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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디 화가가 된 귀족남

닐스 다르델 – 근대 유럽의 민주적 댄디

“NILS DARDEL AND THE MODERN AGE” at Moderna Museet, Stockholm

닐스 다르델 ⟨숨져가는 댄디(The Dying Dandy)⟩ 1918년 © Nils Dardel.

닐스 다르델 ⟨숨져가는 댄디(The Dying Dandy)⟩ 1918년 © Nils Dardel.

근대기 유럽 미술계에서 하이소사이어티에서 기인 화가이자 개성 강한 댄디로 알려져 있던 닐스 다르델(Nils Dardel). 오늘날 스웨덴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국민 화가가 되었지만 그가 국민 화가 대접을 받기 시작한 때는 그다지 오래전이 아니었다. 남달리 개성이 강한 패션 감각, 기이한 성격, 인습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사생활을 고집했던 꾀짜라는 딱지에 가려 198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 덕택에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댄디(Dandy)란 본래 18세기 영국에서 인류 문명과 최고로 세련된 매너를 배우러 이탈리아로 유학여행을 떠나던 엘리트 교육과정, 이른바 이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하고 돌아온 귀족 남자 자제들을 뚯했다. 이렇게 이탈리아 여행 Continue reading

피어라 고통과 죽음의 꽃이여!

MUNCH BY HIMSELF AT MODERNA MUSEET STOCKHOLM

에드바르트 뭉크의 자화상을 통해 본 근대 여명기

올해 2013년, 20세기의 거장 에드바르트 뭉크를 낳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는 이 화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특별전시와 문화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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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 화가의 모습을 담긴 <자화상> 1886년도 작. Nasjonalmuseet for Kunst/Najonalgalleriet, Oslo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뭉크 미술관에서 도난 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뭉크 그림 밖에 없습니다.
“이건 아주 비싼 밍크 코트예요. 절대 도난당하는 일 없이 잘 보관해 줘야 해요.” 한 돈많아 보이는 몸집 큰 노여인이 외투를 벗고 미술관 전시장을 입장해 달라는 미술관측 지시를 받고는 뭉크 미술관 입구 물품보관소 직원을 향해서 모피 코트를 건데며 불평을 토로했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뭉크 미술관의 한 고위 직원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쏘아 붙였다. “부인, 이 미술관에서 도난 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뭉크 그림 밖에는 없답니다.”

화가 뭉크에 대한 노르웨인 국민들의 크나큰 자부심이 느껴지는 이 짤막한 농담은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에서 일한 적 있는 한 미술관 직원으로부터 들은 잊지 못할 일화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지날달 3월 6일 [2005년], 노르웨이 남부 지방에 있는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뭉크의 진품 그림 석점이 도난을 당해 홀연히 사라졌다가 하루만인 이틀만에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 온 사건이 벌여져서 전세계 미술애호인들을 놀라게 했다. 뭉크 그림 도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뭉크는 고가 미술품 도난 사건 목록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단골 손님이다.

이미 1994년에는 전문 미술품 도둑 두명이 사다리를 타고 오슬로 국립 갤러리 창문을 통해서 침입해 『절규 (The Scream)』를 훔쳐 간 일이 있었고, 그보다  일찌기 1990년에도 같은 박물관에서 『마돈나 (Madonna)』가 도난당했다가 경찰의 추적 끝에 오슬로 국립 갤러리 품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발생했었다. 그리고 또다시 작년[2004년] 8월 말에는 평상복 차림의 도난꾼 둘이서 환한 대낮에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 느긋하게 걸어 들어가 뭉크 그림 2점을 버젓이 훔쳐 도망친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뭉크 미술관의 보안 수준은 뭉크 작품에 대한 미술관 측의 드높은 자부심과 애정이 무색할 정도로 크게 뒤떨져 있었음이 또다시 노출된 셈이 되었다.

작년 발생한 이 사건이 남긴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도난당한 두 작품이 뭉크의 가장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그 유명한 『절규』와 『마돈나』라는 것과, 범인들은 아직도 잡힐 낌새없이 범행의 실마리조차 묘연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들의 가격은 이미 돈으로 살 수 없는 국보급이 된지 오래다. 현재 미술 시장의 시세로 추정하자면 『절규』는 9천만 달러 (유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9백억원) 그리고 『마돈나』는 1천8백만 달러 (약 1백8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뭉크 작품 도난 사건은 노르웨이의 국가적 체면이라는 면으로 보나 작품 시세 면으로 보나 막대한 손실을 안겨준 안타까운 사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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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속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Hell)』 1903년 작. Munch-museet, Oslo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비록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모양새가 되긴 했어도 미래의 또 다른 도난 사건을 방지하겠다는 차원에서 뭉크 미술관은 현재 미술관 건물 개축 공사에 한창이며 올 가을에 새로운 모습과 강화된 보안 체계로 무장한 후 뭉크 미술관을 재개관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유럽 최북단 대륙인 스칸디나비아 땅의 맨 왼쪽에 자리해 있는 북극광과 절묘한 피요르드 해안 경치를 자랑하는 나라 노르웨이가 가장 아끼는 국가대표급 문화재는 단연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년)이다.

뭉크는 노르웨이 특유의 감성과 기질을 표현한 가장 노르웨이적인 화가임과 동시에 서양 근대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가장 세계적인 예술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1963년에 처음 문을 연 이래 오늘날까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명물로 남아 있는 뭉크 미술관 (Munch Museet)은 1944년 화가가 사망하기 직전에 오슬로 시에 그가 수중에 보관하고 있는 작품들 일체를 기증한 것들을 모조리 소장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 뭉크 미술관이 건물 개축 공사를 하고 있는 기회를 이웃나라 스웨덴에서는 이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뭉크의 여러 대표작들과 특히 화가의 자화상들을 대거 대여해 와 이번 『뭉크 자신이 그린 뭉크 자화상 (Munch by Himself)』 展을 기획했다. 2월19일부터 오는 5월15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국립 근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에서 대형 전시로 올려지고 있는 이 전시는 뭉크의 자화상이라는 주제로는 최대 규모로 열리는 특별전이라는 점 때문에 미술관객들과 언론의 관심도 잔뜩 불러 모으고 있다.

절망, 고통 그리고 죽음 – 뭉크의 영원한  영감의 원천
화가 뭉크의 작품 세계를 총집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작 『절규』 만을 보더라도 화가의 내면에 들끓고 있던 경련하는 내적 심리와 공포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으리라.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가 근대 예술 철학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예술 작품이란 모름지기 소리쳐 절규 (Das Geschrei)하지 못하면 더 이상 예술 작품으로서의 표현에 실패한 것고 다름없다”고 한 지적을 뭉크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작품이 삼아야 할 핵심 모티프로 삼았다. 뭉크의 『절규』(1893년)가 20세기 근대 시대에 사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감과 고통을 그림으로 분출시킨 가장 폭발적인 표현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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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1892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Thielska Galleriet, Stockholm.

서른살 무렵의 화가 뭉크는 친구 2명과 나란히서 저녁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저녁 일몰 시간, 오슬로 시내 하늘과 피요드르 해안 수평선은 갑자기 검푸른 색으로 변하고 바다물과 수평선은 온통 시뻘건 피와 혓바닥처럼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다리 위를 걷던  뭉크는 갑자기 피로와 구토감을 느끼면서 쓰러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다리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화가는 자신의 신체를 관통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고 동시에 자연 속에서 절규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1892년 뭉크의 자화상 『절망 (Despair)』과 이듬해인 1893년에 완성된 불후의 명작 『절규』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두 손으로 파랗게 질려 길게 늘어진 머리통을 붙잡고 괴성을 질러대는 그림 속의 주인공은 고뇌하는 근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뭉크 자신의 모습인데, 강렬한 색과 진동하는 듯한 곡선을 통해 표현된  절규의 음파는 서양 미술사에 기리남을 ‘청각의 시각화’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이미 알만한 미술 애호가들은 알고 있으시겠지만 『절규』라는 제목으로 화가가 그려 남긴 진품 회화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 지는 것들로는 현재 2점이 남아 있는데 한 점은 뭉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가 작년 도난당한 것이며 나머지 한 점은 지금도 오슬로 국립 갤러리에 영구소장되어 있다.

“… 인생이란 폭랑이 불어치는 광활하고 광폭한 바다에 홀로 표류하는 한 척의 낡은 배…배가 난파하면 모조리 네 탓이며 그에 대한 죄로 지옥에서 영원히 불탈 지어다. …”

화가 뭉크에게 인생이란 나약한 신체와 영혼이 헤쳐가야할 무력하고 불안하며 외로운 여정이었다. 19세기 후반기 유럽의 대기를 온통 휩쓰고 있던 낭만주의 (Romanticism)나  감상주의 (sentimentalism)적 체취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화가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격동하는 유럽의 정황 속에서 어딘가 감상적이고 낭만적이며 내면적 환상을 외부로 강렬하게 표현할 것을 사명을 삼았던 이른바 표현주의 계열을 미술을 추구한 화가들로는 뭉크 뿐만 아니었다.

예컨대, 네덜란드 출신이면서 젊은 시절 성직자로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표현주의 미학의 계보를 일으킨 반 고흐 (Van Gogh)라든가, 기괴하고 으스스한 가면 이미지로 고전적 표현주의 회화 세계를 새롭게 개척한 벨기에 출신의 제임스 앙소르 (James Ensor),  그리고 니체의 ‘질풍노도 (Sturm und Drang)’로 대변되는 낭만주의와 허무주의 철학을 질병, 공포, 죽음이라는 주제로 승화시킨 스위스 출신의 페르디난트 호들러 (Ferdinand Hodler) 등은 저무는 구시대를 뒤로 하고 근대라는 신시대를 대비하며 불안에 떨던 세기전환기 근대인들의 집단적인 노이로제 상태를 표현한 동시대 화가들이다.

같은 시기, 미국의 대문호 에드가 앨런 포우 (Edgar Allen Poe)와 빈의 낭만주의 작곡가 바그너 (Richard Wagner)도 세기 전환기의 긴장을 유사한 감성으로 표현했고,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근대인들의 억압된 무의식과 성의 세계를 탐구하는데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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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가면 아래에 서있는 화가 자화상 (Self-portrait Beneath a Female Mask)』 1893년 경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80년이라는 짧지 않은 예술 인생을 불태운 화가의 일평생은 극적이라면 극적이라 할 수 있는 시련과 절망을 경험했는다고 한다. 그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친 이미저리와 상징들은 화가의 매우 개인적인 성장 경험과 내면적인 트라우마의 결정체들이다.

특히 뭉크는 자신을 그토록 평생 동안 고뇌로 몰아 넣었던 내적 갈등과 고통의 근원을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비극적인 가족사에서 발견했던듯 하다.

그는 “성직자와 바닷사람은 농담을 불허하는 심각한 사람들”이라고 꼬집었는데, 여기서 성직자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농부 출신의 모친을, 바닷사람이란 해군 군함의 의료장교 겸 지휘관으로 일했던 부친을 각각 지칭하는 것이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폐결핵으로 앓던 농가집 출신의 23세 하녀와  44세난 중산계층 출신의 중년 남성의 결혼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결합이었던 만큼 계급적 격차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 긴장의 관계였다. 그나마도 뭉크의 부모는 기독교라는 정신적 영혼적 유대감으로 결혼 생활과 가족을 이끌어 나갔는데,  청교도적 윤리를 유독 강조했던 기독교식 집안 교육은 이후 화가 뭉크의 사생활 속의 정신적인 억압과 성적인 죄책감으로 이어져 그림으로 표현되곤 했다.

특히 여성을 향한 화가의 내면적 갈등은 그의 그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 신비스럽고 광채가 나는 흰색 드레스 차림을 한 젊은 여인은 순결한 처녀,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있거나 붉은 안색을 한 여인은 정욕과 파멸을 부르는 성숙한 여인, 그리고 검정색 드레스와 창백한 안색을 한 초쵀한 여인은 인생과 남성관계 끝에 인생의 쓴맛과 비탄을 경험한 닳고닳은 여인으로 해석되곤 한다.

예컨대 그 유명한 뭉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사춘기 (Puberty)』(1894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나체의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 덧없이 사리지고 말 사춘기 소녀의 가녀리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소녀 옆 켠에 도사리고 있는 짙은 회오리 덩어리는 이 가련하고 청순한 소녀를 뇌살적이고 파괴적인 성숙한 여성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893년 작인 『여인 가면 아래에 서있는 화가 자화상』이라든가 1894년부터 무려 4년에 걸쳐 그려진 『살로메 장절』은 살로메=파멸의 여인이라고 말하려는 화가의 자신의 공포감을 표현한다. 이것은 당시 수많은 근대기 남성들을 공포로 몰아 놓었던 신여성 사상과 파멸을 부르는 여인 (팜므 파탈, femme fatale) 혹은 거세 공포증에 대한 불안감을 아동애 (pedophilia)적인 이미지를 빌어서 현실 속의 여성 관계로부터 도피해 보려던 남성 심리의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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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죽음 II > 1907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뭉크 그 자신도 실제로는 어린 처녀를 향한 동경과 애욕을 느꼈지만 동시에 성숙하고 요염한 여인으로 부터는 긴장과 공포를 느꼈고, 모친과 자매의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불행했던 성장과정을 한탄하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은 기피했으며, 그당시 다른 재능있는 미술가들과는 달리 생전 어지간한 명성과 부를 누렸으면서도 내적 고뇌와 병치레로 두문불출 거의 실내에 갇혀 지냈다.

비극의 인연으로 끝난 중년의 매혹녀 툴라 라르센 (Tulla Larsen)과의 결별을 표현한 그림 『마라의 죽음II (The Death of Marat II)』(19907년)에 보면, 화가는 이제 고통과 무기력을 초월하여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어쨋거나 결국 그는 그 모든 내적 갈등과 불안감을 화폭을 통해서 표현한 소심한 샛님 화가 선생이었던 게다.

16살난 청년 뭉크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해인 1880년. 당시 노르웨이는 어딘가 두서없어 보이지만 놀라운 천재적 잠재력을 잔뜩 품은 이 화가 지망생의 재능을 발굴하기에는 너무 좁고 지엽적이었다. 보다 큰 세상에서 미술을 배워보자는 생각에 청년 뭉크는 우선 독일로 건너가서 엄격한 독일식 아카데미 미술 교육을 접하지만 곧 표현적인 한계를 느끼고는 파리로 건너갔다. 이렇게 뭉크는 20대 중반부터 미술의 중심 도시 파리에서 보고 들은 새로운 사상에 ‘자연을 묘사하는 그림이란 화가의 내면이 표현되어야만 가치가 있다’고 한 화가 고유의 표현주의 철학이 버무려진 화풍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화가는 자기가 넓은 세상에서 배워온 미술 세계를 개인전을 통해서 노르웨이 화단에 꾸준히 소개하곤 했지만 모국의 화단은 선구적이고 무서울 정도로 솔직대담한 뭉크의 표현주의 미학을 이해해 주질 못했다고 한다. 특히 1890년대에 뭉크는 그같은 좌절감을 반영이라도 하듯 어린 시절 경험한 모친과 누나 그리고 부친의 오랜 병고와 죽음이 남긴 충격을 반복해서 그림으로 남겼다. 당시 유럽에서는 병자의 침실을 묘사한 그림들이 심심치 않게 그려질 정도로 병실 및 임종 광경 그림이 유행을 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 멜랑콜리와 신비의 전율을 강도높게 전달한 화가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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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Vampire)』 1895년 작 © Munch-Museet/Munch-Ellingsen gruppen/BUS 2013. Photo: Prallan Allsten /Moderna Museet.

1910년대, 뭉크는 특히 독일 화단과 화가 집단에서 깊이 선망되는 외국인 화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미술사에서 뭉크를 유럽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가 당시 여러 독일 표현주의파들에 끼친 영향력 때문이다.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는 이미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높이 칭찬했으며, 또 그런가하면 뭉크는 역시 독일 표현주의자인 프란츠 마크 (Franz Marc)로부터 보다 강렬한 색채 감각을 배워왔다.

뭉크가 독일 화단에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때는 1892년 베를린 화가 연합의 주최로 열린 뭉크 개인전을 통해서 였는데, 이 전시는 일명  ‘스캔들 전시’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베를린 화랑계를 찬반의 논란으로 몰아 넣었다. 저자세 일관의 얌전한 품성의 뭉크의 주변에도 남몰래 도사리고 있던 숙적이 있었는지라 독일의 보수주의파 고전 화가로 부터 뭉크의 그림은 타락스런 프랑스적 취향으로 푹 젖은  ‘퇴폐미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 소동은 프랑스-독일간의 프로이센 전쟁을 끝으로 유난히 첨예해진 당시 프랑스와 독일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던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전시를 둘러싼 ‘스캔들’은 뭉크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안겨주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논란과 화재를 몰고 다니는 전시회는 뭇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법인지, 뭉크는 이 전시를 끝으로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지만 불티나게 팔려나간 입장권 매출 덕분에 전에 어느새 돈주머니 두둑해진 ‘성공한’ 화가가 되어 있었다.

진정 베를린은 뭉크가 화가로서 성공하는데 분수령적인 순간을 마련해준 행운의 도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뭉크가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정붙이며 살았던 독일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든 운명의 도시이기도 했다. 어느새 베를린에서 떨친 뭉크의 명성은 고국에까지 알려져서 19세기말 노르웨이 근대 극문학의 기수 입센 (Henrik Ibsen)의 상징주의 문학에 불을 치폈으며 그 결과 입센의 희곡대본 『유령들』과 『헤다 가블러』를 위한 연극 무대 장치 디자인까지 했던 것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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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1906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특히 뭉크의 10여년 동안의 독일 체류기는 그로 하여금 초상화라는 회화 쟝르를 실험하는 기회를 제공해준 값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뭉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돈많은 독일 미술애호가들과 후원자들은 뭉크에게 개인 및 가족 초상화를 주문해 그려가곤 했는데, 특히 그들은 뭉크 만이 포착해 낼 수 있는 심리적 깊이와 통찰력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를린에서의 독신생활과 과중한 주문 작업에 밀려 지내던 뭉크는 점차 억누를 수 없는 정신불안증을 이겨내기 위해서 싸구려 와인과 독한 환각주인 압생트에 의존해 보지만 결국 심각한 정신분열증과 알코홀 중독으로 몸과 영혼이 피폐해진 나머지 코펜하겐의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에 이르렀다. 1906년도에 그려진 『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Bottle of Wine)』 속 화가는 주변 환경 속에 눌리고 지쳐서 시린 고독과 무기력으로 시름하고 있다.

전유럽이 제1차대전이라는 격동과 비극의 시대를 항해하고 있을 1910년대, 뭉크는 입체주의나 미래주의 처럼 당시 파리에서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던 미술 신사조에 접하면서 피카소와 더불어 거장 화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와서 작업을 하고 있던 50대의 뭉크는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젊고 아름다운 여성 모델에 빗대어 그림으로 그리는 것으로써 또다른 제2의 자아를 탐구하고 있었다. 중년을 넘어선 화가는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천착해 오던 시대적 불안감, 고통, 불안감이라는 주제를 더이상 즐겨 다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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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 밤에 배회하는 자 (Self-Portrait. The Night Wanderer)』 1923년부터 제작 미완성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마라의 죽음』 시리즈에는 젊은 여성 모델이 꽃다발 속에 숨겨둔 칼로 화가를 찔러 죽일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암시가 넌지시 담겨 있다. 특히 뭉크는 생애 말년 동안 그 어떤 다른 쟝르의 그림 보다 자화상을 즐겨 그리곤 했는데, 그의 자화상들에는 어김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든 남성과 가혹하고 음산한 기다림이 서려있음이 느껴지곤 한다.

『자화상 – 밤에 배회하는 자』 속에 나타난 주인공은 창문으로 대변되는 지독한 고독감과 불안감으로 잠 못이루는 나이든 남자의 모습으로 은밀하게 묘사했다. 화가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에 완성된 『시계와 침대가 있는 자화상』(1942년)에는 시계와 침대 사이에 서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을 임종 침대 옆에서 죽음의 순간을 대기하는 노인네로 묘사했다.

노르웨이는 지금도 이 나라를 뿌리채 사로잡고 있는 ‘뭉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뭉크가 세상을 뜬 1944년 이후로 노르웨이는 뭉크에 필적할 만한 천재 미술가의 탄생은 다시 보지 못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가 미술사에 남긴 시각적 전율과 위력은 대단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가르침 그대로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예술인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존재와 죽음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불안과 실존적 문제를 탐구하는데 바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Images coutersy: 스웨덴 스톡홀름 모데나 무제에트 근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 in Stockholm, Sweden).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2005년 3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마티스의 실내 풍경화 속에 나타난 안락한 코구닝

HENRI MATISSE – A NEW LIFE

„긴 세월 동안 시간이 더해줘 기품으로 윤기를 발하는 침실 가구들, 호박석 옆에서 그윽한 향취를 한껏 발산하는 이색적이고 희귀한 꽃나무 장식, 분위기 있게 페인트칠 된 천정과 깊이를 알 수 없이 신비해 보이는 벽거울, 신비한 동양풍 실내장식들 … 비밀스러운 신비의 언어로 우리의 영혼에 대고 속삭이는 이 모든 사물들 … 이들이야 말로 질서, 아름다움, 럭셔리, 고요,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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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의『 검정 양치 화초가 있는 인테리어』 1948년 유화 작품. Fondation Beyeler, Riehen/Basel © Succession H. Matisse.

19세기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장소를 머릿 속에 상상하며 바로 이런 것들이 한자리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 – 바로 가정의 실내 환경을 한 편의 시로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때는 낭만주의가 창궐하는 전염병처럼 무섭게 번지며 동시대인들의 감성을 사로잡았던 19세기 후반기. 그런 만큼 순수한 장식적 아름다움과 질서정연한  조화에서 기쁨을 찾고 싶어하는 인간 본유의 감성에 잔뜩 호소하는 예술 사조가 등장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화가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는 바로 그런 사고방식을  미술을 통해 추구한 대표적인 화가였다. 일명 야수주의로 불리는 그의 회화 양식은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와 대담한 필치를 사용했으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친근한 매력과 흥건한 분위기가 뒤섞인 순수 아름다움을 이룩했다.

그가 화가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던 1910년대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뼈져린 비극을 격었던 때이며, 미술사조 상으로는 추상적 입체주의를 비롯한 온갖 모더니즘 운동이 실험되고 있던 사상적 갈등기였다. 세상 밖에서 돌아가고 있던 한파와 변화의 물결에도 아랑곳 않고 마티스는 마냥 아늑하고 평화롭기만한 아늑하고 조용한 중산층 가정의 실내 광경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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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과 파랑이 있는 인테리어』 1946년작.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MNAM/CCI © Succession H. Matisse.

구시대 구사상을 청산하고 근대적 선언과 강령들로 신사상의 춘추전국 시대를 맞고 있던 20세기 근대기.

급격한 사상을 추구하던 모더니스트들은 아늑하고 나른한 중산층들의 실내 생활 광경을 다룬 마티스의 그림들은  가리켜서 안일함과 안하무인격 태도로 비춰지며 충격을 넘어 모욕이라고 비난했다. 프랑스 고전 아카데미풍 그림을 연상시키는 그의 살롱화들에는 모더니스트들이 한결같이 퇴물처리하기에 바빴던 요소들로 꽉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마티스의 실내 풍경화들은 환희와 기쁨을 잔뜩 내뿜는 청량한 빨강, 인디안 핑크, 초록 등 지중해빛 색상, 실내에서 한가한 오후를 보내는 가족초상과 여성상, 그리고 동서양 공예에서 영감을 받은 장식 패턴들로 그득하다.

생전 마티스는 자신의 그림이 “… 하루 일과에 시달리고 집에 돌아온 비즈니스맨이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쉬면서 즐길수 있는 미술이 되길 바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마티스는 분명 혁명과 사회 변혁을 위한 미술은 아니었다. 그의 그림을 사주고 감상한 고객은 사회혁명가가 아니라 하루종일 일을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는 교양있는 중산층 시민이었기 때문이었다.

앙리 마티스의 실내 풍경화를 통해서 근대기 프랑스 가정의 포근하고 조화로운 광경을 만끽할 수 있는 전시회 『앙리 마티스 – 새로운 생활 (Henri Matisse – A New Life)』는 올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루이지아나 근현대 미술관 (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에서 [2006년] 올 여름 계속된다. All images coutesy: 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 Denmark.

북구 유럽에 동튼 근대의 새벽

핀란드의 20세기 모더니즘 미술

NORDIC DAWN Modernism’s Awakening in Finland, 189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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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리 갈렌-칼렐라 <봄> 1900년 경 작. 오스트리아 빈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소장.

핀란드의 민족 정신을 일깨워준 불씨 – 모더니즘 미술
서양 미술을 거론할 때마다 20세기초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 운동을 빠지는 일은 없다. 특히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하여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심지어는 동유럽의 여러 대도시들에서 20세기 전후 시기에 가뭄 끝에 산불 붙듯 번진 모더니즘 예술 운동은 학계에서는 물론 일반 문화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핀란드의 모더니즘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20세기 모더니즘 운동이란 종주국인 유럽에서는 물론이고 저멀리 미국, 일본 등에까지 전해졌던 전지국적 국제 예술 운동이었던 만큼 유럽 대륙에 속해 있던 핀란드에서도 모더니즘이 능히 발생과 전개를 경험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핀란드의 독특한 지리적 위치와 역사를 알고 나면 핀란드의 모더니즘은 유럽 중심부의 주류 모더니즘 운동과는 색다른 발생 배경과 전개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

광활한 자연과 신비한 구술 전설의 나라라는 전형화된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 나라 핀란드에 대해서 일반인들의 지식은 대체로 표면적이다. 하물며 우리나라 일반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에서도 일반인들이 핀란드의 미술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는 더우기 널리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오스트리아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Österreiche  National Galerie Belvedere)에서는 『북구 유럽의 새벽 –모더니즘에 눈뜬 1890-1920년기 핀란드 (Nordic Dawn – Modernism’s Awakening in Finland 1890-1920)』 展을 올 초여름인 [2005년] 6월 15일부터 전시로 부치고 있다.

모더니즘 미술이라는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육중한 미술사 연구 분야에서도 핀란드의 모더니즘 미술이라는 분야는 자타가 인정하듯 여전히 많은 연구가 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널리 대중화되어 있지도 않은 미개척 영역으로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한편으로 항상 새로운 전시 주제와 미술 시장 개척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서구 미술계에서 핀란드의 모더니즘 미술을 향한 새로운 관심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빈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에서는 무려 100점이 넘은 근대기 핀란드의 미술 작품들을 대거 한자리에 모아서 보여주고 있어서 대중화된 유명 거장 미술품들이 전세게 대도시들을 번가아 돌며 남발되는 대형 블록버스트식 빅네임 미술 전시회들의 홍수 속에서 한줄기 신선한 소나기 같은 색다른 미술 감상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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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카 할로넨 <얼음 붙은 강가에서 빨래하는 여인> 1990년 작.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소장.

유럽 대륙 최북단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스웨덴과 러시아의 사이에 광활한 숲과 청명한 호수의 나라 핀란드. 자연 조건 면에서, 북극 랩랜드 기후를 지닌 핀란드는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쳐서 21배가 넘는 크기인 30만 평방 킬로 미터에 이르지만 전체 인구는 5십만명 밖에 안되어 유럽에서 이웃나라 스웨덴과 아이슬랜드를 뒤이어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안을 들여다 보면 핀란드는 이 나라 국민들이 어딜가나 가장 큰 자랑거리로 여기는 천재 건축가 겸 디자이너 알바 아알토 (Alvar Aalto)가 수도 헬싱키 안팎을 특유의 단순간결한 근대 미학으로 수놓은 나라이며, 전세계를 통틀어서 그 우수성을 자랑하는 공공 교육 제도와 사회보장 복지 제도를 이룩한 민주국가이기도 하다.

20세기 근대미술, 핀란드의 정치적 독립의 기폭제
이번 전시 『북구 유럽의 새벽 – 모더니즘에 눈뜬 1890-1920년기 핀란드』 전에서 유독 주시하고 있는 촛점은 바로 핀란드의 모더니즘의 탄생과 추진력의 배경은 19-20세기 전환기 핀란드에 불어닥친 핀란드판 민족주의다. 그리고  ‚핀란드식 민족주의 정서’를 규명하고 그것이 핀란드의 미술을 포함하여 건축, 문학, 음악 등과 같은 여타 예술 영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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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테슬레프 <메아리> 1890-1891년 작. 개인 소장품.

어느 나라 국민이나 정치가들이 봐도 한 번쯤은 시샘의 눈초리를 주기에 충분할 만큼 잘 사는 나라 이 핀란드도 실은 과거 그다지 평탄치 만은 않은 역사를 헤쳐왔다. 12세기 중세시대 핀란드 대륙에 진입해 온 스웨덴 제국으로부터 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배를 받아오다가 1809년부터 1917년 독립국가로서 독립을 하기까지 약 100년 가까이 러시아 절대주의 짜르 황실의 지배 하에 억눌려 있던 핀란드에서 근대기에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온 민족주의 운동은 핀란드인들에게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과 자주 의식을 심어주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문화는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는데 더없이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는 바로 핀란드의 근대사가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핀란드인들은 이제까지도 공식언어던 스웨덴어 외에도 핀란드어를 공식 행정 언어로 지정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엽, 스웨덴 제국의 지배력이 점차 약화되는 조짐이 보이자 핀란드인들은 1827년 수도 대화재 사건을 계기로 투르쿠 (Turku)에서 헬싱키 (Helsinki)로 수도를 이전하고 핀란드 고유의 예술, 과학, 교육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핀란드가 자랑하는 국립 대학 및 과학 예술 학회들도 바로 이 시기에 설립된 것들이었다. 1809년 스웨덴 제국의 퇴각 이후 스웨덴 제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관대적인 정책을 폈던 러시아 제정 하에서 핀란드의 독립을 위한 채비를 서서히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스웨덴과 러시아 제정의 지배하에서 설움 받던 유럽 북쪽의 주변국가 핀란드는 어느새 미술, 건축, 문학, 음악을 매개 삼아서 유럽 대륙 중심부로 그 정체성을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핀란드 시인 엘리아스 뢴로트 (Elias Löhnnrot, 1802-1884)이 지은 핀란드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 (Kalevala)』는 그동안 스웨덴 지배와 언어 속에서 무참하게 파괴되고 상실된 핀란드 고유 전통과 언어에 대한 국민들의 감성을 회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핀란드 근대 사의 문을 활짝 열은 것으로 유명하다.

1935년에 출판된 『칼레발라』는 핀란드 민족들이 오랜 세월 간직해 오던 신화적 구술 서사시 형식을 빌어 핀란드 언어에 대한 국민들의 감수성을 흠뻑 적시는데 적중했다. 당시 핀란드를 가장 전형적으로 대표한 화가로 이름을 널리 알렸던 민족주의 화가 악셀린 갈렌-칼렐라 (Akseli Gallen-Kallela, 1865-1931)는 1900년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칼레발라』에서 묘사된 장면들을 민족적 상징들로 재해석하여 핀란드 전시장을 장식적인 프레스코화로 꾸몄는데, 이렇게 해서 연출된 그의 독특한 핀란드적인 미학과 정서는 당시 파리의 언론과 문화애호가들의 관심을 주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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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리 갈렌-칼렐라 <심포지움> 1894년 작. 개인 소장품.

핀란드판 민족주의 정서의 표본 칼레발라 서사시 어느 나라나 그 나라 국민들의 영혼의 주축이 되어 주며 세월을 초월해 심금을 울리는 전통 서사시 한 편 쯤은 갖고 있는 법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호머 이야기 『일레아드』와 『오디세이』,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영웅 서사시 『길가메시』, 고대 인도의 『라마야나』, 그리고 중세 독일 의 『니벨룽겐』 등이 그런 예들 일텐데, 뢴로트가 집결했다 하는 『칼레발라』 서사시도 핀란드 전통적인 민간 구전 서사시를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화한 민족적 역작이다.

민족 서사시가 흔히 그렇듯이 『칼레발라』 역시 빙하 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사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신비로운 천지창조설, 흥미진진한 영웅들의 무용담, 기상천외한 주술사과 마법사들의 기담들을 잔뜩 담고 있는데, 이 서사시 속 이야기를 통해서 핀란드들을 강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시킨 스웨덴 제국에 맞서 정신적 영혼적 독립을 선언하도록 부추기는데 기여하게 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스웨덴 문화와 전통에서 갈피를 못잡고 있던 핀란드인들은 『칼레발라』 서사시를 통해서 민족주의적 감성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예술적 영감에 부풀기 시작했다. 요한 루드비히 루네베르크 (Johan Ludvig Runeberg, 1804-1877)는 핀란드의 농경상과 아름다운 자연을 시로 묘사하여 19세기 핀란드가 자랑하는 민족 시인이 되어서 그의 시 『엔사인 스탈Ensigh Stal)』의 일부는 이후 핀란드 국가國歌 가사로 쓰일 정도가 되었다.

또 알렉시스 키비 (Aleksis Kivi), 아르빗 예르네펠트 (Arvid Järnefelt(1863-1937), 민나 칸트 (Minna Canth), 유하니 아호 (Juhani Aho) 등은 지금도 핀란드 문학사에 길이 남아 있는 문학가들로 인정받고 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핀란드 문학은 핀란드 특유의 서정적 감성에 호소하는 상징주의와 신낭만주의풍의 서정시로 회귀했는데, 그 결과 핀란드는 일찌기 프란스 에에밀 실란패애 (Frans Eemil Sillanpää)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를 배출하는 쾌거를 일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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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에델펠트 『카우콜라 물가의 저녁 노을』 1889-1990년 작.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소장.

본래 민간인들 사이에서 『칼레발라』는 노래 형식으로 구전되어 왔다고 한다. 핀란드에서는 대륙권 중부 유럽에 비해서 세련된 음악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지 못했으나 적어도 『칼레발라』의 유행을 계기로 하여 핀란드의 민족주의적 감성이 표현된 신음악이 새롭게 개척되었다.

우리의 귀에도 낯설지 않은 핀란드 출신의 근대 고전음악 작곡가 쟝 시벨리우스 (Jean Sebelius, 1865-1957)는 핀란드가 낳은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근대 작곡가일 것이다. 이른바 ‚교향시 (symphonic poem)’라고도 불리는 시벨리우스의 웅장한 음악 세계는 1890-91년 동안 잠시나마 음악의 도시 빈에서 체류하면서 경험한 교향악과 전통 핀란드 음악에서 받은 시적 감성의 혼연일체였다.

20세기 근대기 핀란드 미술의 조형 언어 – 민족적 서정과 사회비판적 통찰
핀란드의 근대 미술이 탄생한 시기는 1980년경 즉, 이번 『북구 유럽의 새벽』 전이 설정하고 있는 핀란드의 모더니즘기가 시작될 즈음이 되겠다. 그 이전부터 알베르트 에델펠트 (Albert Edelfelt, 1854-1905) 같이 18세기 프랑스 아카데미 화풍과 야광파 화풍을 결합한 사실주의 회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있었지만 미술을 표현의 수단으로 삼아 작업하는 화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전후에 들어서 부터 본격화 되었다.

핀란드는 지리적으로 유럽 대륙의 주변부에 밀려 있다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미술가들은 파리, 뮌헨, 생페터스부르크 등 유럽의 미술 중심 도시를 방문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근대 아방가르드 미술을 직접 호흡하고 실험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세기말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파스텔조의 아련한 인상주의 풍경화풍을 비롯해서 상징주의 (Symbolism), 폴 고갱 풍의 종합주의 (Synthetism), 그리고 보다 강렬한 색채적 실험성이 돋보이는 야수주의 (Fauvism)와 인상주의에 영향을 준 점묘주의 (Pointilism)에 이르기까지 핀란드 화가들의 실험 정신은 폭넚게 발휘되었다.

예컨대 마그누스 엔켈 (Magnus Enckel, 1870-1925)은 인간의 성애(性愛)를, 후고 심베르크 (Hugo Simberg, 1873-1817)는 핀란드 전통 민담과 사적인 내면 세계라는 매우 개인적이고 은밀한 주제를 상징주의 풍경화로 표현했고, 베르너 토메 (Verner Thomé)와 알프레드 윌리엄 핀치 (Alfred William Finch)는 별다른 이념이나 상징을 내포하지 않은 화사하고 온화한 색채가 지배적인 인상주의풍 순수 풍경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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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토메 <해수욕하는 소년들> 1910년 작.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호빙 컬렉션 소장.

그러나 20세기가 본격화 되자 핀란드 화가들을 예외없이 사로잡은 화두는 뭐니뭐니 해도  ‚민족주의적 감수성’이었을 것이다.

근대에 접어들자 산업의 발전과 도시의 확장 등과 같은 근대적인 환경 변화가 급속히 전개되면서부터 화가들은 급격히 주변에서 눈에 띄는 물리적 사회적 변화를 그림으로 포착해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연 속에 파묻혀 노동에 육체 노동에 전념하는 광부나 나뭇꾼의 초상화 외에도 도시 광경, 산업 지대의 공장 건물과 노동자들의 모습, 무역 항구의 모습이 보이는 수경 풍경 등을 통해서 근대 시대가 잉태하는 사회적 변화상과 그에 따른 부조리를 지적하는 그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전설적인 핀란드 출신 화가 악셀리 갈렌-칼렐라를 위시로하여 19-20세기 이행기 근대 핀란드의 미술계를 이끌던 화가들은 급변하는 나라의 모습을 재빨리 포착하여 풍경화와 초상화 같은 전통적인 쟝르로 화폭에 담아내는 일에 특히 몰두하였다. 악셀리 갈렌-칼렐라의 절친한 동료이자 19세기말 핀란드 사실주의 회화 운동의 주축적인 인물이던 에에로 예르네펠트는 고국의 산천을 구석구석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가을철 산하 풍경을 멜랑콜리한 분위기로 그려내는데에 능했던 화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개인적인 출신 배경 면으로 보나 미술 세계로 보나 핀란드 근대화가들 중에서 가장 핀란드인 답다고 평가되고 있는 화가 유호 리사넨 (Juho Rissanen, 1873-1950)은 노동가 가정 출신답게 시골의 척박한 생활상, 빈곤, 춥고 예측하기 어려운 겨울철 기후와 그 속에서 싸우는 농민들의 모습을 화가가 직접 어린시절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과 한데 버무려 그림으로 그렸다. 역시 근대시대 핀란드인들의 척박한 일상 생활을 화폭으로 옮기되 보다 화려한 색채와 긍정적인 분위기로 그림 속 주인공들을 묘사한 티코 살리넨 (Tyko Sallinen)의 화풍은 한결 표현주의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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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리 갈렌-칼렐라 <쿨러보스의 저주> 1899년 작.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안텔 컬렉션 소장.

전세계에서 가장 일찌기 여성의 투표권이 실행된 남녀평등국가 핀란드에서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핀란드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정식 미술 교육을 받고 직업적인 화가로 활동한 여류 화가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만해도 유럽권에서는 대체로 미술에 대한 남성에 못지 않은 열정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정식 미술 학교에서의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아텔리에 조수로서 미술사의 뒤안길에서 서성이다가 간 여러 여성 미술가들이 많았다는 사실과 견주어 볼 때 분명 핀란드의 여성 화가들은 분명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다.

엘렌 테슬레프 (Ellen Theleff, 1869-1954)는 핀란드 미술 학회에서 정식 미술 수업을 마친 후에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색채와 형태의 오묘한 환상 세계가 담긴 회화 세계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가 하면 헬레네 셰르프벡 (Helene Schjerfbeck, 1862-1946)은 이루 설명하기 어려운 부동(不動)의 정적감과 잔잔함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그림들이 특징적이다. 고관절 부상으로 평생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불구의 몸으로 작품 활동을 했던 이유 때문인지 지칠줄 모르는 그림그리기와 후학 배출이라는 활발한 경력을 누렸으면서도 셰르프벡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멜랑콜리한 실내 광경, 인간의 나약함과 노화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의 나약함, 죽음을 예견하는 듯한 비탄이 여지없이 스며 나온다.

핀란드의 모더니즘 미술은 있었는가? 물론이다. 핀란드의 모더니즘 미술은 유럽 대륙권과는 다른 ‚핀란드의 전통 문화와 민족적 정서’를 되살려 핀란드적 정체성을 규명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정치적인 예술 운동이었다. 이 전시는 빈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에서 10월2일까지 계속되며, 곧 이어서 네덜란드의 헤이그의 게메엔테무제움 (Gemeentemuseum in Den Haag)으로 옮겨져서 순회전시를 계속할 예정이다. Photos courtesy : Österreiche National Galerie Belvedere Wien.

스웨덴 모더니즘의 거장 브루노 마트손의 건축과 디자인

BRUNO MATH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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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브루노 매트손의 작업 모습. Photo: Bruno Mathssons arkiv, Värnamo.

20세기 스웨덴이 낳은 유명한 가구 디자이너 브루노 마트손이 건축디자이너로서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소개되어 서구 모더니즘 건축 디자인에 끼친 그의 영향력을 평가받고 있다. 50여년이라는 긴 디자인 여정 동안 마트손이 이룩했던 디자인 작업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항상 최첨단을 시험하는 혁신의 가도를 주도했지만 그가 세상을 뜨고 나서 더의 20년이 되어가는 지금에는 시공을 뛰넘는 모더니즘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미 1970년대에 서구 근대 디자인사에 기여한 그의 작품 세계를 기리는 뉴욕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서의 대대적인 회고전을 기하여 『뉴욕 타임즈』 지가 “브루노가 우리 미국인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돌아왔다!”라며 반가워했을 정도로 브루노 마트손이 그의 모국인 스웨덴에서는 물론이려니와 국제 근대 디자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북유럽 목공예 전통과 모더니즘의 혁신주의의 만남
4대째 캐비넷을 만드는 목가구공 카를 마트손 (Karl Mathsson)의 아들로 태어난 브루노 마트손 (Bruno Mathsson, * 1907년 – ✝ 1988년 )도 타고난 목공장이였다. 예로부터 목공예로 잘 알려져서 지금도 디자인 중심지로 알려져 있는 베르나모 (Värnamo)에서 태어난 그는 스웨덴 남부 지방의 자연을 벗한 나무 소재와 친숙한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목공예 전통을 어릴적부터 깊이 호흡하며 목공예에 관한 세세한 노하우와 기법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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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 의자, 1931년 작품 Photo: Bruno Mathssons arkiv, Värnamo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 기간 동안 전유럽을 뒤흔들고 있던 기능주의 모더니즘 미학에 깊이 매료된 그는 당시 구할 수 있었던 문헌들과 정간물을 탐독하며 모더니즘과 기능주의 이론을 독학으로 섭렵했다.

그렇게 해선 탄생한 브루노 마트손의 디자인 명작 제1호는 그가 1930년에 스톡홀름에서 열린 가구 박람회를 방문하고 한껏 영감을 얻어 말 안장 모양으로 디자인 한 1931년작 일명 “메뚜기 의자 (Gräshoppan)”였다.

“메뚜기 의자”는 그의 고향에 있는 베르나모 병원의 접수실 공간용 의자로 설치되었는데 그의 혁신성은 당시의 스웨덴인들의 눈에 낯설어 보인 나머지 기괴하고 흉칙스러워 보인다는 불평을 받고는 창고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들의 그같은 미지근한 반응에 오히려 더 의욕을 느꼈던 그는 목재를 가열하여 굽히는 기법 (이 기법은 이웃나라인 핀란드에서 알바 알토가 이미 1920년대에 실험했다.)을 활용하여 등받이가 있는 긴 안락의자 시리즈를 계속해서 실험했다.

그 결과 1937년 파리 박람회에서 그의 작품들은 대륙권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온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게 되었고 급기야 뉴욕 근대 미술관으로부터 방문객용 의자를 디자인해 달라는 주문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인 국제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공의 유기적인 융합
브루노 마트손 디자인의 핵심어는 자연과 디자인을 연결하는 인체공학적 해법, 공간적 사고, 그리고 건축이다. 모더니즘 건축가 디자이너들의 관심사가 그랬듯이 그 역시 가구, 인테리어, 건물 디자인 상의 보편적이면서도 특정한 문제점을 규명하는데 관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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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뢰자쿨 자택의 거실 광경 (Sitting-room in Frösakull). Photo: Bruno Mathssons arkiv, Värnamo.

새로운 생활 환경, 근대적인 라이프스타일, 과학기술의 진보에 걸맞는 새로운 표현 언어를 찾기를 원했던 그는 그래서 건축 외부와 실내 공간 및 개별 가구 아이템들이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총체적인 공간을 실험했다. 자연과 잘 조율되는 날렵하고 유기적인 가구 형태는 프뢰자쿨 (Frösakull)에 지은 주말 별장의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양차 대전과 파시즘의 대두 등 격동과 소용돌이의 근대사를 거쳐 오는 가운데 브루노 마테손은 자타가 공인하는 자랑스러운 모더니스트이자 국제주의자 (internationalist)였다. 그의 국제주의적 활동 반경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미국에서 한창 전개되던 공공 주택 사업과 미래지향적 비젼과 관련하여 상당수 미국과 함께 이루어졌다.

특히 1940년대에 뉴욕 근대 미술관의 에드가 카우프만 큐레이터의 주선으로 아내 카린과 함께 한 기나긴 미국 여행 동안에 브루노 마트손은  전후 시대 미국 건축과 디자인의 개척자 찰스 이임즈 (Charles Eames), 나치의 예술적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온 독일 바우하우스의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뉴욕의 고급 사무용 가구 생산업체 크놀 (Knoll), 그리고 미국의 거장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라이트 (Frank Lloyd Wright) 같은 건축디자인계의 거물인사들과 친분을 구축하는 행운도 맞았다.

이 여행을 계기로 마트손은 지금도 그를 그토록 유명하게 해 준 일명 “유리 주택 디자인 (Glass House)”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실제로 마트손은 겨울이 길고 일조량이 짧은 스칸디나비아를 벗어나서 기후가 따뜻한 남유럽 포르투갈로 건너가서 유리로 된 자택을 직접 디자인하여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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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닐라 1 (Pernilla 1) 안락의자. 1943년 작 Photo: Bruno Mathssons arkiv, Värnamo.

또 그는 개방적인 사고와 도전적인 창의력이 높은 인정을 받는 나라 덴마크를 매우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흠모했던 그는 덴마크 출신의 건축가 겸 디자이너였던 피에트 하인 (Piet Hein)과 협동으로 그 유명한 “이클립스 테이블 (Eclipse table)”을 디자인했으며, 1970년대에는 일본과도 디자인 계약을 맺고 지금까지도 일본의 가구생산 업체인 히오스 (Hios )디자인 사의 라이센스로 가구 용품들이 생산판매되어 오고 있다.

그가 줄기차게 옹호해 온 이른바 “마트손의 궁극적 의자 문화 (ultimate sitting)” 철학은 그가 디자인한 의자와 테이블에 세심하게 고려된 곡선 감각에서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히 그는 현대인들이 점차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 공간을 위한 환경과 가구를 디자인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사람들이 누운 자세로 일을 하면 훨씬 더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일처리에 임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사무실이란 엄숙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당시의 노동 문화의 견지에서 볼 때 두 말 할 것 없는 혁신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가 1940년대 초엽에 차례로 선보인 “페르닐라 (Pernilla)” 의자 시리즈와 1960년대의 “젯슨 (Jetson)” 의자는 뒤로 누을 수 있는 긴 안락형 작업 의자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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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에 제작생산된 “아니카 (Annika)” 테이블.

주관이 강하고 고집스럽고 영리한 머리를 소유자 마트손은 단순하면서도 꼼꼼한 우아함이 돋보이는 형태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함과 기능성이 결합된 아름다움은 유리 주택을 비롯한 50차례에 넘게 수행했던 건축 디자인 프로젝트들과 나무를 가열하여 굽혀 만든 라미네이트 목재 가구 용품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가구 아이템들에 그는 여성의 이름을 달아주곤 했는데, 예컨대 에바 (Eva), 미나 (Mina), 미란다 (Miranda), 페르닐라 (Pernilla) 등은 각 의자 모델마다 지닌 독특한 개성을 한층 강조해 주는데 효과적이었다.

환경주의 미래를 위해 또다시 평가받는 브루노 마트손의 건축 세계
마트손이 건축을 통해서 생전 자연과 인간 사이의시각적으로 지속가능한 개발과 상호작용의 가능성에 쏟은 열정은 지금도 미래의 건축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혜안을 제시해 준다. 최근들어 지속가능한 (sustainable) 환경친화적 건축 디자인을 연구하는 젊은 세대의 전문가와 대중들 사이에서 이미 수십년 전에 마티슨의 철학과 건축 디자인에 응용했던 기법을 재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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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뇌 (Tånnö)에 있는 브루노 마트손의 자택, 1964-65년. Photo: Åke E:son Lindman.

그는 미국 여행을 다녀 온 후 1950년대에 고향 메르나모의 한 가구 전시장에서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바닥 전기 히터가 설치된 콘크리트재 유리 주택을 지어 선보였었다. 그는 사방벽 중에서 한 면은 벽돌로 쌓아 올리고 나머시 세 면은 질소가 주입된 3중 유리창을 벽대신 설비해 넣는 마트손 고유의 “브로노 유리창 공법 (Brunopane)”을 선보이고 특허인가까지 받았다.

자연을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성향과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한 우수한 미하적 경제적 디자인 해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법은 안전상의 이유로 건축허가청의 관료적 난관에 부딛히곤 해서 결국 그가 그토록 바라던 대중화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웁살라의 파르마시아 (Parmacia) 실내 장식(1973년), 단더리드의 핵가족용 주택(1955년), 쿵쇠르의 가족 주택(1954년), 브루노의 자택들에 간직된 다시금 자연과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에게 환경친화성과 기법적 혁신성이 한데 융홥된 합리적인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그의 건축 디자인 50년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모색하는 보편적 건축 디자인의 문제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브루노 마트손 건축 디자인 (Bruno Mathsson – Designer and Architect)』 전시회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건축박물관 (Arketektumuseet)에서 [2006년] 2월9일부터 8월27일까지 전시된다. Photos courtesy Copyright © Arkitekturmuseet 2006.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회화의 대창고

LEOPOLD MUSEUM – LEOPOLD COLLECTION

레오폴트 컬렉션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트 재단 미술관

무지움스쿼르티에서 재개관 무지움스쿼르티에(MQ) 레오폴트 미술관 (Leopold Museum-Privatstiftung)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이행되던 시기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야릇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탄생하여 근대 지성계를 뒤흔들기 시작하는가 하면, 아놀드 쇤베르크의 근대 음악 이론, 아돌프 로오스 (Adolf Loos)와 오토 바그너 (Otto Wagner)의 유겐트스틸 (Jugendstil)의 근대 건축 양식이 등장하고 문학과 비판적 언론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세기말 빈 (Fin-de-Siècle)”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이 때는 지적 창조적 에너지가 곳곳에서 분출하던 빈 모더니즘 (Wiener moderne) 시대는 세기말 특유의 종말적 비관주의와 새시대에 대한 이상주의가 공존하던 시대였다. 19세기 산업혁명과 낭만주의로 향한 회귀적 욕망이 잔존하는 가운데 20세기 근대주의가 표방하는 개인주의가 충돌하던 이 시기, 오스트리아 빈의 근대 미술은 스캔들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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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미술관 내 실러 전시장 광경.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19세기 후반기까지 줄곧 화려하고 장대한 바로크 회화 양식이 보편화되어 있던 빈에 장식적인 고전주의를 배격한 새로운 회화 양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스 마카르트를 위시로 하여 빈 분리파 운동 (Wiener Secession)을 이끈 구스타브 클림트,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에곤 쉴레와 오스카 코코시카 등이 외부 시대의 혼돈과 내면적인 감성과 갈등세계를 표현한 그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이는 같은 시기 파리에서 일던 상징주의, 독일과 북구 유럽의 표현주의 운동과도 맥을 함께하는 당대의 보편적인 사조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표현주의가 세계적인 미술사조로 정식 인정을 받기 시작한 때는 20세기 후반에 접어 든 이후, 한 개인 미술 수집가의 공헌이 크게 기여했다.

루돌프 레오폴트라는 한 개인 컬렉터가 50년대 중엽부터 오스트리아 근대 표현주의 회화 분야에 걸쳐 수집해 온 작품수는 오늘날 5,266점에 이르며,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의 컬렉션이 지니는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1994년 개인재단 설립은 지원해 주어 오늘날 레오폴트 재단 미술관으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오스트리아인들의 수집욕은 전통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옛 합스부르크 왕국 시절, 황실은 영토 수집과 박물관 진귀품 수집에 열을 올렸었고 개인들은 크게는 이름 앞에 붙는 신분 타이틀을 작게는 실내를 장식하는 악세서리와 우표수집에 집착했을 정도였다. 안과의사에서 국립 미술관 관장으로 변신한 루돌프 레오폴트 (Rudolf Leopold, 1925 * -2010 ✝) 박사는 그 가운데에서도 전설적인 실례로 꼽힌다.

부모님에게서 받은 고등학교 졸업 자격 시험 응시료를 평소 눈여겨 두었던 에곤 쉴레의 그림을 사는데 몽땅 써버린 것이 개인 미술 컬렉터로서의 생을 택한 첫출발이었다고 레오폴트 관장은 회고한다. 이후 의과 대학 2년차 되던해인 1947년 도로테움 미술품 경매장과 빈 미술사 박물관을 처음 방문하게 되면서 회화에 대한 애정과 전문가적 안목을 키우기 시작했다. 공부를 마친 해인 1953년부터 레오폴트 관장은 틈틈히 빈 대학 미술사학과 강의를 청강하고 전세계 미술관을 기행하면서 감식안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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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컬렉터 루돌프 레오폴트 내외.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레오폴트 미술관을 구성하고 있는 간판 소장목록은 두말할 것 없이 에곤 쉴레 컬렉션이다. 20대초 청년기부터 쉴레에 대한 혼신의 연구와 작품 수집을 해 온 레오폴트 관장은 그래서 쉴레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임을 자처하며 쉴레 연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우선 레오폴트 미술관을 거쳐가야 한다는 미술계 내 암묵적 원칙을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1950년대까지만해도 터무니없이 평가절하되어 온 쉴레가 세계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때는 60년대 이후부터. 19세기초 빈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화랑이던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를 운영하다가 제2차대전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오토 칼리르 니렌스타인 (Otto Kallir-Nirenstein)이 일찌기 미국 대도시 여러곳에서 클림트와 쉴레를 비롯한 빈 표현주의 회화를 소개했으나 미술계의 반향을 얻지 못한채 였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가 쉴레의 주요 작품들을 이미 다수 소장하고 있었으나 50년대 중반까지 대중 관람을 할 수 없었던 것도 빈 표현주의의 대중화에 걸림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미롭고 탐미주의적인 클림트의 여성 이미지에 반해 거칠고 우울한 에곤 쉴레의 작품은 국내외 미술사가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가혹한 평가를 면치 못했다. 적나라한 포즈와 신체묘사에 관객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주제 (예를 들어 『신부와 수녀 (Kardinal und Nonne)>』는 남녀 성직자의 성적 욕망과 갈등을 표현한 작품)를 묘사한 그의 작품은 외설 퇴폐라는 혹평을 받고 있었으나 레오폴트 관장은 바로 그 점에서 쉴레 회화의 예술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빈을 비롯한 해외 미술경매장을 다니며 쉴레의 작품을 구입할 때마다 주변인들의 조롱과 비웃음도 감수해야 했다. 그 덕분에 쉴레의 작품이 평가절하되던 1950년대초 쉴레의 『은둔자들 (Die Eremiten)』(1912년 작)은 오스트리아화 3만실링 (현재 우리돈 약 300만원 가량)이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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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레의 『은둔자들 (Die Eremiten)』1912년 작품.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요한 슈트라우스가 어린시절 떠오르는 악상을 침대보에 적어 작곡을 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에곤 쉴레 (Egon Schiele, 1890-1918)도 어린나이에 식탁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신동 화가로 알려져 있다.

툴루즈 로트렉이 매춘부를 소재로 그린 그림들을 보고 하층계급 여성들을 모델로 삼아 그리기 시작한 그는 한때 미소녀 스케치를 한 혐의로 감방 생활을 하는 고충까지 감수하며 성으로 갈등하는 그의 내면세계를 줄기차게 표현했다.

그의 수집 열정은 곧 클림트로 이어져 현재 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작품 『죽음과 삶 (Tod und Leben)』(1911/1915년)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빈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져 있는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 1883-1908)의 작품은 그가 쉴레 전문 컬렉터로소의 악명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그의 소장목록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순수 빈 출신으로 에드바르트 뭉크와 반 고흐를 결합한 오스트리아식 “야수주의”를 추구했던 게르스틀은 아놀드 숀버그와 절친한 친구사이였고 쇤베르크의 아내와의 불륜의 사랑으로 갈등하다 때이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였다. 게르스틀은 평생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한 작품도 팔지 못하는 불운에 시달렸던 반면 쉴레는 1914년부터 약 5-6년간 활발히 작품 매매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빈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프로이드의 성심리학의 유행과 전통적 성윤리의식의 붕괴에 어느정도 덕을 본 때문이라고도 해석되고 있다.

현재 가치있는 게르스틀의 작품 26점 가운데 15점이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이 미술관이 또 자랑하는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는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 비해 부와 인기를 누리다 간 반근대적 화가여서 세기전환기 근대적 사고에 반발하는 오스트리아의 부패한 부르조아적 구세력을 대변한 화가여서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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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의 『상반신을 벗은 자화상 (Selbstbildnis als Halbakt)』 1904/05년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특히 코코슈카는 당시 유태인 지성인과 문학인들의 사교모임을 이끌던 여류 언론인이자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아내 알마 말러-베르펠 (Alma Mahler-Werfel)의 문화서클에서 맴돌며 오스트리아 예술인 특유의 퇴폐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그래서인지 이 보헤미언 화가의 작품들은 오스트리아의 바로크적 허장성쇠 뒤에 숨은 공허감과 허무주의로 가득하다.

해가 거듭해 가면서 레오폴트 소장품의 범위는 나날이 넓어져서 화가 오제프 도브로브스키 (Josef Dobrowsky), 알프레트 쿠빈 (Alfred Kubin), 헤르베르트 쿠빈 (Herbert Boeckl), 안톤 파이스타우어 (Anton Faistauer),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안톤 콜릭 (Anton Kolig), 빌리암 퇴니 (William Toeny)를 포함하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컬렉션을 형성해 나갔다.

그는 또 빈 모더니즘기의 회화 분야 말고도 오브제로도 관심의 폭을 넓혀 오토 바그너 (Otto Wagner)와 콜로몬 모저 (Kolomon Moser)의 유겐스틸 가구와 빈 베르크슈테테 공예품, 골동 카페트, 아프리카와 동양 조각품도 소장하고 있어 현재 레오폴트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고 있다.

레오폴트 관장이 개인적인 쉴레 애호가 겸 컬렉터로 출발하여 국립 미술관 과장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그다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외설 퇴폐 화가의 작품들을 사 모으는 과정에서 미술계로 부터 받은 수모는 차치하고라도, 미술의 문외한이면서 개인적인 노력으로 감식가의 안목을 키우고 연구 및 저술 활동을 계속해 오면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회화의 권위자로 변신하기까지 그는 그래서 집요한 자기광적인 퍼스낼리티로 악명적인 명성(?)을 굳혀 온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개인의 문화적 열정과 노력이 국가와 미술사적 유산을 지키고 알리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영광스럽게 감수할 수 있는 악명이 아닐까. All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 이 글은 본래 세종문화회관 월간회원지 『공간사랑』 지 2001년 10월호에 실렸던 것임을 밝혀 둡니다.

파리 인상주의 회화 – 패션 가이드로 다시 보기

IMPRESSIONISM AND FASHION from Musée d’Orsay, Paris

08. Claude Monet_Le déjeuner sur l'herbe_1865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잔디 위에서의 점심식사(Le déjeuner sur l’herbe)》 1865-1866 캔버스에 유채, 248,7 x 218 cm Paris, Musée d’Orsay © Musée d’Orsay, dist. RMN / Patrice Schmidt.

미술시장에서의 최우선 투자대상, 미술 컬렉터들 사이 높이 선망받는 애호 목록, 그리고 일반 대중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친근한 미술 감상대상 제1호를 꼽으라면? 그에 대한 답은 단연 프랑스의 인상주의 회화일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근대기 파리의 도시인들의 일상과 시민문화를 기록한 시대적 눈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 회화가 파리의 최신 대중 패션에 영향을 끼치며  프랑스 패션 산업과 출판 업계까지 활성화시킨 산업 역군 역할까지 했었다는 사실은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 프랑스에서는 뜨고 지는 태양 아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색채와 형태를 발하는 아름다운 야외 자연 세계를 캔버스로 옮기는 인상주의 회화가 등장하여 서양 미술사 발전에 혁명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신시대를 맞아 전격적인 변화가 들이닥친 분야는 인상주의 미술 뿐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근대시대(Modernism)가 되자 도시에 모여살던 도시인들의 도회 환경, ‘근대인(modern man)들의 살아가는 방식, 신시대가 요구하는 개인주의에 발맞춰서 시민들이 저마다 개성을 표현하는 방식도 전격적으로 달라졌다. 그렇다고 근대 유럽인들이 관상, 옷차림, 행동거지 같은 외모와 겉치레만을 내세운 피상적인 속물로 전락했다는 뜻만은 아니다. 엘리트 인사, 예술가,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옷차림을 통해서 신시대의 시각 문화를 개척하고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졌고, 이를 반영하여 파리에서는 백화점과 패션 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09.Pierre-Auguste Renoir_La balançoire

피에르-오귀스트 르노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그네(La balançoire)》 1876 캔버스에 유채, 92 x 73 cm Paris, Musée d’Orsay © RMN (Musée d’Orsay) / Hervé Lewandowski.

사회학자 리쳐드 세네트(Richard Sennett)가 그의 저서 《공적 인간의 몰락(The Fall of Public Man)》(Knopf, 1977)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근대기 유럽에서 탄생한 새 도시 문화와 매너리즘은 몰락한 구시대 귀족, 신흥 중산층 부르조아 계층,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든 농부와 노동자 등 신흥빈민층이 새로 형성된 대도시 문화라는 공공 공간 속에서 함께 엉켜 살게 되면서 자기정체성을 보존하고 사회적 계약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돕는 조절기제 역할을 담당했다.

새 메트로폴리스로 급성장한 근대기 파리는 온갖 인간상을 구경하고 관찰할 수 있는 인간극장과도 같았다.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은 마치 오늘날 사진가들이 하듯 나날이 번창해 가는 도시 속 근대인들의 모습을 재빨리 포착해 그림으로 옮겼다. 특히 마네(Éduard Manet)와 드가(Edgar Degas)는 바로 신 파리지앙 현상을 태연한 시선과 세련된 필치로 시인 보들레드가 정의한 것처럼 “겉모습에 담긴 일상의 변화상(the daily metamorphosis of exterior things)”을 마치 풍속화 또는 길거리 패션 스냅샷처럼 기록했다.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신체와 옷은 빛 속에서 “본질과 물리적 특성이 사라졌다”고 표현했고, 문필가 공쿠르 형제는 “빛과 그림자가 부리는 마술로 인해서 그림 속 인물과 옷의 실체가 변했다”고 했다. 인상주의 그림 속에서 드디어 인물은 더 이상 자연환경으로부터 도드라져 보이는 독자적인 초상으로써가 아니라 자연 환경의 일부가 되어  묻어들었다.

10. James Tissot_Portrait du marquis de Miramon_1865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 – 1905) 《미라몽 후작 부부와 자녀들 초상(Portrait du marquis et de la marquise de Miramon et de leurs enfants)》 1865 캔버스에 유채, 177 x 217 cm Paris, Musée d’Orsay © RMN (Musée d’Orsay) / Hervé Lewandowski.

이 즈음인 1860-1880년대, 인상주의 그림의 미학에 물들은 패션 잡지들 – 예컨대, 《라 모드 일뤼스트레(La Mode Illustrée)》나 《주르날 데 드모아젤(Journal des Demoiselles)》- 은 빛 속에 녹아들어 태양의 변화와 더불어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람들의 자태와 의상을 정기간행물로 출판해 대중화시켰고, 근대 파리인들은 잡지 속 이미지를 지침 삼아서 최신 패션 유행을 일상에서 옷 맞춰입기에 응용했다.

당시 파리인들은 어떤 표정을 얼굴에 머금고 어떤 패션을 구가하며 어떤 장소에 모여 비즈니스 대화를 나누고 사교를 하고 여가를 보냈을까? 티소(Tissot)나 스티븐스(Stevens)가 그린 파리 여성들 초상화들은 프랑스 제2제국과 초기 제3제국 시대(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 사이 나폴레온 3세 통치기)에 귀족과 고위급 사교계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우아한 패션과 몸가짐 관리방식을 관찰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 역할을 한다.

06.Renoir_Jeune Femme à la voilette

피에르-오귀스트 르노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베일을 쓴 젋은 여인(Jeune femme à la voilette), 1870 캔버스에 유채, 61 x 51 cm Paris, musée d’Orsay © Musée d’Orsay, dist. RMN / Patrice Schmidt.

그러나 보다 대중적 수준에서 파리의 신시대 패션과 행동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시각 자료는 마네, 모네, 르노아르, 드가, 카유보뜨의 그림 속에 담겨있다. 이 시대 도회지 신흥 중상층 여성들은 격조 높고 격식에 얽매인 드레스와 고가의 악세서리 보다는 한결 활동에 편하고 실용적인 패션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그림 속에 등장한 중상층 여성들은 제국 시대풍 크리놀린 드레스 스타일에서 벗어나서 간소화된 티 드레스나 워킹 드레스를 입었고, 거추장스럽게 장황하거나 값비싼 장신구 대신에 보터 모자, 베일, 숄, 펠리스(안에 털을 단 긴 코트) 등을 걸쳐 멋을 냈다.

그런가하면, 르노아르가 그린 《샤르팡티에 여사와 자녀들의 초상(Madame Charpentier et ses enfants)》(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과 마네가 그린 《나나(Nana)》(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소장)는 여간해서 전시회를 통해서 보기 어려운 작품들로서, 전자는 당시 파리의 저명한 출판사 발행인의 아내와 두 딸의 모습을 담은 전통 초상화풍 회화이며 후자는 당시 파리몽마르트에 널리 찾아볼 수 있었던 고급 매춘부나 애첩들이 어떻게 침실을 꾸미고  어떤 속옷 패션을 구가했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 그림이다.

11.Bazille_Réunion de famille

프레데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 1841-1870) 《가족 모임(Réunion de famille)》 1867 캔버스에 유채, 152 x 230 cm Paris, musée d’Orsay, acquis avec la participation de Marc Bazille, frère de l’artiste, 1905 © RMN (Musée d’Orsay) / Hervé Lewandowski.

이 전시의 첫 순회지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2012년 9월25일-2013년 1월20일)이며, 이어서 2013년 봄부터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The Art Institute of Chicago)로 차례로 옮겨져 순회전시될 예정이다. 이 전시 기획을 위해서 파리에 있는 파리 시립 패션 칼리에라 박물관(Musée Galliera – Musée de la Mode de la Ville de Paris)이 협찬했다. Image courtesy: Musée d’Orsay, Paris.

전시 장소: 파리 오르세 미술관 1층 주 전시장 | 전시 기간: 2012년 9월25일-2013년 1월20일.

유기적 건축에서 조화로운 가구로

알바 알토의 가구 디자인

portrait-alvar-aaltoALVAR AALTO 핀란드 고유의 목공예 전통을 이어받아서 일찍이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유할 것을 주창한 이른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 정신의 대표적인 옹호자였던 알바 알토(1898-1976). “인도적 모더니즘(Human Modernism)”으로도 알려져 있는 알토의 디자인은 자연, 건축, 디자인, 그리고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대화를 화두로 삼는다.

아름다움이란 기능과 형태가 조화롭게 결합된 것 (Beauty is the harmony of purpose and form.) – 알바 알토, 1928년.

일찍이 초기 건축가 시절부터 스스로를 코즈모폴리탄 지성인이자 ‘세계적 수준의 건축가’라 자칭했던 알바 알토는 비행기 탑승에 늦게 도착하면 의례 핀란드 항공사 승무원들과 탑승객들이 항공기 이륙 시간이 지연되는 것도 마다않고 이 위대한 건축가 선생이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기꺼이 기다려주었을 정도로 생전 국가적인 영웅 취급을 받곤 했는데, 그는 국민들이 그를 향해 베풀어준 그같은 대우를 태연작약하고 당당하게 누린 일면 뻔뻔한 자존가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1924년 알바 알토 건축사무소를 설립하며 건축가로 데뷰한 때는 핀란드가 스위덴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시대 핀란드의 아이덴티티 구축에 한창이던 핀란드 문화 르네상스기이자 건축사업 황금기였다. 그 덕분에 알토의 건축 사무소에는  건축 디자인 수주가 끊기지 않고 물밀려 들어왔다. 특히 비이푸리 시립도서관(Viipuri City Library, 1927-35)과 파이미오 결핵 치료요양소(Paimio Tuberculosis Sanatorium, 1929-33)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국제 모더이즘 양식을 취하되 알토 고유의 해석력과 인간존중적 휴머니즘이 담긴 작업으로 오늘날 건축사에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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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알토가 파이미오 요양소 실내장식을 위해 디자인한 파이미오 팔걸이 의자 41번. 라미네이트 목판 굴곡 공법을 응용한 목재 캔틸레버 의자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Photo courtesy: Jacksons Design, Stockholm-Berlin.

알토는 파이미오 요양소 건물 실내 장식에 임할 당시, 특히 디테일 면에서 디자이너가 아닌 환자의 입장을 깊이 고려하는 시점의 변화를 가했다. 실내 환경은 카나리아 새를 연상시키는 노랑색으로 밝고 차분한 분위기로 연출했고, 금속재 세수대에서 물 떨어지는 소음이 환자들의 청각을 거스르지 않도록 수도꼭지와 세수대도 세심하게 디자인했다.

결핵으로 호흡이 힘겨운 환자들에게 한결 안락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기 위해 금속 대신에 주형 목판을 의자의 주소재로 사용했다. 요즘처럼 사용자 편의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널리 일반화되어 응용되고 있는 시대에 환자의 시점에서 병원과 실내를 디자인한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 하겠지만, 환자를 격리, 감시, 처치의 대상으로 여기던 백 여년전 의료 문화의 관점에 비하면 당시 알토의 시점은 분명 인간존중적이었다.

1930년대초부터 본격적으로 목재를 활용한 기능주의 건축과 가구 디자인을 시작했다. 특히 그의 가구 디자인은 라미네이트 굴곡 공법으로 휘어진 나무소재를 이용한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 형태가 특징적이다. 알토는 독일 바우하우스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가 창안한 철관으로 만든 캔틸레버 의자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는 이 의자를 목재로 재해석한 의자를 고안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파이미오 팔걸이 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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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이푸리 시립도서관 설계 당시 디자인한 등받이 없는 의자와 트롤리 테이블. Photo courtesy: Jacksons Design, Stockholm-Berlin.

1930년대 중엽, 알토는 핀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는 국가대표급 건축가로 높이 존경받고 있었지만 어쩐지 모르게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한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으로부터 밀려온 국제 경쟁에서 다소 밀리며  중요한 건축공모전 당선을 연거푸 놓치게 되면서 건축 수주도 주춤해졌다.

잠시나마 의기소침해진 알토는 1935년 아내 아이노와 함께 수도 헬싱키에서 벗어난 교외마을 문키니에미로 이사한 후 가구용품 회사 아르텍(Artek)을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지금까지도 알토의 고전적 실내장식용 가구와 장식용품을 생산판매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슬럼프기는 1937년, 헬싱키 중심부에 있는 사보이 레스토랑의 실내장식 수주를 받는 것으로써 종지부를 찍고 제2의 알바 알토 황금기 출발을 맞이했다. “젊은 에스키모 여성이 입는 가죽 바지”의 모양새에서 영감을 받아서 디자인한 곡선모양의 그 유명한 디자인 아이콘 “사보이 꽃병”(1937년 디자인)은 바로 이 사보이 레스토랑 디자인에 쓰이기 위해서 디자인된 것이었다.

또 이 때부터 알토는 핀란드 갑부들로부터 수주를 받아서 개인 주택을 설계하는 일을 다수 맡았는데, 통나무, 유리, 금속, 콘크리트 기둥, 잔디 지붕 등 근대적 소재를 결합시킨 알토 특유의 건축 미학을 한껏 발휘했다. 이어 1939년 핀란드를 대표해 뉴욕 근대미술관서 열린 뉴욕 세계 국제 박람회에 참가한 알토는 핀란드의 숲에서 영감받은 핀란드관 건물 디자인을 소개해 남 칭찬 잘 안하기로 소문 자자했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로부터 ‘천재적’이라는 격찬까지 받았다.

스웨덴과 독일에 두 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20세기 디자인 전문화랑 잭슨스(Jacksons)에서는 2012년 9월부터 12월까지 핀란드의 전설적인 모더니즘 건축가 겸 디자이너 알바 알토의 가구, 조명, 유리 디자인 용품을 선별하여 전시한다.

“유기적 건축”에서 조화로운 가구로

알바 알토의 가구 디자인 ALVAR AALTO AT JACKSONS, BERLIN

아름다움이란 기능과 형태가 조화롭게 결합된 것 (Beauty is the harmony of purpose and form.) – 알바 알토, 1928년.

portrait-alvar-aalto핀란드 고유의 목공예 전통을 이어받아서 일찍이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유할 것을 주창한 이른바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 정신의 대표적인 옹호자였던 알바 알토(1898-1976). “인도적 모더니즘(Human Modernism)”으로도 알려져 있는 알토의 디자인은 자연, 건축, 디자인, 그리고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대화를 화두로 삼는다.

비행기 탑승에 늦게 도착하면 핀란드 항공사 승무원들과 탑승객들이 이 위대한 건축가 선생이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기꺼이 기다려주었을 정도로 알토는 국가적인 영웅 취급을 받았고, 알토는 일찍이 초기 건축가 시절부터 스스로를 코즈모폴리탄 지성인이자 ‘세계적 수준의 건축가’라 자칭하며 그같은 대우를 태연작약하고 당당하게 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1924년 알바 알토 건축사무소를 설립하며 건축가로 데뷰한 때는 핀란드가 스위덴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시대 핀란드 아이덴티티 구축에 한창이던 핀란드 문화 르네상스기였고 건축 디자인 주문 물량은 끊기지 않고 밀물려 들어왔다. 특히 빌푸리 시립도서관(Vilpuri City Library, 1927-35)와 파이미오 결핵 치료요양소(Paimio Tuberculosis Sanatorium, 1929-33)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국제 모더니즘 양식을 취하되 알토 고유의 해석력과 인간존중적 휴머니즘이 담긴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아이콘격 의자 모델인 팔걸이 의자 42 (Armschair 42)는 1932년에 아르텍에서 첫 제조되어 오늘날까지 생산되고 있다.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아이콘격 의자 모델인 팔걸이 의자 42 (Armschair 42)는 1932년에 아르텍에서 첫 제조되어 오늘날까지 생산되고 있다.

1930년대초부터 본격적으로 목재를 활용한 기능주의 건축과 가구 디자인을 시작했다. 특히 그의 가구 디자인은 라미네이트 굴곡 공법으로 휘어진 나무소재를 이용한 특유의 부드러운 곡선 형태가 특징적이다. 알토는 독일 바우하우스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가 창안한 철관으로 만든 캔틸레버 의자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는 이 의자를 목재로 재해석한 의자를 고안했다.

알토는 파이미오 요양소 건물 실내 장식에 임할 때 특히 디테일 면에서 디자이너가 아닌 환자의 입장을 깊이 고려하는 시점의 변화를 가했다. 실내 환경은 카나리아 새를 연상시키는 노랑색으로 밝고 차분한 분위기로 연출했고, 금속재 세수대에서 물 떨어지는 소음이 환자들의 청각을 거스르지 않도록 수도꼭지와 세수대도 세심하게 디자인했다. 결핵으로 호흡이 힘겨운 환자들에게 한결 안락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기 위해 금속 대신에 주형 목판을 의자의 주소재로 사용했다.

천정 조명 A330S(Pendant Lamp A330S). 알바와 아내 아이노는 1936년 헬싱키에 있는 사보이 레스토랑 실내장식 디자인 의뢰로 이 조명갓을 디자인했다. 이 작품은 1937년 파리엑스포 행사에서 핀란드관에서 출품되기도 했다.

천정 조명 A330S(Pendant Lamp A330S). 알바와 아내 아이노는 1936년 헬싱키에 있는 사보이 레스토랑 실내장식 디자인 의뢰로 이 조명갓을 디자인했다. 이 작품은 1937년 파리엑스포 행사에서 핀란드관에서 출품되기도 했다.

1930년대 중엽, 알토는 핀란드 국민들 사이에서는 국가대표급 건축가로 높이 존경받고 있었지만 어쩐지 모르게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한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으로부터 밀려온 국제적 경쟁에서 다소 밀려 중요한 건축공모전 당선을 연거푸 놓치며 건축 수주가 주춤해졌다. 잠시나마 의기소침해진 알토는 1935년 아내 아이노와 함께 수도 헬싱키에서 벗어난 교외마을 문키니에미로 이사한 후 가구용품 회사 아르텍(Artek)을 설립해 이 업체는 지금까지도 알토의 고전적 실내장식용 가구와 장식용품을 생산해 전세계로 판매해 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슬럼프기는 1937년, 헬싱키 중심부에 있는 사보이 레스토랑의 실내장식 수주를 받는 것으로써 마감되었다. “젊은 에스키모 여성이 입는 가죽 바지”의 모양새에서 영감을 받아서 디자인한 곡선모양의 그 유명한 디자인 아이콘 사보이 꽃병(1937년 디자인)은 바로 이 사보이 레스토랑 디자인에 쓰이기 위해서 디자인된 것이었다.

사보이 꽃병은 1936년에 카르훌라(Karhula) 사에서 최초로 생산되었다. 1937년 파리세계박람회에서 출품되었다.

사보이 꽃병은 1936년에 카르훌라(Karhula) 사에서 최초로 생산되었다. 1937년 파리세계박람회에서 출품되었다.

또 이 때부터 알토는 핀라드 갑부들로부터 수주를 받아서 개인 주택을 설계하는 일을 다수 맡았는데, 통나무, 유리, 금속, 콘크리트 기둥, 잔디 지붕 등 다양한 근대적 소재로 결합시킨 알토 특유의 건축 미학을 한껏 발휘했다. 이어 1939년 핀란드를 대표해 뉴욕 모마서 열린 뉴욕 세계 국제 박람회에 참가한 알토는 핀란드의 숲에서 영감받은 핀란드관 건물 디자인을 소개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로부터 ‘천재적’이라는 격찬까지 받았다.

스웨덴과 독일에 두 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20세기 디자인 전문화랑 잭슨스(Jacksons)는 2012년 9월부터 12월까지 핀란드의 전설적인 모더니즘 건축가 겸 디자이너 알바 알토의 가구, 조명, 유리 디자인 용품을 선별하여 전시한다. Photographic images courtesy: Jacksons, Berlin.

※ 맨 위 이미지 설명: 비이푸리 시립도서관 설계 당시 디자인한 등받이 없는 의자와 트롤리 테이블. Photo courtesy: Jacksons Design, Stockholm-Berlin.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순수 이상 공간 미학

 20세기 국제건축 양식 –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쏘아올린 순수 이상(理想)을 향한 공간 미학

아들러 설리번 건축사무소가 설계해 1894년 완공한 시카고 주식거래소 빌딩. Courtesy: The Art Insitute of Chicago.

아들러 설리번 건축사무소가 설계해 1894년 완공한 시카고 주식거래소 빌딩. Courtesy: The Art Insitute of Chicago.

모더니즘 건축 제1강령: 장식을 제거하라.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 – 미국의 건축가 설리번 (Louis Sullivan)은 선언했다. 흔히 건축사를 거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더니즘 건축 세계의 핵심적 특징을 기능주의 (functionalism)라  정의한다. 하지만 20세기 초엽 1920-193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휩쓸었던 이 모더니즘은 소수의 사상적, 예술적 선구자들이 주도해 대중화시키고자 했던 상의하달 (top down)의 지극히 엘리트주의적 예술 사조였다해야 더 옳다. 그리고 모더니스트들이 앞세워 칭송했던 기능은 단순함 (simplicity)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송이었다.

근대 이전기 구시대 역사주의풍의에 대한 저항 전통적인 건축물 안팎과 내부 장식품들의 표면은 온통 저마다 시대적으로 유행하던 장식 문양들로 꾸며지곤 했다. 이같은 장식성은 20세기 전후로 등장한 여러 급진적인 모더니즘 건축가 및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반드시 배격해야 할 악취미 내지는 비윤리적인 것으로까지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건축가 아돌프 로오스 (Adolf Loos)는 ‘장식은 범죄 (Ornament is crime.)’라고 규정했고,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로 코르뷔지에 (Le Corbusier)는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1923년 출간)에서 장식적인 군더더기 없이 순수한 건축물에서 고귀한 정신성을 발견했다고 썼다.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의 선구자 페터 베렌스 (Peter Behrens)와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에게 있어서도 모더니즘 건축 정신은 이상 사회 건설과 인류의 진보를 의미했다. 젊은 몽상가들의 백일몽 같이 들릴수도 있는 이들 근대 건축가들은 분명 20세기 초 유럽 곳곳의 대기에 팽만해 있던 모더니즘 사고를 새로운 건축 및 주거 문화로 실현시킨 장본인들이다.

모더니즘 건축 제2강령: 대중에게 봉사하는 디자인이 되어라.
 ‘근대적인 신건축은 탁트이고 텅빈 열린 실내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건축 실내에는 구시대의 건축적 잔재들 즉, 공간내부의 장식물이나 부착물을 일체 제거할 것’은 모더니즘 건축의 공간 개념의 핵심이다. 그와 같은 양식적 특성은 특히나 독일에서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던 정부주도의 공공 주택 건설 프로젝트와 도시 및 조경 설계 프로젝트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마가레테 슈테-리호스키가 디자인한 프랑크푸르트 근대식 주방. 사진은 『다스 베르크(Das Werk)』 지 1927년호에 실렸던 자료사진. Courtesy: Schütte-Lihotzky Archive, University of Applied Arts, Vienna.

마가레테 슈테-리호츠키가 디자인한 프랑크푸르트 근대식 주방. 사진은 『다스 베르크(Das Werk)』 지 1927년호에 실렸던 자료사진. Courtesy: Schütte-Lihotzky Archive, University of Applied Arts, Vienna.

산업 디자인과 더불어서 건축의 표준화에 유독 열성적인 관심을 보였던 나라는 독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패배끝에 효율적이고 단일화된 경제 재건을 하루 빨리 이룩해야 했던 경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비교적 제한된 공간을 이용, 가능한한 많은 수의 주거민들을 쾌적한 환경과 저가로 수용할 수 있는 주거 건축물을 제공한다는 그같은 노력은 곧 건축물의 대량 건축 기술과 표준화 규정의 체계적인 정착에도 기여하였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 주거 생활 속에서도 널리 일반화된 현대식 주방배치는 오스트리아 여성 건축가 마가레테 슈테-리호츠키 (Margarete Schütte-Lihotzky)가 ’20세기적 신생활 환경에 맞는 표준화되고 편리한 주방 환경 창조’라는 기치 아래 1926년 디자인해 에른스트 메이 (Ernst May)가 설계한 프랑스푸르트 공공지원 주택단지 아파트용 주방에 응용한 이래 대중화된 ‘프랑크푸르트 주방 (Frankfurt Kitchen)’*이 그 원형이다.

국제 건축 양식 첫 물결은 실험주의
 오늘날 건축사에서 흔히 일컬어지는 ‘국제 건축 양식 (The International Style)’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탄생한 때는 1932년 미국 뉴욕의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이하 MOMA)에서 ‘인터내셔널 스타일’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유행중이던 최첨단 건축 전시회들이 연달아 부쳐지면서 부터였다. 1920년대에 유럽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여 순식간에 도시간 및 건축가간 보편적이고 통일화된 건축 이념과 양식이 형성되었던 만큼 국제 건축 양식이라는 명칭을 얻을만도 하였다.

근대주의 국제건축양식의 아이콘이 된 피에르 쟈네레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사보아는 1928년 착공해 1931년 완공되었다.

근대주의 국제건축양식의 아이콘이 된 피에르 쟈네레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사보아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활용해 1928년 착공 1931년 완공되었다.

특히 국제 건축 양식의 본고장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난 1920년대 무렵이 되자, 건축가들은 서로 매우 긴밀한 관계와 정보 교환 체체를 구축하며 근대 건축 이념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긴박하게 전개된 양식적 전파와 상호 영향력은 너무도 긴밀했던 나머지 개별 건축가들의 지엽적인 건축 이념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평준화 표준화될 정도였다. 자연히 그들의 관심은 보다 급진적인 사상과 양식을 건축 설계와 건축에 직접 실험으로 옮기는 일로 속히 불붙었다.

그렇지만 근대 국제 건축 양식 보편성과는 대조적으로 이를 주도했던 건축 거장들의 성격과 개성은 참으로 저마다 각양각색이었다고 한다. 독일 바우하우스와 바이마르 미술과 공예 학교의 지도자였던 발터 그로피우스는 자나깨나 건축 디자인의 사회적 측면을 고심했던 진지한 이상주의자이자 성실한 스승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스위스 출신으로서 벨기에 출신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 (Auguste Perret)와 더불어서 파리에서 건축가 활동을 시작한 르 코르뷔지에는 널리 소문난 딜레탕트 취미 건축가이자 허풍쟁이였다.

그런가 하면 흡사 수도사 혹은 고독한 철학자를 연상시킬 만큼 근엄과 강직한 근성으로 일관했던 독일의 미스 반 데어 로헤 (Mies van der Rohe)는 사생활 면에서나 미학적 신념 면에서나 절대적인 경지의 순수 형태 (pure form)의 신봉자였다.

1928년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건물을 위한 시카고 트리뷴 타워 설계 스케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발터 그로피우스. 1922년 화재의 건축공모전 안타깝게도 그의 안은 채택되지 않아 끝내 실현되지 못한 설계안으로 남아있다. © BAUHAUS-ARCHIV BERLIN.

1928 년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건물을 위한 시카고 트리뷴 타워 설계 스케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발터 그로피우스. 1922년 그는 이 화재의 건축공모전에 참여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안은 채택되지 않아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 BAUHAUS-ARCHIV BERLIN.

오늘날까지도 20세기 국제 건축 양식 하면 우선적으로 꼽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는 그 수많은 건축 프로젝트를 해 오면서도 스스로를 국제 건축 양식 계열의 건축가가 아니라고 줄곧 부인했었다. 기복이 심한 한 평생을 살면서도 언제나 비싼 양복 차림에 망토와 지팡이를 잊지 않았던 멋쟁이 댄디였든 로이드 라이트는 스스로를 몇 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 건축가라고 떵떵거리기까지 했다.

새로운 건축 재료가 가능케 해준 조형의 자유 
당시 모더니즘 건축가 및 디자이너들을 또한 깊이 매료시켰던 것들로는 산업 발달과 함께 새로 소개된 강철, 철근 콘크리트, 유리 등의 건축 신소재들이었다. 이들 신소재는 이전 건축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모양과 구조로 건축물을 지어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안겨줬던 만큼 건축디자이너들에게는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신소재가 안겨주는 건축 설계 및 시공상의 자유는 건축물 안팎 및 주변에서의 활동과 공간 활용도는 물론 빛이 모자른 북반부 유럽 지방에서는 곧 신건축 주거 문화로 이어짐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히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을 이끌었던 근대 건축의 선각자 발터 그로피우스는 「파르구스 구두 공장 (Fargus Shoe Factory)」(1911-16년)과 「쾰른 모델 공장」(1914년), 그리고 미국 시카고에 있는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건물 (Chicago Tribune  Building)」(1922년) 같은 대표적 건축 설계물을 통해서 철골 구조와 유리 재료를 단아하고 맵시있게 활용해 보였다.

1920년대에 근대 건축의 제2세대 선구자이자 건축을 시작하기 전부터 발휘해 오던 화가, 비평가, 이론가로서의 다재다능한 재주와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르 코르뷔지에(본명: 샤를르-에뒤아르 쟈네레, Charles-Éduard Jeanneret)가 유럽 곳곳을 여행한 끝에 근대 건축에 관한 가장 감명받았던 요소도 바로 철근 콘트리트라는 새로운 건축 재료였다.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스타인 드 몬치(Villa Stein de Monzie)의 실내 공간. 1926년. Photo: Charles Gérard(?).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스타인 드 몬치(Villa Stein de Monzie)의 실내 공간. 프랑스 가르슈(Garches) 소재. 1926년. Photo: Charles Gérard(?).

르 코르뷔지에가 근대 건축에 기여한 가장 큰 업적을 열거하라고 한다면, 첫째, 막이나 벽이 없는 탁트인 실내 공간에 기둥을 설치하고, 둘째, 건물 골조와 벽은 건축물을 지탱하는 기능 이외에서 그 자체로 미적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며, 셋째, 자유롭고 트인 실내 공간과 내외부 공간 간의 자연스럽고 막힘없는 연결을 위해서 벽을 가능한 한 없애도록 하며, 넷째 건물 앞면은 더이상 건물 지탱 기능을 하지 않고 오로지 겉표면 역할 만을 담당하도록 하며, 끝으로 다섯째, 지붕을 평평하게 설계하여 지붕 위에 옥상 정원을 만들어 생활 공간으로 확장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의 다섯가지 건축 건설 원칙은 오늘날까지도 서구는 물론 우리 주변에서 거주용 건축 설계에서 널리 보편화된채 활용되고 있는 이른바 국제 건축 양식의 공식 규격이 된지 오래다. 안타깝게도 르 코르뷔지에의 여러 혁신적인 안목과 비젼은 설계도 그림으로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생전 이 건축가의 탁월한 지성과 비평능력은 저서 『건축을 향하여』를 통해서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제3세대 국제 건축 양식의 여명  앞서 그로피우스와 르 코르뷔지에가 남긴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근대 건축의 순수 형태를 더 한층 정교화한 장본인은 바로 국제 건축 양식의 제3세대 거장 미스 반 데어 로헤라고 오늘날 건축사는 평가한다. 초기 독일 근대 공예 운동의 아버지 페터 베렌스의 공방에서 3년 동안 목공예 사사를 받고 1910년 베를린 박람회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 세계에 접하고 깊이 감명을 받은 것을 결정적인 계기로 삼아서 미스 반 데어 로헤는 평생을 건축물의 열린 공간과 공간의 수평적 흐름을 창조하는데에 바쳤다.

1920년대 창조적 폭발로 전성기를 누리던 베를린은 그에게 창조적 영감을 안겨주었지만, 1930년대 독일 나치 정권기는 바우하우스의 폐교와 정치와 사생활의 갈등 속에서 엄격하고 순수한 건축 미학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간 인고의 시기였다.

미스 반 데어 로헤, 필립 존슨, 루이스 칸 & 제이콥스 건축 사무소의 공동 설계로 1958년 완공된 시그램 빌딩. 현재도 뉴욕 파크애비뉴 375번지에 자리해 있는 이 철골구조 고층건물은 20세기 후반기 대도시에 보편화된 마천루 풍경을 선도한 예다.

미스 반 데어 로헤, 필립 존슨, 루이스 칸 & 제이콥스 건축 사무소의 공동 설계로 1958년 완공된 시그램 빌딩. 현재도 뉴욕 파크애비뉴 375번지에 자리해 있는 이 철골구조 고층건물은 20세기 후반기 대도시에 보편화된 마천루 풍경을 선도한 예다.

미국에서 고층 마천루로 거듭난 국제 건축 양식
 독일이 나치주의 정권과 광란의 우익 대중 영합주의로 본격적으로 접어든 1937년, 미스 반 데어 로헤는 미국 여행을 하던중 방문하게 된 광활한 미국 중서부를 보고 미국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월스트리트 증권시장의 폭락과 그로 인한 경제 대공황으로 허덕이고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를 거치면서 미국은 전에 보지 못한 번영기를 맞으리란 새싹을 보이고 있었다.

미스 반 데어 로헤에게도 새로운 건축 프로젝트와 돈벌이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독일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매우 뼈아픈 경험이었던 터라 이제 미스 반 데어 로헤는 파시즘, 공산주의, 볼세비즘, 나치즘 그 어느것도 아닌 미국의 국제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위한 국제 건축 양식을 실천할 것을 결심했다. „미스 반 데어 로헤=돈“이라는 주변인들의 바늘 섞인 농담도 바로 당시 그의 신념적 변화를 은근히 비꼬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뉴욕에 굳건히 서있는 시그램 타워 건물은 마치 미스 반 데어 로헤가 미국 자본주의를 영광화라도 하듯 극도로 모던하고 세련되게 설계된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국은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리쳐드 노이트라(Richard Neutra)에게도 행운의 나라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서 빈 모더니즘 건축가인 오토 바그너(Otto Wagner)에게서 사사를 받고 일찌기 미국으로 이미을 떠났던 노이트라는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에 국제 건축 양식을 널리 확산시키는게 공헌한 장본인이었다.

노이트라이 건축 양식은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 반 데어 로헤의 양식과 거의 유사하지만 건축물 바깥에 철근 콘크리트로 된 대형 발코니나 수영장을 매달아 부유시키는 식의 건축공학적으로 도전적인 건축 설계를 즐겨 했던 것이 특징적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러벨 건강원 건물이라든가 카우프만 가족의 사막 주택 등 개인 주문자들을 위한 설계가 주요 작품들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으로 망명온 건축가 리햐르트 노이트라가 에드거 J. 카우프만 가족의 건축 수주를 받아 설계 완공한 카우프만 사막 주택. 미 북동부의 극심한 추위를 피해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스에서 겨울철을 날 수 있도록 지어진 이 가족 별장은 1946-47년 경에 완공되었다. Photo courtesy: Wikiarquitectura.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으로 망명온 건축가 리쳐드 노이트라가 에드거 J. 카우프만 가족의 건축 수주를 받아 설계 완공한 카우프만 사막 주택. 미 북동부의 극심한 추위를 피해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스에서 겨울철을 날 수 있도록 지어진 이 가족 별장은 1946-47년 경에 완공되었다. Photo courtesy: Wikiarquitectura.

자칭 세기의 천재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경우도 주요 건축 의뢰인들은 개인 갑부들이었다. 피츠버그의 돈많은 사업가 집안인 카우만家를 위해 필라델피아에 지은 「폴링워터 (Fallingwater)」 하우스도 그가 설계한 수많은 개인 주택 프로젝트들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폴링워터」가 시냇물 낙하수와 바위에 걸쳐져 아슬아슬하게 지어졌다는 점 때문에 보존상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최근의 보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미국인들에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못지 않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메리칸 드림의 본고장 뉴욕에서는 기업들이 그들의 비상하는 기업적 포부와 이상을 마천루 건물을 통해서 표현했는데, 무려 40년에 걸쳐 1973년에 완공된 로커펠러 센터 빌딩, 데일리 뉴스 빌딩, 매그로-힐 빌딩이 오늘날까지도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수놓고 있다.

신을 향해 드높이 치솟았던 서양 중세의 교회당 건축처럼, 20세기와 21세기의 마천루는 자본주의의 전당이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정치적인 이상에서 출발한 20세기 국제 건축 양식은 21세기 오늘날 경제적인 부와 위상을 과시하는 가장 국제적인 건축 양식이 되었다.

* 또는 프랑크푸르트 주방 디자인 창시자 겸 바우하우스 여성 멤버 베니타 오테 (Benita Otte).

** 이 글은 본래 2005년 2월호와 3월호 『공간사랑』지 “History of …- 건축 & 디자인 역사” 연재 컬럼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독일 모더니즘 건축의 실용적 계승자

에곤 아이어만의 건축 세계

EGON EIERMANN

1958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출품된 독일관 건물 모습. Sep Ruf와 공동으로 설계 건축된 이 작품은 1956-58년 2년여에 걸쳐 건설되었다.

1958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출품된 독일관 건물 모습. Sep Ruf와 공동으로 설계 건축된 이 작품은 1956-58년 2년여에 걸쳐 건설되었다.

예나지금이나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Kaiser Wilhelm Memorial Church)[맨 위의 사진]는 베를린을 찾은 방문객들이 건축 순례지 목록에서 빼놓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가 보고 가는 곳이다. 베를린이 오늘날 독일의 수도가 되기 직전까지, 프러시아 왕국의 빌헬름 황제의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해 지어진 이 교회는 바로 독일 바우하우스가 자랑하는 모더니즘 건축가 에곤 아이어만(Egon Eiermann, 1904-1970)의 역작이다.

올해[2004년]로  건축가 故 에곤 아이어만이 탄생한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베를린에 자리한 바우하우스 아르키브에서는 오는 5월16일까지 건축가가 남긴 여러편의 건축작품들을 사진으로 기록한 자료들을 전시로 부친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독일 관할청 건물. Photo:  saai, J. Alexander Studio/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독일 관할청 건물. Photo: saai, J. Alexander Studio/

아이어만이 처음 국제 건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계기는 1958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를 통해서였다. 국제 건축 양식이 최고조의 인기를 누리며 전세계 대소도시에서 속속 번지며 지어올려지고 있던 1950년대말엽, 아이어만은 건축물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굵직굵직한 공공 정부 건축물 설계 프로젝트들을 연달아 담당했다.

미국 워싱턴DC의 독일 관할청, 독일 본의 국회의사당 타워(Langer Eugen), 프랑크푸르트의 네커만(Neckermann) 사의 우편주문 사무건물, 슈투트가르트의 IBM 사무실 건물, 올리베티(Olivetti) 전자회사 프랑크푸르트 지사 건물은 그같은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의 대표작들을 통해서 미루어볼 수 있듯이 독일 건축가 아이어만의 전문 분야는 모더니즘 계열의 산업과 관련된 사무실 건물을 설계하는 일. 특히 그는 건물내 산업체들이 자사 임직원들을 위한 작업 환경을 조성하는 것 외에도 기업의 제품들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전시할 수 있는 전시장과 매장 인테리어 디자인에도 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독일 IBM 본부 건물. 1967-72년. Photo: saai, Horstheinz Neuendorff.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독일 IBM 본부 건물. 1967-72년. Photo: saai, Horstheinz Neuendorff.

유독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건축 언어는 정밀하고 단순하면서도 기능과 구조 면에서 군더더기 없는 분명함이라 평갑된다. 그래서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가볍고 간결담백한 외관과 투명감을 느끼게 해 준다. 그는 건축 외에도 건축과 통일된 컨셉의 실내 장식 디자인에도 관여하면서 사무용 테이블, 의자, 계단, 옷걸이 등도 디자인해서 가구 디자인 분야에서도 명품을 만들어냈다.

베를린 바우하우스 아르히브(Bauhaus Archiv Berlin), 독일 칼스루헤 대학의 쉬드도이쳬스 건축 디자인 아르키브(saai)가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 전시는 독일 바우하우스의 건축 정신을 계승한 에곤 아이어만의 건축 작품 사진 전부와 스케치 및 청사진 등 그의 작업과 관련된 창조 과정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한자리에 선보인다.

* 이 글은 본래 LG 인테리어 사보 월간 『공간사랑』 지 2004년 3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