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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술 페어 너무 많다.

언제부터 미술시장은 수요측이 아닌 공급측 경제학이 되어 버렸나?

요즘 전세계 대도시에서는 일년 내내 미술 페어가 쉴틈없이 열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여년 전만 해도 국제 미술계에서는 각 나라마다 국가대표격 항공사를 하나씩 두고 있듯 국가대표별 미술 비엔날레 행사는 한둘쯤 갖추고 있어야 국제 문화 지도 위에 오를 수 있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개인 부호 컬렉터가 나날이 늘고 미술품이 럭셔리 소비 아이템으로 인정받고 있는 현재, 미술페어가 과거 비엔날레가 누렸던 위치를 점령해 들어가고 있다. 과연 그러한 현대미술 시장 붐과 공급주도식 미술대중화 기저의 재정적 기반은 든든할까? 그리고 미술품의 대중적 시장화 현상은 지속가능할까?

Banksy, 『Morons』. 이 낙서화는 본래 뱅시가 2006년 LA에서 가진 ⟪Barely Legal⟫ 전시회에 100판 한정본 가운데 한 작품. 인쇄: Modern Multiples.

Banksy, 『Morons』. 이 낙서화는 본래 뱅시가 2006년 LA에서 가진 ⟪Barely Legal⟫ 전시회에 100판 한정본 가운데 한 작품. 인쇄: Modern Multiples.

최근 나는 한 미술 딜러로부터 “18번”이라는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지난 한 해 지금까지 미술 페어에 몇 번 참가했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지난 한 두해 총 18번이라. 매 3주 마다 한 번씩 다른 페어장으로 옮겨다니며 전시했다는 계산이 된다. 아무리 우리가 이벤트성 위주의 환경 속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물류운송 스케쥴 조정과 잦은 여행에 시달릴 딜러의 체력에 얼마나 가혹한 강행군이 될까는 상상만해도 몸서리쳐진다.

그렇게 않고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들 딜러들은 대체로 말한다. 광고 보다 비용이 훨씬 더 들지만 페어에 직접 참가하는 것만이 사실상 마케팅 전략이고 수입효과도 즉각적이다. 페어장에 참가하는 이유는 또 있다. 화랑업자들은 페어에 참가해야만 새 고객을 발굴하게 되고 옛 단골고객도 되찾아와 작품을 사간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딜러들은 어느새 정처없는 악순환의 고리 속으로 말려들고 만다. 이전 페어에서 발생한 세일즈 활동과 각종 참가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음 새 페어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 그같은 전략이 야기할 수 있는 재정적 리스크는 절대로 가볍게 보면 안된다.

그러나 결국 그같은 매출 전략을 택할 것인지 아닐지는 화랑주인 스스로가 판단할 문제다. 다만 필자는 화랑계의 그같은 과열성 비즈니스 관행이 미술 시장 전체에 어떤 파급효과를 미칠까를 우려한다.

미술 시장은 계속 성장중이다. 특히 생존하는 현대작가들의 작품의 매출은 계속 증가세에 있다. 글로벌화 덕분에 오늘날 어느 나라 모든 도시마다 현대미술계 또는 중심부 하나씩은 다 갖고 있다. 페어 행사의 활성화 덕분에 전세계 곳곳 이른바 “미술 수도 (art capitals)”에서는 서로 비슷비슷한 수 십개의 미술 페어들이 동시다발로 열렸다 사라진다.

그러나 그같은 현상을 무작정 칭찬하고 들기보다는 과연 그처럼 운영되는 미술시장의 성장이 얼마나 지속가능한지, 이 현상을 불지피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미술작품의 미술작품의 무작위성 공급 증가 현상 [*참고, 역자주: 과거, 미술시장에서는 미술가가 사망했거나 희귀한 작품일수록 가치와 가격이 높게 책정되는 ‘수요측 경제학 원칙’에 입각해 작동했다.] 이 정상적인 것인지 심사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미술계 전반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공급이 시장을 주도한다고 보는 것 같다. 벽에 걸고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비추면 사람들이 그 작품을 사 갈것이란 막연한 믿음 말이다. 과거 전통주의 거장 작품이나 인상주의 계열 작품들, 심지어는 상한가를 홋가하는 유명 현대미술가의 작품은 너무 귀하고 구하기 어렵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을 감안한다면 공급측 경제원리 하에 보다 광범위한 소비자들에게 많은 미술품 구매와 소유 기획를 제공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긴 하다. 이 모두가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대미술시장의 현실이다. 그리고 화랑, 페어, 경매소들은 미술작품을 시장에 더 많이 공급하면 할수록 더 많이 미술작품을 팔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At the Art Basel Miami Beach 2012 VIP Preview at the Miami Beach Convention Center on December 5, 2012 in Miami Beach, Florida. (Photo by Mike Coppola/Getty Images for Art Basel Miami 2012)

At the Art Basel Miami Beach 2012 VIP Preview at the Miami Beach Convention Center on December 5, 2012 in Miami Beach, Florida. (Photo by Mike Coppola/Getty Images for Art Basel Miami 2012)

물론 아트 페어가 안겨주는 장점도 있다. 특히 최근 등장한 인터넷 미술 매매 플랫폼 덕분에 소비자가 경제적・사회적・지리적 장벽이나 주눅감을 느끼지 않고도 미술작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미술품 소유와 향유의 민주화다. 페어장은 소비자에게는 미술품을 구경하고 사고 모으는 재미있는 공간이고 딜러에게는 새 고객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미술에 헌신하는 컬렉터 기반을 다지려면 긴 시간의 노력과 투자를 필요로 한다. 며칠 열리는 미술품 장터의 단기형 깜짝행사로는 충분치 못하다.

시장에 더 많은 수량의 미술작품을 밀어 넣는 것으로 건전한 미술시장을 유지할 수는 없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수요는 절대로 과잉 공급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현대미술 시장이 유지되는데 필요로 하는 가격발굴 수준에 미치지도 못할 것이다. 잊지 말자. 미술은 필수품이 아니라는 것을.

※ 이 글은 본래 BLOUIN ARTINFO INTERNATIONAL EDITION 2013년 5월20일 게재된 영문기사를 우리말로 요약한 것입니다. / This is a Korean summary of the column by Benjamin Genocchio “Is the Art Market Becoming a Supply-Side Economy? An Argument Against Art Fairs”, originally appeared at BLOUIN ARTINFO INTERNATIONAL EDITION on May 20th, 2013. Read the original article here.

에곤 실레 풍경화가로 다시 보기

EGON SCHIELE  AS A LANDSCAPE PAINTER

에곤 실레가 탐색한 풍경화의 세계 – 저물어 가는 허장성세 바로크 여명기에 싹튼 개인주의 예술 세계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계자’ ‚비엔나 유겐스틸의 화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기수’ –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드는 세기 전환기 비엔나에 살았으며 여인과 에로스의 화가로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를 한 마디로 정의하려도 시도한 별칭들은 여럿있다. 그만큼 그는 사춘기 전후의 어린 소녀로 부터 성숙한 여인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포즈와 도발성을 표현한 여인 그림을 많이도 그렸다.

실레는 1890년에 태어났으니 역시 ‘여인 초상화가’로 불리는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 보다는 인생 면에서나 화가라는 직업적 면에서나 근 30년이나 후배뻘이 되는 셈이다. 일찌기 기성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혀서 중상층 이상 계층의 미술 애호가들과 부유한 아녀자들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리주는 일로 남부럽지 않게 넉넉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클림트와는 대조적으로, 실레는 오늘날로 치면 도색 잡지의 기능을 담당하는 에로틱한 소녀상과 여성상을 그리는 일을 주업으로 생계를 꾸렸던 도색그림쟁이였다.

Egon Schiele: Hauswand am Flusss, 1915, 110x140cm

에곤 실레 『강변의 집 담벼락』 1915년 작. Courtesy: Leopold Museum, Wien.

반면에 여자 그림을 그리는 화가 겸 제도사로 알려져 있는 실레가 풍경화도 잘 그리는 순수 풍경화가라는 사실을 아는 일반인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지고 보면, 경우는 클림트의 사례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클림트는 생전 1989년 세상을 뜬 해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화가 일생을 살면서 그린 풍경화 작품들만도 55점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 작업하는 실내 아텔리에를 벗어나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자연 휴양지를 여행하면서 숲과 호수 경치를 틈틈히 그려댄 결과였으니 그는 분명 두말할 것 없는 집착적인 다작가(多作家)였다.

클림트에게 있어서 여성화가 대체로 주문에 응해 그려진 생계용 그림 프로젝트였다고 한다면 풍경화는 여가 시간을 쪼개어 창조성을 발산하고 영감을 충전하기 위한 순수 표현의 수단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가 풍경화가로서도 가치 높은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의 고국 오스트리아를 벗어난 해외에서는 아직도 그다지 폭넓게 알려져 있지 못하다.

벌써 2년전 즈음, 이곳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에서 4개월에 걸쳐 국가적 규모의 <클림트 풍경화> 전을 열었던 것도 풍경화로서 클림트를 재조명하는 것은 물론 클림트의 풍경화에 관한 한 최대의 소장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 벨베데레 갤러리의 자부심을 과시해 보려는 국가적 차원의 의도가 엿보이는 행사였다.

실레가 30년도 채 살지 못하고 마감한 28세의 미술가 인생 동안 남긴 회화 작품들 가운데 반 수 가량이 풍경화였음은 일반인들이 아직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의 열렬한 에곤 실레 애호가 겸 컬렉터라는 점 때문에 국립 미술관의 관장이 된 루돌프 레오폴트 (Rudolf Leopold) 박사는 이 기회에 자신의 레오폴트 미술관 컬렉션이 보유하고 있는 실레의 풍경화들을 한 자리에 선보이는 것을 통해서 풍경화 화가로서의 에곤 실레를 재조명해 보는 전시를 직접 기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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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가 1913년에 그린 『크루마우의 풍경』 그림을 위한 준비 드로잉. 최근 나치에 의한 강제 압수된 유태인 가족 소유의 작품으로 판정받은 후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고가에 낙찰되어 화재가 되었다. 이 작품 뒷면에는 색정에 몰입하고 있는 여인의 옆모습 그림이 스케치되어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레오폴트 관장이 실레 풍경화 연구 과정에서 풍경화 작품과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실존 장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증적으로 확인한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해 둔 사진 자료들을 나란히 전시한다.

풍경화 연구를 위해서 장소 고증을 하는 일은 미술사가들과 전문가들이 필히 하는 연구 관례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실레 풍경화 연구와 관련하여, 레오폴트 관장이 독자적으로 해 온 고증 연구 결과와 뉴욕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 New York)의 화랑 주인 겸 전문가인 제인 칼리어 (Jane Kallir)의 고증 연구 사이에서 빚어진 정당성 문제와 연구 결과 자료 도용 주장사건은 지금도 에곤 실레를 둘러싼 미술계 스캔들중에서도 뜨거운 화재 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실레 미술을 둘러싼 정치적 스캔들
미술계 스캔들을 거론할 때마다 미술 시장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빼놓지 않고 오가는 이야기 주제는 실레 작품들의 출처 문제이다. 일례로 가장 최근에 여론화된 소식으로 작년인 2003년 6월에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실레의 작품으로 경매에 부쳐진 『크루마우의 풍경 (도시와 강 경치) (Krumauer Landschaft – Stadt und Fluss)』(1916년 작)이 소더비 경매 역사상 최고 가격인 영국화 천 2백 6십 7만 파운드 즉, 미화로 전환하면 2천 1백 십만 달러 (다시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2백 4십 2억 원)에 가까운 낙찰금에 팔려 나가서 화재를 뿌렸다.

『크루마우 풍경』은 음울하고 헐벗고 종종 노골적이고 거친 성애 장면을 묘사한 인물화를 즐겨 그렸던 실레의 여타 작품들과는 다르게 환하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엿보여서 유독 예외적인 작품이다. 실레가 자신의 모친의 고향이던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크루마우 (Krumau)라는 한 작은 도시와 그 곁을 끼고 흐르는 몰다우 강 (Moldau)을 그린 서정풍 강한 유화 그림이다. 이 유화 그림의 창작 동기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불행한 어린 성장 시절을 거쳤고 어린 소녀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잦은 곤혹을 치뤘던 문제의 사나이 실레가 어미니의 고향 크루마우를 방문하여 그 경치를 화폭으로 옮기는 것을 통해서 정신적인 평온을 찾으려 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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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모양으로 늘어선 집들』 또는 『섬 도시』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이 풍경화는 1915년에 그려졌다.

그런데 화재 거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그림이 유독 언론의 관심을 끈 이유는 이 그림이 나치에 의해서 압수되었다가 미술 시장으로 반환된 작품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크루마우 풍경』 그림은 현재가지 규명된 바에 따르면 실레와 절친한 친구 관계였던 유태인 출신의 빌헬름과 데이지 헬만 부부 (Wilhelm & Daisy Hellmann)가 화가로 부터 직접 구입한 작품이었는데, 1938년 나치군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방던 해에 강제 압수한 것이라고 한다. 나치 정권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던 1933-1948년 사이, 본 주인이 게스타포의 손에 갈취당한 이후 줄곧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의 소장품으로 1953년까지 보관되어 오다가 이 작품을 애타게 찾고 있던 헬만 부부의 눈에 띄었다.

헬만 부부는 나치로부터 압수된 미술품 반환을 위한 본격적인 법률 절차를 거쳐 승소한 후 이 작품을 반환받았고, 이후 헬만 부부의 후손들이 작년 소더비 경매에 부쳐 다시 미술시장에 내 놓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은 소더비 경매소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분실 미술품 반환을 위한 연구소 및 법률담당부가 자체적인 분실 미술품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법적인 반환 요구 노력 끝에 마침내 그림 도둑들로부터 되찾아 온 법적 케이스로도 유명하다.

누군가 미술 작품의 역사는 작품을 창조한 화가가 완성하기 까지의 역사와 그 작품이 여러 주인들의 손에서 손으로 거쳐가는 소유자의 역사 두 가지를 갖고 있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미술 작품과 작품을 소유하는 주인 사이의 관계는 참으로 변화무쌍하기도 하지만 또 그에 못지 않게 끈질기기도 한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소더비가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나치 시대 분실된 미술품 회복 운동은 경매에 부칠 명작들을 재발굴하여 경매로 부칠 수 있는 경제적 이득 기회를 재창조하는 셈이고, 또 한 편으로는 나치의 유태인 핍박 끝에 미술품을 강제로 빼앗기거나 손실한 유태인 후손들이 조상들을 대신해 한풀이도 하고 잃어버렸던 미술 명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주는 셈이다.

바로 그런 연유로 해서 특히나 오스트리아의 경우, 나치 시대 유태인들로 부터 강탈했던 미술품들 특히 그 중에서도 오늘날 기록적인 고매매가를 홋가하는 클림트와 실레의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서 골칫거리를 앓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9월 16일부터 대중에게 공개될 『실레 풍경화』 전에는 출처 문제에 휘말릴 만한 출품작들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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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도시』 1911년 작. 실레는 어린 시절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늘 어머니에 대한 애정 부족을 느끼며 성장했다고 전해진다. 그같은 성장경험은 실레가 성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 올 80세를 맞는 노장의 레오폴트 관장은 자신의 실레 컬렉션은 거의 대부분 경매와 시장에서 구입한 것임을 강조해 마지 않는다. 하지만 그도 한창 실레 작품들을 쫏아 다니며 사모으는데 정신이 없던 전후 젊은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실레 컬렉션의 가격은 이루 다 셈할 수 없을 만큼 기하흡수적인 비례로 폭등했음을 기꺼이 시인한다.

실레 미술품 걸작인가 미술 시장의 투자 대상인가?
미술 시장에서 보나 대중적인 인기도 면에서 보나 실레가 그토록 화재를 몰고 다니는 화가인 만큼 그의 작품 가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에 매매되고 있다.

일례로, 올 여름 뉴욕에서 열렸던 소더비 경매에서 실레가 그린 1913년 한 점의 드로잉 작품 『연인들』이무려 미화 3백5십만 달러 그러니까 우리돈으로 하면 4십억에 낙찰되어 뉴욕 출신의 거부 마이클 스타인하트에게 팔여 나가서 「뉴욕 타임즈」 紙가 서둘러 보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가 하면 유명 경매소를 통해서 값비싸게 댓가를 치루고 구입한 실레 드로잉이 알고 보니 희미해져 버린 원작 실레 그림 위에 전문 위조꾼 화가에 의해 선명하게 덧칠이 된 후 본래 있지도 않았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ES’ 라는 서명을 임의로 그려 넣은 일로 해서 그림 주인이 경매 회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건 사건이 벌어지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게다가 실레의 유명세는 미술 컬렉터들의 투자 가치 아이템으로서도 효자 노릇을 톡톡이 한다. 마이클 스타인하트는 올 여름 소더비에서 거머쥔 4십억 짜리의 실레 드로잉 외에도 작년에 이미 14점의 드로잉을 화장품업계의 거물인 로널드 로더 (Ronald Lauder)로부터 우리돈 약 1백 4십6억 여원에 이르는 돈을 주고 구입을 했으며, 스타인하트에게 실레 드로잉들을 온통 팔아버린 로널드 로더는 다시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액수에 달하는 돈을 주고 실레 전문 딜러인 세르게 사바르스키로부터 실레의 수채화 36점을 사들여 자신의 컬렉션을 보충했다.

게다가 이들 큰손 컬렉터들은 보다 많은 낙찰가로 작품을 처분하기 위해서 소더비와 크리스티 등 유수의 국제적인 미술품 경매소들을 오가면서 보다 비싼 가격으로 미술 작품을 매매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는데에도 놀라운 수완을 벌이곤 한다. 여전히 미술 경매장에서 최고 낙찰가로 경매업자들을 기쁘게 해 주는 분야는 20세기 초엽 미술과 인상주의 계열이다. 모딜리아니, 마티스, 반 고흐, 피카소와 더불어 실레 (그리고 동시대인 오스트리아인 화가인 클림트를 포함해서)는 의문의 여지없이 최고의 핫 아이템으로 그 인기는 식을줄 모른다.

실레가 오늘날 환생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가로 치솟은 자신의 작품 가치를 본다면 뭐라 했을까? 28살 나이에 제1차 대전 직후 비엔나 시 전역에 나돌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갑작스럽게 세상을 하직한 젊은 실레는 가난, 고통, 질병, 성적 갈등이 잔뜩 표현된 여인 그림들을 그려 팔아서 생계에 일부 보태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망하기 바로 직전 그는 남달리 뛰어난 재능과 개성이 서서히 비엔나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부와 명성의 궤도로의 진입을 막 앞두고 있던 참이었다.

소위 말하는 ‚성공한 예술가’로서 역사에 남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작품을 꾸준하고 일관적으로 작업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성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을 만큼 장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 영국의 미술 평론가 앨런 보네스의 지적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만일 실레가 좀 더 오래 살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오늘날 미술 경매소에서 오가는 가격 만큼은 안되더라도 훨씬 지위 높고 윤택한 예술인으로서의 여생을 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Egon Schiele: Versinkende Sonne, 1913, 89x90,5cm

에곤 실레의 『지는 해』 1913년 작. Courtesy: Leopold Collection, Wien.

풍경화는 내면적 감정 세계의 표출
 레오폴트 관장이 실레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던 25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구입한 작품은 다름아닌 풍경화였다고 한다.

오스트리아가 제2차 대전 종전을 뒤로 한채 사회적 혼란과 경제 재건에 한창이던 1950년 여름, 당시 의과 대학생이던 레오폴트 관장은 실레의 친구였던 아르투르 뢰슬러 (Arthur Roessler)로 부터 풍경화 한 점을 맞닥드리게 되었다.

나이 많은 뢰슬러 씨는 지갑도 얇은 애송이 미술 수집가에게 ‘해가 지는 경치’를 담은 한 편의 풍경화를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현재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실레의 1913년 유화 작품 『지는 해 (Versinkende Sonne)』이다. 산과 숲을 배경으로 해질녘 저녁놀이 지는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 그림에서 보는이는 이루 설명하기 힘든 울적함을 느끼게 된다. 때는 이미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나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해서 을씨년스러운 냉냉함까지 전달된다.

이 작품은 그로 부터 7 년 후에 뢰슬러 씨가 레오폴트 관장에서 선물을 한 계기로 레오폴트 소장 목록에 포함되었다. 그대신 그날 레오폴트 관장은 『죽은 도시 (Die tote Stadt)>(1910년 작)를 사서 집에 가져왔는데 이 그림도 이번 전시에서 다시 공개된다. 앞에서 언급된 소더비에서 경매된 화재의 작품 『크루마우의 풍경』을 그리기 직전에 그려 뒀던 습작 스케치 『크루마우』(1913년 작)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레오폴트 관장은 실제로 이 그림에 나타난 집 번지수와 실제 크루마우 도시의 집 번지수를 일일이 비교판별해 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에곤 실레가 살았던 19-20세기 전환기는 절대 군주체제의 잔재랄 수 있는 집단적인 허식성과 새로 대두되기 시작한 근대적 개인주의가 전면 충돌한 긴장의 시기였다. 그래서 20세기로의 전환점에 선 비엔나에서는 근대주의라는 막을 수 없는 시대적 대세에 잠시나마 저항하기 위한 고전주의자들과 역사주의자들의 복고주의 몸부림이 일기도 했지만 역시 시대의 흐름은 개인주의라는 근대적 신사고로 흐르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실레의 미술 세계는 당시 비엔나의 대기에 가득하던 시대 정신 (Zeitgeist)의 반영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에 미술 창조의 원동력을 개인의 내면 세계로 눈을 돌려서 폭발적이고 격렬한 필치로 표현한 화가들은 실레 말고도 또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동요와 불안으로 가득한 사회상을 반영하기라 하듯 오스카 코코시카 (Oskar Kokoschka)는 마치 전기를 맞아 전율하는 듯해 보이는 형상으로 인물과 풍경을 묘사했다.

자기 자신의 통쾌하게 비웃는 유령처럼 묘사한 자화상으로 유명한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은 자기 내면과의 투쟁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미술이 내면적 갈등에 대한 외면적 표출의 수단으로서 활용된 이 시대는 성과 무의식을 주축으로 한 프로이트의 심리분석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실레의 풍경화를 바라 보고 있노라면 여성화에서 다름없이 발견되는 강렬대담하면서도 극도로 신경질적인 필치가 여지없이 발견된다. 실레는 웬만해서는 자기가 그린 그림에 대한 복사판을 그리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굳이 모사본을 그려야 했을 경우라도 일부러 변형을 여기저기 가해 그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바로 그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런던에 있는 말보로 갤러리에서 영국에서는 최초로 열린 에곤 실레의 전시회를 본 한 일간지 기자의 말은 실레 미술이 지니는 역사적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사치오와 모차르트의 경우 처럼 실레는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미술사에 남긴 흔적은 충분했다“라고. 이번 『실레의 풍경화』 전은 [2003년] 9월17일부터 내년 초인 2004년 1월31일까지 계속된다. All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이 글은 2003년 10월호 『오뜨』 지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현대 인도미술 시장 다이제스트

INDIAN ART NOW

인도 현대미술의 오늘과 내일

영원한 사랑과 로맨스의 아이콘 타지 마할. 대영제국으로부터 인도를 해방시킨 정신적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현대 인도 대중문화 현상이 된 발리우드 시네마 – 인도 하면 떠오르는 몇몇 대표적 전형 말고도 인도의 문화적 위상 증진에 큰 몫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바로 현대미술이다.

이미 국제적인 인정을 받아온지 오래된 일본미술, 최근 십 여년 동안 경제 급성장과 함께 집중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중국 현대미술, 이어서 인도의 현대미술은 요즘 구미권 컬렉터들 사이에서 새삼스러운 관심과 유망한 투자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인도 현대미술을 향해 강렬히 쏟아지는 국제 미술시장의 주목은 브릭스(BRICS)로 불리는 신흥 성장국들의 일원으로 급성장한 경제력의 덕도 힘입은 때문이다.

아니시 카푸르(Anish Kapoor)
 2006년 작. Stainless steel
1066.8 x 1066.8 cm. 
Photo © 2010. Courtesy of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New York and Brussels.

블루칩 미술품은 이제 주식이나 채권에 버금가는 자산으로 인정받는 포트폴리오 다각화 투자 품목이기도 하지만 컬렉터의 남다른 감식안을 우아하게 뽐낼 수 있는 문화적 무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구미권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즈> <블룸버그> <월스트리트저널> 등은 크리스티스나 소더비의 동남아시아 미술 경매 결과를 눈여겨 보도하고 있다.

스위스 바젤, 런던 프리즈 등 간판급 국제 현대미술 박람회에서는 최근 주가 높은 현대미술가들을 홍보하며 컬렉터들을 유혹한다. 예컨대 아니시 카푸르(Anish Kapoor), 수보드 굽타(Subodh Gupta), 지티시 칼랏(Jitish Kallat)은 서구적인 감각과 최첨단 매체로 인도의 현모습을 조명하는 전략으로 구미 미술시장을 공략하며 한껏 주가를 높이는 작가들이다.

최근 몇 해에 걸쳐 크리스티스 경매소는 인도 현대미술 영역에서 최고의 경매실적을 올려왔고, 그 뒤를 소더비 경매소가 뒤따르고 있다. 2000년 인도 뭄바이 본사에서 창립된 후 현재 뉴욕, 런던, 델리 등 4도시에서 화랑을 운영하고 있는 사프론아트(Saffronart)는 인증된 고급 인도 미술과 공예품을 인터넷상에서 거래하는 최대 규모의 온라인 경매소 겸 딜러로 유명하다. 사프론아트는 가장 최근인 9월말 가을철 정기 경매에서 원로 화가인 티옙 메타(Tyeb Mehta)의 회화작품을 미화 1백5십6만5천 달러(우리돈 약 18억5천여만 원)에 낙찰시켜 2008년 국제금융난 후로 잠시 침체되어 있던 인도미술 시장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었다.

라빈더 레디(Ravinder Reddy) 
 1995-96년 작. 
Fiber glass, gold leaf, paint 
61 x 86,4 x 111,8 cm.
 Lekha and Anupam Poddar Collection 소장품. Photo courtesy: Daimelr Art Collection.

막불 피다 후사인(Maqbool Fida Husain)은 인도 근현대 미술 하면 우선 떠올리는 국가대표급 원로 화가다. 1915년 생인 후사인은 일명 ‘인도의 피카소’ 또는 ‘인도의 워홀’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20세기 인도 미술계를 목도하며 70평생 활동한 다작가였다. 본래 영화극장 간판과 포스터를 그리던 간판쟁이 일을 하던중 미술의 세계로 입문한 그는 말년에 힌두교 다신들을 누드로 그렸다하여 과격 힌두교 신자들로부터 쫏겨 해외 망명생활을 하다가 올해 6월 런던에서 작고했다.

그렇다고 인도 미술가들이 후사인의 뒤를 이어 신성모독이나 사회적 터부에 도전하는 도발적 미술을 추구하지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인도 미술가들은 주로 인도인들의 일상 풍속을 담은 풍경화나 역사적·종교적 사건을 다룬 기록성 강한 역사화를 주로 그려왔다.

그런 이유로 전세계 미술애호가들 사이에서 인도미술은 대체로 신비롭고 사색적인 미술로 받아들여진다. 프랑스풍 구상화를 그린 시예드 하이더 라자(Syed Haider Raza), 인도 토속풍경을 그린 라자 라비 바르마(Raja Ravi Varma)는 후사인과 더불어 인도 근대 미술계의 삼대구도를 형성하는 대표적인 블루칩 원로 화가들이다.

21세기 현재, 인도 현대미술을 이끄는 젊은 30-40대 미술인들을 가장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창조적 화두이자 쟁점은 다름아닌 글로벌리즘(Globalism)이다. 1990년대부터 본격화된 글로벌화의 물결을 타고, 인도는 급속한 도시화와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다. 시골에서 도시로의 인구이동, 고속도로와 신도로 사이로 분주하게 오가는 인간무리와 교통수단, 새로운 물적풍요와 그 뒤안길에 서려있는 수선스러움과 허탈감 – 글로벌화라는 열병에 들떠있는 오늘날 인도의 풍경은 급속한 산업화를 겪은 아시아인에게 보편적인 공감대에 호소하는 면이 있다.

다야니타 싱(Dayanita Singh) 2007-2008년 작. C-print. Courtesy the artist and Frith Street Gallery, London. 2008 © Dayanita Singh.

현대 인도 미술인들은 인도적 향취가 짙은 이미지를 활용하지만 매체나 기법 면에서는 서구의 현대미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젊은 세대 인도미술가들은 과거 선배 화가들이 갇혀있던 전통적 회화나 조각에서 벗어나서 초대형 설치, 멀티-스크린 비디오, 대규모로 확대한 총천연색 디지틀 사진,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결합한 혼합매체 등 매체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표현 방식을 구사한다. 구시대와는 확연히 다르고 복잡해진 글로벌 사회를 보다 절실히 표현하는데에 최첨단 시각매체가 더 유용하기 때문일테다.

주제 면에서도 나태한 컨셉츄얼 미술이나 가벼운 세태풍자나 논평에 안주하지 않는다. 최근 주목받는 현대 인도의 미술인들은 언뜻보기엔 전형적이고 진부하다고 느껴질 지언정 현대화 과정 속에서 인도인들이 경험하는 종교적, 경제적, 일상적인 혼돈과 갈등을 진지한 어조로 다루며 사색적 무게를 가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예컨대 ‘인도의 데미언 허스트’라고 불리며 인도현대미술을 주도하는 수보드 굽타(Subodh Gupta)는 광채가 화려한 일상용품을 활용한 대형 설치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술경매장의 귀염둥이로 자리잡은 다야니타 싱(Dayanita Singh)은 대형 사진작품을 통해서 빛과 초고속 스피드로 전율하며 변화·갈등하는 인도의 겉모습과 인간상을 포착한다.

또 그런가하면 한결 정치적·종교적 운을 띤 작품을 하는 작가들도 눈에 띄는데, 특히 젊은 비디오 아티스트인 아마르 칸와르(Amar Kanwar)는 멀티스크린 비디오로 인도와 파키스탄 간 힌두교대 회교 사이 종교적 갈등을 다뤄 구미권에서 무게있는 작가로써 평가받고 있다.

지티시 칼랏(Jitish Kallat) <수하물 찾기(Baggage Claim)> 2010년 작. 캔버스에 아크릴릭. Courtesy: Arndt Gallery, Berlin.

경제성장과 더불어 미술시장에서 급부상한 인도의 현대미술은 과연 창조성과 예술적 완성도 면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가? 자칫 인도 미술은 몇몇 한정된 수의 미술인들이 서구 미술 시장에 의해 작위적으로 선정돼 ‘인도 브랜드’ 창출로 치중되는 아닐까? 장기적으로 예술적 생명력과 내공을 발휘하며 미술사에 남을 작가는 누구일까? – 이 모든 의문점은 역사의 시험대에 서있는 현대미술가라면 누구나 당면한 숙제일뿐 인도 미술 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인도의 현대 미술은 인도의 역동적인 경제성장 만큼이나 계속 진행중인 흥미로운 문화 프로젝트다.

국가는 경제가 번성하면 그에 준하는 미술이라는 유형 자산(tangible asset)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인도 현대미술이 구미 미술시장에서 관심을 끌게 된 배후에는 인도 산업계 갑부들과 30-50대전문직 중상층 해외파 인도인들이 주도된 미술 수집 트렌드 한 몫을 한다고 새프란아트는 집계하고 있다. 급속한 경제 성장과 물질적 풍요를 정신적 영혼적 풍요로움을 가장 잘 버무려 표현해 주는 재산 목록으로써 미술품만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경제력이 커지면 문화의 위력도 그에 비례해 커지는 것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 이 글은 본래 Chronos Korea 지 2011년 11/12월호 (제17호) 188-189쪽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베를린 새 화랑가

Berlin Art Scene

베를린 현대 미술의 미래가 숨쉬고 있는 곳 – 베를린 미테 화랑가

요즘 미술계 동향을 좀 아는 사람한테 오늘날 독일에서 현대 미술의 중심이 어디냐고 물으면 베를린에 가보라고 할 것이다. 1989년 동서독의 통일과 함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나서 지난 199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베를린은 독일의 새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 베를린의 현대 미술 화랑가는 옛 동베를린이 있던 구역에 자리잡고 있다. 베를린-미테 Berlin-Mitte (‚미테’는 중심이라는 뜻)로 불리는 이 구역은 동서독 통일 이전까지만 해도 동베를린 소속이다가 베를린의 새 미술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 보다 이전인 19세기에는 가난한 베를린 시민들이나 유태인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던 보잘것 없는 빈민 거주 구역에 불과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마자 하케셴 마르크트 (Hackeschen Markt) 재래시장에는 러시아에서 온 암거래 상인들이 어슬렁거리는 풍경만이 을씨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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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중심지 베를린 미테 구역의 아우구스트스트라쎄 거리 Photo: Stella Hoepner-Filies.

‚언제나 건설중인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베를린은 2차대전 종전 이후 반세기 가까이 하나의 독일이 동과 서로 분열된채 갈등하던 정치적 회색 지대였다. 유럽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뚜렷한 4계절 기후에도 불구하고 우울한 회색 하늘 아래 지금도 도시 여기저기에 잔존하는 고풍스런운 역사적 건축물들과 현대식 첨단 건축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들어차 있는 수도 베를린은 90년대 중반 이후로 현대 미술계에 새로 데뷔한 미술의 중심부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싼 이 지역의 지가 때문에 옛 서독 지방과 서베를린에 있던 사설 화랑들이 속속 이곳 베를린-미테로 이주해 오거나 새 화랑들이 문을 열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젊은 미술인들도 임대료와 생활비가 여타 미술 중심 도시에 비해서 저렴하고 화랑이 모여 있다는 입지 조건 때문에 이곳 베를린-미테로 속속 뒤따라 이사를 왔다. 그 결과 최근에는 미술인들 말고도 유럽 다른 나라와 미국을 뒤로 하고 베를린으로 이주해 와 활동하는 신세대 미술평론가들과 큐레이터들을 이 동네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마주치는 일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에 뉴욕, 영국에 런던이 있다면 독일에는 베를린이 있다고 떵떵댈만큼 베를린은 국제적인 미술의 중심 도시임을 자부한다. 특히 아우구스트스트라세 거리(Auguststrasse)는 현대 미술계에서 이미 궤도에 오른 기성 유명 미술인이나 미술계 스타를 꿈구는 미술가 지망생 할 것없이 한 번쯤은 포트폴리오를 선보이기 위해 혹은 다른 미술가들의 전시회를 구경하러 오가게 되는 꿈의 거리이다.

베를린 화랑업계의 전설적인 인물 게르트 해리 륍케 (Gerd Harry Luebke – 최근 초호가를 누리고 있는 동독 출신 화가 네오 라우흐를 발굴한 인물)가 운영하는 갤러리 아이겐+아트 (Galerie EIGEN+ART)는 본래 1980년대초에 옛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운영해 오던 같은 이름의 화랑의 분신이다. 영국의 개념주의 미술을 즐겨 다루며 후원하는 쉬퍼 & 크로메 갤러리 (Galerie Schipper & Krome), 영국 팝아트와 독일출신의 거물급 화가 알렉스 카츠를 대표하는 바바라 툼 갤러리 (Galerie Barbara Thumm) 등은 국제급 해외 미술과 독일의 미술이 한자리에 만나는 곳이다.

급박하게 변화하는 사설 현대 미술 화랑들의 숨가쁜 행진에서 잠시 물러서서 베를린 개인 컬렉터들의 소장품들이나 논리정연하게 기획된 특별 전시를 감상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직물업계의 갑부인 에리카와 롤프 호프만 부부가 설립한 잠룽 호프만  (Sammlung Hoffmann) 현대 미술 컬렉션은 게르하르트 리히터 (Gerhard Richter), 지그마르 폴케 (Sigmar Polke), 프랭크 스텔라 (Frank Stella) 등 독일과 미국의 대표적 거물급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잠룽 호프만이 있는 건물 아래층에는 갤러리 컨템포러리 파인 아츠 (Galerie Contemporary Fine Arts)는 고급 주택가가 모여 있는 샬로텐부르크  (Charlottenburg)에서 이곳 미테로 이전해 온 현대 미술 전시장이다.

베를린-미테 말고도 지금은 터어키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크로이츠베르크 (Kreuzberg) 구역 사이에 위치한 침머스트라세 (Zimmerstrasse) 거리도 90년대 중엽부터 사설 화랑들이 속속 들어차 있는 거리이다. 쾰른에서 온 국제 현대미술 전문 화랑 막스 헤츨 갤러리 (Galerie Max Hetzel), 뉴욕 첼시 화랑가와 베를린을 오가며 분주하게 운영되는 디일 갤러리 (Galerie Diehl), 대대로 내려오는 화랑 가문이 운영하는 콜로스터펠데 갤러리 (Galerie Klosterfelde)도 베를린 현대 미술를 이끄는 주요 플레이어들이다.

하루해가 저물고 해가 뉘엿뉘엿해 지는 저녁 시간 6시 이후 경이면 베를린-미테 구역에서는 거의 매일 화랑과 전시장 여기저기서 전시 오프닝 파티가 열린다. 그러나 어느 화랑에 가나 어쩔수 없이 화랑에서 전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작가의 수 보다는 다른 작가의 전시회에 가서 남들이 어떤 작품을 하는지 확인하며 자신의 네트워킹 기회를 잡으러 가는 무명 작가들의 수가 훨씬 많다. 오늘도 꿈을 잔뜩 안고 재능을 펼쳐 보이고 싶은 열망에 찬 미술인들은 베를린-미테 화랑가를 오가고 있다.

* 이 글은 본래 NOBLESSE 2005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프란시스 베이컨 – 20세기 영국 표현주의 회화의 거장

FRANCIS BACON AND THE TRADITION OF ART

2013년 11월12일 화요일 뉴욕 크리스티 미술경매소에서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루시안 프로이트를 모델로 한 습작 3부작(Three Studies of Lucian Freud)』이 1억4천2백4십만 달러(우리돈 약  1천5백2십여억원)에 낙찰되어 미술경매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에 낙찰된 미술작품이 되었다. 작품 보기

82세까지 승승장구하던 프란시스 베이컨이 마드리드를 방문하던 중 평생 지병이던 천식이 폐렴으로 악화되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며 미술계를 놀라게 했던 1992년. 특히 영국 미술계 인사들과 언론계에서는 생전 베이컨이 활동 말기 20여년 동안 작품제작을 했던 런던 작업실에 대한 뒷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고희가 넘어서도 베니스 비엔날레와 전세계 유명 미술관을 통한 전시회를 통해서 예술성을 인정받고  명성을 누리며 성공한 미술가의 인생을 살았던 그는 사적으로는 공개적인 동성연애자였으며, 별난 캐릭터를 가진 기인이자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 또 동료 미술가와 미술계 인사들 사이서는 너그럽고 인심좋은 인물로 소문난 사교계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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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앵그르의 외디푸스와 스핑크스에 바침』 1983년,  캔버스에 유채 The Berardo Collection, Sintra Museum of Modern Art, Lisbon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프란시스 베이컨 – 20세기 영국 표현주의 회화의 거장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설가, 작가, 평론가인 알베르토 망겔 (Alberto Manguel)에 따르면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의 그림들이 그토록 일반 관객들에게 깊이 감명을 안겨주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유는 작품의 독창성 외에도 남다르게 정열적이고 극단적이었던 화가의 성격과 일대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모름지기 관객들은 화가의 성격과 생애를 알고 나서 작품을 대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작품에 대한 친밀감과 묘한 애착까지 키우게 되는 때문이다.

1909년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 1992년 스페인 마드리드 사망. 비밀스러운 작업실의 소유자이자 유럽 곳곳을 떠돌며 다채로운 애정행각을 서슴치 않았던 정열의 동성연애자. 인간의 고독, 잔혹, 공포를 주제 삼아서 주로 인간의 신체나 인물화로 표현한 영국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이 20세기 서양 미술에 기여한 독창성과 미술사에서 점하고 있는 위상과 작품세계는 유난히 기인적인 한 평생을 살고 간 그의 일생에 못지 않게 별나고 흥미롭다.

그의 사후, 이전까지만해도 신비로 둘려싸여 있던 그의 작품 세계와 작업실에 대한 비밀이 하나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혹은 화가에 의해 직접 찢겨 망가뜨려진 캔버스 조각들, 여러 고서적과 잡지에서 오려져 흩어진 사진들과 책갈피 스크랩, 물감으로 덕지덕지한 작업실 벽 등 화가의 창조 공간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작업실 사물들과 산만함은 물론이려니와, 생전 그림을 그려 판 수입의 상당에 대한 세금 납부의 의무를 상습적으로 피해 온 탈세자였음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해 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은 화가가 태어난 도시 더블린에 가면 런던에 있던 그의 리스 뮤스 스튜디오 (Reece Mews Studio)는 이제 휴 레인 갤러리 (Hugh Lane Gallery)로 이전되어 예전 모습 그대로 재현된 채 전시되고 있어 그의 옛 작업실 분위기를 경험해 볼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공포, 잔혹, 고독을 표현한 외톨이 화가
근현대 미술사를 되돌아 보건대, 20세기는 전에 없이 다양한 사조 (ism)와 화파들 (schools)이 각축을 벌이며 이념적∙미학적 실험을 거쳤던 시절이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태어나 성장한 청년기 유럽은 양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격동의 세월이었으며 이를 배경으로 우후죽순 등장한 미술 운동이 각축을 벌이던 창조적 폭발기이기도 했다. 베이컨도 예외없이 그같은 전유럽적 창조적 기운에 영향을 받았다.

사춘기의 화가는 – 역사적 추측에 따르면 화가의 동성애적 기질을 문제 삼았던 – 부모와의 갈등과 충돌 끝에 1925년 16살 나던 해 고향 더블린을 떠나 런던으로 떠났다. 이듬해 베이컨은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매료를 느껴 베를린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독일 바우하우스 (Bauhaus) 전통의 가구 디자인과 장식 미술을 배워와 런던에서 잠시나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베이컨의 예술적 감성을 뒤흔든 당시  미술은 뭐니뭐니해도 1920년대 초현실주의 (Surrealism)와 피카소 (Pablo Picasso)의 회화 세계였다. 베이컨은 특히 초현실주의에 영감받았던 1920년대말경 피카소의 그림을 매우 아끼고 흠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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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실내 풍경 (Studio Interior)』 1934년경, 종이에 파스텔, Marlborough International Fine Arts, Photo: Herbert Michel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베이컨이 그린 1934년경 작 『작업실 실내 풍경 (Studio Interior)』(말보로 인터내셔널 파인 아트 갤러리 소장)은 그보다 약 15년전인 1928년에 피카소가 그렸던 『탈의실 문을 열고 있는 여인 (Bather opening a Beach Hut)』(파리 피카소 미술관 소장)의 유기적 형상에서 직접 영향 받아서 베이컨식으로 해석한 초기작이다.

20세기초 유럽 화가들은 흔히들 제각각의 미적 이념과 이론적 정당화를 위해서 비슷한 생각과 주장을 공유하는 동료 예술인들과 화파를 형성해 활동하곤 했다. 하지만 독불장군, 외톨이 화가 베이컨은 독학 화가였다. 호주에서 영국으로 온 무명 화가 로이 드 메스트르 (Roy de Maistre)로 부터 잠시 받은 그림 사사가 베이컨이 화가가 되기까지 받은 미술 교육의 전부였을 뿐 단 한번도 정식 미술 교육 기관이나 학교 신세를 지거나 그 어떤 화파에도 소속된 적 없는 외톨이 화가였다.

흔히 베이컨 미술 전문가들은 베이컨의 미술 경력에서 1920년대를 베이컨 양식 형성의 출발기라고 규정하며, 제2차 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를 넘어서야 비로소 양식의 완성단계를 이룩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캔버스와 물감을 갖고 실험을 거듭하던 젊은 화가 지망생 베이컨은 습작 대다수를 스스로 찢어 버리거나 불태워 없앴던 이유로 해서 오늘날 그의 초기작품은 거의 확인해 볼 길이 없는게 안타깝다.

비록 미술 학교에 발을 디뎌본 적 없는 독학 화가 베이컨이지만 미술 이외에도 문학, 영화, 음악 등 예술 다방면을 넘나드는 왕성한 예술 향유가였다. T.S. 엘리엇 (T.S. Eliot),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같은 근대 문호들의 문학 세계에 익숙해 있었으며, 영화에도 조예가 깊어서 에이젠슈타인에서 비스콘티에 이르는 근현대 거장 영화인들과 개인적인 친분까지 맺으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젊은 시절부터 널리 여행해 본 경험 덕택에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와 스페인어도 할 줄 알았다. 미술 분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베이컨이 열정을 바쳤던 과거 거장들은 스페인 바로크 미술이 거장 벨라스케즈 (Velázquez), 렘브란트 (Rembrandt), 앵그르 (Ingres), 반 고흐 (Van Gogh), 수틴 (Soutine) 등 이었으며, 고대 이집트 미술과 그리스 미술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제2차 대전 이후 유럽 개인주의 미술의 최전선
20세기에 범람했던 온갖 이즘과 사조의 홍수 속에서 모든 미술인들이 화파나 동인을 형성해서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2001년도에 작고한 신비의 화가 발투스 (Balthus), 이탈리아의 조각가 쟈코메티 (Alberto Giacometti), 아르브뤼 (Art bru)의 쟝 뒤비페 (Jean Dubuffet) 등은 모두 유행하던 미술 사조와 상관없이 개인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한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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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벨라스케즈의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을 본딴 습작』 1953년, 캔버스에 유채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20세기 전반기 유럽을 뒤흔든 양차 세계 대전과 각종 미술 운동에 이어 20세기 후반 뉴욕에서 이어 숨가쁘게 전개된 전후 추상표현주의 운동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마크 로드코 등 포함)과 개념주의 미술 사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이컨은 런던에 남아 거주하면서 아무런 미술 운동이나 화파에 소속되지 않은채 홀연히 작업했다. 그래서 베이컨은 추상주의, 기학주의,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또 스스로를 어떤 특정한 화풍을 대변하는 화가로 규정하거나 지칭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영국 BBC 라디오 대담(1962년)이나 『타임스』 紙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터뷰 기사(1963년)를 돌이켜 보면, 그는 고전주의 화가도 그렇다고 추상 화가도 아닌, 화가 내면에 지닌 개인적인 공포와 강박관념을 폭력적이고 보기 불편스러운 이미지로 들추어 표현하는 아마츄어 집착적 망상가가 직업적 화가 (畵家)로 화신 (化身)한, 말하자면 ‚20세기 시대정신 (Zeitgeist)’이었다.

1950년 이집트 카이로 여행에서 젊고 패기넘치는 미술 평론가 데이빗 실베스터 (David Sylvester)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베이컨은 특히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평론가 실베스터를 통해서 자신의 미술세계를 해명하곤 했으며,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에서 초대작가로 작품을 선보인 것을 계기로 국제 화단에 본격적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당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된 베이컨의 12점 작품들 가운데 『벨라스케즈의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을 본딴 습작 (Study after Velàs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1953년 작)은 커다란 반향과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다.

베이컨이 묘사한 이노센트 10세 교황은 17세기 살았던 복싱 링을 연상시키는 노랑색 우리에 갖힌채 얼굴 가득이 보라색 히스테리에 질려 절규하고 있다. 기독교 교권이 패권을 잃은 후 종교적 방향을 상실하여 세속화된 근대 사회라는 새 철창 안에 갇힌 20세기 근대인의 자화상이다. 미술평론가 실베스터와 가진 몇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서 마치 뭉크의 『절규 (Scream)』 처럼 20세기의 공포의식, 고독, 인류의 절박감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베이컨을 설명한 바 있다.

이 그림에서 노랑색 세로줄로 표현된 강박적인 분위기는 티치아노 (Titian)가 16세기에 그린 『필립포 아르킨토 추기경 초상 (Portrait of Cardinal Filippo Archinto)』(1551-62)에서 영감받은 요소로, 티치아노가 그린 아르킨토 추기경 얼굴을 가리막이로 반쯤 가려놓고 묘사한 데에서 따 온 것임을 미뤄볼 수 있다. 아르킨토 추기경은 르네상스 시대에 밀라노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정치적인 음모에 휘말려 권좌에서 실추된 바 있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교황이라는 막강한 종교적 정치적 권위의 인물조차 편지풍파와 운명 앞에서는 가녀린 한 인간에 불가함을 말해 주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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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반 고흐 초상화를 위한 습작 제6번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VI)』 1957년, 캔버스에 유채, London, Arts Council Collection and Hayward Gallery © The Estate of Francis Bacon/VBK, Wien, 2003

벤 니콜슨 (Ben Nicholson)과 루시안 프로이트 (Lucian Freud)와 더불어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 화가로서 인정을 받은 베이컨은 1956년 생애 최초로 자화상 그리기를 시작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이컨은 책에 실려 인쇄된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그림인 『타라스콘의 거리 화가 (The Street Painter of Tarascon)』(1888년 작)를 발견하고 자화상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반 고흐의 『타라스콘의 거리 화가』 자화상은 제2차 대전중에 독일에서 소실되어서 더 이상 진품을 확인해 볼 길이 없는 아쉬운 작품이 되버렸지만 인쇄판이나마 베이컨에게는 자화상 제작에 촉매제가 되어 준 요작이 되어 주었다. 『반 고흐 초상화를 위한 습작 제6번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VI)』(1957년 작)은 반 고흐의 자화상에서 영감받아 그린 총6편의 자화상 연작들 가운데 마지막 6번째 작품이다.

육신 살덩어리 그리고 죽음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베이컨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던 1962년에 완성된 문제작 『십자가에 못박힘 3부작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1962년 작)은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되어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전시장 디스플레이를 위해 운반되었고, 전시가 끝나자 마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구입해 가져갔다던 그 화재의 그림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도살장과 동물의 살덩어리 그림에 매료되고 했다…아! 죽음의 냄새…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에 목박힌다 함은 전혀 다른 [종교적] 의미 를 띠고 있음을 알지만 무신론자에게 도살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행위의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베이컨은 이 작품의 제작 동기를 설명했던바 있다. 이 작품은 차임 수틴 (Chaim Soutine)이 한창 도살장 그림 작업에 매료되어 있을 즈음인 1925년에 파리 작업실에서 그린 『도살된 숫소 (Slaughtered Ox)』 그림과 창작 동기를 함께 하고 있지만, 베이컨은 사진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겼고 수틴은 도살장에 직접 가서 관찰한 것을 그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1962년 런던 테이트 회고전, 1963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1967년 미국 피츠버그 세계박람회 카네기 미술대상 수상 [베이컨은 이 상 수상을 거절했다.], 루벤스 미술상, 1968년 런던과 뉴욕에서 말보로 갤러리 전시회, 1971년 프랑스 그랑 팔레 (Grand Palais) 개인전 등 베이컨의 커리어 행보는 그야말로 숨가쁜 속도로 상향행진을 계속했고 전세계 미술계는 프란시스 베이컨을 20세기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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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십자가에 못박힘 3부작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 1962년, 캔버스에 유채와 모래 가루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그는 주로 작업실에 밝고 선명한 자연광이 들이치는 아침 시간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오후와 저녁 시간에는 맥주집과 바에서 동료 미술가와 친구들과 만나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충직한 미술 친구 쟈코메티와 프로이트 외에도 베이컨의 친구 겸 초상화 모델이 돼 주었던 피터 레이시 (Peter Lacy), 조지 다이어 (George Dyer) ,미셸 레리 (Michel Leiris), 친구이자 『보그 (Vogue)』 誌 사진가였던 존 디킨 (John Deakin), 친구 존 에드워즈 (John Edwards) 등은 다 60년대에 만난 보물같은 친구들이었다. 정말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세월이었다.

초상화 – 불멸을 향한 몸부림 그러던 1971년 봄, 조지 다이어가 베이컨이 머물던 파리의 한 같은 호텔방에서 자살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봄 사진가 존 디킨이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베이컨은 전에 없이 자화상을 주력해서 그렸다. 사진가 역할을 해 주던 존 디킨이 사라진 후 베이컨은 거리의 즉석 사진자동 판매기에서 여권 사진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어 자화상으로 옮겼다. 왜 70년대 이후로 유독 자화상을 즐겨 그리기 시작했느냐는 평론가 실베스터의 질문에 „주변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사라져 갔기 때문“이라고 화가는 대답했다.

1973년의 초상화 3부작 『3편의 초상 – 조지 다이어 초상, 자화상, 루시안 프로이트 (Three Portraits – Posthumous Portrait of George Dyer, Self-Portrait, Portrait of Lucien Freud)』>은 이렇게 해서 그려진 초상화 연작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보다 3년후에 그려진 『미셸 레리의 초상 (Portrait of Michel Leiris)』는 프랑스인 지성인 소설가 미셸 레리를 모델로 해 그려진 초상화로서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한  얼굴 모양을 일부러 비대칭적으로 일그러뜨려 표현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위대함과 무의미함 사이의 간격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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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미셸 레리의 초상』 1976년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자화상의 대가 렘브란트는 생전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현재 빈 미술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1657년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생애 말년기 경제적  수난으로 일그러지고 흉칙해진 화가 자신의 얼굴을 기록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이 베이컨을 매우 감명시켰던게 분명하다.

과제로 남아있는 베이컨 신화 풀기 일단 미술사 교과서에 거장으로 거론된 화가의 이름은 웬만해서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미술평론가 데이빗 실베스터가 1962년부터 1986년까지 베이컨을 상대로 한 마라톤 인터뷰를 펼쳐가며 베이컨의 미술 세계에 대한 화가의 해명을 기록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프란시스 베이컨의 창작 동기, 영감의 원천, 재료 활용 방식과 테크닉 등에 관한 비밀은 거의 규명이 되었지만, 정작 과거 서양 미술의 대가들의 작품 세계와 베이컨의 회화 세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은 아직도 해결을 기다리는 중대한 연구과제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베이컨 사후 10년여년이 흐른 지금,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술의 전통 (Francis Bacon and the Tradition of Art)』 展이 겨냥하고 있는 바는 베이컨 미술이 과거 거장들의 작품 세계로 부터 받은 영감이 어떻게 재해석 창조되었는가를 조명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베이컨이 과거 서양 미술의 거장 화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모 (模)하고 재해석한 작품만을 만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독학 화가로서 과거 거장들과 동시대 주변 예술인들의 그림, 조각, 사진, 영화 등을 부지런히 모으고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 영감을 찾았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세계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다.

1987년 파리 르롱 갤러리에서 열였던 베이컨 전시회를 두고 프랑스 언론이 “베이컨 신화 (Bacon Myth)”라고 부르며 의문을 제기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술의 전통”전은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서 내년 1월 18일까지 전시를 계속하며, 이어서 스위스 바젤 근방 도시 리헨 (Riehen)에 있는 바이얼러 재단 갤러리(2004년 2월7일-6월20일)로 옮겨 전시를 계속할 예정이다. Images courtesy: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 지 2003년 1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