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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 없이 물고기 낚기”

TO CATCH FISH WITHOUT A NET

디자인 베끼기는 수치- 베를린 표절 박물관 개관에 즈음하여

오랜 플랑드르 지방 속담에 “그물 없이 물고기 낚기”라는 표현이 있다. 누가 애써 한 일을 남이 득을 본다는 뜻이다. 직업적 어부는 일반인들이 모르는 물고기 낚는 법과 수완이 있다. 아침 눈을 떠 하늘만 보고도 날씨를 예측할 줄 알고, 어느 시간에 배를 띄어 언제 육지로 돌아와야 할 줄도 알며, 물쌀과 바람으로 배를 어디로 몰지 물고기가 어디로 모일지도 알며, 언제 그물을 드리우고 언제 낚시줄을 드리워야 하는지도 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을 하나도 모를 뿐만 아니라 물고기 잡아본 적도 없는 이들이 어선을 몰고 부두에 나타나 ‘풍어’를 외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는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창조 분야와 학계에서 말하는 표절(Plagiarism)이란 다른 사람이 한 독창적인 결과물을 원창작자의 이름이나 출처를 밝히지 않은채 마치 자기한 한 작업인척 제시하는 행동을 일컫는다. 창조적 결과물의 경우 어떤 개인이나 단체가 작업해 만들어진 출판된 혹은 출판되지 않은 문헌, 해석문, 컴퓨터 소프트웨어, 디자인, 음악, 사운드, 이미지, 사진, 아이디어 또는 아이디어 프레임워크가 다 포함된다. 이 결과물은 종이인쇄된 형태일수도 있고 인터넷상 전자 미디어 형식일 수도 있다. [출처: 호주 멜버른 대학 학문 윤리강령]

필자가 잠시나마 디자인 전문지 기자로 일하던 중 „학생들이 프로젝트로 제출하는 디자인 작품들이 다른데서 훔쳐 온게 아닌가를 우선 확인한 다음 채점에 들어간다“고 한국의 디자인 학교에서 대학원 강의를 한 적이 있는 한 외국인 디자이너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신선한 아이디어가 돋보여 좋은 점수를 줬던 한 학생의 디자인 컨셉이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해외 디자이너의 작품을 배낀 것이었음을 한참 후 우연히 알게 된 경우도 있다“고 그 디자이너는 덧붙였다. 남의 작품이나 글을 배낀 숙제나 작품을 수업에 제출하는 것은 „표절“(plagiarism) 행위이고 이는 학사 제도상 심대한 처벌감이다. 그리고 디자인 표절은 학교에서만이 아니라 디자인 업계에서도 혹대한 처벌 대상이다.

디자인은 예술적 독창력을 전제로 한 창조작업이다. 특히 서구문화에서 개인의 창의력, 유일무이의 독창성(uniqueness), 기발한 컨셉은 신성한 가치이다. 그래서 19-20세기 모더니즘부터 오늘날까지 서양 예술가들은 „남들이 아직 하지 않은 뭔가 새롭고 충격적인 것“을 실험하는 컨셉와 혁신적인 형식을 짜아내느라 고심해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서구인들 사이에서는 독창성(originality)이 한없이 존경받는 숭고한 가치인 만큼, 모방과 베끼기는 온 인류의 조롱과 비난을 사도 모자른 죄악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은 시각 예술이고 그래서 수많은 디자이너들(특히 디자인 산업에 대한 냉소주의에 덜 노출된 젊은 디자이너 일수록)은 스스로를 창조 활동에 종사하는  예술가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디자인은 단순한 예술 활동 만일 수는 없다. 디자인이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생산한 후 시장에 내달 팔아 이윤을 남겨야 하는 비즈니스적 실리없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일테다. 19세기 산업혁명 이래 대량생산소비 체제가 경제 원리로 자리잡고 있는 오늘날까지, 디자인와 비즈니스는 특히 산업 디자인 분야에서는 실과 바늘의 관계가 아니던가.

제품 디자인은 외형적 아름다움과 기능적 혁신성을 갖춘 아이디어 상품이어야 하며 그런 양질의 상품은 시장에서 정당한 가격으로 소비자들이 구매할 수 있는 교환가치라는 개념이 널리 자리잡은 서구 선진국들의 경우 표절 제품들이 끼치는 정신적 재정적 피해는 적지 않다고 부쎄 관장은 역설한다. 특히 독일의 경우, 다른 회사가 투자하고 개발한 혁신적인 디자인을 훔치고 배끼는 행위로 인해 피해 업체들이 당하는 경제적 손해는 년간 200-300억 유로,  실업자 수 20만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 이해관계로 인해 최근 선진국들의 법조계는 디자인을 포함한 표절이나 해적행위에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기도 하다.

피터 브뢰겔 아버지 『네덜란드 속담 알레고리』1559년, Gemäldegalerie, Berlin.

오랜 네덜란드 속담에 “그물 없이 물고기 낚기”라는 표현이 있다. 누가 애써 한 일을 남이 득 본다는 뜻이다. 원제『부조리한 세상(The Folly of the World)』로 이름된 피터 브뢰겔 아버지의 유채 그림 『네덜란드 속담 알레고리』중에서. [세부] 1559년, Gemäldegalerie, Berlin.

지난 11월 6일, 독일 베를린에서는 표절 박물관이란 뜻의 플라기아리우스 뮤지움(Museum Plagiarius)이라는 이색적인 박물관이 새로 개관했다. 이 박물관은 다른 디자인 제품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노골적으로 모방해 판매한 „표절 제품“을 전세계에서 모아 소장하고 전시하여 제품 모방 기업들을 규탄하고 법적인 처벌을 가해 업계에서 몰아내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특히 매 년 한차례씩 전세계 피해 제품 업체들과 기업들이 등록해 온 피해 사례들과 미술관측이 직접 발굴한 모방 사례들을 두루 모아 최악(?)의 표절 디자인 제품들을 선정하는  „수치상“ 공모전을 열어 업계와 대중들의 경각심을 높이는데 힘쓰고 있다. 총 400평방 미터 면적의 전시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이 박물관에는 1977년부터 현재까지 전세계에서 수집한 오리지널작과 표절작을 모아 나란히 전시하고 있으며, 학술 세미나 행사와 일반 대중들을 위한 워크숍 공간, 강의실, 그리고 학생, 전문가, 업체를 위한 도서자료실도 갖추고 있다.

리도 부쎄(Rido Busse) 관장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얻은 충격에서 표절 박물관 건립과 표절 „수치상“을 창안했다고 한다. 1977년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봄철 디자인 박람회에 참가했다가 그가 알고 있는 제품의 모양새를 그대로 배껴 생산한 저울을 버젓이 전시하고 있는 한 홍콩 업체를 발견했다.  그 Nr.8600 모델 저울은 부쎄 관장이 이미 1965년에 죈레 저울사라는 업체와의 계약으로 생산하여 개 당 26독일 마르크에 판매되었던 제품이었으나, 이 홍콩 업체는 디자인 개발비 한 푼 안들이고 값싼 소재로 대체해 모양만 따 만든 표절제 저울 6개를 24마르크라는 파격적인 판매가격으로 주문받고 있었다.

사정인즉 이렇다. 박람회 기간 중 죈레 저울의 전시 부스가 주문받기에 정신없는 사이 한 홍콩 업자가 저울을 훔쳐 돌아가 재빨리 이 저울의 표절품 10만점을 생산해 판매하고는 도산했다. 그리고 2개월 후 도산한 업체를 이어받은 또 다른 홍콩 무역업체는 다시 똑같은 표절 저울을 만들어 독일 시장에 팔고 있었다.

부쎄씨는 하이스너(Heissner)라는 정원 장식용 난장이 인형(Nr.917) 생산업체를 인수하게 되면서 이를 기념하여 난장이 모형의 트로피를 직접 만들어 „표절왕“에게 주는 수치의 심볼로 선사하기로 했다. 정원 장식용 난장이 인형은 온몸에 검정색 래커로 칠한 후 코만을 금칠(거짓말을 일삼던 피노키오에 대한 은유)을 입혀 트로피의 불명예성을 표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상의 첫 수치는 물론 표절 저울을 만들어 판 홍콩의 리 무역회사에게 돌아갔다. 이후 이 행사는 오늘날까지 권위있는 디자인 박람회가 열리는 하노버와 프랑크푸르트 암비엔테에서 계속되어  매년 독일 언론의 관심을 끌어오고 있으며 독일 디자인 협회(DDV, 1980년 창립)의 후원도 받고 있다.

그리고 올해 부쎄 관장의 표절 박물관 개관은 1977년부터 20여년 동안 디자인 표절에 홀홀히 대항한 일인(一人) 투쟁(베를린 시의 지원으로 혼자 활동했음)의 결과였다. 그 결과 1989-90년에는 제품 디자인 및 마케팅 해적행위에 대한 법적 제도적 대항활동도 시작해 현재도 운영되어 오고 있다.

서양 미술사에서 홀로 고독하게 작업하는 독창적 개인으로서의 미술가 개념은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 렘브렌트에 와서야 시작되었다고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평론집 『미술과 문화(Art and Culture)』(제1장 „아방가르드와 키치“ 참고)에서 언급했었다. 르네상스 시대까지도 서양에서는 동양의 미술 전통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보고 모작을 하는 것으로써 정신적∙기술적 숙련을 쌓았고 기련적 숙련을 마스터한 후에 비로소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해 나가지 않았던가.

그러나 개인의 독창성이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20세기 근대 이후,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 창조적 아이디어는 명성이고 곧 돈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대다수 국가에서는 외제품의 모양새를 따 만들어 박리다매하는 업체들 때문에 여전히 창조적인 디자이너와 아이디어가 정당하게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박람회마다 유난히 아시아계 업체들의 제품들을 눈여겨 본다고 하는 부쎄 씨의 언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부쎄는 새 소재와 살짝 변형된 홍콩제 저울이 이전 보다 나은 제품이 되었는가에 대한 제품 품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럴 경우, 새 홍콩 업체가 보다 싼 소재로 잘 작동하는 저울을 생산판매했다면 이는 ‘혁신’이지 단순한 ‘표절’은 아니다.]

피터 브뢰겔 아버지 (Pieter Brueghel the Elder, 1526/1530–1569) 『원숭이 두 마리 (Two Monkeys)』 1562년, 목판에 유채.

피터 브뢰겔 아버지 (Pieter Brueghel the Elder, 1526/1530–1569) 『사슬에 묶인 원숭이 두 마리 (Two Monkeys)』 1562년, 목판에 유채. Staatliche Museen zu Berlin, Gemäldegalerie, Berlin, Germany. 바로크 시대 플랑드르 그림 속에서 원숭이는 쉽게 유혹당하기 쉬운 세속적 욕심으로 옥죈 딱한 인간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으로 즐겨 그려진 교훈적 주제였다.

제품 표절 업체들 가운데 아시아 업체들(특히 홍콩과 중국)의 수가 유난히 압도적인 것은 제품 디자인의 독창성의 소유 개념 부재와 단기적 이윤 추구라는 근시안적 경제적 이해가 뒤섞여 나타난 것이 주요 원인인 듯하다. 그리고 구미 국가들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이유로 자국의 혁신적 디자인 아이디어를 도둑질 당하지 않으려 더 눈을 크게 뜨고 관찰할 것이다. 베를린의 표절 박물관은 바로 그런 제도의 하나이며 수치심 자극을 그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하지만, 동서고금 문화전파의 역사를 보건대 남들의 피땀어린 창조물을 슬쩍 하는 비양심적인 사업가와 학자들은 대륙과 피부색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 일이다. 노력하지 않고 쉽게 남이 이룬 성과를 취하고 싶어하는 심리는 예나지금이 동이나 서나 할 것 없는 인지상정이 아니던가.

더구나 요즘 더없이 치열해진 아카데미아 환경 속에서 직위와 강의를 유지하는데 급급한 수많은 과학계, 인문학계, 예술계 구미권과 국내 학자들 할 것 없이 제자들이나 동료들이 피땀 기울여 이룩한 연구 결과를 슬쩍해 기관 후원금을 받아내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영감을 받고 더 아름답고 더 훌륭한 것으로 재탄생시키는 행위, 우리는 그것을 ‘창조’ 혹은 ‘창의력’ 그리고 비즈니스계에선 ‘혁신’이라 부른다.

허나 19세기 아일랜드 출신 문필가 조지 모어(George Moore)도 말했듯, “누군가로부터 그대로 훔쳐와 아무짝에 쓸데 없는 것으로 만들어 이득을 보는 것은 ‘표절’이다.” “그물 없이 물고기를 낚아 이득을 보는 어부”의 부조리한 세상을 꼬집었던 옛 플랑드르 속담처럼 ‘열심히 일한 그 누구로부터 그대로 훔쳐와 원천을 밝히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행위’는 분명 도둑질이다.

* 이 글은 본래 2001년 11월 30일「디자인 정글」을 위해 기고했던 기사를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눈

EYES WIDE OPEN – STANLEY KUBRICK AS PHOTOGRAPHER

“그의 눈은 짙고 촛점이 분명했으며 꿰뚫듯 날카로왔다.” 스탠리 큐브릭의 아내 크리스티안느 할란(Christiane Har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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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ley Kubrick, 쇼걸 로즈머리 윌리엄스의 사진을 찍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Showgirl – Kubrick photographing Rosemary Williams), 1949. Courtesy Museum of the City of New York, Gift of Cowles Communications, Inc. © SK Film Archives, LLC.

인류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20세기 영화사의 거장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1928*-1999†). 그의 대표작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2001: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issey)》(1968년)《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1971년)《아이스 와이드 셧(Eyes Wide Shut)》(1999년)을 비롯해 큐브릭은 완벽한 영화 스토리라인을 구축했던 전설적인 영상 이야기꾼으로서 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

어릴적부터 학교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고등학교 시절 내내 툭하면 결석하고 학교 성적이 너무 나빠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이 되자 갈 수 있는 대학이 한 곳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 지원도 할 자격도 안될 지경이었다고 그는 1965년11월27일 제러미 번스타인과 나눈 76분 짜리의 『뉴요커(The New Yorker)』지 라디오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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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 로키 그라치아노의 초상(Rocky Graziano – Portrait), 1947. Courtesy Museum of the City of New York, Gift of Cowles Communications, Inc. © SK Film Archives, LLC.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이미 추축군에 밀려 주춤거리고 있을 시기. 거의 꼴찌로 고등학교에서 벗어난 큐브릭은 같은 또래 남들이 전쟁에 징병되어 군대를 가고 학자금 빚을 내어 대학에 진학하고 편한 오피스 직장을 찾느라 허둥대며 경쟁하고 있을 동안 자기만의 열정을 키우고 있었다.

그가 열 세살 나던 해 아버지가 사준 그라플렉스 카메라로 늘 사진찍기를 해왔던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룩(Look)』 격주간 잡지에서 프리랜스 사진가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바로 직업 세계로 뛰어들었는데, 때는 공자가 말한 남자에게는 ‘지학(志學)’의 나이를 바로 뒤로 한 꽃 같은 나이 16세.

1945-50년 이 미국 시사 매거진에서 포토저널리스트로 일하는 동안 청년 큐브릭은 나중 영화감독이 될 때를 대비하며 날카로운 눈과 카메라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의 작업 방식에 대한 질문에 큐브릭은 “내가 원치않는 것은 찍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이 전설적인 영화감독은 한 번도 정식 영화 학교나 대학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한 감독이었던 만큼 그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강한 자기의지와 독립적 성격이 담겨있다.

5년 동안 사진을 기고했던『룩』매거진 시절, 피사체의 성격과 본질을 포착하고 그 모든 요소들은 분위기와 타이밍에 적절하게 포착한 후 독자적인 내러티브로 발전시키는 큐브릭 특유의 이야기 만들기 수법에 자양분 역할을 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룩』매거진에서 몸담고 있던 마지막 해로 접어들 무렵, 큐브릭은 전에 없이 더더욱 비일상적이고 외로운 운명을 짊어지고 가는 개인들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며 처절한 외로움, 알 수 없는 운명과 이에 맞부딛힌 20세기 인간적 조건을 탐색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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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ley Kubrick, 창가에서 대본을 외고 있는 여배우 벳시 폰 퓌르스텐버그(Betsy von Fürstenberg – Reading a script in the windowsill), 1950. Courtesy Museum of the City of New York, Gift of Cowles Communications, Inc. © SK Film Archives, LLC.

이번 비엔나 쿤스트룸에서 열리는 『아이스 와이드 오픈(Eyes Wide Open- Stanley Kubrick as Photographer)』 전 (2014년 5월8일-7월13일)은 큐브릭이 전설적인 영화감독이 되기 전 그의 예술적 뼈와 살에 영양분 – 그리고 창조를 향한 자유의지와 독립성 – 을 주었던 사진가로서의 삶과 작업을 재조명해 보면서 창조인의 위대한 창조력과 창조적 삶이란 이 가치관 추구를 향한 한 편의 여정에 다름아님을 시사한다.

《아이스 와이드 셧(Eyes Wide Shut)》을 마지막 작품으로 끝내고 난 후 70세의 나이로 잠 속에서 세상을 떠난 스탠리 큐브릭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내내 그 특유의 소년같은 가볍고 명랑한 미성의 목소리 – 그리고 청명한 정신력과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푸릇푸릇 젊은 나이의 큐브릭이 군대로 징병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통의 광기 통으로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틀에 밖힌 제도권 기초 교육과 대학 교육 체제로부터 세뇌당하지 않아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빚어지는 큰 실수는 아이들에게 분별없이 아무것이나 가르치고는 성적이 나쁠까봐, 학급에서 뒤떨어질까봐 무서워 공부하도록 만드는 공포를 기본 동기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

얼마나 더 여러 케이스의 특출난 인물들이 실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던 모범생도 아니었으며 대학 졸업증을 받은 고학력도 아니었음이 밝혀져야, 또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실제 인생살이에서는 줄줄이 실패를 면치 못하고 자기아집에서 못벗어난채 허우적대는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수두룩함을 증명해야 현대인들은 자식들을 제도권 교육체제라는 족쇄로부터 해방시킬 것인가? 명배우 말론 브란도가 큐브릭을 묘사했듯이 창조적 마인드란 배운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인지하고 소화시킨 것을 자기만의 시점에서 재창조할 줄 아는 능력인 것을. All images courtesy: BA-CA Kunstforum, Vienna.

협력은 창조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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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북리뷰

책 제목: 창조 지능 (Creative Intelligence)

저자: 브루스 누스바움 (Bruce Nussbaum)

출간일: 2013년 3월 8일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기업을 이끄는 CEO? 자기 사업을 꾸려 나가는 자영업자? 적극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거나 그도 아니면 성취감을 느끼며 정당한 보수를 받는 직장인, 혹은 가사, 육아, 가계경제를 잘 관리하는 슬기로운 주부나 남편일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일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창조 지능과 경쟁력을 갖추고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고 당부하는 책 ‘창조 지능’을 만나보자.

디자인 정글에 실린 북리뷰 계속 읽기 (2013년 5월15일 자)

ARE YOU A CREATIVE TALENT?

CREATIVITY IS A UNIVERSAL TALENT. IT MEANS EVERYONE IS BORN CREATIVE.

THE 5 QUALITIES OF CREATIVE PEOPLE: ARE YOU ONE, TOO?

wilde_americaCreativity is a universal talent. Everyone is born creative, although the degree of specific talent might vary from individual to individual. Just watch children play – they are uninhibited about their imagination and expression, and, most of all, have fun with what they do. In complex times such as now we are in dire need for creative and ingenious solutions to wicked problems.

Today, more than ever, needs creative imagination and passion. The writer Tom Robbins once said, “It is never too late to have a happy childhood”. It is also never late to be passionate about being creative. Benjamin Franklin said that “our whole life is but a greater and longer childhood.” So what are some of the qualities you find in people who manage to maintain this universal talent which many adults left behind in their childhood?

  1. FLEXIBLE MIND: When someone is constantly fixated within the already existing boundaries of things in the face of situations requiring solution or change, there will most likely be no way out of trouble. Imagine. Dream. Don’t circle around in the same track. Jump off the track and think outside of the box. Work hard to make brilliant ideas reality.
  2. EMBRACE CHAOS: Creativity thrives in messy surroundings. People working in creative fields often live and work in seemingly chaotic homes and studios. But don’t be fooled. What might look unruly and dishevelled to visitors actually are treasure troves of inspiration. For creative people, chaos is just another word for creative order.
  3. KNOW YOUR PERSONAL STRENGTHS: Knowing one’s ego and talent sets you apart from others. Outstanding creative people throughout history always had a strong inner drive to externalize their visions. But having a self-conscious ego does not mean being arrogant and impolite to others. A great talent transcends into a beautiful reality when it is combined with character.
  4. REAL MOTIVATION COMES FROM WITHIN: Ask someone who is in a creative job why he/she is doing it. They will most likely say it is because they like to do what they do. Psychologists call it “intrinsic motivation.” Creative people have a innate compulsion to create. They cannot help keep generating new ideas, experimenting with new forms, making drawings and building models, and having the irresistible desire to see their vision and inventions realized and presented to the world. A reward for the work one does is sweet. But without creative motivation and hard work, how can there be a reward?
  5. HAVE FUN: Being creative is fun. The whole creative process from ideation and conceptualization to implementation is an immersive experience. Human beings are by nature made to play. Creative people like to mix work and pleasure. There is no question that people who enjoy their work also are much more creative, thus, perform far better than those who are doing their job because they are forced to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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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SOCIAL.

We Are Social At Penccilpenccil – the new social network for creative people.

크리에이티브를 위한 새로운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 펜실.

사업가로서 화가의 자화상

ALBRECHT DŰRER Portrait of the Artist as an Entrepreneur

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

Dürer's 〈Melencolia I〉 is one of three large prints of 1513–14 known as his Meisterstiche (master engravings). The other two are 〈Knight, Death, and the Devil〉 and 〈Saint Jerome in His Study〉. Though they do not form a series in the strict sense, the prints do correspond to the three kinds of virtue in medieval scholasticism—moral, theological, and intellectual—and they embody the complexity of Dürer's conception. Albrecht Dürer (1471–1528), Melencolia I, 1514. Engraving, 9 1/2 x 7 3/8 in. (24 x 18.5 cm) Harris Brisbane Dick Fund, 1943.

Dürer’s 〈Melencolia I〉 is one of three large prints of 1513–14 known as his Meisterstiche (master engravings). The other two are 〈Knight, Death, and the Devil〉 and 〈Saint Jerome in His Study〉. Though they do not form a series in the strict sense, the prints do correspond to the three kinds of virtue in medieval scholasticism—moral, theological, and intellectual—and they embody the complexity of Dürer’s conception. Albrecht Dürer (1471–1528), Melencolia I, 1514. Engraving, 9 1/2 x 7 3/8 in. (24 x 18.5 cm) Harris Brisbane Dick Fund, 1943.

올해 2014년은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 화가 겸 도제사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가 그의 걸작 판화작품중 하나인 『멜랑콜리아 I』(1514년)을 완성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뒤러의 멜랑콜리아 I은 『기사, 죽음, 악마』와 『서재에 앉아있는 성 제롬』과 더불어 1513-14년에 완성한 대형 판화 3부작중 한 작품으로, 중세 유럽에서 3대 미덕으로 꼽히던 도덕적, 신학적, 지적 학구주의를  상징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란 이 세 가지 미덕을 갖춘 교양과 소양있는 자로서 그가 창의적 결과물을 창조하기까지는 영혼적 고뇌와 정신적 우울증이라는 창조의 고통도 감내해야 함을 상징하고 있다.  Image credit: 〈Melencolia I〉 1514. Engraving, 9 1/2 x 7 3/8 in. (24 x 18.5 cm) Harris Brisbane Dick Fund,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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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때의 자화상. 목판에 유화 1498년작.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Photo: Museo Nacional del Prado, Madrid.

21세기 블럭버스터 화가로 둔갑한 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대가
흔히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이름은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짐작된다. 하지만 서구에서 사정은 많이 다르다. 서양인들에게 뒤러는 미술의 역사에서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늘 함께 하는 화가로서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 깊이 자리잡아 온 지 오래다. 특히 알프스 산맥 이북 지방에 자리해 있는 북부 유럽권에서는 더 그렇다.

뒤러의 그 유명한 『들토끼』 드로잉은 어린이들과 중고등 학생들의 미술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해 온 단골 삽화이며, 교회 용품점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뒤러의 『기도하는 손』 그림이 포스터, 열쇄 고리, 책표지, 벽걸이 그림으로 대량 복사되어 오늘날 전지구상의 기독교인들게 팔려나가고 있다.

‚서양 최초의 국제적인 미술가’ ‚서양미술 최초의 적극적인 자기 PR가, ‚현란한 아이디어맨이자 환상적인 상상가’ – 이런 사족스런 별명들 이외에도 흔히 서양 미술사에서는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471-1528)를 두고 혁신가 (innovator)라고 일컫는다. 뭔가 남들과 다른 새로운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13세 때의 자화상(Self-portrait), silverpoint drawing by the thirteen-year-old Dürer, 1484.

13세 난 소년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스케치, 1484년. 종이에 은필(銀筆), 27.5 x 19.6 cm, ©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알브레히트 뒤러는 유럽이 중세와 르네상스를 이행하는 15-16세기 전환기에 살았다. 독일로 이민 온 금속장인의 헝거리 2세 출신일 지언정 뒤러는 정신적인 면에서는 일찌기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접하고 학식을 쌓은 선진적인 사고의 지성인이었으며, 미술면에서는 북이탈리아에서 만난 만테냐(Andrea Mategna)와 벨리니(Giovanni Bellini)로부터 영향을 받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를 이상적인 미술가의 전형으로 본받았다.

오늘날 선진 학문을 하러 외국으로 유학을 가듯, 뒤러는 당시 르네상스 미술의 발상지 이탈리아로 두 차례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원근법과 비례법을 배워 온 신문물의 전달자이기도 했다.

뒤러가 최우상으로 삼았던 미술가이자 정신적 스승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뒤러는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력을 스케치 습작으로 옮기는 버릇, 시대를 앞서간 창조적 발상력을 발휘했다.

일찌기 뒤러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의 천재성을 자각하고 13세의 나이로 처음 자화상을 그려낸 조숙성을 발휘했다. 당시 화가들이 생각지도 않던 화가 스스로의 모습 그리기를 최초로 시작한 이른바 자화상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북구 유럽 미술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화가의 자화상 연구가 뒤러의 자화상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테다. 게다가 당시 화가들이 소수의 귀족 후원자들의 주문에 의존해 작품을 제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자기가 제작한 판화 그림을 대량 생산해 직접 시장에 내다 판 그의 획기적인 비스니스맨쉽은 ‚미술은 비즈니스다’라고 떵떵댔던 팝아트의 큰아버지 앤디 워홀 (Andy Warhol)보다 500년이나 앞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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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들토끼 수채화 1502년작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소장. Photo courtesy : Albertina, Vienna.

뉘렘베르크의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버지 (Albrecht Dürer the Elder)는 1455년 헝거리에서 독일 뉘렘베르크로 이민 온 금세공 장인이었다. 슬하 18명의 자녀들 가운데 세째로 태어난 화가 뒤러는 어려서 부터 금세공 공방에서 목판과 금속판 세공 기술을 배웠다. 목금속 판화가 뒤러가 최고로 자랑하는 쟝르로 자리잡게 된 것도 이 어린시절부터 쌓은 공방 수련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독일 민담과 전설에 등장하는 마녀, 괴물, 성인의 모험담을 묘사한 소형  판화 그림에서부터 판화작으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 (The Triumphal Arch for Emperor Maximilian I)』(1559년)을 바라보자면 한치의 헛된 공간이나 미숙함없이 실행시킨 그 치밀완벽한 화면 구성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사업수완까지 갖춘 금속 세공 장인이자  명인 제도공
뒤러는 남북을 가를 것 없이 전유럽을 통틀어 최고 기량을 자랑하는 판화가 겸  제도공이다. 완성된 500여년이 지난 지금, 수차례의 재난, 전쟁, 도난 사건을 뒤로한 채 전세계 유명 소장처와 미술관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뒤러의 회화작품 수60여점, 목금속 판화작 수 350여점과 드로잉 970여점 가량. 뒤러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시대에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교회당과 귀족 저택의 실내 장식용도로 쓰일 회회가 미술 쟝르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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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 목판화. 알베르티나 소장 Photo: Albertina, Vienna.

여간해서 자국 이탈리아 출신이 아니면 칭찬에 인색했던 16세기 르네상스 미술 평론가 죠르죠 바자리 (Giorgio Vasari)도 풍부한 상상력과 판타지를 한껏 발휘한 뒤러의 기량을 칭찬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뒤러가 베니스를 여행하던 동안 베니스인들은 그의 재능이 혹 그렇지 않아도 뛰어난 재능꾼들이 넘치는 이탈리아에서 뒤러의 존재로 인해 화가들 간의 경쟁이 더 심해지지나 않을까를 못내 겁내기도 했다지 않는가.

1506년 베네치아에서 머물던 뒤러가 절친한 친구 피르크하이머 (Willibald Pirckhei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태양 아래에서 떵떵거리고 있다네. 내 나라는 나를 기생충 취급을 하지만 여기서 나는 거장 취급을 받고 있다구“라며 좋아했다. 공방 장인 취급을 받아오던 뒤러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남다른 천재성을 지닌 창조자’로 특권적인 사회적인 대접을 받았으니 그가 느꼈을 뿌듯한 기분은 능히 짐작이 된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는 그도 초상화 [그림:막시밀리안 1세 황제], 자화상 [28세때 자화상, 본문 맨 위의 그림], 교회나 성소의 제단을 장식하는 종교화 [성처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 주문에 응해 회화 제작도 했으며 그 방면에서도 그의 다재다능했던 기량은 우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뒤러는 막시밀리안 1세 오스트리아 황제의 황실 미술가로서의 영광도 얻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대를 이어 오스트리아를 유럽 대륙의 지배강대국으로 계승하려던 야심의 소유자. 총 195점의 목판에 일일이 조각된 총천연색 판화 인쇄본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과 『위대한 개선 열차』 판화/ 수채화 시리즈는 황실의 자존심을 있는대로 드높여주고 그의 정권을 영광화하는데 성공했다. 뒤러가 구사했던 그리스로마 고대 부흥 미술이 지닌 화려한 장식성과 위풍당당 양식은 신성로마제국 황실과 귀족들의 취향에 안성마춤이었기 때문이다.

일화에 따르면 „회화는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오래걸리지만 보수가 좋지 못해“라고 뒤러는 곧잘 불평했다고 한다. 실은 그는 회화 그리기 보다는 드로잉과 판화일을 훨씬 더 좋아했다. 실제로 뒤러의 전시회를 둘러보자면 회화 작품 보다는 정교한 손재주와 치밀한 화면 구성력이 돋보이는 판화와 드로잉 작품들에 더 매력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드로잉, 스케치, 목금속판 판화는 회화 제작 준비를 위한 습작에서부터 착상이나 끄적거리기에 이르기까지 더할나위 없는 창조적 즐거움과 영감을 안겨줬다고 한다. 미술사학자 곰브리히의 말대로라면 뒤러가 그토록 즐겼던 „끄적거리기는 명인적 기량과 휴식을 한데 결합한 행위“였음이다 [from E.H. Gombrich, The Uses of Image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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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황제 초상 목판에 유화1519년작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Photo: Kunsthistorischesmuseum, Wien.

드로잉과 판화의 장점은 그 뿐만이 아니다. 특히 판화는 판목이나 동판 한 장으로 똑같은 작품을 무한수로 대량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일반 고객을 상대로한 대량 판매가 가능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원하는대로 재디자인하거나 책으로 묶어 출판할 수 있으며 아예 판목과 동판 자체를 내다 팔 수도 있다. 웬만한 대작 회화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조수를 부려가며 반복수정 작업을 거쳐야했던 화가들과는 다르게 뒤러는 그 솜씨좋은 손으로 펜, 끌, 조각칼을 놀려서 스케치, 목금속판 파기, 인쇄에 이르는 제작 전과정을 손수 혼자서 했다.

뒤러는 대량 인쇄 매체로서의 판화를 재발견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의 판화작품에마다 일일이 새겨져 있는 AD 모노그램 (화가의 이름 알파벳 첫 글자인 A와 D를 따서 만든 결합문자로)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 상표 (trademark)나 로고 (logo)와 그 개념이 통하는데가 많다. 그는 자신의 판화 판매 촉진을 위해서 자기 PR에 적극적이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AD 모노그램이 무단복제로 남용될 것을 우려해 법정에 저작권 보호를 요청하기도 한 저작권법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전쟁, 화재, 소실 등을 거친 오랜 역사끝에 오늘날 과연 뒤러가 생전 제작했던 회화며 드로잉, 판화 작품들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될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근 400점의 회화 및 드로잉, 판화작마다 AD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다는 점과, 생전 화가가 자신의 수중에 있던 작품들을 철저히 수집 관리했으며 정확한 제작 시기와 설명문까지 곁들여 보관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뒤러는 분명 자신의 천재성과 작품이 후대에 전해져 영향력을 미칠것을 의식했던 것 같다. 실제로 그의 드로잉 인쇄본과 복사본들은 훗날 매너리즘,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이 선배 대가 뒤러의 놀라운 기법과 구도를 배우고 본따는데 사용한 표본서로써 그 구실을 톡톡이 했다.

뒤러는 통속미술가?
혹자는 뒤러의 판화와 드로잉 작품들을 일컬어 통속적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판화들을 일반 대중을 상대로 시장에 내다 팔 용도로 대량 인쇄했다. 성서 묵시록을 환상적인 장면으로  해석한 이미지들을 비롯해서 이탈리아에서 배워온 고전 누드상과 이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따온 모티프들는 뒤러가 즐겨 다룬 주제들이다. 여기에 르네상스 비례법과  원근법은 고딕시대 독일인들이 전에 보지 못한 사실성과 감각적 역동성을 표현해 안성마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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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처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 1498년경작. Samuel H. Kress Collection,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Photo courtesy: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나타날 법한 괴물들, 근육질의 육중한 남자인물상과 여성상들이 생동감있는 묘사된 판화작품들이 고대 이교 신화의 한 장면을 도식화한 알레고리일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그같은 작품들은 사실 고딕 후기 독일인들의 사고방식에 널리 깔려있던 중세적 미신 세계와 뒤러의 머리 속에서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친 판다지의 융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풍우, 결투, 납치, 강간의 장면이 담긴 판타지 판화들은 곧잘 에로틱함과 격정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효과를 자아내곤 한다. 15-16세기 독일인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기독교 신앙, 미덕, 공포감의 표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명한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의 설명처럼, 당시 후기 고딕시대의 독일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 미술이 아직 전파되지 못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르네상스적 형식과 북부 독일의 고딕적 내용이 혼재되어 나타난게다 [Erwin Panofsky, Meaning in the Visual Arts,1974].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 이론과 독일의 정신 세계의 결합 – 두 말할 것 없이 뒤러는 그래서 그 둘을 잘 버무린 훌륭한 절충주의의 명인이기도 했다.

자화상 – 천재와 자기망상증
독어권 문화를 포함한 북유럽에서 자화상이라는 미술 쟝르는 유난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50년 전에 살았던 화가 제도공 알브레히트 뒤러가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을까 알길이 없었을게다. 공방 기술자에서 창조적인 개인으로서의 의식적 자각을 자화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되는 뒤러의 자화상이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중세 교회 조각가들과 장인들은 건축물이나 작품 한구석에 숨은 그림찾기처럼 그들의 얼굴을 새겨 넣는 관행을 즐겼다. 뒤러는 여기서 한 발짝 더떼어, 이미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은필 소묘로  『13세때의 자화상』(1484년)을 그려 그 빼어난 손재주로 스스로를 여린 피부와 바스라질 듯한 유년의 미의 소유자로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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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자화상』 1450-55년작, 검정색 잉크로 붓과 펜으로 제작. Stiftung Weimarer Klassik und Kunstsammlungen 소장 Photo courtesy: Stiftung Weimarer Klassik und Kunstsammlungen, Schlossmuseum, Graphische Sammlung, Weimar.

그는 나중에 22세 나던해에 이 그림을 자신의 약혼녀 아그네스에게 주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가 28세 나던 해에 그린 『자화상』(1498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은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뒤러의 자화상 회화작품일 것이다. 뒤러는 스스로를 이탈리아 여행과  인문적 학식을 겸비한 신사로서 묘사하는 것으로써 더 이상 일개 손재주나 부리는 공방쟁이가 아니라 신이 내려준 창조력과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예술가임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반짝이는 긴 금발 곱슬머리, 현란한 옷차림, 관람객을 향해 직시하는 눈길, 한껏 등을 곧추세운 자신감찬 자세 … 뒤러는 스스로를 젊은 예수가 되살아나 돌아오기나 한듯 카리스마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말년을 치닫던 해인 1522년, 누드의 모습 『누드 자화상』(1450-55)으로 등장한 화가는 ‘멜랑콜리’ 또는 만성적인 우울증 (melancholie)에 시달리는 자신의 건강상태를 호소하기 위해서 의사에게 보낸 설명 그림이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 자리가 아프답니다“ – 이 드로잉에서 뒤러는 한 손가락을 복부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비장이 위치해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비장이 담즙을 지나치게 분비하면 우울증으로 나타난다고 했던 고대 의학 이론에 정통해 있던 뒤러는 이렇게 자가진단을 내렸다. 1528년 57세의 나이로 환각증세와 악몽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뜰 때까지 뒤러는 자신이 앓던 우울증세를 천재성 때문이라고 여기면서 고통받는 예수의 도상을 빌은 자화상 소묘를 지속해 그렸다고 알려진다.

알베르티나로 『들토끼』와 『기도하는 손』 보러가기
관람객들은 그들이 보고 배워서 알고 있는 작품을 진품으로 확인하기 위해 미술전시회를 찾곤 한다. 『들토끼』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뒤러 작품들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 이번 전시기간 동안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개별적인 『들토끼』 관람 경험을 원하는 관객들을 위해서 전화로 특수 관람 예약까지 접수받는 행사까지 병행하면서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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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손』, 1508년작 빈 알베르티나 소장. Photo: Albertina, Vienna.

자연 숭배자이기도 했던 뒤러는 『들토끼』 외에도 수많은 풍경화와 동물화를 수채화로 그려서 자연의 그 천연의 아름다움과 비례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아내 아그네스 프라이 (Agnes Frey)와 결혼한 해인 1494년,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 도중 들른 남부 티롤 지방과 인스브룩 성을 수채화로 담아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늘 머리와 가슴 속에 기억하고 있는 『기도하는 손』 스케치는 팔이나 어깨 등 다른 신체부위가 일체 제거된채 한데 모은 두 손만이 공중에 떠 있는 특유의 이미지 때문에 보는이에게 유난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 모양대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그 또한 오해이다. 『기도하는 손』은 본래 프랑크푸르트의 한 돈 많은 미술후원자 야콥 헬러 (Jacob Heller)의 주문을 받아 그린 교회제단장식용으로 쓰일 그림 예비 스케치 18점중 하나였다. 뒤러는 헬러가 재료비와 수고비 지급에 인색하다는 이유로 떠들썩한 말타툼을 벌인 끝에 결국 이 프로젝트를 포기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고 그의 『기도하는 손』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완성작의 하나로 남아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컬렉션 뒤러의 그래픽 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알베르티나 미술관과 알브레히트 뒤러 사이의 역사는 남다르다. 작센-테셴 공국의 알베르트 황태자 부부 (합스부르크 제국 17세기 마리아-테레지아 여왕의 아들 부부)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물려받은 뒤러의 드로잉 및 수채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던 이 컬렉션은 20세기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다수 유실되거나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제3제국 시절 나치 지도자 히틀러는 뒤러를 깊이 흠모해서 뒤러의 그래픽 작품 20여점을 훔쳐 자신의 개인 미술 컬렉션 보관함에 몰래 숨겨두기도 했다.

현재는 『들토끼』 『기도하는 손』 『인스브룩 거리』 수채화 등 140여 점의 핵심 드로잉과 수채화와 판화 전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 1971년 뒤러의 500회 생일을 기념해 올려졌던 전시후, 올 [2003년] 가을 빈에서 열리는 뒤러 컬렉션전은 가장 규모가 큰 종합전이어서 일반인들이 뒤러의 진작들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되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전은 5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계속된다.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 지 2003년 10월호 Art News 연재 컬럼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