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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풍경화가로 다시보기

GUSTAV KLIMT’S LANDSCAPES

올해[2002년]로부터 약 2년전인 2000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에 자리한 갤러리 벨베데레에서는 《구스타브 클림트와 여인들》展이 열려 이곳 국내외 미술애호가들의 큰 관심을 끌었던 바 있다. 벨베데레 갤러리가 있는 벨베데레  궁은 오스트로-헝거리 제국 시절 1714-22년 무려 8년에 걸쳐서 사보이의 오이겐 왕자가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바로크 양식 궁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립 미술관으로 지정되었는데, 클림트를 비롯해서 에곤 쉴레, 리햐르트 게르스틀, 오스카 코코슈카 등 19-20세기 전환기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Continue reading

문화재 이전인가 희대의 미술품 도난 사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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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갤러리 동쪽벽 광경. 세잔느의 『누드가 있는 풍경 (Les grandes baigneuses)』 캔버스에 유채 132.4 x 219.1 cm과 오귀스트 르노아르의 『화가의 가족 (La famille de l’artiste)』 캔버스에 유채 1896년 작.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필라델피아 반스 재단 미술컬렉션 이전에 즈음하여

BARNES COLLECTION IN PHILADELPHIA

매년 여는 국제 예술 페스티벌 말고도 미국의 역사 도시 필라델피아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화유산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반스 재단 미술 컬렉션이다. 반스 재단은 故 앨버트 반스 박사가 평생 모은 주옥같은 미술품 컬렉션의 보금자리다. 현재 감정 시세 250억 달러 (우리돈 약 27조원)라는 막대한 가치의 미술품 총 2천5백여점 (그 중 회화의 비중은 800여점)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 7월3일 반스 컬렉션은 문을 잠시 닫았다. 반스 재단의 허술한 재정관리와 근 10년에 걸친 법률 공방 끝에 반스 컬렉션은 지난 85년 넘는 세월 보금자리였던 메리온을 떠나 필라델피아 도심 서부 벤자민 플랭클린 파크웨이 거리에 지어질 새 건물로 이전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7월초 반스 미술 재단이 내년 이전을 이유로 휴관을 선언하고 소장품 이전에 착수하자마자 구미권 미술계와 언론은 잔뜩 술렁댔다. 그토록 값비하고 그많은 수량의 국보급 미술품을 한꺼번에 옯기는 대이동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본 적 없는 규모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또 어느 작품을 몇 점 어느 트럭에 어떻게 무사히 운반하는가는 숨가쁜 헐리우드 첩보영화를 방불케할 만큼 극도로 비밀스럽고 조심스럽다. 미술품은 미술관에 걸려 있을 때보다 운반 도중에 도난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어디 그뿐인가. 혹 제아무리 도난범죄로부터 안전하다 할지언정 모름지기 미술품이란 매번 이동할 때마다 크고작게 내외적 손상을 받기 때문에 복원전문가들은 가급적 미술품의 이동을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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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르죠 데 키리코 (Giogio de Chirico) 『앨버트 반스 초상 (Portrait of Albert C. Barnes)』 캔버스에 유채 1926년 작품. ©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있던 반스 재단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이 집중되기 까지는  2009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도난당한 미술 (The Art of the Steal)』의 공이  컸다. 이 영화는 故 앨버트 반스 박사의 사유 미술 컬렉션의 설립의도를 묵살한채 이 컬렉션을 갈취하려 혈안이 된 필라델피아 시 정치가들과 주지급 재단 위원들의 탐욕과 음모를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다. 문화유산이 막강한 자산이 된 요즘, 반스 컬렉션의 소장품은 필라델피아의 문화적인 위신을 한껏 높여줄 뿐만 아니라 시정부가 추진하는 문화관광 산업 및 파생 수입원에 더없이 요긴한 밑천이 되어 줄것이라는 속셈이 깔려있다.

30대 말엽 미술 컬렉터로 변신하기 전까지만 해도 반스 박사의 본업은 화학자였다. 본래 약사가 될 생각으로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화학을 수학한 후, 1899년에 아가이롤 (Argyrol)이라는 기적의 여성용 청결제를 개발했다. 항생제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던 당시, 아가이롤은 임질로 인한 여성병과 신생아 실명을 예방해준 신약으로 각광받으며 큰 매출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반스 박사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마침 때는 유럽에서 다양한 미술 사조와 창조 운동이 숨가쁘게 펼쳐지고 있던 20세기 모더니즘 시대. 반스 박사는 직접 프랑스로 여행가 머물면서 당대에 내노라하는 아트 딜러와 거장 미술가들을 직접 만나보고 작업실을 둘러본 후 손수 고른 작품만을 사들였다. 예컨대 피카소와 마티스는 딜러 거트루드 스타인을 통해서, 모딜리아니와 데 키리코는 폴 기욤을 통해서 대거 소장하게 된 화가들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당시 반스 박사는 일찍이 미래 거장을 꿰뚫어 볼 줄 알았던 탁월한 감식안을 갖춘 아방가르드 미술 컬렉터였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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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스 재단 미술컬렉션 메인 갤러리 서쪽벽 광경. 위의 작품은 죠르쥬 쇠라 (Georges Seurat)의 『모델들(Poseuses)』, 아래 작품은 폴 세잔느 (Paul Cézanne)의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The Card Players)』.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반스 박사가 유럽을 여행하며 모은 미술작품들은 대체로 파리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계열 작품들이 백미로 꼽힌다. 르노아르의 그림 180여점, 세잔느 59점, 마티스 46점, 피카소 21점, 드가 7점, 고흐 7점을 포함하여 일부 전문가들은 반스의 소장품을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인상주의 미술 컬렉션이라고 감히 평가한다. 특히 세잔느가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5개 연작중에서도 반스 재단 소장품은 작품 규모가 제일 크고 완성도가 높다고 여겨지고 있다.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쉽다” –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 (Eric Hoffer)가 이런 말을 했다. 반스 박사는 평소 성격이 퉁명스롭고 당시 필라델피아 교외에 살던 부유한 지주급 이웃들과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푸줏간집 아들로 태어나 본직 약제사에서 미술 컬렉터로 변신한 앨버트 반스 박사는 자수성가한 백만장자가 되어서도 자신의 소박한 출신을 한번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주옥같은 자신의 미술소장품을 흠모하던 콧대높은 미술계 인사들이나 사교계 방문객들의 관람요청에는 까탈스럽게 굴었지만 소시민 감상객과 학생들에게는 흔쾌히 전시실과 도서관 현관을 활짝 열어주었다고 한다.

반스 컬렉션 재단의 설립자 앨버트 반스 (Albert C. Barnes) 박사는 필라델피아 도심을 피해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한적한 교외 마을 메리온 (Merion)에 토지를 매입하고, 건축가 폴 크레 (Paul Cret)에게 설계를 맡겨서 세기전환기 아르데코풍으로 디자인한 개인 저택을 1925년에 완공하여 소장품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반스 재단은 미술을 제정신으로 감상할 수 있는 미국에서 유일한 곳”이라고 마티스는 말한 적이 있는데, 고즈넉한 교외에 펼쳐진 원예정원, 유럽풍 빌라 건축, 회화와 조각을 빼곡하게 나란히 배치시킨 전시 배열법은 반스 컬렉션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친밀하고 독특한 감상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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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우편배달부 (죠셉 에티엔느-룰랭) (The Postman (Joseph Etienne-Roulin))』, 1889년 작, 캔버스에 유채, 65.7 x 55.2 cm ©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미술작품의 진정한 소유자는 누구인가? 오늘날 문화는 소수 특권층의 사유재산이라기 보다는 만인이 공유하는 공공적 유산이라는 개념이 널리 일반화되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등 국립으로 운영되는 박물관들이 무료입장제로 관객에 공개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생전 반스 박사가 자신의 미술 컬렉션이 길이 비영리 교육 재단으로 활용되길 바란다는 뜻을 밝힌 법적 유서를 남긴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재단 창설자의 사유재산의 본래 의도를 무시하고 시정부가 재정적 부실을 핑계삼아 반스 컬렉션을 자의로 해체 이전한 후 관광명소로 만들기로 한 이 결정을 과연 단순한 문화재 보금자리 이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개인 문화유산와 운영철학에 대한 침해로 볼 것인가?

그래서 반스 컬렉션의 이주에 저항하는 반대 세력은 지금도 만만치 않다. 특히 반스 재단에서 미술사 교육과정을 거친 학생들과 회원들에 따르면, 재단의 도심 이전 결정이 반스의 소장품이 지닌 막대한 가치를 알아챈 필라델피아 시 정부와 지주들이 주도돼 반스 재단을 분산시키고 갈취하려는 본 의도를 은근슬쩍 감추기 위한 마케팅 조작에 다름아니라고 역설한다.

반스 컬렉션 소장품들이 새 반스 컬렉션 미술관 (Tod Williams Billie Tsien Architects 설계)으로 옮겨져 전시 채비를 갖추고 2012년 봄에 개장하면 반스 재단은 더 이상 교육의 위한 사유 문화재단이 아니라 유료입장제 시정 관광명소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그 사이 현재 공시가 1억5천만 달러를 호가하는 원 반스 재단 건물은 다른 용도로 활용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약을 안은채 알보레툼 수목원 안에 지금도 호젓이 서있다. 우수한 문화재의 가치는 현시가로 매길 것이 아니라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라는 인류 역사적 진실을 다시금 환기해 볼 것을 재촉하는 듯하다.

* 이 글은 본래 『크로노스』 코리아 (CHRONOS Korea) 지 2011년 9/10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국제 미술 페어 너무 많다.

언제부터 미술시장은 수요측이 아닌 공급측 경제학이 되어 버렸나?

요즘 전세계 대도시에서는 일년 내내 미술 페어가 쉴틈없이 열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여년 전만 해도 국제 미술계에서는 각 나라마다 국가대표격 항공사를 하나씩 두고 있듯 국가대표별 미술 비엔날레 행사는 한둘쯤 갖추고 있어야 국제 문화 지도 위에 오를 수 있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개인 부호 컬렉터가 나날이 늘고 미술품이 럭셔리 소비 아이템으로 인정받고 있는 현재, 미술페어가 과거 비엔날레가 누렸던 위치를 점령해 들어가고 있다. 과연 그러한 현대미술 시장 붐과 공급주도식 미술대중화 기저의 재정적 기반은 든든할까? 그리고 미술품의 대중적 시장화 현상은 지속가능할까?

Banksy, 『Morons』. 이 낙서화는 본래 뱅시가 2006년 LA에서 가진 ⟪Barely Legal⟫ 전시회에 100판 한정본 가운데 한 작품. 인쇄: Modern Multiples.

Banksy, 『Morons』. 이 낙서화는 본래 뱅시가 2006년 LA에서 가진 ⟪Barely Legal⟫ 전시회에 100판 한정본 가운데 한 작품. 인쇄: Modern Multiples.

최근 나는 한 미술 딜러로부터 “18번”이라는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난 한 해 지금까지 미술 페어에 몇 번 참가했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지난 한 두해 총 18번이라. 매 3주 마다 한 번씩 다른 페어장으로 옮겨다니며 전시했다는 계산이 된다. 아무리 우리가 이벤트성 위주의 환경 속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물류운송 스케쥴 조정과 잦은 여행에 시달릴 딜러의 체력에 얼마나 가혹한 강행군이 될까는 상상만해도 몸서리쳐진다.

그렇게 않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들 딜러들은 대체로 말한다. 광고 보다 비용이 훨씬 더 들지만 페어에 직접 참가하는 것만이 사실상 마케팅 전략이고 수입효과도 즉각적이다. 페어장에 참가하는 이유는 또 있다. 화랑업자들은 페어에 참가해야만 새 고객을 발굴하게 되고 옛 단골고객도 되찾아와 작품을 사간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딜러들은 어느새 정처없는 악순환의 고리 속으로 말려들고 만다. 이전 페어에서 발생한 세일즈 활동과 각종 참가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음 새 페어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 그같은 전략이 야기할 수 있는 재정적 리스크는 절대로 가볍게 보면 안된다.

그러나 결국 그같은 매출 전략을 택할 것인지 아닐지는 화랑주인 스스로가 판단할 문제다. 다만 필자는 화랑계의 그같은 과열성 비즈니스 관행이 미술 시장 전체에 어떤 파급효과를 미칠까를 우려한다.

미술 시장은 계속 성장중이다. 특히 생존하는 현대작가들의 작품의 매출은 계속 증가세에 있다. 글로벌화 덕분에 오늘날 어느 나라 모든 도시마다 현대미술계 또는 중심부 하나씩은 다 갖고 있다. 페어 행사의 활성화 덕분에 전세계 곳곳 이른바 “미술 수도 (art capitals)”에서는 서로 비슷비슷한 수 십개의 미술 페어들이 동시다발로 열렸다 사라진다.

그러나 그같은 현상을 무작정 칭찬하고 들기보다는 과연 그처럼 운영되는 미술시장의 성장이 얼마나 지속가능한지, 이 현상을 불지피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미술작품의 미술작품의 무작위성 공급 증가 현상 [*참고, 역자주: 과거, 미술시장에서는 미술가가 사망했거나 희귀한 작품일수록 가치와 가격이 높게 책정되는 ‘수요측 경제학 원칙’에 입각해 작동했다.] 이 정상적인 것인지 심사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미술계 전반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공급이 시장을 주도한다고 보는 것 같다. 벽에 걸고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비추면 사람들이 그 작품을 사 갈것이란 막연한 믿음 말이다. 과거 전통주의 거장 작품이나 인상주의 계열 작품들, 심지어는 상한가를 홋가하는 유명 현대미술가의 작품은 너무 귀하고 구하기 어렵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을 감안한다면 공급측 경제원리 하에 보다 광범위한 소비자들에게 많은 미술품 구매와 소유 기획를 제공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긴 하다. 이 모두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대미술시장의 현실이다. 그리고 화랑, 페어, 경매소들은 미술작품을 시장에 더 많이 공급하면 할수록 더 많이 미술작품을 팔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At the Art Basel Miami Beach 2012 VIP Preview at the Miami Beach Convention Center on December 5, 2012 in Miami Beach, Florida. (Photo by Mike Coppola/Getty Images for Art Basel Miami 2012)

At the Art Basel Miami Beach 2012 VIP Preview at the Miami Beach Convention Center on December 5, 2012 in Miami Beach, Florida. (Photo by Mike Coppola/Getty Images for Art Basel Miami 2012)

물론 아트 페어가 안겨주는 장점도 있다. 특히 최근 등장한 인터넷 미술 매매 플랫폼 덕분에 소비자가 경제적・사회적・지리적 장벽이나 주눅감을 느끼지 않고도 미술작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미술품 소유와 향유의 민주화다. 페어장은 소비자에게는 미술품을 구경하고 사고 모으는 재미있는 공간이고 딜러에게는 새 고객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미술에 헌신하는 컬렉터 기반을 다지려면 긴 시간의 노력과 투자를 필요로 한다. 며칠 열리는 미술품 장터의 단기형 깜짝행사로는 충분치 못하다.

시장에 더 많은 수량의 미술작품을 밀어 넣는 것으로 건전한 미술시장을 유지할 수는 없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수요는 절대로 과잉 공급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현대미술 시장이 유지되는데 필요로 하는 가격발굴 수준에 미치지도 못할 것이다. 잊지 말자. 미술은 필수품이 아니라는 것을.

※ 이 글은 본래 BLOUIN ARTINFO INTERNATIONAL EDITION 2013년 5월20일 게재된 영문기사를 우리말로 요약한 것입니다. / This is a Korean summary of the column by Benjamin Genocchio “Is the Art Market Becoming a Supply-Side Economy? An Argument Against Art Fairs”, originally appeared at BLOUIN ARTINFO INTERNATIONAL EDITION on May 20th, 2013. Read the original article here.

화려한 바로크 도자기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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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시장은 회화와 조각을 시대를 넘어서 공예 미술로 관심
미술 애호가들과 컬렉터 사이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미적 감상과 수집 대상이 흥미진진한 관심사다. 작년 연말부터 올초에 걸쳐 구미권의 유명 미술 경매장에서 커다란 관심사로 떠 오르고 있는 미술 거래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서양 고전 도자기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작년 연말경인 2005년 12월 중순에 파리에서 열린 크리스티 미술 경매소의 경매 매출 실적에 따르면 17-18세기 유럽 고전 가구 공예품과 도자기들이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낮게는 1백80여억원에서 최고 4백7십억원이라는 가히 천문학적 가격에 팔려 나갔다는 소식이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紙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올초에는 영국의 고전 미술 전문 학술지인 『아폴로(Apollo)』는 17-18세기 바로크 시대 도자기가 미술적 감식안을 자랑하는 컬렉터들 사이에서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하는 컬렉팅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음을 지적하는 기사를 실어 고전 미술 애호가는 물론 학계의 관심을 환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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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쵸치 (Antonio Cioci)가 1732–1792년경에 그린 도자기 그릇이 있는 정물화. Museo dell’Opificio delle Pietre Dure, Florence.

두 말 할 것 없이 미술 시장을 오가는 미술품 컬렉터들과 경매소의 관심사 변동은 잇따른 미술계 학자들의 연구를 부추기고 또 역으로 학계의 관심사가 미술 시장으로 옮겨져 미술품 거래 당사자들 사이의 새로운 구매 관심을 부추기는 것은 상례다.

과거의 미술품 애호가들과 개인 컬렉터들이 유럽의 19세기말 인상주의 회화나 20세기초 표현주의 회화와 조각품들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었던 덕분에 이미 기하학적인 작품 가격을 구축하게 된 나머지 이제 너도나도 웬만큼 돈많은 갑부들이 하나씩 갖고 있다고 알려진 그같은 유명 회화 및 조각 작품들은 재차 미술 경매 시장으로 떠밀려 나와 더 비싼 가격을 주고 사갈 새주인을 찾고 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미술 시장의 한 구석에서는 미술품에 대한 남다른 감식안을 자랑하며 그동안 미술 시장의 뒷전에 밀려 있던 도자기 공예에 관심의 손짓을 내던지는 컬렉터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크 도자기 – 새롭게 떠오르는 미술 시장의 핫 아이템
과거 십여년 특히 1990년대에 구미권 미술 시장에서 도자기 공예 분야가 그다지 커다란 인기를 끌지 못한 이유는 능히 짐작할 만 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영미권의 보수주의적 정권이 부추긴 과거 전통과 노스탤지아에 대한 미적 향수풍의 유행은 인터넷을 위주로 한 신경제 붐과 전에 없는 경제 호황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한 미니멀리즘 인테리어 디자인의 유행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났던게 그같은 원인이었다. 백색 위주의 실내 벽면과 단순간결한 직선 위주의 미니널리즘풍의 실내 환경에 고전적인 형샡과 장황한 장식을 특징으로 한 바로크풍 도자기 용품은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았던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3-4년 동안 변동을 겪어온 구미권의 보수적 정치적 분위기와 패션계의 장황하고 화려해진 유행 경향은 최근에 새롭게 불붙기 시작한 서양 고전 도자 예술에 대한 관심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집안 구석구석에 진열해 놓은 예술품을 둘러싼 이야기들은 미술 컬렉터들의 집을 방문한 친구들과 파티 손님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 및 담소거리로 더없이 안성마춤이기도 하다.

게다가 최근 17-18세기 도자기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 미술품 컬렉터들은 주로 미국와 중유럽권에 살고 있는 사업가 출신의 부유한 남성들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흔히 도자기 하면 식탁용 식기라는가 거실 및 침실용 장식품으로 여성들과 더 가까운 것이라고 여겨져 온 도자기 용품들이 갑작스럽게 남성 컬렉터들 사이에서 미술품에 대한 감식안을 과시할 수 있는 매개체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 역시 여간 재미있는게 아니다. 최근들어 유난히 미국의 대형 박물관들이 앞다투어 유럽 17-18세기 바로크 도자기 작품들 구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도 ‚도자기 소장은 고도의 감신안의 표시’라는 새로운 미술 시장내 추세에 크게 힘입고 있음을 증명한다.

작년 연말부터 올 2월말까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리히텐슈타인 박물관에서 『바로크 시대의 호사 도자기 (Barocker Luxus Porzellan)』 展은 그런 점에서 최신 구미권 미술계의 움직임을 잘 반영하고 있는 전시회가 아닐 수 없다. 리히텐슈타인 박물관 (Liechtenstein Museum)은 약 1년전에 소더비 경매소를 통해서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일명 ‚배드민턴 장롱(Badminton Cabinet)’이라고 불리는 18세기풍 바로크 흑목 자개장을 무려 영화 1천9백만 파운드(우리돈으로 약 3백5십억원)을 주고 구입하여 화재가 된 바 있는 거부의 개인 소장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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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에서 생산한 작은 도자 찻주전자, 1730-35년경 제작, 뚜껑 포함 높이 14,2 cm, Sammlung Rudolf von Strasser.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요즘들어 도자기 수집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중유럽권의 핵심국가. 이미 17세기부터 우수한 도자기 제품을 생활의 일부분을 삼아 사용해 오던 리히텐슈타인 군주 가문이 대대로 사용하고 보관해 오던 진품 바로크 도자 식기들과 장식용품들을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대중에게 공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크 시대의 진품 도자품들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동방에서 온 진기한 신소재 도자기
당시 빈의 합스부르크 황실 정권기 동안에 합스부르크 제국내 영토 중에서도 빈과 프라하를 오가며 중유럽 북동부 지역에서 막대한 권력을 자랑했던 리히텐슈타인 군주 가문은 황실과 여타 고위급 귀족 가문들과의 경쟁에 뒤쳐질 새라  유럽권에서 드높이 찬양받던 바로크식 호화 도자기 용품들을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에 특별 주문하여 사용했고 여타 귀족들도일부 유명 도자기 화가들을 시켜 각 가문 만의 독특한 지위와 고귀한 취향을 반영하기 위한 특수 디자인이 담기 도자기들을 만들어 썼다.

지금도 서양 고전 도자 전문가들과 미술 시장에서 최고로 꼽히는 도자기들은 독일 작센 지방의 마이쎈 (Meissen) 도자기와 프랑스의 세브프 (Sèvre) 도자기를 꼽지만, 빈의 뒤 파키에 (Du Paquier) 도자기 공장 (1718년 설립-1744년 폐쇄)은 유럽에서 두번째로 오랜된 유서깊은 도자기 생산소였다는 점 때문에 최근 미술 경매장에서 높은 인기를 끌며 초고가를 홋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고려 청자를 두고 그 유려한 자태와 색채 감각의 비법 전수와 변천을 둘러싼 숨은 이야기가 많듯이 유럽의 몇몇 도자기 공장들과 명장들 사이에서 쉬쉬하며 돌던 도자기 제작 기법과 극비 유출에 관한 야사는 웬만한 탐정소설을 방불케 할 만큼 흥미진진하고 구구한 설도 많다. 예컨대 빈의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의 총책임자였던 클라디우스 이노첸테 뒤 파키에는 도자기 비법을 누출했다간 죽음 당했다던 마이쎈의 도자기 장인들과 화학자들을 몰래 꼬득여 빈으로 데려와 일을 시키는등 우수한 도자기 생산을 위해서라면 여간한 모험도 서슴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혼신의 노력과 황실 주문을 받은 바쁘고 벅찬 생산활동에도 불구하고 뒤 파키에를 비롯한 온 도자기 공장은 막대한 금액에 이르는 만성적인 적자에서 끝끝내 벗어나지 못하다가 1944년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황제의 관리 하에 들어갔지만 1864년에 결국 폐쇄되었다가 다행히도 오늘날까지 비너 포르첼란 마누팍투르 아우가르튼 (Wiener Porzellan Manufaktur Augarten)이라는 명칭으로 계승되어 도자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도 빈 도심부 근처의 제9구역 파사우 (Passau) 구에 가면 리히텐슈타인 성과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 (Du Paquier Porzellan Manufaktur)은 포르첼란거리 (Porzellangasse) 상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있는데, 이 둘의 지리적은 가차움만 보더라도 당시 리히텐슈타인 가(街)와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의 남다른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를 위한 전시품 정리 과정에서 뒤 파키에 도자기 공장에서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리히텐슈타인 궁전 소장의 도자기들은 대체로 궁전내 은제품 보관 창고와 다과 주방에 수두룩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서 이번 전시에 포함되었다.

18세기 초부터 귀족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심을 모으며 인기 사치품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도자기 (porcelain)는 본래 중동을 거쳐 멀리 중국과 일본에서 도자기 용품들이 수입되어 유럽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만족할 줄 모르고 항상 새로운 외래 유행과 희귀한 진품 수집에 탐욕스럽던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각광받았다.

18세기까지도 금은 식기나 주석으로 된 금속재 식기가 일반적이던 지체 높고 부유한 유럽의 귀족 식탁 문화에서 도자기는 그 특유의 희고 윤기있는 표면 때문에 이른바 ‚하얀금 (white gold)’이라고 불릴 정도로 ‚진귀한’ 신소재로 여겨지며 소재의 혁명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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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뒤파키에 도자 공방에서 생산된 음료수 주전자, 1730/35년경 제작, 높이 7,9 cm, Sammlung Rudolf von Strasser.

당시 귀족들이 사용하던 도자기 용품들은 주로 거나한 식사상을 한껏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기 위해 활용된 식탁용 식기와 성내를 꾸며주는 실내 장식용 미술품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리히텐슈타인 가문에서 그들의 거주용 성내 보물 보관소인 ‚가다로바 (Guardaroba)’실(室)을 그득하게 메운 보배들의 대부분은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해 온 도자기들이었는데, 이들 도자기들은 너무 귀중하게 다뤄진 나머지 실제로 음식을 담는 식기로 기능하기 보다는 식탁을 풍성하고 호화롭게 돋보이게 해 주는 장식품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빈 바로크 도자기 – 정치적 격변에 대한 평화적 외교 수단
건축, 조각, 회화 등 미술 분야에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했던 이탈리아 미술가들을 통해서 특히 16세기 이후부터 남부 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이 급격히 북부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18세기초엽부터 이탈리아 피렌체 근방에서는 유럽을 통틀어서 최고의 제작 기술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도자기 공장이 설립되어 도자기 주문생산식으로 도자기를 전유럽의 소수 고객들에게 공급했다.

도자기 용품을 흠모한 여러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유독 리히텐슈타인 가 (家)가 오늘날까지 값진 도자기 수집품들을 보유하고 있게 된 데에는 이 가문이 지금까지도 가문의 맥과 재산을 운좋게 유지해 올 수 있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이 이미 15세기 유럽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 가문의 조상들이 지녔던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18세기에 피렌체-빈 합스부르크 황실 사이에서 빚어진 유럽의 정치사적인 인연에 기인한 바가 크다.

르네상스의 요람 피렌체는 이 국가도시를 호령해 오던 메디치 가문이 몰락하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의 통치 하로 굴복해야 하는 굴욕적인 정치적 입장에 처하자 피렌체의 귀족이자 토스카나 (피렌체 시가 소속해 있는 지방) 대표 외교사신이던  카를로 지노리 (Carlo Ginori) 후작은 외교적 묘안을 착안해 냈다. 처세술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상술에 정통했던 귀족 출신 지노리는 고향 피렌체가 자랑하는 유럽 최고의 도자기 제품들을 북동 유럽 합스부르크 황실과 귀족들에게 제공함으로써 피렌체는 경제적인 이득을 챙기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양국 사이의 정치적 동요 없이 정치적인 통합을 성취할 수 있었다.

역으로 유럽 북동부의 합스부르크 문화권은 피렌체 도자기 공장에 그들의 시각 문화가 담긴 도자기 용품을 주문함으로써 이탈리아 피렌체로 합스부르크의 시각 문화를 역전파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피렌체의 지노리의 능숙한 상술과 빈 합스부르크 황실의 문화적 지배 전략이 만난 문화 외교의 승리였던 것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도자 기술과 빈 합스부르크 황실의 취향이 반영된 바로크 시대 도자기 제품들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들로는 인도풍 꽃문양과 ‚시누아제리 (Chinoiserie)’로 불리는 중국풍 이미지들이었다. 어느것이 어느것이라고 구분짓기 어려울 정도로 인도풍과 중국풍적 요소들이 교묘하게 뒤섞여 유럽화된 동양풍 도자기 표면에는 대체로 화련한 색상, 비대칭적인 식물 문양,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인물 섞인 풍경화들이 즐겨 그려져 제작되곤 했다.

그런가 하면 17-18세기 바로크 유럽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특유의 패턴들도 발견되는데, 예컨대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널리 애용되던 이른바 ‚그로테스켄베르크 (Grotesenwerk)’는 상상의 동식물 문양이나 신화적인 형상들을 양식화한 정교한 문양을 뜻하는데 이후 도자기 제작을 통해서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으로 전파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유럽풍 꽃문양 (European flowers)’으로 불리는 꽃, 들딸기, 곤충 패턴도 네덜란드의 정물화의 유행과 새롭게 대두된 과학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서 부상한 문양이었는데, 특히 빈 뒤 파키에 공장에서 생산한 강열한 적색과 자주색 안료로 그려진 유럽풍 꽃문양 도자기들은 바로크 시대 도자기 중에서도 핵심 감상 포인트로 꼽힌다. 바로크 도자기는 그 어느 미술품이나 그렇듯이 작품과 관련된 배경과 소유자 및 출처가 그 작품의 진가를 더해주는 미술품이다. § All Images courtesy © LIECHTENSTEIN MUSEUM. Die Fürstlichen Sammlungen, Wien. Photo: Coppitz.

* 이 글은 본래 『오뜨』지 2006년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임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상업 화랑에서 미술관 재단으로

FONDATION BEYELER IN BA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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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젤 Art 25`94 부스에서 곡객과 전화 통화중인 에른스트 바이얼러 (Ernst Beyeler, 1921 – 2010). 뒤켠에 서있는 사람은 평론가 파스캴 촐러(Pascale Zoller), June 16, 1994. Photo: Kurt Wyss, Basel.

바젤 바이얼러 재단 갤러리

매년 6월 중순경이면 미술 전문 딜러, 미술관 관계자, 큐레이터, 미술 애호가, 컬렉터들이 앞다투어 모여드는 중요한 행사가 하나 있다. 아트 바젤 (Art Basel)로 불리는 바젤 아트 페어가 바로 그것. 『뉴욕타임즈』 신문이 바젤 아트 페어를 두고 ‚미술계의 올림픽’이라는 별명을 붙여줬을 정도로 아트 바젤은 세계 미술 시장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정평이 나 있는 국제 미술계 메카이자 최대 권위의 미술 견본 시장이다.

매년 페어 운영 위윈회의 철저한 심사과정 끝에 선정된 270여 안팎의 상업 미술 화랑들이 참여하게 되는데, 이들 화랑들은 그 자체로도 국제적인 지명도가 높은 화랑들이기도 하지만 또 그에 못지 않게 일단 이 행사에 참여한 화랑들은 행사중 적잖이 짭짤한 작품 매매 수입을 올리고 돌아가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마치 숨가쁘게 돌아가는 뉴욕 증시 시장을 연상시키기라도 하듯, 거장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고가로 전세계 미술관이나 개인 컬렉터들에게 팔려나가거나 기성 및 새로 각광받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들이 그럴싸한 가격에 매매되는 소식과 입소문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이곳은 거대한 그야말로 그림과 조각이 있는 장거리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매년 빠짐없이 현대 화랑과 국제 화랑 등이 참여하여 한국의 근현대 미술을 세계에 소개하는 일에 한 몫을 하고 있다.

작아도 귀중한 미술 문화로 가득한 도시 바젤 스위스 영토 북쪽 비르즈 (Birs) 강과 비제 (Wiese) 강이 만나는 지점인 라인강 (River Rhein) 상류 부근을 끼고 발달해 있는 도시 바젤 (Basel 또는 영어로 Basle라 표기)은 프랑스, 독일, 스위스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이들 유럽 3국의 주요 관통 도시이기도 하다. 본래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라인강가의 한 고요정막한 중세 도시에 불과했으나, 16세기 북유럽에 온통 불어닥친 기독교 개신교 종교 개혁을 피해 이민온 카톨릭파 장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장인 길드 (guild)와 무역이 번성한 경제의 중심 도시로 재탄생했다. 은행업, 제약업, 직물 무역, 정밀 기계 등 현재 스위스에서 벌어지는 무역 거래의 3분의 1 이상이 인구 고작 17만여에 불과한 이 작은 도시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강한’ 도시의 전형을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역과 번영의 도시 바젤은 그런가 하면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도시이기도 해서 옛 고도시가 포함되어 있는 그로스바젤과 산업집중 지대인 클라인바젤 그리고 그 주변 소고을들 곳곳에 널려 있는 크고 작은 공립 및 사람 박물관과 미술관만도 40군데가 넘는다. 국립 바젤 쿤스트무제움 (Kunstmuseum Basel)을 비롯하여 고미술 박물관 (Antikemuseum), 역사 박물관 (Historische Museum), 문화 박물관 (Museum der Kulturen) 등은 바젤 시민은 물론 이 도시 방문객들이라면 한 번쯤은 둘러 보았을 고정 관람 코스가 되었다.

바젤이 자랑하는 이 대표적인 박물관/미술관 목록 윗켠을 차지하고 있는 또다른 대표 주자는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 (Fondation Beyeler / Galerie Beyeler)인데, 특히 평소에 20세기 근현대 미술에 관심있는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유럽 도시 관광이나 문화 기행을 하면서 방문지 목록에서 꼭 끼워넣으라고 권장할 만한 곳이다. 바젤 도심에 있는 SBB 스위스 중앙 철도역에서 내려서 노랑색 전차 2번이나 6번을 잡아 타고 동북 방향을 15분 가량 여행하다 보면 바젤-리헨 (Basel-Riehen)이라는 작은 교외 고을이 나타나는데 여기가 바로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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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초 피아노의 설계로 지어진 바이얼러 재단 갤러리 건물의 전경. Photo: Mark Niedermann.

사설 화랑 주인들이 만든 20세기 미술관
고급 적색 포르피리 대리석, 철골, 유리를 주재료로 삼아 지어진 긴 장방형 건물이 푸른 잔듸밭 위에 고즈넉하게 펼쳐져 있는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 파이 퐁피두 센터 건축 디자인을 맡았던 이탈리아 출신의 국제적인 스타 건축가 렌초 피아노 (Renzo Piano)가 설계를 맡아서 건축물 자체만으로도 화재가 되었던 바 있기도 하다.

이곳이 재단 형식의 미술관으로 출범한 때는지금부터 7년전이지만 미술관 건물 공사를 완결하여 본격적인 미술관 형태를 띠고 일반인들을 위한 미술 문화 공간으로 문을 연 때는 지금부터 4년전 가량 전인 2000년도 가을이다. 힐디와 에른스트 바이얼러 (Hildy and Ernst Beyeler) 부부가 개인적으로 모아두었던 20세기 근대 미술품 특히 회화 작품들 200여점 되는 소장품을 팔지 않고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 센터 (Centro de Arte Reina Sofia in Madrid)에 특별 전시로 대여해 줬다가 예상외의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관 건립을 고려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은 피카소, 세잔느, 마티스, 반 고흐, 클레 그리고 워홀 등과 같이 흔히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회화의 거장들의 작품들이 다수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의 수준도 매우 높다. 바이얼러 미술관의 장기 분야는 20세기 서양 근대 미술이며 그래서 자연히 그 출발점을 인상주의 회화로 삼는다.

미술관으로 탄생하기 전 화랑으로 운영되고 있던 당시 바이얼러 부부가 화랑 개업 기념 전시로 1940년대 근대기 일본 목판화 그림, 인상주의 드로잉, 후기 인상주의 회화, 툴루즈-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의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을 선정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던 중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가 1910년에 그린 그림 『즉흥, 제10번 (Improvisation 10)』을 구입하는 것을 계기로 바이얼러 갤러리는 단숨에 20세기 미술 분야에서 주도적인 화랑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피카소 같은 유명한 여럿 거장 화가들과 개인적인 친분과 우정을 구축하기 시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값진 근대 명작들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사적 통로와 노하우를 더 근본적으로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파키소와 클레 컬렉션은 이곳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명품들이라고 하는데, 이 미술관의 주 상설 전시실을 보면 이 두 부부의 화가들과의 개인적인 친분과 소장품 관리에 관한 취향과 안목을 한 눈에 확인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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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얼러 재단 갤러리 내 모네 전시실 광경. Photo: N. Bräuning.

철도역 노동자 아들에서 성공한 화랑 주인이 되기까지
힐디와 에른스트 바이얼러 부부가 그처럼 20세기 미술의 보물들을 다수 차지하게 되기까지는 그 두 사람이 지난 50년 넘도록 개인 화랑을 운영해 오는 가운데 미술계와 미술 시장에 직접적으로 접하면서 미술품 매매에 관여할 수 있었다는 개인적인 잇점이 크게 기여했다. 화랑업을 운영하다보면 외부 일반인들은 웬만해서 접촉하기 어려운 개인 소장자들이나 작품 매입 경로에 접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유독 값지다고 판단되는 작품들은 화랑 고객들에게 팔지 않고 창고에 보관해 두었던 것이 모여 오늘날 바이얼러 미술관 컬렉션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바이얼러 부부는 고백한다.

그러니 미술 컬렉션을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잘 알고 지내면서 그림을 사고파는 사이의 화랑 주인들이 고객 모르게 창고 뒤켠에 숨겨두지 않았나 눈여겨 보시라고 권할만도 하다. ‚그 거장의 작품이 아직도 더 남은게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오늘날까지 세계 국제 미술 경매 시장에서 그 수요가 끊이질 않고 틈틈이 낙찰대 옆에 등장하는 것도 바로 비밀스런 미술품 유통 경로 속에서 돌고도는 미술품들의 생리 때문이다.

에른스트 바이얼러 씨는 바젤 철도역 노동자의 아들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키워온 예술에 대한 관심과 사업 수완을 일찌기 깨닫고 대학에서 미술사와 경제학을 공부했다. 학업중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고서 서점에서 일하던 그는 1945년 서점 주인이 갑자기 병사하자 고서점을 이어받아 운영하다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사업 수완을 동원해 1951년부터 상점 간판을 바이얼러 갤러리로 바꾸어 달고 본격적인 화랑업으로 뛰어 들었다고 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전흔으로 황폐한 유럽에서 20세기 거장들의 명품 회화 구입과 수집을 한 바이얼러 부부의 그같은 추진력은 당시 1950년대 초엽 상황으로 볼 때 분명 선견지명가적이었다.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과는 별도로, 지금도 바젤에 가면 옛 고서점이 있던 보임라인가쎄 거리 9번지에는 바이얼러 갤러리가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도 매년 아트 바젤 미술 박람회에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참여해 온 우량 사설 화랑이기도 한 그들의 바이얼러 갤러리는 20세기 근현대 회화는 물론이려니와 최근 유럽과 미국의 유력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거래해 가면서 그들의 재단 미술관의 소장 창고 살찌우기에 여념이 없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미술사 책을 장식하고 있는 여러 현대 미술가들 중에서도 유독 바이얼러 미술관이 집중적으로 수집한 분야는 1970년대 주류 일맥인 개념주의 미술과 그 이후 198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표현주의 계열 회화 와 소수의 조각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위아래가 전복된 (up-side-down) 캔버스 그림을 트레이드마크로 하는 옛 동독 출신 화가 게오르크 바젤리츠 (Georg Baselitz), 음울하고 황폐한 갈색 혹은 회색 물감을 거대한 규모의 캔버스에 두텁게 발라 그리는 독일의 안젤름 키퍼 (Anselm Kiefer) 그리고 1960년대에 이탈리아에 불어닥친 아르테 보베라 (Arte Povera) 운동의 기수로서 고대 그리스 신화를 모티프로 삼아 개념적인 작품을 구성한 루치아노 파브로 (Luciano Fabro) 등의 회화작들은 특히 바이얼러 부부가 아끼는 이 컬렉션의 대표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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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느 『노랑색 의자에 앉은 세잔느 아내 (Mme Cézanne au fauteuil jaune)』 1888-90, oil on canvas, 80,5 x 64,5 cm © Fondation Beyeler.

화랑업을 통해 얻은 바이얼러 부부의 미술 컬렉션 철학
바이얼러 미술관이 취하고 있는 20세기 및 21세기 미술에 대한 시각은 다소 보수적이라는 느낌이 들정도로 조심스러워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20세기 미술사가 이미 대체로 정리가 된 오늘날에 와서 볼때 바이얼러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20세기 작품들은 서양 근대 미술사 개론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작가 위주별로 구성된 컬렉션 구성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문적으로 다루는 분야가 20세기 근대 미술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가장 최근 벌어지는 현대 미술의 실험적 현장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바이얼러 미술관이 최근 미술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 미술에 대해 취하고 있는 조심스러운 태도는 그들이 1년에 한 두회씩 전시로 부치는 특별전들과 미술관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잘 나타난다. 과거 바이얼러 재단 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회들로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아놀드 쇤베르크의 색과 음악의 만남』 전, 『로이 리히텐스타인』 전, 크리스토와 쟝 클로드의 『나무 포장』 전, 『세잔느와 모더니즘』 전, 『마크 로드코』 전, 『칼더와 미로』 전 등 소장품 위주의 작가별 주제 전시가 주를 이루었다.

지난 199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전세계에는 현대 미술계에는 젊고 활기넘치는 신진 미술인들을 양성하고 발굴하는 실험성 강한 미술 전시장과 대안적인 전시 공간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그같은 전지국적인 문화 현상은 바젤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보다 실험성 강한 최첨단 스위스 현대 미술계와 국제적인 특별 전시를 보려면 아무래도 바젤시가 운영하는 쿤스트할레 바젤 (Kunsthalle Basel)과 쿤스트할레 발젤란트 (Kunsthalle Baselland)와 바젤 출신의 금융계 거부인 에마누엘 호프만 (Emanuel Hoffmann)이 건립한 사설 바젤 현대 미술관 (Museum für Gegenwartskunst Basel) 을 방문해 볼 것을 권장할 만 하다.

그렇다고 해서 바이얼러 미술관이 현대 미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단정짓는 것은 섣부른 오해이다. 실제로 바이얼러 부부는 마르쿠스 브뤼덜린 (Markus Brüderlin) 큐레이터 겸 미술 평론가를 두고 기존 소장품 관리를 맡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떠오르는 유망있는 현대 미술 작품 구입에 관한 자문을 얻기도 한다.

다만 최근 현대 미술계에서 스타급으로 치솟으며 유명세를 누리는 젊은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 선뜻 투자를 하기 보다는 기성 미술사와 이론에 기반하여 적어도 과거 20-30년에 걸친 학문적 검증과 시장적 가치를 인정받은 미술품을 구입하여 소장 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에 더 치중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실제로 바이얼러 부부는 현대 미술에도 관심을 두고 있으며 아직 소수이나마 현대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직 어느 작가의 무슨 작품을 갖고 있는지를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있는 상태이다. 요즘처럼 현대 미술가들의 명성과 시장적 가치가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에 자칫 현대 미술에 대한 투자는 투기로 변질될 위험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바이얼러 부부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능히 짐작을 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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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얼러 재단 미술관 건물 출입구. 렌초 피아노가 설계한 이 건물은 아르헨티나에서 수입해 온 적색 포르피리 대리석, 대형 통판 유리, 통벽이 특징이다. 배경에 보이는 녹원은 베로버 공원 (Berower Park). Photo: T. Dix.

과거 1980-90년대에 걸쳐 지금까지 하강과 상승 곡선을 타고 전개된 경제의 파도 속에서 특히 영미 문화권에서는 기업 미술 소장붐이 전에 없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나라 재정이나 공관 지원으로 운영되는 것으로나 알았던 박물관과 미술관들 말고도, 초국가적 대기업들, 유명 법률 사무소, 광고 제작사에 이르기까지 문화 투자, 세금 환원, 기업 이미지 쇄신 등을 내세워서 미술 작품을 구입에 대거 투자한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학자들도 입을 모아 정의했던 것처럼 고래로부터 미술 작품이란 그 주인의 사회적인 신분과 권력 그리고 남다르게 탁월한 미적 취미를 한껏 뽐내기 위한 ‚신분 차별화 (status distinction)’의 수단이어 왔다. 고대 시대 전쟁에서 이긴 군대는 패배한 상대 나라의 값진 보물과 문화 유산을 약탈해 가져오는 것으로 권력자의 위세를 자랑했고,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메디치가가 그 고위한 가문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을 키우고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 미술가들은 다른 직업으로 연명하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누구나 메디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이얼러 부부의 미술 컬렉션 역사와 그들만의 소장 철학은 미술을 사랑하고 미술품 컬렉션에 관심있는 많은 이들에게 현명한 미술품 수집에 대한 첩경을 제시해 줄지도 모른다. All Photos courtesy: Fondation Beyeler.

* 이 글은 본래  『오뜨 ( HAUTE)』 지 2004년 7월호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에곤 실레 풍경화가로 다시 보기

EGON SCHIELE  AS A LANDSCAPE PAINTER

에곤 실레가 탐색한 풍경화의 세계 – 저물어 가는 허장성세 바로크 여명기에 싹튼 개인주의 예술 세계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계자’ ‚비엔나 유겐스틸의 화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기수’ –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드는 세기 전환기 비엔나에 살았으며 여인과 에로스의 화가로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를 한 마디로 정의하려도 시도한 별칭들은 여럿있다. 그만큼 그는 사춘기 전후의 어린 소녀로 부터 성숙한 여인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포즈와 도발성을 표현한 여인 그림을 많이도 그렸다.

실레는 1890년에 태어났으니 역시 ‘여인 초상화가’로 불리는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 보다는 인생 면에서나 화가라는 직업적 면에서나 근 30년이나 후배뻘이 되는 셈이다. 일찌기 기성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혀서 중상층 이상 계층의 미술 애호가들과 부유한 아녀자들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리주는 일로 남부럽지 않게 넉넉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클림트와는 대조적으로, 실레는 오늘날로 치면 도색 잡지의 기능을 담당하는 에로틱한 소녀상과 여성상을 그리는 일을 주업으로 생계를 꾸렸던 도색그림쟁이였다.

Egon Schiele: Hauswand am Flusss, 1915, 110x140cm

에곤 실레 『강변의 집 담벼락』 1915년 작. Courtesy: Leopold Museum, Wien.

반면에 여자 그림을 그리는 화가 겸 제도사로 알려져 있는 실레가 풍경화도 잘 그리는 순수 풍경화가라는 사실을 아는 일반인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지고 보면, 경우는 클림트의 사례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클림트는 생전 1989년 세상을 뜬 해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화가 일생을 살면서 그린 풍경화 작품들만도 55점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 작업하는 실내 아텔리에를 벗어나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자연 휴양지를 여행하면서 숲과 호수 경치를 틈틈히 그려댄 결과였으니 그는 분명 두말할 것 없는 집착적인 다작가(多作家)였다.

클림트에게 있어서 여성화가 대체로 주문에 응해 그려진 생계용 그림 프로젝트였다고 한다면 풍경화는 여가 시간을 쪼개어 창조성을 발산하고 영감을 충전하기 위한 순수 표현의 수단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가 풍경화가로서도 가치 높은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의 고국 오스트리아를 벗어난 해외에서는 아직도 그다지 폭넓게 알려져 있지 못하다.

벌써 2년전 즈음, 이곳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에서 4개월에 걸쳐 국가적 규모의 <클림트 풍경화> 전을 열었던 것도 풍경화로서 클림트를 재조명하는 것은 물론 클림트의 풍경화에 관한 한 최대의 소장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 벨베데레 갤러리의 자부심을 과시해 보려는 국가적 차원의 의도가 엿보이는 행사였다.

실레가 30년도 채 살지 못하고 마감한 28세의 미술가 인생 동안 남긴 회화 작품들 가운데 반 수 가량이 풍경화였음은 일반인들이 아직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의 열렬한 에곤 실레 애호가 겸 컬렉터라는 점 때문에 국립 미술관의 관장이 된 루돌프 레오폴트 (Rudolf Leopold) 박사는 이 기회에 자신의 레오폴트 미술관 컬렉션이 보유하고 있는 실레의 풍경화들을 한 자리에 선보이는 것을 통해서 풍경화 화가로서의 에곤 실레를 재조명해 보는 전시를 직접 기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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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가 1913년에 그린 『크루마우의 풍경』 그림을 위한 준비 드로잉. 최근 나치에 의한 강제 압수된 유태인 가족 소유의 작품으로 판정받은 후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고가에 낙찰되어 화재가 되었다. 이 작품 뒷면에는 색정에 몰입하고 있는 여인의 옆모습 그림이 스케치되어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레오폴트 관장이 실레 풍경화 연구 과정에서 풍경화 작품과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실존 장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증적으로 확인한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해 둔 사진 자료들을 나란히 전시한다.

풍경화 연구를 위해서 장소 고증을 하는 일은 미술사가들과 전문가들이 필히 하는 연구 관례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실레 풍경화 연구와 관련하여, 레오폴트 관장이 독자적으로 해 온 고증 연구 결과와 뉴욕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 New York)의 화랑 주인 겸 전문가인 제인 칼리어 (Jane Kallir)의 고증 연구 사이에서 빚어진 정당성 문제와 연구 결과 자료 도용 주장사건은 지금도 에곤 실레를 둘러싼 미술계 스캔들중에서도 뜨거운 화재 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실레 미술을 둘러싼 정치적 스캔들
미술계 스캔들을 거론할 때마다 미술 시장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빼놓지 않고 오가는 이야기 주제는 실레 작품들의 출처 문제이다. 일례로 가장 최근에 여론화된 소식으로 작년인 2003년 6월에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실레의 작품으로 경매에 부쳐진 『크루마우의 풍경 (도시와 강 경치) (Krumauer Landschaft – Stadt und Fluss)』(1916년 작)이 소더비 경매 역사상 최고 가격인 영국화 천 2백 6십 7만 파운드 즉, 미화로 전환하면 2천 1백 십만 달러 (다시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2백 4십 2억 원)에 가까운 낙찰금에 팔려 나가서 화재를 뿌렸다.

『크루마우 풍경』은 음울하고 헐벗고 종종 노골적이고 거친 성애 장면을 묘사한 인물화를 즐겨 그렸던 실레의 여타 작품들과는 다르게 환하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엿보여서 유독 예외적인 작품이다. 실레가 자신의 모친의 고향이던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크루마우 (Krumau)라는 한 작은 도시와 그 곁을 끼고 흐르는 몰다우 강 (Moldau)을 그린 서정풍 강한 유화 그림이다. 이 유화 그림의 창작 동기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불행한 어린 성장 시절을 거쳤고 어린 소녀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잦은 곤혹을 치뤘던 문제의 사나이 실레가 어미니의 고향 크루마우를 방문하여 그 경치를 화폭으로 옮기는 것을 통해서 정신적인 평온을 찾으려 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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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모양으로 늘어선 집들』 또는 『섬 도시』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이 풍경화는 1915년에 그려졌다.

그런데 화재 거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그림이 유독 언론의 관심을 끈 이유는 이 그림이 나치에 의해서 압수되었다가 미술 시장으로 반환된 작품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크루마우 풍경』 그림은 현재가지 규명된 바에 따르면 실레와 절친한 친구 관계였던 유태인 출신의 빌헬름과 데이지 헬만 부부 (Wilhelm & Daisy Hellmann)가 화가로 부터 직접 구입한 작품이었는데, 1938년 나치군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방던 해에 강제 압수한 것이라고 한다. 나치 정권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던 1933-1948년 사이, 본 주인이 게스타포의 손에 갈취당한 이후 줄곧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의 소장품으로 1953년까지 보관되어 오다가 이 작품을 애타게 찾고 있던 헬만 부부의 눈에 띄었다.

헬만 부부는 나치로부터 압수된 미술품 반환을 위한 본격적인 법률 절차를 거쳐 승소한 후 이 작품을 반환받았고, 이후 헬만 부부의 후손들이 작년 소더비 경매에 부쳐 다시 미술시장에 내 놓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은 소더비 경매소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분실 미술품 반환을 위한 연구소 및 법률담당부가 자체적인 분실 미술품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법적인 반환 요구 노력 끝에 마침내 그림 도둑들로부터 되찾아 온 법적 케이스로도 유명하다.

누군가 미술 작품의 역사는 작품을 창조한 화가가 완성하기 까지의 역사와 그 작품이 여러 주인들의 손에서 손으로 거쳐가는 소유자의 역사 두 가지를 갖고 있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미술 작품과 작품을 소유하는 주인 사이의 관계는 참으로 변화무쌍하기도 하지만 또 그에 못지 않게 끈질기기도 한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소더비가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나치 시대 분실된 미술품 회복 운동은 경매에 부칠 명작들을 재발굴하여 경매로 부칠 수 있는 경제적 이득 기회를 재창조하는 셈이고, 또 한 편으로는 나치의 유태인 핍박 끝에 미술품을 강제로 빼앗기거나 손실한 유태인 후손들이 조상들을 대신해 한풀이도 하고 잃어버렸던 미술 명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주는 셈이다.

바로 그런 연유로 해서 특히나 오스트리아의 경우, 나치 시대 유태인들로 부터 강탈했던 미술품들 특히 그 중에서도 오늘날 기록적인 고매매가를 홋가하는 클림트와 실레의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서 골칫거리를 앓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9월 16일부터 대중에게 공개될 『실레 풍경화』 전에는 출처 문제에 휘말릴 만한 출품작들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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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도시』 1911년 작. 실레는 어린 시절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늘 어머니에 대한 애정 부족을 느끼며 성장했다고 전해진다. 그같은 성장경험은 실레가 성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 올 80세를 맞는 노장의 레오폴트 관장은 자신의 실레 컬렉션은 거의 대부분 경매와 시장에서 구입한 것임을 강조해 마지 않는다. 하지만 그도 한창 실레 작품들을 쫏아 다니며 사모으는데 정신이 없던 전후 젊은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실레 컬렉션의 가격은 이루 다 셈할 수 없을 만큼 기하흡수적인 비례로 폭등했음을 기꺼이 시인한다.

실레 미술품 걸작인가 미술 시장의 투자 대상인가?
미술 시장에서 보나 대중적인 인기도 면에서 보나 실레가 그토록 화재를 몰고 다니는 화가인 만큼 그의 작품 가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에 매매되고 있다.

일례로, 올 여름 뉴욕에서 열렸던 소더비 경매에서 실레가 그린 1913년 한 점의 드로잉 작품 『연인들』이무려 미화 3백5십만 달러 그러니까 우리돈으로 하면 4십억에 낙찰되어 뉴욕 출신의 거부 마이클 스타인하트에게 팔여 나가서 「뉴욕 타임즈」 紙가 서둘러 보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가 하면 유명 경매소를 통해서 값비싸게 댓가를 치루고 구입한 실레 드로잉이 알고 보니 희미해져 버린 원작 실레 그림 위에 전문 위조꾼 화가에 의해 선명하게 덧칠이 된 후 본래 있지도 않았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ES’ 라는 서명을 임의로 그려 넣은 일로 해서 그림 주인이 경매 회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건 사건이 벌어지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게다가 실레의 유명세는 미술 컬렉터들의 투자 가치 아이템으로서도 효자 노릇을 톡톡이 한다. 마이클 스타인하트는 올 여름 소더비에서 거머쥔 4십억 짜리의 실레 드로잉 외에도 작년에 이미 14점의 드로잉을 화장품업계의 거물인 로널드 로더 (Ronald Lauder)로부터 우리돈 약 1백 4십6억 여원에 이르는 돈을 주고 구입을 했으며, 스타인하트에게 실레 드로잉들을 온통 팔아버린 로널드 로더는 다시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액수에 달하는 돈을 주고 실레 전문 딜러인 세르게 사바르스키로부터 실레의 수채화 36점을 사들여 자신의 컬렉션을 보충했다.

게다가 이들 큰손 컬렉터들은 보다 많은 낙찰가로 작품을 처분하기 위해서 소더비와 크리스티 등 유수의 국제적인 미술품 경매소들을 오가면서 보다 비싼 가격으로 미술 작품을 매매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는데에도 놀라운 수완을 벌이곤 한다. 여전히 미술 경매장에서 최고 낙찰가로 경매업자들을 기쁘게 해 주는 분야는 20세기 초엽 미술과 인상주의 계열이다. 모딜리아니, 마티스, 반 고흐, 피카소와 더불어 실레 (그리고 동시대인 오스트리아인 화가인 클림트를 포함해서)는 의문의 여지없이 최고의 핫 아이템으로 그 인기는 식을줄 모른다.

실레가 오늘날 환생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가로 치솟은 자신의 작품 가치를 본다면 뭐라 했을까? 28살 나이에 제1차 대전 직후 비엔나 시 전역에 나돌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갑작스럽게 세상을 하직한 젊은 실레는 가난, 고통, 질병, 성적 갈등이 잔뜩 표현된 여인 그림들을 그려 팔아서 생계에 일부 보태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망하기 바로 직전 그는 남달리 뛰어난 재능과 개성이 서서히 비엔나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부와 명성의 궤도로의 진입을 막 앞두고 있던 참이었다.

소위 말하는 ‚성공한 예술가’로서 역사에 남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작품을 꾸준하고 일관적으로 작업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성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을 만큼 장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 영국의 미술 평론가 앨런 보네스의 지적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만일 실레가 좀 더 오래 살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오늘날 미술 경매소에서 오가는 가격 만큼은 안되더라도 훨씬 지위 높고 윤택한 예술인으로서의 여생을 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Egon Schiele: Versinkende Sonne, 1913, 89x90,5cm

에곤 실레의 『지는 해』 1913년 작. Courtesy: Leopold Collection, Wien.

풍경화는 내면적 감정 세계의 표출
 레오폴트 관장이 실레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던 25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구입한 작품은 다름아닌 풍경화였다고 한다.

오스트리아가 제2차 대전 종전을 뒤로 한채 사회적 혼란과 경제 재건에 한창이던 1950년 여름, 당시 의과 대학생이던 레오폴트 관장은 실레의 친구였던 아르투르 뢰슬러 (Arthur Roessler)로 부터 풍경화 한 점을 맞닥드리게 되었다.

나이 많은 뢰슬러 씨는 지갑도 얇은 애송이 미술 수집가에게 ‘해가 지는 경치’를 담은 한 편의 풍경화를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현재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실레의 1913년 유화 작품 『지는 해 (Versinkende Sonne)』이다. 산과 숲을 배경으로 해질녘 저녁놀이 지는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 그림에서 보는이는 이루 설명하기 힘든 울적함을 느끼게 된다. 때는 이미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나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해서 을씨년스러운 냉냉함까지 전달된다.

이 작품은 그로 부터 7 년 후에 뢰슬러 씨가 레오폴트 관장에서 선물을 한 계기로 레오폴트 소장 목록에 포함되었다. 그대신 그날 레오폴트 관장은 『죽은 도시 (Die tote Stadt)>(1910년 작)를 사서 집에 가져왔는데 이 그림도 이번 전시에서 다시 공개된다. 앞에서 언급된 소더비에서 경매된 화재의 작품 『크루마우의 풍경』을 그리기 직전에 그려 뒀던 습작 스케치 『크루마우』(1913년 작)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레오폴트 관장은 실제로 이 그림에 나타난 집 번지수와 실제 크루마우 도시의 집 번지수를 일일이 비교판별해 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에곤 실레가 살았던 19-20세기 전환기는 절대 군주체제의 잔재랄 수 있는 집단적인 허식성과 새로 대두되기 시작한 근대적 개인주의가 전면 충돌한 긴장의 시기였다. 그래서 20세기로의 전환점에 선 비엔나에서는 근대주의라는 막을 수 없는 시대적 대세에 잠시나마 저항하기 위한 고전주의자들과 역사주의자들의 복고주의 몸부림이 일기도 했지만 역시 시대의 흐름은 개인주의라는 근대적 신사고로 흐르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실레의 미술 세계는 당시 비엔나의 대기에 가득하던 시대 정신 (Zeitgeist)의 반영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에 미술 창조의 원동력을 개인의 내면 세계로 눈을 돌려서 폭발적이고 격렬한 필치로 표현한 화가들은 실레 말고도 또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동요와 불안으로 가득한 사회상을 반영하기라 하듯 오스카 코코시카 (Oskar Kokoschka)는 마치 전기를 맞아 전율하는 듯해 보이는 형상으로 인물과 풍경을 묘사했다.

자기 자신의 통쾌하게 비웃는 유령처럼 묘사한 자화상으로 유명한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은 자기 내면과의 투쟁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미술이 내면적 갈등에 대한 외면적 표출의 수단으로서 활용된 이 시대는 성과 무의식을 주축으로 한 프로이트의 심리분석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실레의 풍경화를 바라 보고 있노라면 여성화에서 다름없이 발견되는 강렬대담하면서도 극도로 신경질적인 필치가 여지없이 발견된다. 실레는 웬만해서는 자기가 그린 그림에 대한 복사판을 그리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굳이 모사본을 그려야 했을 경우라도 일부러 변형을 여기저기 가해 그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바로 그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런던에 있는 말보로 갤러리에서 영국에서는 최초로 열린 에곤 실레의 전시회를 본 한 일간지 기자의 말은 실레 미술이 지니는 역사적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사치오와 모차르트의 경우 처럼 실레는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미술사에 남긴 흔적은 충분했다“라고. 이번 『실레의 풍경화』 전은 [2003년] 9월17일부터 내년 초인 2004년 1월31일까지 계속된다. All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이 글은 2003년 10월호 『오뜨』 지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Francesca von Habsburg and T-B A21

Francesca von Habsburg and T-B A21(Thyssen-Bornemisza Art Contemporary Space in Progress)

Art collecting has throughout history been an exclusive pastime for aristocrats and the wealthy. After World War II in Austria, the new social democratic government took over this role, creating a climate of relative liberalism in which most art projects were supported by the federal government. Since the takeover of the conservative-right wing coalition in 2000 and the forces of the free market which accompanied this, an increasing number of museums and public galleries have complained of being starved of funding.

In this situation it appears to have been a logical move for Francesca von Habsburg, wife of the grandson of the last Austro-Hungarian monarch Franz Joseph II, to have chosen Vienna once again as a location of aristocratic collecting. To paraphrase Hans Christian Andersen, the empress got a new dress, and it’s name was T-B A21. The heritage of art collecting in Francesca von Habsburg’s family begun with the legacy of her grandfather Heinrich Thyssen, an ardent collector of 17th and 18th century old masters and her father Hans Heinrich Thyssen-Bornemisza, a Forbes list billionaire, who built up the world’s second largest private art collection, which is now installed in the Museo Thyssen-Bornemisza in Madrid.

Francesca von Habsburg is now expanding on this family tradition, utilizing qualities that are scarce in a scene dominated by the interests of politics and the free market: audacity, taste, and, of course, means. Unlike her ancestors though, she follows a distinctively more contemporary style. Located on the prestigious Himmelpfortgasse, near Seilerstatte in the city center, an area tightly packed with government administrative offices and home to several well-established Viennese commercial galleries, at a first glance T-B A21 exudes an air of understatement considering its collection of some 400 contemporary art works by dozens of international artists.

“I have come from an extremely traditional view on collecting based on the generations before me and what my father achieved,” Habsburg states. For her and the Thyssen family before her, an art collection is about the collector’s vision, not just about individual art works. She collects works by both established and emerging artists whom she values as those that will stand the test of time and testimony for many years to come. In order to achieve that, she commissions new works or projects in the context of TB-A21-organized exhibitions rather than buying individual works that have been already widely publicized.

T-B A21 is now arguably the most noteworthy private collections with a contemporary and conceptual focus in Austria, comparable only to the insurance-owned Generali Foundation and the BAWAG Foundation, which is run by one of the largest banks in the country. Also, in Vienna most public art institutions and projects are government funded, and thus are heavily influenced by their policies. T-B A21 however has clearly set out to be an important private patron with a bureaucratic upper hand. For example, the spectacular installations comprised of heaps of rubbish and construction materials by John Bock and Christoph Schlingensief which were displayed last summer, had they been in normal museums or commercial galleries, could have had faced with much difficulty convincing Austria’s notoriously rigid Building Regulation Authority (known as the Baupolizei) for safety reasons.

On the 20th of April, 2004, T-B A21 launched its official opening with an audio-based installation exhibition by Canadian, Berlin-based multi-media artist Janet Cardiff. Since then, it has mounted some of the most experimental contemporary art shows in Vienna. Puppets were a familiar sight last summer with Dan Graham, Tony Oursler and Rodney Graham’s puppet rock-opera Don’t Trust Anyone over Thirty (2005) which was commissioned by T-B A21 and presented at the annual Vienna Festival. The accompanying show at T-B A21, ‘Puppets and Heavenly Creatures,’ exhibited works by these artists as well as Paul McCarthy, John Bock and Jason Rhoades. Recently in Deseos Fluidos – Brazilian and Cuban Perspectives between Reality and Fantasy Brazilian artist Ernesto Neto showed his Humanoídes (2001), figurine sculptures made of Lycra and Styrofoam that visitors were invited to inhabit and explore. Deseos Fluidos was a colorful and creative potpourri with a distinctively sun-drenched and ironic quality, providing a much needed artistic antidepressant, especially during Vienna’s dreary winter days. While Brazilian Rivane Neuenschwander showed an unpretentious installation with colored tape and balls, perhaps the most outstanding and humourous piece was Portaviones (2005), a swimming pool which had been converted into a battleship (or maybe vice versa), by Cuban artist group Los Carpinteros.

Art in T-B A21 is also tailor-made on imperial order as the gallery likes to commission works from hip artists. For example, in March last year, Germany’s rising star Jonathan Meese staged a multi-tech opera performance at the Unter den Linden State Opera House in Berlin. Christoph Schlingensief also showed the spooky installation Animatograph (2005) and will move his blankets and slide projectors to both Neuhadenberg and Namibia. Olafur Eliasson presented his conceptual installation Your Black Horizon (2005) at the temporary pavilion designed by David Adjaye at the Venice Biennale and in December Candice Breitz exhibited her homage to Bob Marley. From April to July this year Kutlug Ataman will present his 40 channel video installation Küba (2005-6), on an artistic river cruise from Istanbul to Vienna, certainly a timely piece considering that Vienna last summer was full of right-wing election propaganda and slogans such as ‘Vienna must not become Istanbul.’

T-B A21 labels itself as a space for the contemporary. But the new today is old news tomorrow, and some of the better pieces in Francesca’s collection might well manage to join the family collection in the Museo Thyssen-Bornemizsa in Madrid.  ‘Look at the Emperor’s new clothes. They’re beautiful!’ people clamored in Andersen’s tale. Francesca’s gallery is really beautiful, and colorful at that.

* This article originally appeared in Contemporary 21 Special Issue on Collections no.80 in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