계를 찬반의 논란으로 몰아 넣었다. 저자세 일관의 얌전한 품성의 뭉크의 주변에도 남몰래 도사리고 있던 숙적이 있었는지라 독일의 보수주의파 고전 화가로 부터 뭉크의 그림은 타락스런 프랑스적 취향으로 푹 젖은  ‘퇴폐미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 소동은 프랑스-독일간의 프로이센 전쟁을 끝으로 유난히 첨예해진 당시 프랑스와 독일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던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전시를 둘러싼 ‘스캔들’은 뭉크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안겨주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논란과 화재를 몰고 다니는 전시회는 뭇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법인지, 뭉크는 이 전시를 끝으로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지만 불티나게 팔려나간 입장권 매출 덕분에 전에 어느새 돈주머니 두둑해진 ‘성공한’ 화가가 되어 있었다.

진정 베를린은 뭉크가 화가로서 성공하는데 분수령적인 순간을 마련해준 행운의 도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뭉크가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정붙이며 살았던 독일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든 운명의 도시이기도 했다. 어느새 베를린에서 떨친 뭉크의 명성은 고국에까지 알려져서 19세기말 노르웨이 근대 극문학의 기수 입센 (Henrik Ibsen)의 상징주의 문학에 불을 치폈으며 그 결과 입센의 희곡대본 『유령들』과 『헤다 가블러』를 위한 연극 무대 장치 디자인까지 했던 것은 유명하다.

6159sm

『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1906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특히 뭉크의 10여년 동안의 독일 체류기는 그로 하여금 초상화라는 회화 쟝르를 실험하는 기회를 제공해준 값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뭉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돈많은 독일 미술애호가들과 후원자들은 뭉크에게 개인 및 가족 초상화를 주문해 그려가곤 했는데, 특히 그들은 뭉크 만이 포착해 낼 수 있는 심리적 깊이와 통찰력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를린에서의 독신생활과 과중한 주문 작업에 밀려 지내던 뭉크는 점차 억누를 수 없는 정신불안증을 이겨내기 위해서 싸구려 와인과 독한 환각주인 압생트에 의존해 보지만 결국 심각한 정신분열증과 알코홀 중독으로 몸과 영혼이 피폐해진 나머지 코펜하겐의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에 이르렀다. 1906년도에 그려진 『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Bottle of Wine)』 속 화가는 주변 환경 속에 눌리고 지쳐서 시린 고독과 무기력으로 시름하고 있다.

전유럽이 제1차대전이라는 격동과 비극의 시대를 항해하고 있을 1910년대, 뭉크는 입체주의나 미래주의 처럼 당시 파리에서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던 미술 신사조에 접하면서 피카소와 더불어 거장 화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와서 작업을 하고 있던 50대의 뭉크는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젊고 아름다운 여성 모델에 빗대어 그림으로 그리는 것으로써 또다른 제2의 자아를 탐구하고 있었다. 중년을 넘어선 화가는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천착해 오던 시대적 불안감, 고통, 불안감이라는 주제를 더이상 즐겨 다루지 않았다.

6118sm-224x300

『자화상 – 밤에 배회하는 자 (Self-Portrait. The Night Wanderer)』 1923년부터 제작 미완성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마라의 죽음』 시리즈에는 젊은 여성 모델이 꽃다발 속에 숨겨둔 칼로 화가를 찔러 죽일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암시가 넌지시 담겨 있다. 특히 뭉크는 생애 말년 동안 그 어떤 다른 쟝르의 그림 보다 자화상을 즐겨 그리곤 했는데, 그의 자화상들에는 어김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든 남성과 가혹하고 음산한 기다림이 서려있음이 느껴지곤 한다.

『자화상 – 밤에 배회하는 자』 속에 나타난 주인공은 창문으로 대변되는 지독한 고독감과 불안감으로 잠 못이루는 나이든 남자의 모습으로 은밀하게 묘사했다. 화가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에 완성된 『시계와 침대가 있는 자화상』(1942년)에는 시계와 침대 사이에 서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을 임종 침대 옆에서 죽음의 순간을 대기하는 노인네로 묘사했다.

노르웨이는 지금도 이 나라를 뿌리채 사로잡고 있는 ‘뭉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뭉크가 세상을 뜬 1944년 이후로 노르웨이는 뭉크에 필적할 만한 천재 미술가의 탄생은 다시 보지 못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가 미술사에 남긴 시각적 전율과 위력은 대단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가르침 그대로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예술인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존재와 죽음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불안과 실존적 문제를 탐구하는데 바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Images coutersy: 스웨덴 스톡홀름 모데나 무제에트 근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 in Stockholm, Sweden).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2005년 3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21세기의 눈으로 다시 본 독일 표현주의

THE SOUND AND FORM OF SOUL – GERMAN EXPRESSIONISM REVISITED

berlinstrassenzsene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가 그린 『베를린 거리 풍경 (Berliner Strassenszene)』, 캔버스에 유채, 47 7/8 x 35 7/8 in. (121.6 x 91.1 cm.) 1913-1914년경 작. 2006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로널드 로더에게 38,096,000 달러에 낙찰되었다.

감성과 영혼의 미술 표현주의 회화 (Deutsche Expressionismus)를 향한 새로운 주목  독일을 위시로 한 나치주의 정권의 반인륜적 행위와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라는 오명 때문에 특히 20세기 근대기 독일 미술은 여간해서 미술사학자들이나 컬렉터들이 기피해 온 분야로 남아 있었다. 특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 제1차 세계 대전 전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 유럽에서 불거져 나온 표현주의 미술은 거칠고 표현이 단도직입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오랜 세월 동안 주류 화단에서는 한낱 주변적인 미술 운동 정도로 여겨져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에는 독일의 표현주의 선구적인 화가로 꼽히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의 작품 한 점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며, 천재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인 에곤 실레 (Egon Schiele)의 미술 세계는 각각 1960년대와 1980년대에 와서야 비로서 영국과 미국의 미술관에서 처음 소개되었을 정도로 심한 외면을 받았다.

최근 구미권 유명 미술 경매장 매출 보고와 미술 박람회에서 들려 오는 미술 시장 소식에 따르면 세계적 미술관들과 미술 컬렉터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회화에 대하여 전에 없이 새로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을 향한 관심이 커졌다.

바로 지난 11월 8일 뉴욕에서 열린 인상주의 및 모더니즘 미술품 경매에서 키르히너가 그린 『베를린 거리 풍경 (Berliner Strassenszene)』 11점 연작 중 한 작품은 본래 1천8백-2천5백만 달러의 가격으로 낙찰될 것이라는 전망을 뒤엎고 그의 두 배에 가까운 가격인 3천8백만 달러  즉,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3백6십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되어 화장품 업계의 거물 인사 겸 유명 미술 컬렉터인 로널드 로더가 소유한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에로 넘겨졌다. 그런가 하면 미술 시장에서 계속되고 있는 실레의 인기는 경매장에서도 이어져서 그의 『단독 주택들 (Single Houses)』은 2천2백4십만 달러(2십1억2천 여만원)에 낙찰되었다.

Karl Schmidt-Rottluff_Herbstlandschaft in Oldenburg_1907_c Museo Thyssen Bornemisza_sm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의  『올덴부르크의 가을 풍경 (Herbstlandschaft in Oldenburg)』 1907년 작 © Museo Thyssen-Bornemisza 슈미트-로틀루프는 베를린에 다리파 미술관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 및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에 대한 구미권 미술계의 집중 현상은 최근 연거푸 국제 법정의 주요 기사거리로 오르내리는 나치 약탈 미술품에 대한 반환 소송건 소식이 큰 자극제 역할을 하는게 사실이다. 특히 미술사에는 기록이 되어 있으나 시장성 면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일부 20세기 화가들의 작품의 경우 국제 법정에서의 반환 소송건은 작품가격을 몇 배로 높일 수 있게 해 주는 최적의 홍보 역할을 한다.

예컨대 올 11월 뉴욕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키르히너의 『베를린 거리 풍경』은 최근 나치로부터 압수되었다가 반환된 유태인 소유의 미술 작품에 대한 법정 소송 사건으로 더더욱 유명해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이 작품은 이번 뉴욕 경매에서 8천7백9십만 달러 (우리돈 8백3십2억 여원)에 낙찰되었다.]과 더불어서 나치군에 의해 강제 압수되었던 것을 되찾은 한 유태인 후손이 경매에 내놓은 작품이어서 더 화재가 되었다.

이미 독일 표현주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나 개인들에게는 분명 좋은 소식이다. 그같은 추세에 덩달아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품에 대한 인기는 당분간 더 상승세를 구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술계의 그 같은 대세를 반영하듯 지난 [2006년] 9월28일부터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독일의 표현주의자들 (Deutsche Expressioninsten)』이라는 전시로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전시를 기획 전시중인 레오폴트 미술관 (Leopold Museum)은 뉴욕 노이에 갤러리와 더불어서 에곤 실레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서, 이번 전시를 통해서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티센-보르네미자 미술관 (Thyssen-Bornemisza Collection)이 대거 소장하고 있는 독일의 표현주의 회화 작품들과 나란히 선보이고 있다.

Erich_Heckel_Haus in Dangast_1908_c_Carmen Thyssen Bornemisza Collection on loan at the Museo Thyssen Bornemisza_sm

에리히 헤켈 (Erich Heckel)의 『단가스트의 집 (Haus in Dangast)』 1908년 작 © Carmen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on loan at the Museo Thyssen-Bornemisza.

프랑스에 인상주의가 있다면 독일에는 표현주의가 있다. 때는 근대기 서양 미술이 새로운 창조적 폭발을 거듭하고 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근대적 신사고와 지성적 합리주의를 여러 미술 운동의 철학적인 기초로 삼았던 파리에서와는 반대로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의 화가들은 감정과 영혼에 호소하는 표현적인 미술이 전격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때는 에곤 실레가 뒤틀린 사지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듯한 인물 초상화와 누드화를 그려서 포르노 화가로 몰려 감옥 신세를 졌던 때이며, 저멀리 북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웨이에서는 에드바르크 뭉크 (Edvard Munch)라는 청년이 급변하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인들의 불안과 공포를 『절규』라는 충격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던 때이기도 했다.

흔히 서양 미술사에서는 세잔느의 정물화가 입체주의의 시초라고 보듯, 19세기 말엽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소용돌이치듯 강렬하고 격렬한 필치의 그림을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적인 양식이라고 추적한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는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거칠음을 뜻한 야수파 (Les fauves)라는 사조를 이끌며 강렬한 색채과 대담한 필치를 구가했다.

Ernst Ludwig Kirchner_fraenzi vor einem geschnitzten sessel_1910_TyhssenBornemisza Collection_co VBK Wien 2006_sm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나무로 깎은 의자 앞의 프랜치의 초상 (Fränzi vor einem geschnitzten sessel』 1910년 작 ©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 VBK Wien 2006  다리파 초기 드레즈덴에서 활동중이던 키르히너의 작품 속의 여성상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성적 긴장감을 발산한다. 독일 표현주의의 잉태는 그 모든 외부적인 영향 보다는 독일 미술가들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자생적인 예술혼과 표현욕구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표현주의의 잉태는 그 모든 외부적인 영향 보다는 독일 미술가들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자생적인 예술혼과 표현욕구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다. 독일을 포함한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이미 중세 시대부터 급격한 사회 변혁의 시대마다 인간이 겪는 내면적 공포와 영혼적 위기감을 합리적인 이성주의로 소화하기 보다는 왜곡과 과장의 미학을 빌어 격정적이고 폭발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발휘해 왔다.

독일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표현주의 미술 운동은 20세기가 열리자 마자 표면화되었지만 그 잠재력은 이미 19세기 독일을 사로잡았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피트 프리트리히 (Caspar David Friedrich)가 특유의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풍경화에서 비극과 고독의 멜랑콜리를 잠잠하게 표현했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은 일찍이 19세기 독일을 뒤흔들었던 신 칸트주의 철학에서 이론적인 바탕을 삼았다.

특히 19세기 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쓴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는 개인의 내면 세계와 의지가 외부로 향한 표현의 창 (window)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는데, 그의 철학은 의지를 발휘하면 인간의 내면과 직관은 외부 세계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은 당시 젊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두 팔 벌려 환영받았다.

드레스덴의 다리파 – 비문명 상태로의 회귀 독일땅 동쪽 끝의 역사 도시 드레즈덴 (Dresden)에서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가 주도하여  1905년 다리파 (Die Brücke)가 결성되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나타난 아프리카 원시 미술, 북유럽의 뭉크의 절박함, 오스트리아의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의 실존적 고통이 표현된 그림을 본 후 독일만의 자체적인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이 필요함을 느낀 키르히너는 ‘문명 (civilization)’이라는 거름장치를 거치지 않은 인간 내면의 천연순수의 창조력을 외부로 표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다리파는 삐죽삐죽하고 각진 형태, 튜브에서 갓 짜낸 배색되지 않은 강한 물감 원색, 여과되지 않은 화가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그림들을 그렸다. 다리파 화가들은 그 때까지 주로 광고 인쇄물에나 사용되며 중세 시대 이후로 사실상 잊혀졌던 목판화를 부활시켰는데, 목판화가 자아내는 조악함은 거칠고 노골적인 감정 표현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Emil Nolde_Sommerwolken_1913_c_Museo Thyssen Bornemisza Madrid_sm

« 에밀 놀데 (Emil Nolde)의 『여름 구름 (Sommerwolken)』 1913년 작 © Museo Thyssen-Bornemisza, Madrid. 덴마크 태생 독일 화가 에밀 놀데는 다리파와 잠시 인연을 맺으며 드레즈덴에서 그림을 그렸다.

다리파 동인들은 문명을 떠나 자연의 단순성과 원시성을 되찾자는 취지에서 모리츠부르크 호수가에서 난잡한 생활에 탐닉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있어 다시금 도시로 눈을 돌려 미술적 영감을 찾았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듯이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들 역시 신작대로가 뚫리고 나날이 인구가 늘어나며 상업과 활동이 번화해지던 근대 유럽의 도시화 현상에서 영감적인 매료를 느꼈던 때문이다.

급변하던 도시상을 그림으로 포착하기 위해 다리파 동인들은 1911년 독일 수도 베를린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급변하는 도시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베를린 거리 풍경, 버라이어티 극장가, 아텔리에 실내 풍경화 속에 표현된 남녀 간의 동물적이고 성적 기장, 언제 분출할지 알 수 없는 억눌린 감정은 키르히너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뮌헨의 청기사파 – 음악과 그림의 만남 한편 독일의 남쪽 도시 뮌헨에서는 곧 터질 제1차 세계 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없이 한결 조화롭고 시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는 젊은 화가들이 1911년에 청기사파 (Der Blaue Reiter)의 결성을 선언했다. 음악을 미술과 결합시켰다 하여 일명 ‘음악적 표현주의 (Musical Expressionism)’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청기사파 회화는 다리파 보다 감정을 절제하고 외부로의 거침없는 감정적 발산 보다는 내면적 조화와 균형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Felixmueller_Nacht vor dem Moulin Rouge_1925_lindenau museum altenburg_co_VBK Wien 2006_sm

» 콘라트 펠릭스뮐러 (Konrad Felixmueller)의 『물랭 루쥬 앞의 밤거리 풍경 (Nacht vor dem Moulin Rouge)』 1925년 작. Lindenau Museum, Altenburg © VBK, Wien 2006.

청기사파의 결성 멤버였던 바실리 칸딘스키(Wasily Kandinsky)는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매우 심취했던 화가였는데, 그래서 칸딘스키가 빈 출신의 근대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 (Arnold Schönberg)와 남다른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다른 청기사파의 대표적인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는 가시적인 외부 세계에 대한 깊은 불신감을 청산하기 위하여 자연 속의 동물들의 영혼과 교감하면서 인간적 영혼에 대한 자기 성찰을 시도했다. 동물과의 교감 시도라니 심원난해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마르크의 ‘자연을 통한 자기 성찰 (Durchgeistigung)’은 이미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미술에서도 시도된 바 있는 어찌보면 매우 독일적인 전통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독일 표현주의와 그 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과 종전까지 독일 표현주의는 독일 내에서는 여전히 가장 주도적인 미술 사조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고된 전쟁과 패전 후의  독일인들의 경제적 사정과 일상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고, 그에 따라서 표현주의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전에 없는 냉소주의와 사회적 비판정신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전후 독일 사회 속에 팽배한 냉소주의, 고립과 소외, 환멸감은 보다 사실주의적인 그림으로 표현되었는데, 예컨대 게오르크 그로스 (Georg Grosz)와 오토 딕스 (Otto Dix) 등은 사실주의적 기법과 날카로운 사회비평적 시각이 담긴 이른바 ‘신즉물주의파 (Neue Sachlichkeit)’를 주도한 대표적인 화가들로 꼽힌다.

Georg Grosz_Strassenszene_Kurfuerstendamm_c Museo Thyssen Bornemisza Madrid_sm

« 게오르크 그로스 (Georg Grosz)의 『쿠르퓌르스텐담 구역의 거리 풍경 (Strassenszene Kurfuerstendamm)』 © Museo Thyssen-Bornemisza, Madrid. 쿠르퓌르스텐담 (Kurfuerstendamm)은 독일 베를린의 부유한 고급 상가 구역. 화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로상을 오가는 사회 각층의 군상을 통해서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꼬집고 있다.

신즉물주의파의 그림은 다리파와 청기사파의 것에 비해 눈에 뛰게 사실주의적인 묘사 기법을 택하고 있지만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충격적 감흥과 위력 면에서 여전히 독일 표현주의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 같은 시각적 효과는 양차 대전 사이기 기괴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독일 표현주의 영화 운동으로 이어져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년)이라는 공포 영화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패전으로 끝낸 독일 사회에서 표현주의 미술은 1920년대를 고비로 하강 국면을 면치 못했다. 화가 개인의 감성을 앞세워 사회적인 주제를 외면하는 표현주의 미술은 자기도취적이고 목표가 불분명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주 원인이었다.

결정적으로 표현주의가 공식적인 종말을 맞은 때는 1933년. 나치주의 정권이 독일 표현주의 미술을 퇴폐 미술이라고 낙인한 이래 표현주의 화가들이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 흩어지게 되면서 독일 표현주의는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물론 구미 여러 나라들조차 기피하는 미술 사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이번 전시회는 다시금 독일 표현주의를 새로운 역사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독일 표현주의자들』 전은 내년 [2007년] 1월 10일까지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계속된다.

* 이 글은 본래 『오뜨』 지 2006년 1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