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Architecture & Design

Architecture

에즈라 스톨러가 보여주는 흑백의 건축 공간

에즈라 스톨러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뉴욕의 명물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의 실내 천정을 촬영한 것. 1959년 작. Silver gelatin pring. Ezra Stoller © Esto.

에즈라 스톨러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뉴욕의 명물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의 실내 천정을 촬영한 것. 1959년 작. Silver gelatin pring. Ezra Stoller © Esto.

EZRA STOLLER PHOTOGRAPHY

에즈라 스톨러의 건축 사진

TWA 공항 터미널을 촬영한 사진작. 본래 아이들와일드 공항이라 불리던 곳으로서 현재는 K.F.케네디 공항으로 바뀌었다. 핀란드계 미국인 디자인 에에로 사아린넨 설계. 1962년 작. Ezra Stoller © Esto.

TWA 공항 터미널을 촬영한 사진작. 본래 아이들와일드 공항이라 불리던 곳으로서 현재는 J.F. 케네디 공항으로 바뀌었다. 핀란드계 미국인 디자인 에에로 사아린넨 설계. 1962년 작. Ezra Stoller © Esto.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이름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출간되어 온 여러 신문 및 대중 매체와 책을 통해서 작품을 알려온 사진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에즈라 스톨러(Ezra Stoller). 1915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뉴욕 대학에서 산업 디자인을 공부한 후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38년 부터 본격적인 프리랜스 사진업으로 뛰어들어 직업적인 사진가 활동을 시작했다.

제2차 대전을 통해서 경제 대공황이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다시금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미국에서 에즈라 스톨러는 사진업에 뛰어들자마자 건축과 디자인 사진 분야에 관한 한 독보적인 전문가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니 시운도 참 좋은 사람이었다.

1940년대 중반 이후 향후 2,30여 년 동안 에즈라 스톨러가 카메라로 포착하지 않은 미국의 주요 건축물은 거의 없다했을 만큼 그의 활동은 광범하고 두드러졌다. 과거 미국 『뉴욕 타임즈』 지의 건축 평론가 폴 골드버거(Paul Goldberger)가 „에즈라 스톨러 만큼 일반 대중들이 20세기 근대기 건축물을 보는 눈을 철저하게 길들였던 사진가는 전에 없었다“고 평가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른바 ‚아메리컨 드림’이 본격적으로 발아하는 가운데 미국이 풍요의 사회로 진입할 무렵이던 194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전문가들에 따르면 스톨러는 디테일에 대한 세심한 고려할 줄 알고  건축가, 편집자, 사진 외뢰자가 의도한 비젼을 잘 체득하여 사진 속의 이미지로 전환하는 능력이 유난히 탁월했던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미스 반 데어 로헤와 필립 존슨의 공동 설계로 지어진 뉴욕 시그램 빌딩. 1958년 촬영. Ezra Stoller © Esto.

미스 반 데어 로헤와 필립 존슨의 공동 설계로 지어진 뉴욕 시그램 빌딩. 1958년 촬영. Ezra Stoller © Esto.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제일 위의 사진 이미지], 미스 반 데어 로헤(Mies van der Rohe),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같은 거장 근대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물 사진 촬영을 하는데 만큼은 에즈라 스톨러 만한 사람이 없다며 고집해 그를 사진가로 고용했다는 사실도 유명하다.

20세기 전반기 미국 대도시들에서 강하게 불어닥쳤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서 스톨러는 흑백으로만 사진을 촬영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건물을 비롯해서, 시카고에 있는 에드가 카우프만의 개인 주택인 폭포수 위의 집 폴링 워터(Falling Water), 미스 반 데어 로헤와 필립 존슨이 공동 설계한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 에에로 사아린넨(Eero Saarinen)이 설계한 역작 뉴욕 TWA 공항 터미널, 폴 루돌프 (Paul Rudolf)가 지은 예일대학 미술건축대학, 그리고 루이스 칸(Louis Kahn)의 소오크 연구소(Salk Institute) 등은 하나같이 사진가 스톨러의 눈과 카메라를 통해서 포착된 20세기 전반기 아메리카의 상징적인 건축물들이다.

2004년 이이콘적 흑백 사진으로 20세기 건축물을 바라보는 근현대인들의 시야를 재정의해 준 사진가 스톨러의 타개를 기념하여 그의 건축 사진 세계를 한 눈에 경험할 수 있는 전시 『에즈라 스톨러』 회고전은 [2004년] 12월 19일까지 미국 윌리엄즈 대학 미술관 Williams College Museum of Art에서 계속된다.

* 이 글은 본래 LG 데코빌 사보 『공간사랑』지 2004년1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편안함의 철학

세기 전환기 미국  미술과 공예  정신을 통해 본 실내 가구 디자인

BYRDCLIFFE – AMERICAN ARTS AND CRAFTS COL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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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나 워커 (Edna M. Walker, 미국, 1880–?)가 버드클리프 예술과 공예 공동체를 위해 디자인한 가정용 직물 보관함 (Linen press) 1904년 경, 뉴욕 산 참나무목, 튤립포플러목, 황동 소재, 55 x 41 x 18 3/4 in. (139.7 x 104.1 x 47.6 cm)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미술과 공예 운동 – 미술사와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과 이 분야 전문가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이 예술 운동은 영국에서 19세기가 거의 저물기 즈음인 1880-1890년경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를 주축으로 하여 공예 예술을 당시 미술이 지니던 높은 예술적 완성도와 사회적 위치로 끌어 올리기 위해 노력했던 일군의 공예가, 미술가, 건축가, 디자이너의 소규모 모임으로 시작해서 차후 영국 내에서는 물론 미국으로 전해진 예술 조합인들의 모임에서 처음 비롯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이어진 엄격하고 이성적인 성향의 고전주의 미술에 반발하여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감성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이 미술과 공예 운동에서 엿보이는 미학적 특징이다. 그래서 영국의 문필가 존 러스킨과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가 위시해서 주도된 이 미술과 공예 운동은 보는이로 하여금 어딘가 시적이고 아련한 감성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복잡한 장식성과 이국적인 패턴을 즐겨 사용한 작품들을 다수 제작한게 특징이다.

Byrdcliffe-White-Pines-porch19세기말 미국으로 이민간 영국인들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알려져 유행으로 퍼지기 시작한 이 미술과 공예 운동은 곧 버드클리프 (Byrdcliffe)로 불리는 한 작은 고을에서 일명 ‚미국 미술과 공예 운동 마을 (American Arts and Crafts Colony)’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곳 버드클리프는 오늘날 미국 동부에 있는 뉴욕 주의 도시 우드스톡 (Woodstock)의 옛 이름. 1902-3년에 영국의 미술과 공예 운동 정신을 비젼으로 삼아서 창설된 이 버드클리프 미술과 공예 마을은 미국의 세번째 대통령이던 토마스 제퍼슨에게 큰 사랑을 받은 실내 디자인 운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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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클리프 예술과 공예 공동체의 일원이던 줄마 스틸 (Zulma Steele)이 디자인한 백합꽃 의자 (“Lilu” Chair)는 1904년에 제작되었다. 크기: 37 3/4 x 18 x 16 in. (95.9 x 45.7 x 40.6 cm)

버드클리프 미술과 공예 운동을 통해 제작된 미국식 가구들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편안함. 고전적인 유럽풍 가구 공예가이 안락감과 편안을 희생해 가며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실내장식품을 디자인하고 사용했다라고 한다면, 미국식 가구 공예는 가족 중심의 사용자를 위해서 격식과 화려함 보다는 편안함과 휴식을 제공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는 점 때문이다.

예전 공방들과 당시 만들어진 각종 가구, 직물 용품, 금속 공예품, 도자기, 그림, 사진 등 20세기초 미국 가정에서 널리 사랑받았던 버드클리프 공예 마을은 지금도 뉴욕 우드스톡에 가면 예전의 공방 모습 그대로 유지하며 공예품을 생산하고 있다.

관심있거나 이곳의 공예품을 구입하고 싶은 고객들은 버드클리프 공예 마을로 문의하면 된다. 미국 밀워키 미술관 장식 미술 갤러리에서는 9월19일까지 버드클리프 공예 마을의 대표작들을 모은 실내 공예 전시를 계속한다.

* 이 글은 본래 『공간사랑』지 LG 데코빌 사보 2004년 10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순수 이상 공간 미학

 20세기 국제건축 양식 –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쏘아올린 순수 이상(理想)을 향한 공간 미학

아들러 설리번 건축사무소가 설계해 1894년 완공한 시카고 주식거래소 빌딩. Courtesy: The Art Insitute of Chicago.

아들러 설리번 건축사무소가 설계해 1894년 완공한 시카고 주식거래소 빌딩. Courtesy: The Art Insitute of Chicago.

모더니즘 건축 제1강령: 장식을 제거하라.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 – 미국의 건축가 설리번 (Louis Sullivan)은 선언했다. 흔히 건축사를 거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모더니즘 건축 세계의 핵심적 특징을 기능주의 (functionalism)라  정의한다. 하지만 20세기 초엽 1920-193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휩쓸었던 이 모더니즘은 소수의 사상적, 예술적 선구자들이 주도해 대중화시키고자 했던 상의하달 (top down)의 지극히 엘리트주의적 예술 사조였다해야 더 옳다. 그리고 모더니스트들이 앞세워 칭송했던 기능은 단순함 (simplicity)의 아름다움에 대한 칭송이었다.

근대 이전기 구시대 역사주의풍의에 대한 저항 전통적인 건축물 안팎과 내부 장식품들의 표면은 온통 저마다 시대적으로 유행하던 장식 문양들로 꾸며지곤 했다. 이같은 장식성은 20세기 전후로 등장한 여러 급진적인 모더니즘 건축가 및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반드시 배격해야 할 악취미 내지는 비윤리적인 것으로까지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건축가 아돌프 로오스 (Adolf Loos)는 ‘장식은 범죄 (Ornament is crime.)’라고 규정했고,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로 코르뷔지에 (Le Corbusier)는 『건축을 향하여 (Vers une architecture)』(1923년 출간)에서 장식적인 군더더기 없이 순수한 건축물에서 고귀한 정신성을 발견했다고 썼다.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의 선구자 페터 베렌스 (Peter Behrens)와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에게 있어서도 모더니즘 건축 정신은 이상 사회 건설과 인류의 진보를 의미했다. 젊은 몽상가들의 백일몽 같이 들릴수도 있는 이들 근대 건축가들은 분명 20세기 초 유럽 곳곳의 대기에 팽만해 있던 모더니즘 사고를 새로운 건축 및 주거 문화로 실현시킨 장본인들이다.

모더니즘 건축 제2강령: 대중에게 봉사하는 디자인이 되어라.
 ‘근대적인 신건축은 탁트이고 텅빈 열린 실내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건축 실내에는 구시대의 건축적 잔재들 즉, 공간내부의 장식물이나 부착물을 일체 제거할 것’은 모더니즘 건축의 공간 개념의 핵심이다. 그와 같은 양식적 특성은 특히나 독일에서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던 정부주도의 공공 주택 건설 프로젝트와 도시 및 조경 설계 프로젝트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마가레테 슈테-리호스키가 디자인한 프랑크푸르트 근대식 주방. 사진은 『다스 베르크(Das Werk)』 지 1927년호에 실렸던 자료사진. Courtesy: Schütte-Lihotzky Archive, University of Applied Arts, Vienna.

마가레테 슈테-리호츠키가 디자인한 프랑크푸르트 근대식 주방. 사진은 『다스 베르크(Das Werk)』 지 1927년호에 실렸던 자료사진. Courtesy: Schütte-Lihotzky Archive, University of Applied Arts, Vienna.

산업 디자인과 더불어서 건축의 표준화에 유독 열성적인 관심을 보였던 나라는 독일이었는데,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패배끝에 효율적이고 단일화된 경제 재건을 하루 빨리 이룩해야 했던 경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야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비교적 제한된 공간을 이용, 가능한한 많은 수의 주거민들을 쾌적한 환경과 저가로 수용할 수 있는 주거 건축물을 제공한다는 그같은 노력은 곧 건축물의 대량 건축 기술과 표준화 규정의 체계적인 정착에도 기여하였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 주거 생활 속에서도 널리 일반화된 현대식 주방배치는 오스트리아 여성 건축가 마가레테 슈테-리호츠키 (Margarete Schütte-Lihotzky)가 ’20세기적 신생활 환경에 맞는 표준화되고 편리한 주방 환경 창조’라는 기치 아래 1926년 디자인해 에른스트 메이 (Ernst May)가 설계한 프랑스푸르트 공공지원 주택단지 아파트용 주방에 응용한 이래 대중화된 ‘프랑크푸르트 주방 (Frankfurt Kitchen)’*이 그 원형이다.

국제 건축 양식 첫 물결은 실험주의
 오늘날 건축사에서 흔히 일컬어지는 ‘국제 건축 양식 (The International Style)’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탄생한 때는 1932년 미국 뉴욕의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이하 MOMA)에서 ‘인터내셔널 스타일’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유행중이던 최첨단 건축 전시회들이 연달아 부쳐지면서 부터였다. 1920년대에 유럽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여 순식간에 도시간 및 건축가간 보편적이고 통일화된 건축 이념과 양식이 형성되었던 만큼 국제 건축 양식이라는 명칭을 얻을만도 하였다.

근대주의 국제건축양식의 아이콘이 된 피에르 쟈네레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사보아는 1928년 착공해 1931년 완공되었다.

근대주의 국제건축양식의 아이콘이 된 피에르 쟈네레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사보아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활용해 1928년 착공 1931년 완공되었다.

특히 국제 건축 양식의 본고장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난 1920년대 무렵이 되자, 건축가들은 서로 매우 긴밀한 관계와 정보 교환 체체를 구축하며 근대 건축 이념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긴박하게 전개된 양식적 전파와 상호 영향력은 너무도 긴밀했던 나머지 개별 건축가들의 지엽적인 건축 이념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평준화 표준화될 정도였다. 자연히 그들의 관심은 보다 급진적인 사상과 양식을 건축 설계와 건축에 직접 실험으로 옮기는 일로 속히 불붙었다.

그렇지만 근대 국제 건축 양식 보편성과는 대조적으로 이를 주도했던 건축 거장들의 성격과 개성은 참으로 저마다 각양각색이었다고 한다. 독일 바우하우스와 바이마르 미술과 공예 학교의 지도자였던 발터 그로피우스는 자나깨나 건축 디자인의 사회적 측면을 고심했던 진지한 이상주의자이자 성실한 스승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스위스 출신으로서 벨기에 출신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 (Auguste Perret)와 더불어서 파리에서 건축가 활동을 시작한 르 코르뷔지에는 널리 소문난 딜레탕트 취미 건축가이자 허풍쟁이였다.

그런가 하면 흡사 수도사 혹은 고독한 철학자를 연상시킬 만큼 근엄과 강직한 근성으로 일관했던 독일의 미스 반 데어 로헤 (Mies van der Rohe)는 사생활 면에서나 미학적 신념 면에서나 절대적인 경지의 순수 형태 (pure form)의 신봉자였다.

1928년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건물을 위한 시카고 트리뷴 타워 설계 스케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발터 그로피우스. 1922년 화재의 건축공모전 안타깝게도 그의 안은 채택되지 않아 끝내 실현되지 못한 설계안으로 남아있다. © BAUHAUS-ARCHIV BERLIN.

1928 년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건물을 위한 시카고 트리뷴 타워 설계 스케치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발터 그로피우스. 1922년 그는 이 화재의 건축공모전에 참여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안은 채택되지 않아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 BAUHAUS-ARCHIV BERLIN.

오늘날까지도 20세기 국제 건축 양식 하면 우선적으로 꼽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는 그 수많은 건축 프로젝트를 해 오면서도 스스로를 국제 건축 양식 계열의 건축가가 아니라고 줄곧 부인했었다. 기복이 심한 한 평생을 살면서도 언제나 비싼 양복 차림에 망토와 지팡이를 잊지 않았던 멋쟁이 댄디였든 로이드 라이트는 스스로를 몇 백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 건축가라고 떵떵거리기까지 했다.

새로운 건축 재료가 가능케 해준 조형의 자유 
당시 모더니즘 건축가 및 디자이너들을 또한 깊이 매료시켰던 것들로는 산업 발달과 함께 새로 소개된 강철, 철근 콘크리트, 유리 등의 건축 신소재들이었다. 이들 신소재는 이전 건축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모양과 구조로 건축물을 지어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안겨줬던 만큼 건축디자이너들에게는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신소재가 안겨주는 건축 설계 및 시공상의 자유는 건축물 안팎 및 주변에서의 활동과 공간 활용도는 물론 빛이 모자른 북반부 유럽 지방에서는 곧 신건축 주거 문화로 이어짐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히 독일 바우하우스 운동을 이끌었던 근대 건축의 선각자 발터 그로피우스는 「파르구스 구두 공장 (Fargus Shoe Factory)」(1911-16년)과 「쾰른 모델 공장」(1914년), 그리고 미국 시카고에 있는 「시카고 트리뷴 신문사 건물 (Chicago Tribune  Building)」(1922년) 같은 대표적 건축 설계물을 통해서 철골 구조와 유리 재료를 단아하고 맵시있게 활용해 보였다.

1920년대에 근대 건축의 제2세대 선구자이자 건축을 시작하기 전부터 발휘해 오던 화가, 비평가, 이론가로서의 다재다능한 재주와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르 코르뷔지에(본명: 샤를르-에뒤아르 쟈네레, Charles-Éduard Jeanneret)가 유럽 곳곳을 여행한 끝에 근대 건축에 관한 가장 감명받았던 요소도 바로 철근 콘트리트라는 새로운 건축 재료였다.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스타인 드 몬치(Villa Stein de Monzie)의 실내 공간. 1926년. Photo: Charles Gérard(?).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빌라 스타인 드 몬치(Villa Stein de Monzie)의 실내 공간. 프랑스 가르슈(Garches) 소재. 1926년. Photo: Charles Gérard(?).

르 코르뷔지에가 근대 건축에 기여한 가장 큰 업적을 열거하라고 한다면, 첫째, 막이나 벽이 없는 탁트인 실내 공간에 기둥을 설치하고, 둘째, 건물 골조와 벽은 건축물을 지탱하는 기능 이외에서 그 자체로 미적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며, 셋째, 자유롭고 트인 실내 공간과 내외부 공간 간의 자연스럽고 막힘없는 연결을 위해서 벽을 가능한 한 없애도록 하며, 넷째 건물 앞면은 더이상 건물 지탱 기능을 하지 않고 오로지 겉표면 역할 만을 담당하도록 하며, 끝으로 다섯째, 지붕을 평평하게 설계하여 지붕 위에 옥상 정원을 만들어 생활 공간으로 확장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상의 다섯가지 건축 건설 원칙은 오늘날까지도 서구는 물론 우리 주변에서 거주용 건축 설계에서 널리 보편화된채 활용되고 있는 이른바 국제 건축 양식의 공식 규격이 된지 오래다. 안타깝게도 르 코르뷔지에의 여러 혁신적인 안목과 비젼은 설계도 그림으로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생전 이 건축가의 탁월한 지성과 비평능력은 저서 『건축을 향하여』를 통해서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제3세대 국제 건축 양식의 여명  앞서 그로피우스와 르 코르뷔지에가 남긴 업적을 바탕으로 하여 근대 건축의 순수 형태를 더 한층 정교화한 장본인은 바로 국제 건축 양식의 제3세대 거장 미스 반 데어 로헤라고 오늘날 건축사는 평가한다. 초기 독일 근대 공예 운동의 아버지 페터 베렌스의 공방에서 3년 동안 목공예 사사를 받고 1910년 베를린 박람회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 세계에 접하고 깊이 감명을 받은 것을 결정적인 계기로 삼아서 미스 반 데어 로헤는 평생을 건축물의 열린 공간과 공간의 수평적 흐름을 창조하는데에 바쳤다.

1920년대 창조적 폭발로 전성기를 누리던 베를린은 그에게 창조적 영감을 안겨주었지만, 1930년대 독일 나치 정권기는 바우하우스의 폐교와 정치와 사생활의 갈등 속에서 엄격하고 순수한 건축 미학을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간 인고의 시기였다.

미스 반 데어 로헤, 필립 존슨, 루이스 칸 & 제이콥스 건축 사무소의 공동 설계로 1958년 완공된 시그램 빌딩. 현재도 뉴욕 파크애비뉴 375번지에 자리해 있는 이 철골구조 고층건물은 20세기 후반기 대도시에 보편화된 마천루 풍경을 선도한 예다.

미스 반 데어 로헤, 필립 존슨, 루이스 칸 & 제이콥스 건축 사무소의 공동 설계로 1958년 완공된 시그램 빌딩. 현재도 뉴욕 파크애비뉴 375번지에 자리해 있는 이 철골구조 고층건물은 20세기 후반기 대도시에 보편화된 마천루 풍경을 선도한 예다.

미국에서 고층 마천루로 거듭난 국제 건축 양식
 독일이 나치주의 정권과 광란의 우익 대중 영합주의로 본격적으로 접어든 1937년, 미스 반 데어 로헤는 미국 여행을 하던중 방문하게 된 광활한 미국 중서부를 보고 미국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미국은 월스트리트 증권시장의 폭락과 그로 인한 경제 대공황으로 허덕이고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를 거치면서 미국은 전에 보지 못한 번영기를 맞으리란 새싹을 보이고 있었다.

미스 반 데어 로헤에게도 새로운 건축 프로젝트와 돈벌이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독일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매우 뼈아픈 경험이었던 터라 이제 미스 반 데어 로헤는 파시즘, 공산주의, 볼세비즘, 나치즘 그 어느것도 아닌 미국의 국제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위한 국제 건축 양식을 실천할 것을 결심했다. „미스 반 데어 로헤=돈“이라는 주변인들의 바늘 섞인 농담도 바로 당시 그의 신념적 변화를 은근히 비꼬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뉴욕에 굳건히 서있는 시그램 타워 건물은 마치 미스 반 데어 로헤가 미국 자본주의를 영광화라도 하듯 극도로 모던하고 세련되게 설계된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국은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리쳐드 노이트라(Richard Neutra)에게도 행운의 나라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서 빈 모더니즘 건축가인 오토 바그너(Otto Wagner)에게서 사사를 받고 일찌기 미국으로 이미을 떠났던 노이트라는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에 국제 건축 양식을 널리 확산시키는게 공헌한 장본인이었다.

노이트라이 건축 양식은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 반 데어 로헤의 양식과 거의 유사하지만 건축물 바깥에 철근 콘크리트로 된 대형 발코니나 수영장을 매달아 부유시키는 식의 건축공학적으로 도전적인 건축 설계를 즐겨 했던 것이 특징적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러벨 건강원 건물이라든가 카우프만 가족의 사막 주택 등 개인 주문자들을 위한 설계가 주요 작품들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으로 망명온 건축가 리햐르트 노이트라가 에드거 J. 카우프만 가족의 건축 수주를 받아 설계 완공한 카우프만 사막 주택. 미 북동부의 극심한 추위를 피해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스에서 겨울철을 날 수 있도록 지어진 이 가족 별장은 1946-47년 경에 완공되었다. Photo courtesy: Wikiarquitectura.

오스트리아 빈에서 미국으로 망명온 건축가 리쳐드 노이트라가 에드거 J. 카우프만 가족의 건축 수주를 받아 설계 완공한 카우프만 사막 주택. 미 북동부의 극심한 추위를 피해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스에서 겨울철을 날 수 있도록 지어진 이 가족 별장은 1946-47년 경에 완공되었다. Photo courtesy: Wikiarquitectura.

자칭 세기의 천재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경우도 주요 건축 의뢰인들은 개인 갑부들이었다. 피츠버그의 돈많은 사업가 집안인 카우만家를 위해 필라델피아에 지은 「폴링워터 (Fallingwater)」 하우스도 그가 설계한 수많은 개인 주택 프로젝트들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폴링워터」가 시냇물 낙하수와 바위에 걸쳐져 아슬아슬하게 지어졌다는 점 때문에 보존상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최근의 보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미국인들에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못지 않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아메리칸 드림의 본고장 뉴욕에서는 기업들이 그들의 비상하는 기업적 포부와 이상을 마천루 건물을 통해서 표현했는데, 무려 40년에 걸쳐 1973년에 완공된 로커펠러 센터 빌딩, 데일리 뉴스 빌딩, 매그로-힐 빌딩이 오늘날까지도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수놓고 있다.

신을 향해 드높이 치솟았던 서양 중세의 교회당 건축처럼, 20세기와 21세기의 마천루는 자본주의의 전당이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정치적인 이상에서 출발한 20세기 국제 건축 양식은 21세기 오늘날 경제적인 부와 위상을 과시하는 가장 국제적인 건축 양식이 되었다.

* 또는 프랑크푸르트 주방 디자인 창시자 겸 바우하우스 여성 멤버 베니타 오테 (Benita Otte).

** 이 글은 본래 2005년 2월호와 3월호 『공간사랑』지 “History of …- 건축 & 디자인 역사” 연재 컬럼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독일 모더니즘 건축의 실용적 계승자

에곤 아이어만의 건축 세계

EGON EIERMANN

1958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출품된 독일관 건물 모습. Sep Ruf와 공동으로 설계 건축된 이 작품은 1956-58년 2년여에 걸쳐 건설되었다.

1958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출품된 독일관 건물 모습. Sep Ruf와 공동으로 설계 건축된 이 작품은 1956-58년 2년여에 걸쳐 건설되었다.

예나지금이나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Kaiser Wilhelm Memorial Church)[맨 위의 사진]는 베를린을 찾은 방문객들이 건축 순례지 목록에서 빼놓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가 보고 가는 곳이다. 베를린이 오늘날 독일의 수도가 되기 직전까지, 프러시아 왕국의 빌헬름 황제의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해 지어진 이 교회는 바로 독일 바우하우스가 자랑하는 모더니즘 건축가 에곤 아이어만(Egon Eiermann, 1904-1970)의 역작이다.

올해[2004년]로  건축가 故 에곤 아이어만이 탄생한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베를린에 자리한 바우하우스 아르키브에서는 오는 5월16일까지 건축가가 남긴 여러편의 건축작품들을 사진으로 기록한 자료들을 전시로 부친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독일 관할청 건물. Photo:  saai, J. Alexander Studio/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독일 관할청 건물. Photo: saai, J. Alexander Studio/

아이어만이 처음 국제 건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계기는 1958년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를 통해서였다. 국제 건축 양식이 최고조의 인기를 누리며 전세계 대소도시에서 속속 번지며 지어올려지고 있던 1950년대말엽, 아이어만은 건축물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굵직굵직한 공공 정부 건축물 설계 프로젝트들을 연달아 담당했다.

미국 워싱턴DC의 독일 관할청, 독일 본의 국회의사당 타워(Langer Eugen), 프랑크푸르트의 네커만(Neckermann) 사의 우편주문 사무건물, 슈투트가르트의 IBM 사무실 건물, 올리베티(Olivetti) 전자회사 프랑크푸르트 지사 건물은 그같은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의 대표작들을 통해서 미루어볼 수 있듯이 독일 건축가 아이어만의 전문 분야는 모더니즘 계열의 산업과 관련된 사무실 건물을 설계하는 일. 특히 그는 건물내 산업체들이 자사 임직원들을 위한 작업 환경을 조성하는 것 외에도 기업의 제품들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전시할 수 있는 전시장과 매장 인테리어 디자인에도 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독일 IBM 본부 건물. 1967-72년. Photo: saai, Horstheinz Neuendorff.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독일 IBM 본부 건물. 1967-72년. Photo: saai, Horstheinz Neuendorff.

유독 그의 작품을 특징짓는 건축 언어는 정밀하고 단순하면서도 기능과 구조 면에서 군더더기 없는 분명함이라 평갑된다. 그래서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은 가볍고 간결담백한 외관과 투명감을 느끼게 해 준다. 그는 건축 외에도 건축과 통일된 컨셉의 실내 장식 디자인에도 관여하면서 사무용 테이블, 의자, 계단, 옷걸이 등도 디자인해서 가구 디자인 분야에서도 명품을 만들어냈다.

베를린 바우하우스 아르히브(Bauhaus Archiv Berlin), 독일 칼스루헤 대학의 쉬드도이쳬스 건축 디자인 아르키브(saai)가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 전시는 독일 바우하우스의 건축 정신을 계승한 에곤 아이어만의 건축 작품 사진 전부와 스케치 및 청사진 등 그의 작업과 관련된 창조 과정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한자리에 선보인다.

* 이 글은 본래 LG 인테리어 사보 월간 『공간사랑』 지 2004년 3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외로울 땐 … 쇼핑하세요.

쇼핑은 산업이고 예술이고 인생이다.

Mickry 3, 『Tea service』2003, MAK Design Space Museum für angewandte Kunst, Wien, Austria

비엔나 베르크슈테테 운동의 대표적 건축가/디자이너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이 디자인한 은제 차 서비스 세트를 흉내내어 싸구려 제품으로 화해 재창조한 것이 재미있다. 비엔나 베르크슈테테 운동의 대표적 건축가/디자이너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이 디자인한 은제 차 서비스 세트를 흉내내어 싸구려 제품으로 패러디한 것이 재미있다. Mickry 3, 『Tea service』 2003, MAK Design Space Museum für angewandte Kunst, Wien, Austria

MICKRY 3 SUPERMARKET PROJECT 빨간 벽돌로 지어진 빈 응용미술 박물관 건물 오른켠 코너에 자리해 있던 서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MAK DESIGN SPACE라는 디자인 전문 전시장이 4월말부터 새로 들어섰다. 19-20세기 전환기 빈 모더니즘기의 공예 및 디자인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이 박물관이 현대 디자인을 보다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전시 기획을 해 보려는 새로운 관심 방향과 의욕을 표명하는 제스쳐이기도 하다.

MAK DESIGN SPACE가 이 새 전시장에서 선보이게 될 현대 디자인 전시들은 예술, 디자인, 산업, 경제를 두루 아우르며 상호 보완하는 진흥제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국제 현대 디자인계에서 급속하게 번지고 있는 디자인 이론과 비평을 시시각각 따라잡고 대중에게 이해시키겠다는 교육적 목표까지 겨냥하고 있다.

이 전시장에서 펼쳐질 첫 전시는 스위스 출신의 젊은 세대 3인조 현대 미술가 미크리3인(Mickry 3)의 „수퍼마켓“ 프로젝트. 수퍼마켓은 현대 디자인 이론과 비평에서 소비주의와 연관되어 자주 언급되는 현대 특유의 공간 현상이자 백화점이나 쇼핑몰과 더불어 대중의 소비활동이 펼쳐지는 종합 소비 설비 공간이 된지 오래다. 채소, 과일, 생선, 고기 같은 신선한 식료품에서부터 천편일률적으로 대량생산된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기 어려운 차갑고 획일적인 상품들이 선반위에 진열된채 소비자들의 선택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미크리3인은 수퍼마켓의 바로 그같은 정서에 반항 겸 풍자의 비평을 가한다. 그들이 상정하고 있는 현대 사회 속의 수퍼마켓은 „신선한 식료품(Lebensmittel)“을 비롯해서 „고기류(Fleischvoegel)“, „디즈니-토끼(Disney-Kaninchen)“라는 작품 이름들처럼 식품 생필품만 파는 곳이 아니다. ‚새 애인이 필요하세요? 아니면 여동생이 갖고 싶으세요?’ – 현대 사회의 수퍼마켓은 성적 오르가즘을 제공하는 즉석 성욕 충족품인 „인스턴트 세트(Instant-set)“까지도 돈주고 살 수 있는 만능해결소로 묘사된다. 심지어 행복하지 못한 소비자들을 위해서 컵라면 처럼 물을 붓고 5분만 기다렸다가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즉석 행복믹스도 살 수 있다.

Mickry 3『Organshop』2001, M3 Supermarkt Installation view Kunstraum Walcheturm, Zurich, Switzerland

새 창자가 필요한가요? 새 콩팥으로 이식 수술할 때가 되었나요? 내장가게에서는 온갖 신체부위별 내장도 살 수 있다. Mickry 3『Organshop』 2001, M3 Supermarkt
Installation view Kunstraum Walcheturm, Zurich, Switzerland

크리스티나 판더, 도미니크 빈뉴, 니나 폰 마이스 3인의 여성으로 구성된 미크리3인의 수퍼마켓 프로젝트는 소비주의 문화와 대량생산된 소비품을 예술적인 개념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미술적 논평에 더 가깝다. 나아가서 그들이 영감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는 수퍼마켓이란 수많은 미술 작품이 난무하는 가운데 미술을 소비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부추기는 미술 시장 제도에 대한 풍자적 논평이기도 하다.

디자인과 소비주의 문화를 연결시켜 분석하는 디자인 비평 담론이 유난히 자주 언급되고 있어 오고 있는 요즘, 미크리 3인의 ‚수퍼마켓’ 프로젝트가 디자이너들에게 소비주의 이론에서 바라본 비판적인 안목과 시각적 영감을 환기시켜 줄 수 있길 바란다.『쇼핑은 산업인가 예술인가 – 미크리3 수퍼마켓』| 전시 장소 : 빈 응용미술 박물관 디자인 스페이스 (MAK DESIGN SPACE) | 전시 기간 : 4월 23일-5월 18일까지

* 이 글은 본래 월간 『디자인』2003년 4월호에 실렸던 글임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영원히 건술중인 도시 베를린

BERLIN – CITY UNDER PERPETUAL CONTRUCTION

역사의 상처를 감싸안고 변화를 지속해 가는 도시 베를린의 건축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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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라이히스탁 독일 연방 국회의사당 건물중 영국의 거장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개조 설계를 맡아 완성된 천정 돔 © danda.

비행기편으로 베를린에 막 도착한 방문객은 우선 이 도시가 지닌 깊은 역사적 흔적을 느끼기 시작한다.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 (Tempelhof Airport)은 독일 나치 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어두운 독일 근현대 역사가 내리누르는 과거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채 오늘날까지 그 자리에 서있다. 템펠호프 공항은 에른스트 자게비일 (Ernst Sagebiel)이 설계해 1937년 개항했다.

히틀러의 뒤를 이은 대독일 지도자 겸 독일 공군 총사령관이던 헤르만 괴링 (Hermann Goering)이 총애하던 건축가 에리히 멘델존 (Erich Mendelshohn)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던 건축가 자게비일은 이 공항 설계를 통해서 나치 정권이 강요하던 극도로 경직된 양식을 극적으로 표현해 이후, 1980년대 베를린 시내 제임스 스털링 (James Stirling)의 설계로 지어진 베를린 과학센터 (Wissenschaftzentrum)가 탄생하는데 모형이 되어준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놀랍게도 이 공항은 미국의 펜타곤 국방부 다음으로 큰 면적을 자랑하면서도 좁게 설계된 항공기 이착륙로 때문에 개인 출퇴근용 항공기 경유지로 이용되어 오기도 했다. 오늘날 베를린 시민들은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부터 이 도시를 보호해 준 옛 베를린 에어리프트 (Berlin AirLift) 공군 기지로서의 이 공항을 민주주의의 수호지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 한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는 베를린을 두고 „사랑과 웃음이 결여된 도시“라고 일컫는 것으로써 이 도시가 지닌 역사적 무게와 상처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도 그럴것이 실제 지난 일세기여 동안 베를린은 파란만장한 역사와 격변을 거쳐 온 가운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베를린이 흔히 „항상 공사중에 있는 (in progress)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려 온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만큼 독일은 물론 유럽의 역사적 변화가 이 도시의 건축물과 도시 설계에 끼친 영향을 숨가쁘게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 Gate)은 베를린을 둘러싼 성문(城門) 출입구로서, 18세기말경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치하 동안 지어져 현재는 나폴레옹 정권에 대한 프러시아군의 승리와 독일 비더마이어 (Biedermeier) 시대의 영광을 대변하는 아이콘이 되어 당당히 서있다.

시도때도 없이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그 유명한 포츠다머 플라츠 (Potsdamer Platz)는 두 말 할 것 없이 통일 독일의 새수도 베를린으로서의 상징물이다. 포츠다머 플라츠는 19세기 프러시아 정권기 특유의 도시 설계 의도와 미감을 반영하고 있다.재공사 당시 각종 전문 건축 인부들이 지하수 밑으로 잠수해 콘크리트 공사를 하는가 하면 공사 전용 철로를 설치하는 등 독일이 자랑하는 최첨단 현대 건축 설계 기술을 일축해 과시해 보여 화재를 모은 곳도 바로 이 포츠다머 플라츠였다.

베를린 시내 구석구석과 스카이라인은 18, 19세기의 건축적 유산과 20세기의 국제적 건축 양식을 골고루 구비하고 있다. 시당국은 일명 „비판적 도시 재거설 (critical reconstruction)“, „역사적 요소에 대한 고려 (respect for the historical substance)“라는 도시 건설 원칙에 입각해 도시가 지닌 역사적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현대적인 신건축 공사를 단행하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자랑해 왔다. 그같은 가장 대표적인 예는 노먼 포스터 (Sir Norman Foster) 경이 재디자인 개축한 라이히스탁 (Reichstag) 독일 연방 국회의사당 건물일 것이다.

90년대초, 크리스토 (Christo)가 라이히스톡 건물을 헝겊으로 포장하는 행위 미술을 전개했던 일은 베를린 시민들에게 세계사 한가운데에 선 듯한 크나큰 자긍심을 안겨주었다. 본래 1894년 지어져 1933년의 화재 사건 (이로 인해 히틀러 나치 지도자는 한 번도 이곳에서 공식적인 집권을 해 보지 못했다), 1945년 2차대전중 소련군 침략 등을 거치는 등 격동의 독일 근현대사를 경험한 장소이기도 하다. 무려 4년에 걸쳐 완공된 라이히스탁은 현재 관광객들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어 그 유명한 노먼 포스터식 웅장한 풍의 유리 돔 천정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있다.

20세기 초엽부터 1930년대까지만 해도 베를린은 ‚메트로폴리스 건설’을 겨냥한 중부 유럽 특유의 빽빽하고 밀도높은 건축 도시로서의 발전을 거듭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정권의 패전을 겪고난 이후 도시의 대부분은 폭격과 총알의 흔적만 남긴채 거의 폐허되다시피 했다. 1945년 제2차대전 종전을 끝으로 베를린이 콘크리트 벽을 사이에 두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뉜 후, 서베를린은 서방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경제 재건 노력을 통해서 전흔의 기억과 고통을 지우려는 몸부림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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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리베스킨트가 1998년에 설계한 베를린 유태인 박물관 © Jüdisches Museum Berlin Photo: Jens Ziehe.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친 냉전기 동안에는 정부 주도 도시 신건설 계획의 적극적인 추진하에 불도우저 바퀴흔적과 신축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서 가고 있는 가운데, 베를린은 루 리드 (Lou Reed)와 데이빗 보위 (David Bowie)를 앞세운 급진적 대중문화와 이어 히피문화의 중심지로 떠 오르면서 독일 전역의 젊은이들이 대거 모여든 희망과 해방의 도시로 받아들여 지기도 했다.

1989년, 동서독을 가로 막았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 진 이후 시정부가 주도한 도시 재건설 계획에 따라, 지난 10여년 동안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쿨투르포룸 (Kulturforum) 건물이 자리해 있는 도심 일대는 신소재 건축자재와 유리로 광채를 발하는 모던한 신주거지 및 사무용 건축 구역으로 탈바꿈 해 버렸다.

건축가 조세프 조반니니 (Joseph Giovannini)는 한때 베를린의 도시 설계 및 건축 지침을 두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스타 건축가들의 이름을 내세운 도시 미화 작업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한 적이 있다. 지난 20여년에 걸쳐 베를린를 메운 건축물들을 설계한 국제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하나둘 거명하다 보면 어딘가 수긍이 갈 정도로 그 목록은 제법 화려하다. 그리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이 담긴 건축물들도 자연스럽게 나란히 발견되곤 한다. 베를린 올림픽을 거행했던 베르너 마르흐 (Werner March)의 나치 올림픽 경기장은 지금도 옛 스와스티카 장식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유지한 채 보존되어 있다.이 경기장 바로 근처에는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가 설계한 위니뜨 다비따시옹 (Unite D’Habitation) 아파트 단지와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지만90년대 중반의 자하 하디드 (Zaha Hadid) 초기작으로 꼽히는 강철 구조의 아파트 건물이 스트레세만스트라세 거리상에 숨은듯 서있다.

베를린를 통틀어 가장 기이한 양식을 자랑하는 건물은 현재 베를린 주식거래소로 활용되고 있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하우스 (Ludwig Erhard Haus). 니콜라스 그림쇼 (Nicolas Grimshaw)가 설계한 이 건물은 삐죽삐죽한 형태의 알루미늄 자재를 사용해 강렬한 표현성을 강조한 첨단 하이테크 빌딩으로서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서 아르마딜로 (Armadillo)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있다.

포츠다머 플라츠 마스터 플랜을 맡은 렌쪼 피아노 (Renzo Piano)를 비롯해서 리쳐드 로저스 (Richard Rogers), 헬뭇 얀 (Helmut Jahn), 한스 콜호프 (Hans Kollhoff) 등 포츠다머 플라츠 주변에 자리한 사무실, 상점, 아파트 건물들의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가히 내노라할 만하다.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에 위치한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은 쟝 누벨 (Jean Nouvel)이, 브란덴부르크 문 뒤켠 파리저 플라츠 상에 있는 DC 은행 (DC Bank)은 프랭크 게리 (Frank O. Gehry)가, 트라이앵글 오피스 및 아파트 건물은 요제프 파울 클라이후스 (Joseph Paul Kleihues), 프리드리히슈트라세, 마우어슈트라세, 크라우젠슈트라세의 건물들은 필립 존슨 (Philip Johnson)이 각각 담당했으며, 이탈리아의 알도 로시 (Aldo Rossi)도 그 주변 주거용 아파트 건물 설계를 책임진 바 있다. 콜호프와 머피/얀 설계팀이 설계한 머피/양 타워 (Murphy/Jahn Tower)는 일명 소니 센터 (Sony Center)로도 불리는 초대형 유리 건물로서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서 건축적 자랑거리로 꼽힌다.

그 같은 베를린 도심에서 벗어나 자리한 유태인 박물관 (Jewish Museum)은 다니엘 리베스킨트 (Daniel Liebeskind) 설계로 작년에 완공되어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유태인 박물관은 여러개의 타워식 건물들로 둘러 싸여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을 끄는 것은 자우어브루흐 허튼 (Sauerbruch Hutton)설계팀의 GSW 에코 타워 (GSW eco-tower)로 독일과 영국의 건축 전통의 특유한 어우러짐을 선사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동서독의 통일 이후로 이 도시를 가로 막고 섰던 장벽의 흔적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거리 위에 장벽이 서 있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던 흔적이 이따금씩 보이지만 장벽의 물리적 존재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렇지만 동서독 간의 심리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격차는 통일 이후로 그다지 완화되지 못했음을 베를린의 옛동독 구역에 발을 디딛는 자라면 느낄 수 있다. 신고 (新古) 건축물들이 뒤섞여 한데 녹아들어 있는 서베를린과는 대조적으로 동베를린에서는 지금도 옛 나치식 건물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곤 한다.

슐로스플라츠 (Schlossplatz)에 1967년 세워진 팔라스트 데어 레푸블릭 (Palast der Republik: 공화국의 궁전이라는 의미) 동독 국회의사당 (Parliament) 본부는 하얀색 대리석과 동(銅)과 유리가 부서진채 그대로 방치되어 빈 건물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서독에서는 이미 오래전 폐기해 버린 노랑색 거리 전차가 지금도 동부 베를린의 한산한 거리를 운행하는 모습과 서늘한 시민들의 표정에서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옛동독의 과거상을 엿보게 해 준다.

* 이 글은 본래 『ASIANA』 아시아나 항공 기내지 2003년 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로낭과 에르윙 부루엑 형제

INTERVIEW WITH RONAN & ERWAN BOUROULLEC 

부루엑 형제 작품 세계

‚80년대 필립 스탁 이후 프랑스 최고의 유망 산업 디자이너’ ‚낭만적 기능주의’ ‚심플 휴머’ – 최근 국내 프랑스에서는 물론 영국과 대륙권 유럽에서 산업 디자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로낭과 에르윙 형제를 일컫는 몇몇 형용구들이다. 이제 갓 30대에 접어든 형 로낭과 20대말의 아우 에르윙은 최근 크리스티앙 비셰이, 쟝-마리 마쏘, 크리스토프 필레, 마탈리 크라쎄, RADI 등와 더불어 90년대 프랑스 디자인을 대표하는 신세대 디자이너로 꼽히고 있다. 프랑스 디자인계는 80년대 필립 스탁의 독주 이후로 침체기를 겪다가 이들 젊은 신세대 디자이너들이 파리에서 집중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로 디자인 르네상스 시대를 맞기 시작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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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해 주방 (Cuisine désintegré)』 주방 시스템, 1998년, 이탈리아 카펠리니 사의 지원을 받아 프로토타입을 개발했다. Photo: Kreo Gallery, Paris.

형 로낭이 처음 디자인계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90년대 후반기는 유럽계 디자인 제조 및 소매 업체들이 재능있는 신진 유럽 디자이너 물색에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라는 점에서 브루엑 형제에게는 분명 행운기였다. 브르타뉴 지방 농가 가정에서 자연을 벗해 성장한 두 형제는 미술과 공예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오기까지 디자이너가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형 로낭은 산업 디자인을 공부하던중 우연히 가구 디자인 강의를 수강했다가 디자이너로서의  진로를 발견했다. 1995년 국립 고등 장식 미술 학교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에서 학업을 마치고 프랑스의 문화 보조금을 받아 가구와 세라믹 제품 디자인 작업을 프로토타입 전시를 지속해 가며 클라이언트 모색의 기회를 엿보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동생 에르윙은 조수로서 형의 프로젝트를 도와가며 세르지 국립 미술 학교 (L’École natioanale d’arts de Cergy)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둘은 아직 별다른 클라이언트의 주문이 없는 형편에서나마 1997년 특유의 간결 단순한 형태와 융통성이 결합된 공동작 『조합식 꽃병 (Vases Combinatoires)』을 발표했다. 이 제품은 흰색 폴리프로필렌 소재를 사용해 8개 꽃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친구들에게 물건을 나눠주고 그들이 제각기 사용하는 방법을 관찰하기 좋아한다는 부루엑 형제는 수 백가지 방법으로 형태를  조합분리해 변형할 수 있는 유희적 제품을 만들어보자는데에서 착상했다고 한다.

이어 1998년, 그같은 컨셉의 연장선상에서 부루엑 형제는 사용자의 취미에 맞게 변형가능한 융통성있는 『분해 주방  (Cuisine désintegré)』 주방 디자인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이사를 할 때 주방가구는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한다는 통념을 뒤엎고 서람, 조리 선반, 걸개 고리, 기초 가구 프레임 덮개 등 원하는 부분을 떼어 가지고 가 새로 이사간 집에 설치할 수 있게 한 그같은 무버블 주방 컨셉은 곧 이탈리아의 유명 제품 디자인 제조업체인 카펠리니의 눈에 띄어 파리 가구박람회에서 전시되었다. 이를 인연으로 부루엑 형제는 카펠리니 사를 위한 조명 및 세라믹 액세서리 디자인 프로젝트를 연이어 완성했다. 다시 1999년의 오텐틱스를 위한 꽃병디자인과 영국의 마이클 영이 아트디렉팅 한 SMAK을 위한 목걸이 디자인은 모두 두 형제의 공동 작업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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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침대 (Lit clos) 이탈리아 카펠리니 사의 지원을 받아 프로토타입을 2000년도에 개발했다. 당시 한정수량 8점만이 생산판매되었다. Photo: Kreo Gallery, Paris.

그러나 2000년 이후로 형제는 각자의 정체성 모색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잠시 일부 프로젝트에서 각자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기도 했다. 이유는 „일부 프로젝트들은 둘 중 한사람의 아이디어가 지배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공동작으로 부르기에 불공평했기 때문“이다.

형 로낭은 기술적인 면에서 그리고 아우 에르윙은 미적 감각 면에서 각각 우월하다고 말하는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작품이 완성되고 나면 둘이 기여한 요소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서로의 아이디어가 총체적으로 녹아 어우려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지명도 높은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프로젝트를 이행해야 하는 만큼 프로젝트의 기대수준이 높을 수 밖에 없다. 자연히 두 사람은 새로운 프로젝트에 임할 때마다 아주 작은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의견을 달리하거나 충돌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하지만 디자인은 팀워크이니 만큼 „서로 의견 충돌이 클 수록 서로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가운데 좋은 결과물이 나오곤 한다. 반대로 서로 많이 동의하는 가운데 진행된 작품은 오히려  별로였다“라고 에르윙은 대답한다.

2000년 에르윙이 혼자의 이름으로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카펠리니사 전시관에서 발표한  『닫힌 침대 (Lit clos)』는 그해 박람회 이벤트를 통틀어 최고의 화재거리 가운데 하나로 회자되었다. 당시만해도 파리 주변부 생-드니에 자리한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형의 조수로 일하고 있던 에르윙은 어린시절 나무에 지은 놀이집과 어린이용 이층침대의 기억을 더듬어 이 작품의 컨셉을 구축했다고 한다. 『닫힌 침대』 프로젝트는 나날이 비싸지는 지가와 임대료로 인해서 여러명이 한 가구에 모여 살아야하는 요즘의 서구 일상문화로부터 비롯된 지극히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아이디어이다. 상자모양의 이 침대 안에 설치된 조명등과 ‚구멍과 스프링 라운지 의자 (Hole and Spring Lounge Chair)는 형 로낭이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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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라 가구사와 개발 생산한 사무공간 및 사무가구 시리즈 조인 (Joyn).

2001년 카펠리니사를 통해 발표한 『글라이드(Glide)』 실내디자인 시스템 디자인은 부루엑 형제가 두 이름을 다시 나란히 해 밀라노 가구박람회에 선보인 작품. 학생 시절부터 좀고 값싼 임대 아파트에 살면서 수많은 친구들이 드나드는 북적거리는 생활 공간에 익숙해 있던 둘은 이 프로젝트에서 다시 한번 무버블 생활 가구 컨셉을 제시했다. 가벼운 소재를 활용, 컴팩트하고 이리저리 움직여 재구성하기 쉽게 설계된 소파 겸 침대와 선반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부루엑 형제의 작품은 일본의 패션디자이너 이쎄이 미야케 (Issey Miyake)의 관심을 끌었다.  미야케는 도쿄 A-POC 부티크를 큰 성공으로 이끈 후 2000년도에 파리 지점을 개장했다. 그는 ‚이음새없는 재단 디자인 (A Piece of Clothing)’이 주를 이루는 A-POC 매장에 부루엑 형제의 세심성과 휴머있는 디자인이 적격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수차례의 토론과 반복작업 끝에 A-POC 파리 매장은 그래픽이 곁들여진 우유색의 반투명 쇼윈도와 일명 ‚어셈블리라인’으로 불리는 실내 디자인으로 탄생했다.

약 100평방미터 가량의 매장 공간은 코리안(Corian)이 주문 생산한 옷걸이, 선반, 진열대 등이 유기적으로 장식되어 전시장과 의류는 마치 연출된 한 편의 그림을 연상시킨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한마디로 미야케 A-POC 매장은 미야케의 부루엑 형제의 동서양 퓨전 디자인의 한 예를 보여준 실례였다. 부루엑 형제는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일본 미학에 감명받고 카펠리니 의자와 발라우리스(Valauris) 세라믹 꽃병 시리즈를 제작해 추가로 A-POC 매장에 진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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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엑 형제가 디자인한 베제탈 (Végétal) 의자는 스위스의 가구생산업체 비트라에서 개발해 생산중이다. 2008년 밀라노 가구박람회를 통해서 처음 소개되었다.

작년 2002년 2월 1일부터 6월 16일까지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린 바 있는 부루엑 형제의 전시는 지난 5년여 동안 해 온 작업에 대한 중간점검이었다. 이미 2001년도 봄 뉴욕에 있는 콘란숍에서 연 『프랑스 신세대 디자인전 (Paris’s Rising Designers)』을 계기로 부루엑 형제를 눈여겨 보고 있던 테렌스 콘란 경(卿)은 지난  2002년 12월 6일부터 2003년 2월 9일까지 『드로오그 – 2002년 콘란 재단 컬렉션』(콘란 디자인 재단 후원/런던 디자인 뮤지엄 주최)를 전시중에 있다. 콘란경은 올해의 초대 큐레이터로 네덜란드의 드로오그 디자인 대표 기스 바커와 레니 라마커를 초대해 영국화 3만 파운드 어치의 디자인 제품을 구입하게 했는데, 부루엑 형제의 『TV 꽃병』(2000년 작)이 이 컬렉션에 포함되었다는 소식이다.

2002년  독일 쾰른에서 열린 비트라 오가텍 (Orgatec, 10월 22-26일) 디자인 페어와 이어서 11월 2-3일 스위스 랑겐탈에서 열린 디자이너스 새터데이 (Designers’ Saturday) 컨퍼런스에서 전격 소개된 조인(Joyn) 오피스 가구 시리즈는 일관 생활이 통합되고 상하위계 질서 대신 커뮤니케이션이 강조되는 현대 작업 환경을 반영한 디자인이다.

인터넷 환경에서 성장한 젊은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인 만큼 현대 사무실이 요하는 기술적인 융통성, 인체공학,개인적 창의력과 직원간 의사소통을 최적화한 열린 노동 공간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샛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스타 디자이너 시대, 디자인 창조의 맥락(context)를 강조하며 그에 적합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추구하는 로낭과 에르윙 부루엑의 디자인을 계속 주목해 본다.

동생 에르윙 부루엑과의 인터뷰

월간 『디자인』2002년 12월호에 실린 기사 중.

월간 『디자인』2002년 12월호에 실린 기사 중.

Q: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는가?
A: 대체로 아침 5시에 기상해서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그날 해야할 일에 바로 돌입한다.

Q: 평범한 하루 일과를 간단히 묘사한다면?
A: 그날그날 상황마다 좀 다르긴 하지만 하루일과를 보내는 특별한 방법이나 그런 것은 없다.  정해진 작업 시간이나 일과 같은 것도 없다. 스튜디오에서 일해야 하는 날이면 아침 일찌기바로 일을 시작한다. 우리는 프로토타입 워크숍이나 제조 공장에도 자주 들러야 하는 관계로 필요할 때마다 출장도 자주 다닌다.

Q: 지금부터 5년전에 무슨일을 하고 있었나?
A: 형 로낭은 이미 파리 고등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적인 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나는 아직도 학생 신분으로 순수 미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Q: 디자이너나 스승 중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 있다면?
A: 요즘처럼 디자인계의 상황이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와 이슈가 한꺼번에 공존하는 시대에 누구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이탈리아의 거장들 가운데 아킬레 카스틸리오네, 안드레아 브란찌, 그리고 에토레 솟사스의 공예성과 작품규모는 인상적이다. 미국의 60-70년대 디자인에서는의 산업화된 제품 생산 방식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본다. 최근 영국에서는  재스퍼 모리슨과 독일의 콘스탄틴 그르치치를 눈여겨 보고 있다.

Q: 여러 국제적인 프로젝트와 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해 오는 가운데 일과 개인 생활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유지하는가?
A: 우리의 경우 일과 개인 생활 간의 균형은 그다지 생각하지도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특별한 방법도 없다. 일과 생활은 그다지 구분되어 있지 않다. 스튜디오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일터에서 편하고 기분좋은 생활과 일을 함께 하려 노력한다.

Q: 두 형제가 한 팀이 되어 디자인일을 하는 것의 장점과 단점이라면?
A: 장점이라면 두 사람이 하나의 디자인 프로세스에 참여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토론과 의견 충돌을 거치기 때문에 매우 완성도높은 결과물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이라면 둘이 하나의 동일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보면 어떤 아이디어아 결과가 누구의 것이었는가 모호해진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두 사람이 강조하길 원하는 부분, 디테일, 아이디어가 서로 다른 경우도 있다.

Q: 작업에 대한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은?
A: 현대사회가 그렇듯 항상 다른 맥락(context)이 담긴 다양한 프로젝트를 완성했을 때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다. 예를들어 작년에는 세이코 시계와 협력으로 LCD 라이오 디자인 프로젝트를 담당했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 라디오 회사의 제품 역사를 깊이 배우게 되어 깊이 감명받았다. 또 최근 비트라와 함께 진행한 „벽을 허물어라(Break the Walls) – 오피스 공간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조인(Joyn:Espéce d’espaces)》을 선보였다. 비트라와의 협력을 통해서 디자인의 워크샵에서 자주 작업하면서 디자인의 공예성을 느꼈다.

Q: 창조활동으로서의 디자인과 비즈니스로서의 디자인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유지하는가?
A: 하하(웃음)… 우리는 디자인을 창조 활동일 뿐 비즈니스적 측면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앞서 언급했지만 디자인은 여러 맥락에 따라 달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문제를 정확히 진단 파악하고 그를 해결할 수 있는 정확한 제품을 창조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디자이너들은 복잡한 맥락 속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내가 발표한 『닫힌 침대』는 실제로 유용한 디자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제작비와 유통업체 확보 문제로 인해서 아직도  대량생산 및 판매 방법을 찾지 못했다. 카펠리니사는 높은 생산비를 이유로 판매를 미루고 있다. 우리가 소속해 있는 크레오 갤러리가 고가로 매우 소량을 판매중이다. 카펠리니가 저가로 생산하여 이케아같은 대중유통망을 통해 판매하는 방법도 고려해 봤지만 아직은 실현되지 못했다.

Q: 디자인 잡지를 읽는가? 당신에 대한 디자인 비평 기사는 일일이 읽는가?
A: 잡지는 읽지 않는다. 그냥 훑어만 본다. 대중매체는 너무 자주 독자를 오도하는 경향이 있다. 책은 항상 읽는데 요즘은 공상과학 소설을 읽고 있다.

Q: 음악은 듣는가?
A: 음악은 항상 듣지만 그다지 신경써 가려 듣지는 않는다. 우리의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친구들이나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가져오는 CD가 많아서 그걸 다 듣기에 바쁘다.

Q: 지금부터 10년 후 무엇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하나?
A: 자세한 미래에 대한 계획은 우리도 갖고 있지 않다. 디자인 환경과 맥락이 변해가는 것에 따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발견해 나가려고 한다. 의자, 꽃병, 악세서리 같이 우리가 해 온 기본적인 디자인 아이템들도 계속 디자인할 생각이다.

로낭과 에르윙 부루엑 형제 프로파일
로낭과 에르윙 부루엑 형제 (Ronan & Erwan Bouroullec)는 각각 1971년과 1976년에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프랑스 셍-드니(Saint-Denis)에서 거주하면서 2인조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작업하고 있다. 카펠리니 (Capellini), 보피 (Boffi), 해비탯 (Habitat), 리탈라 (Littala), 로젠탈 (Rosenthal), 마죠 (Magio), 로셋 (Roset), 솜머 (Sommer), 라 모네 드 파리 (La Monnaie de Paris), SMAK Iceland 등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제품 디자인 생산회사 및 디자인 숍 등과 협력하여 프로젝트를 당담해 왔다.

로낭과 에르윙 형제가 디자인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1998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살롱 드 뮈블르 가구박람회에서 심사위원상 그랑프리를 거머쥐면서부터. 연이어 두 형제는 라 빌르 드 파리 디자인 공모전 그랑프리, 1999년에 ICFF 뉴욕 베스트 뉴디자이너 대상(Best New Designer Award, New York), 그리고 2001년 대표작 ‚스프링 체어’로 콤파소 도로(Compasso D’oro) 수상후보작으로 지명되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왔다.

그들의 일부 대표작들은 현재 파리 조르쥬 퐁피두 센터와 뉴욕 근대미술관 (MoMA)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2000년 이쎄이 미야케가 파리에 개장한 ISSEY MIYAKE A-POC 전시장겸 패션 부티크에 소개된 두 형제의 패션 아이템과 실내 가구 디자인은 큰 화재를 모은 바 있으며, 곧 이어 도쿄에 있는 마야케 디자인 스튜디오 갤러리 (Miyake Design Studio Gallery)에서 전시회를 열어 일본인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가장 최근 전시로는 파리의 갤러리 크레오 (Galerie Kréo)(2001년 3얼 31일-7월 28일), 런던 디자인 뮤지엄(2002년 2월1일-6월 16일), 쾰른 오가텍 2002 디자인 박람회(조인 오피스 가구 비트라 프로젝트 , 10월 22-26일), 제9회 디자이너스 새터데이(2002년 11월 2-3일, 스위스 랑겐탈)가 있다.

* 이 글은 본래 월간 『디자인』지 2002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으로 최신 정보가 아닐 수 있습니다.

 

피터 빌락 타이포그라피

PETER BILĂK INTERVIEW WITH MONTHLY DESIGN KOREA

디자이너 프로파일
신세대 그래픽 디자이너 겸 디자인 디자인 평론가, 저술인, 교육자, 잡지 편집인은 물론 디자인 전시회 기획자 등 로 활동하고 있는 피터 빌락. 이제 갓 서른살을 넘긴 그는 현재 네덜란드의 행정도시 헤이그에서 작년인 2001년 봄에 설립한 피터 빌락 그래픽 타입 웹 디자인 앤 비욘드 (Peter Bilǎk : graphic, type, web design & beyond)라는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웬만한 중견 디자이너에 못지 않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디자이너다. 작년 2001년 한국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타이포잔치“ 타이포그라피 비엔날레에서도 출품한 경력이 있기도 하다.

빌락은 본래 타이포그라피 디자인을 통해 디자인계에 첫발을 딛은 후 줄곧 서구 유럽과 미국에서 국제적인 경험을 쌓아가면서 경력을 쌓은 케이스. 옛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인 그는 현재 슬로바키아에 위치해 있는 브라티즐라바 미술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타이포그라피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다. 수학 도중 국제 교환학생 과정과 인턴 수련과정을 통해서 영국과 미국에서 디자인 환경을 익힌 후 파리에 있는 국립 타이포그라피 아틀리에 (ANCT, Atelier National de Création Typographique)에서 타이포그라피 및 타이포 디자인 공부를 마쳤다. 프랑스에 있는 한 유명 타이포그라피 디자인 회사에서 1년간 일을 한 후 연구장학금을 받고 네덜란드 마스트리히에 있는 얀 반 아이크 미술 아카데미 (Jan Van Eyck Akademie)로 건너가 비디오를 통한 타이포디자인의 가독성을 주제로 한 연구과정을 2년만에 마치고 이를 인연으로90년대 중반부터 네덜란드의 유서깊은 그래픽 디자인 대행 회사인 스튜디오 둠바 (현재 헤이그 소재)에서 5년여간 그래픽 관련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슬로바키아 출신인 젊은 그가 타이포그라피 및 그래픽과 웹 디자이너로서 디자인 수준이 높기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유로는 빌락이 타이포그라피와 그래픽 디자인 전통이 깊은 동유럽권 출신이라는 점이 적잖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처럼 그래픽 및 서체디자인 역사가 깊은 서구 유럽의 전통과 달리 특히 근대에 접어들어 동유럽권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사회적 요구에 부합하는 효과적인 의사소통 기능과 그래픽 디자인이 요하는 특유의 예술성을 두루 만족시키는 복합적인 디자인을 창조해야 하는 숙제을 안고 있었고 바로 그같은 디자인 문화가 잠재적으로 빌락의 디자인에 영향을 끼쳐왔다고 말한다. 여기에 건축가와 디자이너란 전천후 만능인 (Jack-of all-trades)이며 따라서 고소득과 고급 지성인급 직업인으로서 대접받는 특수전문인이라는 관념이 자리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인 문화에서 비추어 볼 때 빌락은 이른바 그가 알고 있는 „디자이너의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원리원칙대로 수행하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빌락이 처음 그래픽 디자인계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시기는 지난 95년경 공모전을 통해 유레카라는 서체를 응모하여 수상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이미 90년대 초엽 그가 미국에서 디자인 수련과정을 하던 중 한창 미국을 주도로 유행하기 시작한 디지틀 서체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때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이리저리 날뛰듯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디지틀 서체가 지니는 특성에 매료되어 서체의 비가독성 (illegibility)에 대해 관심을 갖고 폰트숍 (FontShop)에 손수 제작한 서체를 판매하기도 했던 그 대표작들이다.

이후 파리 국립 타이포그라피 아틀리에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다시 서체의 가독성과 실용성에 다시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가독이 쉬우면서도 독자 마다의 개별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서체를 제작하자는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결과 탄생한 서체가 오늘날 동유럽 언어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유레카체(Eureka)인데, 이 서체는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를 비롯한 동구유럽 문자에 많은 각종 액센트 표기와 특유의 시각적 리듬 조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서체 디자인이 빌락의 핵심 디자인 창조활동인 만큼 그는 독자적으로 설립한 온라인 폰트샵 티포테크를 통해서 폰트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발표 판매하고 있기도 하다. 90년대 중엽의 실험적 성격이 강한 홀리 카우체 (1995년)와 챔폴리언체 (1996년)과 대조적으로 가장 최근 페드라 상스 (2001년) 및 페드라 모노체 (2002년)는 디지틀 시대를 반영하듯 단순간결한 스타일과 컴퓨터 디스플레이 최적화를 고려한 것이 특징이다.

디자인 비평과 저술활동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디자인 창조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2000년도 5월에 창간한 <닷-닷-닷(dot-dot-dot)> 디자인 전문지 편집 활동이다. 빌락 외에도 유르겐 알브레히트, 톰 운페르자그트, 스튜어트 베일리 등 총 4명이 모여 창간한 이 잡지는 현재 스튜어트 베일리와 빌락이 주요 책임 편집인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일년에 2번씩 간행되고 있다(http://www.dot-dot-dot.org)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는 이미지 위주의 포트폴리오식 편집 아니면 저널리즘 리포트식 편집이 주를 이루는 여타 기존의 대다수 디자인 잡지들에서 느꼈던 못마땅한 점들을 과감히 수정하고 현재 디자인 출판물들이 놓치고 있는 요소들을 추가하여 디자인 잡지들 간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간행물을 만들어 보자는게 <닷-닷-닷>의 창간 취지라고 그는 말한다. 일명 창조적인 비평 저널리즘을 추구한다고 하는 이 잡지는 그래서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한정된 주제 이외에도 그래픽 디자인과 관련된 각종 시각 문화 현상에까지도 관심을 두고 그에 적합한 기고를 편집에 추가한다.

다음은 피터 빌락과의 인터뷰 문답 내용:
디자인 : 당신은 디자인 창조 작업 외에도 디자인 전시 기획, 국제적인 디자인 전문지 비평 기고 활동, 강의, 직접 창간한 <닷-닷-닷>지 편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같은 비평 활동은 당신의 디자인 창조작업에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가?

빌락: 언급한 이상의 활동들은 모조리 동등한 중요성을 띠고 있으며 내 디자인 작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나에게 디자인 기고활동은 디자인 창조와 똑같이 중요하다. 일부 디자이너들은 자기네들이 ‚시각적으로 사고한다’며 글쓰기와 디자인하기를 분리하곤 한다. 하지만 디자이너란 사실상 작업에 투여하는 시간보다 자기의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임을 염두해 본다면 디자인에 대해 사고할 줄 안다는 것은 큰 맥락에서 볼 때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디자인 평론가라고 자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은 순수히 디자이너라고 여기며, 글쓰기에 임할 땐 아주 아주 느린 속도로 곰곰히 신경을 써가며 글을 쓰지만 글을 씀으로 해서 비로소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오로지 타이포 디자인 혹은 강의만을 하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여러가지 활동을 동시에 하는 것을 너무 즐겁게 하고 있으며 그런 창조외 활동들이 그 모든 활동들 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디자인: 훌륭한 타이포그라피 디자이너는 동시에 훌륭한 그래픽 디자이너가 될 잠재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가?

빌락: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그같은 예는 현실에서도 흔하다. 나는 훌륭한 타이포그라피 디자이너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그래픽 디자이너이거나 그 역의 경우의 예가 없음을 언제나 이상하게 생각해 왔다. 그 두가지 재능은 두뇌의 서로 다른 부분과 연관되어 있는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뭏튼 그 둘은 미시적 대(對) 거시적 시각을 요하는 재능이며 어떤 이유에 있어서인지 몰라도 웬만해서는 동시에 겸비되지 않는다.

디자인: 슬로바키아 출신 디자이너로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것의 장점과 단점은?

빌락: 분명 단점이라면 우선 사회적 배경,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하고 법률적인 문제에 휘말리기 쉽다는 점 등이다. 타국에서 외국인으로서 여유있고 의미있는 인생을 누릴 수 있는 위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장점이라고 한다면 양쪽 문화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울 수 있다는 점, 보다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지역적인 편견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일 게다.

디자인: 당신은 네덜란드 외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도 교육을 받고 직업적인 경험을 쌓았는데 결국 네덜란드를 작업지로 선택한 이유는?

빌락: 사실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된 이유를 내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인생사가 그렇듯 여러차례의 우연에 결과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단지 네덜란드의 작업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꼭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디자인: 당신은 현 네덜란드의 시각문화와 비교할 때 자신의 디자인 혹은 디자인 양식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당신이 네덜란드에서 인정받는 타이포그라피 및 그래픽 디자이너로 자리잡게 된 것이 그 분야 전통이 깊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했다고 보는가?

빌락: 잘 알려져 있는 바대로 네덜란드인들은 상당히 관용적이다. 나는 내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임이 내 직업생활에 그다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 배경을 저어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단지 어떤 특정 배경 출신이라고 해서 더 우월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그다지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내 출신은 내 선택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다만 내 능력 혹은 내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따라 인정받기 원한다. 하지만 물론 특정한 교육이라든가 성장시기 영향요소로 인해 유전받는 감성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체코 시문학과 네덜란드적 직접성에 두루 영향을 받았다고 여기며 이 두 작업환경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디자인: 작년 2001년 4월경 몸담고 있던 스투디오 둠바를 떠나 독립된 디자인 스튜디오를 설립한 후 성과는?

빌락: 지금 생각해 보면, 스튜디오 둠바를 떠난 것은 참 잘 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들에 열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고 싶었던 타이포 디자인과 강의에 더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좋한다. 나는 네덜란드 울타리를 벗어나 현재도 프랑스, 독일, 영국에 있는 친구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디자인: 시각을 돌려서, 당신의 활동상은 고국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그리고 네덜란드와 동구유럽의 디자인 교류는?

빌락: 지난주 나는 내가 그래픽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던 브라티즐라바 미술 디자인 학교에 초대되어 방문했다. 매우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나는 고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편이긴 하지만 공식적인 행사로 모교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방문 동안 내가 네덜란드에서 하고 있는 작업을 설명하는 기회를 가졌다. 고국을 떠나 있음으로 해서 나는 고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더 분명하게 살필 수 있게 되었고 이상하게도 그로 인해서 고국에 더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프라하와 브라티즐라바 두 곳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정보제공, 출판활동, 전시회 등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디자인: 클라이언트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빌락: 내가 하는 작업은 매우 독특한 한정된 클라이언트의 취향을 자극하는 것 같다. 주로 그들은 친구들이나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작업하기도 쉽다. 나의 경우 내가 잘 개인적으로 알지못하는 클라이언트와 작업하는 일은 거의 없다. 상호신뢰와 존중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클라이언트와의 협력은 대부분 매우 보람있게 마무리되곤 한다.

디자인: 최근 당신의 관심을 차지하고 있는 최근 프로젝트나 개인적인 창조작업은 무엇인가?

빌락: 나는 요즘 타이포 디자인에 훨씬 시간을 많이 투여하고 있다. 오픈타입의 가능성에 매우 큰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새로운 서체개발에 계속 전력할 생각이다. <닷-닷-닷> 제5호가 지금 막 인쇄를 마치고 출간되었다. 이 잡지는 제 발이 달린듯 새 호가 출간될 때마다 자연스럽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공동편집자인 스튜어트 베일리와 나는 현대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책을 내년까지 출간(템즈앤허드슨 간)하기 위해 집필에 한창이다. 이 책은 내가 작년 브루노 비엔날레의 행사 일부로 기획했던 현대 네덜란드 디자인 전시를 한발짝 전개시킨 창조적 기록물이 될 것이다.

디자인: 당신의 최근 지적/창조적 관심사는?

빌락 :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책읽기를 아주 많이 하고 있다. 칼비노, 카프카, 고다르, 에코 등을 읽는다. 그리고 음악, 영화, 문학 할 것 없이 여러 다양한 분야의 ‚역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는 타이포 디자인의 역사적 측면을 이해하는 매우 도움이 된다. 타이포 디자인은 필히 역사적이고 축적적인 산물이므로.

디자인: 당신의 단장기 미래 계획은?

빌락: 책읽기에 시간을 더 만들었으면 좋겠다. 최근 급격히 내게 중요한 요소이므로.

인터뷰 진행/편집 박진아

*이 글은 본래 월간 『디자인』지 2002년 10월호에 실렸던 기사를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최고 품질의 제품이 곧 광고

루치안 베른하르트가 디자인한 보쉬의 자동차용 헤드라이트 광고. 사실적인 형태 묘사와 강렬한 원색과 큼직한 타입페이스가 특징적이다.

초창기부터 60년내까지 보쉬(Bosch) 광고 특별전

“광고는 제품매출의 필수요건”- 보쉬 사보 『Bosch-Zuender』는 이미 1919년, 그래픽 인쇄광고가 기업문화와 매출고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철통처럼 견고하고 오래가는 가전제품 생산제조업체의 대명사 보쉬 (Bosch).

보쉬가 오는날 독일의 전자 제품 브랜드의 대명사로 자리잡기까지에는 이 회사가 100년 넘게 보유해 온 축적된 기술 말고도 시대적 분위기와 문화적 트렌드가 반영된 광고의 역할이 컷음을 지적하는 특별 기획전 『Werbung bei Bosch von den Anfängen bis 1960』이 베를린 독일 기술박물관 (Deutsches Tecknikmuseum Berlin)에서 5월 25일부터 8월 27일까지 계속된다.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정밀기계와 전자기기 워크숍을 운영하던 창업자 로베르트 보쉬 (Robert Bosch)는 1886년 Robert Bosch GmbH라는 회사명으로 본격적인 전자제품 생산 사업을 시작했다. 보쉬의 최초 성공작은 1887년 급속 점화기. 보쉬기술로 자체 개발한 자석 점화기로서 독일을 비롯한 전세계 자동차 제조업체들에 대량 공급하기 시작했다.

1913년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다시 한 번 유명해 졌고, 30년대부터는 냉장고, 라디오, 자동차 라이오를 생산하기 시작, 특히 1932년의 블라우풍크트-라디오 (Blaupunkt-Radio)와 1933년의 보쉬 냉장고는 오늘날 제품 디자인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진품들이 되었다. “기업 아이덴티티”나 “기업 디자인 (corporate design)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훨씬 전인 1909년 보쉬는 유겐트스틸 양식으로 작업하는 그래픽 아티스트인 율리우스 클링거 (Julis Klinger)를 고용, 그 유명한 “보쉬-메피스토 (Bosch-Mephisto)” 로고를 탄생시켰다. (메피스토는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율리우스 클링거가 디자인한 급속 점화엔진 선전용 그래픽 광고. 『파우스트』의 붉은 악마 메피스토는 1910년대 보쉬의 로고로 자리잡아 큰 성공을 이루었다.

1920년대는 그래픽 아티스트 루치안 베른하르트 (Lucian Bernhard)와 더불어 보쉬 그래픽 광고의 “대성황기”를 맞았다. 제품 그대로의 사실적 디테일과 외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예술적 감각이 가미된 색채사용과 타이포그라피가 특징적이다.

1920년대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아르데코 양식의 영향으로 유선형(streamline) 디자인이 지배하는 가운데, 그래픽 디자이너 해리 마이어(Harry Maier)는 ‘운전은 멋진 라이프스타일의 필수품’이라는 이미지를 고취시키는 슬로건과 우아하고 곡선적인 그래픽 광고를 제작했다.

제2차 대전 후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해야했던 50-60년대 독일은 경제 재건이라는 대명제를 반영한 그래픽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해리 마이어는 텔레비젼의 보급에 발맞추어 TV 스폿광고 그래픽 제작을 맡았고 광고 이미지로 TV 인기 출연자의 얼굴을 이용하기도 해 미스미디어에 의한 광고 판도의 변화를 암시하기 시작했다. 보쉬 제품 광고 80년사 속에 배어있는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 볼 수 있는 이번 전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박물관에서 판매중인 전시 카탈로그 (29.80독일 마르크)를 구입.

현대도시의 디즈니화

LEAVE THE CITIES ALONE

관광 즉, 소비로서의 인파의 순환은 근본적으로 이미 진부해진 것을 보러가는 여가활동에 다름 아니다. – 기 드보르

Tourism, human circulation considered as consumption is fundamentally nothing more than the leisure of going to see what has become banal. – Guy Deb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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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팀첸코 (Alexander Timtschenko)작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Wild Wild West)』 1999년. 한 익명의 유럽 도시에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건물 분위기로 지은 주제 공원 거리를 사진으로 담았다.

현대 사회의 대도시들은 관광산업의 희생물로 전락하고 있는가? 현대 도시들은 소비와 유흥의 무덤에 불과한가? 작년 12월부터 개장한 이번 퀸스틀러하우스 (Künstlerhaus)에서의 “사이트 시잉-현대도시의 디즈니화 (Site-seeing: Disneyfication of Cities) “ 전시는 특히 오늘날의 유럽 도시들이 대중관광산업, 유흥, 쇼핑, 나이트라이프 (nightlife)라는 자본주의적 소비현상을 제공하는 디즈 공원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 현상을 진단해 보는데 촛점을 두고 있다.

고풍스런 건축물과 진한 역사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해 보라. 외국어를 쓰며 도시를 두리번거리는 관광객들을 그다지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는 현지인들은 심심찮게 눈에 띈다.  현지인들에게 관광객들은 더 이상 이국적인 손님들이 아니라 현지인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하고 싸구려 기념품을 사들고 떠날 소비자들에 불과하다. 유럽의 유명 관광도시들을 거닐다 보면 관광객용 메뉴로 호객행위하는 레스토랑과 기념품 상점들이 집중적으로 개발되있어 흡사 관광객 게토를 맴돌고 있는 듯한 불쾌감까지 경험하기 일쑤다.

한편  자본주의적 경제논리가 발달한 영국이나 독일등지에서는 지역사회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발전을 이유로 일부 도시에 대형 숙박시설, 쇼핑몰, 유료 관람 시설 등의 신건축개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기까지 하다.

그같은 유행을 본따 싱가포르, 홍콩, 일본,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도 도시 개발과 도시 이미지 쇄신 작업에서 어떻게 하면 관광객들에게 잘 팔리는 디즈니형 도시로 만들것을 지향하는 추세이다. “성공적인 도시 설계=잘 꾸며진 디즈니 도시”라는 상업적 소비주의 원칙 때문이다.

전과 달리 지난 20여년 동안 미국과 일본이 주도한  대규모 대중 관광 산업의 발달이 관광 대중화의 원인이었다. 덕분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말로만 듣던 전세계의 국제도시와 유서깊은 역사 도시들을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여행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한편 과거의 유산과 흔적을 간직한 역사의 유럽의 고도시들이나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열대섬들은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국제 관광객들로 인해 환경의 균형이 파괴되고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상실하는 안따까운 현실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이탈리아 거리 한구석에는 고을 아낙네나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 대신 모자와 운동화차림을 한 관광객들이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더 자주 눈에 띈다. 파리와 비엔나에서 친한 친구의 초대가 아니고서는 관광객들은 관광객 전용 술집이나 레스토랑에서 정성없이 조리된 식사로 끼니를 때우곤 한다.

그같은 현실 속에서 과연 현대 도시들은 언론이 조작하는 도시 이미지 스테레오타입에서 탈피하고 소비활동의 제공자로 전락하는 추세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전시에서는 이같은 현대사회 현상을 주제삼아 작업하는 13의 유럽출신 미술가 및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 제목 :  사이트시잉 – 현대도시의 디즈니화 | 장소 : 오스트리아 빈 퀸스틀러하우스 | 기간 : 2002년 12월 13일-2003년 2월 9일. Photos courtesy: Künstlerhaus, Wien.

* 이 글은 본래 월간 『디자인』 2002년 3월호에 실렸던 기사를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의자 과거와 오늘, Part 1

의자 –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한 앉기의 문화

CHAIRS OLD & NEW

당신은 생각해 보았는가? 의자에 앉으라고 권유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해 땅바닥이나 층계에 걸터앉아야 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를? 중요한 손님을 반겨야 하는 사업가나 개인은 찾아온 객인에게 편히 앉을 것을 권유하며 의자를 제공한다. 반면 쇼핑센터를 거니는 익명의 쇼퍼나 관광객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이나 상업적 커피숍에서 돈 쓰지 않고 다리를 쉬고 싶어하는 지나치는 사람은] 은 지친 다리와 허리에 쌓인 피곤을 잠시나마 다스리기 위해서 땅바닥이나 계단에 주저앉아 한숨을 돌린다. 지친 인간의 몸과 마음에 순간적인 휴식 혹은 다소간이나마의 안락과 권력의 순간을 안겨주는 인간 신체와 빈 공간 사이의 매개물체 – 그것은 다름아닌 ‘의자’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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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 궁중에서 사용되던 요강 © 2013 Schloß Schönbrunn.

오늘날 서구 장식 미술과 디자인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디자인 오브제도 바로 의자이며, 디자인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애송이 디자인 학과 학생으로부터 거장 디자이너들이 제각자의 대표적인 스타일을 압축해 보여주고 평가를 기다릴때 가장 우선 내보이는 표준 잣대가 또 바로 이 의자다.

의자란 엉거주춤 무릎을 90도로 구부려 둔부를 바닥에 대고 앉으면 등을 뒤에서 받쳐 주는 가구. 해서 엄밀히 정의하자면 엉덩이가 바로 닿는 시트(seat)와 등받이(back rest)가 갖추어진 것이 의자(chair)이다. 누워서 잠자고 몸을 직접 움직여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을 하는 순간을 제한다면 인간은 쉬고, 먹고, 일하고, 심지어 배설하는 순간까지 의자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셈이니 의자라는 가구 품목이 우리 일상생활과 얽힌 관계는 심히 뿌리 깊다 아니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의 의자가 처음 탄생한 때는 기원전 3세기경 고대 이집트. 아마도 인류의 조상들이 실내의 딱딱한 바닥과 벽에 보다 안락감있게 앉고 쉬기 위해 나무 줄기를 깎거나 켜서 꼬고나 엮어 만든 일종의 쿠션이나 방석을 얻어 만든 원시적인 형태에서 출발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집트에서 만들어졌던 의자들은 그같은 방석 내지는 쿠션 형태에서 한 걸음 발전해 동물 형상을 한 의자 다리에 시트와 쿠션을 붙인 석식 의자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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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말경 미국의 실내 장식 디자이너 테렌스 해롤드 롭스존-기빙스(Terence Harold Robsjohn-Gibbings)가 유럽에서 불어닥쳐 온 모더니즘 미학과 18-19세기 고전주의 양식을 결합해서 고안한 동명의 명품 의자 클리즈모스 의자는 바로 이 고대 그리스 의자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이어서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클리즈모스(Klismos) 의자는 의자 디자인 역사상 가장 우아한 형태를 자랑하는 인류 초기 의자 디자인의 대표적인 사례다. 지금은 더 이상 진품을 구경할 길이 없지만 고대 그리스 도기 그림에서 그 모양새의 흔적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다. 시트는 얇게 켠 나무골로 가로세로로 짜서 만들고, 등받이는 몸의 곡선에 맞도록 굴곡시킨 가로판과 세로판을 붙여 만들었으며, 다리는 *사브르 모양으로 앞과 뒤로 날렵하게 휘어진채 의자 시트와 등받이를 떠받들어주는 모양새를 지녔다.

오늘날 낚시꾼들과 캠핑족들이 잊지 않고 가져가는 X-자 모양의 휴대 의자의 탄생 시기는 기원전 2세기 고대 로마 시대로 거슬로 올라간다고 알려져 있다. 일명 *가위 의자(Scissors Chair) 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의자의 기본 원리는 서로 앞뒤 또는 좌우로 교차되는 다리의 힘으로 시트를 받쳐주어 사용자가 그 위에 앉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 기본성과 단순성 때문에 등받이가 있는 의자용으로 그리고 등받이가 없이 시트만 있는 걸상(stool)용으로 공히 널리 사용되었던 기발성있는 의자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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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나롤라 의자(Savonarola Chair) 또는 단테 의자(Dante Chair)로 불리는 가위형 다리 의자.

다리를 가위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유럽 초기 중세 시대에는 교회나 수도원에서 기도용 접개식 걸상으로 널리 활용되었으며, 이후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자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일을 해야했던 직공 장인들 사이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특히 르세상스 미술 문화가 더 널리 드높이 보편화되어 꽃피우던 16-17세기 시대가 되자 이 가위자 모양의 의자 디자인인 자못 화려해지고 소재면에서도 가죽이나 고급 직물을 사용해 만드는 등 고급화되어서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 인문주의자들의 이름을 딴 사보나롤라 의자(Savonarola Chair) 또는 단테 의자(Dante Chair)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생산되었다.

이 가위 의자의 실용성 만큼이나 우아한 자태 덕분에 이후 18세기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고전 미술로의 복귀 운동에 힘입어 가구 디자인에서 가위 의자가 여러 변형된 형태로 재탄생했으며, 19세기 중엽부터는 강철 소재의 발견 덕택에 본래 온전히 목재로 만들어졌던 가위 의자에 강철 부품과 부속이 덧가해져 디자인되기도 했다.

Bishop Palace at Wells Somerset

런던의 가구 제작업체 켄셋 (Kensset) 에서 생산한 이 턴드 의자는 16세기 유럽에서 제작되기 시작했던 다리 세 개의 삼각 의자 모형에 기초하고 있으며 영국 서머셋 웰스 비숍 팰리스에서 생산되던 의자를 원형에 충실하게 재건한 것이다. Copyright © V&A Images.

그러나 한 집안의 가장에서 부터 교회나 왕실 등 주요 직책을 맡은 가중있는 신분의 사람들은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가위 의자 보다는 등받이가 높고 크며 묵직한 소재로 제작된 위엄있는 의자에 앉아서 업무에 임했다.

16세기 튜더 왕조가 지배하던 영국에서 사용된 의자는 대체로 박스 모양의 커다란 직사각형 형태가 기본을 이루던 사각 틀 모양의 턴드 의자(Turned Chair)였다. 단순엄격한 박스형 골격은 유지하되 벨벳같이 각종 값비싸고 귀한 직물천, 가죽, 브로케이드와 프린지 장식물, 금동 못으로 현란하게 장식한 의자가 품위있는 가정에서 앉을 용도와 빈공간 장식용으로 널리 유행했다.

그같은 화려한 의자 장식 유행은 17세기 이르면서 그 정교한 직물과 장식물을 각종 고급 목재를 재료 삼아 목조각으로 재현한 정교한 목공 의자가 목공예 재간의 극치를 이룩했다. 같은 시대 프랑스에서도 의자 시와 등받이를 값비싼 직물로 감싸고 부와 안락을 상징하도록 시트와 등받이를 두툼하게 채워 넣는 모양새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 바로크 시대의 대명사이자 태양왕 루이 14세에 와서 의자 등받이는 전에 없이 높고 시트의 폭은 넓어 졌으며 복잡화려한 굴곡과 세심한 직물 및 목공 기량과 값비싼 금박과 칠 공예가 눈에 띄는 장황한 모양새의 의자가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부와 권력의 상징 역할을 톡톡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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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엽 영국의 가구 디자이너 존 리넬(John Linnel)이 디자인한 윈저 의자 연필 드로잉 Copyright © V&A Images.

그같은 유행은 대륙권 유럽에서만 아니라 바다 건너 영국으로 전해져 왔지만 프랑스에서 행해지던 화려장대한 취향과 고도록 숙련된 목공 기술은 다소 침착하고 소박한 형태로 변형되었다. 오늘날 흔히 *카브리올 다리(cabriole leg)로 불리며 영국식 앤티크 책상과 의자에 즐겨 활용되고 있는 젊잖은 곡선 형태의 다리가 바로 이 카브리올 다리이다.

영국에서는 중심 도시에서 벗어난 농촌 지방에서 17세기 말경부터 윈저 의자(Windsor Chair)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의자는 카브리올 다리 의자를 한결 실용적이고 단순화시켜 만든 대중용 의자였다.

그런 이유로 해서 이 윈저 의자는 18세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여러곳에서 수공 제작되는등 미국식 의자로 재탄생하여 대중적으로 애용된 의자가 되었다. 오늘날 일반인들이 미국 서부 영화의 살룬이나 한가로운 저택 발코니에 놓여있는 목공 의자와 흔들의자는 바로 윈저 의자가 미국화된 것들이다.

18세기 로코코 시대에 프랑스에서는 등받이 부분이 리본처럼 엮이고 꼬인 형태를 따서 얽히고 설키듯 복잡다단한 패턴을 따 만든 리본등받이 의자 (Ribbonback Chair)가 유행하는 동안, 영국에서는 이 젊잖은 카브리올 다리에 옛 고딕식 패턴이나 중국식 동식물 문양 직물 패턴이 가미된 의자가 큰 인기를 끌었다.

  • 사브르 다리(sabre leg)란? 별다른 굴곡이나 장식 없이 사각 모서리를 그대로 살려서 매끈하고 우아하게 앞뒤 혹은 좌우로 살짝 휘며 뻗은 의자 다리.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졌던 클리모스 의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후 고전주의 복귀 운동이 전개되었던 18세기 신고전주의 시대의 직선위주의 절제된 의자 디자인에 다시 응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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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기 영국 글래스턴버리 수도원장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X자형 의자는 고대 그리스풍을 본따 다리를 X자형으로 디자인했으나 접히지는 않는다. 어거스터스 웰비 노스모어 퍼진(Augustus Welby Northmore Pugin) 공방 제작 Copyright © V&A Images.

  •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X-자 의자란? X-자 의자는 서양 중세기 부터 주로 교회당에서 사용된 의자 형태로 그 우아한 모양새와 종교적 권위의 상징성 때문에 이후 르네상스 시대까지 귀족과 종교 권위자들이 즐겨 사용했다. 특히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사보나롤라 의자 또는 단테 의자는 이 시대부터 특유의 가위자 다리 구조를 발전시켜 접었다폈다 할 수 있도록 처음 고안되기 시작했다.

중세까지만 해도 가위자 다리 모양은 실제로 접개 기능을 하지 못했던데 비해서 의자의 부피를 손쉽게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동에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 이후 귀족들 사이에서 야외 피크닉, 사냥 또는 야외 정원용 의자로 각광받았던 X-자 의자는 20세기 근현대 의자 디자인에 지속적인 영감의 원천이 돼 주었다.

  • 카브리올 다리(cabriole leg)란? 카브리올 다리란 의자나 걸상을 포함해서 책상이나 탁자 처럼 다리가 달린 가구를 떠받치는 다리 부분 중에서도 2중으로 곡선을 그리며 내리뻗은 다리 모양을 의미한다. 윗부분의 곡선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아랫부분의 곡선은 안쪽에서 바깥쪽 방향으로 곡선을 형성하는게 일반적이며 본래는 고대 그리스와 중국으로부터 유럽으로 소개되었으나 유행을 끌지 못하다가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들어 비로소 특히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에서 실내장식용 가구에 즐겨 사용되는 양식이 되었으며 18세기 중엽부터 다시 퇴조하였다. [제2부 계속]

 

의자 과거와 오늘, Part 2

근대와 20세기 – 의자의 보편화 시대

CHAIRS OLD & NEW

[제1편을 계속 이어서] 의자 디자인의 두 큰맥이랄 수 있는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전까지 자랑하던 화려장대한 디자인 양식을 폐기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대륙 유럽과 영국을 휩쓸었던 바로크와 로코코의 열병을 뒤로 하고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유럽은 온통 신고전주의 운동(Neocalssical Movement)이 본격화 되었다. 고전주의 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 속 미술이 이룩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이를 18세기에 맞게 재해석한 것이 신고전주의의 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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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과 마호가니 목을 소재로 하여 19세기에 제작된 엠파이어 스타일 팔걸이 의자. 당시 파리의 고급 가구 생산을 장악했던 목공소 명인 쟈콥-데스말터(Jacob-Desmalter)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 Sotheby’s.

신고전주의 양식을 통해서 만들어진 의자 디자인을 보면, 바로크와 로코코의 복잡다단하고 번잡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그 대신에 직선 위주의 다리와 시트 디자인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으며 곡선은 타원형 정도의 절제된 원형으로 자제하는 추세를 보였다.

예컨대 영국의 리전시 스타일의 의자나 프랑스 나폴레옹 제정 시대를 주도했던 제국양식(Empire Style) 의자는 각각 고대 이집트 시대 파라오의 권좌를 연상시키는 팔걸이 의자와 고대 그리스 시대의 클리즈모스 의자의 기본 형태를 본따 만들어진 의자들의 대표작들이다.

19세기, 구 귀족들이 점점 경제적으로 몰락해가는 동안, 신흥 부르조아 계층이 급부상하면서 사회적인 신분상승과 자기 과시를 하는데 있어서도 새로운 유행이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문화 영역에서는 이른바 역사주의(Historicism)가 유럽을 강타했는데, 이 시대 역사주의는 민족주의, 인종주의, 종족의식 같은 지엽적 성향의 민중적 감성에 기초하고 있다보니 자연히 처연한 감상주의(感傷主義, sentimentalism), 자연에 대한 막연한 동경,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치는 감각주의를 특징으로 하며 주로 일반 대중들의 평범하고 통속적인 감성에 어필하는데에 기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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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넷 형제가 1865년경 디자인해 생산한 토넷 의자 제1번. 빈 황제가국박물관 소장 Photo: F. Simak © Kaiserliches Hofmobiliendepot, Wien.

프랑스의 제국 양식(Empire Style), 영국의 치펜데일(Chippendale)과 빅토리아 양식(Victorian Style)이 계속되는 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중유럽에서는 신흥 중산층 사이에서 비더마이어 양식(Biedermeier Style)이 크게 유행했다.

비더마이어 양식으로 만들어진 의자 디자인의 영원한 고전으로 꼽히는 토넷(Thonet) 의자는 목재를 엮고 굽히는 고유의 제작 방식 만큼이나 단순 간결한 완성도를 이룩한 19세기 의자의 고전작이다. 오늘날까지 의자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토넷은 이후 20세기 근현대 여러 디자이너들의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기도 했다.

19세기 후반기에서 20세기로 치달아가는 약 20년 간은 유럽에서 모더니즘이 폭발적인 창조적 분출을 경험했던 시대였다. 영국의 미술과 공예 운동, 프랑스의 아르누보, 독일어권 국가의 유겐스틸 운동은 바로 그 대표적인 움직임들이었는데,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 스코틀랜드의 찰스 레니 매킨토시, 벨기에의 앙리 반 데 벨데, 프랑스의 가이아르, 오스트리아의 오토 바그너와 요제프 호프만 등은 식물에서 도출한듯 묘하고 아름다움 곡선미와 근대적 직선미를 결합한 최초의 근대적 의자 디자인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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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디자인해 생산된 바실리 의자 위에 앉아 있는 바우하우스 건축가 겸 디자이너 마르셀 브로이어. Photo courtesy: Thomas Breuer.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양차 세계 대전이 유럽을 휩쓰는 환경 속에서 유럽 특히 프랑스와 영국은 더 이상 의자 디자인의 유행을 선도하는 유일한 대륙이 아니었다. 제1차 대전후, 독일의 건축가 겸 디자이너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는 철관이라는 아주 근대적인 재료를 사용해 캔틸레버 구조로 의자 디자인의 혁신을 이루었다.

독일 출신의 근대 디자이너 거장 미스 반 데어 로헤가 디자인한 철재 의자 받침구조와 가죽 시트의 바르셀로나 의자(Barcelona chair)는 지금도 비트라에서 꾸준히 생산판매 되고 있는 근대 의자의 고전이 되었다. 또 스위스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철제 팔걸이 의자, 핀란드의 거장 알바 아알토(Alvar Aalto)의 라미네이트 굴곡목 의자, 전후 미국의 산업디자인을 재정의했던 찰스 에임스(Charles Eames)의 철제와 플라스틱 소재 의자 등은 근대 디자인의 국제성을 대변해 주는 명작들이다.

대량생산과 소비주의와 후기 산업사회가 무르익기 시작한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디자이너 개인의 독특한 컨셉과 스타일, 20세기초 바우하우스식의 기능주의에서 탈피한 유연하고 혁신적인 사고가 의자를 디자인한 디자이너들의 핵심적 창조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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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키미아 운동의 선구자 알레싼드로 멘디니가 디자인한 『프루스트』 의자(Poltrona di Proust)는 1978년에 생산되었다. Photo courtesy: Pinakothek der Moderne München.

1960년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대가 베르너 판톤(Verner Panton)에서 표현된 미래주의 시대정신과 인체공학의 유행, 1970년대의 팝 디자인, 1980년대 이탈리아의 스튜디오 알키미아(Alchimia)와 멤피스(Memphis) 아방가르드 디자인 운동을 거쳤다.

이어서 경제와 문화의 세계화(Globalization) 정책으로 인류 역사상 경기 호황과 윤택하고 안락한 소비주의 문화가 최고조를 이루었던 1990년대가 되자 전세계적 건축붐을 타고 전에 없이 많은 스타 건축가들이 건축 외형과 부합하는 실내장식과 가구 디자인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간 후기 산업시대 포스트모던 의자 디자인의 각축 시대를 목도했다.

첨단 신소재와 공학에 의존해 의자 본유의 기능성 보다는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독특한 개성, 재미와 개념적 위트를 과시하고 표현할 수 있는 조형물로 된 현재 21세기, 다가올 10년 동안의 의자 디자인과 인류의 앉게 문화는 또 어떻게 진화해 나갈까?

 

Peter Bilăk on Typography

INTERVIEW WITH PETER BILĂK ON TYPO DESIGN

Jungle: How did you first get yourself exposed to the world of graphic design, and what formal/informal education or trainings did you have before you started your professional career as a designer?

Peter Bilăk: 
I started studying back in Czechoslovakia at the Academy of Fine Arts and Design in Bratislava. While studying there, I went for an exchange programme to England and to the US. After finishing my internship in the US, I went on to study to ANCT (Atelier National de Création Typographique) in Paris to focus on type design and typography. I worked for a year in a big agency, but left and I received a research grant at the Jan van Eyck Akademie in Maastricht, NL where I spent two years working on a video-based project on reading. From there my route lead to Studio Dumbar in The Hague.

Jungle: What teachers, artists, movements helped form or change your perspectives about typography and graphic design? How your international experiences (U.K, U.S. France, and currently the Netherlands) have formed you and your work?

PB: Every experience in the course of my studies was extremely useful and invaluable, I learned different things home in Slovakia then in the US or France. It is difficult to compare, and pinpoint the best. And there are so many people I admire…

Jungle: As a Slovakian designer, how much do you value and treasure the history and heritage of Czechoslovak typography? And how do your ideas reflect in your design?

PB: The Czech type designers such Menhard, Preissig or Hlavsa have got me interested in the profession at the first place. I didn’t realise at that time how unique were the Czech books that I had at my disposal. The tradition is fundamentally different then the French or Dutch one; Czechoslovak designers always worked in complicated situations and were forced to look for very creative solutions. There was a big gap and a period of silence in the 70s and 80s, but fortunately with political changed in the country and technological development the tradition survived and is blossoming.
Today I work in the Netherlands where the esthetical and functional values in design are very high. But I can’t forget and deny my own roots. An artist in Czechoslovakia has always a special position. They didn’t only have a role of artist adding value of society but carried direct responsibilities; they were often socially and politically involved.

Jungle: How did you come by with the ideas for the ‘Illegibility’ book?

PB: 
I started working on the Illegibility project in the US, and its background is the wild development of digital typography in the early 90s. By that time, I have designed a series of fonts some of which were published by FontShop. Illegibility came naturally as a next step, and more theoretical base for my work. It was challenging to start working with the written word after I have been playing around with its form. Today, I feel a big distance from this project.

Jungle: And Transparency?

PB: Transparency is a result of one year sobering in France. I got interested in linguistics which later resulted in the Transparency book. The by-product of this interest was also Eureka which preceded Transparency. The book is arguing that typography is fully dependent on technological, social and political development.
The Transparency project is not intended to romanticise graphic design; it is about provoking independent thinking. The subjectivity of today’s graphic design is unlimited and leaves enough space for more than one interpretation. We must respect the reader’s right to interpret the message. Graphic designers should be the most sensitive readers, offering their work to other readers who reconstruct the meaning individually. Designers have the opportunity to ask questions, to discover textual complexities and introduce readers to new feelings.

Jungle: You mention the emotive and expressive nature and aspects of typographic design. How are they manifested in, for instance, Eureka?

PB: Eureka is closely connected to the Transparency project, in fact it was designed with the intention to have a typefaces that can be used to longer bilingual text.
 Because most of the fonts used in Central and Eastern Europe are of Western origin, they don’t really respect the local culture and language. There are many fonts which totally ignore the linguistic particularities.
Some fonts work well when used in Dutch or English, but used in languages which have many accented characters they are not adequate. Eureka is a direct response to this. I was observing different reading rhythm in different languages, and studying what causes it. Eureka has adjusted proportion to accommodate accents which are very important in Czech or Slovak for example.
Of course, Eureka is not only a visual response to a set of problems, it is also a formal experiment, and a learning process. Because of the long process (five years) I learned a lot. When I see the first versions of Eureka I can’t believe how many mistakes and inconstancies there are. But I guess this quirkiness adds font some character.

Jungle: There are many literary fans for Milan Kundera in Korea, as most of his published books have been translated into Korean were always successful in charting the bestseller list. Regarding your notes on the Problems of translation of Kundera’s work, how does it relate to your attitude towards design?

PB: As you might have gathered I am a big fan of Kundera myself. In his body of work, he has been striving to devise a his own definition of novel. A novel that is not reducible to a story or adaptable to e.g. theatre play, film script or comic strip. Kundera makes an argument that if a novel survives an adaptation or rewriting it is a proof of its low quality. 
Finding a unique form of expression (in writing or in visual communication) is a very interesting point in todays’ information saturation. I also came to a conclusion that if I want to develop a specific way of working, I cannot ignore the outside world, I need to be able to react to everyday stimuli and have my eyes and ears open. This is essentially contradictory to a definition of ‘style’, which many designers are trying to develop.
 I find inspiring finding inspiration outside of the design limits. Kundera’s way of thinking can be easily projected to, for example, graphic design. Kundera developed his own way of language of relativity and ambiguity which despises comfortable classification into good or bad. Similarly to Kundera, I also dislike answering the question before knowing the question. People tend to judge before they know enough. This is probably a simple human condition: making a sense out of the world around. Applying it to design, this results in signature style, the lowest of styles. But style is the content, and doesn’t need to be revealed only on the surface.

Jungle: What part are you taking in Vienna’s art project ‘Museums in Progress’?
 It was a collaboration with artist Eran Schaerf. We have met in Maastricht and shared some ideas. When Eran was invited to work in Vienna he invited me for a collaboration in the project.

PB: A long term project is ‘dot dot dot’ magazine which we started last year in May. I was working with different magazines before, in our magazine we are trying to correct do everything we disliked or thought was wrong. Dot dot dot is intended to fill a gap in current arts publishing. We are not interested in re-promoting established material or creating another ‘portfolio’ magazine. Instead, we offer inventive critical journalism on a variety of topics related both directly and indirectly to graphic design. Most interesting if collaborating with other people on contributions. Since we have very limited budget for production and no money to pay our contributors, we really work only with the those who have heart at the right place and are really engaged in the subjects they working on.

Jungle: Your future plans or wishes?

PB: Currently we are preparing already a third issue of ‘dot dot dot’, the magazine is a constant challenge, it has its own life and we are not even sure where is it leading. We have our own scope of interests which are visible in the magazine, but we have no themes or long term plans. At this moment comes also a major career turn. After time spent working at Studio Dumbar, I am starting my own studio to focus on my projects. I hope to combine self-initiated projects such ‘dot dot dot’ with commissioned work in graphic design and typography. I am finishing some typefaces for FontShop, and hoping to do some custom commissioned fonts.
 After organising an exhibition of Dutch graphic design in Brno, I had clear ideas how graphic design could be presented in a book form. Together with Stuart Bailey I am preparing a book proposal which is a reaction to conventional cafe table books. And I keep my eyes and ears open to enjoy the world. The magazine was founded by Jurgen Albrecht, Tom Unverzagt, Stuart Bailey and myself. White the first two are still involved, Stuart and I are taking most of editorial responsibilities.

* Jina Park interviewed Peter Bilak for Design Jungle Korea
, May 2nd, 2001. See this inteview in Korean here.

판톤 판타지

VERNER PANTON AT HOFMOBILIENDEPOT VIENNA

세계 최초로 휘청거리는 플라스틱 의자를 디자인해 60년대 가구 디자인의 아이콘을 창조한 덴마크 출신의 전설적인 디자인 베르너 판톤 (Verner Panton, 1926-1998). 그의 디자인 회고전이 빈 황제 가구 박물관 (Kaiserliches Hofmobiliendepot)에서 전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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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룸, 1970년도 작품. Photo courtesy Vitra.

독일의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이 기획한 이 순회전시에서는 그 유명한 초기작 ‘판톤 의자 (Panton Chair)”에서 가장 최근의 “환다지 룸 (Phantasy Room)”을 비롯하여 환상적인 이미지와 우아한 곡선이 돋보이는 대표작들을 전시하고 있다.

판톤이 디자인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50년대 말부터. 판톤의 초기 활동기부터 줄곧 제품의뢰와 생산 판매를 맡아왔던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독일 라인 소재)은 그래서 작가의 거의 전 작품들과 스케치 등을 시기별 제품별로 소장하고 있어 60년대 이후 판톤 디자인의 변천사를 가장 완벽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실내장식과 가구제품 이외에도 작가가 시도한 직물 디자인도 함께 선보이고 있다. 서로 동떨어진 아이템으로서가 아니라 실내 디자인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는 통합적인 전시라는 점이 눈에 띈다.

2차대전 이후 독일의 바우하우스의 아성이 차츰 약해지면서 서구 디자인계에 고개를 들기 시작한 스칸디나비아 가구 및 건축 전통은 60년대와 70년초까지 이어졌다. 유기적인 형상을 연상시키는 기상천외한 형태와 대담한 원색으로 우아한 기능주의를 표방했던 그의 작품은 일견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i)의 환상주의를 떠 올리기도 한다. 일평생 그는 자유분방한 재미 (fun)와 위트를 잃지 않는 강한 실험주의자인 한편으로 지극히 꼼꼼한 체계주의자였던 걸로도 유명하다.

시대별 제품별로 구성된 이 전시의 도입부는 판톤의 경력발달사를 고찰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쿤스트아카데미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1950-52년까지 아르네 아콥센 (Arne Jacobsen) 디자인 사무실에 일하면서 “개미”의자를 만들었고, 그를 국제적인 디자이너로 만든 “꼬깔 의자 시리즈”를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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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톤의 대표작 심장 꼬깔 의자 (Heart Cone Chairs)는 1959년 작품으로 미키마우스의 귀를 연상시킨다. Photo courtesy Vitra.

이후 프라츠 한센, 루이스 풀센, 토넷, 헤르만 밀러, 비트라, 로열 코펜하겐, 로젠탈 등 유수의 브랜드와 함께 작업했다. 특히 60년대는 판톤의 전 시기 가운데에서 가장 폭발적인 시기였는데 “화분” 램프와 “판톤의자” 독일 론트하임에 있는 레스토랑 “아스토리아” 인테리어 디자인은 그때 작품들이다.

램트 디자인은 감성, 색채, 형태, 체계가 결합한 스칸디나비아적 특성을 가장 잘 대변한 디자인으로 꼽힌다. “환다지 룸”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또 램프의 조명와 은밀하게 조응하는 직물 디자인과 벽면 장식 디자인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걸로 보이며, 재료로는 에나멜과 종이를 즐겨 사용했다.

판톤의 환상적 기능주의 양식은 90년대의 인체공학적 (Ergonomics) 디자인의 유행에 힘입어 다시 한 번 큰 성공을 거둔바 있다. 『베르너 판톤(Verner Panton) 디자인 회고전』 
2001년 4월 6일-6월 30일까지
 오스트리아 빈 황제 가구박물관.

* 이 글은 2001년 4월에 『디자인 정글』 해외뉴스 리뷰에 실렸던 글임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