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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라 고통과 죽음의 꽃이여!

MUNCH BY HIMSELF AT MODERNA MUSEET STOCKHOLM

에드바르트 뭉크의 자화상을 통해 본 근대 여명기

올해 2013년, 20세기의 거장 에드바르트 뭉크를 낳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는 이 화가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특별전시와 문화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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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 화가의 모습을 담긴 <자화상> 1886년도 작. Nasjonalmuseet for Kunst/Najonalgalleriet, Oslo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뭉크 미술관에서 도난 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뭉크 그림 밖에 없습니다.
“이건 아주 비싼 밍크 코트예요. 절대 도난당하는 일 없이 잘 보관해 줘야 해요.” 한 돈많아 보이는 몸집 큰 노여인이 외투를 벗고 미술관 전시장을 입장해 달라는 미술관측 지시를 받고는 뭉크 미술관 입구 물품보관소 직원을 향해서 모피 코트를 건데며 불평을 토로했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뭉크 미술관의 한 고위 직원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쏘아 붙였다. “부인, 이 미술관에서 도난 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뭉크 그림 밖에는 없답니다.”

화가 뭉크에 대한 노르웨인 국민들의 크나큰 자부심이 느껴지는 이 짤막한 농담은 오슬로에 있는 뭉크 미술관에서 일한 적 있는 한 미술관 직원으로부터 들은 잊지 못할 일화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지날달 3월 6일 [2005년], 노르웨이 남부 지방에 있는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뭉크의 진품 그림 석점이 도난을 당해 홀연히 사라졌다가 하루만인 이틀만에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 온 사건이 벌여져서 전세계 미술애호인들을 놀라게 했다. 뭉크 그림 도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뭉크는 고가 미술품 도난 사건 목록에 가장 자주 오르내리는 단골 손님이다.

이미 1994년에는 전문 미술품 도둑 두명이 사다리를 타고 오슬로 국립 갤러리 창문을 통해서 침입해 『절규 (The Scream)』를 훔쳐 간 일이 있었고, 그보다  일찌기 1990년에도 같은 박물관에서 『마돈나 (Madonna)』가 도난당했다가 경찰의 추적 끝에 오슬로 국립 갤러리 품으로 되돌아오는 일이 발생했었다. 그리고 또다시 작년[2004년] 8월 말에는 평상복 차림의 도난꾼 둘이서 환한 대낮에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 느긋하게 걸어 들어가 뭉크 그림 2점을 버젓이 훔쳐 도망친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뭉크 미술관의 보안 수준은 뭉크 작품에 대한 미술관 측의 드높은 자부심과 애정이 무색할 정도로 크게 뒤떨져 있었음이 또다시 노출된 셈이 되었다.

작년 발생한 이 사건이 남긴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사실은 도난당한 두 작품이 뭉크의 가장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그 유명한 『절규』와 『마돈나』라는 것과, 범인들은 아직도 잡힐 낌새없이 범행의 실마리조차 묘연한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들의 가격은 이미 돈으로 살 수 없는 국보급이 된지 오래다. 현재 미술 시장의 시세로 추정하자면 『절규』는 9천만 달러 (유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9백억원) 그리고 『마돈나』는 1천8백만 달러 (약 1백8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뭉크 작품 도난 사건은 노르웨이의 국가적 체면이라는 면으로 보나 작품 시세 면으로 보나 막대한 손실을 안겨준 안타까운 사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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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속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Hell)』 1903년 작. Munch-museet, Oslo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비록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모양새가 되긴 했어도 미래의 또 다른 도난 사건을 방지하겠다는 차원에서 뭉크 미술관은 현재 미술관 건물 개축 공사에 한창이며 올 가을에 새로운 모습과 강화된 보안 체계로 무장한 후 뭉크 미술관을 재개관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유럽 최북단 대륙인 스칸디나비아 땅의 맨 왼쪽에 자리해 있는 북극광과 절묘한 피요르드 해안 경치를 자랑하는 나라 노르웨이가 가장 아끼는 국가대표급 문화재는 단연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Edvard Munch, 1863-1944년)이다.

뭉크는 노르웨이 특유의 감성과 기질을 표현한 가장 노르웨이적인 화가임과 동시에 서양 근대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가장 세계적인 예술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1963년에 처음 문을 연 이래 오늘날까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명물로 남아 있는 뭉크 미술관 (Munch Museet)은 1944년 화가가 사망하기 직전에 오슬로 시에 그가 수중에 보관하고 있는 작품들 일체를 기증한 것들을 모조리 소장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 뭉크 미술관이 건물 개축 공사를 하고 있는 기회를 이웃나라 스웨덴에서는 이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뭉크의 여러 대표작들과 특히 화가의 자화상들을 대거 대여해 와 이번 『뭉크 자신이 그린 뭉크 자화상 (Munch by Himself)』 展을 기획했다. 2월19일부터 오는 5월15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국립 근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에서 대형 전시로 올려지고 있는 이 전시는 뭉크의 자화상이라는 주제로는 최대 규모로 열리는 특별전이라는 점 때문에 미술관객들과 언론의 관심도 잔뜩 불러 모으고 있다.

절망, 고통 그리고 죽음 – 뭉크의 영원한  영감의 원천
화가 뭉크의 작품 세계를 총집결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작 『절규』 만을 보더라도 화가의 내면에 들끓고 있던 경련하는 내적 심리와 공포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으리라.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가 근대 예술 철학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예술 작품이란 모름지기 소리쳐 절규 (Das Geschrei)하지 못하면 더 이상 예술 작품으로서의 표현에 실패한 것고 다름없다”고 한 지적을 뭉크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작품이 삼아야 할 핵심 모티프로 삼았다. 뭉크의 『절규』(1893년)가 20세기 근대 시대에 사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감과 고통을 그림으로 분출시킨 가장 폭발적인 표현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것도 바로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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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1892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Thielska Galleriet, Stockholm.

서른살 무렵의 화가 뭉크는 친구 2명과 나란히서 저녁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저녁 일몰 시간, 오슬로 시내 하늘과 피요드르 해안 수평선은 갑자기 검푸른 색으로 변하고 바다물과 수평선은 온통 시뻘건 피와 혓바닥처럼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다리 위를 걷던  뭉크는 갑자기 피로와 구토감을 느끼면서 쓰러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다리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화가는 자신의 신체를 관통하는 불안감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고 동시에 자연 속에서 절규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1892년 뭉크의 자화상 『절망 (Despair)』과 이듬해인 1893년에 완성된 불후의 명작 『절규』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두 손으로 파랗게 질려 길게 늘어진 머리통을 붙잡고 괴성을 질러대는 그림 속의 주인공은 고뇌하는 근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뭉크 자신의 모습인데, 강렬한 색과 진동하는 듯한 곡선을 통해 표현된  절규의 음파는 서양 미술사에 기리남을 ‘청각의 시각화’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이미 알만한 미술 애호가들은 알고 있으시겠지만 『절규』라는 제목으로 화가가 그려 남긴 진품 회화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 지는 것들로는 현재 2점이 남아 있는데 한 점은 뭉크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가 작년 도난당한 것이며 나머지 한 점은 지금도 오슬로 국립 갤러리에 영구소장되어 있다.

“… 인생이란 폭랑이 불어치는 광활하고 광폭한 바다에 홀로 표류하는 한 척의 낡은 배…배가 난파하면 모조리 네 탓이며 그에 대한 죄로 지옥에서 영원히 불탈 지어다. …”

화가 뭉크에게 인생이란 나약한 신체와 영혼이 헤쳐가야할 무력하고 불안하며 외로운 여정이었다. 19세기 후반기 유럽의 대기를 온통 휩쓰고 있던 낭만주의 (Romanticism)나  감상주의 (sentimentalism)적 체취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화가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격동하는 유럽의 정황 속에서 어딘가 감상적이고 낭만적이며 내면적 환상을 외부로 강렬하게 표현할 것을 사명을 삼았던 이른바 표현주의 계열을 미술을 추구한 화가들로는 뭉크 뿐만 아니었다.

예컨대, 네덜란드 출신이면서 젊은 시절 성직자로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표현주의 미학의 계보를 일으킨 반 고흐 (Van Gogh)라든가, 기괴하고 으스스한 가면 이미지로 고전적 표현주의 회화 세계를 새롭게 개척한 벨기에 출신의 제임스 앙소르 (James Ensor),  그리고 니체의 ‘질풍노도 (Sturm und Drang)’로 대변되는 낭만주의와 허무주의 철학을 질병, 공포, 죽음이라는 주제로 승화시킨 스위스 출신의 페르디난트 호들러 (Ferdinand Hodler) 등은 저무는 구시대를 뒤로 하고 근대라는 신시대를 대비하며 불안에 떨던 세기전환기 근대인들의 집단적인 노이로제 상태를 표현한 동시대 화가들이다.

같은 시기, 미국의 대문호 에드가 앨런 포우 (Edgar Allen Poe)와 빈의 낭만주의 작곡가 바그너 (Richard Wagner)도 세기 전환기의 긴장을 유사한 감성으로 표현했고,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근대인들의 억압된 무의식과 성의 세계를 탐구하는데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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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가면 아래에 서있는 화가 자화상 (Self-portrait Beneath a Female Mask)』 1893년 경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80년이라는 짧지 않은 예술 인생을 불태운 화가의 일평생은 극적이라면 극적이라 할 수 있는 시련과 절망을 경험했는다고 한다. 그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친 이미저리와 상징들은 화가의 매우 개인적인 성장 경험과 내면적인 트라우마의 결정체들이다.

특히 뭉크는 자신을 그토록 평생 동안 고뇌로 몰아 넣었던 내적 갈등과 고통의 근원을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비극적인 가족사에서 발견했던듯 하다.

그는 “성직자와 바닷사람은 농담을 불허하는 심각한 사람들”이라고 꼬집었는데, 여기서 성직자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농부 출신의 모친을, 바닷사람이란 해군 군함의 의료장교 겸 지휘관으로 일했던 부친을 각각 지칭하는 것이다.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폐결핵으로 앓던 농가집 출신의 23세 하녀와  44세난 중산계층 출신의 중년 남성의 결혼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결합이었던 만큼 계급적 격차와 갈등이 끊이지 않는 긴장의 관계였다. 그나마도 뭉크의 부모는 기독교라는 정신적 영혼적 유대감으로 결혼 생활과 가족을 이끌어 나갔는데,  청교도적 윤리를 유독 강조했던 기독교식 집안 교육은 이후 화가 뭉크의 사생활 속의 정신적인 억압과 성적인 죄책감으로 이어져 그림으로 표현되곤 했다.

특히 여성을 향한 화가의 내면적 갈등은 그의 그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흔히 신비스럽고 광채가 나는 흰색 드레스 차림을 한 젊은 여인은 순결한 처녀, 붉은 색 드레스를 입고 있거나 붉은 안색을 한 여인은 정욕과 파멸을 부르는 성숙한 여인, 그리고 검정색 드레스와 창백한 안색을 한 초쵀한 여인은 인생과 남성관계 끝에 인생의 쓴맛과 비탄을 경험한 닳고닳은 여인으로 해석되곤 한다.

예컨대 그 유명한 뭉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사춘기 (Puberty)』(1894년)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나체의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 덧없이 사리지고 말 사춘기 소녀의 가녀리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소녀 옆 켠에 도사리고 있는 짙은 회오리 덩어리는 이 가련하고 청순한 소녀를 뇌살적이고 파괴적인 성숙한 여성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893년 작인 『여인 가면 아래에 서있는 화가 자화상』이라든가 1894년부터 무려 4년에 걸쳐 그려진 『살로메 장절』은 살로메=파멸의 여인이라고 말하려는 화가의 자신의 공포감을 표현한다. 이것은 당시 수많은 근대기 남성들을 공포로 몰아 놓었던 신여성 사상과 파멸을 부르는 여인 (팜므 파탈, femme fatale) 혹은 거세 공포증에 대한 불안감을 아동애 (pedophilia)적인 이미지를 빌어서 현실 속의 여성 관계로부터 도피해 보려던 남성 심리의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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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죽음 II > 1907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뭉크 그 자신도 실제로는 어린 처녀를 향한 동경과 애욕을 느꼈지만 동시에 성숙하고 요염한 여인으로 부터는 긴장과 공포를 느꼈고, 모친과 자매의 질병과 죽음으로 점철되었던 불행했던 성장과정을 한탄하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은 기피했으며, 그당시 다른 재능있는 미술가들과는 달리 생전 어지간한 명성과 부를 누렸으면서도 내적 고뇌와 병치레로 두문불출 거의 실내에 갇혀 지냈다.

비극의 인연으로 끝난 중년의 매혹녀 툴라 라르센 (Tulla Larsen)과의 결별을 표현한 그림 『마라의 죽음II (The Death of Marat II)』(19907년)에 보면, 화가는 이제 고통과 무기력을 초월하여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어쨋거나 결국 그는 그 모든 내적 갈등과 불안감을 화폭을 통해서 표현한 소심한 샛님 화가 선생이었던 게다.

16살난 청년 뭉크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해인 1880년. 당시 노르웨이는 어딘가 두서없어 보이지만 놀라운 천재적 잠재력을 잔뜩 품은 이 화가 지망생의 재능을 발굴하기에는 너무 좁고 지엽적이었다. 보다 큰 세상에서 미술을 배워보자는 생각에 청년 뭉크는 우선 독일로 건너가서 엄격한 독일식 아카데미 미술 교육을 접하지만 곧 표현적인 한계를 느끼고는 파리로 건너갔다. 이렇게 뭉크는 20대 중반부터 미술의 중심 도시 파리에서 보고 들은 새로운 사상에 ‘자연을 묘사하는 그림이란 화가의 내면이 표현되어야만 가치가 있다’고 한 화가 고유의 표현주의 철학이 버무려진 화풍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화가는 자기가 넓은 세상에서 배워온 미술 세계를 개인전을 통해서 노르웨이 화단에 꾸준히 소개하곤 했지만 모국의 화단은 선구적이고 무서울 정도로 솔직대담한 뭉크의 표현주의 미학을 이해해 주질 못했다고 한다. 특히 1890년대에 뭉크는 그같은 좌절감을 반영이라도 하듯 어린 시절 경험한 모친과 누나 그리고 부친의 오랜 병고와 죽음이 남긴 충격을 반복해서 그림으로 남겼다. 당시 유럽에서는 병자의 침실을 묘사한 그림들이 심심치 않게 그려질 정도로 병실 및 임종 광경 그림이 유행을 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 멜랑콜리와 신비의 전율을 강도높게 전달한 화가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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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 (Vampire)』 1895년 작 © Munch-Museet/Munch-Ellingsen gruppen/BUS 2013. Photo: Prallan Allsten /Moderna Museet.

1910년대, 뭉크는 특히 독일 화단과 화가 집단에서 깊이 선망되는 외국인 화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미술사에서 뭉크를 유럽 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가 당시 여러 독일 표현주의파들에 끼친 영향력 때문이다.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는 이미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높이 칭찬했으며, 또 그런가하면 뭉크는 역시 독일 표현주의자인 프란츠 마크 (Franz Marc)로부터 보다 강렬한 색채 감각을 배워왔다.

뭉크가 독일 화단에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때는 1892년 베를린 화가 연합의 주최로 열린 뭉크 개인전을 통해서 였는데, 이 전시는 일명  ‘스캔들 전시’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베를린 화랑계를 찬반의 논란으로 몰아 넣었다. 저자세 일관의 얌전한 품성의 뭉크의 주변에도 남몰래 도사리고 있던 숙적이 있었는지라 독일의 보수주의파 고전 화가로 부터 뭉크의 그림은 타락스런 프랑스적 취향으로 푹 젖은  ‘퇴폐미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 소동은 프랑스-독일간의 프로이센 전쟁을 끝으로 유난히 첨예해진 당시 프랑스와 독일 간의 관계를 엿볼 수 있던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전시를 둘러싼 ‘스캔들’은 뭉크에게 오히려 긍정적인 결과를 안겨주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논란과 화재를 몰고 다니는 전시회는 뭇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법인지, 뭉크는 이 전시를 끝으로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지만 불티나게 팔려나간 입장권 매출 덕분에 전에 어느새 돈주머니 두둑해진 ‘성공한’ 화가가 되어 있었다.

진정 베를린은 뭉크가 화가로서 성공하는데 분수령적인 순간을 마련해준 행운의 도시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뭉크가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정붙이며 살았던 독일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든 운명의 도시이기도 했다. 어느새 베를린에서 떨친 뭉크의 명성은 고국에까지 알려져서 19세기말 노르웨이 근대 극문학의 기수 입센 (Henrik Ibsen)의 상징주의 문학에 불을 치폈으며 그 결과 입센의 희곡대본 『유령들』과 『헤다 가블러』를 위한 연극 무대 장치 디자인까지 했던 것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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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1906년 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Munch-museet, Oslo.

특히 뭉크의 10여년 동안의 독일 체류기는 그로 하여금 초상화라는 회화 쟝르를 실험하는 기회를 제공해준 값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뭉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돈많은 독일 미술애호가들과 후원자들은 뭉크에게 개인 및 가족 초상화를 주문해 그려가곤 했는데, 특히 그들은 뭉크 만이 포착해 낼 수 있는 심리적 깊이와 통찰력이 그림으로 표현된 것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를린에서의 독신생활과 과중한 주문 작업에 밀려 지내던 뭉크는 점차 억누를 수 없는 정신불안증을 이겨내기 위해서 싸구려 와인과 독한 환각주인 압생트에 의존해 보지만 결국 심각한 정신분열증과 알코홀 중독으로 몸과 영혼이 피폐해진 나머지 코펜하겐의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에 이르렀다. 1906년도에 그려진 『와인병이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 Bottle of Wine)』 속 화가는 주변 환경 속에 눌리고 지쳐서 시린 고독과 무기력으로 시름하고 있다.

전유럽이 제1차대전이라는 격동과 비극의 시대를 항해하고 있을 1910년대, 뭉크는 입체주의나 미래주의 처럼 당시 파리에서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던 미술 신사조에 접하면서 피카소와 더불어 거장 화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와서 작업을 하고 있던 50대의 뭉크는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젊고 아름다운 여성 모델에 빗대어 그림으로 그리는 것으로써 또다른 제2의 자아를 탐구하고 있었다. 중년을 넘어선 화가는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천착해 오던 시대적 불안감, 고통, 불안감이라는 주제를 더이상 즐겨 다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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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 밤에 배회하는 자 (Self-Portrait. The Night Wanderer)』 1923년부터 제작 미완성작. © Munch-museet/ Munch-Ellingsen Gruppen/BUS 2005.

『마라의 죽음』 시리즈에는 젊은 여성 모델이 꽃다발 속에 숨겨둔 칼로 화가를 찔러 죽일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암시가 넌지시 담겨 있다. 특히 뭉크는 생애 말년 동안 그 어떤 다른 쟝르의 그림 보다 자화상을 즐겨 그리곤 했는데, 그의 자화상들에는 어김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든 남성과 가혹하고 음산한 기다림이 서려있음이 느껴지곤 한다.

『자화상 – 밤에 배회하는 자』 속에 나타난 주인공은 창문으로 대변되는 지독한 고독감과 불안감으로 잠 못이루는 나이든 남자의 모습으로 은밀하게 묘사했다. 화가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에 완성된 『시계와 침대가 있는 자화상』(1942년)에는 시계와 침대 사이에 서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을 임종 침대 옆에서 죽음의 순간을 대기하는 노인네로 묘사했다.

노르웨이는 지금도 이 나라를 뿌리채 사로잡고 있는 ‘뭉크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뭉크가 세상을 뜬 1944년 이후로 노르웨이는 뭉크에 필적할 만한 천재 미술가의 탄생은 다시 보지 못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가 미술사에 남긴 시각적 전율과 위력은 대단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의 가르침 그대로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예술인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존재와 죽음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불안과 실존적 문제를 탐구하는데 바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Images coutersy: 스웨덴 스톡홀름 모데나 무제에트 근현대 미술관 (Moderna Museet in Stockholm, Sweden).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2005년 3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21세기의 눈으로 다시 본 독일 표현주의

THE SOUND AND FORM OF SOUL – GERMAN EXPRESSIONISM REVIS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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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가 그린 『베를린 거리 풍경 (Berliner Strassenszene)』, 캔버스에 유채, 47 7/8 x 35 7/8 in. (121.6 x 91.1 cm.) 1913-1914년경 작. 2006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로널드 로더에게 38,096,000 달러에 낙찰되었다.

감성과 영혼의 미술 표현주의 회화 (Deutsche Expressionismus)를 향한 새로운 주목  독일을 위시로 한 나치주의 정권의 반인륜적 행위와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라는 오명 때문에 특히 20세기 근대기 독일 미술은 여간해서 미술사학자들이나 컬렉터들이 기피해 온 분야로 남아 있었다. 특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 제1차 세계 대전 전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 유럽에서 불거져 나온 표현주의 미술은 거칠고 표현이 단도직입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오랜 세월 동안 주류 화단에서는 한낱 주변적인 미술 운동 정도로 여겨져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에는 독일의 표현주의 선구적인 화가로 꼽히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의 작품 한 점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며, 천재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인 에곤 실레 (Egon Schiele)의 미술 세계는 각각 1960년대와 1980년대에 와서야 비로서 영국과 미국의 미술관에서 처음 소개되었을 정도로 심한 외면을 받았다.

최근 구미권 유명 미술 경매장 매출 보고와 미술 박람회에서 들려 오는 미술 시장 소식에 따르면 세계적 미술관들과 미술 컬렉터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회화에 대하여 전에 없이 새로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을 향한 관심이 커졌다.

바로 지난 11월 8일 뉴욕에서 열린 인상주의 및 모더니즘 미술품 경매에서 키르히너가 그린 『베를린 거리 풍경 (Berliner Strassenszene)』 11점 연작 중 한 작품은 본래 1천8백-2천5백만 달러의 가격으로 낙찰될 것이라는 전망을 뒤엎고 그의 두 배에 가까운 가격인 3천8백만 달러  즉,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3백6십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되어 화장품 업계의 거물 인사 겸 유명 미술 컬렉터인 로널드 로더가 소유한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에로 넘겨졌다. 그런가 하면 미술 시장에서 계속되고 있는 실레의 인기는 경매장에서도 이어져서 그의 『단독 주택들 (Single Houses)』은 2천2백4십만 달러(2십1억2천 여만원)에 낙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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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의  『올덴부르크의 가을 풍경 (Herbstlandschaft in Oldenburg)』 1907년 작 © Museo Thyssen-Bornemisza 슈미트-로틀루프는 베를린에 다리파 미술관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 및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에 대한 구미권 미술계의 집중 현상은 최근 연거푸 국제 법정의 주요 기사거리로 오르내리는 나치 약탈 미술품에 대한 반환 소송건 소식이 큰 자극제 역할을 하는게 사실이다. 특히 미술사에는 기록이 되어 있으나 시장성 면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일부 20세기 화가들의 작품의 경우 국제 법정에서의 반환 소송건은 작품가격을 몇 배로 높일 수 있게 해 주는 최적의 홍보 역할을 한다.

예컨대 올 11월 뉴욕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키르히너의 『베를린 거리 풍경』은 최근 나치로부터 압수되었다가 반환된 유태인 소유의 미술 작품에 대한 법정 소송 사건으로 더더욱 유명해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이 작품은 이번 뉴욕 경매에서 8천7백9십만 달러 (우리돈 8백3십2억 여원)에 낙찰되었다.]과 더불어서 나치군에 의해 강제 압수되었던 것을 되찾은 한 유태인 후손이 경매에 내놓은 작품이어서 더 화재가 되었다.

이미 독일 표현주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나 개인들에게는 분명 좋은 소식이다. 그같은 추세에 덩달아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품에 대한 인기는 당분간 더 상승세를 구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술계의 그 같은 대세를 반영하듯 지난 [2006년] 9월28일부터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독일의 표현주의자들 (Deutsche Expressioninsten)』이라는 전시로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전시를 기획 전시중인 레오폴트 미술관 (Leopold Museum)은 뉴욕 노이에 갤러리와 더불어서 에곤 실레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서, 이번 전시를 통해서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티센-보르네미자 미술관 (Thyssen-Bornemisza Collection)이 대거 소장하고 있는 독일의 표현주의 회화 작품들과 나란히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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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헤켈 (Erich Heckel)의 『단가스트의 집 (Haus in Dangast)』 1908년 작 © Carmen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on loan at the Museo Thyssen-Bornemisza.

프랑스에 인상주의가 있다면 독일에는 표현주의가 있다. 때는 근대기 서양 미술이 새로운 창조적 폭발을 거듭하고 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근대적 신사고와 지성적 합리주의를 여러 미술 운동의 철학적인 기초로 삼았던 파리에서와는 반대로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의 화가들은 감정과 영혼에 호소하는 표현적인 미술이 전격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때는 에곤 실레가 뒤틀린 사지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듯한 인물 초상화와 누드화를 그려서 포르노 화가로 몰려 감옥 신세를 졌던 때이며, 저멀리 북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웨이에서는 에드바르크 뭉크 (Edvard Munch)라는 청년이 급변하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인들의 불안과 공포를 『절규』라는 충격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던 때이기도 했다.

흔히 서양 미술사에서는 세잔느의 정물화가 입체주의의 시초라고 보듯, 19세기 말엽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소용돌이치듯 강렬하고 격렬한 필치의 그림을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적인 양식이라고 추적한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는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거칠음을 뜻한 야수파 (Les fauves)라는 사조를 이끌며 강렬한 색채과 대담한 필치를 구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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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나무로 깎은 의자 앞의 프랜치의 초상 (Fränzi vor einem geschnitzten sessel』 1910년 작 ©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 VBK Wien 2006  다리파 초기 드레즈덴에서 활동중이던 키르히너의 작품 속의 여성상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성적 긴장감을 발산한다. 독일 표현주의의 잉태는 그 모든 외부적인 영향 보다는 독일 미술가들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자생적인 예술혼과 표현욕구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표현주의의 잉태는 그 모든 외부적인 영향 보다는 독일 미술가들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자생적인 예술혼과 표현욕구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다. 독일을 포함한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이미 중세 시대부터 급격한 사회 변혁의 시대마다 인간이 겪는 내면적 공포와 영혼적 위기감을 합리적인 이성주의로 소화하기 보다는 왜곡과 과장의 미학을 빌어 격정적이고 폭발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발휘해 왔다.

독일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표현주의 미술 운동은 20세기가 열리자 마자 표면화되었지만 그 잠재력은 이미 19세기 독일을 사로잡았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피트 프리트리히 (Caspar David Friedrich)가 특유의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풍경화에서 비극과 고독의 멜랑콜리를 잠잠하게 표현했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은 일찍이 19세기 독일을 뒤흔들었던 신 칸트주의 철학에서 이론적인 바탕을 삼았다.

특히 19세기 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쓴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는 개인의 내면 세계와 의지가 외부로 향한 표현의 창 (window)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는데, 그의 철학은 의지를 발휘하면 인간의 내면과 직관은 외부 세계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은 당시 젊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두 팔 벌려 환영받았다.

드레스덴의 다리파 – 비문명 상태로의 회귀 독일땅 동쪽 끝의 역사 도시 드레즈덴 (Dresden)에서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가 주도하여  1905년 다리파 (Die Brücke)가 결성되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나타난 아프리카 원시 미술, 북유럽의 뭉크의 절박함, 오스트리아의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의 실존적 고통이 표현된 그림을 본 후 독일만의 자체적인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이 필요함을 느낀 키르히너는 ‘문명 (civilization)’이라는 거름장치를 거치지 않은 인간 내면의 천연순수의 창조력을 외부로 표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다리파는 삐죽삐죽하고 각진 형태, 튜브에서 갓 짜낸 배색되지 않은 강한 물감 원색, 여과되지 않은 화가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그림들을 그렸다. 다리파 화가들은 그 때까지 주로 광고 인쇄물에나 사용되며 중세 시대 이후로 사실상 잊혀졌던 목판화를 부활시켰는데, 목판화가 자아내는 조악함은 거칠고 노골적인 감정 표현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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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놀데 (Emil Nolde)의 『여름 구름 (Sommerwolken)』 1913년 작 © Museo Thyssen-Bornemisza, Madrid. 덴마크 태생 독일 화가 에밀 놀데는 다리파와 잠시 인연을 맺으며 드레즈덴에서 그림을 그렸다.

다리파 동인들은 문명을 떠나 자연의 단순성과 원시성을 되찾자는 취지에서 모리츠부르크 호수가에서 난잡한 생활에 탐닉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있어 다시금 도시로 눈을 돌려 미술적 영감을 찾았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듯이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들 역시 신작대로가 뚫리고 나날이 인구가 늘어나며 상업과 활동이 번화해지던 근대 유럽의 도시화 현상에서 영감적인 매료를 느꼈던 때문이다.

급변하던 도시상을 그림으로 포착하기 위해 다리파 동인들은 1911년 독일 수도 베를린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급변하는 도시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베를린 거리 풍경, 버라이어티 극장가, 아텔리에 실내 풍경화 속에 표현된 남녀 간의 동물적이고 성적 기장, 언제 분출할지 알 수 없는 억눌린 감정은 키르히너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뮌헨의 청기사파 – 음악과 그림의 만남 한편 독일의 남쪽 도시 뮌헨에서는 곧 터질 제1차 세계 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없이 한결 조화롭고 시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는 젊은 화가들이 1911년에 청기사파 (Der Blaue Reiter)의 결성을 선언했다. 음악을 미술과 결합시켰다 하여 일명 ‘음악적 표현주의 (Musical Expressionism)’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청기사파 회화는 다리파 보다 감정을 절제하고 외부로의 거침없는 감정적 발산 보다는 내면적 조화와 균형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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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라트 펠릭스뮐러 (Konrad Felixmueller)의 『물랭 루쥬 앞의 밤거리 풍경 (Nacht vor dem Moulin Rouge)』 1925년 작. Lindenau Museum, Altenburg © VBK, Wien 2006.

청기사파의 결성 멤버였던 바실리 칸딘스키(Wasily Kandinsky)는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매우 심취했던 화가였는데, 그래서 칸딘스키가 빈 출신의 근대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 (Arnold Schönberg)와 남다른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다른 청기사파의 대표적인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는 가시적인 외부 세계에 대한 깊은 불신감을 청산하기 위하여 자연 속의 동물들의 영혼과 교감하면서 인간적 영혼에 대한 자기 성찰을 시도했다. 동물과의 교감 시도라니 심원난해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마르크의 ‘자연을 통한 자기 성찰 (Durchgeistigung)’은 이미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미술에서도 시도된 바 있는 어찌보면 매우 독일적인 전통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독일 표현주의와 그 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과 종전까지 독일 표현주의는 독일 내에서는 여전히 가장 주도적인 미술 사조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고된 전쟁과 패전 후의  독일인들의 경제적 사정과 일상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고, 그에 따라서 표현주의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전에 없는 냉소주의와 사회적 비판정신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전후 독일 사회 속에 팽배한 냉소주의, 고립과 소외, 환멸감은 보다 사실주의적인 그림으로 표현되었는데, 예컨대 게오르크 그로스 (Georg Grosz)와 오토 딕스 (Otto Dix) 등은 사실주의적 기법과 날카로운 사회비평적 시각이 담긴 이른바 ‘신즉물주의파 (Neue Sachlichkeit)’를 주도한 대표적인 화가들로 꼽힌다.

Georg Grosz_Strassenszene_Kurfuerstendamm_c Museo Thyssen Bornemisza Madrid_sm

« 게오르크 그로스 (Georg Grosz)의 『쿠르퓌르스텐담 구역의 거리 풍경 (Strassenszene Kurfuerstendamm)』 © Museo Thyssen-Bornemisza, Madrid. 쿠르퓌르스텐담 (Kurfuerstendamm)은 독일 베를린의 부유한 고급 상가 구역. 화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로상을 오가는 사회 각층의 군상을 통해서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꼬집고 있다.

신즉물주의파의 그림은 다리파와 청기사파의 것에 비해 눈에 뛰게 사실주의적인 묘사 기법을 택하고 있지만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충격적 감흥과 위력 면에서 여전히 독일 표현주의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 같은 시각적 효과는 양차 대전 사이기 기괴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독일 표현주의 영화 운동으로 이어져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년)이라는 공포 영화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패전으로 끝낸 독일 사회에서 표현주의 미술은 1920년대를 고비로 하강 국면을 면치 못했다. 화가 개인의 감성을 앞세워 사회적인 주제를 외면하는 표현주의 미술은 자기도취적이고 목표가 불분명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주 원인이었다.

결정적으로 표현주의가 공식적인 종말을 맞은 때는 1933년. 나치주의 정권이 독일 표현주의 미술을 퇴폐 미술이라고 낙인한 이래 표현주의 화가들이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 흩어지게 되면서 독일 표현주의는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물론 구미 여러 나라들조차 기피하는 미술 사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이번 전시회는 다시금 독일 표현주의를 새로운 역사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독일 표현주의자들』 전은 내년 [2007년] 1월 10일까지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계속된다.

* 이 글은 본래 『오뜨』 지 2006년 1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회화의 대창고

LEOPOLD MUSEUM – LEOPOLD COLLECTION

레오폴트 컬렉션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트 재단 미술관

무지움스쿼르티에서 재개관 무지움스쿼르티에(MQ) 레오폴트 미술관 (Leopold Museum-Privatstiftung)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이행되던 시기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야릇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탄생하여 근대 지성계를 뒤흔들기 시작하는가 하면, 아놀드 쇤베르크의 근대 음악 이론, 아돌프 로오스 (Adolf Loos)와 오토 바그너 (Otto Wagner)의 유겐트스틸 (Jugendstil)의 근대 건축 양식이 등장하고 문학과 비판적 언론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세기말 빈 (Fin-de-Siècle)”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이 때는 지적 창조적 에너지가 곳곳에서 분출하던 빈 모더니즘 (Wiener moderne) 시대는 세기말 특유의 종말적 비관주의와 새시대에 대한 이상주의가 공존하던 시대였다. 19세기 산업혁명과 낭만주의로 향한 회귀적 욕망이 잔존하는 가운데 20세기 근대주의가 표방하는 개인주의가 충돌하던 이 시기, 오스트리아 빈의 근대 미술은 스캔들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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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미술관 내 실러 전시장 광경.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19세기 후반기까지 줄곧 화려하고 장대한 바로크 회화 양식이 보편화되어 있던 빈에 장식적인 고전주의를 배격한 새로운 회화 양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스 마카르트를 위시로 하여 빈 분리파 운동 (Wiener Secession)을 이끈 구스타브 클림트,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에곤 쉴레와 오스카 코코시카 등이 외부 시대의 혼돈과 내면적인 감성과 갈등세계를 표현한 그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이는 같은 시기 파리에서 일던 상징주의, 독일과 북구 유럽의 표현주의 운동과도 맥을 함께하는 당대의 보편적인 사조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표현주의가 세계적인 미술사조로 정식 인정을 받기 시작한 때는 20세기 후반에 접어 든 이후, 한 개인 미술 수집가의 공헌이 크게 기여했다.

루돌프 레오폴트라는 한 개인 컬렉터가 50년대 중엽부터 오스트리아 근대 표현주의 회화 분야에 걸쳐 수집해 온 작품수는 오늘날 5,266점에 이르며,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의 컬렉션이 지니는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1994년 개인재단 설립은 지원해 주어 오늘날 레오폴트 재단 미술관으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오스트리아인들의 수집욕은 전통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옛 합스부르크 왕국 시절, 황실은 영토 수집과 박물관 진귀품 수집에 열을 올렸었고 개인들은 크게는 이름 앞에 붙는 신분 타이틀을 작게는 실내를 장식하는 악세서리와 우표수집에 집착했을 정도였다. 안과의사에서 국립 미술관 관장으로 변신한 루돌프 레오폴트 (Rudolf Leopold, 1925 * -2010 ✝) 박사는 그 가운데에서도 전설적인 실례로 꼽힌다.

부모님에게서 받은 고등학교 졸업 자격 시험 응시료를 평소 눈여겨 두었던 에곤 쉴레의 그림을 사는데 몽땅 써버린 것이 개인 미술 컬렉터로서의 생을 택한 첫출발이었다고 레오폴트 관장은 회고한다. 이후 의과 대학 2년차 되던해인 1947년 도로테움 미술품 경매장과 빈 미술사 박물관을 처음 방문하게 되면서 회화에 대한 애정과 전문가적 안목을 키우기 시작했다. 공부를 마친 해인 1953년부터 레오폴트 관장은 틈틈히 빈 대학 미술사학과 강의를 청강하고 전세계 미술관을 기행하면서 감식안을 키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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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컬렉터 루돌프 레오폴트 내외.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레오폴트 미술관을 구성하고 있는 간판 소장목록은 두말할 것 없이 에곤 쉴레 컬렉션이다. 20대초 청년기부터 쉴레에 대한 혼신의 연구와 작품 수집을 해 온 레오폴트 관장은 그래서 쉴레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임을 자처하며 쉴레 연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우선 레오폴트 미술관을 거쳐가야 한다는 미술계 내 암묵적 원칙을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1950년대까지만해도 터무니없이 평가절하되어 온 쉴레가 세계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한 때는 60년대 이후부터. 19세기초 빈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화랑이던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를 운영하다가 제2차대전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오토 칼리르 니렌스타인 (Otto Kallir-Nirenstein)이 일찌기 미국 대도시 여러곳에서 클림트와 쉴레를 비롯한 빈 표현주의 회화를 소개했으나 미술계의 반향을 얻지 못한채 였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가 쉴레의 주요 작품들을 이미 다수 소장하고 있었으나 50년대 중반까지 대중 관람을 할 수 없었던 것도 빈 표현주의의 대중화에 걸림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미롭고 탐미주의적인 클림트의 여성 이미지에 반해 거칠고 우울한 에곤 쉴레의 작품은 국내외 미술사가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가혹한 평가를 면치 못했다. 적나라한 포즈와 신체묘사에 관객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주제 (예를 들어 『신부와 수녀 (Kardinal und Nonne)>』는 남녀 성직자의 성적 욕망과 갈등을 표현한 작품)를 묘사한 그의 작품은 외설 퇴폐라는 혹평을 받고 있었으나 레오폴트 관장은 바로 그 점에서 쉴레 회화의 예술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빈을 비롯한 해외 미술경매장을 다니며 쉴레의 작품을 구입할 때마다 주변인들의 조롱과 비웃음도 감수해야 했다. 그 덕분에 쉴레의 작품이 평가절하되던 1950년대초 쉴레의 『은둔자들 (Die Eremiten)』(1912년 작)은 오스트리아화 3만실링 (현재 우리돈 약 300만원 가량)이라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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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레의 『은둔자들 (Die Eremiten)』1912년 작품.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요한 슈트라우스가 어린시절 떠오르는 악상을 침대보에 적어 작곡을 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에곤 쉴레 (Egon Schiele, 1890-1918)도 어린나이에 식탁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신동 화가로 알려져 있다.

툴루즈 로트렉이 매춘부를 소재로 그린 그림들을 보고 하층계급 여성들을 모델로 삼아 그리기 시작한 그는 한때 미소녀 스케치를 한 혐의로 감방 생활을 하는 고충까지 감수하며 성으로 갈등하는 그의 내면세계를 줄기차게 표현했다.

그의 수집 열정은 곧 클림트로 이어져 현재 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작품 『죽음과 삶 (Tod und Leben)』(1911/1915년)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하지만 빈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져 있는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 1883-1908)의 작품은 그가 쉴레 전문 컬렉터로소의 악명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그의 소장목록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순수 빈 출신으로 에드바르트 뭉크와 반 고흐를 결합한 오스트리아식 “야수주의”를 추구했던 게르스틀은 아놀드 숀버그와 절친한 친구사이였고 쇤베르크의 아내와의 불륜의 사랑으로 갈등하다 때이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였다. 게르스틀은 평생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한 작품도 팔지 못하는 불운에 시달렸던 반면 쉴레는 1914년부터 약 5-6년간 활발히 작품 매매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빈에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프로이드의 성심리학의 유행과 전통적 성윤리의식의 붕괴에 어느정도 덕을 본 때문이라고도 해석되고 있다.

현재 가치있는 게르스틀의 작품 26점 가운데 15점이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이 미술관이 또 자랑하는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는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 비해 부와 인기를 누리다 간 반근대적 화가여서 세기전환기 근대적 사고에 반발하는 오스트리아의 부패한 부르조아적 구세력을 대변한 화가여서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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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의 『상반신을 벗은 자화상 (Selbstbildnis als Halbakt)』 1904/05년 © Leopold Museum, Wien. Photo courtesy: Leopold Museum – Sammlung Leopold, Wien.

특히 코코슈카는 당시 유태인 지성인과 문학인들의 사교모임을 이끌던 여류 언론인이자 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아내 알마 말러-베르펠 (Alma Mahler-Werfel)의 문화서클에서 맴돌며 오스트리아 예술인 특유의 퇴폐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그래서인지 이 보헤미언 화가의 작품들은 오스트리아의 바로크적 허장성쇠 뒤에 숨은 공허감과 허무주의로 가득하다.

해가 거듭해 가면서 레오폴트 소장품의 범위는 나날이 넓어져서 화가 오제프 도브로브스키 (Josef Dobrowsky), 알프레트 쿠빈 (Alfred Kubin), 헤르베르트 쿠빈 (Herbert Boeckl), 안톤 파이스타우어 (Anton Faistauer),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안톤 콜릭 (Anton Kolig), 빌리암 퇴니 (William Toeny)를 포함하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컬렉션을 형성해 나갔다.

그는 또 빈 모더니즘기의 회화 분야 말고도 오브제로도 관심의 폭을 넓혀 오토 바그너 (Otto Wagner)와 콜로몬 모저 (Kolomon Moser)의 유겐스틸 가구와 빈 베르크슈테테 공예품, 골동 카페트, 아프리카와 동양 조각품도 소장하고 있어 현재 레오폴트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고 있다.

레오폴트 관장이 개인적인 쉴레 애호가 겸 컬렉터로 출발하여 국립 미술관 과장이 되기까지의 여정은 그다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외설 퇴폐 화가의 작품들을 사 모으는 과정에서 미술계로 부터 받은 수모는 차치하고라도, 미술의 문외한이면서 개인적인 노력으로 감식가의 안목을 키우고 연구 및 저술 활동을 계속해 오면서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회화의 권위자로 변신하기까지 그는 그래서 집요한 자기광적인 퍼스낼리티로 악명적인 명성(?)을 굳혀 온 것으로 유명하다. 결국 개인의 문화적 열정과 노력이 국가와 미술사적 유산을 지키고 알리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기꺼이 영광스럽게 감수할 수 있는 악명이 아닐까. All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 이 글은 본래 세종문화회관 월간회원지 『공간사랑』 지 2001년 10월호에 실렸던 것임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