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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 되었던 곳

FLEMISH LANDSCAPE PAINTING

플랑드르 지방의 풍경화 감상하기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인 지난 2002년 봄과 여름철, 빈에 있는 미술사 박물관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부설 전시장인 하라흐 궁 (Palais Harrach) 에서는 『플랑드르 정물화』 전시를 열어서 미술 애호가들과 관광 방문객들의 큰 호응을 모았었다. 역사적으로나 언어와 문화면에서나 플랑드르 지방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미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네덜란드의 일부 영토 내지는 주변적 문화권으로 두리뭉실 취급되어 왔던게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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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반 발켄보르흐의 『볏짚이 있는 여름철 풍경 (7월 혹은 8월)』 1585년 작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그같은 점에 착안해서 빈 미술사 박물관이 기획해 전시로 부쳤던 『플랑드르 정물화』 전을 통해서 일반 대중 미술 관객들은 물론 전문가들에게 네덜란드 회화와는 구분되는 플랑드르 회화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규명하고 거장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준 교육적 성격이 강한 전시였다.

2년전의 그같은 대중 관객들의 호응도와 전시 연구 성과의 여세를 몰아서 이번에는 『플랑드르 풍경화 (Flemish Landscape Painting)』를 주제로 빈 미술사 박물관은 과연 플랑드르 풍경화의 전형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 모색의 결과를 보여주는 전시에 한창이다. 전세계 유명 박물관들과 개인 소장처들로부터 대여해 온 대표적인 플랑드르 풍경화들의 수는 총 유화 작품 130점과 스케치 및 그래픽 작품 18점.

지난번 『플랑드르 정물화』 전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가 성사되기까지 빈 미술사 박물관의 회화 학예 원구원들은 독일 에쎈의 빌라 휘겔 박물관의 루르 문화 재단 (Kulturstiftung Ruhr in der Villa Huegel at Essen)과의 연구 협력과 소장품 전시 대여 공유 협의 끝에 이 전시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보다 일찌기 이미 1988-89년에 미술관 방문객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의 『17세기 프라하 미술 (Prague around 1600)』 展과 이어 1997-98년 『브뢰겔 형제의 회화 (Breughel-Breughel)』 展도 바로 그같은 공동 전시 기획 연구의 결과였으며, 특히 이번 『플랑드르 풍경화』 전시를 위해서는 플랑드르 회화 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벨기에 안트워프 왕립 미술관 (Koninklijk Museum voor schone Kunsten in Antwerp)까지 가세했다.

우선 플랑드르란 어떤 곳일까가 궁금해 진다. 1970년대에 어린이 만화 방송을 보고 큰 세대들은 만화 영화 시리즈 『플란다스의 개 (The Dog of Flanders)』를 기억하시리라. 천사처럼 맘 착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농촌 소년 네로와 늙은 개 파트라슈의 아름답지만 슬픈 이야기를 담은 만화 『플란다스의 개』가 배경으로 했던 곳은 바로 플랑드르였다. 나무 울창한 숲과 녹색 잔디 구릉, 포를러 나무가 늘어 선 농촌길, 옹기종기 모여 선 농가 마을 – 만화 속에서 정형화되어 버리다 시피한 플랑드르 지방 농촌의 전형화된 단편적 이미지들이지만 플랑드르의 자연 풍경을 어림짐작해 보는데 아주 쓸모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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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브뢰겔 (아버지, Jan Brueghel d.Ä.) 『한 강가의 생선시장 (Fischmarkt am Ufer eines Flusses)』 1605년 작 © München, Bayerische Staatsgemäldesammlungen, Alte Pinakothek.

플랑드르 지방 영토는 오늘날 벨기에가 차지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보자면 오늘날 네덜란드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유럽 중세기에 속하는 14-15세기에는 프랑스령 하에서 농업과 양모 수출로 번성했던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1830년 혁명이 터지기 전까지 벨기에는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나폴레옹 프랑스에 걸친 외부 열강들의 지배하에서 시달렸던 고난과 아픔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치적 격동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던 플랑드르 지방에서 17세기 이후부터는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외부 정권의 압력과 끊이지 않는 종교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서 15-16세기와 같은 미술 전성기를 다시는 경험하지 못했다.

플랑드르가 14세기 이후로 적어도 17세기까지 미술 문화의 절정기를 이룩하게 되기까지에는 중세 시대 플랑드르 영토의 프랑스 군주들이 일찌기 확립해 놓았던 황실 미술 후원 전통과 양모 무역이 가져다 준 재정적 번영의 덕이 톡톡이 차지했다. 지금도 벨기에가 자랑하는 옛 역사적 무역 중심지 하알렘 (Haarlem)에서는 조각가 클라우스 슐루터와 화가 멜키오르 브로덜람이 활동했고, 북부 유럽의 양모 무역의 중심 도시던 브루게 (Brugge)에서는 중세의 거장 화가 얀 반 아이크 (Jan van Eyck)가 프랑스 황실 전속 화가로 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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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브뢰겔 (아버지 Pieter Bruegel d. Ä.) 『소떼를 이끌고 귀향하는 길 (Die Heimkehr der Herde)』 1565년 작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플랑드르 지방 화가들의 혁신적인 창의력은 또 남다르기로 유명해서 선배 대가들의 양식을 추종하고 모방하기 보다는 저마다의 전문적인 특기를 발전시키는 재주를 발휘하곤 했다.

흔히 유화 물감의 발명가로 알려져 있는 얀 반 아이크는 유화의 풍부한 색채성과 질감을 개척했다고 한다면, 이어 16세기와 17세기에 피터 브루겔과 피터 폴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성숙된 화면 구도법과 육중하고 감각적인 바로크 미술의 고전미를 완성했다고 일컬어 진다. 『플란다스의 개』의 결말 부분에서 네로가 얼어죽기 직전 추운 겨울 교회당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바라봤던 대상은 바로 안트워프 성당 안에 걸려 있는 루벤스의 그림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였다.

또 15세기말 북유럽 고딕 시대를 마무리하던 시대에 인간의 욕망과 죄악을 환상적 상상력과 기괴한 알레고리로 표현했던 히에로니무스 보슈 (Hieronymus Bosch), 17세기 영국 황실 화가로 명성을 누렸던 신동 화가 안토니 반 다익 (Anthony van Dyck), 플랑드르 정물화의 귀재 프라스 슈나이더 (Frans Snyder)는 플랑드르 출신의 거장화가들이다.

피터 브뤼겔과 그의 두 아들 피터 브뢰겔 (Pieter Brueghel the Younger (성서의 최후의 심판을 즐겨 그려서 ‘지옥 브뢰겔 (Hell Brueghel)’이라는 별칭으로 불림)과 얀 브뢰겔 (Jan Brueghel (벨벳 천을 실감나게 잘 그려서 벨벳 브뢰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정물화가로 활동)도 풍경화라는 국한된 쟝르와 상관없이 이 지방이 배출한 걸출한거장 화가들이다.

이번 “플랑드르 풍경화” 전이 유독 촛점 삼고 있는 시기는 1520-1700년까지. 그러니까 플랑드르 지방이 자리해 있는 북서부 유럽에서는 바로크 시대가 지배하고 있던 16세기초부터 18세기까지가 되겠다. 플랑드르 지방의 회화,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풍경화가 북방 네덜란드의 그것과 본격적으로 분리되어 독자적인 쟝르로 전개되기 시작한 계기는 다름 아닌 반종교 개혁 운동 (Counter Reformation). 즉, 북부 네덜란드가 프로테스탄트 신교를 인정한데 반해서 플랑드르와 브라방 지방을 포함한 남부 네덜란드에서는 신교를 배척하고 카톨릭 스페인의 지배하에서 구 카톨릭교를 고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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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베르프의 한 화가 [약 1540년 경 활동했던 마티스 쿡 (Matthys Cook(?))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가 그린 『위대한 성녀 카타리나가 있는 풍경화 (Landschaft mit der Marter der Hl. Katharina)』 © Washington, National Gallery of Artm Samuel H. Kress Collection.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가 구 카톨릭 교회 권력의 지나친 권력과 부패를 비판하고 성서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리를 재해석하면서 돌발한 기독교 종교 개혁은 거듭된 반종교 개혁 운동 끝에 북부 독일을 포함한 그 이북 유럽에서는 성공했지만 플랑드르를 포함한 그 이남 유럽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적어도 미술 분야에 있어서, 플랑드르 지방을 지배한 카톨릭 교회 전통은 프랑스 궁정풍의 위풍장대한 바로크 미술 양식이 후원받으면서 발전할 수 있었던 자양분을 제공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한 셈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제를 빌어오거나 성서 속의 일화를 해석한 종교화와 역사화가 회화 미술의 주류를 이루던 서양 미술사에서, 정물화와 풍경화 장르는 흔히 네덜란드가 탄생시킨 고유의 발명품이라고 여겨져 왔던게 상식이다. 본래 풍경화란 북부 네덜란드에서 처음 도입해 온 것으로소, 실제로 이번 전시가 플랑드르식 풍경화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1520년경인 16세기 초엽만 하더라도 플랑드르에서 풍경화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한 낯선 그림 쟝르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미술 전문가들에 따르면 풍경화가 정물화 보다 약간 앞서서 독자적인 그림 쟝르로 독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종교화나 역사화 속 한 구석에 들러리처럼 끼워넣어진채 묘사되던 바깥 자연 풍경과 실내 인테리어나 야채, 과일, 먹거리 등이 확대경처럼 한 폭의 그림 속 그 자체로 묘사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플랑드르 정물화가 인생무상 (人生無常), 절제와 검소의 미덕, 기독 성서 내용 알레고리, 거리의 활기찬 시장 광경이나 음식거리와 식기가 널려있는 풍성한 식탁 묘사로 지속적인 가내 평안과 번영 기원 등을 묘사한 교훈용 그림이었다고 한다면, 풍경화는 기독교적 요소와 자연을 모티프로 삼은 화가의 판타지 그림의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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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 – 1640) 『숲 속의 연못 (Der Teich im Walde)』© Vaduz, Sammlungen des Fürsten von und zu Liechtenstein.

오늘날 일반인들에게도 어지간히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바로크 회화의 거장 피터 폴 루벤스 (Pieter Paul Rubens)라든가 피터 브뤼겔(아버지 Pieter Brueghel the Elder) 등은 플랑드르 회화 전통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거장들이다.

이들은 다름아닌 당시 플랑드르 지방의 중심 도시던 안트베르프 (Antwerp)와 브뤼셀 (Brussel)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플랑드르식 정물화와 풍경화 전통을 구축해 나갔던 장본인들이었으며, 그들의 기량과 재간은 가히 유럽 대륙 곳곳에서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피터 브뤼겔의 걸작 풍경화들과 드로잉들 중 일부는 현재 빈 미술사 박물관이 애지중지하는 대표적인 영구 소장품들이다. 당시 16-17세기 플랑드르 화단이 그 절정의 꽃봉오리들을 만개하도록 기여한 우수한 풍경화가들은 또 있다. 헤리 멧 데 블레스 (Herri met de Bles), 얀 반 암스텔 (Jan van Amstel), 코르넬리스 마시스 (Cornelis Massys), 루카스 가셀 (Lucas Gassel) 등은 비록 네덜란드-플랑드르 미술사 전문가와 학자들 사이에서나 알려져 있는 다소 생소한 이름들이긴 하지만 16-17세기 플랑드르 풍경화가 독립적인 쟝르로 자리잡기까지 없어서는 안됐을 일등공신들이었다.

또 1570-1610년대 즉, 16세기말과 17세기초에 이르는 시기 동안 안트베르프와 브뤼셀을 거점 삼아서 그림을 그렸던 화가 작업실들이 번성했다. 화가들은 저마다 조수 화가와 견습생들을 두고 신흥 부유층 고객들의 주문에 응해 그림을 그려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히 화가들 사이에서는 제나름마다의 특기를 부각시켜서 독자적인 양식을 고집하는 전문화 현상이 전개되었다. 16세기 동안만 해도 일명 “세속 풍경화 (world landscapes)”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인기를 끌었던 보편적인 풍경화는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그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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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브뢰겔 (Jan Brueghel d.Ä., 1568 – 1625)과 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 – 1640) 협동 제작한 회화작품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묘사한 세속적 천국(Das irdische Paradies mit dem Sündenfall von Adam und Eva)』1615년 경 작품 © Den Haag, Mauritshuis.

산수 풍경 약간, 숲과 강가 풍경 약간, 마을 풍경과 인물상 약간씩 골고루 섞은 절충무난한 세속 풍경화 대신, 이 시대에 들어서부터는 그림을 주문하는 고객들은 풍경화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 풍경 속의 요소들 가운데에서 한 두가지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킨 세부화된 풍경화를 원하기 시작한게 그 원인이었다.

그래서 이16세기말-17세기초 플랑드르 풍경화는 산수 풍경화, 마을 풍경화, 바다 풍경화, 조감도식 풍경 기록화, 사시사철 풍경을 묘사한 계절 풍경화, 성서나 상상 속의 천국 풍경화, 환상 풍경화 등 전에 없이 세분화, 환타지화되었다. 미술사에서 이 시기의 플랑드르 풍경화 유행 현상을 두고 “후기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다 빈치, 미켈란젤로, 이어서 라파엘로로 이르는 전성기를 이룩했다면, 플랑드르 정물화는 17세기초에 피터 폴 루벤스와 더불어 그 절정기에 다달았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때는 시기상 서양 미술사에서는 바로크 시대로써 루벤스는 풍경화 분야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대혁신을 이룩했다고 평가받는다. 루벤스의 손재주로 인해서 풍경화 속의 대기와 자연은 마치 살아있는듯 숨쉬기 시작했으며, 이탈리아풍의 세련된 구도법과 플랑드르 회화 전통의 육중하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이 프랑스 바로크 궁중 회화를 영광되게 드높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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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반 발켄보르흐의 『겨울철 풍경 (1월 혹은 2월) Winterlandschaft (Januar oder Februar)』 1586년 작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얀 빌덴스 (Jan Wildens), 루카스 반 우덴 (Lucas van Uden), 그리고 브뤼셀 화파 소속 화가들 (로데빅 데 바아더 (Lodewijck de Vadder), 자크 다르투아 )Jacques d’Artois), 루카스 아체링크 (Lucas Achtschellink), 다니델 반 하일 (Daniel van Heil), 코르넬리스 호이스만스 (Cornelis Huysmans)는 루벤스를 스승삼아 루벤스 회화 전통을 충실하게 추종한 후계 풍경화가들이다.

모름지기 풍경화 (landscape painting)라고 불리는 그림 쟝르는 동양의 산수화 (山水畵)나 서양의 풍경화 (風景畵)든 그 출발은 화가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된 이상화 (理想化)된 경치를 화폭에 담는 것에서 출발했다. 고대 로마의 프레스코 벽화, 중국 고대의 산수화, 15세기 서양 르네상스 미술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초상화나 기록화를 위한 배경 처리적 요소로 활용되다가 16-17세기에 와서야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화가들에 의해 비로소 독립적인 그림 주제로 인정받게 되었다.

풍경화는 19세기말에 접어들면서 가장 눈부신 발전을 했다고 평가되는데, 분명 터너, 콘스터블, 세잔느, 반 고흐 등 오늘날 일반인들이 즐겨 감상하는 19세기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 풍경화는 바로 그 대표적인 결과였으니 분명 서양 풍경화의 역사에서 플랑드르 풍경화는 분수령적인 공로를 했음에 분명하다.

*이 글은 본래 『오뜨』지 2004년 3월호에 실렸던 것으로 편집되기 이전의 글을 그대로 실은 것입니다

에곤 실레 풍경화가로 다시 보기

EGON SCHIELE  AS A LANDSCAPE PAINTER

에곤 실레가 탐색한 풍경화의 세계 – 저물어 가는 허장성세 바로크 여명기에 싹튼 개인주의 예술 세계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계자’ ‚비엔나 유겐스틸의 화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기수’ –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드는 세기 전환기 비엔나에 살았으며 여인과 에로스의 화가로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를 한 마디로 정의하려도 시도한 별칭들은 여럿있다. 그만큼 그는 사춘기 전후의 어린 소녀로 부터 성숙한 여인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포즈와 도발성을 표현한 여인 그림을 많이도 그렸다.

실레는 1890년에 태어났으니 역시 ‘여인 초상화가’로 불리는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 보다는 인생 면에서나 화가라는 직업적 면에서나 근 30년이나 후배뻘이 되는 셈이다. 일찌기 기성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혀서 중상층 이상 계층의 미술 애호가들과 부유한 아녀자들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리주는 일로 남부럽지 않게 넉넉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클림트와는 대조적으로, 실레는 오늘날로 치면 도색 잡지의 기능을 담당하는 에로틱한 소녀상과 여성상을 그리는 일을 주업으로 생계를 꾸렸던 도색그림쟁이였다.

Egon Schiele: Hauswand am Flusss, 1915, 110x140cm

에곤 실레 『강변의 집 담벼락』 1915년 작. Courtesy: Leopold Museum, Wien.

반면에 여자 그림을 그리는 화가 겸 제도사로 알려져 있는 실레가 풍경화도 잘 그리는 순수 풍경화가라는 사실을 아는 일반인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지고 보면, 경우는 클림트의 사례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클림트는 생전 1989년 세상을 뜬 해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화가 일생을 살면서 그린 풍경화 작품들만도 55점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 작업하는 실내 아텔리에를 벗어나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자연 휴양지를 여행하면서 숲과 호수 경치를 틈틈히 그려댄 결과였으니 그는 분명 두말할 것 없는 집착적인 다작가(多作家)였다.

클림트에게 있어서 여성화가 대체로 주문에 응해 그려진 생계용 그림 프로젝트였다고 한다면 풍경화는 여가 시간을 쪼개어 창조성을 발산하고 영감을 충전하기 위한 순수 표현의 수단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가 풍경화가로서도 가치 높은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의 고국 오스트리아를 벗어난 해외에서는 아직도 그다지 폭넓게 알려져 있지 못하다.

벌써 2년전 즈음, 이곳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에서 4개월에 걸쳐 국가적 규모의 <클림트 풍경화> 전을 열었던 것도 풍경화로서 클림트를 재조명하는 것은 물론 클림트의 풍경화에 관한 한 최대의 소장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 벨베데레 갤러리의 자부심을 과시해 보려는 국가적 차원의 의도가 엿보이는 행사였다.

실레가 30년도 채 살지 못하고 마감한 28세의 미술가 인생 동안 남긴 회화 작품들 가운데 반 수 가량이 풍경화였음은 일반인들이 아직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의 열렬한 에곤 실레 애호가 겸 컬렉터라는 점 때문에 국립 미술관의 관장이 된 루돌프 레오폴트 (Rudolf Leopold) 박사는 이 기회에 자신의 레오폴트 미술관 컬렉션이 보유하고 있는 실레의 풍경화들을 한 자리에 선보이는 것을 통해서 풍경화 화가로서의 에곤 실레를 재조명해 보는 전시를 직접 기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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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가 1913년에 그린 『크루마우의 풍경』 그림을 위한 준비 드로잉. 최근 나치에 의한 강제 압수된 유태인 가족 소유의 작품으로 판정받은 후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고가에 낙찰되어 화재가 되었다. 이 작품 뒷면에는 색정에 몰입하고 있는 여인의 옆모습 그림이 스케치되어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레오폴트 관장이 실레 풍경화 연구 과정에서 풍경화 작품과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실존 장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증적으로 확인한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해 둔 사진 자료들을 나란히 전시한다.

풍경화 연구를 위해서 장소 고증을 하는 일은 미술사가들과 전문가들이 필히 하는 연구 관례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실레 풍경화 연구와 관련하여, 레오폴트 관장이 독자적으로 해 온 고증 연구 결과와 뉴욕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 New York)의 화랑 주인 겸 전문가인 제인 칼리어 (Jane Kallir)의 고증 연구 사이에서 빚어진 정당성 문제와 연구 결과 자료 도용 주장사건은 지금도 에곤 실레를 둘러싼 미술계 스캔들중에서도 뜨거운 화재 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실레 미술을 둘러싼 정치적 스캔들
미술계 스캔들을 거론할 때마다 미술 시장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빼놓지 않고 오가는 이야기 주제는 실레 작품들의 출처 문제이다. 일례로 가장 최근에 여론화된 소식으로 작년인 2003년 6월에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실레의 작품으로 경매에 부쳐진 『크루마우의 풍경 (도시와 강 경치) (Krumauer Landschaft – Stadt und Fluss)』(1916년 작)이 소더비 경매 역사상 최고 가격인 영국화 천 2백 6십 7만 파운드 즉, 미화로 전환하면 2천 1백 십만 달러 (다시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2백 4십 2억 원)에 가까운 낙찰금에 팔려 나가서 화재를 뿌렸다.

『크루마우 풍경』은 음울하고 헐벗고 종종 노골적이고 거친 성애 장면을 묘사한 인물화를 즐겨 그렸던 실레의 여타 작품들과는 다르게 환하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엿보여서 유독 예외적인 작품이다. 실레가 자신의 모친의 고향이던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크루마우 (Krumau)라는 한 작은 도시와 그 곁을 끼고 흐르는 몰다우 강 (Moldau)을 그린 서정풍 강한 유화 그림이다. 이 유화 그림의 창작 동기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불행한 어린 성장 시절을 거쳤고 어린 소녀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잦은 곤혹을 치뤘던 문제의 사나이 실레가 어미니의 고향 크루마우를 방문하여 그 경치를 화폭으로 옮기는 것을 통해서 정신적인 평온을 찾으려 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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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모양으로 늘어선 집들』 또는 『섬 도시』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이 풍경화는 1915년에 그려졌다.

그런데 화재 거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그림이 유독 언론의 관심을 끈 이유는 이 그림이 나치에 의해서 압수되었다가 미술 시장으로 반환된 작품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크루마우 풍경』 그림은 현재가지 규명된 바에 따르면 실레와 절친한 친구 관계였던 유태인 출신의 빌헬름과 데이지 헬만 부부 (Wilhelm & Daisy Hellmann)가 화가로 부터 직접 구입한 작품이었는데, 1938년 나치군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방던 해에 강제 압수한 것이라고 한다. 나치 정권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던 1933-1948년 사이, 본 주인이 게스타포의 손에 갈취당한 이후 줄곧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의 소장품으로 1953년까지 보관되어 오다가 이 작품을 애타게 찾고 있던 헬만 부부의 눈에 띄었다.

헬만 부부는 나치로부터 압수된 미술품 반환을 위한 본격적인 법률 절차를 거쳐 승소한 후 이 작품을 반환받았고, 이후 헬만 부부의 후손들이 작년 소더비 경매에 부쳐 다시 미술시장에 내 놓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은 소더비 경매소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분실 미술품 반환을 위한 연구소 및 법률담당부가 자체적인 분실 미술품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법적인 반환 요구 노력 끝에 마침내 그림 도둑들로부터 되찾아 온 법적 케이스로도 유명하다.

누군가 미술 작품의 역사는 작품을 창조한 화가가 완성하기 까지의 역사와 그 작품이 여러 주인들의 손에서 손으로 거쳐가는 소유자의 역사 두 가지를 갖고 있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미술 작품과 작품을 소유하는 주인 사이의 관계는 참으로 변화무쌍하기도 하지만 또 그에 못지 않게 끈질기기도 한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소더비가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나치 시대 분실된 미술품 회복 운동은 경매에 부칠 명작들을 재발굴하여 경매로 부칠 수 있는 경제적 이득 기회를 재창조하는 셈이고, 또 한 편으로는 나치의 유태인 핍박 끝에 미술품을 강제로 빼앗기거나 손실한 유태인 후손들이 조상들을 대신해 한풀이도 하고 잃어버렸던 미술 명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주는 셈이다.

바로 그런 연유로 해서 특히나 오스트리아의 경우, 나치 시대 유태인들로 부터 강탈했던 미술품들 특히 그 중에서도 오늘날 기록적인 고매매가를 홋가하는 클림트와 실레의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서 골칫거리를 앓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9월 16일부터 대중에게 공개될 『실레 풍경화』 전에는 출처 문제에 휘말릴 만한 출품작들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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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도시』 1911년 작. 실레는 어린 시절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늘 어머니에 대한 애정 부족을 느끼며 성장했다고 전해진다. 그같은 성장경험은 실레가 성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 올 80세를 맞는 노장의 레오폴트 관장은 자신의 실레 컬렉션은 거의 대부분 경매와 시장에서 구입한 것임을 강조해 마지 않는다. 하지만 그도 한창 실레 작품들을 쫏아 다니며 사모으는데 정신이 없던 전후 젊은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실레 컬렉션의 가격은 이루 다 셈할 수 없을 만큼 기하흡수적인 비례로 폭등했음을 기꺼이 시인한다.

실레 미술품 걸작인가 미술 시장의 투자 대상인가?
미술 시장에서 보나 대중적인 인기도 면에서 보나 실레가 그토록 화재를 몰고 다니는 화가인 만큼 그의 작품 가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에 매매되고 있다.

일례로, 올 여름 뉴욕에서 열렸던 소더비 경매에서 실레가 그린 1913년 한 점의 드로잉 작품 『연인들』이무려 미화 3백5십만 달러 그러니까 우리돈으로 하면 4십억에 낙찰되어 뉴욕 출신의 거부 마이클 스타인하트에게 팔여 나가서 「뉴욕 타임즈」 紙가 서둘러 보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가 하면 유명 경매소를 통해서 값비싸게 댓가를 치루고 구입한 실레 드로잉이 알고 보니 희미해져 버린 원작 실레 그림 위에 전문 위조꾼 화가에 의해 선명하게 덧칠이 된 후 본래 있지도 않았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ES’ 라는 서명을 임의로 그려 넣은 일로 해서 그림 주인이 경매 회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건 사건이 벌어지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게다가 실레의 유명세는 미술 컬렉터들의 투자 가치 아이템으로서도 효자 노릇을 톡톡이 한다. 마이클 스타인하트는 올 여름 소더비에서 거머쥔 4십억 짜리의 실레 드로잉 외에도 작년에 이미 14점의 드로잉을 화장품업계의 거물인 로널드 로더 (Ronald Lauder)로부터 우리돈 약 1백 4십6억 여원에 이르는 돈을 주고 구입을 했으며, 스타인하트에게 실레 드로잉들을 온통 팔아버린 로널드 로더는 다시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액수에 달하는 돈을 주고 실레 전문 딜러인 세르게 사바르스키로부터 실레의 수채화 36점을 사들여 자신의 컬렉션을 보충했다.

게다가 이들 큰손 컬렉터들은 보다 많은 낙찰가로 작품을 처분하기 위해서 소더비와 크리스티 등 유수의 국제적인 미술품 경매소들을 오가면서 보다 비싼 가격으로 미술 작품을 매매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는데에도 놀라운 수완을 벌이곤 한다. 여전히 미술 경매장에서 최고 낙찰가로 경매업자들을 기쁘게 해 주는 분야는 20세기 초엽 미술과 인상주의 계열이다. 모딜리아니, 마티스, 반 고흐, 피카소와 더불어 실레 (그리고 동시대인 오스트리아인 화가인 클림트를 포함해서)는 의문의 여지없이 최고의 핫 아이템으로 그 인기는 식을줄 모른다.

실레가 오늘날 환생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가로 치솟은 자신의 작품 가치를 본다면 뭐라 했을까? 28살 나이에 제1차 대전 직후 비엔나 시 전역에 나돌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갑작스럽게 세상을 하직한 젊은 실레는 가난, 고통, 질병, 성적 갈등이 잔뜩 표현된 여인 그림들을 그려 팔아서 생계에 일부 보태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망하기 바로 직전 그는 남달리 뛰어난 재능과 개성이 서서히 비엔나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부와 명성의 궤도로의 진입을 막 앞두고 있던 참이었다.

소위 말하는 ‚성공한 예술가’로서 역사에 남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작품을 꾸준하고 일관적으로 작업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성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을 만큼 장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 영국의 미술 평론가 앨런 보네스의 지적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만일 실레가 좀 더 오래 살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오늘날 미술 경매소에서 오가는 가격 만큼은 안되더라도 훨씬 지위 높고 윤택한 예술인으로서의 여생을 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Egon Schiele: Versinkende Sonne, 1913, 89x90,5cm

에곤 실레의 『지는 해』 1913년 작. Courtesy: Leopold Collection, Wien.

풍경화는 내면적 감정 세계의 표출
 레오폴트 관장이 실레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던 25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구입한 작품은 다름아닌 풍경화였다고 한다.

오스트리아가 제2차 대전 종전을 뒤로 한채 사회적 혼란과 경제 재건에 한창이던 1950년 여름, 당시 의과 대학생이던 레오폴트 관장은 실레의 친구였던 아르투르 뢰슬러 (Arthur Roessler)로 부터 풍경화 한 점을 맞닥드리게 되었다.

나이 많은 뢰슬러 씨는 지갑도 얇은 애송이 미술 수집가에게 ‘해가 지는 경치’를 담은 한 편의 풍경화를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현재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실레의 1913년 유화 작품 『지는 해 (Versinkende Sonne)』이다. 산과 숲을 배경으로 해질녘 저녁놀이 지는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 그림에서 보는이는 이루 설명하기 힘든 울적함을 느끼게 된다. 때는 이미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나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해서 을씨년스러운 냉냉함까지 전달된다.

이 작품은 그로 부터 7 년 후에 뢰슬러 씨가 레오폴트 관장에서 선물을 한 계기로 레오폴트 소장 목록에 포함되었다. 그대신 그날 레오폴트 관장은 『죽은 도시 (Die tote Stadt)>(1910년 작)를 사서 집에 가져왔는데 이 그림도 이번 전시에서 다시 공개된다. 앞에서 언급된 소더비에서 경매된 화재의 작품 『크루마우의 풍경』을 그리기 직전에 그려 뒀던 습작 스케치 『크루마우』(1913년 작)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레오폴트 관장은 실제로 이 그림에 나타난 집 번지수와 실제 크루마우 도시의 집 번지수를 일일이 비교판별해 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에곤 실레가 살았던 19-20세기 전환기는 절대 군주체제의 잔재랄 수 있는 집단적인 허식성과 새로 대두되기 시작한 근대적 개인주의가 전면 충돌한 긴장의 시기였다. 그래서 20세기로의 전환점에 선 비엔나에서는 근대주의라는 막을 수 없는 시대적 대세에 잠시나마 저항하기 위한 고전주의자들과 역사주의자들의 복고주의 몸부림이 일기도 했지만 역시 시대의 흐름은 개인주의라는 근대적 신사고로 흐르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실레의 미술 세계는 당시 비엔나의 대기에 가득하던 시대 정신 (Zeitgeist)의 반영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에 미술 창조의 원동력을 개인의 내면 세계로 눈을 돌려서 폭발적이고 격렬한 필치로 표현한 화가들은 실레 말고도 또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동요와 불안으로 가득한 사회상을 반영하기라 하듯 오스카 코코시카 (Oskar Kokoschka)는 마치 전기를 맞아 전율하는 듯해 보이는 형상으로 인물과 풍경을 묘사했다.

자기 자신의 통쾌하게 비웃는 유령처럼 묘사한 자화상으로 유명한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은 자기 내면과의 투쟁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미술이 내면적 갈등에 대한 외면적 표출의 수단으로서 활용된 이 시대는 성과 무의식을 주축으로 한 프로이트의 심리분석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실레의 풍경화를 바라 보고 있노라면 여성화에서 다름없이 발견되는 강렬대담하면서도 극도로 신경질적인 필치가 여지없이 발견된다. 실레는 웬만해서는 자기가 그린 그림에 대한 복사판을 그리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굳이 모사본을 그려야 했을 경우라도 일부러 변형을 여기저기 가해 그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바로 그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런던에 있는 말보로 갤러리에서 영국에서는 최초로 열린 에곤 실레의 전시회를 본 한 일간지 기자의 말은 실레 미술이 지니는 역사적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사치오와 모차르트의 경우 처럼 실레는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미술사에 남긴 흔적은 충분했다“라고. 이번 『실레의 풍경화』 전은 [2003년] 9월17일부터 내년 초인 2004년 1월31일까지 계속된다. All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이 글은 2003년 10월호 『오뜨』 지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