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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한 아텔리에서 탁트인 전원 공간으로

인상주의 회화의 잉태한 세기말 파리  – 귀족을 위한 미술에서 시민을 위한 미술로
19세기에서 20세기로 이행하던 세기 전환기 유럽 – 여타 예술 분야와 더불어서 미술도 전에 없던 혁신적인 변화를 목도하기 시작했다. 귀족층들만을 미술품 관객 및 주고객으로 취급하던 왕립 주도의 파리 미술 아카데미 (Acadé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s, 1648년 창립)는 17세기 처음 창설한 이래 그 철저한 아카데미 교육과 미술가 선발 제도를 200년 동안 고수하며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체의 미술을 주도·통제했다. 그러나 이 막강한 미술 기관의 제도적 고루성과 천편일률성은 일부 미술가들과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불거져 나온 불만과 반발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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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야콥 쉰들러 『카이저뮐렌의 도나우 강변 증기기관선』 1871/72년 경 작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그같은 원성이 급기야는 파리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예술적 권위와 취향에 대항하는 사건으로 번지게 되었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1863년의 낙선전 (Salon de refusés)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3세와 신흥 중산층 시민 계층이 주도가 되어 새로운 시대의 미술을 외치고자 한 이 낙선전을 통해서 전시를 하게 된 화가들 중에는 폴 세잔느, 에두아르 마네, 카미유 피사로, 제임스 휘슬러 같이 오늘날 일반인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있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유럽을 지배해 왔던 절대주의 귀족주의가 붕괴의 일로로 가속화해 가던 한편으로 새로운 정치 경제적 급부상 일로에 있던 부르조아 시민계층이 세를 더해 가고 있던 당시 19세기, 부르조아 대중은 이제 귀족주의적 취향에 봉사하던 고전주의 아카데미 미술 대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미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회  극소수 상류 엘리트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미술은 이제 남부럽지 않게 부를 축적하게 된 신흥 중산층 시민들도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기호 상품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상주의 미술의 대두는 유럽 근대 세기 전환기에 전개되었던 신흥 부르조아 계급의 출현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 된다. 인상주의 개척자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후기 인상주의파 화가들, 특히 폴 세잔느,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등은 인상주의의 파격적인 이념과 양식적 특징을 이어받아 근대기 파리 미술계가 나아갈 향방을 제시하며20세기 근현대 주류 아방가르드 미술의 시발점을 제공해 주었다.

비엔나 인상주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도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 운동이 지녔던 의미있는 인상주의 회화 운동이 존재했는가? 미술에 대한 문외한들도 인상주의 회화의 발상지가 파리였음은 능히 짐작하시겠지만, 미술을 웬만큼 안다고 자부하는 애호가들과 전문가들에게 비엔나 인상주의 회화를 아느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하시리라.

이같은 의문에 대한 분명한 응전으로써 ‚비엔나에도 인상주의 회화 운동이 있었다’라는 선언구를 내걸고 지난 3월16일부터 이곳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미술관에서는 『비엔나 인상주의풍 회화전 (Stimmungsimpressionismus)』 展이 전시에 한창이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되는 180여점의 비엔나 인상주의 회화 작품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곳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를 포함한 오스트리아 내 미술관 여러곳과 개인 소장자들로부터 대여해 온 것들이며 그 외에도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립 박물관에서도 이번 전시를 위해서 작품들 일부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이 전시를 바라보는 언론, 미술 전문가들, 그리고 일반 관객들의 이해와 주장은 저마다 각양각색이겠지만, 대체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근대기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했던 인상주의풍의 회화 운동은 전원적 자연을 소재로 삼은 사실주의 경향의 회화 경향의 하나로서, 그리고 일반 관객들 사이에서는 중산층 대중들의 취향과 잘 부합하여 집에 한번 쯤은 걸어 두고 싶은 낭만적이고 보기좋은 그림들을 만들었던 그림 양식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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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라바르츠 (Rudolf Ribarz), 『밭에 딩구는 호박 (Pumpkins On The Field)』목판에 유채, 44 x 54 cm ⓒ Wien Museum, Wien.

물론 앞에서 언급한 프랑스의 인상주의 운동과 오스트리아의 인상주의豊의 풍경화 그림 운동은 동일한 미술사적 의미로 설명될 수는 없다. 오스트리아에서 행해졌던 인상주의풍 회화 운동은 근원적인 동기 면에 있어서나 미술계에 미친 파급 효과 면에 있어서나 프랑스에서 처럼  폭발적이거나 혁명적인 성격을 띠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이 운동에 참여했던 화가들 대다수는 그림그리기를 생계를 위한 주업으로 삼았던 직업적인 화가들도 아니었다.

감성과 신비가 느껴지는 정취 담긴 풍경화
그러나 프랑스 인상주의가 발단했던 사회적 배경과 미의식(美意識) 면에 있어서 서로 공유하는 유사점도 없진 않다. 사회적인 배경 면에서 볼 때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절대주의 귀족체제에서 부르조아 체제로 이행하는 근대기를 겪고 있었으며, 따라서 때는 새로운 신흥 중산층 시민들은 카톨릭 교회와 귀족 정권을 미화하는 엘리트주의 경도의 고전파 미술을 거부하고 그대신 일상 생활과 연관지을 수 있는 보다 쉽고 이해하기 쉬운 미술을 요구하는 시대였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스트리아의 인상주의풍 화가들은 풍경화로부터 예술적 ·미적 정당성을 찾는데 주력했다. 때는 1870-1900년대 즈음, 프랑스 퐁텐블로 (Fontainebleau)에서 전개되었던 바르비종 화파 (Barbizon School, ‚외광파(外光派)’로도 알려져 있는 이 화파에는 쟝-쟈크 루소, 프랑소와 밀레 등이 포함)의 영향을 받고, 오스트리아의 인상주의파 화가들은 이젤과 휴대에 편할 만한 크기의 캔버스와 그림 재료들을 들고 야외로 나가서 천연 태양광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나우강(江)과 비엔나 숲 (Wienerwald)을 끼고 발달해 있는 도시에 살던 비엔나인들은 스스로를 둘도 없이 자연과 친숙한 자연애호가들임을 자부해 왔던 터인데에다가 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터주는 풍경화 그림에 아무런 거부감없이 금방 친숙해 질 수 있었던 듯 하다.

바르비종 화파와 인상주의파 화가들이 일광에 반사된 자연과 일상 풍경을 보고 받은 일시적으로 받은 인상 (Impression)을 객관적인 눈으로 즉각 화폭에 옮기는 일에 주력했다고 한다면, 오스트리아의 인상주의풍 화가들은 자칫 다분해 질 수 있는 단조로운 자연 풍경과 날씨 묘사를 하는 것을 넘어서서 화가 개인의 감성(emotion)을 담아 내는 이른바 ‚정취 담긴 풍경화 (atmospheric landscape)’를 창조하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전통적인 회화 관습에 따르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사소하고 미미한 소재를 크게 클로즈업해 묘사하는 방식이 일부 화가들 사이에서 집중적으로 탐구되기도 해서 그들이 즐겨 묘사했던 정원이나 밭 위에 널려있는 채소나 꽃, 그리고 풍경화 속에 곁들여진 묘한 자태의 미소년과 미소녀의 모습은 알 수 없는 신비감까지 더해 주었다.

이같은 비엔나 인상주의풍 풍경화파를 주도했던 화가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 화파에 참여했던 화가들로는 대체로 전통적인 아카데미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이른바 비직업적 혹은 아마츄어 화가들과 여성들이 차지했던 것이 특징적이다. 일명 ‚쉰들러 서클 (Schindler Kreis)’의 주도적 인물이었던 에밀 야콥 쉰들러 (Emil Jacon Schindler)는 근대 비엔나 인상주의풍의 대부격 인물이자 여러 다른 후배 화가들의 표본이자 스승뻘 인물이었다.

에밀 야콥 쉰들러는 사실 근대 음악의 선구적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와 결혼했으며 바우하우스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등과 염문을 뿌려서 부르조아 사교계에서 널리 알려졌던 여성 알마-말러 베르펠 (Alma-Mahler Werfel)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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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에 에그너 『덩굴 시렁』 1919년 작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그의 미술 일기에서도 적고 있는 것처럼 그가 추구했던 풍경화는 ‚자연의 헌신적인 입맞춤’을 감성과 시적(詩的) 정서를 한껏 담아서 표현하는 것이 목표였다. 쉰들러가 특히 그의 풍경화 소재로 삼았던 대상들로는 그의 작품 『카이저뮐렌의 도나우 강변 증기기관선』(1871/72년 경 작), 『하킹의 봄』(1883년 작)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도나우 강변의 숲과 수경(水景), 비엔나 도심 북부에 펼쳐져 있는 비엔나 숲, 그리고 각종 박람 전시와 놀이 공원이 있는 프라터 거리 (Prater) 풍경들이었다.

눈으로 보고 눈으로 느낀 자연을 감성을 담아 가미해 그려내는 것을 사명감으로 삼았던 쉰들러의 ‚인상주의풍 사실주의 회화’ 또는 ‚시적 사실주의 회화’들은 보는이에 따라서는 감정에 북바쳐 표출된 측은한 감상주의 (sentimentalism)라고 볼 수도 있겠고 또 한편으로는 시적 감수성과 자연을 향한 친밀감이 고조된 사실주의로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프랑스 인상주의에서 느껴지는 세련된 색채 감각이나 치밀한 구도력은 뒤떨어진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생전 쉰들러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열렬한 슈베르트 팬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화가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감흥을 최다한 느껴보기 위해서 슈베르트의 가곡 한 편을 틀어 놓고 쉰들러의 그림을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쉰들러 서클과 여성 후학들
에밀 쉰들러는 동시대 젊은 화가들을 추종자로 끌어 모으는데 적잖이 성공했다. 오스트리아의 세기 전환기 화가 카를 몰 (Carl Moll)은 갓 애송이 화가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 쉰들러의 영향을 받고 아텔리에에서 박차고 나와 도심 슈타트파크 (Stadtpark)  시립공원이나 비엔나 시립 중앙 묘지 (Zentralfriedhof)에 이젤과 캔버스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렸다.  쉰들러와 한때 한 아텔리에를 나눠쓰던 동료 화가 아우구스트 셰퍼 (August Schäffer)는 „하나님 자유로운 자연에서 작업하는 것이 내 천명“이라고 외쳤던 자연 애호가였다.

한편 쉰들러 서클의 동인으로 가입해 풍경화를 그리던 젊은 화가들중에서 오이겐 예틀 (Eugen Jettel) 『무성하게 자라는 양파밭』 (1897년 작), 루돌프 리바르츠 (Rudolf Ribarz , 야채가 있는 풍경화가 특징), 로베르트 루스 (Robert Russ) 등은 쉰들러 서클에서 중도탈퇴하고 그 대신 정식 미술 학교에서 수학하는 길을 택했다. 유명한 스승의 지도나 개인 교습을 통해서 그림을 배우던 도제식 교육 방식이 점차 미술 학교 혹은 미술 대학과 같은 근대적인 교육 제도에 의해 대체되는 교육 체제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같은 변혁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들에게 전통적인 미술 아카데미나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는 여간해서 주어지지 않았다. 때는 여성의 몸으로 그림을 그려 독립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던 시대였으며 당시 19세기 비엔나의 미술 아카데미는 철저한 가부장적 체제를 고수하고 있었다.

에밀 쉰들러의 날개 밑에서 인상주의풍  풍경화를 추구했던 젊은 여성 화가들이 여럿 활동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특히 티나 블라우 (Tina Blau)와 올가 비싱어-플로리안 (Olga Wisinger-Florian) 두 여성 화가는 오스트리아 미술사에서 저마다 독특한 풍경화 소재를 추구한 화가로서 만이 아니라 근대 여명기 유럽에서 개화된 신여성상을 일찌기 시사한 초기 여성해방주의자로 비춰지기도 한다.

특히 티나 블라우는 쉰들러 서클의 주도자이자 스승이었던 에밀 쉰들러의 애인이었으며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녀의 작품 『프라터의 봄』(1882년 작)이나 『암스텔담 수로』(1875/76년 작)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스승이 주로 다뤘던 숲 경치나 도나우강 수경을 역시 즐겨 그렸다. 티나 블라우가 그녀 내면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여성해방주의적 신념은 사실 그녀의 그림을 통해서는 엿보기가 힘들다. 다만 연출된 블라우의 기록 사진을 통해서 그녀가 그림그리기 활동을 일종의 여성성(女性性) 혹은 모성(母性)과 연결시키는 제스쳐를 보였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림그리기에 필요한 이젤, 캔버스, 재료를 유모차에 싣고 프라터 공원으로 그림을 그리러 가는 블라우의 모습을 담은 연출 사진을 통해서‚ 여성적 상징물로서의 유모차’ – 유모차는 여성의 잉태와 종족 번식이라는 상징성을 내포 –를 이 화가의 창조적 도구가 담아 나르는 ‚창조의 자궁’이라는 메시지를 소리높여 외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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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비싱어-플로리안 『만발한 양귀비 꽃』 1895/1900년 작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올가 비싱어-플로리안은 본래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가 30대 중반부터  미술 사사를 받기 시작하면서 정물화와 풍경화의 매력에 빠져 화가로 전향한 여성 화가. 음악 수련에서 받은 규율적 태도 때문인지 „미술에서 일정한 경지에 이르는 첩경은 근면이다. 근면이 없는 재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라는 원리원칙을 모토로 삼고 그림그리기에 임했던 비싱어-플로리안은 자연의 미미하고 사소한 대상들을 눈여겨 보면서 화폭으로 옮겼다.

오스트리아의 미술평론가 클라우디아 아이그너가 ‚야채 심리학자’, ‚야채 관음주의자’ ‚사이코 식물학자’라는 가시달린 우스개 별명으로도 평가되고 있는 비싱어-플로리안이 집요하게 천착했던 대상들은 가을철 수확을 앞두고 있는 호박, 양배추, 홍당무 비트 같은 채소류, 봄여름철 만발한 꽃밭과 정원 풍경, 낙엽지는 가을 풍경들이 주를 이룬다. 『만발한 양귀비 꽃』(1895/1900년 작), 『멘토네의 덩굴 시렁』(1900년 경 작), 『수국꽃이 있는 정원 길』(1895년 작) 등은 그같은 예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인상주의파 풍경화파 속의 여성 화가들 중에 가장 나이어린 화가 지망생 마리에 에그너 (Marie Egner)는 결혼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직업적인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경우인데 그녀의 작품은 대체로 스승 쉰들러의 회화풍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외광을 찾아 풍경화를 그렸던 마리에 에그너의 시력은 그녀가 세상을 뜨던 1940년 거의 실명 상태였다. 로베르트 루스는 약시 때문에 대수술을 받았고 야채 풍경화의 달인 올가 비징어-플로리안의 말년기 시력은 실명 상태에 가까웠다. 에밀 쉰들러도 심한 눈염증이 화근이 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이젤과 붓물감을 들고 아텔리에를 벗어나서 자연 속으로 들어가 비엔나 풍경을 인상주의풍으로 그려냈던 이 화가들에게 천연 태양광은 절대 필요 조건이었음이 분명하다. 헌데 그 천연 태양광으로 인해 화가들은  시력을 상실해야 하는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태양빛 가득할 비엔나의 올 봄과 여름, 미술 관객들은 그들의 눈을 통해 그려진 인상주의풍 풍경화를 맘놓고 감상할 수 있다. 이 전시는 7월 4일까지 계속된다.

근대 오스트리아 인상주의 회화전 | 전시 제목 : 비엔나 근대 인상주의풍 회화 (Stimmungsimpressionismus) | 전시 장소 :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립 벨베데레 미술관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Oberes Belvedere)  전시 기간 : 2004년 3월17일-7월4일까지

* 이 글은 본래 『오뜨』 2004년 5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터어키 이스탄불 현대미술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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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모던 – 터어키 근현대미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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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내리보며 자리해 있는 이스탄불 모던 근현대미술관 외관 모습 ⓒ 2011.

기원전 7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역사를 가진 동서양의 교차점 터키의 유서 깊은 고도시 이스탄불. 도처에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건축물과 고미술품이 널려 있어 울타리 없이 열려 있는 영원한 박물관이라고도 표현되는 도시다. 이곳에 최근 근현대 미술관이 들어서며 세계적인 컬렉션을 선보여 세계인의 놀라운 시선을 받고 있다.

요즘 들어 유럽에서 터키는 삼삼오오 모인 지인들과 뉴스 언론이 가장 즐겨 떠올리는 화젯거리가 되었다. 터키의 유서 깊은 고도 이스탄불에 이 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현대 미술관이 지난 12월 12일에 문을 열어 구미권 미술계와 언론을 잔뜩 주목시켰기 때문이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터키의 회원 가입 여부를 정식 논의하기로 되어 있던 12월 17일을 며칠 앞두고, 터키는 자국에 대한 홍보 효과를 극대화할 의도로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5개월이나 앞서 서둘러 개막식을 올렸다는 후문이다.

이스탄불 모던 미술관은 개관 첫 주에 1만8,000명에 가까운 관람자 수를 기록했다. 용기를 얻은 이 미술관의 관장 오야 에크자치바시 (Oya Eczacibasi) 여사는 2005년에 관람자 수 100만을 돌파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과시하고 있다. 그녀는 가문의 막대한 부를 이용해 모아둔 개인 미술품 컬렉션 4,000여 점을 미술관에 영구 전시하고 있는데, 20세기 터키 출신의 국내외 미술가들과 최근 구미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20세기 유럽에서 모더니즘과 현대 미술 등 다양한 사조가 전개되고 있는 동안 터키 미술계는 유화 중심의 회화와 고전적 조각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오즈데미르 알탄과 오메르 울루치는 20세기 터키 회화사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원로 화가로, 이번 이스탄불 개막전에서 대중에게 처음 공개된다. 터키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아비딘 디노와 피트렛 무알라의 작품들도 조만간 미술관 창고를 벗어나 전시실에서 관객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미술관의 개인 소유주이자 창립자인 아크자치바시家는 미국 경제 주간지 『포브스 (Forbes)』가 선정한 터키 제5의 갑부 집안이다. ‘이스탄불의 오르세 미술관’을 만들어보자는 에르도간 터키 수상의 비전이 이번 아크자치바시家의 현대 미술관 개관에 결정적인 청신호 역할을 했던 만큼, 이스탄불 모던 미술관이 향후 터키의 대외 문화 이미지 제고와 관광 수익에 효자 노릇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동서 세계 사이에서 안장을 갈아타며 발전해온 인구 7000만의 이슬람계 국가 터키는 우리에게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멀리 느껴지는 나라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기원전 7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영광스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터키가 자랑하는 역사 도시 이스탄불은 기원후 250년 즈음 고대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자리한 비잔틴 문명의 중심지였다. 11세기 이후 이슬람 교권을 중심으로 한 오토만제국이 들어선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은 동쪽에서 침범해온 몽고의 칭기즈칸과 서쪽 유럽 십자군의 기독교 세력 사이에서 수차례 잔혹한 전쟁과 갈등을 헤쳐왔다. 그만큼 주류 이슬람권 문화와 유럽의 잔재들이 묘하게 융합되어 있는 신비와 낭만의 고도이기도 하다.

istanbul-modern-4_small그래서 터키인들의 이스탄불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은 제법 강하다. 터키인들은 자기 나라를 두고 ‘도처에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건축물과 고미술품이 널려 있어 울타리 없이 열려 있는 영원한 박물관’이라고 설명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이 표현을 달리 해석하자면, 터키에는 구미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제도 시설이 그다지 보편화되어 있지 않음을 뜻하기도 한다.

여전히 제도권이 운영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시설을 찾아보기 어려운 터키. 그 때문에 이번 서양식 대형 미술관인 이스탄불 모던 미술관의 개관은 터키인들에게 있어서나 세계 미술관계의 입장에서나 매우 뜻깊은 계기로 여겨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탄불을 미술의 불모지라고 섣불리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현재 이스탄불에서는 고도의 심장부 술타나으멧 구역 주변 곳곳에 사설 화랑들이 운영되고 있다. 지난 1987년부터는 국제적인 규모의 현대 미술 행사 ‘이스탄불 비엔날레 (Istanbul Biennial)’를 2년마다 개최하고 있을 정도로 근현대 미술 문화 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이스탄불 최초의 근현대 미술관이 들어선 자리는 이 도시를 안고 있는 마르마라海 해안. 회청색 수경을 전망 삼아 서 있는 미술관 건물은 관장인 오야 에크자치바시 여사가 손수 이스탄불 전역을 돌아다닌 끝에 낙점한 옛 세관 건물로, 지난 20여 년간 이스탄불 비엔날레 전시장으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 “서양 미술의 중심부와 주변 지역 간의 대화는 매우 중요하다”라는 수석 큐레이터 로자 마르티네즈의 말처럼, 동서양의 문화적 교량 역할을 담당하게 될 이스탄불 모던 미술관의 미래가 기대된다.

* 이 글은 본래 『노블레스 (NOBLESSE)』 지 2005년 3월호 104페이지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베를린 새 화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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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현대 미술의 미래가 숨쉬고 있는 곳 – 베를린 미테 화랑가

요즘 미술계 동향을 좀 아는 사람한테 오늘날 독일에서 현대 미술의 중심이 어디냐고 물으면 베를린에 가보라고 할 것이다. 1989년 동서독의 통일과 함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나서 지난 199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베를린은 독일의 새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다. 베를린의 현대 미술 화랑가는 옛 동베를린이 있던 구역에 자리잡고 있다. 베를린-미테 Berlin-Mitte (‚미테’는 중심이라는 뜻)로 불리는 이 구역은 동서독 통일 이전까지만 해도 동베를린 소속이다가 베를린의 새 미술문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 보다 이전인 19세기에는 가난한 베를린 시민들이나 유태인 이민자들이 모여 살았던 보잘것 없는 빈민 거주 구역에 불과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마자 하케셴 마르크트 (Hackeschen Markt) 재래시장에는 러시아에서 온 암거래 상인들이 어슬렁거리는 풍경만이 을씨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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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중심지 베를린 미테 구역의 아우구스트스트라쎄 거리 Photo: Stella Hoepner-Filies.

‚언제나 건설중인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베를린은 2차대전 종전 이후 반세기 가까이 하나의 독일이 동과 서로 분열된채 갈등하던 정치적 회색 지대였다. 유럽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뚜렷한 4계절 기후에도 불구하고 우울한 회색 하늘 아래 지금도 도시 여기저기에 잔존하는 고풍스런운 역사적 건축물들과 현대식 첨단 건축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들어차 있는 수도 베를린은 90년대 중반 이후로 현대 미술계에 새로 데뷔한 미술의 중심부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싼 이 지역의 지가 때문에 옛 서독 지방과 서베를린에 있던 사설 화랑들이 속속 이곳 베를린-미테로 이주해 오거나 새 화랑들이 문을 열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한 젊은 미술인들도 임대료와 생활비가 여타 미술 중심 도시에 비해서 저렴하고 화랑이 모여 있다는 입지 조건 때문에 이곳 베를린-미테로 속속 뒤따라 이사를 왔다. 그 결과 최근에는 미술인들 말고도 유럽 다른 나라와 미국을 뒤로 하고 베를린으로 이주해 와 활동하는 신세대 미술평론가들과 큐레이터들을 이 동네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마주치는 일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에 뉴욕, 영국에 런던이 있다면 독일에는 베를린이 있다고 떵떵댈만큼 베를린은 국제적인 미술의 중심 도시임을 자부한다. 특히 아우구스트스트라세 거리(Auguststrasse)는 현대 미술계에서 이미 궤도에 오른 기성 유명 미술인이나 미술계 스타를 꿈구는 미술가 지망생 할 것없이 한 번쯤은 포트폴리오를 선보이기 위해 혹은 다른 미술가들의 전시회를 구경하러 오가게 되는 꿈의 거리이다.

베를린 화랑업계의 전설적인 인물 게르트 해리 륍케 (Gerd Harry Luebke – 최근 초호가를 누리고 있는 동독 출신 화가 네오 라우흐를 발굴한 인물)가 운영하는 갤러리 아이겐+아트 (Galerie EIGEN+ART)는 본래 1980년대초에 옛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운영해 오던 같은 이름의 화랑의 분신이다. 영국의 개념주의 미술을 즐겨 다루며 후원하는 쉬퍼 & 크로메 갤러리 (Galerie Schipper & Krome), 영국 팝아트와 독일출신의 거물급 화가 알렉스 카츠를 대표하는 바바라 툼 갤러리 (Galerie Barbara Thumm) 등은 국제급 해외 미술과 독일의 미술이 한자리에 만나는 곳이다.

급박하게 변화하는 사설 현대 미술 화랑들의 숨가쁜 행진에서 잠시 물러서서 베를린 개인 컬렉터들의 소장품들이나 논리정연하게 기획된 특별 전시를 감상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직물업계의 갑부인 에리카와 롤프 호프만 부부가 설립한 잠룽 호프만  (Sammlung Hoffmann) 현대 미술 컬렉션은 게르하르트 리히터 (Gerhard Richter), 지그마르 폴케 (Sigmar Polke), 프랭크 스텔라 (Frank Stella) 등 독일과 미국의 대표적 거물급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잠룽 호프만이 있는 건물 아래층에는 갤러리 컨템포러리 파인 아츠 (Galerie Contemporary Fine Arts)는 고급 주택가가 모여 있는 샬로텐부르크  (Charlottenburg)에서 이곳 미테로 이전해 온 현대 미술 전시장이다.

베를린-미테 말고도 지금은 터어키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크로이츠베르크 (Kreuzberg) 구역 사이에 위치한 침머스트라세 (Zimmerstrasse) 거리도 90년대 중엽부터 사설 화랑들이 속속 들어차 있는 거리이다. 쾰른에서 온 국제 현대미술 전문 화랑 막스 헤츨 갤러리 (Galerie Max Hetzel), 뉴욕 첼시 화랑가와 베를린을 오가며 분주하게 운영되는 디일 갤러리 (Galerie Diehl), 대대로 내려오는 화랑 가문이 운영하는 콜로스터펠데 갤러리 (Galerie Klosterfelde)도 베를린 현대 미술를 이끄는 주요 플레이어들이다.

하루해가 저물고 해가 뉘엿뉘엿해 지는 저녁 시간 6시 이후 경이면 베를린-미테 구역에서는 거의 매일 화랑과 전시장 여기저기서 전시 오프닝 파티가 열린다. 그러나 어느 화랑에 가나 어쩔수 없이 화랑에서 전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작가의 수 보다는 다른 작가의 전시회에 가서 남들이 어떤 작품을 하는지 확인하며 자신의 네트워킹 기회를 잡으러 가는 무명 작가들의 수가 훨씬 많다. 오늘도 꿈을 잔뜩 안고 재능을 펼쳐 보이고 싶은 열망에 찬 미술인들은 베를린-미테 화랑가를 오가고 있다.

* 이 글은 본래 NOBLESSE 2005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영국 현대 미술 컬렉터 찰스 사치 회화로 관심 전향

THE TRIUMPH OF PAINTING
21세기, 찰스 사치 왜 회화로 관심을 돌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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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사우스뱅크에 있던 사치 갤러리 건물 전경 (2003-2005년) Photo courtesy: The Saatchi Gallery. [참고: 사치 갤러리는 2008년 10월에 King’s Road로 이전했다.]

현대 미술의 미래는 회화이다 – 영국 출신의 광고업계의 거물급 인사 겸 정열적인 현대미술 컬렉터로 유명한 찰스 사치(Charles Saatchi)가 런던 사우스뱅크 (South Bank)에 위치한 그의 갤러리 전시장을 전격적으로 개편한다.

일명 ‚영브리티시 아티스트YBA’라고 불리는 영국 출신의 신세대 미술가들을 발굴하여 일단의 미술 운동으로 끌어올린 현대미술계의 트렌드세터이기도 한 찰스 사치는 광고업에서 뿐만 아니라 90년대 이후로 서구 현대미술 시장과 취향 형성에까지 영향력을 끼친 현대 미술계의 권력가이다.

커다란 유리관 속에 포르말데하이드로 통조림된 반쪽 짜리 동물 시체를 작품화한 데미언 허스트 (Damien Hirst)의 『찬송 Hymn』을 비롯해서, 트레이시 에민 (Tracey Emin), 제니 사빌 (Jenny Saville), 사라 루카스 (Sarah Lucas), 제이크와 다이노스 챕먼 형제 (Jake and Dinos Chapman), 마크 퀸 (Marc Quinn), 크리스 오필리 (Chris Ofili)는 저마다 도발적이고 논쟁성 강한 이미저리와 개념성 때문에 화재와 논란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현대 미술계의 악동들로서 사치에게 발굴되면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미술계의 커리어 마차에 올라탄 YBA 즉, 영브리티시 아티스트들이다.

사치의 기발한 수완으로 이들 영브리티시 아티스트들은 1997년에 『센세이션 (Sensation)』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런던, 뉴욕, 베를린에서 차례로 순회 전시를 하면서 현대 미술계의 중심부에 우뚝 자리잡았다. 그런가 하면 사치를 본보기로 삼아서 현대 미술 컬렉팅 활동에 뛰어든 갑부 사업가들과 투자가들이 전세계 여기저기에서 뒤따라 등장하기도 했다.

그런 사치에게 올 5월 말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100여점에 이르는 그의 현대 미술 소장품들 (주로 영브리티시 아티스트의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는 미술품 전문 창고인 모마트 (Momart)가 화재로 불타버린 것이다. 화재 사건이후 사치 컬렉션의 소실을 둘러싸고 마치 기다렸다는듯 일부 언론계에서는 비아냥과 조롱으로 환호했다. 그럴수록 사치에게는 데미언 허스트의 대형 조각상인 『자선 (Charity)』를 비롯해서 트레이시 에민의 30년간의 남성 편력사를 기록한 『텐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애지중지하던 챕먼 형제의 『지옥 (Hell)』이 한낱 연기로 사라지고 난 후의 상실감이 컷다고 한다.

상실에 대한 상처를 뒤로 하고 사치는 제2의 영브리티시 아티스트 발굴을 겨냥, 브라이언 그리피스 (Brian Griffith), 틸로 바움가르튼 (Tilo Baumgarten), 사이먼 베드웰 (Simon Bedwell) 등을 포함한 『뉴 블러드 (New Blood)』 展을 올 여름 대중 관객에 공개했지만 안타깝게도 언론과 비평가들의 반응은 기대이하를 넘어서 부정적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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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키펜베르거 『파리스 바 베를린 (Paris Bar in Berlin)』 1993년 유화 작품. Photo courtesy: The Saatchi Gallery.

그래도 인생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던가. 찰스 사치의 도전도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가오는 2005년 새해부터 사치 갤러리는 설립 20주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컬렉션들로 갤러리 새단장을 하고 다시 문을 연다.

『회화의 승리 (The Triumph of Painting)』이라는 전시명으로 새롭게 공개를 앞두고 있는 사치 갤러리가 이번에 소개할 것들은 이미 현재 유럽에서 크게 주가를 올리고 있는 화가 5인의 작품들이다.

사치는 스코틀랜드의 피터 도익 (Peter Doig), 벨기에의 뤽 토이만 (Luc Tuymans), 남아공의 마를렌느 뒤마스 (Marlene Dumas), 독일의 외르크 이멘도르프 (Joerg Immendorf)와 마르틴 키펜베르거 (✝ Martin Kippenberger)는 현지점에서 유럽을 대변하는 핵심 5대 현대 화가라고 선언하고 그동안 사모아 두었던 그들의 작품들을 공개한다.

사치는 기존에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대량 구입하여 작품의 투자가치를 높이는 스타 미술가 제조기로서의 본분을 포기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다이엘 리히터Daniel Richter, 세실리 브라운 Cecily Brown 같이 이제 막 ‚떠오르는’ 화가들의 그림들도 나란히 함께 전시될 예정이어서 미래 사치가 2005년 한해 동안 예의주시할 현대 회화의 향방을 점쳐볼 수 있는 잣대를 제시해 줄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지금까지 사치 갤러리를 빛내줬던 영브리티시 아티스트들의 대형설치물들은 2006년까지 창고 속에서 대기하고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런던 중심부와 런던 아이 London Eye 구역에서 가까이 위치해 있는 사치 갤러리는 옛 카운티홀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하여 2003년 봄에 개관했다. 런던의 문화와 오락의 중심지인 사우스뱅크에 자리하고 있으며 20세기초에 신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져서 높은 천정과 고급 목재 실내 장식이 특징적이다.

*이 글은 『NOBLESSE』 2004년 12월호에 실렸던 컬럼 기사의 원문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그리스 아테네 현대 미술의 심장부로

ATHENS – A NEW PLAYER IN CONTEMPORAR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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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아트 아티나 (Art Athina) 미술 페어 행사장 모습. Photo courtesy: Art Athina.

8월의 마지막 2주일간을 뜨겁게 달구면서 전세계인들의 이목을 한곳으로 집중시켰던 제28회 아네테 올림픽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서양 문명의 발상지이자 올림픽 경기의 종주지 아테네시에서는 미술의 올림픽 경기라 해도 좋을 만큼 야심찬 예술 행사가 나란히 열리고 있었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문물이 한껏 꽃피웠던 고대 그리스. 수도 아테네가 자리하고 있는 아테네 섬 말고도 14개의 섬 무리로 구성되어 있는 그리스는 화창한 날씨와 느긋한 여가를 즐기러 오는 휴가철 여행객들의 천국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나라에도 주목할 만한 현대 미술계가 있었던가?

중세 초기 비잔틴 문화에 이어 중세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슬람권인 오스만투르크의 오랜 지배와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이어진 발칸전쟁과 테오도로스 판갈로스의 독재정권으로 혼란과 지체를 경험했던 역사적 특성 때문에 이웃 서북부 유럽에서 한창 전개되었던 20세기 근대화 물결에 동참하지 못했다.

덕분에 그리스는 근대기 유럽에서 온 국제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그리스 전형의 근대주의 미술을 채 발전시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오늘날 미술계 전문가들이 20세기 이후의 그리스 미술을 논할 때 그리스를 기독교적 개념상의 유럽권으로 포함시켜야 할지 아니면 동유럽 동남쪽에 자리한 ‘유럽의 화약고’ 발칸 지방으로 포함시켜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바로 그 같은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반세기 동안 현대 미술 또한 뚜렷한 정체성이나 주목할 만한 특성을 구축하지 못한 채로 표류해오고 있었다는 미술계의 평가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에도 현대 미술계는 분명 존재한다. 아직 파릇파릇하고 여린 연녹색 들풀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리스 미술계는 변화와 발전의 기운으로 꿈틀대고 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수완을 갖추고 현대 미술가를 발굴하고 매매하는 신세대 화랑업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리스는 자국의 독자적인 화랑업계 장려를 목표로 지난 1993년부터 아트 아티나 (Art Athina)라는 연례 미술 박람회를 주최하여 현대 미술의 대중적 보급과 인식 확산에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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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베르니에 엘리아데스 화랑(The Bernier / Eliades Gallery)은 1977년에 설립된 이래 현재는 현대미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Photo courtesy: The Bernier / Eliades Gallery, Athens, Greece.

올 2004년 행사에는 전세계에서 찾아온 71개 사설 화랑들이 참여해 아테네 도시를 북적거리게 했다. 올 초 스페인 아르코 (ARCO) 현대 미술 박람회에서도 그리스의 2004 하계 올림픽 주최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최근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여러 도시 곳곳에서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한 신진 화랑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행사를 통해서 아직까지 그리스의 현대 미술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미술계 관계자들과 언론들은 그동안 그리스의 대표적인 사설 화랑, 아트 딜러, 현대 미술 전시장 등을 발굴하는 기회를 맞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아테네의 데스테 현대미술 컬렉션 (Deste Collection) 특히 글로벌주의를 표방하며 그리스 현대 미술계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는 다키스 조아누 (Dakis Joannu)는 ‘그리스의 현대 미술 슈퍼 컬렉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미술 관련 언론계에서 다키스 조아누라는 이름은 숨은 관심거리로 잔뜩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에 화장품업계의 거물 로널드 로더 (Ronald Lauder),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Bill Gates), 음반업계의 데이비드 게펜 (David Geffen), 영국에 거물급 광고대행업체의 공동 소유자 찰스 사치(Charles Saatchi), 스위스에 엠마누엘 호프만 (Emmanuel Hoffmann)과 에른스트 바이얼러 (Ernst Beyeler)가 있다면 그리스에는 다키스 조아누가 있다고 자랑할 만큼 그가 그리스 현대 미술계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여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구미권 미술 컬렉터들의 경우와 달리 거부의 사업가라고만 알려져 있는 현대 미술 컬렉터 다키스 조아누의 정체는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구석이 있다. 전시회 오프닝 행사나 기자회견에서 간단한 인사 연설을 하거나 주요 국제 현대 미술 박람회가 열릴 때마다 수많은 참관객들 사이에 묻힌 채 잠시 잠깐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지곤 하는 조아누는 아테네와 스위스 제네바를 오가며 거주하고 있는 데다 웬만해서는 언론매체의 개인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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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멘트 투 나우 (Monument to Now)』 展 (22/6/2004 – 06/03/2005)이 열리고 있는 데스테 재단 현대미술관 외관 모습.

하지만 컬렉터로서 다키스 조아누의 명성이 처음 국제 미술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벌써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83년, 조아누가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활용해서 사들인 현대 미술 작품들을 소장 관리하고 상설 전시하는 현대 미술관인 데스테 재단 현대 미술관 (DESTE Foundation for Contemporary Art  – 데스테란 그리스어 동사로 ‘보다 (to see)’라는 의미)을 설립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데스테 현대 미술관이 본격적으로 미술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본래 있던 자리를 떠나 아테네시에서 최근 들어 급부상하고 있는 네오이오니아 (Neo Ionia)라는 트렌디한 상업구역에 옛 제지공장 창고를 뉴욕 건축가인 크리스찬 휴버트 (Christian Hubert)의 설계로 개조한 후 1998년 재개관하면서부터였다.

넉넉한 사유재산이 허락한 덕분에 조아누는 전세계적으로 지명도 높은 스타급 현대 미술 큐레이터들을 연이어 초청, 특별전시 기획을 통해서 자신이 그동안 수집해온 미술품들을 다각도로 해석하고 조명하는 전시회를 열어왔다. 니코스 차라람비디스는 이곳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그리스 출신 현대 미술가이며, 최근 구미 현대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령한 미국 출신 행위미술가 매튜 바니 (Matthew Barney)는 지난 1998년에 이곳 데스테 현대 미술관을 통해 그리스 관객들에게 소개된 바 있다. 여성 현대 사진작가 피필로티 리스트 (Pipilotti Rist), 공상과학 만화를 모티브로 한 자화상 사진 작품으로 국제 미술 시장에서 주가를 올린 일본의 마리코 모리 등도 90년대 말 뉴욕, 런던, 도쿄 등 국제 미술 중심지에 이어 아테네를 거쳐갔다.

올해 데스테 재단 현대 미술관에서 아테네 올림픽 경기가 벌어지는 시기와 조율하여 ‘아테네 2004 문화’ 연합 이벤트의 일환으로 기획 전시 중(12월31일까지 계속)인 <모뉴먼트 투 나우(Monument to Now)> 展은 올해 그리스가 주최한 올림픽 경기 못지않게 화제를 불러일으킨 행사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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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켈리 (MIKE KELLEY) 작 Brown Star, 1991년, Stuffed animals, steel, strings. Photo courtesy: DESTE Foundation, Athens, Greece.

◈ 『모뉴멘트 투 나우 (Monument to Now)』 展: 그리스 방문객이라면 아테네 데스테 재단 현대 미술관이 선보이는 『모뉴멘트 투 나우』 展을 통해서 그리스 현대 미술계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시는 요즘 전세계 곳곳에서 2년마다 거행되는 대규모 국제 미술 비엔날레를 뺨칠 만큼 작가들의 지명도, 작품 수준, 그리고 행사의 규모 면에서 컬렉터 다키스 조아누의 안목과 야심이 돋보이는 블록버스터급이다.

우선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진만 봐도 그렇다. 뉴욕 뉴 뮤지엄의 큐레이터 댄 캐머런, 파리 퐁피두 센터 큐레이터 앨리스 진저라스, 이탈리아의 마시밀리아노 조니, 구겐하임의 낸시 스펙터, 그리고 뉴욕에서 온 화랑 딜러 제프리 다이치 이렇게 5인의 초호화판 기획진만으로도 데스테의 이번 『모뉴멘트 투 나우』 展이 현대 미술의 올림픽을 겨냥하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해준다.

나체 여성 모델들의 퍼포먼스 사진으로 유명한 바네사 비크로프트 (Vanessa Beecroft), 중국의 슈퍼스타 카이 구오-키양 (Cai Guo-Qiang), 논쟁성 짙은 설치물로 각광받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Maurizio Cattelan), 아이슬랜드의 올라푸르 엘리아손 (Olafur Eliasson), 남아공의 양심을 미술로 표현하는 윌리엄 켄드리지 (William Kendridge), 악동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 대미언 허스트 (Damien Hirst)와 크리스 오필리 (Chris Ofili), 일본의 슈퍼스타 다카시 무라카미 (Takashi Murakami), 아랍권 여성과 문화를 사진으로 논평하는 이란의 시린 네샷 (Shirin Neshat) 등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고 있는 현대 미술의 대명사급 작가들.

작가들이 표방하고 있는 각기 색다르고 다양한 국적, 문화적 배경, 주제, 매체 등 어느 모로 보나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글로벌 시대를 한 전시로 압축해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의 현대 문화 특성을 교배 (Cross-Fertilization) 또는 혼성(Hybrid)이라고 본 아테네 사업가 다키스 조아누의 지적은 그의 이번 소장품 전시회가 잘 대변해주고 있다.

* 이 글은 본래 NOBLESSE 2004년 10월호 124페이지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유리 예술의 마술사 쟝-미셸 오토니엘의 유리 궁전

JEAN-MICHEL OTHONIEL’S CRYSTAL PALACE

Crystal Palace

카르티에 재단 현대미술관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에 전시된 오토니엘의 『크리스탈 궁전 (Crystal Palace)』전시 (2003년10월31일-2004년1월11일) 광경 © ADAGP Photo: Patrick Gries.

일찍이 2000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헤르마프로티테』라는 제목의 환상적인 유리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알려진 바 있는 유리 예술가 쟝-미셸 오토니엘 (Jean-Michel Othoniel, 1964*-현재).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40세 유리 예술가는 본래 80년대부터 유리 말고도 유황, 왁스, 인광 물질, 납 등을 주재료로 한 거대한 규모와 환상적인 모양새를 자랑하는 조각 작품을 주로 제작하는 조각가로 활동하다가 90년대부터 유리 작업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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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현대미술관에서 전시중인 《크리스탈 궁전》 전 중에서 전시중인 작품 『유니콘 (Unicorn)』Photo: Steven Brooke Studios.

오토니엘이 유리라는 재료에 처음 매료되기 시작한 때는 유리 공예로 유명한 이탈리아 베니스 근처에 자리해 있는 무라노 섬의 유리 공방 명인인 오스카 자네티 (Oscar Zanetti)를 알게 되면서부터.

오토니엘이 유리 공예의 스승뻘인 자네티로 부터 배운 중요한 기법은 바로 유리를 녹이고 공처럼 둥글린 다음 이리 저리 절단한 후 남는 흠집 자국에 또다시 유리 조각을 붙이고 떼서 연결된 장식성을 창조하는 것. 그래서 오토니엘의 유리 공예 작품들은 가지각색 모양을 한 유리 조각들을 줄줄이 연결하고 매달아서 만든 듯한 장신구 같다는 인상을 준다.

오토니엘은 다루기 조심스럽고 운반하는데 신경이 많이 쓰이는 섬세연약한 유리 공예품을 전세계 곳곳 전시장으로 순회하면서 전시하기를 좋아하는 변덕스러운 일면의 작가이기도 하다.

1996년 로마에 있는 르네상스기 귀족 가문인 메디치家의 한 궁전에서 가졌던 개인전에서는 자신이 제작한 초대형 유리 목걸이 모양의 설치물을 궁전 정원에 있는 대나무에 주렁주렁 달아 디스플레이했고, 이어서 1999년에 스페인 알함브라와 그라나다에서 차례로 열린 전시에서도 자연석, 나무 등과 같은 천연 배경물과 그의 발짝거리고 현란한 빛을 발하는 유리 공예품을 유기적으로 나란히 결합 전시하는 독특한 디스플레이 방식을 선보였다.

올초 파리 카르티에 재단 박물관에서 열린 『오토니엘의 크리스탈 궁전 (Crystal Palace)』 전시는 현재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시에 있는 현대 미술관으로 옮겨져 [2004년] 8월30일까지 계속되어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찬란한 유리 설치물이 우리 일상 공간에 던져줄 환상적인 광채와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이 글은 본래 LG 데코빌 발행 『공간사랑 』지 2004년 9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Vienna and Body Art

Vienna News

« John Baldessari, “I am Making Art”, black and white video, 1971.

The body is the all-time favourite hit theme in Vienna. Vienna, arguably, being the cradle of post-war Europe body art and performance responsible for Fluxus movement, exhibitions dedicated to Wiener Aktionismus, or Viennese Actionism were widely in evidence. Hermann Nitsch, whose historical St. Marx performance orgy of blood and dead animals in the 1960s, had his retrospective show at Essl Collection (until 11 January). Günter Brus, another pillar figure for this movement whose works marked by self-inflicted injury and brutality to the extreme, had his first Retrospective at Albertina (7 November – 8 February). Another Actionist and founder of utopian artists community Friedrichshof Commune, Otto Muehl undisclosed painting works since his gestural action of destroying easel canvases in 1962 (Otto Muehl. Life, Art, Work – Action Utopia Painting 1960-2004 at MAK,).

Today, Vienna is clearly moved away from the radicalism of the 1960s and the 1970s. The fourth sequence of the five-part ‘Performative Installation’ Body Display: Body and Economy at the Secession, for one, puts the question of body and matter of money in a contemporary on-stage context. John Bock’s inexpensively-constructed installation, adorned with sex toys and disjointed limbs and torsos of dolls, is a metaphor of bodies helplessly exposed to vulnerability. The gap between artist´s aspirations and realities becomes once again visible in the display of Austrian Svetlana Heger’s body, transformed into an advertising billboard for luxury brands.

That bodies Speak has been known for a long Time – indeed, and exactly with that title Dass die Körper sprechen, auch das wissen wir seit langem, an exhibition at Generali Foundation examined the theme with 23 artists. In Kunsthalle Wien, one finds St. Sebastian : A Splendid Readiness for Death, an enlightening exhibition on the representation of the arrow-punctured Catholic gay martyr and patron saint of plague and AIDS, surveying the aesthetics of sado-masochism, physical torment, and death. Within all these displays of flesh and blood, Innocy, a cuddly monster made by Japanese artist Shintaro Miyake (Krinzinger Projekte), earned sympathy when he made a surprise appearance cum performance at Vienna’s traditional Café Prückl, the favorite café of art students, right next to MAK, where director Peter Noever continued his blame game against the government for freezing his budget.

Arts Secretary Franz Morak for his part invited criticism from the artists’ community with a newly proposed social security plan that would result in reduced benefit, particularly for artists with low level of output. Not all is lost, though, as Vienna’s City Cultural Council boasted that it secured its annual funding of €1.2 million at hand for disposal to initiate a public arts project called Kunst für öffenlichen Raum, (Art for Public Space, that is). Also financially troubled Künstlerhaus, whose entrance door remained shut since last October(after its last show Abstract Now), said it will resume its contemporary arts exhibitions from April. In the meanwhile, Viennese galleries are anticipating a radically new version of KunstWien art fair from the year 2005 (prospective fair days are 20-24 April). Ths annual art fair of regional scale suffered drastic fall in attendance and sales as the event dates collided with London’s new Frieze Fair.

Highlights:

Eva Hesse: Transformations, Kunsthalle Wien in Museumsquartier, 5 March – 23 May 2004. ‘The Sojourn in Germany 1964/65’ – so goes and subtitle of the show, and it will feature over 60 drawings, collages, gouaches, and reliefs as well as sculptures Hesse produced during her one year stay in Kettwig(near Essen), Germany, where the artist presumably had an impetus to move on to minimalistic tendencies. Also included in the exhibition are personal documents such as calendar notes and travel diaries to catch a glimpse at the artist’s inner conflicts and developments.

From the Pages of My Diary, Atelier Augarten Zentrum für zeitgenössische Kunst der Österreichen Galerie Belvedere, From 20 February and onward. This on-line arts project initiated by Atelier Augarten, contemporary exhibitions center within Austria’s National Galerie Belvedere, presents the works of various artists of the moment in series throughout this year. Featuring artists include: Christy Astuy, Tatiana Bazzichelli, Betty Bee, Roberto Cascone, E.G.Ø, Frank Gassner, Marcus Geiger & Marcus Geiger, Gelatin, Francesco Impellizeri, Lucia Leuci, Marko Lulic, Ezia Mitolo, Vegetali Ignoti, Erwin Wurm. www.casaluce-geiger.net

Art & Rebellion (Viennese Actionism Archive), MUMOK (Museum Moderner Kunst Stiftung Ludwig Wien), MUMOK Factory, 12 February – 25 April 2004. As any serious museums and private collections in Vienna, MUMOK in Museumsquartier holds a comprehensive Viennese Actionism collection and auxiliary documents which has been put to permanent show since last summer. This show features archived documents, including photos, original manuscripts, notes, personal sketches and publications obtained from recent purchase (Friedrichshof Collection) and gifts from artists (Günter Brus and Hermann Nitsch).

* This article originally appeared in the Contemporary magazine issue no. 62 in 2004.

John Baldessari, I Am Making Art, 1971, videostill, Generali Foundation Collection, Vienna, © Generali Foundation.

 

스페인의 자존심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고향의 품에 안긴 20세기 거장 화가 파블로 피카소

PICASSO MUSEUM IN MÁLAGA

이게 몇 번째 피카소 미술관이지요?
 – 프랑스 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 프랑스 리비에라 해안 안티베스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들, 파리 국립 근대미술관, 죠르쥬 퐁피두 센터,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 센터, 스위스 바이얼러 재단 등 20세기 서양 근대 미술의 대가 파블로 피카소가 70평생 미술혼을 불태워 남긴 수백 편의 작품들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피카소 미술관들은 이미 전세계 여러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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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제오 피카소 말라가. Photo: Picasso Museum, Málaga.

이 거장이 한 번쯤 손을 대어 다루고 실험해 봤던 방대한 범위의 미술 사조와 기법적 탁월성은 차지하고라도 그 기나긴 미술가로서의 경력기 동안 쏟아낸 작품의 수량도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지금까지도 전세계 대소 미술관들의 소장품들 말고도 이전까지 일반에 알려져 있지 않던 작품들이 추가로 틈틈이 개인 소장자들과 국제 미술 경매장과 박람회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 미술 컬렉터들과 전문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10월 27일, 스페인 남부에 자리한 태양과 바다의 휴양 도시 말라가에서는 피카소 미술관 뮤제오 피카소 말라가 (Museo Picasso Málaga)가 문을 열어 미술계와 대중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조용한 화재거리로 떠올랐다. ‚아니 또 피카소 미술관을 열 만큼 피카소의 작품이 더 남아 있단 말이야?’ – 피카소 애호가들과 미술관계자들은 기존의 여러 피카소 미술관들을 뒤로 한 채 새로 지어진 이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신개관을 두고 어리둥절해 했다.

프랑스 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독일 뮌스터를 비롯해서 러시아의 에르미다쥬 박물관 내 피카소 갤러리에 이르기까지 이미 핵심적인 피카소의 미술 작품을 전문적으로 소장관리하며 대중 관객에 전시하고 있는 피카소 미술관과 전시장들을 통해서 웬만한 피카소 작품들은 알려질대로 알려져 있는 때문이다. 특히 파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은 이미 미술계 안팎에서 공히 피카소의 주옥같은 대표작을 가장 종합적이고 완결적으로 정리한 컬렉션으로 꼽히고 있다.

화가의 고향 말라가에 들어선 피카소 미술관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컬렉션은 다분히 가족적인 흥취로 가득하다. 말라가의 옛 도심부 유태인 거주구역 안에 16세기 르네상스풍으로 지어진 팔라시오 데 부에나비스타 (Palacio de Buenavista) 궁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선 이 미술관의 피카소 소장품의 수는 총 204점.

1901년부터 말년인1972년까지 피카소가 남긴 이 작품들은 모두 화가의 며느리 크리스티네 루이즈-피카소 (Christine Ruiz-Picasso)와 손자 베르나르드 루이즈-피카소 (Bernard Ruiz-Picasso)가 화가로부터 유산으로 이어받아 보관해 온 개인 소장품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주로 피카소가 말년에 그린 소품들과 미완성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크리스티네 루이즈-피카소 여사는 이중 133점을, 그리고 베르나르드 루이즈-피카소는 22작품을 이 미술관에 기증하고 나머지를 장기 대여했다고 한다.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개관은 후안 카를로스 (King Juan Carlos) 스페인 왕가 부부와 말라가가 속해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 정부의 전격적인 지원으로 성사된 지방정부적 차원의 결실이다. 지난 1998년부터 착수된 이 미술관 건립을 위해 안달루시아 지방정부가 투자한 금액은 6백만 유로, 그러니까 우리돈으로 8십8억여원에 달하는 액수이다. 그래서 안달루시아 지방 정부와 미술관측은 말라가의 유명한 해변가 (Costa di Sole)와 낭만을 찾아 온 여행객들을 한껏 더 붙잡아 들일 수 있는 관광 명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잔뜩 하고 있다.

말라가는 지금도 옛 스페인 르네상스 시대의 고건축물과 아랍계 북아프리카의 고풍스런 분위기가 남아있는 피카소의 고향이다. 피카소는 생전 자기의 고향 말라가에 자신의 미술품을 소장전시하는 미술관을 열고 싶어했다고 말버릇처럼 곱씹었었다고 한다. 독재자 프랑코는 역시 스페인 출신의 거장 화가 달리 (Salvatore Dali)는 애지중지했지만 피카소는 퇴폐 (degenerate) 화가고 규정하며 피카소를 탐탁해 하지 않았다.

역으로 프랑코에 대한 혐오는 피카소 쪽도 마찬가지여서 화가는 프랑코가 정권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절대로 스페인 땅에 발을 디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로해서 피카소는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하기 2년전인 1973년에 결국 고국땅을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채 그가 작업하며 평생을 보냈던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번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의 개관으로 해서 피카소는 죽어서나마 평생 못다한 원을 풀게 된 셈이 되었다.

서양 근대 화단 속 스페인을 대표하는 국민 화가
 오늘날에 와서 파블로 피카소 (1881출생 – 1973년 타계)를 두고 20세기 서양미술을 평정한 최고의 거장 화가라고 하는 평가는 상식처럼 되어 버렸다. 미술계 안에서는 일명 „쬐끄만 스페인 녀석 (little Spaniard)“이라는 애칭으로도 널리 불려지곤 했던 그는 지천명 (知天命)이라는 50의 나이에도 미치기 전  이미 20세기 근대 미술가의 가장 전형이자 근대 서양 미술에서는 더이상 흔들릴 수 없는 대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힌 명사가 되어 있었다.

서양에서 미술이란 전통적으로 예술을 향유하고 소유하고 과시할 수 있는 극소수 엘리트층의 전유물이었다. 해서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티치아노, 17세기 스페인의 인기 종교 화가 벨라스케즈, 18세기 네덜란드의 풍속화가 베르메르 (Jan Vermeer)도 그 당시로서는 미술 애호가들 속에서 널리 사랑받은 화가였다고 하나 그 향유층은 귀족이나 부유 상인계층에 불과했다.

그런데 반해서 피카소는 20세기 근현대를 통해서 대중매체라는 새로운 정보 수완의 덕을 톡톡히 받은 덕택에 미술사상에 전에 없는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며 인기있는 공인 (公人)으로서의 미술 인생을 살고 간 행운아이기도 했다. 흔히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의 개념주의적 풍자 미술이 미술사에서 미술가들과 학자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을 지언정, 작업의 방대한 폭과 실험성 면에서나 폭넓은 대중적 인기 면에서는 피카소가 단연 우세하다. 아무리 미술에 대한 문외한이라 한들 피카소라는 이름은 한 번 쯤은 들어 보았을 터이며 그의 대표작 몇 점을 오고가며 보지 못한 자 없다.

ART = LIFE 그런 유명세 못지 않게 피카소를 둘러싼 끝없는 재해석과 평가, 뒷소문과 루머, 질시와 혐오는 지금도 가실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대머리에 키작고 가무잡잡한 피부에 유난히 광채나는 눈빛과 다부진 체격의 키작은 이 스페인 녀석의 성격은 별난 구석도 있었다. 그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하루일과의 대부분을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깎는데 보낸 열정과 다작 (多作)의 미술가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여인, 사랑, 태양, 좋은 음식과 와인을 포함한 생의 환희를 맘껏 누리길 좋아했던 쾌락주의자이기도 했다.

저항하기 어려운 매력과 날카로운 위트섞인 말재주로 작업실의 누드 모델에서 동료 화가들에 이르는 수많은 여성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던 그는 또 한편으로는 여러명 두었던 아내들, 연인들, 자식들에게 거침없이 호통치고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던 폭풍적인 성미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피카소의 그같은 짙은 남자다움 (machismo)은 그래서 이후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같은 남성적인 화가들과 한데 싸잡혀 페미니즘 계열 여성들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성들은 그치지 않고 피카소의 인생을 드나들었으며, 피카소는 일평생 정력적 예술가로서의 신화를 구축해 나갔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피카소는 여간 운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에 앞서서 1940-1945년 나치 독일군의 파리 점령기에 히틀러는 피카소를 퇴폐 화가라고 낙인했다. 파리의 수많은 보헤이먼 예술인들은 나치주의과 파시즘을 철저히 비난하는 입장이 일반적이었으나 유독 피카소만은 러시아의 독재자 스탈린에게 동정을 표시했다.

그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단 한 번도 냉전기 동안 미국측으로부터 정치적인 비난이나 제재를 받은 적 없이 미국은 전세계 미술감상인들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스페인 내전기 프랑코 장군 (Francisco Franco) 장군이 스페인 북부도시 게르니카에 폭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되는 장면을 담은 그 유명한 『게르니카Guernica』(1937년 작, 현재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 근대 미술관 소장)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감동적인 반전 (反戰) 미술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한국 전쟁을 참상을 폭로한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1951년 작)도 그에 못지 않은 정치참여적 요소를 담은 대작이다.

회화는 화가 감정의 표출 
흔히들 피카소를 20세기 근대 서양 미술의 가장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는 당시 근대 유럽의 주류 미술계의 여타 동료 모더니즘 화가들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유지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이념적 역사적인 사명감이란 것도 특별히 없었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들은 현재를 위해서 언제나 현재에 존재할 것을 기대하며 만들어진 것들이다. 내가 뭔가 표현했다면 그것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없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한 그는 한 때 자기는 그림의 힘에 이끌려 그림을 그릴 뿐이라고 말하면서 미술은 내면의 본질을 외면화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한 표현주의 미술이나 깊숙이 깔린 욕망, 무의식, 본능, 꿈을 표면 위로 끌어 올려 그림으로 그린다고 하는 상징주의 미술에도 거부감을 표현했었다.

그는 어린 소년기부터 탁월한 손재주와 천채적 기량을 지닌 그림쟁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내는 사실주의 계열의 화가는 분명 아니었다. 그 유명한 피카소의 청색 시대 (Blue period), 분홍 시대 (Rose Period), 입체주의 (Cubism) 시대라는 양식별 시기구분을 거쳐 구축해 나간 피카소의 미술 세계는 그 만의 독자적인 범주를 창조했다. 흔히 대중 관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는 청색 시대와 분홍 시대의 그림들은 피카소가 20대 청년 시절에 그렸던 초창기 실험 단계였다. 고독과 가난에 절은 서커스 단원들이나 거리부랑아의 모습을 그린 그의 20대는 타고난 천재성이 아직 채 발휘되기 직전에 불과했다.

천성적으로 피카소는 치밀한 수학자도 그렇다고 해서 심오한 철학적 기질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가 1910년대에 파리에 살면서 죠르쥬 브라크 (Georges Braque)와 협동으로 창안한 입체주의 양식이 탄생하기 까지는 엄밀히 말해서 브라크의 기여가 더 지배적이었다. 피카소 스스로는 끝내 입체주의 양식에 싫증을 내고 이탈했으며 근본적으로 추상주의 미술을 더 멀리 추구하지도 않았다.

1920-30년대에 정신분석학에 영향받아 파리에서 크게 유행했던 초현실주의에 피카소는 그다지 관심을 보인 적도 동인활동을 벌인 적도 없었다. 그대신 피카소는 인간의 몸과 얼굴을 맘껏 일그러뜨려서 피카소가 가장 관심있어 하던 에로스 (eros)와 죽음 (thanatos)과 연관된 욕망과 공포감을 기괴하면서도 에로틱한 전환시키거나, 고전 대가들의 양식을 재해석한 몽롱한 듯한 인물 초상을 즐겨 그렸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 (sex)은 예술을 위한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리라. 경우는 피카소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성의 얼굴과 몸을 즐겨 그렸다. 특히 입체주의 실험을 끝내고 난 1920년대부터 꿈결같은 에로티즘을 표현한 여성 추상화는 피카소의 집착적인 주제가 되었다.

뭐니뭐니해도 피카소 미술의 최고 전성기는 근대 미술사의 분수령을 이룩한 작품 『아비뇽의 여인 (Les Demoiselles d’Avignon)』이 완성된 1907년부터 파시즘이 유럽 대륙을 휩쓸고 있던 1937년작 『게르니카』가 완성되기 까지 30년 동안 즉, 피카소가 50세를 넘어선 시점이었다고 전문가들을 말하지만 제2차 대전이 지나고 나서 1950-70년대까지도 피카소의 정력적인 활동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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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제오 피카소 말라가 실내 전시장 광경. Photo: Picasso Museum, Málaga.

대가 (master)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난 중장년기의 피카소는 과거로 눈을 돌려 벨라스케즈 (Diego Velazquez,) 고야 (Francisco Goya), 푸생 (Nicholas Poussin), 들라크롸 (Eugène Delacroix), 마네 (Eduard Manet), 쿠르베 (Gustav Courbet) 같은 선배 대가들에게 바치는 작품들을 연속적으로 제작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기량을 견줘보기도 했다. 1973년 세상을 뜨기까지 피카소의 작품 세계는 마치 피할 수 없는 죽음 미리 감지라도 한듯 집착증적이고 신경질적인 인상을 안겨 주었던 것으로 미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귀향의 꿈을 이룬 피카소
 크리스티네와 베르나르드 루이즈-피카소의 개인 피카소 소장품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204점의 말라가 미술관의 피카소 컬렉션은 엄밀히 평가해 보건대 피카소의 대표작들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 두 피카소 가족들이 보관해 온 작품들의 대다수는 스케치 51점과 판화 63점 등 (그외 유화 49점, 조각 11점, 도자기 19점)이 차지하고 있어서 일반 관객들에게는 피카소 유화 작품들이 주는 시각적 압도감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개막을 기념하기 위해 특수 기획된 특별전 『피카소 가족의 피카소 (El Picasso de Los Picasso)』 展(2003년 10월27일 – 2004년2월27일 까지)은 피카소가 생전 자신의 아내, 연인, 자녀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작품들을 전세계 미술관과 개인 소장가들로부터 대여해 와 전시하고 있어서 비록 사후에서 나마 끝내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안긴 화가 피카소를 반기고 축하해 주고 있는 셈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며느리 크리스티네는,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은 그 자체로서 한 편의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독재자 프랑코로 인해서 평생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감수해야 했던] 미술 작품을 고향으로 가져오고 싶어했던 생전 고인故人의 꿈을 이뤄드리고 싶었습니다.“ 라고 요약한다.

* 이 글은  『오뜨』 지 2004년 1월호에 실렸던 기사를 다시 게재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

프란시스 베이컨 – 20세기 영국 표현주의 회화의 거장

FRANCIS BACON AND THE TRADITION OF ART

2013년 11월12일 화요일 뉴욕 크리스티 미술경매소에서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루시안 프로이트를 모델로 한 습작 3부작(Three Studies of Lucian Freud)』이 1억4천2백4십만 달러(우리돈 약  1천5백2십여억원)에 낙찰되어 미술경매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에 낙찰된 미술작품이 되었다. 작품 보기

82세까지 승승장구하던 프란시스 베이컨이 마드리드를 방문하던 중 평생 지병이던 천식이 폐렴으로 악화되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며 미술계를 놀라게 했던 1992년. 특히 영국 미술계 인사들과 언론계에서는 생전 베이컨이 활동 말기 20여년 동안 작품제작을 했던 런던 작업실에 대한 뒷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고희가 넘어서도 베니스 비엔날레와 전세계 유명 미술관을 통한 전시회를 통해서 예술성을 인정받고  명성을 누리며 성공한 미술가의 인생을 살았던 그는 사적으로는 공개적인 동성연애자였으며, 별난 캐릭터를 가진 기인이자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 또 동료 미술가와 미술계 인사들 사이서는 너그럽고 인심좋은 인물로 소문난 사교계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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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앵그르의 외디푸스와 스핑크스에 바침』 1983년,  캔버스에 유채 The Berardo Collection, Sintra Museum of Modern Art, Lisbon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프란시스 베이컨 – 20세기 영국 표현주의 회화의 거장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설가, 작가, 평론가인 알베르토 망겔 (Alberto Manguel)에 따르면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의 그림들이 그토록 일반 관객들에게 깊이 감명을 안겨주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유는 작품의 독창성 외에도 남다르게 정열적이고 극단적이었던 화가의 성격과 일대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모름지기 관객들은 화가의 성격과 생애를 알고 나서 작품을 대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보다 작품에 대한 친밀감과 묘한 애착까지 키우게 되는 때문이다.

1909년 아일랜드 더블린 태생, 1992년 스페인 마드리드 사망. 비밀스러운 작업실의 소유자이자 유럽 곳곳을 떠돌며 다채로운 애정행각을 서슴치 않았던 정열의 동성연애자. 인간의 고독, 잔혹, 공포를 주제 삼아서 주로 인간의 신체나 인물화로 표현한 영국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 프란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이 20세기 서양 미술에 기여한 독창성과 미술사에서 점하고 있는 위상과 작품세계는 유난히 기인적인 한 평생을 살고 간 그의 일생에 못지 않게 별나고 흥미롭다.

그의 사후, 이전까지만해도 신비로 둘려싸여 있던 그의 작품 세계와 작업실에 대한 비밀이 하나둘씩 벗겨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혹은 화가에 의해 직접 찢겨 망가뜨려진 캔버스 조각들, 여러 고서적과 잡지에서 오려져 흩어진 사진들과 책갈피 스크랩, 물감으로 덕지덕지한 작업실 벽 등 화가의 창조 공간이라면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작업실 사물들과 산만함은 물론이려니와, 생전 그림을 그려 판 수입의 상당에 대한 세금 납부의 의무를 상습적으로 피해 온 탈세자였음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해 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은 화가가 태어난 도시 더블린에 가면 런던에 있던 그의 리스 뮤스 스튜디오 (Reece Mews Studio)는 이제 휴 레인 갤러리 (Hugh Lane Gallery)로 이전되어 예전 모습 그대로 재현된 채 전시되고 있어 그의 옛 작업실 분위기를 경험해 볼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공포, 잔혹, 고독을 표현한 외톨이 화가
근현대 미술사를 되돌아 보건대, 20세기는 전에 없이 다양한 사조 (ism)와 화파들 (schools)이 각축을 벌이며 이념적∙미학적 실험을 거쳤던 시절이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태어나 성장한 청년기 유럽은 양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격동의 세월이었으며 이를 배경으로 우후죽순 등장한 미술 운동이 각축을 벌이던 창조적 폭발기이기도 했다. 베이컨도 예외없이 그같은 전유럽적 창조적 기운에 영향을 받았다.

사춘기의 화가는 – 역사적 추측에 따르면 화가의 동성애적 기질을 문제 삼았던 – 부모와의 갈등과 충돌 끝에 1925년 16살 나던 해 고향 더블린을 떠나 런던으로 떠났다. 이듬해 베이컨은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 매료를 느껴 베를린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독일 바우하우스 (Bauhaus) 전통의 가구 디자인과 장식 미술을 배워와 런던에서 잠시나마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 베이컨의 예술적 감성을 뒤흔든 당시  미술은 뭐니뭐니해도 1920년대 초현실주의 (Surrealism)와 피카소 (Pablo Picasso)의 회화 세계였다. 베이컨은 특히 초현실주의에 영감받았던 1920년대말경 피카소의 그림을 매우 아끼고 흠모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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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실내 풍경 (Studio Interior)』 1934년경, 종이에 파스텔, Marlborough International Fine Arts, Photo: Herbert Michel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베이컨이 그린 1934년경 작 『작업실 실내 풍경 (Studio Interior)』(말보로 인터내셔널 파인 아트 갤러리 소장)은 그보다 약 15년전인 1928년에 피카소가 그렸던 『탈의실 문을 열고 있는 여인 (Bather opening a Beach Hut)』(파리 피카소 미술관 소장)의 유기적 형상에서 직접 영향 받아서 베이컨식으로 해석한 초기작이다.

20세기초 유럽 화가들은 흔히들 제각각의 미적 이념과 이론적 정당화를 위해서 비슷한 생각과 주장을 공유하는 동료 예술인들과 화파를 형성해 활동하곤 했다. 하지만 독불장군, 외톨이 화가 베이컨은 독학 화가였다. 호주에서 영국으로 온 무명 화가 로이 드 메스트르 (Roy de Maistre)로 부터 잠시 받은 그림 사사가 베이컨이 화가가 되기까지 받은 미술 교육의 전부였을 뿐 단 한번도 정식 미술 교육 기관이나 학교 신세를 지거나 그 어떤 화파에도 소속된 적 없는 외톨이 화가였다.

흔히 베이컨 미술 전문가들은 베이컨의 미술 경력에서 1920년대를 베이컨 양식 형성의 출발기라고 규정하며, 제2차 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를 넘어서야 비로소 양식의 완성단계를 이룩했다고 평가하곤 한다. 캔버스와 물감을 갖고 실험을 거듭하던 젊은 화가 지망생 베이컨은 습작 대다수를 스스로 찢어 버리거나 불태워 없앴던 이유로 해서 오늘날 그의 초기작품은 거의 확인해 볼 길이 없는게 안타깝다.

비록 미술 학교에 발을 디뎌본 적 없는 독학 화가 베이컨이지만 미술 이외에도 문학, 영화, 음악 등 예술 다방면을 넘나드는 왕성한 예술 향유가였다. T.S. 엘리엇 (T.S. Eliot),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 에즈라 파운드 (Ezra Pound) 같은 근대 문호들의 문학 세계에 익숙해 있었으며, 영화에도 조예가 깊어서 에이젠슈타인에서 비스콘티에 이르는 근현대 거장 영화인들과 개인적인 친분까지 맺으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젊은 시절부터 널리 여행해 본 경험 덕택에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와 스페인어도 할 줄 알았다. 미술 분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베이컨이 열정을 바쳤던 과거 거장들은 스페인 바로크 미술이 거장 벨라스케즈 (Velázquez), 렘브란트 (Rembrandt), 앵그르 (Ingres), 반 고흐 (Van Gogh), 수틴 (Soutine) 등 이었으며, 고대 이집트 미술과 그리스 미술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제2차 대전 이후 유럽 개인주의 미술의 최전선
20세기에 범람했던 온갖 이즘과 사조의 홍수 속에서 모든 미술인들이 화파나 동인을 형성해서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2001년도에 작고한 신비의 화가 발투스 (Balthus), 이탈리아의 조각가 쟈코메티 (Alberto Giacometti), 아르브뤼 (Art bru)의 쟝 뒤비페 (Jean Dubuffet) 등은 모두 유행하던 미술 사조와 상관없이 개인적인 미술세계를 구축한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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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벨라스케즈의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을 본딴 습작』 1953년, 캔버스에 유채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20세기 전반기 유럽을 뒤흔든 양차 세계 대전과 각종 미술 운동에 이어 20세기 후반 뉴욕에서 이어 숨가쁘게 전개된 전후 추상표현주의 운동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마크 로드코 등 포함)과 개념주의 미술 사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이컨은 런던에 남아 거주하면서 아무런 미술 운동이나 화파에 소속되지 않은채 홀연히 작업했다. 그래서 베이컨은 추상주의, 기학주의,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또 스스로를 어떤 특정한 화풍을 대변하는 화가로 규정하거나 지칭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영국 BBC 라디오 대담(1962년)이나 『타임스』 紙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터뷰 기사(1963년)를 돌이켜 보면, 그는 고전주의 화가도 그렇다고 추상 화가도 아닌, 화가 내면에 지닌 개인적인 공포와 강박관념을 폭력적이고 보기 불편스러운 이미지로 들추어 표현하는 아마츄어 집착적 망상가가 직업적 화가 (畵家)로 화신 (化身)한, 말하자면 ‚20세기 시대정신 (Zeitgeist)’이었다.

1950년 이집트 카이로 여행에서 젊고 패기넘치는 미술 평론가 데이빗 실베스터 (David Sylvester)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베이컨은 특히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평론가 실베스터를 통해서 자신의 미술세계를 해명하곤 했으며,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에서 초대작가로 작품을 선보인 것을 계기로 국제 화단에 본격적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당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소개된 베이컨의 12점 작품들 가운데 『벨라스케즈의 이노센트 10세 교황 초상을 본딴 습작 (Study after Velàsquez’s Portrait of Pope Innocent X)』(1953년 작)은 커다란 반향과 스캔들을 불러 일으켰다.

베이컨이 묘사한 이노센트 10세 교황은 17세기 살았던 복싱 링을 연상시키는 노랑색 우리에 갖힌채 얼굴 가득이 보라색 히스테리에 질려 절규하고 있다. 기독교 교권이 패권을 잃은 후 종교적 방향을 상실하여 세속화된 근대 사회라는 새 철창 안에 갇힌 20세기 근대인의 자화상이다. 미술평론가 실베스터와 가진 몇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서 마치 뭉크의 『절규 (Scream)』 처럼 20세기의 공포의식, 고독, 인류의 절박감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베이컨을 설명한 바 있다.

이 그림에서 노랑색 세로줄로 표현된 강박적인 분위기는 티치아노 (Titian)가 16세기에 그린 『필립포 아르킨토 추기경 초상 (Portrait of Cardinal Filippo Archinto)』(1551-62)에서 영감받은 요소로, 티치아노가 그린 아르킨토 추기경 얼굴을 가리막이로 반쯤 가려놓고 묘사한 데에서 따 온 것임을 미뤄볼 수 있다. 아르킨토 추기경은 르네상스 시대에 밀라노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정치적인 음모에 휘말려 권좌에서 실추된 바 있는 비운의 인물이었다. 교황이라는 막강한 종교적 정치적 권위의 인물조차 편지풍파와 운명 앞에서는 가녀린 한 인간에 불가함을 말해 주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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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반 고흐 초상화를 위한 습작 제6번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VI)』 1957년, 캔버스에 유채, London, Arts Council Collection and Hayward Gallery © The Estate of Francis Bacon/VBK, Wien, 2003

벤 니콜슨 (Ben Nicholson)과 루시안 프로이트 (Lucian Freud)와 더불어 195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 화가로서 인정을 받은 베이컨은 1956년 생애 최초로 자화상 그리기를 시작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베이컨은 책에 실려 인쇄된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그림인 『타라스콘의 거리 화가 (The Street Painter of Tarascon)』(1888년 작)를 발견하고 자화상을 그리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반 고흐의 『타라스콘의 거리 화가』 자화상은 제2차 대전중에 독일에서 소실되어서 더 이상 진품을 확인해 볼 길이 없는 아쉬운 작품이 되버렸지만 인쇄판이나마 베이컨에게는 자화상 제작에 촉매제가 되어 준 요작이 되어 주었다. 『반 고흐 초상화를 위한 습작 제6번 (Study for Portrait of Van Gogh VI)』(1957년 작)은 반 고흐의 자화상에서 영감받아 그린 총6편의 자화상 연작들 가운데 마지막 6번째 작품이다.

육신 살덩어리 그리고 죽음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서 베이컨 생애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던 1962년에 완성된 문제작 『십자가에 못박힘 3부작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1962년 작)은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되어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전시장 디스플레이를 위해 운반되었고, 전시가 끝나자 마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구입해 가져갔다던 그 화재의 그림이기도 하다.

„나는 언제나 도살장과 동물의 살덩어리 그림에 매료되고 했다…아! 죽음의 냄새…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에 목박힌다 함은 전혀 다른 [종교적] 의미 를 띠고 있음을 알지만 무신론자에게 도살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행위의 하나에 불과하다..“라고 베이컨은 이 작품의 제작 동기를 설명했던바 있다. 이 작품은 차임 수틴 (Chaim Soutine)이 한창 도살장 그림 작업에 매료되어 있을 즈음인 1925년에 파리 작업실에서 그린 『도살된 숫소 (Slaughtered Ox)』 그림과 창작 동기를 함께 하고 있지만, 베이컨은 사진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겼고 수틴은 도살장에 직접 가서 관찰한 것을 그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1962년 런던 테이트 회고전, 1963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1967년 미국 피츠버그 세계박람회 카네기 미술대상 수상 [베이컨은 이 상 수상을 거절했다.], 루벤스 미술상, 1968년 런던과 뉴욕에서 말보로 갤러리 전시회, 1971년 프랑스 그랑 팔레 (Grand Palais) 개인전 등 베이컨의 커리어 행보는 그야말로 숨가쁜 속도로 상향행진을 계속했고 전세계 미술계는 프란시스 베이컨을 20세기 거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널리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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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십자가에 못박힘 3부작 (Three Studies for a Crucifixion)』 1962년, 캔버스에 유채와 모래 가루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그는 주로 작업실에 밝고 선명한 자연광이 들이치는 아침 시간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오후와 저녁 시간에는 맥주집과 바에서 동료 미술가와 친구들과 만나 우정과 사랑을 나누었다. 충직한 미술 친구 쟈코메티와 프로이트 외에도 베이컨의 친구 겸 초상화 모델이 돼 주었던 피터 레이시 (Peter Lacy), 조지 다이어 (George Dyer) ,미셸 레리 (Michel Leiris), 친구이자 『보그 (Vogue)』 誌 사진가였던 존 디킨 (John Deakin), 친구 존 에드워즈 (John Edwards) 등은 다 60년대에 만난 보물같은 친구들이었다. 정말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세월이었다.

초상화 – 불멸을 향한 몸부림 그러던 1971년 봄, 조지 다이어가 베이컨이 머물던 파리의 한 같은 호텔방에서 자살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듬해 봄 사진가 존 디킨이 뒤따라 세상을 떠났다. 그 후로 베이컨은 전에 없이 자화상을 주력해서 그렸다. 사진가 역할을 해 주던 존 디킨이 사라진 후 베이컨은 거리의 즉석 사진자동 판매기에서 여권 사진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어 자화상으로 옮겼다. 왜 70년대 이후로 유독 자화상을 즐겨 그리기 시작했느냐는 평론가 실베스터의 질문에 „주변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사라져 갔기 때문“이라고 화가는 대답했다.

1973년의 초상화 3부작 『3편의 초상 – 조지 다이어 초상, 자화상, 루시안 프로이트 (Three Portraits – Posthumous Portrait of George Dyer, Self-Portrait, Portrait of Lucien Freud)』>은 이렇게 해서 그려진 초상화 연작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보다 3년후에 그려진 『미셸 레리의 초상 (Portrait of Michel Leiris)』는 프랑스인 지성인 소설가 미셸 레리를 모델로 해 그려진 초상화로서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한  얼굴 모양을 일부러 비대칭적으로 일그러뜨려 표현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위대함과 무의미함 사이의 간격을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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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 『미셸 레리의 초상』 1976년 © The Estate of Francis Bacon / VBK, Wien, 2003

자화상의 대가 렘브란트는 생전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현재 빈 미술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1657년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생애 말년기 경제적  수난으로 일그러지고 흉칙해진 화가 자신의 얼굴을 기록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이 베이컨을 매우 감명시켰던게 분명하다.

과제로 남아있는 베이컨 신화 풀기 일단 미술사 교과서에 거장으로 거론된 화가의 이름은 웬만해서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경우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미술평론가 데이빗 실베스터가 1962년부터 1986년까지 베이컨을 상대로 한 마라톤 인터뷰를 펼쳐가며 베이컨의 미술 세계에 대한 화가의 해명을 기록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프란시스 베이컨의 창작 동기, 영감의 원천, 재료 활용 방식과 테크닉 등에 관한 비밀은 거의 규명이 되었지만, 정작 과거 서양 미술의 대가들의 작품 세계와 베이컨의 회화 세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은 아직도 해결을 기다리는 중대한 연구과제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베이컨 사후 10년여년이 흐른 지금,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술의 전통 (Francis Bacon and the Tradition of Art)』 展이 겨냥하고 있는 바는 베이컨 미술이 과거 거장들의 작품 세계로 부터 받은 영감이 어떻게 재해석 창조되었는가를 조명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베이컨이 과거 서양 미술의 거장 화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모 (模)하고 재해석한 작품만을 만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독학 화가로서 과거 거장들과 동시대 주변 예술인들의 그림, 조각, 사진, 영화 등을 부지런히 모으고 관찰하는 것을 통해서 영감을 찾았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세계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다.

1987년 파리 르롱 갤러리에서 열였던 베이컨 전시회를 두고 프랑스 언론이 “베이컨 신화 (Bacon Myth)”라고 부르며 의문을 제기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전시중인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술의 전통”전은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서 내년 1월 18일까지 전시를 계속하며, 이어서 스위스 바젤 근방 도시 리헨 (Riehen)에 있는 바이얼러 재단 갤러리(2004년 2월7일-6월20일)로 옮겨 전시를 계속할 예정이다. Images courtesy: 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 지 2003년 1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사업가로서 화가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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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

Dürer's 〈Melencolia I〉 is one of three large prints of 1513–14 known as his Meisterstiche (master engravings). The other two are 〈Knight, Death, and the Devil〉 and 〈Saint Jerome in His Study〉. Though they do not form a series in the strict sense, the prints do correspond to the three kinds of virtue in medieval scholasticism—moral, theological, and intellectual—and they embody the complexity of Dürer's conception. Albrecht Dürer (1471–1528), Melencolia I, 1514. Engraving, 9 1/2 x 7 3/8 in. (24 x 18.5 cm) Harris Brisbane Dick Fund, 1943.

Dürer’s 〈Melencolia I〉 is one of three large prints of 1513–14 known as his Meisterstiche (master engravings). The other two are 〈Knight, Death, and the Devil〉 and 〈Saint Jerome in His Study〉. Though they do not form a series in the strict sense, the prints do correspond to the three kinds of virtue in medieval scholasticism—moral, theological, and intellectual—and they embody the complexity of Dürer’s conception. Albrecht Dürer (1471–1528), Melencolia I, 1514. Engraving, 9 1/2 x 7 3/8 in. (24 x 18.5 cm) Harris Brisbane Dick Fund, 1943.

올해 2014년은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 화가 겸 도제사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가 그의 걸작 판화작품중 하나인 『멜랑콜리아 I』(1514년)을 완성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뒤러의 멜랑콜리아 I은 『기사, 죽음, 악마』와 『서재에 앉아있는 성 제롬』과 더불어 1513-14년에 완성한 대형 판화 3부작중 한 작품으로, 중세 유럽에서 3대 미덕으로 꼽히던 도덕적, 신학적, 지적 학구주의를  상징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란 이 세 가지 미덕을 갖춘 교양과 소양있는 자로서 그가 창의적 결과물을 창조하기까지는 영혼적 고뇌와 정신적 우울증이라는 창조의 고통도 감내해야 함을 상징하고 있다.  Image credit: 〈Melencolia I〉 1514. Engraving, 9 1/2 x 7 3/8 in. (24 x 18.5 cm) Harris Brisbane Dick Fund,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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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때의 자화상. 목판에 유화 1498년작.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Photo: Museo Nacional del Prado, Madrid.

21세기 블럭버스터 화가로 둔갑한 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대가
흔히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이름은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짐작된다. 하지만 서구에서 사정은 많이 다르다. 서양인들에게 뒤러는 미술의 역사에서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늘 함께 하는 화가로서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 깊이 자리잡아 온 지 오래다. 특히 알프스 산맥 이북 지방에 자리해 있는 북부 유럽권에서는 더 그렇다.

뒤러의 그 유명한 『들토끼』 드로잉은 어린이들과 중고등 학생들의 미술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해 온 단골 삽화이며, 교회 용품점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뒤러의 『기도하는 손』 그림이 포스터, 열쇄 고리, 책표지, 벽걸이 그림으로 대량 복사되어 오늘날 전지구상의 기독교인들게 팔려나가고 있다.

‚서양 최초의 국제적인 미술가’ ‚서양미술 최초의 적극적인 자기 PR가, ‚현란한 아이디어맨이자 환상적인 상상가’ – 이런 사족스런 별명들 이외에도 흔히 서양 미술사에서는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471-1528)를 두고 혁신가 (innovator)라고 일컫는다. 뭔가 남들과 다른 새로운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13세 때의 자화상(Self-portrait), silverpoint drawing by the thirteen-year-old Dürer, 1484.

13세 난 소년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스케치, 1484년. 종이에 은필(銀筆), 27.5 x 19.6 cm, ©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알브레히트 뒤러는 유럽이 중세와 르네상스를 이행하는 15-16세기 전환기에 살았다. 독일로 이민 온 금속장인의 헝거리 2세 출신일 지언정 뒤러는 정신적인 면에서는 일찌기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접하고 학식을 쌓은 선진적인 사고의 지성인이었으며, 미술면에서는 북이탈리아에서 만난 만테냐(Andrea Mategna)와 벨리니(Giovanni Bellini)로부터 영향을 받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를 이상적인 미술가의 전형으로 본받았다.

오늘날 선진 학문을 하러 외국으로 유학을 가듯, 뒤러는 당시 르네상스 미술의 발상지 이탈리아로 두 차례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원근법과 비례법을 배워 온 신문물의 전달자이기도 했다.

뒤러가 최우상으로 삼았던 미술가이자 정신적 스승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뒤러는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력을 스케치 습작으로 옮기는 버릇, 시대를 앞서간 창조적 발상력을 발휘했다.

일찌기 뒤러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의 천재성을 자각하고 13세의 나이로 처음 자화상을 그려낸 조숙성을 발휘했다. 당시 화가들이 생각지도 않던 화가 스스로의 모습 그리기를 최초로 시작한 이른바 자화상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북구 유럽 미술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화가의 자화상 연구가 뒤러의 자화상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테다. 게다가 당시 화가들이 소수의 귀족 후원자들의 주문에 의존해 작품을 제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자기가 제작한 판화 그림을 대량 생산해 직접 시장에 내다 판 그의 획기적인 비스니스맨쉽은 ‚미술은 비즈니스다’라고 떵떵댔던 팝아트의 큰아버지 앤디 워홀 (Andy Warhol)보다 500년이나 앞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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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들토끼 수채화 1502년작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소장. Photo courtesy : Albertina, Vienna.

뉘렘베르크의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버지 (Albrecht Dürer the Elder)는 1455년 헝거리에서 독일 뉘렘베르크로 이민 온 금세공 장인이었다. 슬하 18명의 자녀들 가운데 세째로 태어난 화가 뒤러는 어려서 부터 금세공 공방에서 목판과 금속판 세공 기술을 배웠다. 목금속 판화가 뒤러가 최고로 자랑하는 쟝르로 자리잡게 된 것도 이 어린시절부터 쌓은 공방 수련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독일 민담과 전설에 등장하는 마녀, 괴물, 성인의 모험담을 묘사한 소형  판화 그림에서부터 판화작으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 (The Triumphal Arch for Emperor Maximilian I)』(1559년)을 바라보자면 한치의 헛된 공간이나 미숙함없이 실행시킨 그 치밀완벽한 화면 구성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사업수완까지 갖춘 금속 세공 장인이자  명인 제도공
뒤러는 남북을 가를 것 없이 전유럽을 통틀어 최고 기량을 자랑하는 판화가 겸  제도공이다. 완성된 500여년이 지난 지금, 수차례의 재난, 전쟁, 도난 사건을 뒤로한 채 전세계 유명 소장처와 미술관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뒤러의 회화작품 수60여점, 목금속 판화작 수 350여점과 드로잉 970여점 가량. 뒤러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시대에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교회당과 귀족 저택의 실내 장식용도로 쓰일 회회가 미술 쟝르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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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 목판화. 알베르티나 소장 Photo: Albertina, Vienna.

여간해서 자국 이탈리아 출신이 아니면 칭찬에 인색했던 16세기 르네상스 미술 평론가 죠르죠 바자리 (Giorgio Vasari)도 풍부한 상상력과 판타지를 한껏 발휘한 뒤러의 기량을 칭찬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뒤러가 베니스를 여행하던 동안 베니스인들은 그의 재능이 혹 그렇지 않아도 뛰어난 재능꾼들이 넘치는 이탈리아에서 뒤러의 존재로 인해 화가들 간의 경쟁이 더 심해지지나 않을까를 못내 겁내기도 했다지 않는가.

1506년 베네치아에서 머물던 뒤러가 절친한 친구 피르크하이머 (Willibald Pirckhei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태양 아래에서 떵떵거리고 있다네. 내 나라는 나를 기생충 취급을 하지만 여기서 나는 거장 취급을 받고 있다구“라며 좋아했다. 공방 장인 취급을 받아오던 뒤러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남다른 천재성을 지닌 창조자’로 특권적인 사회적인 대접을 받았으니 그가 느꼈을 뿌듯한 기분은 능히 짐작이 된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는 그도 초상화 [그림:막시밀리안 1세 황제], 자화상 [28세때 자화상, 본문 맨 위의 그림], 교회나 성소의 제단을 장식하는 종교화 [성처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 주문에 응해 회화 제작도 했으며 그 방면에서도 그의 다재다능했던 기량은 우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뒤러는 막시밀리안 1세 오스트리아 황제의 황실 미술가로서의 영광도 얻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대를 이어 오스트리아를 유럽 대륙의 지배강대국으로 계승하려던 야심의 소유자. 총 195점의 목판에 일일이 조각된 총천연색 판화 인쇄본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과 『위대한 개선 열차』 판화/ 수채화 시리즈는 황실의 자존심을 있는대로 드높여주고 그의 정권을 영광화하는데 성공했다. 뒤러가 구사했던 그리스로마 고대 부흥 미술이 지닌 화려한 장식성과 위풍당당 양식은 신성로마제국 황실과 귀족들의 취향에 안성마춤이었기 때문이다.

일화에 따르면 „회화는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오래걸리지만 보수가 좋지 못해“라고 뒤러는 곧잘 불평했다고 한다. 실은 그는 회화 그리기 보다는 드로잉과 판화일을 훨씬 더 좋아했다. 실제로 뒤러의 전시회를 둘러보자면 회화 작품 보다는 정교한 손재주와 치밀한 화면 구성력이 돋보이는 판화와 드로잉 작품들에 더 매력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드로잉, 스케치, 목금속판 판화는 회화 제작 준비를 위한 습작에서부터 착상이나 끄적거리기에 이르기까지 더할나위 없는 창조적 즐거움과 영감을 안겨줬다고 한다. 미술사학자 곰브리히의 말대로라면 뒤러가 그토록 즐겼던 „끄적거리기는 명인적 기량과 휴식을 한데 결합한 행위“였음이다 [from E.H. Gombrich, The Uses of Image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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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황제 초상 목판에 유화1519년작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Photo: Kunsthistorischesmuseum, Wien.

드로잉과 판화의 장점은 그 뿐만이 아니다. 특히 판화는 판목이나 동판 한 장으로 똑같은 작품을 무한수로 대량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일반 고객을 상대로한 대량 판매가 가능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원하는대로 재디자인하거나 책으로 묶어 출판할 수 있으며 아예 판목과 동판 자체를 내다 팔 수도 있다. 웬만한 대작 회화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조수를 부려가며 반복수정 작업을 거쳐야했던 화가들과는 다르게 뒤러는 그 솜씨좋은 손으로 펜, 끌, 조각칼을 놀려서 스케치, 목금속판 파기, 인쇄에 이르는 제작 전과정을 손수 혼자서 했다.

뒤러는 대량 인쇄 매체로서의 판화를 재발견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의 판화작품에마다 일일이 새겨져 있는 AD 모노그램 (화가의 이름 알파벳 첫 글자인 A와 D를 따서 만든 결합문자로)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 상표 (trademark)나 로고 (logo)와 그 개념이 통하는데가 많다. 그는 자신의 판화 판매 촉진을 위해서 자기 PR에 적극적이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AD 모노그램이 무단복제로 남용될 것을 우려해 법정에 저작권 보호를 요청하기도 한 저작권법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전쟁, 화재, 소실 등을 거친 오랜 역사끝에 오늘날 과연 뒤러가 생전 제작했던 회화며 드로잉, 판화 작품들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될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근 400점의 회화 및 드로잉, 판화작마다 AD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다는 점과, 생전 화가가 자신의 수중에 있던 작품들을 철저히 수집 관리했으며 정확한 제작 시기와 설명문까지 곁들여 보관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뒤러는 분명 자신의 천재성과 작품이 후대에 전해져 영향력을 미칠것을 의식했던 것 같다. 실제로 그의 드로잉 인쇄본과 복사본들은 훗날 매너리즘,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이 선배 대가 뒤러의 놀라운 기법과 구도를 배우고 본따는데 사용한 표본서로써 그 구실을 톡톡이 했다.

뒤러는 통속미술가?
혹자는 뒤러의 판화와 드로잉 작품들을 일컬어 통속적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판화들을 일반 대중을 상대로 시장에 내다 팔 용도로 대량 인쇄했다. 성서 묵시록을 환상적인 장면으로  해석한 이미지들을 비롯해서 이탈리아에서 배워온 고전 누드상과 이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따온 모티프들는 뒤러가 즐겨 다룬 주제들이다. 여기에 르네상스 비례법과  원근법은 고딕시대 독일인들이 전에 보지 못한 사실성과 감각적 역동성을 표현해 안성마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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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처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 1498년경작. Samuel H. Kress Collection,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Photo courtesy: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나타날 법한 괴물들, 근육질의 육중한 남자인물상과 여성상들이 생동감있는 묘사된 판화작품들이 고대 이교 신화의 한 장면을 도식화한 알레고리일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그같은 작품들은 사실 고딕 후기 독일인들의 사고방식에 널리 깔려있던 중세적 미신 세계와 뒤러의 머리 속에서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친 판다지의 융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풍우, 결투, 납치, 강간의 장면이 담긴 판타지 판화들은 곧잘 에로틱함과 격정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효과를 자아내곤 한다. 15-16세기 독일인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기독교 신앙, 미덕, 공포감의 표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명한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의 설명처럼, 당시 후기 고딕시대의 독일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 미술이 아직 전파되지 못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르네상스적 형식과 북부 독일의 고딕적 내용이 혼재되어 나타난게다 [Erwin Panofsky, Meaning in the Visual Arts,1974].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 이론과 독일의 정신 세계의 결합 – 두 말할 것 없이 뒤러는 그래서 그 둘을 잘 버무린 훌륭한 절충주의의 명인이기도 했다.

자화상 – 천재와 자기망상증
독어권 문화를 포함한 북유럽에서 자화상이라는 미술 쟝르는 유난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50년 전에 살았던 화가 제도공 알브레히트 뒤러가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을까 알길이 없었을게다. 공방 기술자에서 창조적인 개인으로서의 의식적 자각을 자화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되는 뒤러의 자화상이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중세 교회 조각가들과 장인들은 건축물이나 작품 한구석에 숨은 그림찾기처럼 그들의 얼굴을 새겨 넣는 관행을 즐겼다. 뒤러는 여기서 한 발짝 더떼어, 이미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은필 소묘로  『13세때의 자화상』(1484년)을 그려 그 빼어난 손재주로 스스로를 여린 피부와 바스라질 듯한 유년의 미의 소유자로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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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자화상』 1450-55년작, 검정색 잉크로 붓과 펜으로 제작. Stiftung Weimarer Klassik und Kunstsammlungen 소장 Photo courtesy: Stiftung Weimarer Klassik und Kunstsammlungen, Schlossmuseum, Graphische Sammlung, Weimar.

그는 나중에 22세 나던해에 이 그림을 자신의 약혼녀 아그네스에게 주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가 28세 나던 해에 그린 『자화상』(1498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은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뒤러의 자화상 회화작품일 것이다. 뒤러는 스스로를 이탈리아 여행과  인문적 학식을 겸비한 신사로서 묘사하는 것으로써 더 이상 일개 손재주나 부리는 공방쟁이가 아니라 신이 내려준 창조력과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예술가임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반짝이는 긴 금발 곱슬머리, 현란한 옷차림, 관람객을 향해 직시하는 눈길, 한껏 등을 곧추세운 자신감찬 자세 … 뒤러는 스스로를 젊은 예수가 되살아나 돌아오기나 한듯 카리스마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말년을 치닫던 해인 1522년, 누드의 모습 『누드 자화상』(1450-55)으로 등장한 화가는 ‘멜랑콜리’ 또는 만성적인 우울증 (melancholie)에 시달리는 자신의 건강상태를 호소하기 위해서 의사에게 보낸 설명 그림이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 자리가 아프답니다“ – 이 드로잉에서 뒤러는 한 손가락을 복부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비장이 위치해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비장이 담즙을 지나치게 분비하면 우울증으로 나타난다고 했던 고대 의학 이론에 정통해 있던 뒤러는 이렇게 자가진단을 내렸다. 1528년 57세의 나이로 환각증세와 악몽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뜰 때까지 뒤러는 자신이 앓던 우울증세를 천재성 때문이라고 여기면서 고통받는 예수의 도상을 빌은 자화상 소묘를 지속해 그렸다고 알려진다.

알베르티나로 『들토끼』와 『기도하는 손』 보러가기
관람객들은 그들이 보고 배워서 알고 있는 작품을 진품으로 확인하기 위해 미술전시회를 찾곤 한다. 『들토끼』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뒤러 작품들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 이번 전시기간 동안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개별적인 『들토끼』 관람 경험을 원하는 관객들을 위해서 전화로 특수 관람 예약까지 접수받는 행사까지 병행하면서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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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손』, 1508년작 빈 알베르티나 소장. Photo: Albertina, Vienna.

자연 숭배자이기도 했던 뒤러는 『들토끼』 외에도 수많은 풍경화와 동물화를 수채화로 그려서 자연의 그 천연의 아름다움과 비례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아내 아그네스 프라이 (Agnes Frey)와 결혼한 해인 1494년,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 도중 들른 남부 티롤 지방과 인스브룩 성을 수채화로 담아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늘 머리와 가슴 속에 기억하고 있는 『기도하는 손』 스케치는 팔이나 어깨 등 다른 신체부위가 일체 제거된채 한데 모은 두 손만이 공중에 떠 있는 특유의 이미지 때문에 보는이에게 유난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 모양대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그 또한 오해이다. 『기도하는 손』은 본래 프랑크푸르트의 한 돈 많은 미술후원자 야콥 헬러 (Jacob Heller)의 주문을 받아 그린 교회제단장식용으로 쓰일 그림 예비 스케치 18점중 하나였다. 뒤러는 헬러가 재료비와 수고비 지급에 인색하다는 이유로 떠들썩한 말타툼을 벌인 끝에 결국 이 프로젝트를 포기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고 그의 『기도하는 손』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완성작의 하나로 남아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컬렉션 뒤러의 그래픽 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알베르티나 미술관과 알브레히트 뒤러 사이의 역사는 남다르다. 작센-테셴 공국의 알베르트 황태자 부부 (합스부르크 제국 17세기 마리아-테레지아 여왕의 아들 부부)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물려받은 뒤러의 드로잉 및 수채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던 이 컬렉션은 20세기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다수 유실되거나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제3제국 시절 나치 지도자 히틀러는 뒤러를 깊이 흠모해서 뒤러의 그래픽 작품 20여점을 훔쳐 자신의 개인 미술 컬렉션 보관함에 몰래 숨겨두기도 했다.

현재는 『들토끼』 『기도하는 손』 『인스브룩 거리』 수채화 등 140여 점의 핵심 드로잉과 수채화와 판화 전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 1971년 뒤러의 500회 생일을 기념해 올려졌던 전시후, 올 [2003년] 가을 빈에서 열리는 뒤러 컬렉션전은 가장 규모가 큰 종합전이어서 일반인들이 뒤러의 진작들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되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전은 5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계속된다.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 지 2003년 10월호 Art News 연재 컬럼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한 사업가로부터 듣는 미술 컬렉터 되는 법

ART COLLECTING

아트 컬렉션을 향해 바치는 한 성공 사업가의 평생 열정

하나은행 트랜스트랜드 (Transtrend) 지 2001년 가을호 기사 첫 페이지. [이 기사에 등장하는 그 어떤 실제 인물과 무관함]

하나은행 트랜스트랜드 (Transtrend) 지 2003년 가을호 기사 첫 페이지. [이 기사에 등장하는 그 어떤 실제 인물과 무관함]

왜 미술작품을 수집하시나요?
 미술 컬렉터들을 만나면 의례 ‚왜 미술작품을 수집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이면 백 의례 ‚그냥 미술이 좋아서’라고 대답을 합니다. 대답이 그러할지는 웬만큼 알만한 질문자라면 능히 미리 짐작을 할만도 합니다만, 되반복해 던지게 되는 단골 질문이자 대화를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단골 화두이기도 하지요.

경우는 이번 만나본 칼하인츠 에슬과 아그네스 에슬 부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수집해 온 미술작품들을 모아 미술관을 열어 운영할 것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미술가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어가는 동안 맘에 드는 작품들을 사 모으다보니 어느새 컬렉션의 규모가 커져 있더군요.“ 라고 차분하고 나트막한 미성의 소유자 칼-하인츠 에슬 관장은 그 특유의 겸손함으로 대답합니다.

„돈을 헛되게 낭비하거나 변덕스러운 소비에 내맡기지 말며 개인적인 부와 소유물을 여럿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삽니다.“라고 말하는 칼-하인츠 에슬 관장은 남이 시키지 않은 청교도적 공리(公利) 의식에도 민감한 인물입니다. 비엔나 미술계에서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프로테스탄트교 신앙(카톨릭 구교가 지배적인 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는 특이한 경우)을 배경으로 성장한 두 부부에게서는 여지없이 근면검소가 배어있는 옷매무새와 허식없는 자태가 풍겨나옵니다.

칼하인츠 에슬과 아그네스 에슬 부부(Agnes and Karl-Heinz Essl)는 오스트리아에서는 현대미술 분야에 한한 가장 방대한 규모의 미술작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개인 미술소장자들입니다. 역사를 더듬어보자면 오스트리아에서 부부 미술 컬렉터의 선례는 이미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장부 마리아-테레지아 (Maria-Theresia) 여왕의 아들이자 독일 작센-테셴 (Sachsen-Teschen) 지방의 군주이기도 했던 알베르트와 마리-크리스티네 공작 (Duke Albert & Marie-Christine) 부부는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는 부부 미술 컬렉터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들이 평생에 걸쳐 수집했던 서양 고전 미술품들 가운데 독일 르네상스의 대가인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의 그래픽 작품 전작 컬렉션은 오늘날 비엔나에 자리해 있는 알베르티나 컬렉션 미술관 (Albertina Collection)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이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 유산의 크나큰 자산이자 자부심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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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룽 에쓸 쿤스트하우스 2층 전시장 광경. © 2000 Photo by C. Richters.

잠룽 에슬은 현대미술을 위한 집입니다. 
1999년 11월 5일, 에슬 부부는 잠룽 에슬- 현대미술 (Sammlung Essl – Kunst der Gegenwart)이라는 개인 미술관 건물을 짓고 두 부부가 지난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모아 온 미술 작품 컬렉션을 대중에게 처음 공개했습니다. 『에슬 컬렉션 – 최초 공개 (The Essl Collection: The First View)』 展이라는 제목을 달고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 큐레이터 루디 푹스 (Rudi Fuchs, 前 네덜란드 암스텔담 스테델릭 미술관 관장)의 기획으로 부쳐진 전시였습니다.

흔히들 오스트리아 미술하면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에곤 실레(Egon Schiele), 또는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를 떠올리는 것이 고작인 현실 속에서 오스트리아적 특유의 감수성과 미적 전통을 간직한 에슬의 미술 소장품을 활용해 전시로 기획 공개하는 일은 적잖이 고무적인 사건이었다고 푹스 큐레이터는 이 첫 전시 서두에서 고백하기도 했었습니다.

20세기초 파리를 비롯한 여타 유럽의 미술 중심도시들과는 대조적으로 비엔나에서는 인상주의 (Impressionism) 사조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할 정도록 미미했습니다. 그대신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실레, 코코슈카,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 같은 표현주의 (Expressionism) 계열의 회화 사조가 두드러지게 전개되었고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각광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같은 전통은 이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전개된 오스트리아 앵포르맬 (Austrian Informel)과 행위주의 (Aktionismus) 계열 미술로 이어져서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굳건히 계승해 오고 있습니다.

이곳 오스트리아에서 이름하듯 잠룽 에슬(에슬 컬렉션이라는 의미)은 우리말로는 에슬 현대 미술관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였던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Adorno)가 지적했던 것처럼 „박/미물관(musuem)이란 과거를 보존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엄밀히 정의해 보건대, 박물관학/미술관학에서 미술관이란 역사적 시간과 학문적 검증을 거쳐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유물 (artifacts)이나 미술 작품 (works of art)을 보관하고 보존 및 복원 책임을 지며 학술적 연구를 위한 자료제공처 역할을 하는 미술품 대(大)보관창고를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미술관이라는 어휘는 어느 누군가 지적했던 것처럼 ‚미술품이 최종 도달하는 무덤’같다는 인상을 주는게 사실이지요.

반면, 현대-동시대 미술 (contemporary art)이란 고전기 미술과 근대 미술과는 달리 생존 미술작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전시 활동을 펼쳐 가며 미술사학적인 가치평가와 검증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지요. 결국 현대 미술은 ,계속 진행중에 있는 (on-going) 미술’이니만큼 미술관이라는 막다른 제도적 울타리에 보다는 전시장 (exhibition hall) 또는 쿤스트할레 (Kunsthalle)와 같이 현장감 느껴지는 공간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에슬 부부는 그들의 미술관을 ‚미술의 위한 집 (A House for Art)’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어휘 즉, 쿤스트하우스 (Kunsthaus)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고집합니다.

한 아트 컬렉터 부부의 작지만 큰 출발 
사실 이 잠룽 에슬 현대미술관이 에슬 관장의 이름을 달고 개관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은 오스트리아에서 제일 돈많은 갑부 사업가중 한 사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미술 컬렉터 칼하인츠와 아그네스 에슬 부부 Photo: Frank Garzarolli © Sammlung Essl Privatstiftung, 2009.

미술 컬렉터 칼하인츠와 아그네스 에슬 부부 Photo: Frank Garzarolli © Sammlung Essl Privatstiftung, 2009.

현재 그가 소유주 겸 최고경영인으로 운영하고 있는 회사는 바우막스 (Baumax)라는 전문 건축 자재 및 DIY 건축 주택 자재품 제조판매 업체로서,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중유럽권은 물론 동유럽권 시장에 117개 대형 체인점을 두고 있는 유럽 주택 개량 엄계의 선두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업계 재벌로 유명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꿈꿔 왔던 것처럼 지금은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칼-하인츠 에슬. 실은 그도 1970년대 동안 10여년 넘게 직장일로 바쁜 일과를 쪼개 틈틈이 짬을 내어 드로잉과 유화 수업을 받아가며 습작 활동을 했던 적 있는 그 자신 아마츄어 미술가였다고 합니다. 아내 아그네스의 경우처럼 미술을 좋아하시던 양친 덕택에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들고 집안 구석구석마다 온갖 일상 수집품들과 골동품들이 팔꿈치와 소매를 스치는 분위기에서 자랐던 것이 미술과 맺게된 오랜 인연의 출발이 되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에슬 관장은 „내 못말리는 수집병은 우리 집안 대대로 물려 받은 유전자 속에 숨쉬고 있는가 봅니다“라고 덧붙이면서 그 특유의 수줍은듯 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흔히 오스트리아인들은 그 어느 다른 나라 국민들과도 견줘도 뒤지지않을 왕성한 수집가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미술품 수집을 향한 집착욕을 순순히 시인하는 에슬 관장도 여지없는 오스트리아인인 셈이지요.

1950년대 말엽에 결혼한 에슬 부부는 1년여 동안 미국에서 지낼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아내 아그네스가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일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였지요. 아들 칼-하인츠 2세를 잉태하기전인 신혼기까지만해도 아내는 미술계에서 일하고 싶어하던 야망찬 커리어 우먼이었지요.“ 이 젊은 두 부부에게 뉴욕에서의 달콤한 밀월기가 50년대 뉴욕 미술계의 창조적 폭발력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목도할 수 있었던 일생의 전환기가 될 줄을 누구 알았을까.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을 위시로 해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던 당시 뉴욕 미술계를 보고 우리 둘은 흥분을 금치 못했지요. 그 전까지만해도 미술사에서 그만큼 파격적인 미술 운동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들은 특히 당시 뉴욕에서 전성기를 맞으며 전개되고 있던 전후 추상표현주의 계열 회화운동에 깊이 감명받았다고 합니다.그리고 그들은 과연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당시 현대 미술 조류와 대등히 견줄만한 당대 오스트리아의 자체적인 미술 사조는 무엇일까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이 분수령적인 계기가 되어 에슬 부부는 오스트리아로 귀국한 후 1960년대초부터 차츰 오스트리아 출신의 현대 화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모으자는 결심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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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쓸 컬렉션 쿤스트하우스 외관 야경. © 2000 Ali Schafler.

미술품 수집은 돈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취미 생활?
 자고로 미술 컬렉팅을 한다하면 흔히 ‚돈많고 눈이 높은 사람들이나 하는 취미 생활’이라고들 생각을 합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투가가치라는 이윤추구적 목적과 혁신적인 기업 이미지 및 홍보효과를 앞세워 미술 컬렉팅을 하는 기업기관들이 많아진 요즘같은 현실에서 미술 컬렉팅과 돈은 뗄레야 뗄수 없는 운명적 관계로 얽혀 있음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돈많고 유명한 사람들 중에는 현대미술 소장가들이 꽤 많습니다. 일례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게펜 레코드 사의 제프리 게펜, 영국의 광고 거물 찰스 사치가 아주 대표적이며, 연예계의 여왕벌 마돈나도 현대미술의 열렬한 팬이어서 벌어들이는 수입중 상당을 유명 미술작가들의 작품 구매에 쓴다고 하는 소식은 국제 미술 시장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미술 컬렉팅이란 아름다움을 수집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고 유지하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지적했던 것처럼 예술적 사물 (cultural objects)은 나와 타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을 구분시켜주는 차별화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도 ‚문화적 자본 (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들어 미술을 소유하고 보존해서 후손에서 대를 물리는 서구 전통적 행위는 아름다움과 미술 작품을 매개로 한 상류 엘리트들의 세력 대물림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미술 후원가 메디치 (Medici) 가족도 바로 그렇게 해서 도나텔로 (Donatello),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라파엘로 (Raffaelo) 같은 거장들을 발굴 후원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 발전에 막강한 기여를 했지 않습니까.

물론 미술 작품 컬렉팅이란 돈이 없이는 여간해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돈만으로 만사해결되는 간단한 취미 활동만은 아닙니다. 미술 컬렉팅이란 화랑계, 미술가 공동체, 국공사립 미술 기관이난 단체를 좌지우지하는 미술계 인사이더들과 친분 관계를 형성하고 지속적인 정보 교환을 요하는 사교 활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히 국제 미술계 사조와 맥을 같이 할만한 오스트리아 미술가와 미술 작품을 물색해야 했던 두 부부는 현대 오스트리아 미술품 수집은 곧 당시 오스트리아 미술계와의 인맥 형성과 연계가 매우 중요함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후반기 동안, 비엔나의 화랑가와 미술계는 사회민주주의 정권의 후한 재정지원과 국가주도식의 미술계 육성 정책으로 인해서 사설 화랑간이나 개인 컬렉터간의 치열한 경쟁 체제나 독자적 자생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합니다. 그 결과 비엔나 미술계와 화랑계는 소규모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아는 얼굴 빤한 공동체여서 이곳 미술계 내부 분위기는 흡사 제2차 대전이 막 끝난 뉴욕 어퍼이스트 거리상에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던 초기 뉴욕 화랑가와도 제법 흡사한 데가 많습니다.

제대로 된 미술 컬렉팅은 제대로 된 미술사의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1960년대 오스트리아의 미술계, 특히 수도 비엔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비엔나 미술계는 한창 비엔나 행위주의 (Wiener Aktionismus) 운동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제2차 대전 독일의 패망을 끝으로 정치경제적 혼란과 불안정의 분위기가 대기에 가득했던 1940년대 말엽,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는 타부와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며 이를 드로잉과 회화 작품으로 표출하여 선배 오스트리아 출신 표현주의 화가인 실레의 회화 정신을 한층 극단적인 경지로 밀어붙인 화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엽 등장한 비엔나 행위주의자 헤르만 니치 (Hermann Nitsch)와 이후 1960년대 뒤따라 등장한 귄터 브루스 (Günter Brus), 오토 뮐 (Otto Muehl), 발터 피힐러 (Walter Pichler) 등과 최근 각광받고 있는 프란츠 베스트 (Franz West)는 바로 이 비엔나 행위주의 전통 선상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미술인들입니다. 이 시기 비엔나 행위주의 운동은 오늘날 비엔나 미술전문가들과 화랑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1960년대말 미국에서 전개된 행위주의 미술과 신체 미술은 물론 가장 최근 주목받고 있는 폴 매카시 (Paul McCarthy)와 최근 영국의 데미언 허스트 (Damien Hirst)의 미술에까지 영감적 원천이 되어 준 선구적인 미술 사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후 1920-30년대 동안 비엔나 미술계에서 벌어졌던 미술 운동은 국제 현대 미술사 전개 발전과 분명 그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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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 『Georg Baselitz – Werke von 1968 bis 2012 』 전에 기하여 기자회견(2013년 1월17일)에 참석하여 연설중인 독일의 화가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모습. Essl Museum, Klosterneuburg bei Wien. Photo © Essl Museum.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에슬 부부의 현대 미술 컬렉션은 1945년 이후로 등장한 이른바 ‚전후 오스트리아 현대 회화’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건축계에서 20세기 중엽까지도 예술성 찬반논쟁에 휘말려 있던 일명 ‚사기꾼 건축가’ 프리든스라이히 훈더트바서 (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그림을 사들이는 것을 출발삼아 두 부부는 미술 컬렉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초, 개인적인 인연으로 알게 된 화가 쿠르트 몰도반 (Kurt Moldovan)의 아텔리에 처음 초대받게 되면서 그들의 미술 컬렉션이 취해야 할 구체적인 방향성을 구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인연을 실마리로 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현대 미술의 개척자 아르눌프 라이너를 비롯한 당대 주요 화가들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지요. 때마침 칼-하인츠 에슬은 아내 아그네스의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1975년 장인이 소유하고 있던 기업체를 통채로 이어받으면서 전에 없이 큰 몫의 기업자금을 책임지게 되었고, 이참에 그 전보다 훨씬 큰 기업 수익금 일부를 미술 작품 구입과 컬렉션 부풀리기에 할애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술가들과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일는 미술작품을 소유하는 것 만큼 중요합니다. 
미술품 구입은 어떤 통로와 방식으로 하느냐라는 질문에 에슬 관장은 대체로 미술가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출발로 해서 미술가-컬렉터 간의 신뢰를 쌓아가는 방법을 이용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사설 화랑이나 미술계 인사들과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전시회 오프닝식 등에 참여해 가면서 미술가들을 소개받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하지만, 우리는 우선 마음에 드는 작품을 점찍은 후 그 작가를 사적으로 접촉한 다음 그들의 아텔리에를 방문하고 친분을 구축해 나가는 편을 선호합니다. 화랑주인들의 상업적인 이해관계나 미술시장이 가하는 상업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점 때문입니다.

„화가들에 따라서는 접촉과 친분 형성이 비교적 쉬운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매우 까다롭고 장기간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 소장 작가인 스페인 화가 안토니 타피에스 (Antoni Tàpies)의 경우, 처음 연락을 취해서 서로 직접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그의 아텔리에로 초대받기까지 3년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맘에 두고 있는 화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때로는 참을성과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인내력이 필요하지요 …”



내 컬렉션은 미술가들로부터 얻은 영감을 미술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는 공간 
„ … 하지만 미술가들과의 만남과 관계 형성 과정이 어떠했으며 얼마나 수월하거나 힘겨웠든지 상관없이 그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보람있고 즐겁습니다. 미술인들은 저마다 깊고 넓은 사유 (思諭)와 다독 (多讀)을 하는 개성적인 창조인들이지요.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보면 일로 지쳤던 나의 몸과 마음에 영감과 에너지를 보충받곤 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사람이란 나이와 경험을 불문하고 끊임없이 배우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라고 에슬 관장은 덧붙이면서 16쪽짜리 미술관 행사 일정표를 건네줍니다.

그가 유독 에슬 현대 미술관 운영에서 일반 관객과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저녁 프로그램과 교육 행사 프로그램에 예산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 자신의 경험을 미술관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시공립 예산으로 운영되는 국가소유 박물관과 미술관들의 경우, 한정된 예산이나 충분치 못한 고용 인력을 이유로 해서 전시 이외의 부대 행사와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충분히 기획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슬 컬렉션은 사설 기관이기 때문에 정부 기관이나 상위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관장인 내가 원하는대로 예산을 배분하고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독자적으로 기획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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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룽 에쓸 쿤스트하우스 외관 모습. © 2000 Photo by C. Richters.

실제로 에슬 컬렉션 현대 미술관은 교육중심의 미술관임을 자랑하고 있어서, 교육 프로그램만을 담당하고 있는 전문 인력만 12명을 별도로 고용해 주별 및 월별 특별 교육 행사를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운좋은 날이면 미술관 교육 담당 직원들 외에도 에슬 부부가 직접 관객들과 만나 특별 강연 및 안내 행사를 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에슬 관장은 매분기마다 미술 관계자들과 언론기자들을 초대해서 에슬 컬렉션의 신구매 작품 목록과 미술관 운영 예산을 공개하는 등 적극적인 PR 전략을 구사해 오고 있기도 합니다.

미술품 구매 선정은 직접하고 관리와 전시 기획과 컬렉션 관리는 큐레이터가 
,1970-80년대 약 20년 동안 주력해 수집해 온 오스트리아 현대 미술에서 시야를 넓혀서 1990년대부터는 미국, 독일, 북구 유럽,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해외 현대 미술작품 컬렉션 부풀리기에 한창이던 에슬 부부는 1990년 중엽, 갑자기 4천여 점에 이르는 크고 작은 규모의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느날 미술품 창고를 둘러보다가 많은 작품들이 창고 한구석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곁에 걸어두고 보려고 산 그림들인데 창고에서 먼지에 묻혀가는 그림들을 보고는 이래서는 안돼겠다 싶더군요.“ 이렇게 해서 에슬 부부는 1995년 에슬 컬렉션 재단 (Sammlung Essl Privatstiftung)을 발족해 가브리엘레 뵈쉬 (Gabriele Bösch) 컬렉션 큐레이터의 책임하에 컬렉션을 관리해 오고 있습니다. [2013년 현재 안드레아스 호퍼(Andreas Hoffer) 선임 큐레이터]

에슬 컬렉션 현대 미술관은 대체로 일년에 4-5차례의 특별 기획전시를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 중 1-2회는 자문위원으로 있는 루디 푹스나 하랄트 제만 (Harald Szeemann) 같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거물급 큐레이터들을 초청해 새로운 주제로 외부 미술관으로부터 작품을 대여해와 전시하는 특별전시가 차지하며, 나머지 2-3회는 이미 에슬 컬렉션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들을 이용해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는 컬렉션 위주의 전시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푹스와 제만 같은 이른바 스타 큐레이터들과 빌란트 슈미트 (Wieland Schmied) 같은 미술사학자들을 자문위원으로 두고 있는 에슬 컬렉션 재단에서 자문위원들의 역할과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얼마만큼 되는가라는 질문에 „자문위원들은 주로 특별 전시 기획일을 하며 실질적인 미술품 구매와 관련한 정보수집과 의사 결정은 나와 아내 둘이서 합니다“ 라고 에슬 관장은 대답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해외 여행을 자주 하게 되는데 그럴때마다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화랑들을 둘러 보며 우리의 취향과 컬렉션에 적합하다 싶을 미술작품과 작가들을 선정하곤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의 미술 컬렉터들을 한자리에서 만나고 친분을 다질 수 있는 국제 아트 컬렉터 협회 모임 등에도 틈틈히 참여하여 정보교환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나직이 귀띰합니다.

미술 컬렉션에 관심있는 여러분께
세상에 어느 누구라도 비판으로부터 면역받은자 없는 법이지요. 에슬 부부의 미술 컬렉션 역시 비엔나 미술계 인사이더들과 언론의 비판과 지적을 면할 수는 없어서 미술관 건립 전까지만해도 그들의 컬렉션은 ‚미술가의 경륜이나 양식을 분별않고 잡다하게 모은 두서없는 마구잡이 수집물’이며 따라서 ‚개성이나 일관성없는 컬렉션에 불과’하다는 놀림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슬 관장은 그같은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는듯 합니다. „나는 한 번 관심을 뒀던 미술가는 지속적으로 작업의 수준과 양식을 관찰합니다. 대체로 한 작가당 5-6점의 작품을 시리즈 식으로 구입을 하되 서로 시기적으로나 양식적으로 연관성이 있는 작품들만을 사지요. 한 번 관심을 두었던 작가라해도 작품의 경향이나 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구입을 멈추고 더 관찰을 합니다“라며 에슬 관장을 자신의 미술품 구매 철학을 피력합니다.

„미술품 컬렉션을 시작하려면 우선 미술을 좋아하고 미술에 대한 열정을 지니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미술을 단순한 투자 가치나 매매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 미술 컬렉터들은 다소 한정된 지갑 사정 때문에 미술 작품을 투자 및 매매 가치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더군요. 돈의 여유가 없었던 젊은 시절 나는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그래픽 작품이나 수채화를 사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

“… 그러나 미술 작품의 가격대가 높든 낮든 미술품 컬렉션을 구축하기 위한 중요선결 요건은 미술 작품을 보고 좋은 작품을 선별할 줄 아는 눈 (eye) 즉, 감식안 (鑑識眼)을 키우는 일“이라고 합니다. „감식안을 갖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미술관이나 화랑을 다니면서 실물 미술품을 보고 독서를 통해서 미술사의 흐름과 이해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으로, 진지한 미술 컬렉터가 되길 꿈꾸는 이라면 누구라도 꼭 기억해야 할 사항: “화랑업자들의 상술이나 작가의 유명세에 휩쓸려 마구잡이로 작품을 사들일게 아니라 컬렉터의 개인적인 감식안과 취향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도록 분명한 방향성과 내적 일관성이 있는 컬렉션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에슬 관장은 당부합니다.

에슬 컬렉션 전시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는 행정구역상 비엔나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비엔나-니더외스터라이히주(州) 경계에 있는 소도시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로 비엔나 도심에서 고속 기차나 시외버스를 타고 15분 가량의 여행으로 닿을수 있는 거리입니다.

때문에 비엔나 도심 국립 미술관들이나 무지움스쿼르티에 (MuseumsQuartier) 시립 미술관 대단지(2001년 가을 개관)에 비하면 주중 관광객과 방문객의 발걸음이 상대적으로 뜸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말이면 도나우강을 끼고 펼쳐져 있는 숲과 맑은 공기를 만끽하며 자동차와 자전거로 에슬 컬렉션 현대미술관을 찾는 연인들과 가족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특히 사교 활동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과 성인 관객들을 위해 이 미술관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이후를 무료입장 시간으로 정해서 성인 관객들과 가족들에게 미술관 건물 내외부 공간을 무료의 향취있는 공간으로 제공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에슬 부부의 쿤스트하우스인 잠룽 에슬은 단지 과거의 미술 작품만이 모여 있는 창고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서로 어깨를 겨누며 살아 숨쉬고 있는 미술의 집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본래 하나은행 발행 문화 계간지 『Transtrend』 誌 2003년 가을호에 출판되었던 글임을 밝혀 둡니다.

20세기 노동의 세계

CULTURE OF WORK

근현대 사회 속에서 노동의 의미와 이미지를 사진으로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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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re Rodtchenko, 『톱니바퀴』, fabrica AMO, 1930년. Colleccio Maison de la Photographie de Moscou (c) Archives A. Rodtchenko et V. Stepanova.

인간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죄악의 과일을 맛보면서 평생 노동이라는 고역을 한평생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었다고 성경의 창세기는 이른다.

낙원에서 쫏겨난 아담과 이브의 후예들은 생존을 위해 필히 일을 해야 했고 인간의 역사가 발달을 거듭해 감에 따라 인간이 종사하는 일의 종류와 전문성도 복잡다양해져 왔다.

지난 2세기여간 서양 문화는 노동을 기초로 형성되었고 역으로 노동은 문화형성에 기여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는 ‘노동의 문화’ 전시가 바르셀로나 문화 센터 (Centre de Cultura Contemporania de Barcelona)에서 [2000년] 9월 17일까지 계속된다.

근현대 사회 속의 인간에게 노동이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형태로 묘사되어 왔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미래 사회에서 노동을 어떤 변화된 형태와 의미를 지니고 등장할 것인가? 전혀 가볍지 않은, 오히려 철할적이기까지 한 이슈를 내걸고 기획된 이번 전시의 출발점은 신화, 공간, 현재와 미래, 미래의 직업세계를 포함하여 총 5개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출발점은 다름아닌 19세기말 산업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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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s Ignatovitch, 『공장 노동자들의 식사시간』, 1920년. (c) Colleccio K. Ignatovitch.

각 주제별 갤러리의 입구에 마다 관람객들을 반기는 조각작품들은 조각가 펩 두란 (Pep Duran), 로케 (Roque), 수자나 솔라노 (Susana Solano), 호안 브로사 (Joan Brossa), 에두아르도 칠리다 (Eduardo Chillida) 등이 노동을 테마로 제작한 것들로써 관객들이 공장, 부두, 사무실 등과 같은 일터 분위기를 느끼면서 관객들이 전시에 자연스럽게 젓어들게끔 유도한다.

산업체제가 고안해 낸 노동의 질서 체계의 대표적인 노동공간은 공장과 사무실. ‘기억의 공간’이라는 타이틀의 갤러리는 그 두 공간의 여러 단면을 사진 이미지들로 숨막히리만치 쉴틈없이 제시한다. 공장은 노동자의 육체를 통제하고 규칙적 노동을 유지하는데 효과적인 노동공간 시설이었다. 파텔라니, 파이닝거, 첸텔레스, 호이서, 로드첸코, 살롬의 사진작품들과 대중선동용 영화와 몽타쥬 이미지에 나타난 공장은 편리한 노동공간임과 동시에 인간 노동력의 무자비한 착취의 산실에 다름아니었다.

공장은 그래서 노동조합 활동, 파업, 시위, 노동협상 등과 같은 새로운 사회관계와 현상의 잉태소가 되었다. 노동을 찾아나서 도시로 도시로 이주하는 노동자들의 이주상을 보여준다. 콜러 (Kollar), 페롤 (Ferrol), 미세락스 (Miserachs), 브론자르드 (Blonzard), 하멘 (Hammen), 리츠만 (Litzman), 쿠아드라다 (Cuadrada), 차이크넷 (Chaiknet), 미쇼 (Michaud)가 포착한 노동자의 이주상은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재촉된 도시화 현상을 암시하고 있다.

시골에서 도시로, 소도시에서 대도시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참으로 노동에 의한 이주의 지리학과 역사는 한 세기를 거치면서 여러 방향과 장소로 번지고 발달했다. 노동을 찾아나서 낯선 곳으로 떠나가는 노동자들의 한결같은 동기는 노동이 부와 생활의 안정을 가져다 줄거라는 막연한 희망과 기대였으리라.

cultures-treball_cover한편 사무실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 (Das Schloss)』에서 묘사된 관료제를 낳은 노동공간으로 현대적 의미의 관리 및 서비스업무 이행처이다.  컴퓨터화, 온라인화로 대변되는 오늘날의 후기산업사회 속에서 사무실의 의미와 중요성은 그 어느때보다도 비중이 커져 버렸다.

노동착취와 노동통제라는 적대적 이해관계에서 도래하기 시작한 노동 제도와 노동자 보호 법안의 현실, 국가와 문화에 따른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사회적 권리와 이해관계를 포착한 소리아노 (Soriano), 몰레렛 (Moleres), 랭 (Lange), 로니스 (Ronis), 드와즈노 (Doisneau) 등의 사진작품들이 이어지면서, 노동사회와 공장체제가 낳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논쟁으로 이끌어간다.

‘현재와 미래의 공간’으로 이름붙여진 갤러리에 들어서면 9개의 비디오 스크린-1개는 시계, 8개는 각 나라의 전형적인 노동자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스크린-이 관객을 맞이한다. 그 한켠으로는 그래프와 통계자료를 제시하여 현대 경제의 세계화와 디지틀 기술로 인한 급격한 노동시장 변화상을 강조하는 설치물을 훑어보면서 관객을 한 숨을 돌릴 여유를 찾을 것이다.

미래의 노동시장과 노동체제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현재를 근거로 미래를 예측한다고는 하지만 간단한 결론을 내리기에 현재는 미지의 요소들과 상충하는 아이디어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가능한한 적은 양의 노동과 최대한의 여가를 즐기고 싶어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은 변치 않은 것이다. 여기에 동조라도 하듯이 이 전시는 휴식과 여가를 주제로한 페르루소프 (Petroussov), 이그나토비치 (Ignatovich), 볼프 (Wolff), 할렌스레벤 (Hallensleben)의 사진들로 마감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전시명: 노동의 문화(Cultures of Work) 전 | 전시장소: 바르셀로나 현대 문화 센터  | 전시기간: 2000년 5월 24일-9월1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