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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즈

VELÁZQUEZ IN VIENNA

작년 2014년 10월 말 비엔나의 미술사박물관에서는 바로크 시대 스페인 궁중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즈 전을 열어 스페인 합스부르크 황실가 가족들의 모습을 초상화로 다시 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오늘날 대중 미술사 서적 마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던 화가 겸 거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디에고 벨라스케즈. 19세기말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벨라스케즈를 가리켜 ‘화가중의 화가(painter of painters)’라며 프랑스 인상주의의 선구자라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재조명 받기 전까지 실은 서양 미술사에서 오래 잊혀져 있던 유럽 역사 속 궁중화가중 일인에 불과했다.

Workshop of Diego Velázquez 『King Philip IV of Spain』 c. 1653–1656/59, Oil on canvas, 47 x 37,5 cm ©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디에고 벨라스케즈 아텔리에에서 화가와 조수들이 합작해 완성한 펠리페 4세의 초상. Workshop of Diego Velázquez 『King Philip IV of Spain』 c. 1653–1656/59, Oil on canvas, 47 x 37,5 cm ©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20세기 근대주의 대두 이전까지 절대주의 귀족주의가 지배하던 유럽에서 미술을 포함해 각족 공예, 음악, 문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창조 예술 분야에서 먹고 살아야 했던 재능있는 예술가들 사이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귀족집안, 왕가, 황실, 교회에 전속돼 권력자를 섬기며 작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예스럽고 안정된 생계 수단이었다.

천재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서로 경쟁하며 메디치 가문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활동했고, 모차르트가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로 올라와 합스부르크 황실 음악가가 되길 그토록 갈망했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유럽이 배출한 걸출한 천재 예술가들은 소명적으로는 신이 내려준 재능을 한껏 발휘해 천상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구현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데 혼신을 바친 위대한 창조가들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생활인이었기 때문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즈(Diego Rodri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는 스페인 남부 도시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태생이나 포르투갈에서 이민온 유태인계 포르투갈 부모 밑에서 카톨릭 교회 세례를 받았으며 소귀족 출신이었던 이유로 해서 벨라스케즈는 당시 스페인을 한바탕 공포로 휘몰아 넣었던 스페인 종교 재판으로부터 수난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유복한 환경에서 일찍이 갓 열 살이 넘은 나이로 철학책을 보고 화가 프란치스코 파체코(Pacheco) 수하에서 그림그리기를 공부하며 화가 수련을 받기 시작했다.

Diego Velázquez 『The Waterseller』 c. 1622, Oil on canvas, 107,7 x 83,3 cm © London, Apsley House, The Wellington Collection English Heritage

벨라스케즈의 초기 작품 『물장수』는 허름한 연인숙, 주점, 주방 풍경을 묘사한 보데고네스 장르의 그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바로크 시대 화가 카라바죠의 영향이 엿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Waterseller』 c. 1622, Oil on canvas, 107,7 x 83,3 cm © London, Apsley House, The Wellington Collection English Heritage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 했듯, 스승 프랑치스코 파체코 보다 그림그리는 재능이 한층 특출났던 갓 스무살 넘긴 젊은 벨라스케즈는 스승의 딸 후아나와 결혼하자 마자 그 연줄로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산티아고 교회를 거쳐 곧바로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궁중으로 그 이름이 알려졌다. 때는 마침 1922년 겨울, 합스부르크 왕가 필리페 3세와 4세가 가장 아꼈다던 왕실전속화가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가 세상을 떠서 그 자리를 메꿀 새 궁중화가 물색작업이 한창이던 시기. 절묘한 시운과 스승이자 장인 파체코의 연줄의 축복을 한껏 받고 24세의 디에고 벨라스케즈는 초봉 50 두카트(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200-250 만원) 받는 궁중전속화가로 전격 발탁된 이후 예순살로 세상을 뜰 때까지 40년 넘게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궁중화가로 한평생을 봉사했다.

모든 궁중화가의 최우선 임무는 두 말 할 것 없이 왕과 왕가 가족과 친지들의 공식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다. 요즘과 달리 장거리 여행을 자주하기 어렵던 과거, 스페인 마드리드와 오스트리아 비엔나 두 곳에서 2중 왕실을 거느렸었던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황실은 멀리 떨어져 있던 유럽의 두 수도 사이 가문 친지들의 모습을 수시로 초상화로 그려서 주고받는 것으로써 안부를 확인했고 차후 서로 결혼하게 될 어린 새 후손들의 모습을 미리 확인했다. 오늘날 벨라스케즈의 명작 알려져 있는 작품들 다수는 마드리드의 합스부르크 왕실 가족 초상화이고 그러하다보니 그의 대표작 다수는 스페인의 프라도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Diego Velázquez 『Infante Baltasar Carlos with a Dwarf』 1631–1632, Oil on canvas, 128 x 101,9 cm © Boston, Museum of Fine Arts

펠리페 4세 왕과 이자벨 여왕 사이서 태어난 2살박이 발타자르 카를로스 왕자와 난장이 궁정광대가 있는 2인 초상화. 펠리페 4세는 이 귀한 아들 초상화를 벨라스케즈에게 특별히 맡겨 그렸는데 베네치아파 르네상스의 거장 화가 티치아노의 색감과 구도에서 영향받은 흔적이 뚜렸하다. Diego Velázquez 『Infante Baltasar Carlos with a Dwarf』 1631–1632, Oil on canvas, 128 x 101,9 cm © Boston, Museum of Fine Arts

지금도 비엔나 국립 미술사박물관에 남아있는 벨라스케즈의 합스부르크 왕가 초상화 작품들은 마드리드 왕실에서 선물로 보내왔던 가족 초상화들이다. 벨라스케즈를 궁중화가로 간택한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50대 초엽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비롯해서,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초상, 오늘날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펠리페 4세 왕의 딸 인판타 마가리타 공주의 성장과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초상화 연작들중 네 편을 통해서 벨라스케즈는 왕실 내 신하들간의 권모술수, 30년 전쟁과 경쟁 권력들로부터의 도전과 위헙, 병약하던 어린 왕자와 공주들의 건강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호사롭게 잘 다듬어지고 차밍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으로 왕가 일가족과 친지들을 그려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가 찬연하고 말끔하게 그려낸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초상화들의 이면엔 이 가문에 드리워질 암울한 미래가 감쪽같이 감춰져 있다. 벨라스케즈의 고용자 겸 후원자이던 펠리페 4세는 실은 스페인 왕국 최후의 왕이된 비운의 인물이었다. 포르투갈이 스페인 영토에서 분리독립해 나가고,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저마다 세력을 키워가자 한때 유럽의 주도 세력이던 스페인 왕국은 점차 군사적, 외교적, 문화적 권력 무대에서 종결을 순간을 맞고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가문은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후계자 생산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권력 분산을 막고 권력을 통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6백 여년 집권기 동안 가족친인척끼리만 결혼하는 근친혼인을 고집한 끝에 발생된 유전질환과 건강적 장애가 그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엄격한 위계체제와 근엄한 분위기라 내리누르는 궁정에서 해소 역할을 했던 궁정 광대. 벨라스케즈의 눈에 비친 광대란 실없음, 어리석음, 광기를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Buffoon Juan de Calabazas (Calabacillas)』 c. 1638, Oil on canvas, 106 x 83 cm ©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엄격한 위계체제와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가 내리누르는 궁정에서 긴장 해소 역할을 담당했던 궁정 광대. 벨라스케즈의 눈에 비친 광대란 실없음, 어리석음, 광기를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Buffoon Juan de Calabazas (Calabacillas)』 c. 1638, Oil on canvas, 106 x 83 cm ©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왕실 최후의 왕 펠리페 4세가 왕권 후계자 생산을 간절히 기다리며 새로 태어난 왕자와 공주들을 비엔나 합스부르크 왕실로 혼인시켜 대권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펠리페 4세와 첫 아내 이자벨 여왕과 오랜 노력 끝에 탄생한 첫아들 발타자르 카를로스는 안타깝게도 16살 나던 해에 갑작스럽게 죽었는데, 열 살 난 어린 소년의 발타자르 카를로스 초상화와 펠리페 4세가 간절히 기대했던 왕권후계자 아기 펠리페 프로스페로의 초상화는 비엔나 합스부르크 왕실에 보내 결혼을 제안하기 위해 특별히 벨라스케스의 손으로 그려졌다.

발타자르 카를로스의 누이이자 첫 딸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혼시키는 것으로서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을 잠재웠다. 펠리페 4세의 둘째 부인 마리아나 여왕과 낳은 인판타 마가리타의 2세, 5세, 8세 때의 초상화들은 장차 레오폴트 1세 황제가 될 비엔나 합스부르크 황태자에게 일찍부터 결혼을 제안하기 위해 보낸 맞선용 초상화였다.

번뜩이는 독창성과 독특한 스타일이 폭발했던 17세기 유럽문화 황금기 바로크 시대, 궁중화가 벨라스케즈는 과연 회화를 재정의한 거장 화가의 대열에 설 만한가? 비슷한 시기 로마에서 활동한 카라바죠의 격정과 파격적인 시각, 스페인 출신의 바로크 거장 주르바란의 강렬한 영혼성, 인간조건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표현한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의 깊이와 승화력, 베르메르의 고요하고 잠잠하되 애상적 시적 감성은 벨라스케즈의 회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허나 초기 시절 그가 즐겨 그렸던 ‘보데고네스(bodegones)’ 혹은 주방 정물화 그림들 중에서 『물장수(Waterseller)』 에 나타난 대담한 화면 구도라든가 유럽 미술사상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 여성 누드라 불리는 『화장하는 비너스(일명 로커비 비너스)』 같은 작품은 마네 같은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화면구성법을 구축하는데 영감을 주었을 만하다. 그런가하면 20세기 영국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벨라스케즈의 초상화 속 숨막히는 격식을 표현주의로 재해석해 초상 속 모델들을 해방시켰다.

Diego Velázquez 『Infanta margarIta』 (1651–1673) In a WhIte dress, c. 1656.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다섯살난 마가리타 공주. 이 초상화는 비엔나 합스부르크 황실에 사시는 할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 황제께서 보시라고 보내진 손녀 초상화였다. 거울에 반사되어 반대방향으로 서 있는 이 모습은 『시녀들』 그림에 재활용되었다. Diego Velázquez 『Infanta MargarIta』 (1651–1673) In a WhIte dress, c. 1656.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궁중화가 벨라스케즈의 평생 목표는 왕실 위계 속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작위를 받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독이 베네치아파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를 깊이 흠모했는데 특히 티치아노가 평생공로를 인정받아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 카를 5세로부터 작위 수여받은 것을 부러워했다. 실제로 벨라스케즈는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659년 필립 4세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고, 그 흔적은 그 유명한 그림 『시녀들(Las Meninas)』(프라도 박물관 소장)에 빼곡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화가 자신의 자화상에 빨강색 십자가로 기록되어 있다.

미셸 푸코의 책 『사물의 질서(Les Mots et Les Choses)』(1966년) 서론의 상세한 분석대상이 된 이래 무수한 학자들 사이의 논쟁의 주제가 된 그림 『시녀들』은 궁중화가로서 성취감에 찬 디에고 벨라스케즈의 자족한 자아를 한 폭의 그림으로 옮겨놓은 자랑스런 최종 이력서였다. 커리어리스트 디에고 벨라스케즈는 더도덜도 아닌 궁중 화가였고, 그의 그림은 오로지 그의 후원자 만을 위한 것이었다. 《벨라스케즈》 전은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에서 2014년 10월28일부터 2015년 2월15일까지 열린다. Images courtesy: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한 천재의 초상 – 렘브란트

REMBRANDT 400 in Amsterdam

화가, 데상가, 판화가 –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 시대(Dutch Golden Age)라고 불리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으로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거장 화가이다. 2006년은 거장 렘브란트가 태어난지 400년째가 되는 해로, 고국 네덜란드에서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세계적인 화가의 생일을 맞아 대대적인 전시회 및 문화 행사를 기획했다.

렘브란트의 작품들이 대거 소장되어 있는 암스텔담의 릭스무제움(Rijksmuseum)을 비롯해서 반 고흐 미술관, 렘브란트의 옛 거주집을 박물관로 전환한 렘브란트하우스(Rembrandthuis)는 물론이고 런던의 덜위치 갤러리, 베를린의 고전 미술관,  헝거리 부다페스트 미술관, 그리고 파리 주재 네덜란드 문화원인 커스토디아 재단(Fondation Custodia) 등 유럽 전역에서 거장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은 물론 그가 살던 17세기 네덜란드와 유럽의 정황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유익한 전시들이 올 한 해와 내년 초에 걸쳐서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는 신비와 마력으로 현대인들을 사로잡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그림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22세의 젊은이로서의 렘브란트 자화상. 1628년 작품. © Rijksmuseum, Amsterdam.

“세세한 것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지닌 화가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위대한 화가의 재능은 경이로운 것이다. 신은 위대한 화가에게 재능을 선사하여 그의 그림을 통해서 여느 사람들은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르네상스 시절 독일 출신의 회화의 거장이자 렘브란트의 선배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는 말한 적이 있다.

천재라는 개념에 대한 다분히 르네상스적인 정의로 들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신화 알레고리, 성서 해석, 역사화,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여러 장르는 넘나들며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한 렘브란트의 미술 생애는 끝없고 정처없는 탐험이었고 누가 뭐라해도 분명 탁월한 것이었다.

한 인간의 인성은 그가 타고난 여러 속성과 자질을 모두 도합한 것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말이 있다.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탁월한 기술적 재능 외에도 밝고 어두운 빛의 강한 대조를 통한 극적 분위기와 심오한 내면세계가 느껴지는 그림 속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오늘날까지도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적 조건(human condition)을 되돌이켜 보게 만드는 보편적 위력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패기 넘치는 22세의 곱슬머리 젊은이의 모습에서부터 삶의 무게와 내면적 고뇌를 머금은 60대의 노인의 모습까지 화가의 초상을 화폭으로 옮긴 자화상의 명인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렘브란트는 지금도 그의 삶과 작품 속에 깃든 신비에 매료를 느끼는 수많은 낭만파 회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사랑 받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네덜란드가 국가적으로 지정한 ‘렘브란트의 해’이다. 올[2006년] 여름 7월15일 토요일,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텔담과 화가의 고향 라이덴(Leyden)에서는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렘브란트의 400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내세운 국가적 문화 행사가 흔히 그렇듯 ‘렘브란트의 해’를 맞는 네덜란드에서는 렘브란트 스파게티와 초컬릿 등 렘브란트를 내세운 마케팅 홍보로 관광객 유치와 문화 상품 매출에 열을 올리는 상혼도 발휘되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어머니”(라이덴 라켄할 시립 박물관(Municipal Museum of Lakenhal), 올 3월19일까지 전시 마침) 展, “렘브란트와 카라바죠”(릭스무제움, 올 6월 18일까지 전시 마침) 展, 그리고 가장 최근 일반 관객에게 문을 연 “렘브란트-천재성을 향한 탐구”(현재 독일 베를린 고전미술 박물관(Gemäldegalerie Berlin)) 展을 통해서 미술계는 렘브란트에 얽힌 신비를 해독하고 이 거장이 예술 한 평생 동안 이룩해 놓은 미술사적 성과를 차분하게 종합 재평가 해 보는 기회로 삼고 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역시 네덜란드 출신의 동료 거장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의 경우와는 다르게 렘브란트의 일대기와 행적은 기록으로 잘 보존되어 있고 따라서 렘브란트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이미 많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의 일생과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도 속시원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은 남아 있다.

흔히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렘브란트는 그의 극적이고 신비로워 보이는 회화 작품들만큼 평생을 빈곤과 투쟁하며 그림을 그렸던 낭만적 화가였을까? 렘브란트는 유태인이었나? – 생전 화가는 유태인 출신의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와 랍비 메나세 벤 이즈라엘과 친하게 지냈으며 <유태인 신부(The Jewish Bride)> 같은 유태인 주제의 작품을 여러편 남겼다는 사실에 미루어 그가 유태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일각의 추측이 일기도 했는데, 이 같은 의문점을 화두로 삼아 네덜란드의 유태인 역사 박물관(Jewish Historical Museum)에서는 오는 11월부터 내년 초까지 “유태인 렘브란트(The Jewish Rembrandt)’라는 전시가 개장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렘브란트는 수많은 제자와 화실 조수들의 도움을 많이 본 화실 지휘자였다. 그로 인해서 ‘렘브란트의 작업실 (Rembrandt’s Laboratory)’로 불린 대규모 아텔리에를 운영하며 제자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밀려드는 그림 주문에 응했는데, 그 결과 지금도 렘브란트의 진품(眞品) 판정 기준을 세우는데 전문가들을 혼란케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in a Cap』 1630 Etching, 51 x 46 mm. Gift of J. P. Morgan, Jr.

눈을 끄게 부릅뜬 서른살 난 화가의 자화상 또는 원제 『모자를 쓴 화가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a Cap)』 1630
Etching, 51 x 46 mm. Gift of J. P. Morgan, Jr. © The Morgan Library & Museum.

그래서 렘브란트와 그의 작품세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단체인 램브란트 연구 프로젝트(Rembrandt Research Project)을 이끌고 있는 에른스트 반 데 벤터링(Ernst van de Wentering) 관장은 “그동안 대중 매체를 통해서 미화되어 오던 신비로운 인물로서의 렘브란트의 이미지를 접어두고 신선한 시각으로 이 화가의 예술적 창조력과 내면적 동기가 어떻게 작품으로 표출되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르멘조온 반 라인 렘브란트(Harmenszoon van Rijn Rembrandt)는 1606년 7월 15일 라인강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 라이덴(Leiden)에서 제분업을 하는 중산층 집안의 열 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강가 주변에 그림처럼 서 있는 풍차가 있는 전형적인 목가적 풍경 속에서 성장한 그는 학자가 되길 기대했던 부모의 바램에 따라 라틴어로 학습하는 인문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나 결국 맘 속에 품어왔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17세부터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반 쉬바넨부르흐 밑에서 기초 그림 수업을 받은 후 보다 더 큰 물에서 그림을 배우고자 마음먹은 그는 수도 암스텔담으로 가서 당대에 유명했던 역사 화가 피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 밑에서도 6개월간 수학했다. 렘브란트의 불후의 명작이자 현재 릭스뮤제움의 한 전시실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대작 단체 초상화 <야간 경비(The Night Watch)>는 이 때 배운 역사화 구성 능력이 렘브란트의 본령인 초상화술과 한데 어우러져 창조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군계일학을 짚어내는데 능했던 당시 눈썰미 좋은 귀족들 덕분에 젊은 렘브란트의 남다른 재주는 일찍이 발굴되었다. 방년 19세의 청년 렘브란트는 분명 놀라운 재능을 발휘해서 고작 3년 반 가량의 그림 수업을 마감하고 고향 라이덴으로 귀향하여 동료 화가인 얀 리벤스(Jan Lievens)와 동업하여 개인 화실을 열었다. 22세 되던 해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왕가의 눈에 띄어 헤이그 궁전의 실내 장식용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이는 직업적 화가 렘브란트가 수주한 그림 주문 제1호이자 동시에 암스텔담에서 온 헨드릭 윌렌부르크(Hendrick Uylenburgh)라는 유력한 초상화 딜러와의 인연을 맺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청춘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했던가. 환희 펼쳐질 성공한 화가로서의 미래를 앞두고도 <22세의 젊은이로서의 자화상>(1628년 작)은 젊은 렘브란트의 또다른 내면을 암시한다. 렘브란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극적인 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 효과 즉, 강한 명암의 대비 기법이 잘 나타나 있는데, 자유분방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앳되어 보이는 통통한 뺨과 대조적으로 어둡게 가려진 눈매는 젊음과 촉망 받는 미래를 앞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떨고 있던 화가의 내면 한구석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성공적인 직업 화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위하여 암스텔담에서 화실을 개업한 방년 25세의 렘브란트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634년에 그의 아트딜러인 윌렌부르크의 여사촌 사스키아(Saskia)와 결혼했다. 사스키아가 귀족 출신의 여성이라는 잇점 때문에 렘브란트는 결혼 후 상류층 고객들로부터 그림 주문을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수주한 그림 주문 덕택에 큰 돈을 벌기도 했다.

렘브란트가 1656-58년 경 그린 이 자화상은 50살을 갓 넘긴 화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 Kunsthistorischesmuseum. Wien.

허나 비싼 집을 구입하고 값비싼 골동품과 옷을 사들이는 일을 좋아했던 화가의 낭비벽 때문에 곤혹을 치루기도 했는데, 지금도 네덜란드 관청 자료실에는 과거 렘브란트가 가족, 채권자들, 미술 후원자들은 물론 모델들과 얽혀 들었던 수십 건의 금전적 분쟁 기록들이 남아 있어서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미 서른 무렵의 나이에 결혼, 직업적 성공과 유명세, 사치스러운 생활을 경험한 그는 <눈을 크게 뜬 자화상>(1630년 작)이라는 판화 속에서 놀람, 환희, 슬픔 등 모순적인 인생의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묘하게 뒤섞인 채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렘브란트의 개인사를 연구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의 사생활은 그다지 본받을 만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렘브란트는 갓 서른을 맞는 아내 사스키아를 폐결핵으로 때이르게 잃었고 그 이후로 10년 가까이 붓을 들지 못했을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를 앓았다. 혹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이 그 같은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하지만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스키아가 죽은 후 렘브란트는 아들의 보모로 집에 들인 게르체 디륵스(Geertje Dircs)라는 여성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전 아내 사스키아의 사촌이자 딜러 윌렌부르크가 렘브란트로부터 그림 주문을 끊은 것이 렘브란트가 일을 못하게 된 진짜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디륵스와 지내는 동안에 22세난 젊은 여시종 헨드리케 스토펠스(Henrickje Stoffels)와도 바람을 피워서 게르체에게 위자료를 물어주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치와 무분별한 돈관리로 곤경을 겪고 있던 렘브란트는 결국 50세 되던 해에 파산 신고를 내고 갖고 있던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말았다.

보수적인 청교도적 신앙이 지배하던 당시 17세기 네덜란드 사회는 제아무리 천재 화가라 할지언정 절제력이 부족한 렘브란트를 고운 눈으로 봐 주지 않았다. 30대 초엽 잠깐 맛 본 부와 명성을 끝으로 그는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빚쟁이들에 쫏기던 가련한 화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으며 덩달아서 생전 그의 미술 세계는 거의 이해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는 사생활 보다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

그가 죽고 난 후 100년 후 18세기 말엽부터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극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낭만주의(Romanticism) 사조가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렘브란트의 자화상 연작들은 인간 영혼 탐색과 심리적 여정의 미술적 자취로써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2006년 400회째 생일을 맞아 신화나 신비의 베일을 벗고 다시금 전시회를 통해 재점검 받고 있는 렘브란트는 숨가쁜 일상 속의 현대인들에게 자아 숙고의 순간을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Photos courtesy: Rijksmuseum Amsterdam/Gemäldegalerie Berlin.

*이 글은 원래 『오뜨』 誌 2006년 9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플란다스의 개의 배경이 되었던 곳

FLEMISH LANDSCAPE PAINTING

플랑드르 지방의 풍경화 감상하기
지금으로부터 2년 전쯤인 지난 2002년 봄과 여름철, 빈에 있는 미술사 박물관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부설 전시장인 하라흐 궁 (Palais Harrach) 에서는 『플랑드르 정물화』 전시를 열어서 미술 애호가들과 관광 방문객들의 큰 호응을 모았었다. 역사적으로나 언어와 문화면에서나 플랑드르 지방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미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네덜란드의 일부 영토 내지는 주변적 문화권으로 두리뭉실 취급되어 왔던게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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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반 발켄보르흐의 『볏짚이 있는 여름철 풍경 (7월 혹은 8월)』 1585년 작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그같은 점에 착안해서 빈 미술사 박물관이 기획해 전시로 부쳤던 『플랑드르 정물화』 전을 통해서 일반 대중 미술 관객들은 물론 전문가들에게 네덜란드 회화와는 구분되는 플랑드르 회화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규명하고 거장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준 교육적 성격이 강한 전시였다.

2년전의 그같은 대중 관객들의 호응도와 전시 연구 성과의 여세를 몰아서 이번에는 『플랑드르 풍경화 (Flemish Landscape Painting)』를 주제로 빈 미술사 박물관은 과연 플랑드르 풍경화의 전형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 모색의 결과를 보여주는 전시에 한창이다. 전세계 유명 박물관들과 개인 소장처들로부터 대여해 온 대표적인 플랑드르 풍경화들의 수는 총 유화 작품 130점과 스케치 및 그래픽 작품 18점.

지난번 『플랑드르 정물화』 전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가 성사되기까지 빈 미술사 박물관의 회화 학예 원구원들은 독일 에쎈의 빌라 휘겔 박물관의 루르 문화 재단 (Kulturstiftung Ruhr in der Villa Huegel at Essen)과의 연구 협력과 소장품 전시 대여 공유 협의 끝에 이 전시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보다 일찌기 이미 1988-89년에 미술관 방문객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던의 『17세기 프라하 미술 (Prague around 1600)』 展과 이어 1997-98년 『브뢰겔 형제의 회화 (Breughel-Breughel)』 展도 바로 그같은 공동 전시 기획 연구의 결과였으며, 특히 이번 『플랑드르 풍경화』 전시를 위해서는 플랑드르 회화 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벨기에 안트워프 왕립 미술관 (Koninklijk Museum voor schone Kunsten in Antwerp)까지 가세했다.

우선 플랑드르란 어떤 곳일까가 궁금해 진다. 1970년대에 어린이 만화 방송을 보고 큰 세대들은 만화 영화 시리즈 『플란다스의 개 (The Dog of Flanders)』를 기억하시리라. 천사처럼 맘 착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농촌 소년 네로와 늙은 개 파트라슈의 아름답지만 슬픈 이야기를 담은 만화 『플란다스의 개』가 배경으로 했던 곳은 바로 플랑드르였다. 나무 울창한 숲과 녹색 잔디 구릉, 포를러 나무가 늘어 선 농촌길, 옹기종기 모여 선 농가 마을 – 만화 속에서 정형화되어 버리다 시피한 플랑드르 지방 농촌의 전형화된 단편적 이미지들이지만 플랑드르의 자연 풍경을 어림짐작해 보는데 아주 쓸모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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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브뢰겔 (아버지, Jan Brueghel d.Ä.) 『한 강가의 생선시장 (Fischmarkt am Ufer eines Flusses)』 1605년 작 © München, Bayerische Staatsgemäldesammlungen, Alte Pinakothek.

플랑드르 지방 영토는 오늘날 벨기에가 차지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보자면 오늘날 네덜란드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유럽 중세기에 속하는 14-15세기에는 프랑스령 하에서 농업과 양모 수출로 번성했던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1830년 혁명이 터지기 전까지 벨기에는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나폴레옹 프랑스에 걸친 외부 열강들의 지배하에서 시달렸던 고난과 아픔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정치적 격동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던 플랑드르 지방에서 17세기 이후부터는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외부 정권의 압력과 끊이지 않는 종교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서 15-16세기와 같은 미술 전성기를 다시는 경험하지 못했다.

플랑드르가 14세기 이후로 적어도 17세기까지 미술 문화의 절정기를 이룩하게 되기까지에는 중세 시대 플랑드르 영토의 프랑스 군주들이 일찌기 확립해 놓았던 황실 미술 후원 전통과 양모 무역이 가져다 준 재정적 번영의 덕이 톡톡이 차지했다. 지금도 벨기에가 자랑하는 옛 역사적 무역 중심지 하알렘 (Haarlem)에서는 조각가 클라우스 슐루터와 화가 멜키오르 브로덜람이 활동했고, 북부 유럽의 양모 무역의 중심 도시던 브루게 (Brugge)에서는 중세의 거장 화가 얀 반 아이크 (Jan van Eyck)가 프랑스 황실 전속 화가로 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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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브뢰겔 (아버지 Pieter Bruegel d. Ä.) 『소떼를 이끌고 귀향하는 길 (Die Heimkehr der Herde)』 1565년 작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플랑드르 지방 화가들의 혁신적인 창의력은 또 남다르기로 유명해서 선배 대가들의 양식을 추종하고 모방하기 보다는 저마다의 전문적인 특기를 발전시키는 재주를 발휘하곤 했다.

흔히 유화 물감의 발명가로 알려져 있는 얀 반 아이크는 유화의 풍부한 색채성과 질감을 개척했다고 한다면, 이어 16세기와 17세기에 피터 브루겔과 피터 폴 루벤스는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성숙된 화면 구도법과 육중하고 감각적인 바로크 미술의 고전미를 완성했다고 일컬어 진다. 『플란다스의 개』의 결말 부분에서 네로가 얼어죽기 직전 추운 겨울 교회당에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바라봤던 대상은 바로 안트워프 성당 안에 걸려 있는 루벤스의 그림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였다.

또 15세기말 북유럽 고딕 시대를 마무리하던 시대에 인간의 욕망과 죄악을 환상적 상상력과 기괴한 알레고리로 표현했던 히에로니무스 보슈 (Hieronymus Bosch), 17세기 영국 황실 화가로 명성을 누렸던 신동 화가 안토니 반 다익 (Anthony van Dyck), 플랑드르 정물화의 귀재 프라스 슈나이더 (Frans Snyder)는 플랑드르 출신의 거장화가들이다.

피터 브뤼겔과 그의 두 아들 피터 브뢰겔 (Pieter Brueghel the Younger (성서의 최후의 심판을 즐겨 그려서 ‘지옥 브뢰겔 (Hell Brueghel)’이라는 별칭으로 불림)과 얀 브뢰겔 (Jan Brueghel (벨벳 천을 실감나게 잘 그려서 벨벳 브뢰겔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정물화가로 활동)도 풍경화라는 국한된 쟝르와 상관없이 이 지방이 배출한 걸출한거장 화가들이다.

이번 “플랑드르 풍경화” 전이 유독 촛점 삼고 있는 시기는 1520-1700년까지. 그러니까 플랑드르 지방이 자리해 있는 북서부 유럽에서는 바로크 시대가 지배하고 있던 16세기초부터 18세기까지가 되겠다. 플랑드르 지방의 회화,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풍경화가 북방 네덜란드의 그것과 본격적으로 분리되어 독자적인 쟝르로 전개되기 시작한 계기는 다름 아닌 반종교 개혁 운동 (Counter Reformation). 즉, 북부 네덜란드가 프로테스탄트 신교를 인정한데 반해서 플랑드르와 브라방 지방을 포함한 남부 네덜란드에서는 신교를 배척하고 카톨릭 스페인의 지배하에서 구 카톨릭교를 고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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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베르프의 한 화가 [약 1540년 경 활동했던 마티스 쿡 (Matthys Cook(?))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가 그린 『위대한 성녀 카타리나가 있는 풍경화 (Landschaft mit der Marter der Hl. Katharina)』 © Washington, National Gallery of Artm Samuel H. Kress Collection.

1517년 독일의 마틴 루터가 구 카톨릭 교회 권력의 지나친 권력과 부패를 비판하고 성서를 중심으로 기독교 교리를 재해석하면서 돌발한 기독교 종교 개혁은 거듭된 반종교 개혁 운동 끝에 북부 독일을 포함한 그 이북 유럽에서는 성공했지만 플랑드르를 포함한 그 이남 유럽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적어도 미술 분야에 있어서, 플랑드르 지방을 지배한 카톨릭 교회 전통은 프랑스 궁정풍의 위풍장대한 바로크 미술 양식이 후원받으면서 발전할 수 있었던 자양분을 제공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한 셈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제를 빌어오거나 성서 속의 일화를 해석한 종교화와 역사화가 회화 미술의 주류를 이루던 서양 미술사에서, 정물화와 풍경화 장르는 흔히 네덜란드가 탄생시킨 고유의 발명품이라고 여겨져 왔던게 상식이다. 본래 풍경화란 북부 네덜란드에서 처음 도입해 온 것으로소, 실제로 이번 전시가 플랑드르식 풍경화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1520년경인 16세기 초엽만 하더라도 플랑드르에서 풍경화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한 낯선 그림 쟝르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미술 전문가들에 따르면 풍경화가 정물화 보다 약간 앞서서 독자적인 그림 쟝르로 독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종교화나 역사화 속 한 구석에 들러리처럼 끼워넣어진채 묘사되던 바깥 자연 풍경과 실내 인테리어나 야채, 과일, 먹거리 등이 확대경처럼 한 폭의 그림 속 그 자체로 묘사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플랑드르 정물화가 인생무상 (人生無常), 절제와 검소의 미덕, 기독 성서 내용 알레고리, 거리의 활기찬 시장 광경이나 음식거리와 식기가 널려있는 풍성한 식탁 묘사로 지속적인 가내 평안과 번영 기원 등을 묘사한 교훈용 그림이었다고 한다면, 풍경화는 기독교적 요소와 자연을 모티프로 삼은 화가의 판타지 그림의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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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 – 1640) 『숲 속의 연못 (Der Teich im Walde)』© Vaduz, Sammlungen des Fürsten von und zu Liechtenstein.

오늘날 일반인들에게도 어지간히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바로크 회화의 거장 피터 폴 루벤스 (Pieter Paul Rubens)라든가 피터 브뤼겔(아버지 Pieter Brueghel the Elder) 등은 플랑드르 회화 전통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거장들이다.

이들은 다름아닌 당시 플랑드르 지방의 중심 도시던 안트베르프 (Antwerp)와 브뤼셀 (Brussel)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플랑드르식 정물화와 풍경화 전통을 구축해 나갔던 장본인들이었으며, 그들의 기량과 재간은 가히 유럽 대륙 곳곳에서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피터 브뤼겔의 걸작 풍경화들과 드로잉들 중 일부는 현재 빈 미술사 박물관이 애지중지하는 대표적인 영구 소장품들이다. 당시 16-17세기 플랑드르 화단이 그 절정의 꽃봉오리들을 만개하도록 기여한 우수한 풍경화가들은 또 있다. 헤리 멧 데 블레스 (Herri met de Bles), 얀 반 암스텔 (Jan van Amstel), 코르넬리스 마시스 (Cornelis Massys), 루카스 가셀 (Lucas Gassel) 등은 비록 네덜란드-플랑드르 미술사 전문가와 학자들 사이에서나 알려져 있는 다소 생소한 이름들이긴 하지만 16-17세기 플랑드르 풍경화가 독립적인 쟝르로 자리잡기까지 없어서는 안됐을 일등공신들이었다.

또 1570-1610년대 즉, 16세기말과 17세기초에 이르는 시기 동안 안트베르프와 브뤼셀을 거점 삼아서 그림을 그렸던 화가 작업실들이 번성했다. 화가들은 저마다 조수 화가와 견습생들을 두고 신흥 부유층 고객들의 주문에 응해 그림을 그려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히 화가들 사이에서는 제나름마다의 특기를 부각시켜서 독자적인 양식을 고집하는 전문화 현상이 전개되었다. 16세기 동안만 해도 일명 “세속 풍경화 (world landscapes)”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인기를 끌었던 보편적인 풍경화는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그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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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브뢰겔 (Jan Brueghel d.Ä., 1568 – 1625)과 피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 – 1640) 협동 제작한 회화작품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묘사한 세속적 천국(Das irdische Paradies mit dem Sündenfall von Adam und Eva)』1615년 경 작품 © Den Haag, Mauritshuis.

산수 풍경 약간, 숲과 강가 풍경 약간, 마을 풍경과 인물상 약간씩 골고루 섞은 절충무난한 세속 풍경화 대신, 이 시대에 들어서부터는 그림을 주문하는 고객들은 풍경화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 풍경 속의 요소들 가운데에서 한 두가지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킨 세부화된 풍경화를 원하기 시작한게 그 원인이었다.

그래서 이16세기말-17세기초 플랑드르 풍경화는 산수 풍경화, 마을 풍경화, 바다 풍경화, 조감도식 풍경 기록화, 사시사철 풍경을 묘사한 계절 풍경화, 성서나 상상 속의 천국 풍경화, 환상 풍경화 등 전에 없이 세분화, 환타지화되었다. 미술사에서 이 시기의 플랑드르 풍경화 유행 현상을 두고 “후기 매너리즘”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다 빈치, 미켈란젤로, 이어서 라파엘로로 이르는 전성기를 이룩했다면, 플랑드르 정물화는 17세기초에 피터 폴 루벤스와 더불어 그 절정기에 다달았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때는 시기상 서양 미술사에서는 바로크 시대로써 루벤스는 풍경화 분야에서 전에 보지 못했던 대혁신을 이룩했다고 평가받는다. 루벤스의 손재주로 인해서 풍경화 속의 대기와 자연은 마치 살아있는듯 숨쉬기 시작했으며, 이탈리아풍의 세련된 구도법과 플랑드르 회화 전통의 육중하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이 프랑스 바로크 궁중 회화를 영광되게 드높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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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반 발켄보르흐의 『겨울철 풍경 (1월 혹은 2월) Winterlandschaft (Januar oder Februar)』 1586년 작 ©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얀 빌덴스 (Jan Wildens), 루카스 반 우덴 (Lucas van Uden), 그리고 브뤼셀 화파 소속 화가들 (로데빅 데 바아더 (Lodewijck de Vadder), 자크 다르투아 )Jacques d’Artois), 루카스 아체링크 (Lucas Achtschellink), 다니델 반 하일 (Daniel van Heil), 코르넬리스 호이스만스 (Cornelis Huysmans)는 루벤스를 스승삼아 루벤스 회화 전통을 충실하게 추종한 후계 풍경화가들이다.

모름지기 풍경화 (landscape painting)라고 불리는 그림 쟝르는 동양의 산수화 (山水畵)나 서양의 풍경화 (風景畵)든 그 출발은 화가의 상상 속에서 재구성된 이상화 (理想化)된 경치를 화폭에 담는 것에서 출발했다. 고대 로마의 프레스코 벽화, 중국 고대의 산수화, 15세기 서양 르네상스 미술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초상화나 기록화를 위한 배경 처리적 요소로 활용되다가 16-17세기에 와서야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화가들에 의해 비로소 독립적인 그림 주제로 인정받게 되었다.

풍경화는 19세기말에 접어들면서 가장 눈부신 발전을 했다고 평가되는데, 분명 터너, 콘스터블, 세잔느, 반 고흐 등 오늘날 일반인들이 즐겨 감상하는 19세기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 풍경화는 바로 그 대표적인 결과였으니 분명 서양 풍경화의 역사에서 플랑드르 풍경화는 분수령적인 공로를 했음에 분명하다.

*이 글은 본래 『오뜨』지 2004년 3월호에 실렸던 것으로 편집되기 이전의 글을 그대로 실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