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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정물화 정체성 선언

REVIEW

플랑드르 정물화 감상하기

FLEMISH STILL LIFES from the Kunsthistorische MuseumWien, from March 18 till July 21, 2002.

이제까지 미술사 학계와 미술 전시회 등은 “네덜란드의 정물화”라는 주제로 통칭해 온 연유로 해서, 정물화(still-life)라는 회화 장르의 본령은 네덜란드 미술이라는 광범위한 지리적 범주 속에 두리뭉실 포함되어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빈에서는 그처럼 널리 받아들여져 온 전제에 도전하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어 미술계와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플랑드르 정물화 전시가 열리고 있는 빈 미술사 박물관 하라흐 궁 입구. 사진: 박진아.

독일출신 미술사학자인 클라우스 에르츠(Klaus Erts)가 빈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과의 협력으로 수년간의 학술연구 끝에 기획한 이 전시에서는 플랑드르 지방의 정물화는 기존 네덜란드 정물화로 알려져 있는 회화 장르와서는 차별화된 회화 쟝르라고 하는 대명제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같은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전세계 유명 박물관들이 소장중인 플랑드르 정물화 120여점을 한자리에 모아 규명보고 있는 이 전시는 그런 점에서 그동안 뒷켠에 물러서 있던 플랑드르 정물화의 정체성 선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플랑드르 정물화의 기원을 찾아서 정물화의 역사를 거슬러 보게 되면, Continue reading

기상예보에 따르면 2017년-18년 겨울은 매섭게 추울 것이라 한다.

MINI ICE AGE BY 2030

옛 그림으로 보는 小 빙하시대 경치

현대인들은 오늘날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고를 귀아프게 듣고 살고 있다. 하지만 향후 15년 지구상의 인류는 오히려 소 빙하시대를 맞게 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주장한다. 370년 전 지구가 마운더 극소기(Maunder Minimum)에 경험했던 것처럼 태양의 활동이 급속하게 줄어들어 2030년 경이 되면 태양의 활동이 지금보다 60%가 감소하게 되며 겨울은 더 추워지고 잘 얼지않는 작은 냇가도 꽁꽁 얼어붙을 것이란 전망이다. 지금부터 370년 전, 그러니까 마운더 극소기에 속하던 1650-1700년대 소 빙하기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사람들은 이 혹독한 기후 속에서 어떻게 생활했을까?

Pieter Bruegel the Elder, The Census at Bethlehem, c. 1566[1], Oil on panel, 116 cm × 164.5 cm (46 in × 64.8 in). 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 Brussels.

플랑드르 출신의 거장 풍속화가 피터 브뢰겔이 그린 일련의 겨울철 풍경화들은 소 빙하시대 북유럽의 겨울철을 잘 보여준다. 16세기 중엽은 이른바 소빙하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유럽에 극심한 한파가 휘몰아친 시기였다. 고기감을 구하기 위한 농군들의 사냥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인 듯해 보이지 않지만, 겨울철의 한 순간을 묘사한 이 그림 속에는 왠지 알 수 없는 영원불변의 겨울 경치의 아련한 추억을 자아내는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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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정글] 우리는 관광객인가 여행자인가?

21세기 크리에이티브는 미래를 향한 여행자

Why Creatives Must be Travellers, not Tour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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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지구 북반부에 사는 수많은 현대인은 직장일이나 평소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휴가를 떠난다. 특히 7월 말부터 8월 초, 여름 날씨가 가장 더워지면 직장과 일상을 벗어나 평소 가보지 못한 낯선 장소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과거 가본 곳이 좋아 되돌아 가기도 한다.

어떤 이는 매일의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고, 또 어떤 이는 틀에 박히고 따분한 일상으로부터 잠시나마 탈피하여 새로운 자극과 경험을 찾으러 여행을 떠난다. 『디자인정글』 FOCUS, 2016년 8월 5일 자 Future of Design: 디자인 현재 창조적 미래 칼럼 제10탄 전체 기사 계속 보기. Go to article in Design Jungle magazine

Happy Valentines Day!

CUPID THE HONEY THIEF

큐피드는 꿀 도둑 – 고대 전성기 그리스 시대 시인 테오크리수트가 쓴 시에서 큐피드가 꿀벌통에서 꿀을 훔치다가 벌들에게 쏘이며 아프다고 어머니 비너스(사랑의 여신)에게 불평하는 순간을 르네상스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펜과 수채화로 그린 작품. 큐피드: “아야 아야! 엄마! 어떻게 이 작은 벌레들이 그토록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거죠?” 비너스: “하하~ 내 귀여운 아들아, 이제 네 화살을 맞고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지? 순간적인 사랑의 희열은 얼마안가 고통과 가슴앓이를 가져오는 법이란다.”

Cupid the Honey Thief by Albrecht Dürer, 1514, Pen and ink and watercolour on paper,
22 cm (8.7 in) x 31 cm (12.2 in). Collection: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The scene is taken from literature, specifically the poem Cupid Stealing Honey by the classical Greek poet Theocritus. The poem tells the story of how Cupid complains to his mother, Venus (the goddess of love), of how the bees sting him because he has stolen their hive. He wonders that creatures so small can inflict so much pain. Venus laughs and tells him that their stings can be compared to the wounds that he himself inflicts on all those hit by his arrows. The brief ecstasy of love may soon be replaced by suffering and heartbreak.

런던 백 년 전과 지금 달라진게 있나?

막대그림 그림 거장 LS LOWRY – The Match stick master at the Tate

영국 화가 로렌스 스테븐 로리(Lawrence Stephen Lowry, 1887-1976)의 그림을 감상해보자. 일명 ‘성냥개피(matchstick)’ 그림으로 유명한 로리는 20세기 전반기 영국 수도 런던과 북구 영국에서 급속히 벌어지던 산업화, 도시화, 공장화 풍경을 그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다섯번이나 제영제국4등훈장과 기사작위를 받았지만 매번 거절했던 굳은 신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궁중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즈

VELÁZQUEZ IN VIENNA

작년 2014년 10월 말 비엔나의 미술사박물관에서는 바로크 시대 스페인 궁중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즈 전을 열어 스페인 합스부르크 황실가 가족들의 모습을 초상화로 다시 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오늘날 대중 미술사 서적 마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던 화가 겸 거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디에고 벨라스케즈. 19세기말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벨라스케즈를 가리켜 ‘화가중의 화가(painter of painters)’라며 프랑스 인상주의의 선구자라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재조명 받기 전까지 실은 서양 미술사에서 오래 잊혀져 있던 유럽 역사 속 궁중화가중 일인에 불과했다.

Workshop of Diego Velázquez 『King Philip IV of Spain』 c. 1653–1656/59, Oil on canvas, 47 x 37,5 cm ©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디에고 벨라스케즈 아텔리에에서 화가와 조수들이 합작해 완성한 펠리페 4세의 초상. Workshop of Diego Velázquez 『King Philip IV of Spain』 c. 1653–1656/59, Oil on canvas, 47 x 37,5 cm ©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20세기 근대주의 대두 이전까지 절대주의 귀족주의가 지배하던 유럽에서 미술을 포함해 각족 공예, 음악, 문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창조 예술 분야에서 먹고 살아야 했던 재능있는 예술가들 사이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귀족집안, 왕가, 황실, 교회에 전속돼 권력자를 섬기며 작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예스럽고 안정된 생계 수단이었다.

천재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서로 경쟁하며 메디치 가문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활동했고, 모차르트가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로 올라와 합스부르크 황실 음악가가 되길 그토록 갈망했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유럽이 배출한 걸출한 천재 예술가들은 소명적으로는 신이 내려준 재능을 한껏 발휘해 천상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구현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데 혼신을 바친 위대한 창조가들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생활인이었기 때문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즈(Diego Rodri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는 스페인 남부 도시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태생이나 포르투갈에서 이민온 유태인계 포르투갈 부모 밑에서 카톨릭 교회 세례를 받았으며 소귀족 출신이었던 이유로 해서 벨라스케즈는 당시 스페인을 한바탕 공포로 휘몰아 넣었던 스페인 종교 재판으로부터 수난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유복한 환경에서 일찍이 갓 열 살이 넘은 나이로 철학책을 보고 화가 프란치스코 파체코(Pacheco) 수하에서 그림그리기를 공부하며 화가 수련을 받기 시작했다.

Diego Velázquez 『The Waterseller』 c. 1622, Oil on canvas, 107,7 x 83,3 cm © London, Apsley House, The Wellington Collection English Heritage

벨라스케즈의 초기 작품 『물장수』는 허름한 연인숙, 주점, 주방 풍경을 묘사한 보데고네스 장르의 그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바로크 시대 화가 카라바죠의 영향이 엿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Waterseller』 c. 1622, Oil on canvas, 107,7 x 83,3 cm © London, Apsley House, The Wellington Collection English Heritage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 했듯, 스승 프랑치스코 파체코 보다 그림그리는 재능이 한층 특출났던 갓 스무살 넘긴 젊은 벨라스케즈는 스승의 딸 후아나와 결혼하자 마자 그 연줄로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산티아고 교회를 거쳐 곧바로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궁중으로 그 이름이 알려졌다. 때는 마침 1922년 겨울, 합스부르크 왕가 필리페 3세와 4세가 가장 아꼈다던 왕실전속화가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가 세상을 떠서 그 자리를 메꿀 새 궁중화가 물색작업이 한창이던 시기. 절묘한 시운과 스승이자 장인 파체코의 연줄의 축복을 한껏 받고 24세의 디에고 벨라스케즈는 초봉 50 두카트(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200-250 만원) 받는 궁중전속화가로 전격 발탁된 이후 예순살로 세상을 뜰 때까지 40년 넘게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궁중화가로 한평생을 봉사했다.

모든 궁중화가의 최우선 임무는 두 말 할 것 없이 왕과 왕가 가족과 친지들의 공식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다. 요즘과 달리 장거리 여행을 자주하기 어렵던 과거, 스페인 마드리드와 오스트리아 비엔나 두 곳에서 2중 왕실을 거느렸었던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황실은 멀리 떨어져 있던 유럽의 두 수도 사이 가문 친지들의 모습을 수시로 초상화로 그려서 주고받는 것으로써 안부를 확인했고 차후 서로 결혼하게 될 어린 새 후손들의 모습을 미리 확인했다. 오늘날 벨라스케즈의 명작 알려져 있는 작품들 다수는 마드리드의 합스부르크 왕실 가족 초상화이고 그러하다보니 그의 대표작 다수는 스페인의 프라도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Diego Velázquez 『Infante Baltasar Carlos with a Dwarf』 1631–1632, Oil on canvas, 128 x 101,9 cm © Boston, Museum of Fine Arts

펠리페 4세 왕과 이자벨 여왕 사이서 태어난 2살박이 발타자르 카를로스 왕자와 난장이 궁정광대가 있는 2인 초상화. 펠리페 4세는 이 귀한 아들 초상화를 벨라스케즈에게 특별히 맡겨 그렸는데 베네치아파 르네상스의 거장 화가 티치아노의 색감과 구도에서 영향받은 흔적이 뚜렸하다. Diego Velázquez 『Infante Baltasar Carlos with a Dwarf』 1631–1632, Oil on canvas, 128 x 101,9 cm © Boston, Museum of Fine Arts

지금도 비엔나 국립 미술사박물관에 남아있는 벨라스케즈의 합스부르크 왕가 초상화 작품들은 마드리드 왕실에서 선물로 보내왔던 가족 초상화들이다. 벨라스케즈를 궁중화가로 간택한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50대 초엽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비롯해서,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초상, 오늘날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펠리페 4세 왕의 딸 인판타 마가리타 공주의 성장과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초상화 연작들중 네 편을 통해서 벨라스케즈는 왕실 내 신하들간의 권모술수, 30년 전쟁과 경쟁 권력들로부터의 도전과 위헙, 병약하던 어린 왕자와 공주들의 건강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호사롭게 잘 다듬어지고 차밍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으로 왕가 일가족과 친지들을 그려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가 찬연하고 말끔하게 그려낸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초상화들의 이면엔 이 가문에 드리워질 암울한 미래가 감쪽같이 감춰져 있다. 벨라스케즈의 고용자 겸 후원자이던 펠리페 4세는 실은 스페인 왕국 최후의 왕이된 비운의 인물이었다. 포르투갈이 스페인 영토에서 분리독립해 나가고,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저마다 세력을 키워가자 한때 유럽의 주도 세력이던 스페인 왕국은 점차 군사적, 외교적, 문화적 권력 무대에서 종결을 순간을 맞고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가문은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후계자 생산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권력 분산을 막고 권력을 통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6백 여년 집권기 동안 가족친인척끼리만 결혼하는 근친혼인을 고집한 끝에 발생된 유전질환과 건강적 장애가 그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엄격한 위계체제와 근엄한 분위기라 내리누르는 궁정에서 해소 역할을 했던 궁정 광대. 벨라스케즈의 눈에 비친 광대란 실없음, 어리석음, 광기를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Buffoon Juan de Calabazas (Calabacillas)』 c. 1638, Oil on canvas, 106 x 83 cm ©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엄격한 위계체제와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가 내리누르는 궁정에서 긴장 해소 역할을 담당했던 궁정 광대. 벨라스케즈의 눈에 비친 광대란 실없음, 어리석음, 광기를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Buffoon Juan de Calabazas (Calabacillas)』 c. 1638, Oil on canvas, 106 x 83 cm ©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왕실 최후의 왕 펠리페 4세가 왕권 후계자 생산을 간절히 기다리며 새로 태어난 왕자와 공주들을 비엔나 합스부르크 왕실로 혼인시켜 대권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펠리페 4세와 첫 아내 이자벨 여왕과 오랜 노력 끝에 탄생한 첫아들 발타자르 카를로스는 안타깝게도 16살 나던 해에 갑작스럽게 죽었는데, 열 살 난 어린 소년의 발타자르 카를로스 초상화와 펠리페 4세가 간절히 기대했던 왕권후계자 아기 펠리페 프로스페로의 초상화는 비엔나 합스부르크 왕실에 보내 결혼을 제안하기 위해 특별히 벨라스케스의 손으로 그려졌다.

발타자르 카를로스의 누이이자 첫 딸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혼시키는 것으로서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을 잠재웠다. 펠리페 4세의 둘째 부인 마리아나 여왕과 낳은 인판타 마가리타의 2세, 5세, 8세 때의 초상화들은 장차 레오폴트 1세 황제가 될 비엔나 합스부르크 황태자에게 일찍부터 결혼을 제안하기 위해 보낸 맞선용 초상화였다.

번뜩이는 독창성과 독특한 스타일이 폭발했던 17세기 유럽문화 황금기 바로크 시대, 궁중화가 벨라스케즈는 과연 회화를 재정의한 거장 화가의 대열에 설 만한가? 비슷한 시기 로마에서 활동한 카라바죠의 격정과 파격적인 시각, 스페인 출신의 바로크 거장 주르바란의 강렬한 영혼성, 인간조건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표현한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의 깊이와 승화력, 베르메르의 고요하고 잠잠하되 애상적 시적 감성은 벨라스케즈의 회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허나 초기 시절 그가 즐겨 그렸던 ‘보데고네스(bodegones)’ 혹은 주방 정물화 그림들 중에서 『물장수(Waterseller)』 에 나타난 대담한 화면 구도라든가 유럽 미술사상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 여성 누드라 불리는 『화장하는 비너스(일명 로커비 비너스)』 같은 작품은 마네 같은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화면구성법을 구축하는데 영감을 주었을 만하다. 그런가하면 20세기 영국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벨라스케즈의 초상화 속 숨막히는 격식을 표현주의로 재해석해 초상 속 모델들을 해방시켰다.

Diego Velázquez 『Infanta margarIta』 (1651–1673) In a WhIte dress, c. 1656.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다섯살난 마가리타 공주. 이 초상화는 비엔나 합스부르크 황실에 사시는 할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 황제께서 보시라고 보내진 손녀 초상화였다. 거울에 반사되어 반대방향으로 서 있는 이 모습은 『시녀들』 그림에 재활용되었다. Diego Velázquez 『Infanta MargarIta』 (1651–1673) In a WhIte dress, c. 1656.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궁중화가 벨라스케즈의 평생 목표는 왕실 위계 속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작위를 받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독이 베네치아파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를 깊이 흠모했는데 특히 티치아노가 평생공로를 인정받아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 카를 5세로부터 작위 수여받은 것을 부러워했다. 실제로 벨라스케즈는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659년 필립 4세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고, 그 흔적은 그 유명한 그림 『시녀들(Las Meninas)』(프라도 박물관 소장)에 빼곡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화가 자신의 자화상에 빨강색 십자가로 기록되어 있다.

미셸 푸코의 책 『사물의 질서(Les Mots et Les Choses)』(1966년) 서론의 상세한 분석대상이 된 이래 무수한 학자들 사이의 논쟁의 주제가 된 그림 『시녀들』은 궁중화가로서 성취감에 찬 디에고 벨라스케즈의 자족한 자아를 한 폭의 그림으로 옮겨놓은 자랑스런 최종 이력서였다. 커리어리스트 디에고 벨라스케즈는 더도덜도 아닌 궁중 화가였고, 그의 그림은 오로지 그의 후원자 만을 위한 것이었다. 《벨라스케즈》 전은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에서 2014년 10월28일부터 2015년 2월15일까지 열린다. Images courtesy: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한 천재의 초상 – 렘브란트

REMBRANDT 400 in Amsterdam

화가, 데상가, 판화가 –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 시대(Dutch Golden Age)라고 불리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으로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거장 화가이다. 2006년은 거장 렘브란트가 태어난지 400년째가 되는 해로, 고국 네덜란드에서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세계적인 화가의 생일을 맞아 대대적인 전시회 및 문화 행사를 기획했다.

렘브란트의 작품들이 대거 소장되어 있는 암스텔담의 릭스무제움(Rijksmuseum)을 비롯해서 반 고흐 미술관, 렘브란트의 옛 거주집을 박물관로 전환한 렘브란트하우스(Rembrandthuis)는 물론이고 런던의 덜위치 갤러리, 베를린의 고전 미술관,  헝거리 부다페스트 미술관, 그리고 파리 주재 네덜란드 문화원인 커스토디아 재단(Fondation Custodia) 등 유럽 전역에서 거장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은 물론 그가 살던 17세기 네덜란드와 유럽의 정황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유익한 전시들이 올 한 해와 내년 초에 걸쳐서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는 신비와 마력으로 현대인들을 사로잡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그림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22세의 젊은이로서의 렘브란트 자화상. 1628년 작품. © Rijksmuseum, Amsterdam.

“세세한 것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지닌 화가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위대한 화가의 재능은 경이로운 것이다. 신은 위대한 화가에게 재능을 선사하여 그의 그림을 통해서 여느 사람들은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르네상스 시절 독일 출신의 회화의 거장이자 렘브란트의 선배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는 말한 적이 있다.

천재라는 개념에 대한 다분히 르네상스적인 정의로 들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신화 알레고리, 성서 해석, 역사화,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여러 장르는 넘나들며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한 렘브란트의 미술 생애는 끝없고 정처없는 탐험이었고 누가 뭐라해도 분명 탁월한 것이었다.

한 인간의 인성은 그가 타고난 여러 속성과 자질을 모두 도합한 것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말이 있다.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탁월한 기술적 재능 외에도 밝고 어두운 빛의 강한 대조를 통한 극적 분위기와 심오한 내면세계가 느껴지는 그림 속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오늘날까지도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적 조건(human condition)을 되돌이켜 보게 만드는 보편적 위력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패기 넘치는 22세의 곱슬머리 젊은이의 모습에서부터 삶의 무게와 내면적 고뇌를 머금은 60대의 노인의 모습까지 화가의 초상을 화폭으로 옮긴 자화상의 명인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렘브란트는 지금도 그의 삶과 작품 속에 깃든 신비에 매료를 느끼는 수많은 낭만파 회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사랑 받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네덜란드가 국가적으로 지정한 ‘렘브란트의 해’이다. 올[2006년] 여름 7월15일 토요일,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텔담과 화가의 고향 라이덴(Leyden)에서는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렘브란트의 400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내세운 국가적 문화 행사가 흔히 그렇듯 ‘렘브란트의 해’를 맞는 네덜란드에서는 렘브란트 스파게티와 초컬릿 등 렘브란트를 내세운 마케팅 홍보로 관광객 유치와 문화 상품 매출에 열을 올리는 상혼도 발휘되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어머니”(라이덴 라켄할 시립 박물관(Municipal Museum of Lakenhal), 올 3월19일까지 전시 마침) 展, “렘브란트와 카라바죠”(릭스무제움, 올 6월 18일까지 전시 마침) 展, 그리고 가장 최근 일반 관객에게 문을 연 “렘브란트-천재성을 향한 탐구”(현재 독일 베를린 고전미술 박물관(Gemäldegalerie Berlin)) 展을 통해서 미술계는 렘브란트에 얽힌 신비를 해독하고 이 거장이 예술 한 평생 동안 이룩해 놓은 미술사적 성과를 차분하게 종합 재평가 해 보는 기회로 삼고 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역시 네덜란드 출신의 동료 거장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의 경우와는 다르게 렘브란트의 일대기와 행적은 기록으로 잘 보존되어 있고 따라서 렘브란트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이미 많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의 일생과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도 속시원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은 남아 있다.

흔히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렘브란트는 그의 극적이고 신비로워 보이는 회화 작품들만큼 평생을 빈곤과 투쟁하며 그림을 그렸던 낭만적 화가였을까? 렘브란트는 유태인이었나? – 생전 화가는 유태인 출신의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와 랍비 메나세 벤 이즈라엘과 친하게 지냈으며 <유태인 신부(The Jewish Bride)> 같은 유태인 주제의 작품을 여러편 남겼다는 사실에 미루어 그가 유태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일각의 추측이 일기도 했는데, 이 같은 의문점을 화두로 삼아 네덜란드의 유태인 역사 박물관(Jewish Historical Museum)에서는 오는 11월부터 내년 초까지 “유태인 렘브란트(The Jewish Rembrandt)’라는 전시가 개장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렘브란트는 수많은 제자와 화실 조수들의 도움을 많이 본 화실 지휘자였다. 그로 인해서 ‘렘브란트의 작업실 (Rembrandt’s Laboratory)’로 불린 대규모 아텔리에를 운영하며 제자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밀려드는 그림 주문에 응했는데, 그 결과 지금도 렘브란트의 진품(眞品) 판정 기준을 세우는데 전문가들을 혼란케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in a Cap』 1630 Etching, 51 x 46 mm. Gift of J. P. Morgan, Jr.

눈을 끄게 부릅뜬 서른살 난 화가의 자화상 또는 원제 『모자를 쓴 화가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a Cap)』 1630
Etching, 51 x 46 mm. Gift of J. P. Morgan, Jr. © The Morgan Library & Museum.

그래서 렘브란트와 그의 작품세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단체인 램브란트 연구 프로젝트(Rembrandt Research Project)을 이끌고 있는 에른스트 반 데 벤터링(Ernst van de Wentering) 관장은 “그동안 대중 매체를 통해서 미화되어 오던 신비로운 인물로서의 렘브란트의 이미지를 접어두고 신선한 시각으로 이 화가의 예술적 창조력과 내면적 동기가 어떻게 작품으로 표출되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르멘조온 반 라인 렘브란트(Harmenszoon van Rijn Rembrandt)는 1606년 7월 15일 라인강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 라이덴(Leiden)에서 제분업을 하는 중산층 집안의 열 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강가 주변에 그림처럼 서 있는 풍차가 있는 전형적인 목가적 풍경 속에서 성장한 그는 학자가 되길 기대했던 부모의 바램에 따라 라틴어로 학습하는 인문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나 결국 맘 속에 품어왔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17세부터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반 쉬바넨부르흐 밑에서 기초 그림 수업을 받은 후 보다 더 큰 물에서 그림을 배우고자 마음먹은 그는 수도 암스텔담으로 가서 당대에 유명했던 역사 화가 피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 밑에서도 6개월간 수학했다. 렘브란트의 불후의 명작이자 현재 릭스뮤제움의 한 전시실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대작 단체 초상화 <야간 경비(The Night Watch)>는 이 때 배운 역사화 구성 능력이 렘브란트의 본령인 초상화술과 한데 어우러져 창조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군계일학을 짚어내는데 능했던 당시 눈썰미 좋은 귀족들 덕분에 젊은 렘브란트의 남다른 재주는 일찍이 발굴되었다. 방년 19세의 청년 렘브란트는 분명 놀라운 재능을 발휘해서 고작 3년 반 가량의 그림 수업을 마감하고 고향 라이덴으로 귀향하여 동료 화가인 얀 리벤스(Jan Lievens)와 동업하여 개인 화실을 열었다. 22세 되던 해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왕가의 눈에 띄어 헤이그 궁전의 실내 장식용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이는 직업적 화가 렘브란트가 수주한 그림 주문 제1호이자 동시에 암스텔담에서 온 헨드릭 윌렌부르크(Hendrick Uylenburgh)라는 유력한 초상화 딜러와의 인연을 맺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청춘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했던가. 환희 펼쳐질 성공한 화가로서의 미래를 앞두고도 <22세의 젊은이로서의 자화상>(1628년 작)은 젊은 렘브란트의 또다른 내면을 암시한다. 렘브란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극적인 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 효과 즉, 강한 명암의 대비 기법이 잘 나타나 있는데, 자유분방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앳되어 보이는 통통한 뺨과 대조적으로 어둡게 가려진 눈매는 젊음과 촉망 받는 미래를 앞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떨고 있던 화가의 내면 한구석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성공적인 직업 화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위하여 암스텔담에서 화실을 개업한 방년 25세의 렘브란트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634년에 그의 아트딜러인 윌렌부르크의 여사촌 사스키아(Saskia)와 결혼했다. 사스키아가 귀족 출신의 여성이라는 잇점 때문에 렘브란트는 결혼 후 상류층 고객들로부터 그림 주문을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수주한 그림 주문 덕택에 큰 돈을 벌기도 했다.

렘브란트가 1656-58년 경 그린 이 자화상은 50살을 갓 넘긴 화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 Kunsthistorischesmuseum. Wien.

허나 비싼 집을 구입하고 값비싼 골동품과 옷을 사들이는 일을 좋아했던 화가의 낭비벽 때문에 곤혹을 치루기도 했는데, 지금도 네덜란드 관청 자료실에는 과거 렘브란트가 가족, 채권자들, 미술 후원자들은 물론 모델들과 얽혀 들었던 수십 건의 금전적 분쟁 기록들이 남아 있어서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미 서른 무렵의 나이에 결혼, 직업적 성공과 유명세, 사치스러운 생활을 경험한 그는 <눈을 크게 뜬 자화상>(1630년 작)이라는 판화 속에서 놀람, 환희, 슬픔 등 모순적인 인생의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묘하게 뒤섞인 채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렘브란트의 개인사를 연구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의 사생활은 그다지 본받을 만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렘브란트는 갓 서른을 맞는 아내 사스키아를 폐결핵으로 때이르게 잃었고 그 이후로 10년 가까이 붓을 들지 못했을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를 앓았다. 혹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이 그 같은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하지만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스키아가 죽은 후 렘브란트는 아들의 보모로 집에 들인 게르체 디륵스(Geertje Dircs)라는 여성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전 아내 사스키아의 사촌이자 딜러 윌렌부르크가 렘브란트로부터 그림 주문을 끊은 것이 렘브란트가 일을 못하게 된 진짜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디륵스와 지내는 동안에 22세난 젊은 여시종 헨드리케 스토펠스(Henrickje Stoffels)와도 바람을 피워서 게르체에게 위자료를 물어주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치와 무분별한 돈관리로 곤경을 겪고 있던 렘브란트는 결국 50세 되던 해에 파산 신고를 내고 갖고 있던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말았다.

보수적인 청교도적 신앙이 지배하던 당시 17세기 네덜란드 사회는 제아무리 천재 화가라 할지언정 절제력이 부족한 렘브란트를 고운 눈으로 봐 주지 않았다. 30대 초엽 잠깐 맛 본 부와 명성을 끝으로 그는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빚쟁이들에 쫏기던 가련한 화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으며 덩달아서 생전 그의 미술 세계는 거의 이해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는 사생활 보다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

그가 죽고 난 후 100년 후 18세기 말엽부터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극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낭만주의(Romanticism) 사조가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렘브란트의 자화상 연작들은 인간 영혼 탐색과 심리적 여정의 미술적 자취로써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2006년 400회째 생일을 맞아 신화나 신비의 베일을 벗고 다시금 전시회를 통해 재점검 받고 있는 렘브란트는 숨가쁜 일상 속의 현대인들에게 자아 숙고의 순간을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Photos courtesy: Rijksmuseum Amsterdam/Gemäldegalerie Berlin.

*이 글은 원래 『오뜨』 誌 2006년 9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고대 로마 - 게르마니쿠스의 재를 갖고 로마로 돌아오는 아그리파 (Ancient Rome; Agrippina Landing with the Ashes of Germanicus) 1839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윌리엄 터너 『고대 로마 – 게르마니쿠스의 재를 갖고 로마로 돌아오는 아그리파 (Ancient Rome; Agrippina Landing with the Ashes of Germanicus)』 1839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윌리엄 터너의 후기 회화 세계

LATE TURNER – PAINTING SET FREE At the Tate

2013년 영화화되어 큰 화재를 모은 스웨덴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장편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The Hundred-Year-Old Man Who Climbed Out the Window and Disappeared)』(2009년)은 창조적 마인드와 끊임없는 호기심과 생을 향한 열정이 있는 자에게 나이란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 장수하는 노년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 속에 있는 요즘 세상에서 노후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한편,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노년에 치닫더라도 유연하고 개방된 사고를 키우며 자연을 관찰하고 경외하며 동시에 과학적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류 정신을 되세기게 해준다.

윌리엄 터너 『빛과 색채 (괴테의 이론) - 홍수 이튿날 - 모세의 창세기 (Light and Colour (Goethe’s Theory) - the Morning after the Deluge - Moses Writing the Book of Genesis)』 1843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윌리엄 터너 『빛과 색채 (괴테의 이론) – 홍수 이튿날 – 모세의 창세기 (Light and Colour (Goethe’s Theory) – the Morning after the Deluge – Moses Writing the Book of Genesis)』 1843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영국 화가 조세프 메일러드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년✝) 또한 작업 말년기인 1835-50년 약 15년 동안 유난히 폭발적인 창조적 활력과 발군의 시각적 혁신을 이룩했다. 1835년 윌리엄 터너는 환갑을 맞았다. 누가 뭐라해도 이미 ‘장년의 나이’가 된 이 화가는 나이와 노쇄해진 체력에도 아랑곳 않고 더 큰 세상을 보고 역사를 공부하고 외국의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럽 전역으로의 긴 그림 여행길에 오르곤 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터너는 정말 모와 마티스에게 표현적인 색채, 뿌옇고 아련한 대기 분위기 연출하는 법을 가르친 근대미술의 선구자였을까? 일부 서양 미술사 책에 보면, 특히 그가 그린 말기 그림들에 보이는 극도의 추상적이고 물감을 두텁게 입힌 임파스토 기법을 들어서 터너를 19-20세기로 넘어가던 근대기 프랑스 인상파의 선각자인양 가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실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자연의 영원불변성을 그림으로 기록해 두고자 했다는 점에서, 시시각각 빛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외부세상을 포착하려 했던 프랑스 인상주의 세계관과는 정반대 입장을 취했다.

터너는 실은 고대 유럽 역사주의와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던 18세기형 낭만주의자였다. 터너가 환갑의 나이에 인류역사를 배우기를 계속하며 그림 그리기 열정을 불태웠던 당시 19세기 유럽은 근대 모더니즘이 본격화하기 직전, ‘질풍노도 (Sturm und Drang)’ 자연의 위력에 경외를 바치고 고대 로마 그리스 시대를 되돌아보며 흘러간 역사주의의 향수 속에서 시름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터너는 당시 독일인들의 낭만주의 서정을 한껏 적셨던 작곡가 리햐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와도 정서적으로나 세계관적인 측면에서 아주 유사했던 바그너리언이었다.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푸른 리지에서의 일몰 (The Blue Rigi, Sunrise)』1842, Watercolour on paper, 297 x 450 mm. Tate collection.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푸른 리지에서의 일몰 (The Blue Rigi, Sunrise)』1842, Watercolour on paper, 297 x 450 mm. Tate collection.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이라는 지극히 조촐한 배경의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 네살의 어린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아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해 그림 공부를 한 후 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교수로 발탁되며 노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사회적 존경까지 받았던 그는 내면적으로는 전근대적 인물이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어느새 근대적 업적주의의 장점을 누렸던 시대운을 잘 타고난 운 좋은 미술가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미술컬렉터가 제시한 거금의 돈을 거부하고 자신의 작품 모두와 스케치 및 기록물을 간직해 두었다가 테이트 미술관에 기증할 수 있었다.

영국  2014년 개봉된 영화 『미스터 터너(Mr Turner)』(티모시 스폴(Timothy Spall) 주연)에서 묘사되었듯, 땅딸막하고 무뚝뚝했던 화가 터너 씨는 혁명적이고 위대한 미술을 창조했지만 사생활 면에서 조촐하다 못해 때론 인격적으로 의심스러운 면모까지도 지녔던 한 남자였다. 이 영화를 만든 마이크 리(Mike Leigh) 감독은 과연 화가 터너를 훌륭한 미술가로 보여주려했던 것일까 아니면 단점을 지녔던 한 인간에 불과함을 보여주려 했을까? 이 영화의 의도는 그다지 중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훌륭한 미술가는 오로지 불타는 창조적 열정과 그나 남긴 훌륭한 미술작품을 통해서 역사와 관객에게 평가받을 뿐이므로.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서 열리는 『터너의 후기 회화 – 회화를 해방시키다. (Late Turner – Painting Set Free)』 전은 2014년 9월10일부터 2015년 1월25일까지 테이트 브리튼 린버리 갤러리에서 전시된다. Images courtesy: Tate Britain, London.

그래도 미술은 계속된다.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1868–1926), 『죽음의 무도 (Der Totentanz (IV. Version)』, 1915 Danse Macabre (version IV), 202 × 244,5 cm / Casein on canvas, Leopold Museum, Wien.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1868–1926), 『죽음의 무도 (Der Totentanz (IV. Version)』, 1915년, 202 × 244,5 cm / Casein on canvas, Leopold Museum, Wien.

제1차 세계대전 시대 오스트리아 미술

AND YET THERE WAS ART! – AUSTRIA 1914-1918

1914-1918년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은 근대기 급속히 진보한 무기 및 전투 기술에 힘입어서 그 이전 그 어떤 전쟁 보다도 잔인했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그야말로 ‘20세기 거대한 원초적 재앙 (great seminal catastrophe)’ 였다. 비참과 혼란으로 범벅된 이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미술은 계속되었다. 구체제식 제국주의, 글로벌리즘, 다인종∙다언어가 뒤섞인 다문화가 농익고 곪아터지며 서서히 구체제 종말을 맞고 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느 미술가들의 눈과 손을 통해서 어떤 미술이 전개되고 있었을까? 비엔나에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에서는 『그래도 미술은 계속되었네! (And Yet There was Art! – Austria 1914-1918)』 전을 9월 15일까지 열어 점검한다.

손님으로 여기를 왔더니 당신네는 나를 폭탄으로 환대하누나! –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소집 (Der Ruf)« 지 1912년11월호 전쟁 특집호 표지로 선정된 에곤 실레의 자화상, 22,8 × 14,8 cm / Letterpress. Private collection.

»소집 (Der Ruf)« 지 1912년11월호 전쟁 특집호 표지로 선정된 에곤 실레의 자화상, 22,8 × 14,8 cm / Letterpress. Private collection.

올해 20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100년이 되는 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중이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합스부르크 황실 황태자와 소피 폰 호헨베르크 황태자비가 열렬 보즈니아-세르비아계 해방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칩에 의해 저격당한 사건은 미술가들의 운명까지도 뒤흔들었다.

전쟁이 터지자 갑자기 미술 시장은 덩달아 침체되었다. 미술가들은 전쟁터로 징집돼 나가야 하는 슬픈 운명에 처했는데, 에곤 실레(Egon Schiele), 알빈 데거-린츠(Albin Egger-Lienz), 안톤 콜릭(Anton Kolig)은 바로 그런 미술가들이었다. 이탈리아, 루마니아, 러시아, 세르비아 국경으로 배치되어 최전방에서 전투에 임하며 그림 그리기를 계속했던 이들의 눈과 손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제1차 세계대전의 파멸과 광기가 기록되었다.

전쟁 포고와 징집 선전
1912년 2월부터 1913년 11월까지 근 2년 동안 총 7부를 찍어 남성 인구로부터 징병을 호소하기 위해 출판되었던 『소집(Der Ruf)』 지는 전쟁이란 “파괴적인 재앙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카타르시스적인 기회”라고 전쟁의 의미를 재정의했다. “전정은 피를 통해서 세상에 온다”고 외치며 전쟁을 선동하고 징집을 독려하는 이 잡지 속 기사들은 종종 강렬한 원색과 격정적 필치가 주특성인 표현주의 미술을 활용하기를 좋아했다. 나태와 게으름에 빠진 중산층들을 백일몽에 빠진 정신상태로부터 흔들어 깨우는데 전쟁 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고 외쳤으며, 미술가들은 보는이의 감정을 건들고 뒤흔드는 미술로 이 안일에 빠진 인구를 일깨우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전쟁에 동원되기에 이른다.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 »병든 러시아 군 (Kranker Russe)«, 1915년, 43,6 × 30,4 cm, Black chalk, gouache on brown paper, mounted on Japanese paper. Leopold Museum, Wien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
»병든 러시아 군 (Kranker Russe)«, 1915년, 43,6 × 30,4 cm, Black chalk, gouache on brown paper, mounted on Japanese paper. Leopold Museum, Wien

전쟁은 죽음의 무도회(Danse Macabre)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다” – 프란츠 카프카는 충격에 쌓여 소리 높여 절규했고, 극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는 “세계 전쟁. 세계 파멸.”이라고 응축했다.

보통 예술가들이란 대체로 전쟁 같은 죽음과 처참의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 민감한 감성의 족속들이지만, 알빈 에거-린츠(Albin Egger-Lienz)는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 직전인 1915년에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자진 지원해 입대했다. 전쟁을 “운명의 무자비한 행보”로 보았던 그는 심장 건강이 좋지못해 입대 면제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입대를 고집해 황실 지정 전쟁 홍보실 미술단(Kunstguppe der k.u.k. Kriegspressequartier)에 정식 회원이 되어 1916년 오스트리아 남단 이탈리아 국경에서 근무하며 전투 장면을 프레스코풍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을 했다.

적군에 대한 연민, 인류 보편에 대한 동정
“나는 이제 군인이 되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14일을 보냈다네.” 1915년 군대 징집되어 훈련을 받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에곤 실레에게 전쟁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운 경험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였던 점이 참작되어 실레 역시 황실 전쟁 홍보실 미술단으로 편입되어 전투 최선전으로 내몰리지는 않았다.

그가 미술단에서 주로 담당했던 임무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적군 러시아 포로들의 초상과 생활상을 두루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복무중 쓴 편지에 보면 러시아 포로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과 평화주의로 그득했던 실레의 심성을 엿볼 수가 있다. “아뭏든, 나는 적군 쪽에 훨씬 더 마음이 간다네. 그들의 나라는 우리 나라 보다 월등히 흥미롭더군. 진정한 의미의 자유도 있고, 여기선 찾아보기 어려운 생각 깊은 사람들도 더 많다구. 매 시간 마다 이곳에서 그런 사람들이 썩고 있다니, 이건 손실이라구. …”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 『원칙 "자유, 평등, 형제살 (Das Prinzip (»Liberté, Egalité, Fratricide«), 1918년, 41,2 × 31,2 cm / Color lithograph on paper Leopold Museum, Wien © Fondation Oskar Kokoschka/Bildrecht, Wien 2014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
『원칙 “자유, 평등, 형제살상” (Das Prinzip (»Liberté, Egalité, Fratricide«), 1918년, 41,2 × 31,2 cm / Color lithograph on paper Leopold Museum, Wien © Fondation Oskar Kokoschka/Bildrecht, Wien 2014

실존적으로 힘들었던 전쟁기는 실레에게는 예술적인 돌파력을 안겨줬는지, 특히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던 1917-18년이 되자 그의 작품들은 과거와는 달리 인생, 공포, 좌절, 죽음 같은 멜랑콜리적이고 위태로운 요소를 한결 제거하고 한결 조형적이고 기하학적 위주로 그림을 그리며 작품성을 한결 드높여 미술계의 총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꿈도 잠시.

전쟁이 막 끝나기 전 실레는 1918년 2월 클림트의 임종을 지키며 임종 초상을 그렸고, 그 자신 전쟁이 끝나자마자 같은 해 가을 유럽에서 창궐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28세라는 때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존재의 고통, 전쟁의 트라우마
그런가하면 독자적인 표현주의 그림을 그리던 오스카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최전방에서 기갑군으로 싸우면서 육체적 부상과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고 돌아와 전쟁의 참혹함을 되세기는 격렬한 그림을 계속해 그렸지만 끝내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전쟁통의 우울을 미술로 표현한 또다른 화가 안톤 콜릭(Anton Kolig)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마자 전쟁을 피해 망명하려 애쓰다가 어렵사리 이탈리아를 경유해 남 프랑스로 피신했지만 결국 1916년 전쟁 기록 화가로 일하게 되었다. 그가 특히 많이 그린 그림은 포로 수용소에 감금된 적군 지휘관들의 초상화였으나 그의 그림은 너무도 솔직했던 나머지 전쟁 홍보용 그림으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대신 콜릭는 전투 장면이 담긴 최전방 풍경화를 잘 그려서 1917년 황실 전쟁 홍보실 전속 화가로 위촉되어 전쟁 기록화를 다수 그려 남겼지만, 전쟁통 내내 “나는 막중한 고통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고통스러워 했다.

20세기를 연 전 세계적 글로벌 전쟁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되었던 미완의 전쟁 –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에서 참혹하고 무지막지한 혁명의 고비였다. 그러나 현재의 눈에서 본다면 구체제 절대주의를 청산한 유럽의 체재 변혁기이자 전 인류를 계급의 ‘감옥’으로 해방시켜준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미술은 평화기이든 전쟁기이든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클림트 풍경화가로 다시보기

GUSTAV KLIMT’S LANDSCAPES

올해[2002년]로부터 약 2년전인 2000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에 자리한 갤러리 벨베데레에서는 《구스타브 클림트와 여인들》展이 열려 이곳 국내외 미술애호가들의 큰 관심을 끌었던 바 있다. 벨베데레 갤러리가 있는 벨베데레  궁은 오스트로-헝거리 제국 시절 1714-22년 무려 8년에 걸쳐서 사보이의 오이겐 왕자가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바로크 양식 궁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립 미술관으로 지정되었는데, 클림트를 비롯해서 에곤 쉴레, 리햐르트 게르스틀, 오스카 코코슈카 등 19-20세기 전환기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Continue reading

미술을 통해 본 결혼의 모습 어떻게 변했나

Rembrandt van Rijn 『The Jewish Bride』, 1667. Rijksmuseum Amsterdam

Rembrandt van Rijn 『The Jewish Bride』, 1667. Rijksmuseum Amsterdam

WEDDINGS THROUGH THE AGES

19세기 미국의 정치가, 과학자, 저자였던 벤자민 플랭클린 (Benjamin Franklin)에 따르면 모름지기 „결혼이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로 행복한 상태“라고 했다. 남남이 만나 평생 동안 함께 할 것을 맹세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계약 관계이기도 한 결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경험하기도 하는 결혼은 생노병사(生老病死)와 희노애락(禧怒愛樂) 인생살이에서도 빼놓은 수 없는 인생여정의 한 과정인 만큼 예식으로서의 결혼식이란 즐비한 먹거리로 손님을 대접하는 만찬 (feast)과 축제 (festival)를 열어 신랑과 신부의 미래를 한껏 축복해 주는 잔치이다.

After_the_Prom_norman-rockwell-1957

“나와 결혼해 주겠소?” 노먼 락웰 (Norman Rockwell)이 1957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The Saturday Evening Post)》誌 표지에 기고했던 일러스트레이션 「고등학교 졸업 무도회 이후 (After the Prom).

개인주의 의식의 발현으로 두 남녀 [※2000년부터  네덜란드에서는 동성의 결혼도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개인이 구애와 연애 끝에 사랑과 신뢰라는 가치관을 주축으로 해서 결혼이라는 평생 언약식을 올리는 결혼식이란 20세기 후반기에 와서야 널리 보편화된 현상이었다.

허나 그 이전까지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에게 결혼이란 종교적 사회적 통합과 평화 유지, 경제적인 교환 가치, 자손 대잇기 같은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략 결혼, 신부 매매, 신부 도둑질 관습을 두루 지칭하는 인간사회 내 각종 형태의 부족간 혹은 가문간의 짝짓기 관행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결혼식이라는 의미로 널리 일반화된 웨딩 (wedding)이라는 단어는 본래 18세기 영국에서 신부의 아버지가 자신의 딸과 신랑을 결합을 알리는 공식 행사를 직접 주간해 딸자식의 보호와 책임을 다른 가족 출신 남성에게 이전하는 신부 이행 예식 (ceremony)을 일컫는  ‚비웨딩 (bewedding)’ 예식에서 유래했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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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산에서의 제우스와 헤라의 결혼.

인류의 역사 아주 오래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유태교 전통에서는 남녀 간의 성적·사회적 결합을 종교적이고 법적인 차원에서 인정하기 위해 결혼식이라는 예식을 중히 여겨 실시했다 한다. 그같은 전통은 예수가 살았던 초기 기독교 시대 기원 후 한 두 세기 그리고 이어서  고대 로마 시대로 계승되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신중의 신 제우스가 사랑의 여신 비너스와 이다산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은 고대 로마 시대 실내 장식용 벽화로 그려져 지금도 이탈리아 나폴리에 남아있다. 최고의 신과 여신이 결혼 서약을 하는 그 고결한 맹세에도 불구하고 사랑, 기쁨, 배신, 질투가 뒤섞인 인간의 모험 넘치는 격동의 결혼생활을 암시하는 듯 하다. 아틀란타와 히포메네스, 술의 신 디오니수스와 아리아드네도 결혼을 했는데 (그 장면을 그린 그림은 폼페이에 있는 빌라 데이 미스테리 프레스코 벽화에 남아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 로마 시대의 결혼식에서는 결혼의 신 히메나에우스 (Hymenaeus)를 기리는 결혼시(詩)가 읊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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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 『산보 (Promenade)』1917년 작, 캔버스에 유채, 170 x 164 cm (66 15/16 x 64 9/16 in.).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한편 유대교 신자들은 결혼식에서 온갖 다채로운 축하 무용을 발달시켜 온 것으로 유명한데, 그같은 흔적은 유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 (Fiddler on the Roof)』에 나오는 결혼식 장면이라든가, 화가 마르크 샤갈 (Marc Chagall)이 결혼과 결혼한 남녀를 주제 삼아 즐겨 그렸던 환상적인 분위기의 유화 그림들에서도 발견된다.

고대 유태인은 결혼식 만찬에서 신랑이 신부와 춤을 추는 것은 반려자를 향한 헌신 (devotion)의 표시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들의 문화권에서도 남녀칠세 부동석 원칙이 철저했던 중세시대에는 각각 신부와 신랑은 같은 성의 초대 손님들과만 춤을 출 수 있었지만 점차 그같은 규칙이 느슨해 져서 손과 손에 손수건을 대고 신랑신부와 남녀 객빈들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춤을 추는 풍습이 일반화되었다.

유대교 초기 기독교, 로마 카톨릭교, 불교 등 인류 초기 역사에서 번성했던 주요 종교들을 보면 언제나 성직자나 신앙인들의 종교적인 성생활 금지 원칙으로 인한 성적(性的) 긴장이 항존했던게 사실이다. 종교에 귀속한 남녀 수도승들이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수도원에 은적하며 수도에 전념하는 것을 신과 일대일의 상징적 결혼식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일반 신도들은 일부일처제의 결혼 서약을 통해서 부부의 화합을 고결하고 성스러운 평생의 헌신 행위로 발전시킨 것이다. 인류의 주요 종교가 결혼한 상태 혹은 기혼자를 미혼 상태나 미혼자들보다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게 된 기원도 바로 여기에서 기원하는 바가 크다.

예컨대, 고대 유대교 율법서 『탈무드 (Tamud)』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자(남성)는 살인자와 같으며 신의 형상을 짓밟는 자이다“라고까지 했으며, 조로아스터교에서 사용되는 성전인 아베스타 (Avesta)에서도 „결혼한 자는 결혼하지 않은 자보다 신분상 우월하다“라는 유사한 언급이 나타나있다. 그러니 결혼한 자는 지역사회와 가족친지들에게 책임감있고 독립적인 성인으로 인정받는 그같은 통념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서와 고금을 통틀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인류 보편의 집단의식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Kulturgeschichte / Liebe / Hochzeit / Hochzeitsfeier

얀 스테엔 『농군의 결혼 피로연 (Country Wedding)』1670년, 57 x 68 cm.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Gemäldegalerie.

과거 시절의 결혼의 개념은  세월이 지나고 역사가 발전해 온 결과,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결혼이란 신랑과 신부간의 사랑, 행복, 그리고 미래를 향한 모험이라는 애정이 위주가 된 일부일처제 언약 관계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기 기독교 시대 예수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신약성서 계시록에 등장해 특히 일부다처제가 일반화되어 있던 고대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사실상 결혼이라는 제도는 기독교 교리에 의해 최초로 남녀의 관계 더 나아가 부부를 위주로 한 가족 관계와 자녀의 부양을 종교적이고 영적(靈的)인 단계로 격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다.

무릇 „…결혼식과 연회 잔치는 손님많고 먹을 것 많은 즐거운 생사이어야 하며 신랑신부의 첫날밤 침실은 선하고 성스러운 것이 될지어다…“라고 한 신약 에페지안서 5장 내용처럼 결혼식 잔치와 부부의 화합은 기독교의 축복을 잔뜩 내려 받은 인생 관례 행사가 되었다.

서양에서 신랑신부의 결혼식 복장과 첫날밤 침실을 흔히 아담과 이브의 형상, 생명의 나무, 금슬좋은 쌍쌍새 등과 같은 상징성 깊은 문양들로 장식해 성스러운 분위기로 연출하곤 했던 것이나 결혼하는 신부에게 값진 가구나 세공장식품을 선물해 보내는 풍습 등은 딸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오동나무를 심어 혼수가구를 준비하고 혼수품을 준비해 시집보내거나 혼인 첫날밤을 중요하게 여기는 옛날 우리나라 풍습과 아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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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코포 로부스티 틴토레토(Jacopo Robusti Tintoretto)가 그린 『가나에서의 결혼 만찬』 1561년, 캔버스에 유채, 4.35m x 5.45 m. 베네치아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 (Sacristy of the Chiesa di Santa Maria della Salute, Venice)의 주문을 받아 그려 바쳐진 이 그림은 현재에도 이 교회의 성물안치소에 남아있다.

„양고기 저녁상에 초대된 자들이야말로 축복받은 자들일지어다“ [계시록 19장9절]라고 한 말에서 예수는 메시아 – 즉,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난 예수 자신 – 의 선택을 받아 구원받은 자들은 양고기가 있는 저녁 식사에 초대될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저녁 식사상을 두고 혼인 축하연 (Wedding Feast)이라고 비유하곤 했다.

여기서 예수는 구약성서 창세기 부분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 아브라함과 사라 처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해 하나의 육신이 된다고 설파함으로써 일부일처제의 정당성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서양 초기 기독교 시대와 중세기 이후로 르네상스기까지 카나에서의 결혼 만찬 (The Marriage Feast of Cana)이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기도 했던 인기 주제이기도 하다.

데이비드와 바드셰바의 결혼식 만찬 도중 초대석에 앉아 있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포도주가 모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 잔치의 주인이 부끄러운 곤경에 처할 것을 우려하여 아들 예수를 시켜 잔치상을 포도주와 음식으로 가득채우는 기적을 행하게 한다는 성서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이 바로 『카나에서의 결혼 만찬』이다.

Raffaello, Spozalizio (The Engagement of Virgin Mary), 1504. Oil on round-headed panel, 170 x 117 cm. Pinacoteca di Brera, Milan.

라파엘로 (Raffaello), 《성처녀 마리아의 약혼식 (“La Spozalizio” (The Engagement of Virgin Mary)》 1504년. Oil on round-headed panel, 170 x 117 cm. Pinacoteca di Brera, Milan.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했는데 신부의 처녀성과 결혼과 가족의 성스러움을 중시했던 서양 기독교와 기독교 미술은 이같은 놀라운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성서에서도 흔히 발견되듯 마리아의 몸을 빌어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때어난 예수는 어머니를 향해 „여인이여, 나와 무슨 용건이 있는가?“ [요한서] 라고 했을 정도로 어머니 마리아와 거리를 두었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칭하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에서 마리아 신앙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고대 지중해 지방에서 비기독교 이교도들이 급격히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기원후 400-500년도부터 비로소 예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성처녀“ 혹은 „성모“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숭배의 대상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예수의 생애를 묘사한 중세 기독교 미술과 르네상스 미술에서는 „마리아의 결혼식 장면(Wedding Procession 또는 Marriage of the Virgin)“  „수태고지 (Annunciation)“ „예수 탄생과 동방박사의 방문 (Adoration of Magi)“ „성처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 (Virgin Mary and Jesus)“상을 통해서 마리아는 하나님이 육신화한 예수를 낳아 준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으로 나타났고, 특히 [마리아의 결혼식 장면을 그림 작품]들은 서양 중세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결혼식 풍경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자료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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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아이크 『아르놀피니의 결혼』1434년, 떡갈나무판 위에 유채. The National Gallery, London.

역시 르네상스 시대이지만 장소를 바꾸어 북구 유럽으로 잠시 눈을 돌려 보자. 네덜란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거장 화가 얀 반 아이크 (Jan van Eyck)의 걸작 『아르놀피니의 결혼(Arnofini Marriage)』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은 르네상스 미술사가들 사이에서 미술 속의 도상과 상징 연구에 즐겨 활용된 바 있는 의미심장한 작품이자 화가의 탁월한 묘사력과 손재주로 보는이의 감탄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귀족이자 난봉꾼으로 이름이 자자했던 아르르놀피니가 결혼 서약을 하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려진 이 그림 속의 두 신랑신부는 사랑 보다는 경제적 사회적 필요에 의한 계약으로써의 결혼이 널리 행해지던 당시 15,6세기 유럽의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충직과 헌신을 상징하는 개,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 평탄치 못할 결혼의 미래를 예견이나 하듯 고개를 삐딱이 기울이고 있는 신부의 모습 등에서 보는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묘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특히 국제 무역과 상업으로 경제적인 부흥을 한껏 경험했던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신흥 부유층의 높아가는 수요에 부응해 풍속화가 널리 유행했다. 그림을 주문한 고객의 희망사항에 따라서 가문의 넉넉함을 자랑하기 위한 과시용 장식품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또 혹은 낭비, 방탕, 무절제의 악덕을 꼬집고 풍자하는 교훈 그림으로 그려져서 집안 거실이나 식당 벽에 걸어 장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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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브뢰겔 아들 (Pieter Bruegel the Younger), 『농군 결혼 잔치 (Peasant Wedding Dance)』1623년, 목판에 유채. 개인소장.

인물 초상화, 우리나라 조선 후기의 민화처럼 집안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정물화, 그리고 집주인이나 아녀자들의 생활상이나 농부나 시녀의 일상을 묘사한 풍속화 등 집안 장식용이나 게으름, 방탕, 낭비를 말라는 훈계용 그림들 가운데에는 농가나 하층계급자들이 모이는 주점이나 실내를 배경으로 한 결혼 피로연이나 춤잔치를 묘사한 작품들이 즐겨 발견된다.

일찍이 히에로니무스 보시 (Hieronymus Bosch)를 비롯해서, 페터 브뢰겔 (Peter Bruegel), 얀 스테엔 (Jan Steen) 같은 바로크 시대 풍속화가들이 그린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결혼식 장면 묘사는 초대된 수많은 하객들이 음(飮)과 주(酒)를 한껏 즐기며 진탕하게 노는 축제를 묘사했다. 이 그림들의 도상적 뼈대는 분명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에서 즐겨 등장하던 성서 속 카나에서의 결혼 연회 일화에서 빌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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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소 (Henri Rousseau) 가 그린 『결혼 잔치 (The Wedding Party) 』 1905년 경, 캔버스에 유채, 163.0 x 114.0 cm. Musée de l’Orangerie, Paris © Photo RMN – C. Jean.

18-19세기 서양 문명은 귀족주의 체제가 서서히 그 쇠퇴을 길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근대적인 사고와 과학의 발전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모더니즘과 개인주의 의식이 폭발적으로 번지기 시작한 19세기말-20세기초 세기전환기 유럽, 드디어 결혼이란 소수의 상류지배계층이나 평민족들에 할 것 없이 부족들 혹은 가문들 사이의 사회적 윤활과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 더이상 아니라 사랑의 결실이자 새인생 출발을 위한 두 자유로운 개인 간의 선택과 의지의 상징이라는 근대적인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이란 사회적 약속이자 관례로 남아있다. 19세기 스페인 절대주의의 잔학성과 인간의 어두운 면을 그림으로 고발했던 고야 (Francisco de Goya y Lucientes)의 『결혼식 (The Wedding)』은 갓 결혼의 서약을 마친 행복한 신랑신부의 모습 보다는 특에 박힌 제도와 맹목적인 복종의 틀에서 맴도는 딱한 하층계급인들의 일상 속의 한 단면을 포착한다.

결혼이란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두 남녀가 평생을 함께 하리라는 맹세이자 의식적인 개인 의사 표시가 된 오늘, 미술은 점차 결혼식의 황홀감과 결혼 생활의 행복을 표현하게 되었다. 20세기초 프랑스의 에뒤아르 루소 (Eduard Rousseau)의 『결혼식 (The Wedding)』은 천진난만한 아름다움을 안겨주며, 마르크 샤갈의 『결혼식 (The Wedding)』이나 『산보 (The Stroll)』는 결혼식 혹은 결혼한 상태는 환상적이고 행복함을 넘어 성스럽기까지한 남녀의 화합임을 잔뜩 강조하는 그림들이다.

* 이 글은 본래 『오뜨 웨딩 (Haute Wedding)』 지 2003-2004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