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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인상주의 회화 – 패션 가이드로 다시 보기

IMPRESSIONISM AND FASHION from Musée d’Orsay, Paris

08. Claude Monet_Le déjeuner sur l'herbe_1865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잔디 위에서의 점심식사(Le déjeuner sur l’herbe)》 1865-1866 캔버스에 유채, 248,7 x 218 cm Paris, Musée d’Orsay © Musée d’Orsay, dist. RMN / Patrice Schmidt.

미술시장에서의 최우선 투자대상, 미술 컬렉터들 사이 높이 선망받는 애호 목록, 그리고 일반 대중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친근한 미술 감상대상 제1호를 꼽으라면? 그에 대한 답은 단연 프랑스의 인상주의 회화일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근대기 파리의 도시인들의 일상과 시민문화를 기록한 시대적 눈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 회화가 파리의 최신 대중 패션에 영향을 끼치며  프랑스 패션 산업과 출판 업계까지 활성화시킨 산업 역군 역할까지 했었다는 사실은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 프랑스에서는 뜨고 지는 태양 아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색채와 형태를 발하는 아름다운 야외 자연 세계를 캔버스로 옮기는 인상주의 회화가 등장하여 서양 미술사 발전에 혁명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신시대를 맞아 전격적인 변화가 들이닥친 분야는 인상주의 미술 뿐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근대시대(Modernism)가 되자 도시에 모여살던 도시인들의 도회 환경, ‘근대인(modern man)들의 살아가는 방식, 신시대가 요구하는 개인주의에 발맞춰서 시민들이 저마다 개성을 표현하는 방식도 전격적으로 달라졌다. 그렇다고 근대 유럽인들이 관상, 옷차림, 행동거지 같은 외모와 겉치레만을 내세운 피상적인 속물로 전락했다는 뜻만은 아니다. 엘리트 인사, 예술가,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옷차림을 통해서 신시대의 시각 문화를 개척하고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졌고, 이를 반영하여 파리에서는 백화점과 패션 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09.Pierre-Auguste Renoir_La balançoire

피에르-오귀스트 르노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그네(La balançoire)》 1876 캔버스에 유채, 92 x 73 cm Paris, Musée d’Orsay © RMN (Musée d’Orsay) / Hervé Lewandowski.

사회학자 리쳐드 세네트(Richard Sennett)가 그의 저서 《공적 인간의 몰락(The Fall of Public Man)》(Knopf, 1977)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근대기 유럽에서 탄생한 새 도시 문화와 매너리즘은 몰락한 구시대 귀족, 신흥 중산층 부르조아 계층,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든 농부와 노동자 등 신흥빈민층이 새로 형성된 대도시 문화라는 공공 공간 속에서 함께 엉켜 살게 되면서 자기정체성을 보존하고 사회적 계약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돕는 조절기제 역할을 담당했다.

새 메트로폴리스로 급성장한 근대기 파리는 온갖 인간상을 구경하고 관찰할 수 있는 인간극장과도 같았다.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은 마치 오늘날 사진가들이 하듯 나날이 번창해 가는 도시 속 근대인들의 모습을 재빨리 포착해 그림으로 옮겼다. 특히 마네(Éduard Manet)와 드가(Edgar Degas)는 바로 신 파리지앙 현상을 태연한 시선과 세련된 필치로 시인 보들레드가 정의한 것처럼 “겉모습에 담긴 일상의 변화상(the daily metamorphosis of exterior things)”을 마치 풍속화 또는 길거리 패션 스냅샷처럼 기록했다.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신체와 옷은 빛 속에서 “본질과 물리적 특성이 사라졌다”고 표현했고, 문필가 공쿠르 형제는 “빛과 그림자가 부리는 마술로 인해서 그림 속 인물과 옷의 실체가 변했다”고 했다. 인상주의 그림 속에서 드디어 인물은 더 이상 자연환경으로부터 도드라져 보이는 독자적인 초상으로써가 아니라 자연 환경의 일부가 되어  묻어들었다.

10. James Tissot_Portrait du marquis de Miramon_1865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 – 1905) 《미라몽 후작 부부와 자녀들 초상(Portrait du marquis et de la marquise de Miramon et de leurs enfants)》 1865 캔버스에 유채, 177 x 217 cm Paris, Musée d’Orsay © RMN (Musée d’Orsay) / Hervé Lewandowski.

이 즈음인 1860-1880년대, 인상주의 그림의 미학에 물들은 패션 잡지들 – 예컨대, 《라 모드 일뤼스트레(La Mode Illustrée)》나 《주르날 데 드모아젤(Journal des Demoiselles)》- 은 빛 속에 녹아들어 태양의 변화와 더불어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람들의 자태와 의상을 정기간행물로 출판해 대중화시켰고, 근대 파리인들은 잡지 속 이미지를 지침 삼아서 최신 패션 유행을 일상에서 옷 맞춰입기에 응용했다.

당시 파리인들은 어떤 표정을 얼굴에 머금고 어떤 패션을 구가하며 어떤 장소에 모여 비즈니스 대화를 나누고 사교를 하고 여가를 보냈을까? 티소(Tissot)나 스티븐스(Stevens)가 그린 파리 여성들 초상화들은 프랑스 제2제국과 초기 제3제국 시대(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 사이 나폴레온 3세 통치기)에 귀족과 고위급 사교계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우아한 패션과 몸가짐 관리방식을 관찰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 역할을 한다.

06.Renoir_Jeune Femme à la voilette

피에르-오귀스트 르노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베일을 쓴 젋은 여인(Jeune femme à la voilette), 1870 캔버스에 유채, 61 x 51 cm Paris, musée d’Orsay © Musée d’Orsay, dist. RMN / Patrice Schmidt.

그러나 보다 대중적 수준에서 파리의 신시대 패션과 행동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시각 자료는 마네, 모네, 르노아르, 드가, 카유보뜨의 그림 속에 담겨있다. 이 시대 도회지 신흥 중상층 여성들은 격조 높고 격식에 얽매인 드레스와 고가의 악세서리 보다는 한결 활동에 편하고 실용적인 패션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그림 속에 등장한 중상층 여성들은 제국 시대풍 크리놀린 드레스 스타일에서 벗어나서 간소화된 티 드레스나 워킹 드레스를 입었고, 거추장스럽게 장황하거나 값비싼 장신구 대신에 보터 모자, 베일, 숄, 펠리스(안에 털을 단 긴 코트) 등을 걸쳐 멋을 냈다.

그런가하면, 르노아르가 그린 《샤르팡티에 여사와 자녀들의 초상(Madame Charpentier et ses enfants)》(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과 마네가 그린 《나나(Nana)》(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소장)는 여간해서 전시회를 통해서 보기 어려운 작품들로서, 전자는 당시 파리의 저명한 출판사 발행인의 아내와 두 딸의 모습을 담은 전통 초상화풍 회화이며 후자는 당시 파리몽마르트에 널리 찾아볼 수 있었던 고급 매춘부나 애첩들이 어떻게 침실을 꾸미고  어떤 속옷 패션을 구가했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 그림이다.

11.Bazille_Réunion de famille

프레데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 1841-1870) 《가족 모임(Réunion de famille)》 1867 캔버스에 유채, 152 x 230 cm Paris, musée d’Orsay, acquis avec la participation de Marc Bazille, frère de l’artiste, 1905 © RMN (Musée d’Orsay) / Hervé Lewandowski.

이 전시의 첫 순회지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2012년 9월25일-2013년 1월20일)이며, 이어서 2013년 봄부터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The Art Institute of Chicago)로 차례로 옮겨져 순회전시될 예정이다. 이 전시 기획을 위해서 파리에 있는 파리 시립 패션 칼리에라 박물관(Musée Galliera – Musée de la Mode de la Ville de Paris)이 협찬했다. Image courtesy: Musée d’Orsay, Paris.

전시 장소: 파리 오르세 미술관 1층 주 전시장 | 전시 기간: 2012년 9월25일-2013년 1월20일.

갑갑한 아텔리에서 탁트인 전원 공간으로

인상주의 회화의 잉태한 세기말 파리  – 귀족을 위한 미술에서 시민을 위한 미술로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행하던 세기 전환기 유럽 – 여타 예술 분야와 더불어서 미술도 전에 없던 혁신적인 변화를 목도하기 시작했다. 귀족층들만을 미술품 관객 및 주고객으로 취급하던 왕립 주도의 파리 미술 아카데미 (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s, 1648년 창립)는 17세기 처음 창설한 이래 그 철저한 아카데미 교육과 미술가 선발 제도를 200년 동안 고수하며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체의 미술을 주도·통제했다. 그러나 이 막강한 미술 기관의 제도적 고루성과 천편일률성은 일부 미술가들과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불거져 나온 불만과 반발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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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야콥 쉰들러 『카이저뮐렌의 도나우 강변 증기기관선』 1871/72년 경 작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그같은 원성이 급기야는 파리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예술적 권위와 취향에 대항하는 사건으로 번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1863년의 낙선전 (Salon de refusés)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3세와 신흥 중산층 시민 계층이 주도가 되어 새로운 시대의 미술을 외치고자 한 이 낙선전을 통해서 전시를 하게 된 화가들 중에는 폴 세잔느, 에두아르 마네, 카미유 피사로, 제임스 휘슬러 같이 오늘날 일반인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있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럽을 지배해 왔던 절대주의 귀족주의가 붕괴의 일로로 가속화해 가던 한편으로 새로운 정치 경제적 급부상 일로에 있던 부르조아 시민계층이 세를 더해 가고 있던 당시 19세기, 부르조아 대중은 이제 귀족주의적 취향에 봉사하던 고전주의 아카데미 미술 대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미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회  극소수 상류 엘리트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미술은 이제 남부럽지 않게 부를 축적하게 된 신흥 중산층 시민들도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기호 상품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상주의 미술의 대두는 유럽 근대 세기 전환기에 전개되었던 신흥 부르조아 계급의 출현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 된다. 인상주의 개척자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후기 인상주의파 화가들, 특히 폴 세잔느,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등은 인상주의의 파격적인 이념과 양식적 특징을 이어받아 근대기 파리 미술계가 나아갈 향방을 제시하며20세기 근현대 주류 아방가르드 미술의 시발점을 제공해 주었다.

비엔나 인상주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도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 운동이 지녔던 의미있는 인상주의 회화 운동이 존재했는가? 미술에 대한 문외한들도 인상주의 회화의 발상지가 파리였음은 능히 짐작하시겠지만, 미술을 웬만큼 안다고 자부하는 애호가들과 전문가들에게 비엔나 인상주의 회화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하시리라.

이같은 의문에 대한 분명한 응전으로써 ‚비엔나에도 인상주의 회화 운동이 있었다’라는 선언구를 내걸고 지난 3월16일부터 이곳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미술관에서는 『비엔나 인상주의풍 회화전 (Stimmungsimpressionismus)』 展이 전시에 한창이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되는 180여점의 비엔나 인상주의 회화 작품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곳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내 미술관 여러곳과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대여해 온 것들이며 그 외에도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립 박물관에서도 이번 전시를 위해서 작품들 일부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이 전시를 바라보는 언론, 미술 전문가들, 그리고 일반 관객들의 이해와 주장은 저마다 각양각색이겠지만, 대체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근대기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했던 인상주의풍의 회화 운동은 전원적 자연을 소재로 삼은 사실주의 경향의 회화 경향의 하나로서, 그리고 일반 관객들 사이에서는 중산층 대중들의 취향과 잘 부합하여 집에 한번 쯤은 걸어 두고 싶은 낭만적이고 보기좋은 그림들을 만들었던 그림 양식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는듯 하다.

Ribarz

루돌프 라바르츠 (Rudolf Ribarz), 『밭에 딩구는 호박 (Pumpkins On The Field)』목판에 유채, 44 x 54 cm ⓒ Wien Museum, Wien.

물론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의 인상주의 운동과 오스트리아의 인상주의豊의 풍경화 그림 운동은 동일한 미술사적 의미로 설명될 수는 없다. 오스트리아에서 행해졌던 인상주의풍 회화 운동은 근원적인 동기 면에 있어서나 미술계에 미친 파급 효과 면에 있어서나 프랑스에서 처럼  폭발적이거나 혁명적인 성격을 띠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운동에 참여했던 화가들 대다수는 그림그리기를 생계를 위한 주업으로 삼았던 직업적인 화가들도 아니었다.

감성과 신비가 느껴지는 정취 담긴 풍경화
그러나 프랑스 인상주의가 발단했던 사회적 배경과 미의식(美意識) 면에 있어서 서로 공유하는 유사점도 없진 않다. 사회적인 배경 면에서 볼 때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절대주의 귀족체제에서 부르조아 체제로 이행하는 근대기를 겪고 있었으며, 따라서 때는 새로운 신흥 중산층 시민들은 카톨릭 교회와 귀족 정권을 미화하는 엘리트주의 경도의 고전파 미술을 거부하고 그대신 일상 생활과 연관지을 수 있는 보다 쉽고 이해하기 쉬운 미술을 요구하는 시대였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스트리아의 인상주의풍 화가들은 풍경화로부터 예술적 ·미적 정당성을 찾는데 주력했다. 때는 1870-1900년대 즈음, 프랑스 퐁텐블로 (Fontainebleau)에서 전개되었던 바르비종 화파 (Barbizon School, ‚외광파(外光派)’로도 알려져 있는 이 화파에는 쟝-쟈크 루소, 프랑소와 밀레 등이 포함)의 영향을 받고, 오스트리아의 인상주의파 화가들은 이젤과 휴대에 편할 만한 크기의 캔버스와 그림 재료들을 들고 야외로 나가서 천연 태양광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나우강(江)과 비엔나 숲 (Wienerwald)을 끼고 발달해 있는 도시에 살던 비엔나인들은 스스로를 둘도 없이 자연과 친숙한 자연애호가들임을 자부해 왔던 터인데에다가 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터주는 풍경화 그림에 아무런 거부감없이 금방 친숙해 질 수 있었던 듯 하다.

바르비종 화파와 인상주의파 화가들이 일광에 반사된 자연과 일상 풍경을 보고 받은 일시적으로 받은 인상 (Impression)을 객관적인 눈으로 즉각 화폭에 옮기는 일에 주력했다고 한다면, 오스트리아의 인상주의풍 화가들은 자칫 다분해 질 수 있는 단조로운 자연 풍경과 날씨 묘사를 하는 것을 넘어서서 화가 개인의 감성(emotion)을 담아 내는 이른바 ‚정취 담긴 풍경화 (atmospheric landscape)’를 창조하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전통적인 회화 관습에 따르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사소하고 미미한 소재를 크게 클로즈업해 묘사하는 방식이 일부 화가들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탐구되기도 해서 그들이 즐겨 묘사했던 정원이나 밭 위에 널려있는 채소나 꽃, 그리고 풍경화 속에 곁들여진 묘한 자태의 미소년과 미소녀의 모습은 알 수 없는 신비감까지 더해 주었다.

이같은 비엔나 인상주의풍 풍경화파를 주도했던 화가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 화파에 참여했던 화가들로는 대체로 전통적인 아카데미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이른바 비직업적 혹은 아마츄어 화가들과 여성들이 차지했던 것이 특징적이다. 일명 ‚쉰들러 서클 (Schindler Kreis)’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에밀 야콥 쉰들러 (Emil Jacon Schindler)는 근대 비엔나 인상주의풍의 대부격 인물이자 여러 다른 후배 화가들의 표본이자 스승뻘 인물이었다.

에밀 야콥 쉰들러는 사실 근대 음악의 선구적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와 결혼했으며 바우하우스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등과 염문을 뿌려서 부르조아 사교계에서 널리 알려졌던 여성 알마-말러 베르펠 (Alma-Mahler Werfel)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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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에 에그너 『덩굴 시렁』 1919년 작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그의 미술 일기에서도 적고 있는 것처럼 그가 추구했던 풍경화는 ‚자연의 헌신적인 입맞춤’을 감성과 시적(詩的) 정서를 한껏 담아서 표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쉰들러가 특히 그의 풍경화 소재로 삼았던 대상들로는 그의 작품 『카이저뮐렌의 도나우 강변 증기기관선』(1871/72년 경 작), 『하킹의 봄』(1883년 작)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도나우 강변의 숲과 수경(水景), 비엔나 도심 북부에 펼쳐져 있는 비엔나 숲, 그리고 각종 박람 전시와 놀이 공원이 있는 프라터 거리 (Prater) 풍경들이었다.

눈으로 보고 눈으로 느낀 자연을 감성을 담아 가미해 그려내는 것을 사명감으로 삼았던 쉰들러의 ‚인상주의풍 사실주의 회화’ 또는 ‚시적 사실주의 회화’들은 보는이에 따라서는 감정에 북바쳐 표출된 측은한 감상주의 (sentimentalism)라고 볼 수도 있겠고 또 한편으로는 시적 감수성과 자연을 향한 친밀감이 고조된 사실주의로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프랑스 인상주의에서 느껴지는 세련된 색채 감각이나 치밀한 구도력은 뒤떨어진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생전 쉰들러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열렬한 슈베르트 팬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화가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감흥을 최다한 느껴보기 위해서 슈베르트의 가곡 한 편을 틀어 놓고 쉰들러의 그림을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쉰들러 서클과 여성 후학들
에밀 쉰들러는 동시대 젊은 화가들을 추종자로 끌어 모으는데 적잖이 성공했다. 오스트리아의 세기 전환기 화가 카를 몰 (Carl Moll)은 갓 애송이 화가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 쉰들러의 영향을 받고 아텔리에에서 박차고 나와 도심 슈타트파크 (Stadtpark)  시립공원이나 비엔나 시립 중앙 묘지 (Zentralfriedhof)에 이젤과 캔버스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렸다.  쉰들러와 한때 한 아텔리에를 나눠쓰던 동료 화가 아우구스트 셰퍼 (August Schäffer)는 „하나님 자유로운 자연에서 작업하는 것이 내 천명“이라고 외쳤던 자연 애호가였다.

한편 쉰들러 서클의 동인으로 가입해 풍경화를 그리던 젊은 화가들중에서 오이겐 예틀 (Eugen Jettel) 『무성하게 자라는 양파밭』 (1897년 작), 루돌프 리바르츠 (Rudolf Ribarz , 야채가 있는 풍경화가 특징), 로베르트 루스 (Robert Russ) 등은 쉰들러 서클에서 중도탈퇴하고 그 대신 정식 미술 학교에서 수학하는 길을 택했다. 유명한 스승의 지도나 개인 교습을 통해서 그림을 배우던 도제식 교육 방식이 점차 미술 학교 혹은 미술 대학과 같은 근대적인 교육 제도에 의해 대체되는 교육 체제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변혁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들에게 전통적인 미술 아카데미나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는 여간해서 주어지지 않았다. 때는 여성의 몸으로 그림을 그려 독립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던 시대였으며 당시 19세기 비엔나의 미술 아카데미는 철저한 가부장적 체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에밀 쉰들러의 날개 밑에서 인상주의풍  풍경화를 추구했던 젊은 여성 화가들이 여럿 활동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특히 티나 블라우 (Tina Blau)와 올가 비싱어-플로리안 (Olga Wisinger-Florian) 두 여성 화가는 오스트리아 미술사에서 저마다 독특한 풍경화 소재를 추구한 화가로서 만이 아니라 근대 여명기 유럽에서 개화된 신여성상을 일찌기 시사한 초기 여성해방주의자로 비춰지기도 한다.

특히 티나 블라우는 쉰들러 서클의 주도자이자 스승이었던 에밀 쉰들러의 애인이었으며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의 작품 『프라터의 봄』(1882년 작)이나 『암스텔담 수로』(1875/76년 작)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승이 주로 다뤘던 숲 경치나 도나우강 수경을 역시 즐겨 그렸다. 티나 블라우가 그녀 내면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여성해방주의적 신념은 사실 그녀의 그림을 통해서는 엿보기가 힘들다. 다만 연출된 블라우의 기록 사진을 통해서 그녀가 그림그리기 활동을 일종의 여성성(女性性) 혹은 모성(母性)과 연결시키는 제스쳐를 보였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림그리기에 필요한 이젤, 캔버스, 재료를 유모차에 싣고 프라터 공원으로 그림을 그리러 가는 블라우의 모습을 담은 연출 사진을 통해서‚ 여성적 상징물로서의 유모차’ – 유모차는 여성의 잉태와 종족 번식이라는 상징성을 내포 –를 이 화가의 창조적 도구가 담아 나르는 ‚창조의 자궁’이라는 메시지를 소리높여 외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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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비싱어-플로리안 『만발한 양귀비 꽃』 1895/1900년 작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올가 비싱어-플로리안은 본래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가 30대 중반부터  미술 사사를 받기 시작하면서 정물화와 풍경화의 매력에 빠져 화가로 전향한 여성 화가. 음악 수련에서 받은 규율적 태도 때문인지 „미술에서 일정한 경지에 이르는 첩경은 근면이다. 근면이 없는 재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라는 원리원칙을 모토로 삼고 그림그리기에 임했던 비싱어-플로리안은 자연의 미미하고 사소한 대상들을 눈여겨 보면서 화폭으로 옮겼다.

오스트리아의 미술평론가 클라우디아 아이그너가 ‚야채 심리학자’, ‚야채 관음주의자’ ‚사이코 식물학자’라는 가시달린 우스개 별명으로도 평가되고 있는 비싱어-플로리안이 집요하게 천착했던 대상들은 가을철 수확을 앞두고 있는 호박, 양배추, 홍당무 비트 같은 채소류, 봄여름철 만발한 꽃밭과 정원 풍경, 낙엽지는 가을 풍경들이 주를 이룬다. 『만발한 양귀비 꽃』(1895/1900년 작), 『멘토네의 덩굴 시렁』(1900년 경 작), 『수국꽃이 있는 정원 길』(1895년 작) 등은 그같은 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인상주의파 풍경화파 속의 여성 화가들 중에 가장 나이어린 화가 지망생 마리에 에그너 (Marie Egner)는 결혼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직업적인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경우인데 그녀의 작품은 대체로 스승 쉰들러의 회화풍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외광을 찾아 풍경화를 그렸던 마리에 에그너의 시력은 그녀가 세상을 뜨던 1940년 거의 실명 상태였다. 로베르트 루스는 약시 때문에 대수술을 받았고 야채 풍경화의 달인 올가 비징어-플로리안의 말년기 시력은 실명 상태에 가까웠다. 에밀 쉰들러도 심한 눈염증이 화근이 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이젤과 붓물감을 들고 아텔리에를 벗어나서 자연 속으로 들어가 비엔나 풍경을 인상주의풍으로 그려냈던 이 화가들에게 천연 태양광은 절대 필요 조건이었음이 분명하다. 헌데 그 천연 태양광으로 인해 화가들은  시력을 상실해야 하는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태양빛 가득할 비엔나의 올 봄과 여름, 미술 관객들은 그들의 눈을 통해 그려진 인상주의풍 풍경화를 맘놓고 감상할 수 있다. 이 전시는 7월 4일까지 계속된다.

근대 오스트리아 인상주의 회화전 | 전시 제목 : 비엔나 근대 인상주의풍 회화 (Stimmungsimpressionismus) | 전시 장소 :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립 벨베데레 미술관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Oberes Belvedere)  전시 기간 : 2004년 3월17일-7월4일까지

* 이 글은 본래 『오뜨』 2004년 5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