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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된 귀족녀 – 타마라 데 렘피카

Glamorous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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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서 병회복중인 여인』 1932년 목판 위의 유화. 개인 소장© VBK, Wien, 2004.

나른과 호색의 아름다움에서 헐리우드 글래머로 잠자리에서 방금 일어나 앉은듯 퀭하고 나른한 눈길의 여인. 값비싼 비단과 우단의 광채가 흐르는 외투 차림을 한 귀족 남성. 쇼울을 두르고 자욱한 담배 연기를 뿜으며 유혹하는 풍만과 에로스의 여인 – 아르데코 미술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여류 화가 타마라 데 렘피카 (Tamara de Lempicka)의 초상화들은 최근 미술계와 컬렉터 사회에서 외면하고 지나칠 수 없는 미술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코코 샤넬과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재단한 파리 오띄 쿠튀르 의상을 완벽하게 차려 입고 1920년대 파리와 1930년대 LA 와 뉴욕 사교계를 드나들었던 타마라 데 렘피카는 흡사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 (Greta Garbo) 또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Marlene Dietrich)의 자매 격은 능히 되고도 남을 만큼 퍽 세련되고 현란한 외모를 자랑한 사교계 미녀이자 직업 화가였다.

나른한 눈매와 선홍색 립스틱으로 화장을 하고 초록색 부가티 자동차 안에 몸을 싣고 앉아 있는 여인은 바로 다름아닌 타마라 데 렘피카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본래 독일 여성잡지 『디 다메 (Die Dame)』 誌의 표지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아서 제작된 이 작품에서 고급 이탈리아제制 스포츠카인 부가티 (Bugatti) 자동차는 거칠 것 없이 전진하는 ‚스피드 (speed)’를 상징한다.

운전대를 쥐고 있는 주인공은 그 어떤 남성 배우자나 운전기사 없이도 홀로설 수 있는 독립된 여성상과 ‚여성 해방주의’를 거침없이 내뿜고 있다. 머리에 꽉 끼는 아르데코풍 에르메스 패션 모자와 긴 팔목 가죽 장갑으로 치장하고 화장기 짙은 매혹과 ‚글래머’를 잔뜩 발산하는 주인공의 초상은 1920년대 여성들이 꿈꾸던 신여성상을 한 편의 그림 속에 모조리 구현한, 이른바 ‚팜므 파탈 (femme fatale)’ 이미지의 종합 결정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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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끝물경 파리의 하이소사이어티에서 가장 인기있는 초상화가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면서 본격적인 호가로서의 커리어를 굳히기 시작한 그녀가 자신감에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한 편의 초상화로 담은 1929년 완성작 『자화상』.

근대와 신여성, 럭셔리와 글래머, 극도로 세련되고 다듬어진 아름다움, 개인주의와 성해방이라는 서구 20세기 초엽의 신사고를 핵심 주제어로 삼고 구축된 타마라 데 렘 피카의 아르데코 미술 세계와 팜므 파탈 (femme fatale des Art Deco) 이미지들이 유명인들과 연예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무대와 은막을 강타하는 화려한 조명과 반들거리는 광채, 다소 드라마틱하다 싶을 만큼 연출된 초상 주인공들의 표정과 제스쳐, 배우들 가슴속 깊숙이 자리잡은 부와 명성에 대한 야심 등은 1920-30년대 헐리우드 영화계에서 은막을 뒤흔든 스타들을 실제 삶과 영화 속 시나리오와 너무도 흡사하다. 타마라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부와 명성, 쾌락과 환상을 오가며 생활하는 사교계 유명인사들이나 인기 연예인들 바로 자신의 자화상인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타라마 데 렘피카는 1930년대말에 독일 나치군을 침략을 피해서 – 그녀의 혈통은 부분적으로 유태계였기 때문이다 – LA로 이민을 온 이후로 그림그리기를 계속하던 중에 『어느 아름다운 근대식 아텔리에 (Un bel atelier moderne)』라는 단편 영화에 디바 여주인공으로 직접 연기하기까지 했다.

폴 포아레 (Paul Poiret) 가 제작한 영화 『비인도적인 (L’inhumaine)』(1923년), 아르데코 스타일 전형의 팜므파탈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 (Greta Garbo)가 출연한 영화 『키스 (The Kiss)』(1929년), 루비 킬러 (Ruby Keeler)와 진저 로저스 (Ginger Rogers)가 출연한 뮤지컬 영화 『42번가 (42nd Street)』, 진저 로저스와 프레드 에스테어 (Fred Astaire) 주연의 뮤지컬 영화 『탑 햇 (Top Hat)』(1935년) 등은 모두 타마라 데 렘피카가 그림 속에 묘사했던 시대적 사고방식과 유행 감각이 영화 필름으로 재현된 대표작들이다.

그래서일까. 타마라 데 렘피카의 작품은 요즘들어 유독 구미의 유명인들 사이에서도 너나없이 한 점씩 갖고 싶어하는 인기 수집용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다. 헐리우드에서는 유명 배우 잭 니콜슨이 타마라 데 렘피카의 그림 한 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최근 미술품 수집에도 손을 뻗힌 팝음악계의 여왕벌 마돈나도 2점을,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도나 캐런이 한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독일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볼프강 요옵도 최근 타마라 데 렘피카의 작품을 여러점 사들여 개인 미술품 컬렉션을 한층 더 부풀리고 있는 데 렘피카의 애호가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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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작의 초상』 1926년경 그려진 유화로 높이 1미터가 넘는 (크기 116 x 65cm) 대작이다. 현재 미국 헐리우드 영화배우 잭 니콜슨의 개인 소장품이다. J. Nicholson, Beverly Hills, California © VBK, Wien, 2004.

서양 미술의 고전미와 감각적인 스타일은 20세기 근대인들 외에도 오늘날 현대인들의 눈에도 쉽게 친근감을 주는 대중적 위력을 발휘함을 입증하고 있다.

2004년초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Victoria & Albert Museum, London)에서 큰 대중적 성공을 거뒀던 『아르데코 (Art Deco)』展은 곧 같은해 봄 미국 보스턴에 있는 파인 아트 뮤지엄 (Museum of Fine Arts Boston)으로 옮겨져서 다시 한 번 아르데코 미술에 대한 대중 관객들의 관심을 한껏 불지폈다.

20세기 양차 대전 사이 기간인 1920-30년대에 반짝 등장했다가 자취를 감춘 아르테코 미술 운동은 본래 파리와 뉴욕을 연결하며 유행한 실내 장식과 디자인 분야의 응용미술 운동이었지만, 정작 이 『아르테코』전을 통해서 현대인들 사이에서 대중적 주목을 받으며 재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타마라 데 렘피카의 그림들을 통해서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아르데코 미술에 대한 대중 관객들의 관심을 반영하기나 하듯,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 미술관에서는 서둘러 미술 전시 사상 처음으로 타마라 데 렘피카의 개인전을 기획하여 5월 중순부터 8월말까지 전시로 부쳤고, 같은 전시는 작년 가을 9월 중순부터 빈으로 옮겨져서 올해 1월초까지 순회전을 계속한다.

화려, 낭만, 퇴폐, 드라마로 그득한 그녀의 작품 세계 못지않게 여류 화가 타마라 데 렘피카의 예술 한평생도 파리의 보헤미풍 낭만, 헐리우드식 글래머, 퇴폐와 쾌락의 화신, 신여성이 가부장적 체체로부터 해방의 심볼을 그녀와 미술과 예술 인생으로 모조리 구현한 그 자체 한 편의 드라마였다.

기록에 따르면 신비의 여인 타마라 데 렘피카는 마리아 고르스카 (Maria Górska)라는 이름으로 1898년 모스코바에서 돈많은 폴란드인 어머니와 러시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녀의 정확한 생년월일과 출생도시(그녀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에 대한 진실은 다소 분분한채로 남아 있다.

근대 전환기 러시아 상류사회의 부유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덕분에 타마라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성격의 주인공으로 러시아 상류층에서 사교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14세라는 지금으로 보면 어린 나이에 타데우즈 렘피키 (Tadeusz Lempicki)라는 이름의 귀족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의 서약을 맺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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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드레스』 1927년도 유화작품. Caroline Hirsch 소장 © VBK, Wien, 2004.

얄굳은 근대 역사의 흐름은 갓 결혼한 렘피카 부부가 신혼의 단꿈을 채 맛보기 시작할 무렵 그 둘을 러시아로부터 몰아냈다. 때는 1912년 짜르 귀족 체제가 전면 몰락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기였고, 귀족 상류계층 출신이라는 이유로 렘피카 부부는 어린딸 키제트 (Kizette)를 데리고 1919년에 프랑스 파리로 피신했다.

변호사 남편이 새 보금자리인 파리에서 직장을 찾지 못한채 고전을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 심각한 생계의 위기에 내몰린 타마라 데 렘피카는 어린 시절 깊숙이 감춰 두고 있던 미술에 대한 열정을 되살려 직업적인 화가업을 생계 수단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상류층 사교계로 재진입하고 싶어했던 그녀의 사회적 지위욕 때문이었든 아니면 임박한 생계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임기응변력 때문이었든, 이렇게 직업적 화가로서 첫 발을 내디디게 된 타마라 데 렘피카의 출발은 성공적이었던듯 하다. 먼 훗날 딸 키제트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어머니 타마라는 ‚킬러의 본능’으로 직업 화가로서 그리고 파리 사교계 인사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벌여나갔다고 했을 만큼 성공을 향한 집념은 요즘 시대의 맹렬 직업여성들의 그것을 방불케하는 것이었다.

직업적 화가로 인생을 개척할 것을 결심한 타마라가 겨냥한 미술 세계의 목표 의식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화려하고 풍족했던 성장 경험, 어린 시절 이탈리아로의 미술 여행, 광채와 화려로 가득한 부유층 사교계에 대한 익숙함과 개인적 친화성 등은 그녀가 아르테코풍 그림그리기로 뛰어드는데 직접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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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토프 왕자의 초상』 1925년도작 유화, 65 x 92cm. Courtesy: Barry Friedman Ltd. New York 개인 소장품 © VBK, Wien, 2004.

파리에 당도해서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는 그랑 쇼미에르 미술 아카데미 (Ad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 입학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풍 그림을 열심히 관찰하여 배끼는 수업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상징주의파 화가 모리스 드니 (Maurice Denis)에게 사사하면서 당시 고갱을 위시로 해 한창 유행하던 상징주의와 색면주의풍 그림을 배웠다.

그러나 결국 타마라가 이 엄격하고 완벽주의자인 것으로 정평이 높던 스승 모리스 드니로 부터 1년 동안 사사한 결과 얻은 것은 그림의 스타일 보다는 그림그리기 작업 과정이 요하는 자기 규율과 완벽주의적 태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타마라 데 렘피카가 그녀만의 야한듯 화려하고 조명을 받은듯 화려한 초상화 세계를 구축하기까지 끼친 결정적인 스승은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20세기초 파리에서 화가 겸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던 앙드레 로테 (André Llote)였다. 오늘날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다소 낯설은 이름이지만 당시 20세기 전반기 서양 근대 미술을 중심지인 파리에서 앞다투어 전개되고 실험되던 온갖 미술 사조와 유행을 손바닥 처럼 알고 있던 앙드레 로테는 타마라가 파리 상류층 미술 애호가들과 사교계 인사들의 입맛에 딱 맞는 그림 양식을 찾아내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타마라는 로테의 아텔리에에서 사사를 받고 있던 때는 바로 20세기 미술의 거장인 피카소가 피사체를 수많은 정방형 형상으로 분해해석하여 그리는 이른바 ‚종합적인 큐비즘 (synthetic cubism)’을 한창 실험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유행이 유행었던 만큼 타마라는 그녀가 그리기 좋아하는 고전주의풍 여성 누드 그림을 피카소식 큐비즘 양식과 섞어서 그려보기도 했는데, 예상대로 사교계와 부유층 그림 고객들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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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캔버스에 유화 그림 1927년도 작. 뉴욕 Toni Schulman 소장품 © VBK, Wien, 2004.

타마라 데 렘피카가 여성 누드를 주로 그리기로 결정하게 된 데에는 당시 1920년대 파리의 퇴폐문화의 유행에도 눈설미 있게 적절히 응한 결과였다. 때는 파리에서는 최초로 흑인 여성 무용가 조세핀 베이커 (Josephine Baker)가 바나나 껍질로 만든 스커트를 입고 무대에서 춤을 추면서 아프리카의 여성의 이국적 에로티즘과 원시주의를 발산하며 근대 미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할 때였다.

또 그런가 하면 대서양해 건너 미국 뉴욕에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은 아르데코식 초고층 마천루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가는 가운데 도시적 섹스 판타지와 시크함이 건축과 실내장식 미술로 급격하게 번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예술과 낭만의 파리 레프트뱅크에 살면서 무기력과 생활고에 찌든 남편을 뒤로 한채 동성애에 잔뜩 탐닉하는 것으로써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했던 공공연한 레즈비언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선언이나 하듯,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인 앵그르의 19세기풍 그림 『터어키 탕』을 본따서 타마라가 아르데코풍으로 재해석한 여성 집단 누드화는 파리 부르조아들 사이에서 드높은 인기를 끌었다.

자신이 그린 초상화 속 미인들에 못지 않게 그녀 자신이 늘씬한 곡선미와 화려한 화장과 옷차림을 한 아르데코풍 디바 겸 욕망의 여신으로 사교계에 등장하길 좋아했던 적극적인 자기PR가 타마라 데 렘피카. 그렇다고 해서 이 섹스와 욕망의 화신이 밤인생과 파티 세계 만을 주름잡은 방탕녀였기만 했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스승 모리스 드니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그녀는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을 아텔리에 밖혀 그림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던 일중독자이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는 당시 파리 여러 소규모 개인 화랑은 물론 페미니즘 성향의 파리 근대 여성 화가 살롱과 밀라노의 개인전 출품을 위해서 작업에 열중했다. 그같은 전시 발표 기회를 통해서 사교계에 발을 넓히고 자신의 그림을 주문해 줄 후원자를 찾는 일은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못지 않은 중대한 전략이었던 때문이다. 어려운 파리로 이민온 후 실질적인 가장이 된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림그리는 일은 예술로 여가를 삼은 낭만과 자기성취의 취미활동이 아니라 생계 유지라는 보다 절박하고 실용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직업활동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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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꽃이 있는 아를레트 부카르의 사진』 베니어 합판 위에 유화 그림 1930년작. 이 작품은 독일출신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볼프강 요옵이 소장하고 있다. Sammlung Wolfgang Joop © VBK, Wien, 2004.

하늘은 무심하시지 않았는지 곧 타마라 데 렘피카의 가차없이 맹렬한 직업적 미술 활동은 얼마안가서 부와 명성이라는 댓가로 확인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잦아드는 상류층 인사들의 초상화 주문으로 바빠졌지만 덕분에 그로 모은 돈으로 파리 예술인 구역에 저택 아파트를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았다.

파리의 유명한 내과 의사 피에르 부카르 (Pierre Boucard) 박사는 온 가족의 개인 초상화를 포함해서 타마라가 즐겨 그리던 레즈비언풍의 집단 여성누드화를 무더기로 주문했다. 또 독일 귀족 퓌르스텐베르크-에르드린겐 백작은 타마라의 손을 빌어 프랑스 해군 복장과 베레 차림의 초상화를 그려 갔다.

그런가하면 사교, 소비, 향락을 존재이 이유로 삼고 살던 구시대 귀족들은 스스로를 조롱하는듯 표현한 화가의 풍자적 시각을 내심 좋아했던 것 같다. 러시아 짜르 왕가의 사촌뻘 귀족인 가브리엘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작도 군복 차림을 한채 놀랍도록 공허하면서도 냉소적인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핑크 드레스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프랑스 귀족 로마나 데 라 쌀르 공작 부인의 초상화도 특유의 위풍장대한 초대형 규모의 캔버스 위에 주인공 특유의 권위 의식과 생에 대한 씁쓸함이 교묘하게 섞여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특이작이다.

그녀는 우선 특유의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을 한껏 발동시켜서 그림 모델에서 부터 상류층 사교계 남성들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상대를 애인으로 만드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 마력의 여성이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컨대, 그녀가 자신의 여성 초상화의 모델로 세웠던 라파엘라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젊은 여성은 한 늦은밤 타마라가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유혹한 거리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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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나 드 라 쌀르 공작부인의 초상』 1928년도 유화작품. Sammlung Wolfgang Joop © VBK, Wien, 2004.

1929년 남편 타데우즈와 이혼한 후, 타마라는 머리끝부터 팔목까지 휘황찬란하고 요란한 보석과 장신구로 꾸미고 파티장에 등장하곤 했는데 그러는 가운데 파리에 모인 여러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계 남성들을 하나둘씩 점령해 나갔다.

이탈리아 미래주의파 화가인 마리네티, 프랑스의 지성인 겸 미술인 쟝 콕토, 이탈리아의 귀족 사교가인 가브리엘 다눈초는 하나같이 타마라의 매혹적인 마력에 무릎을 꿇었던 그런 남성들이었다.

사교계 연인 나탈리 바니가 운영하던 여성 동성애자 클럽을 즐겨 드나드는 단골 마담 역할을 했으며, 프랑스의 문호 앙드레 지드와는 마약을 나눠 쓸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몰락해가는 구시대 귀족들과 상류 부르조아들의 취향에 봉사하는 사랑받는 초상화가로서 그리고 독립적인 미술가 커리어와 자유로운 신여성으로서의 인생을 한껏 누리던 타마라 데 렘피카는 파리에서의 어느 한 파티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온 한 열렬한 팬이자 컬렉터를 만나게 된다. 1933년 35세라는 나이로 그녀는 곧 20세 연상의 이 귀족 출신 라울 쿠프너 남작과 생의 두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어쩐지 그 후로부터 근 5년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정신과 병원과 요양원을 드나드는데 바빴고 여간해서 다시 그림붓을 잡지 못하고 만다.

귀족과의 결혼과 안정은 그녀를 움직이게 하던 힘 즉, 상류사회의 남성들, 젊고 매력적인 레즈비언 여성들, 화려한 파티장과 환락의 나이트클럽을 오가는 쾌락과 자유의 세계를 뒤로 해야 했던 데에서 오는 무기력함과 방향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38년 한겨울, 오스트리아의 한 한적한 휴양지에서 남편과 아침식사를 하던 타마라는 독일 나치군과 히틀러 청년단의 행진소리를 듣고 이내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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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II』 목판 위에 유화 그림으로 1930년대에 그려졌다. 패션 디자이너 볼프강 요옵의 개인 소장품. Sammlung Wolfgang Joop © VBK, Wien, 2004.

미국 LA 베벌리힐즈에서 머물던 타마라 데 렘피카는 파리 시절의 명성을 되살려 수많은 헐리우드 배우들을 모델 삼은 초상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제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뉴욕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타마라는 한동안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을 위시로 한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감명을 받고 1960년대에와서 한동안 고무 주걱으로 추상 회화 그리기를 시도해 보았지만 그녀를 정작 유명하게 해주었던 아르데코풍 회화의 성과나 예술적 완성도에는 감히 미치질 못했다. 어차피 타마라 데 렘피카는 추상 미술가가 아니었다.

저물어 가는 계급체제를 자조하던 귀족들의 냉소와 공허, 부유층 특유의 음탕한 눈초리와 거만한 태도, 철없고 젊은 여인네들의 자기도취 섞인 시선 – 진정 그녀가 능했던 것은 한 편의 캔버스로 차갑게 얼어붙은 듯 그녀만의 조형 언어로 승화시켜 누가 봐도 보기에 호감하고 대중적인 초상 이미지를 붓끝으로 표현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시대의 파란과 인간의 만가지 욕망은 한낯 덧없는 먼지와 같다고 말하려는듯, 타마라 데 렘피카는 멕시코의 한 작은 고을에서 92세라는 나이로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귀의했다. Photos courtesy: Kunstforum Wien.

* 이 글은 본래 『HAUTE』 지 2005년 1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포효하는 1920년대 – 아르데코 건축과 디자인

Art Deco : Post-modern or Zeitge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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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부르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가 1931년 젤라틴 실버 프린트로 찍은 뉴욕 크라이슬러 빌딩 사진 © 1994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아르데코 열풍 – 포스트모던인가, 시대정신인가? 신비와 우수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 (Greta Garbo). 이제는 미국 영화사의 전설적인 우상이 되어버린 1920-30년대 헐리우드 은막의 스타 진저 로저스 (Ginger Rogers)와 프레드 에스테어 (Fred Astaire). 지금까지도 마천루의 고향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며 그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Empire State Building)과 크라이슬러 빌딩 (Chrysler Building).

멋쟁이 댄디들이 호화로운 레스토랑 바에서 식사 전에 홀짝거리기 좋아하는 마르티니 (Martini) 칵테일. 자욱한 담배 연기 가득한 재즈 바를 그득이 메우고 있는 세련된 차림의 남녀와 그들을 흥겹게 해주는 듀크 엘링튼풍의 스윙 재즈 음악. 파리와 뉴욕을 이은 노르망디 (Normandie) 초호화 유람선 안팎을 장식한 호화찬연한 인테리어 스타일 – 아르데코 미술이 21세기의 현재에 와서도 일반인들의 뇌리에 각인해 놓은 불멸의 아이콘들이다.

새롭게 불어닥치고 있는 아르데코 미술 열풍
 요즘 [2003-5년] 아르데코가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흔히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서 20세기 모더니즘 계열 과 최근들어 업계와 대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현대 건축 및 디자인 계열의 작품들이 몇몇 유명한 거장들의 이름을 중심으로 각광받고 있어왔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현상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아르데코 (Art Deco)가 새로운 빛을 받으며 이 분야와 대중들 사이에서 때아닌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데코를 둘러싸고 불어닥친 후끈한 열기는 최근 서구 미술계와 미술 시장가에서도 최근 한 두 해 사이에 유독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같은 결과는 지난 한 두해부터 크리스티 (Christie’s)나 소더비 (Sotheby’s) 같은 국제적인 미술 경매시장과 국제박람회 행사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지기 시작한 아르데코 미술품 매출 성장과 선호도 상승도 한 몫을 하고 있지만, 보다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대형 박물관들이 선보이는 특별전시회를 통해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진 것이 그 이유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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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출시된 오번(Auburn) 851 스피드스터 컨버터블(디자인: Gordon Buehrig, 크기: 154.9 x 198.1 x 523.2 cm, 1927.8 kg (61 x 78 x 206 in., 4250 lb.) Michael G. Tillson III Photograph © Michael Furman. Courtesy, Museum of Fine Arts, Boston.

제작년 봄철,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 (Victoria & Albert Museum, London)에서는 사상 최초로 대규모의 『아르데코: 1910-1939』 종합전(2003년 3월 27-7월20일)이 열려서 언론계의 관심은 물론 일반 대중에 대한 아르데코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도모하는데 기여했다.

영국인들에게 아르데코 미학에 새로운 미각을 일깨워준 이 전시는 이어서 2004년 내내 캐나다 온타리오 (Royal Ontario Museum), 미국 샌프란시스코 (California Palace of the Legion of Honor in San Francisco), 그리고 보스턴 (Museum of Fine Arts in Boston, 2004년 8월22일-2005년 1월9일)으로 차례로 옮겨져서 미국의 박물관 관람객들을 잔뜩 매료시겼다. 이 블럭버스터 순회전은 곧 내년초 (2006년)부터 일본으로 옮겨져 아르데코의 열풍적인 행진을 계속할 예정이다.

가장 성공한 글로벌 예술양식 아르데코 미술에 대한 미술계와 대중의 관심은 분명 1930년대말 이 양식이 자취를 감추고 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다. 아르데코 양식이란 무엇이길래 최근 미술시장과 이 시대를 사는 대중 관람객들을 그토록 흥분하게 만드는 것일까?

아르데코는 20세기 초엽, 좀 더 구체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1910년경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하기 직전인 1939년까지 약 30년 가까이 동안  전세계로 펼쳐진 가장 글로벌적 예술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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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120 플리트 거리 (120 Fleet Street) 상에 위치한 데일리 익스프레스 신문사 건물은 1932년에 설계된 영국에서 가장 아르데코 다운 건축디자인의 예다.

헌데 아르데코 양식을 미학적인 측면에서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여간 난감한 면이 없질 않다. 제작년 런던 빅토니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 개관한 『아르데코:1910-1939』 종합전을 보고난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 紙의 미술 평론가 브라이언 시웰도 ‚아르데코 양식을 정의한다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나비 십 여마리를 핀 하나로 뚫어 고정하려드는 격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논평했다. 그만큼 아르데코 양식은 일목요연하고 간략한 단어와 문장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복잡다채롭기도 하고 또 일관성이 부족한 두리뭉실한 양식임을 의미한다.

파리를 출발로 유럽과 대서양 건너 미국, 중남미 멕시코, 중국 샹하이와 일본을 아우르며 돈많은 부유층부터 중산층 가정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시각 유행을 폭넓게 장악한 초막강의 국제 양식으로 출발했지만 곧 인류 디자인의 역사에서 가장 폭넓게 대중적 인기를 독차지했던 말하자면 가장 ‚민주적’인 디자인 양식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아르데코’라는 명칭이 처음 도래한 계기는 1925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장식 미술 박람회 (Exposition des Arts Decoratifs)였다. 장식미술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아르 데코라티프 (Arts Decoratifs)’ 두 단어 앞자를 하나씩 따서 조합한 단어 아르데코 (Art Deco)를 미술 양식의 정식 명칭으로 널리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960년대에나 와서였다. 아르데코는 20세기 전반을 통틀어서 최고의 폭넓은 대중적 인기와 보편성을 발휘한 스타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사가들에 의해서 한낱 깊이없고 절충적인 장식예술 정도로 밖에 취급받지 못했다.

21세기로 회귀한 아르데코
 그렇다면 그런 아르데코가 요즘에 와서 유독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이목을 독차지 하게 된 그 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아, 호화, 이국성, 쾌락, 글래머 – 아르데코는 과거 1920-30년대에 맴돌던 오묘한 분위기와 감춰진 시대적 욕망을 영감으로 삼고서, 그로부터 근 100년이 흐른 오늘날 21세기라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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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데코 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화가 타마라 렘피카의 작품 『녹색 차림을 한 여인 (Jeune fille en vert)』 1927년경작.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Image © Kizette Foxhall – Licensed by Victoria de Lempicka/MMI. Photo courtesy of MMI, NYC.

아르데코가 처음 그 발아의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때는 1910년대경. 유럽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바로 직전 격동기였다. 때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운동과 마티스의 야수주의 등을 비롯해서 철학적 사조(史潮)와 신근대적 사상(思想)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미술 운동이 실험되고 있던 사상과 사조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아르데코는 여성에게 봉사하는 예술 양식 그 속에서 갈피를 못잡고 들떠있던 아르데코는 이른바 ‚포효하는 1920년대 (The Roaring Twenties)’에 접어들어서 부터야 비로소 ‚플래퍼(flapper)’로 불리는 신여성의 등장과 더불어 본격적인 대중적 유행의 대열에 끼어 들었다.

지금도 아르데코의 가장 상징적인 여성상의 전형은 플래퍼다. 플래퍼로 불린 여성들은 짧은 삼고 단발머리 스타일을 하고 말괄량이처럼 행동함으로써 여성스러움과 복종적 태도가 요구되던 전통적인 전근대적 가부장적 제도를 전격 거부하며 갇힌 가정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왔다.

예컨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여성인 여류화가 나혜석과 과거 교복시대에 여학생들의 헤어스타일을 장악했던 귀밑 길이의 단발머리도 바로 아르데코 시대의 플래퍼들이 근대기 일본을 통해서 우리 문화에 까지 남긴 유산중 하나였다. 일부 용감한 근대기 신여성은 남장을 하고 외출해 카페나 바 같은 공공 장소를 맘대로 드나들며 담배를 피우고 칵테일을 마시며 사교활동을 만끽했다.

예컨대, 최근 아르데코풍 화가의 대명사로 떠오른 여류 화가 타마라 데 렘피카 (Tamara de Lempicka)는 그같은 신여성 사상과 실천을 온몸으로 실천한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였으며, 그녀의 그림에는 남장을 한 여성이나 남성처럼 굵은 목덜미와 강인한 체격을 한 덩치 큰 여성들이 즐겨 등장했다.

그래서인지 흔히들 아르누보 (Art Nouveau) 는 여성적이지만, 아르데코는 남성적이라고 손쉽게 정의하곤 한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파리에서 등장한 자연적 모티프 및 유기적인 곡선 위주의 아르누보 운동과는 대조적이게, 아르데코는 직선을 위주로 생동감, 스피드, 유선형 (streamline)이 강조된 디자인이 주를 이루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7394resize아르데코는 남성적이라고 정의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성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예술 유행양식이었다 해야 더 옳다. 특히 아르데코가 여성의 자유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포용하게 된 진짜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전쟁과 징병으로 인해 남성 인구가 줄어듦자 자연히 과거 집안에 있던 여성의 사회참여가 중요해졌다.

전쟁은 여성들의 패션에도 영향을 끼쳤다. 군복용으로 쓰일 강한 소재의 직물이 군용 조달로 모조리 보내져 물량이 쪼들리자 어쩔수 없이 여성들은 실크, 레이욘, 무슬린 같이 얇고 하늘하늘한 대체 직물 소재를 패션에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같은 패션 트렌드에 맞춰 티파니 같은 귀금속상은 보석류 대신 섬세한 의상에 어울리는 가벼우면서도 강한 플래티넘 같은 희귀금속 소재를 적극 도입해 장신구를 디자인해 유행시켰다.

레저, 글래머, 럭셔리, 낙관주의 – 아르데코는 화려한 삶에 대한 동경 오늘날 20세기 디자인 문화사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국제 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는 아르데코 양식은 본디 유럽의 몰락해가는 구체제 귀족 후예들과 신흥 최고부유층들이 독점한 계급특권적이고 배타적인 엘리트주의 양식으로 출발했다. 아르데코가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은 부유하고 지위높은 남녀들의 자유연애, 고급 술과 음식이 분수처럼 흐르는 사교 파티, 화려하고 번질거리는 고급 인테리어와 악세서리가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그렇다보니 아르데코 유행의 주 애호가와 소비자는 여성들이었다. 신여성들은 자신이 상류부유층에 속하든 평범한 소시민 계층에 속하든 상관없이 화려하고 우아하며 쾌락적인 생활에 대한 집단적인 동경심을 맘속에 키우며 저마다 추구했다. 그런가하면 여성들 사이에서는 무성흑백영화에서 음행과 총천연색이 입혀진 헐리우드 시네마에 몰입하며 영화 속 주인공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판타시와 감상주의가 활개를 쳤다.

파리에서 코코 샤넬 (Coco Chanel)과 엘사 스키아파렐리 (Elsa Schiaparelli) 같은 오뜨꾸뛰르 패션 디자이너들은 뇌살적인 에로티즘을 자아내는 데카당트 (decadent)한 여성미를 추구했다. 근대의 남성들은 나날이 커져가는 여성들의 자아의식과 그에 못지 않게 당당하고 화려함에 경탄과 두려움을 한꺼번에 느끼며 혼란스러워 했고, 이 시대의 불안감을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으로 해명하려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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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알베르 라토 (Armand-Albert Rateau)가 디자인한 파리 바르베-드-주아 저택의 거실 실내 장식.

아르데코가 가장 잘 구현된 예를 들라고 한다면 인류 선박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람선으로 꼽히는 노르망디 호를 꼽는다. 1935년 처녀 항해로 파리 출항해 뉴욕에 입항 예정이던 초호화 대서양 횡단 유람선인 노르망디 호는 1925년 파리 국제 장식미술 박람회서 떠오른 아르데코의 수퍼스타 디자이너들의 최고 기량을 모조리 한 자리에 구현한 아르데코 양식의 결정판이었다.

목가구 디자인의 명인 룰만을 비롯해서 유리 장식은 르네 랄리크 (René Lalique – 오늘날 랄리크 (Lalique) 유리명품으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실내 벽장식용 그림은 아르데코 화가 쟝 뒤파 (Jean Dupas)와 쟝 뒤낭 (Jean Dunand)이 담당했다.

극도의 호화와 화려의 뒤안길은 그 절정의 높이 만큼 심연의 무(無)로 사라지는 기구한 것이 만물만사의 이치던가. 노르망디호는 제2차 대전 동안 뉴욕 항구에 묶여 있다가 군함으로 개조공사되던 중 폭파사고로 산산조각나는 극적이고도 안타까운 운명을 맞고 끝내 소실되고 말아 오늘날에는 제모습을 다시 볼 길이 없다.

아르데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감적 원천 
아르누보의 정신은 비슷한 시대에 유럽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여타 주의와 사조들에 비하면 유독 더 남성적이지도 교조적이지도 않았다. 다른 예술 사조들이 선언문, 이념적 원리원칙과 도그마를 중심으로 발족∙운영되었던 반면, 아르데코는 어떤 특정의 조직화된 예술운동 세력도 아니었으며 체계적인 이념적 원칙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아르데코 양식은 절충적이다. 아르데코 양식을 한마디로 정연하게 정의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모더니즘과 아르데코는 동시대에 나란히 전개되던 시대적 트렌드였지만 서로를 등한시했다.

특히 모더니즘은 아르데코를 가리켜서 눈뜨고 봐줄수 없이 경박하며 앞뒤가릴줄 모르는 자기방종이라고 비난했다. 아르데코는 사람들이 쉽게 좋아하는 요소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자기것으로 취해 사용했지만 그 배경에는 아무런 내용 (substance)이나 본질 (essence)이 없이 텅빈 양식들의 표면적인 취합이었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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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크-에밀 륄만 (Jacques-Emile Ruhlmann)이 1919-23년경 디자인한 연꽃 경대 (Lotus dressing table) Victoria & Albert Museum, London © 2004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ADAGP, Paris.

가장 ‚전통주의적인’ 아르데코 디자이너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쟈크-에밀 륄만의 18-19세기 귀족풍 가구 디자인은 바로 그같은 단적인 예이다. 그는 지독하게 희귀하기로 자자했던 에보니 흑목, 상아, 크롬 금속재, 거북이 등껍질 등 희소가치를 이유로 상류층 고객들이 선호하던 재료들만을 골라서 절묘한 가구들을 만들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20년대에 파리의 최상위층 후원자들을 상대로 호화 가구 디자인 디자인을 맡았던 쟈크-에밀 룰만 (Jacques-Emile Ruhlmann)의 초호화판 실내장식용 목재 가구품들은 1925년도 파리 세계 장식미술 박람회에서 처음 소개된 이래 지금까지도 국제 미술품 경매장에서 작품당 수십만달러 대로 낙찰되어 나갈만큼 컬렉터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아르데코는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을 수반하는 모든 사상을 거부하고 과거 다양한 시대와 양식으로부터 추출한 여러 요소들을 뽑아 버무린 양식이라는 점에서 20세기 후반기 건축・디자인계를 강타했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론과 기법 면에서 유사하다.

아르데코 애호가들은 20세기초 건축과 디자인을 평정하다시피 한 모더니즘 세력을 아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모더니즘이 불어제치던 이념적인 과격성과 관념적 난해성에 쉽게 동감하지 않았지만 시대적인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모더니즘적인 요소들을 부분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장식적 요소를 일체 제거하고 제품의 기능성만을 강조할 것을 설파한 모더니즘 미학을 그다지 달가와 않았던 아르데코 애호가들은 형태는 단순하게 유지하되 호사스럽고 이국적인 소재를 사용한다든가 부분적인 디테일 장식을 넣는 식으로 우회함으로써 모더니즘 시대 양식적 대세와 호사스런 장식성을 좋아하는 깊숙한 욕구를 적절하게 화해시켜 모더니즘 對 전통주의 간의 갈등을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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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디자이너 클래리스 클리프(Clarice Cliff)가 1929-30년경 디자인한 햇살 꽃병 (Sunray vase), Manufactured by Arthur J. Wilkinson Ltd, Burslem, Victoria & Albert Museum, London.

포효하는 1920년대 (The Roaring 20s) 아르데코풍 스타일은 상류층 트렌드세터들의 선두적인 취향은 얼마 안가서 중산층과 일반 대중 사이에서 널리 추종하는 표본적인 모델이 되어 선망되받았다. 특히 1930년대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는 유리와 강철을 이용한 대형 건축물들과 유선형에 매끈한 재질을 소재로 대량생산된 일상용품들이 상품시장을 강타하면서 본격적인 대중화 전성대를 맞았다.

1930년대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아르데코풍 건축물들도 별다른 신조나 사명감 같은 배경 의식 없이 속속 건설되기 시작했다. 뉴욕의 명물 크라이슬러 빌딩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포함한 당시 아르테코 건축물들은 대체로 재료면에서는 유리, 강철, 철근, 콘크리트 등을 사용해서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듯 매끄럽고 번쩍거리는 표면 광채 효과를 자랑하며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사랑을 받았다.

모더니즘 건축과는 대조적으로 아르테코 건축물들은 대체적으로 유명한 개인 건축가들이 아닌 무명의 건설 엔지니어들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것인데, 그로 인해서 오늘날 건축 역사에서는 고급 취향과 저급 취향 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묘한 파생 건축 양식이 탄생했다고 비난받고 있다. 예나지금이나 아르데코 건축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인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도시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초고층 현대식 고층빌딩 스타일이 널리 일반화되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 1920-30년대 아르데코풍 도회 건축은 지금까지도 강력한 매력과 영감을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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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디자이너 노먼 벨 게데스 (Norman Bel Geddes)가 1937년 디자인한 맨해튼 칵테일 세트 (Manhattan cocktail set)는 놋쇠에 크롬도금해 제작했다. Manufactured by Revere Copper & Brass Company, Rome,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John C. Waddell Collection, Gift of John C. Waddell, 1998. Photography © 2000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아르데코 시대는 상상만 해도 어딘가 모르게 화려하고 흥겹고 낙원같은 시대로 보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번 『아르데코』 전을 통해서 공개된 작품들을 보면 아르데코 시대는 매일밤 재즈 음악이 흐르는 캬바레에서 남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칵테일을 나눠 마시며 희희낙낙하는 화려한 시대였으리라고 착각하기 쉽다.

‚포효하는 1920년대’에 이어서 뉴욕 증권가과 전세계 경제를 암흑기로 몰아넣은 ‚배고픈 1930년대’ 대공황기가 계속되던 아르데코 시대에는 제2차 대전을 앞둔채 정치적인 불안과 경제적 곤경으로 전세계가 몸살을 앓았다. 그같은 당시 현실 속에서 아르데코 양식이 건축, 패션, 디자인을 통해서 반영한 호화로움은 공허한 도피의식과 가식이었을까 아니면 조건없는 낙관주의였을까?

* 이 글은 본래 LG화학 발행 『공간사랑』 지 2005년 1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