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로서 화가의 자화상 –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ŰRER Portrait of the Artist as an Entrepreneur

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

Dürer's 〈Melencolia I〉 is one of three large prints of 1513–14 known as his Meisterstiche (master engravings). The other two are 〈Knight, Death, and the Devil〉 and 〈Saint Jerome in His Study〉. Though they do not form a series in the strict sense, the prints do correspond to the three kinds of virtue in medieval scholasticism—moral, theological, and intellectual—and they embody the complexity of Dürer's conception. Albrecht Dürer (1471–1528), Melencolia I, 1514. Engraving, 9 1/2 x 7 3/8 in. (24 x 18.5 cm) Harris Brisbane Dick Fund, 1943.

Dürer’s 〈Melencolia I〉 is one of three large prints of 1513–14 known as his Meisterstiche (master engravings). The other two are 〈Knight, Death, and the Devil〉 and 〈Saint Jerome in His Study〉. Though they do not form a series in the strict sense, the prints do correspond to the three kinds of virtue in medieval scholasticism—moral, theological, and intellectual—and they embody the complexity of Dürer’s conception. Albrecht Dürer (1471–1528), Melencolia I, 1514. Engraving, 9 1/2 x 7 3/8 in. (24 x 18.5 cm) Harris Brisbane Dick Fund, 1943.

올해 2014년은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 화가 겸 도제사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가 그의 걸작 판화작품중 하나인 『멜랑콜리아 I』(1514년)을 완성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뒤러의 멜랑콜리아 I은 『기사, 죽음, 악마』와 『서재에 앉아있는 성 제롬』과 더불어 1513-14년에 완성한 대형 판화 3부작중 한 작품으로, 중세 유럽에서 3대 미덕으로 꼽히던 도덕적, 신학적, 지적 학구주의를  상징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란 이 세 가지 미덕을 갖춘 교양과 소양있는 자로서 그가 창의적 결과물을 창조하기까지는 영혼적 고뇌와 정신적 우울증이라는 창조의 고통도 감내해야 함을 상징하고 있다.  Image credit: 〈Melencolia I〉 1514. Engraving, 9 1/2 x 7 3/8 in. (24 x 18.5 cm) Harris Brisbane Dick Fund,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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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때의 자화상. 목판에 유화 1498년작.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Photo: Museo Nacional del Prado, Madrid.

21세기 블럭버스터 화가로 둔갑한 독일 르네상스 미술의 대가
흔히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대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이름은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많지 않을까 짐작된다. 하지만 서구에서 사정은 많이 다르다. 서양인들에게 뒤러는 미술의 역사에서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늘 함께 하는 화가로서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 깊이 자리잡아 온 지 오래다. 특히 알프스 산맥 이북 지방에 자리해 있는 북부 유럽권에서는 더 그렇다.

뒤러의 그 유명한 『들토끼』 드로잉은 어린이들과 중고등 학생들의 미술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해 온 단골 삽화이며, 교회 용품점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뒤러의 『기도하는 손』 그림이 포스터, 열쇄 고리, 책표지, 벽걸이 그림으로 대량 복사되어 오늘날 전지구상의 기독교인들게 팔려나가고 있다.

‚서양 최초의 국제적인 미술가’ ‚서양미술 최초의 적극적인 자기 PR가, ‚현란한 아이디어맨이자 환상적인 상상가’ – 이런 사족스런 별명들 이외에도 흔히 서양 미술사에서는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471-1528)를 두고 혁신가 (innovator)라고 일컫는다. 뭔가 남들과 다른 새로운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13세 때의 자화상(Self-portrait), silverpoint drawing by the thirteen-year-old Dürer, 1484.

13세 난 소년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스케치, 1484년. 종이에 은필(銀筆), 27.5 x 19.6 cm, ©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알브레히트 뒤러는 유럽이 중세와 르네상스를 이행하는 15-16세기 전환기에 살았다. 독일로 이민 온 금속장인의 헝거리 2세 출신일 지언정 뒤러는 정신적인 면에서는 일찌기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접하고 학식을 쌓은 선진적인 사고의 지성인이었으며, 미술면에서는 북이탈리아에서 만난 만테냐(Andrea Mategna)와 벨리니(Giovanni Bellini)로부터 영향을 받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를 이상적인 미술가의 전형으로 본받았다.

오늘날 선진 학문을 하러 외국으로 유학을 가듯, 뒤러는 당시 르네상스 미술의 발상지 이탈리아로 두 차례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원근법과 비례법을 배워 온 신문물의 전달자이기도 했다.

뒤러가 최우상으로 삼았던 미술가이자 정신적 스승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뒤러는 자연에 대한 면밀한 관찰력을 스케치 습작으로 옮기는 버릇, 시대를 앞서간 창조적 발상력을 발휘했다.

일찌기 뒤러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의 천재성을 자각하고 13세의 나이로 처음 자화상을 그려낸 조숙성을 발휘했다. 당시 화가들이 생각지도 않던 화가 스스로의 모습 그리기를 최초로 시작한 이른바 자화상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북구 유럽 미술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화가의 자화상 연구가 뒤러의 자화상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테다. 게다가 당시 화가들이 소수의 귀족 후원자들의 주문에 의존해 작품을 제작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에서 과감히 탈피하고 자기가 제작한 판화 그림을 대량 생산해 직접 시장에 내다 판 그의 획기적인 비스니스맨쉽은 ‚미술은 비즈니스다’라고 떵떵댔던 팝아트의 큰아버지 앤디 워홀 (Andy Warhol)보다 500년이나 앞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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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들토끼 수채화 1502년작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소장. Photo courtesy : Albertina, Vienna.

뉘렘베르크의 뒤러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버지 (Albrecht Dürer the Elder)는 1455년 헝거리에서 독일 뉘렘베르크로 이민 온 금세공 장인이었다. 슬하 18명의 자녀들 가운데 세째로 태어난 화가 뒤러는 어려서 부터 금세공 공방에서 목판과 금속판 세공 기술을 배웠다. 목금속 판화가 뒤러가 최고로 자랑하는 쟝르로 자리잡게 된 것도 이 어린시절부터 쌓은 공방 수련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독일 민담과 전설에 등장하는 마녀, 괴물, 성인의 모험담을 묘사한 소형  판화 그림에서부터 판화작으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 (The Triumphal Arch for Emperor Maximilian I)』(1559년)을 바라보자면 한치의 헛된 공간이나 미숙함없이 실행시킨 그 치밀완벽한 화면 구성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사업수완까지 갖춘 금속 세공 장인이자  명인 제도공
뒤러는 남북을 가를 것 없이 전유럽을 통틀어 최고 기량을 자랑하는 판화가 겸  제도공이다. 완성된 500여년이 지난 지금, 수차례의 재난, 전쟁, 도난 사건을 뒤로한 채 전세계 유명 소장처와 미술관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뒤러의 회화작품 수60여점, 목금속 판화작 수 350여점과 드로잉 970여점 가량. 뒤러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동시대에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교회당과 귀족 저택의 실내 장식용도로 쓰일 회회가 미술 쟝르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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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 목판화. 알베르티나 소장 Photo: Albertina, Vienna.

여간해서 자국 이탈리아 출신이 아니면 칭찬에 인색했던 16세기 르네상스 미술 평론가 죠르죠 바자리 (Giorgio Vasari)도 풍부한 상상력과 판타지를 한껏 발휘한 뒤러의 기량을 칭찬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뒤러가 베니스를 여행하던 동안 베니스인들은 그의 재능이 혹 그렇지 않아도 뛰어난 재능꾼들이 넘치는 이탈리아에서 뒤러의 존재로 인해 화가들 간의 경쟁이 더 심해지지나 않을까를 못내 겁내기도 했다지 않는가.

1506년 베네치아에서 머물던 뒤러가 절친한 친구 피르크하이머 (Willibald Pirckhei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태양 아래에서 떵떵거리고 있다네. 내 나라는 나를 기생충 취급을 하지만 여기서 나는 거장 취급을 받고 있다구“라며 좋아했다. 공방 장인 취급을 받아오던 뒤러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남다른 천재성을 지닌 창조자’로 특권적인 사회적인 대접을 받았으니 그가 느꼈을 뿌듯한 기분은 능히 짐작이 된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는 그도 초상화 [그림:막시밀리안 1세 황제], 자화상 [28세때 자화상, 본문 맨 위의 그림], 교회나 성소의 제단을 장식하는 종교화 [성처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 주문에 응해 회화 제작도 했으며 그 방면에서도 그의 다재다능했던 기량은 우수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뒤러는 막시밀리안 1세 오스트리아 황제의 황실 미술가로서의 영광도 얻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대를 이어 오스트리아를 유럽 대륙의 지배강대국으로 계승하려던 야심의 소유자. 총 195점의 목판에 일일이 조각된 총천연색 판화 인쇄본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바치는 개선문』과 『위대한 개선 열차』 판화/ 수채화 시리즈는 황실의 자존심을 있는대로 드높여주고 그의 정권을 영광화하는데 성공했다. 뒤러가 구사했던 그리스로마 고대 부흥 미술이 지닌 화려한 장식성과 위풍당당 양식은 신성로마제국 황실과 귀족들의 취향에 안성마춤이었기 때문이다.

일화에 따르면 „회화는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오래걸리지만 보수가 좋지 못해“라고 뒤러는 곧잘 불평했다고 한다. 실은 그는 회화 그리기 보다는 드로잉과 판화일을 훨씬 더 좋아했다. 실제로 뒤러의 전시회를 둘러보자면 회화 작품 보다는 정교한 손재주와 치밀한 화면 구성력이 돋보이는 판화와 드로잉 작품들에 더 매력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드로잉, 스케치, 목금속판 판화는 회화 제작 준비를 위한 습작에서부터 착상이나 끄적거리기에 이르기까지 더할나위 없는 창조적 즐거움과 영감을 안겨줬다고 한다. 미술사학자 곰브리히의 말대로라면 뒤러가 그토록 즐겼던 „끄적거리기는 명인적 기량과 휴식을 한데 결합한 행위“였음이다 [from E.H. Gombrich, The Uses of Image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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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1세 황제 초상 목판에 유화1519년작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Photo: Kunsthistorischesmuseum, Wien.

드로잉과 판화의 장점은 그 뿐만이 아니다. 특히 판화는 판목이나 동판 한 장으로 똑같은 작품을 무한수로 대량 제작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일반 고객을 상대로한 대량 판매가 가능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원하는대로 재디자인하거나 책으로 묶어 출판할 수 있으며 아예 판목과 동판 자체를 내다 팔 수도 있다. 웬만한 대작 회화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조수를 부려가며 반복수정 작업을 거쳐야했던 화가들과는 다르게 뒤러는 그 솜씨좋은 손으로 펜, 끌, 조각칼을 놀려서 스케치, 목금속판 파기, 인쇄에 이르는 제작 전과정을 손수 혼자서 했다.

뒤러는 대량 인쇄 매체로서의 판화를 재발견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의 판화작품에마다 일일이 새겨져 있는 AD 모노그램 (화가의 이름 알파벳 첫 글자인 A와 D를 따서 만든 결합문자로)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유 상표 (trademark)나 로고 (logo)와 그 개념이 통하는데가 많다. 그는 자신의 판화 판매 촉진을 위해서 자기 PR에 적극적이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AD 모노그램이 무단복제로 남용될 것을 우려해 법정에 저작권 보호를 요청하기도 한 저작권법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전쟁, 화재, 소실 등을 거친 오랜 역사끝에 오늘날 과연 뒤러가 생전 제작했던 회화며 드로잉, 판화 작품들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될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근 400점의 회화 및 드로잉, 판화작마다 AD 모노그램이 새겨져 있다는 점과, 생전 화가가 자신의 수중에 있던 작품들을 철저히 수집 관리했으며 정확한 제작 시기와 설명문까지 곁들여 보관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뒤러는 분명 자신의 천재성과 작품이 후대에 전해져 영향력을 미칠것을 의식했던 것 같다. 실제로 그의 드로잉 인쇄본과 복사본들은 훗날 매너리즘,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이 선배 대가 뒤러의 놀라운 기법과 구도를 배우고 본따는데 사용한 표본서로써 그 구실을 톡톡이 했다.

뒤러는 통속미술가?
혹자는 뒤러의 판화와 드로잉 작품들을 일컬어 통속적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판화들을 일반 대중을 상대로 시장에 내다 팔 용도로 대량 인쇄했다. 성서 묵시록을 환상적인 장면으로  해석한 이미지들을 비롯해서 이탈리아에서 배워온 고전 누드상과 이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따온 모티프들는 뒤러가 즐겨 다룬 주제들이다. 여기에 르네상스 비례법과  원근법은 고딕시대 독일인들이 전에 보지 못한 사실성과 감각적 역동성을 표현해 안성마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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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처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 1498년경작. Samuel H. Kress Collection,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Photo courtesy: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 나타날 법한 괴물들, 근육질의 육중한 남자인물상과 여성상들이 생동감있는 묘사된 판화작품들이 고대 이교 신화의 한 장면을 도식화한 알레고리일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그같은 작품들은 사실 고딕 후기 독일인들의 사고방식에 널리 깔려있던 중세적 미신 세계와 뒤러의 머리 속에서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친 판다지의 융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풍우, 결투, 납치, 강간의 장면이 담긴 판타지 판화들은 곧잘 에로틱함과 격정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효과를 자아내곤 한다. 15-16세기 독일인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기독교 신앙, 미덕, 공포감의 표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명한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의 설명처럼, 당시 후기 고딕시대의 독일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 미술이 아직 전파되지 못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르네상스적 형식과 북부 독일의 고딕적 내용이 혼재되어 나타난게다 [Erwin Panofsky, Meaning in the Visual Arts,1974].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 이론과 독일의 정신 세계의 결합 – 두 말할 것 없이 뒤러는 그래서 그 둘을 잘 버무린 훌륭한 절충주의의 명인이기도 했다.

자화상 – 천재와 자기망상증
독어권 문화를 포함한 북유럽에서 자화상이라는 미술 쟝르는 유난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50년 전에 살았던 화가 제도공 알브레히트 뒤러가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이었을까 알길이 없었을게다. 공방 기술자에서 창조적인 개인으로서의 의식적 자각을 자화상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되는 뒤러의 자화상이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중세 교회 조각가들과 장인들은 건축물이나 작품 한구석에 숨은 그림찾기처럼 그들의 얼굴을 새겨 넣는 관행을 즐겼다. 뒤러는 여기서 한 발짝 더떼어, 이미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은필 소묘로  『13세때의 자화상』(1484년)을 그려 그 빼어난 손재주로 스스로를 여린 피부와 바스라질 듯한 유년의 미의 소유자로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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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자화상』 1450-55년작, 검정색 잉크로 붓과 펜으로 제작. Stiftung Weimarer Klassik und Kunstsammlungen 소장 Photo courtesy: Stiftung Weimarer Klassik und Kunstsammlungen, Schlossmuseum, Graphische Sammlung, Weimar.

그는 나중에 22세 나던해에 이 그림을 자신의 약혼녀 아그네스에게 주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가 28세 나던 해에 그린 『자화상』(1498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은 오늘날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뒤러의 자화상 회화작품일 것이다. 뒤러는 스스로를 이탈리아 여행과  인문적 학식을 겸비한 신사로서 묘사하는 것으로써 더 이상 일개 손재주나 부리는 공방쟁이가 아니라 신이 내려준 창조력과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예술가임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반짝이는 긴 금발 곱슬머리, 현란한 옷차림, 관람객을 향해 직시하는 눈길, 한껏 등을 곧추세운 자신감찬 자세 … 뒤러는 스스로를 젊은 예수가 되살아나 돌아오기나 한듯 카리스마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말년을 치닫던 해인 1522년, 누드의 모습 『누드 자화상』(1450-55)으로 등장한 화가는 ‘멜랑콜리’ 또는 만성적인 우울증 (melancholie)에 시달리는 자신의 건강상태를 호소하기 위해서 의사에게 보낸 설명 그림이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 자리가 아프답니다“ – 이 드로잉에서 뒤러는 한 손가락을 복부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것은 비장이 위치해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비장이 담즙을 지나치게 분비하면 우울증으로 나타난다고 했던 고대 의학 이론에 정통해 있던 뒤러는 이렇게 자가진단을 내렸다. 1528년 57세의 나이로 환각증세와 악몽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뜰 때까지 뒤러는 자신이 앓던 우울증세를 천재성 때문이라고 여기면서 고통받는 예수의 도상을 빌은 자화상 소묘를 지속해 그렸다고 알려진다.

알베르티나로 『들토끼』와 『기도하는 손』 보러가기
관람객들은 그들이 보고 배워서 알고 있는 작품을 진품으로 확인하기 위해 미술전시회를 찾곤 한다. 『들토끼』는 알베르티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뒤러 작품들 가운데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 이번 전시기간 동안 알베르티나 미술관은 개별적인 『들토끼』 관람 경험을 원하는 관객들을 위해서 전화로 특수 관람 예약까지 접수받는 행사까지 병행하면서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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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손』, 1508년작 빈 알베르티나 소장. Photo: Albertina, Vienna.

자연 숭배자이기도 했던 뒤러는 『들토끼』 외에도 수많은 풍경화와 동물화를 수채화로 그려서 자연의 그 천연의 아름다움과 비례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아내 아그네스 프라이 (Agnes Frey)와 결혼한 해인 1494년,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 도중 들른 남부 티롤 지방과 인스브룩 성을 수채화로 담아냈다.

전세계 기독교인들이 늘 머리와 가슴 속에 기억하고 있는 『기도하는 손』 스케치는 팔이나 어깨 등 다른 신체부위가 일체 제거된채 한데 모은 두 손만이 공중에 떠 있는 특유의 이미지 때문에 보는이에게 유난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이 모양대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그 또한 오해이다. 『기도하는 손』은 본래 프랑크푸르트의 한 돈 많은 미술후원자 야콥 헬러 (Jacob Heller)의 주문을 받아 그린 교회제단장식용으로 쓰일 그림 예비 스케치 18점중 하나였다. 뒤러는 헬러가 재료비와 수고비 지급에 인색하다는 이유로 떠들썩한 말타툼을 벌인 끝에 결국 이 프로젝트를 포기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고 그의 『기도하는 손』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완성작의 하나로 남아있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컬렉션 뒤러의 그래픽 작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알베르티나 미술관과 알브레히트 뒤러 사이의 역사는 남다르다. 작센-테셴 공국의 알베르트 황태자 부부 (합스부르크 제국 17세기 마리아-테레지아 여왕의 아들 부부)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물려받은 뒤러의 드로잉 및 수채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던 이 컬렉션은 20세기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다수 유실되거나 도난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제3제국 시절 나치 지도자 히틀러는 뒤러를 깊이 흠모해서 뒤러의 그래픽 작품 20여점을 훔쳐 자신의 개인 미술 컬렉션 보관함에 몰래 숨겨두기도 했다.

현재는 『들토끼』 『기도하는 손』 『인스브룩 거리』 수채화 등 140여 점의 핵심 드로잉과 수채화와 판화 전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 1971년 뒤러의 500회 생일을 기념해 올려졌던 전시후, 올 [2003년] 가을 빈에서 열리는 뒤러 컬렉션전은 가장 규모가 큰 종합전이어서 일반인들이 뒤러의 진작들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되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 전은 5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계속된다.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 지 2003년 10월호 Art News 연재 컬럼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음악의 도시 빈에서 한 편의 환타지아

유태인 이민자들이 건설한 백일몽 같은 근대 음악계 오늘날까지도 ’음악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19-20세기 전환기 – 빈(Wien, Vienna)은 시기 지성사적으로나 예술사적으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폭발적인 창조적 분위기로 가득했다. 때는 17세기 이후로 지속되어 온 귀족주의 절대왕권이 제 명을 다하여 쇠퇘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며 상업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지위까지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신흥부유층의 부르조아 사회가 자리잡기 시작한 격동의 변화기이기도 했다. Continue reading

쇼핑 만능 시대 속의 디자인

REVIEW

누가한 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날 쇼핑은 섹스 다음으로 현대인의 관심사와 일과의 주축을 이루는 활동이라고 했다. 현재 영국 리퍼풀에 있는 테이트 미술관에서는 현대미술에 표현된 쇼핑 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고 있어 일반 관객들 발길을 유혹하고 있다. 쇼핑이라는 범현대적인 관심사를 포착해 기획한 전시라는 점에서 분명 기발한 착상이 돋보이는 행사이다. 평소 현대 미술에 거리감을 느끼던 미술 문외한 관객들이 미술 감상을 쇼핑하기와 연관시키도록 유도하고 나아가서 엔터테인먼트 효과까지도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와 야나기 (Miwa Yanagi)의 설치작 『엘리베이터 걸 (Elevator Girl)』, 1997년. Aarhus Kunstmuseum Collection. 플렉시글래스에 컬러사진을 이중패널식으로 붙여 만든 작품으로 아시아 백화점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니폼 차림의 안내원과 엘리베이터 요원들의 이미지를 패러디했다.

쇼핑몰, 현대판 소비주의 신앙을 숭배하는 성전인가?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교회 건물을 짓는데 쏟았던 혼심의 정성과 돈은 오늘날 쇼핑몰 건설에 투여되고 있다. 지가가 높고 통행인구가 많은 도심 지역이나 상업 요충지마다 크든 작든 백화점이나 대형 상가를 찾아보기란 대로에서 택시잡기보다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같은 현상은 도심 외곽 여기저기에 속속 개발되는 신도시 거주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현상은 서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도시 신개발과 지역 사회 경제활성화 및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도시 외곽이나 주거 위주의 교외에는 거대 주차장이 완비된 미국식 대형 종합 쇼핑몰이나 할인매장이 속속 들어서서 지역 환경과 경제구조를 뒤바꿔 놓는다. Continue reading

외로울 땐 … 쇼핑하세요.

쇼핑은 산업이고 예술이고 인생이다.

Mickry 3, 『Tea service』2003, MAK Design Space Museum für angewandte Kunst, Wien, Austria

비엔나 베르크슈테테 운동의 대표적 건축가/디자이너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이 디자인한 은제 차 서비스 세트를 흉내내어 싸구려 제품으로 화해 재창조한 것이 재미있다. 비엔나 베르크슈테테 운동의 대표적 건축가/디자이너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이 디자인한 은제 차 서비스 세트를 흉내내어 싸구려 제품으로 패러디한 것이 재미있다. Mickry 3, 『Tea service』 2003, MAK Design Space Museum für angewandte Kunst, Wien, Austria

MICKRY 3 SUPERMARKET PROJECT 빨간 벽돌로 지어진 빈 응용미술 박물관 건물 오른켠 코너에 자리해 있던 서점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MAK DESIGN SPACE라는 디자인 전문 전시장이 4월말부터 새로 들어섰다. 19-20세기 전환기 빈 모더니즘기의 공예 및 디자인품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이 박물관이 현대 디자인을 보다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전시 기획을 해 보려는 새로운 관심 방향과 의욕을 표명하는 제스쳐이기도 하다.

MAK DESIGN SPACE가 이 새 전시장에서 선보이게 될 현대 디자인 전시들은 예술, 디자인, 산업, 경제를 두루 아우르며 상호 보완하는 진흥제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국제 현대 디자인계에서 급속하게 번지고 있는 디자인 이론과 비평을 시시각각 따라잡고 대중에게 이해시키겠다는 교육적 목표까지 겨냥하고 있다.

이 전시장에서 펼쳐질 첫 전시는 스위스 출신의 젊은 세대 3인조 현대 미술가 미크리3인(Mickry 3)의 „수퍼마켓“ 프로젝트. 수퍼마켓은 현대 디자인 이론과 비평에서 소비주의와 연관되어 자주 언급되는 현대 특유의 공간 현상이자 백화점이나 쇼핑몰과 더불어 대중의 소비활동이 펼쳐지는 종합 소비 설비 공간이 된지 오래다. 채소, 과일, 생선, 고기 같은 신선한 식료품에서부터 천편일률적으로 대량생산된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기 어려운 차갑고 획일적인 상품들이 선반위에 진열된채 소비자들의 선택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기도 하다.

미크리3인은 수퍼마켓의 바로 그같은 정서에 반항 겸 풍자의 비평을 가한다. 그들이 상정하고 있는 현대 사회 속의 수퍼마켓은 „신선한 식료품(Lebensmittel)“을 비롯해서 „고기류(Fleischvoegel)“, „디즈니-토끼(Disney-Kaninchen)“라는 작품 이름들처럼 식품 생필품만 파는 곳이 아니다. ‚새 애인이 필요하세요? 아니면 여동생이 갖고 싶으세요?’ – 현대 사회의 수퍼마켓은 성적 오르가즘을 제공하는 즉석 성욕 충족품인 „인스턴트 세트(Instant-set)“까지도 돈주고 살 수 있는 만능해결소로 묘사된다. 심지어 행복하지 못한 소비자들을 위해서 컵라면 처럼 물을 붓고 5분만 기다렸다가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즉석 행복믹스도 살 수 있다.

Mickry 3『Organshop』2001, M3 Supermarkt Installation view Kunstraum Walcheturm, Zurich, Switzerland

새 창자가 필요한가요? 새 콩팥으로 이식 수술할 때가 되었나요? 내장가게에서는 온갖 신체부위별 내장도 살 수 있다. Mickry 3『Organshop』 2001, M3 Supermarkt
Installation view Kunstraum Walcheturm, Zurich, Switzerland

크리스티나 판더, 도미니크 빈뉴, 니나 폰 마이스 3인의 여성으로 구성된 미크리3인의 수퍼마켓 프로젝트는 소비주의 문화와 대량생산된 소비품을 예술적인 개념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미술적 논평에 더 가깝다. 나아가서 그들이 영감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는 수퍼마켓이란 수많은 미술 작품이 난무하는 가운데 미술을 소비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부추기는 미술 시장 제도에 대한 풍자적 논평이기도 하다.

디자인과 소비주의 문화를 연결시켜 분석하는 디자인 비평 담론이 유난히 자주 언급되고 있어 오고 있는 요즘, 미크리 3인의 ‚수퍼마켓’ 프로젝트가 디자이너들에게 소비주의 이론에서 바라본 비판적인 안목과 시각적 영감을 환기시켜 줄 수 있길 바란다.『쇼핑은 산업인가 예술인가 – 미크리3 수퍼마켓』| 전시 장소 : 빈 응용미술 박물관 디자인 스페이스 (MAK DESIGN SPACE) | 전시 기간 : 4월 23일-5월 18일까지

* 이 글은 본래 월간 『디자인』2003년 4월호에 실렸던 글임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쉽게 해독하기

ROLAND BARTHES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는 지난해 11월 27일부터 올 3월 10일까지 프랑스 현대 철학가 롤랑 바르트의 전시회를 열어 그의 철학과 사상 세계를 조명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현대 철학자, 저술가, 문화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일생과 업적을 미술관 전시로 부칠 만큼 지성인을 전통 문화 만큼이나 존중하고 떠받드는 프랑스 사회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1938년에 촬영된 방년 23세의 롤랑 바르트의 초상 사진. Private Collection.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계 스타
프랑스만큼 지성인이라는 직업을 사회문화적으로 높이 우대해 주는 나라가 또 있을까. 문학가, 문장가•에세이스트, 영화 평론가, 현대 문화 비평가, 현대 미술 애호가 겸 컬렉터, 사회학자, 취미 화가 –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1915년 셰르부르 생 – 1980년 파리 사망)를 일컫는 직업 명칭과 타이틀만도 한두 단어로 축약하기 어려울 만치 잡다하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바르트가 기여한 공적은 뭐니뭐니해도 기호학 (semiotics)일 것이다.

기호학은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일상 언어, 의사소통 태도나 행위, 심지어 하찮은 사물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것들은 숨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온갖 일상적 현상의 표면에 나타난 ‚기호 (signs)’는 그 나름대로 목적한 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 바르트의 언어에 따르면- 이른바 ‚신화 (myth)’를 내포하고 있게 마련이며, 그는 일생을 바쳐 현대 일상 문화 속의 신화를 지적하고 분석하는 ‚탈신화 (demystify)’ 작업에 헌신했다.

롤랑 바르트라는 한 인물을 주제로 삼는 종합 전시회는 어떻게 기획 전시될 수 있을까?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지난 11월 27일부터 개관해 올 3월 10일까지 3개월여 동안 전시된 <롤랑 바르트>전은 철학자를 주제로 한 전시라는 점에서 많은 언론과 관객들이 사전부터 우려를 표시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이 전시 오프닝 직후 게재한 11월 27일 자 짧은 리뷰에서 마리안느 알팡 (Marianne Alphant)과 나탈리 레제 (Nathalie Léger) 두 큐레이터를 칭찬하면서 바르트가 남긴 각종 물리적 자료는 물론 그의 사상까지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잘 꾸려진 구성이 돋보인 전시였다고 평가했다.

흔히 프랑스인들이 기획하는 전시회들이 그렇듯, 이번 전시에서도 역시 기획 컨셉과 전개 방식에서 자료의 방대함, 디스플레이 디자인(건축가 나탈리 크리니에르 담당) 효과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특유의 거창한 태도 (le grande manière)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퐁피두 센터는 IMEC (Institut Mémoires de l’edition contemporaine)와의 협력으로 생전 롤랑 바르트와 관련된 각종 개인 문서 및 필기 기록, 비디오, 음성 녹음된 인터뷰, 영상 기록 클립, 사진, 노트 등의 자료를 입수해 전시에 포함시켰다.

롤랑 바르트는 쟝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 미셸 푸코 (Michel Foucault)와 더불어서 디자인과 시각 현상에 대한 유용한 분석틀과 통찰력을 제시한 현대 프랑스 지성임에 분명하지만, 일반인 독자들에게는 여간해서 접근하기 어려운 사상가라는 인상을 주어 왔던게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인문사회 과학에서 다분야간 학문 (interdisciplinary)이라고 하는 개념은 60년대 프랑스 구조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구조주의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소쉬르의 언어학, 인류학 등 여러 인문과학 분야에서 수입해 온 이론틀을 빌어 방법론으로 구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조주의가 채용하고 있는 여러 이론틀 가운데에서 기호학은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의 저서 『일상생활 속의 신화들 (Mythologies)』중 „오늘날의 신화 (Myth Today)“라는 장에서 나타난 바르트의 기호학 이론틀은 당시 프랑스 지성계를 지배했던 좌파적 성향과 비판적 필력이 돋보인다. 『일상생활 속의 신화들』은 현대 브루조아지 대중 문화를 겨냥한 날카로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에세이식 단편글 모음집으로서 문체면에서 평소 철학과 친하지 않은 일반 대중 독자들에게도 어렵지 않게 읽힐 수 있을 만큼 대중친화적이다. 실제로 이 저서는 1957년 초판이 발행되자마자 큰 대중적 매출 성공을 거둔 베스트셀러였으며 이전까지만 해도 단편글 기고가에 불과했던 바르트를 스타 기호학자로 만들어준 행운작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그래서 그의 저서 『일상생활 속의 신화들 (Mythologies)』로 부터 출발한다. 롤랑 바르트가 남긴 문화적 유산이라고 한다면 철학의 원천을 일상 생활 (ordinary)에서 발견했다는 것일 게다. 평범한 일상으로 눈을 돌려 하찮은 현상과 사물들로 부터 우리 사회가 대중에게 주입하는 이데올로기를 벗겨 폭로하는 그의 사상은 대체로 50, 60년대 프랑스 주류 사상계를 주도한 맑스주의론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외에도 역사는 위대한 이름과 정치사의 묘사가 아니라 한 시대를 관통하는 지속적인 대세와 개인들의 사고방식과 믿음 (정신 상태 또는 멘탈리티)을 묘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아날학파로부터도 영향받은 바 크다. 개인적인 야사,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들에 못지 않게 바르트는 제2차 대전 이후 급격히 두드러진 대중 문화 현상을 철학적 주제로 삼았다.

오늘날 자동차란 고딕 성당과 거의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창조물이며, 무명의 예술가의 정열을 빌어 착상되었으며,자동차가 그 자체로 마치 마술적인 대상인양 대중은 그것이 지니는 유용성 보다는 이미지를 소비한다. 『일상생활 속의 신화들』중에서.

전시장 입구에서는 1957년산 시트로엥 DS 19 (Citroën DS 19) 모델 자동차로 표지를 장식한 롤방 바르트의 첫 대중 철학서 『일상생활 속의 신화들』이 우선 전시장을 들어서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르트는 이 자동차를 두고 그의 책 『일상생활 속의 신화들』에서 „새 시트로엥“이라는 제목의 에세이 첫 문장을 이렇게 연다. – „오늘날 자동차란 고딕 성당과 거의 똑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창조물이며, 무명의 예술가의 정열을 빌어 착상되었으며,자동차가 그 자체로 마치 마술적인 대상인양 대중은 그것이 지니는 유용성 보다는 이미지를 소비한다.“

이전까지만 해도 이만큼 제품과 디자인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를 날카롭게 포착해 지적한 비평가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바르트는 일찌기 가장 초기의 제품디자인 비평가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만하다.

전시가 보여주는 일상생활 속의 신화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르트는 당시 프랑스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프로레슬링에서부터 섬유 세탁용 세재, 와인과 우유, 스테이크와 감자칩, 『기드 블르 (Guide Bleu)』 대중용 여행 안내서, 플라스틱 제품, 장난감, 스트립쇼에 이르기까지 기호학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전시는 바르트가 이 책에서 탈신화시킨 일상 용품들과 이미지들을 광채나는 유리관에 담아 관객들에게 제시해 보인다.

대중 프로 레슬링은 고대 그리스의 권투나 일본의 유도가 지니는 내적 원칙이나 상징적인 요소가 일체 거세된 과장극화된 역겨운 코미디에 불과하다고 한 그의 비판은 흥미롭다. 50년대 중엽, 섬유세재의 두 대표적인 브랜드 오모 (Omo)와 페르질 (Persil)이 프랑스 섬유세재 시장에서 대대적인 유통판매를 시작하면서 즐겨 사용된 광고 전략도 바르트에 의해 기호학적인 해부를 면치 못했다. „가루 비누와 세재“라는 에세이는 브랜딩 디자인과 광고의 허위성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바르트는 『노로고 (No Logo)』의 저자 나오미 클라인 (Naomi Klein)의 할아버지뻘쯤 되겠다.

화학 섬유세제가 대량 시판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일명 양잿물로 옷을 빨아 입었다. 소비자들이 양잿물을 버리고 그대신 화학 섬유세제를 사쓰도록 부추기기 위해서 당시 광고들은 양잿물은 더러움을 죽이는 광폭한 물질이고 „화학 섬유세제 가루는 옷표면으로부터 더러움을 떠밀어 낸다…“고 해 인체에 대한 무자극성과 시민적인 청결성을 소비자들에게 세뇌하는 전략을 이용했다.

페르질 세제 광고 속에는 한 칙칙한 회색 옷차림을 한 여인이 새하얗고 깨끗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새초롬한 여성을 가리키며 „Ah, cette blancheur … Persil!“ 하며 소리친다. 훗날 오모와 페르질 두 회사는 세계적인 화학 섬유세제업계에서 대표적인 브랜드로 성장해 오늘날 유니레버 (Unilever)라는 다국적기업의 소유하에 운영되고 있으며, 두 회사가 생산하는 우아한 섬유 세제는 염소와 암모니아를 주원료로 한 똑같은 가루 비누에 불과함을 지적하면서 바르트는 이 글의 끝을 맺었다.

반쯤 익힌 먹음직스럽고 핑크색 핏빛도는 두툼한 쇠고기 안심 스테이크가 프랑스 음식문화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은 아는 분은 많지 않으리라. 바르트에 따르면, 프랑스인에게 와인과 더불어 덜익힌 고깃덩어리는 피와 생명을 의미하며, 스테이크 식사를 권유받는 것은 남으로부터 신뢰와 협력을 제안받는 것과 같은 성스러움의 상징이다.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는 서양인 비즈니스맨과 여행객들을 보라. 모르긴 몰라도 중요한 사업미팅을 앞두고 기를 다지거나 친구들끼리의 우애를 다지는 의례행위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프랑스인에게만이 아니라 서양인들에게 감자란 땅에서 자라는 곡물이라는 이유에서 노스탤지어와 애국심을 상징한다. 이에 곁들여 마실 와인은 절대로 취하려는 목적으로 한꺼번에 마시지 말 것인데, 와인은 위스키나 맥주와는 달리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며 와인마시기는 프랑스인들의 일상생활중 일부를 구성하는 장식성 의례행위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격조와 품위가 있는 식탁을 꾸미고 싶어하는 젊은 여성들과 주부들은 어디서 메뉴를 찾을까. 입맛 돌게 윤기나는 세련된 요리 사진이 실린 『엘르 (Elle)』 여성지를 보라. 희귀한 재료와 일류 조리사의 테크닉과 디자인 감각 없이는 만들기 어려워 보이는 메뉴가 실린 이 『엘르』지가 겨냥하는 주 독자가 실은 요리할 시간이 많지 않은 하류노동계층 여성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일상적으로 평범한 요리를 하는 중류층 여성이라면 보다 현실적인 조리법이 실린 <『렉스프레스 (L’Express)』> 대중지를 보고 그날 저녁 식탁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엘르』가 보여주는 구르메 음식은 음식 디자인, 사진기술, 포토샵이 결합해 탄생시킨 데코레이션 요리 (Ornamental Cookery)에 불과하다.

프랑스 대중이 가장 즐겨 보는 여행 안내서 『기드블르』는 또 어떤가. 오늘날 얼마나 많은 대중 관광객들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도시과 나라를 체계적으로 경험하기 위해 여행 안내서를 활용하고 있는가. 여행비를 손에 쥔채 어디로 어떻게 여행해야 할지 모르는 대중은 기드 블르 관광 안내서에 의존해 여행 계획을 짜며, 책에 실린 엽서 사진을 자신의 카메라에 다시 찍어담기 위해 관광명소를 방문하고 가이드가 제안하는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기드 블르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수고를 덜어주는 조절도구이며 여행자의 사기를 지켜주는 손쉬운 대체물…“일 뿐이다.

1954년경 롤랑 바르트가 40살을 맞기 즈음의 모습. 개인 소장.

자신이 속해 있던 프랑스 부르조아지 계층을 향한 비판
『일상생활 속의 신화들』을 비롯한 그의 기호학 저서가 공개적으로 비난의 표적으로 삼고 있는 대상은 프랑스의 상층 부르조아지 (grande bourgeoisie)와 프티부르조아지 중산계층와 그에 속해있는 대중 (mass)이다. 바르트 스스로가 중산층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바로 그 사회구성원들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바르트의 출신과 성장 배경은 부르조아지 계층에 대한 일관적인 천착을 어느정도 설명해 주는 구석이 있다.

1915년 해군 장교 아버지와 프티브루조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제1차대전중 전사한 이후 그의 어머니는 중산층 출신에 남편의 출신과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국가로부터 전사자 보상금 지급혜택을 받지 못했다. 바르트의 사진미술에 대한 비평서이자 그의 최후작인 『카메라 루시다 (La chambre claire)』(1980)는 다름아닌 그의 어머니 앙리에트에 대한 아련하고 감상적인 기억과 애정을 서술한 사진비평론집이다. 해변가를 배경으로 황량하게 버려진듯 서있는 당나귀를 뒤에 둔채 서 있는 앙리에트의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은 원래보다 훨씬 크게 확대인화된 채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카톨릭 교회가 지배하는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자로 성장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으며, 그로 인해 경험한 심리적 갈등이 생전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던 것같다. 평생을 봉비방 (bonvivant, 호식가, 미식가, 유쾌한 대화 친구, 뚜렷한 고정 직업없이 사교계를 오가며 유유자적하게 인생을 즐기는 탐미가를 두루 지칭하는 명칭), 쾌락주의자, 동성연애자, 세심한 댄디 드레서, 수다스런 가십취미가로 살았던 그는 책읽기와 철학하기라는 자칫 고통스러울 수 있는 지적노동을 에로틱하고 쾌락적인 취미라고 여겼다. 그의 저서 『텍스트의 즐거움 (Le plaisir du texte)』(1973)은 바로 그에 대한 책 한 권의 주석이다.

그보다 훨씬 전인1968년, 반문화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다달았을 시기 출간된 『저자의 죽음 (La mort de l’auteur)』에서 그는 텍스트는 독자가 읽어 내려가는 동안 독자의 머리속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서술 된다고 주장하여 저자의 언어전달 의도에 찬물을 끼얻었던 바 있는 책이다.

바르트는 프랑스 지성계에 데뷰했을 50년대와 이후 60년대까지 중국 공산주의당 마오쩌뚱 정권을 지지했던 바 있다. 특히 60년대에 그는 정치적인 관심을 다소 미뤄둔채 동양 문화권에서의 기호 체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을 자주 여행하기도 했다. 여러차례의 일본 여행과 관찰의 결실로써, 그는 1970년 출판된 책 『기호의 제국 (L’Empire des signes)』에서 일본 문화는 기호들이 의미나 상징이 없는 순수한 기호 그 자체로써 존재하는 문화라고 결론내렸다.

쥬세페 아르침볼도 (Giuseppe Arcimboldo). 『도서직원 (Le bibliothécaire)』, 1566년작. 캔버스에 유화. © Skokolosterns slott, Skokloster, Sweden.

생전 바르트는 상당한 수준의 피아니스트였으며 미술 애호가 겸 컬렉터이기도 했다. 70년대에는 잠시나마 취미 화가로서 그림그리기에 열중하기도 했었다. 그같은 그의 개인적 취미 활동 흔적과 미술 소장품들도 이번 전시에서 빠지지 않고 전시되었다.

그는 과일과 채소 형상을 인물화로 그려낸 아르침볼도 (Arcimboldo), 발투스의 큰형이자 에로티스트였던 피에르 콜로소스키, 화가 사이 톰블리, 동성애주의 사진가 빌헬름 폰 글뢰덴, 근대 초현실주의 화가 앙드레 마쏭의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생전 모았던 그의 미술 작품들은 현재 IMEC가 보관하고 있다.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Claude Lévi-Strauss)와 어린시절 한 동네에서 같이 성장한 동무였던 바르트는 불가리아 출신 헤겔주의자 크리스테바, 후기 니체주의 역사고고학 및 철학자 미셸 푸코, 알제리아 태생 유태인계 철학자 쟈크 데리다 등 동시대 철학자들과 더불어 제2차 대전 종전후 50년대 이후부터 돌파구를 찾지 못한채 갈팡질팡하던 프랑스 철학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현대 프랑스 지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60년대 이후 프랑스 지성계의 큰별 롤랑 바르트는 그가 사망하기 1980년도 직전까지 강의했던 콜레쥬 드 프랑스 (Collège de France)와 그의 단골 사교실이던 생제르맹의 카페 플로르 (Café Flore)를 오가면서 전형적인 프랑스 지성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대중적인 인기까지 독차지했다.

마지막으로 이 전시는 생전 바르트가 콜레쥬 드 프랑스에서 강의준비에 사용했던 수백장의 노트 인덱스 카드를 전시장 벽면에 빼곡히 붙여 보여주는 것으로 마감한다. 노트 마다 칠필로 일일이 적었던 철학자의 사변적 흔적들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이 전시 코너는 특히 프랑스인 관람객들로 북적거렸다. 바르트가 손으로 끄적거린 필적들은 놀랍게도 그가 생전 흠모해 하던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 그림과 닮은데가 많다.

돌이켜 보건대, 롤랑 바르트는 독창적인 기호학 이론가였다든가 체계적인 방법론을 수립한 철학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비범한 관찰력과 통찰력은 그의 저서와 글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사물과 관습들이란 무심코 지나칠 평범한 것들이 아님을 바르트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이 전시를 계기로 평소 철학책을 가까이하지 않던 일반인들 사이에서 다시금 바르트의 책을 사보는 대중 독자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 이 글은 『디자인네트 (designNET)』 2003년 4월호 포럼 컬럼에 개제되었던 것임을 밝혀 둡니다.

영원히 건술중인 도시 베를린

BERLIN – CITY UNDER PERPETUAL CONTRUCTION

역사의 상처를 감싸안고 변화를 지속해 가는 도시 베를린의 건축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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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라이히스탁 독일 연방 국회의사당 건물중 영국의 거장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개조 설계를 맡아 완성된 천정 돔 © danda.

비행기편으로 베를린에 막 도착한 방문객은 우선 이 도시가 지닌 깊은 역사적 흔적을 느끼기 시작한다.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 (Tempelhof Airport)은 독일 나치 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어두운 독일 근현대 역사가 내리누르는 과거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채 오늘날까지 그 자리에 서있다. 템펠호프 공항은 에른스트 자게비일 (Ernst Sagebiel)이 설계해 1937년 개항했다.

히틀러의 뒤를 이은 대독일 지도자 겸 독일 공군 총사령관이던 헤르만 괴링 (Hermann Goering)이 총애하던 건축가 에리히 멘델존 (Erich Mendelshohn)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던 건축가 자게비일은 이 공항 설계를 통해서 나치 정권이 강요하던 극도로 경직된 양식을 극적으로 표현해 이후, 1980년대 베를린 시내 제임스 스털링 (James Stirling)의 설계로 지어진 베를린 과학센터 (Wissenschaftzentrum)가 탄생하는데 모형이 되어준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놀랍게도 이 공항은 미국의 펜타곤 국방부 다음으로 큰 면적을 자랑하면서도 좁게 설계된 항공기 이착륙로 때문에 개인 출퇴근용 항공기 경유지로 이용되어 오기도 했다. 오늘날 베를린 시민들은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부터 이 도시를 보호해 준 옛 베를린 에어리프트 (Berlin AirLift) 공군 기지로서의 이 공항을 민주주의의 수호지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 한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는 베를린을 두고 „사랑과 웃음이 결여된 도시“라고 일컫는 것으로써 이 도시가 지닌 역사적 무게와 상처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도 그럴것이 실제 지난 일세기여 동안 베를린은 파란만장한 역사와 격변을 거쳐 온 가운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베를린이 흔히 „항상 공사중에 있는 (in progress)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려 온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만큼 독일은 물론 유럽의 역사적 변화가 이 도시의 건축물과 도시 설계에 끼친 영향을 숨가쁘게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 Gate)은 베를린을 둘러싼 성문(城門) 출입구로서, 18세기말경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치하 동안 지어져 현재는 나폴레옹 정권에 대한 프러시아군의 승리와 독일 비더마이어 (Biedermeier) 시대의 영광을 대변하는 아이콘이 되어 당당히 서있다.

시도때도 없이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그 유명한 포츠다머 플라츠 (Potsdamer Platz)는 두 말 할 것 없이 통일 독일의 새수도 베를린으로서의 상징물이다. 포츠다머 플라츠는 19세기 프러시아 정권기 특유의 도시 설계 의도와 미감을 반영하고 있다.재공사 당시 각종 전문 건축 인부들이 지하수 밑으로 잠수해 콘크리트 공사를 하는가 하면 공사 전용 철로를 설치하는 등 독일이 자랑하는 최첨단 현대 건축 설계 기술을 일축해 과시해 보여 화재를 모은 곳도 바로 이 포츠다머 플라츠였다.

베를린 시내 구석구석과 스카이라인은 18, 19세기의 건축적 유산과 20세기의 국제적 건축 양식을 골고루 구비하고 있다. 시당국은 일명 „비판적 도시 재거설 (critical reconstruction)“, „역사적 요소에 대한 고려 (respect for the historical substance)“라는 도시 건설 원칙에 입각해 도시가 지닌 역사적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현대적인 신건축 공사를 단행하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자랑해 왔다. 그같은 가장 대표적인 예는 노먼 포스터 (Sir Norman Foster) 경이 재디자인 개축한 라이히스탁 (Reichstag) 독일 연방 국회의사당 건물일 것이다.

90년대초, 크리스토 (Christo)가 라이히스톡 건물을 헝겊으로 포장하는 행위 미술을 전개했던 일은 베를린 시민들에게 세계사 한가운데에 선 듯한 크나큰 자긍심을 안겨주었다. 본래 1894년 지어져 1933년의 화재 사건 (이로 인해 히틀러 나치 지도자는 한 번도 이곳에서 공식적인 집권을 해 보지 못했다), 1945년 2차대전중 소련군 침략 등을 거치는 등 격동의 독일 근현대사를 경험한 장소이기도 하다. 무려 4년에 걸쳐 완공된 라이히스탁은 현재 관광객들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어 그 유명한 노먼 포스터식 웅장한 풍의 유리 돔 천정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있다.

20세기 초엽부터 1930년대까지만 해도 베를린은 ‚메트로폴리스 건설’을 겨냥한 중부 유럽 특유의 빽빽하고 밀도높은 건축 도시로서의 발전을 거듭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정권의 패전을 겪고난 이후 도시의 대부분은 폭격과 총알의 흔적만 남긴채 거의 폐허되다시피 했다. 1945년 제2차대전 종전을 끝으로 베를린이 콘크리트 벽을 사이에 두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뉜 후, 서베를린은 서방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경제 재건 노력을 통해서 전흔의 기억과 고통을 지우려는 몸부림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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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리베스킨트가 1998년에 설계한 베를린 유태인 박물관 © Jüdisches Museum Berlin Photo: Jens Ziehe.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친 냉전기 동안에는 정부 주도 도시 신건설 계획의 적극적인 추진하에 불도우저 바퀴흔적과 신축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서 가고 있는 가운데, 베를린은 루 리드 (Lou Reed)와 데이빗 보위 (David Bowie)를 앞세운 급진적 대중문화와 이어 히피문화의 중심지로 떠 오르면서 독일 전역의 젊은이들이 대거 모여든 희망과 해방의 도시로 받아들여 지기도 했다.

1989년, 동서독을 가로 막았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 진 이후 시정부가 주도한 도시 재건설 계획에 따라, 지난 10여년 동안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쿨투르포룸 (Kulturforum) 건물이 자리해 있는 도심 일대는 신소재 건축자재와 유리로 광채를 발하는 모던한 신주거지 및 사무용 건축 구역으로 탈바꿈 해 버렸다.

건축가 조세프 조반니니 (Joseph Giovannini)는 한때 베를린의 도시 설계 및 건축 지침을 두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스타 건축가들의 이름을 내세운 도시 미화 작업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한 적이 있다. 지난 20여년에 걸쳐 베를린를 메운 건축물들을 설계한 국제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하나둘 거명하다 보면 어딘가 수긍이 갈 정도로 그 목록은 제법 화려하다. 그리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이 담긴 건축물들도 자연스럽게 나란히 발견되곤 한다. 베를린 올림픽을 거행했던 베르너 마르흐 (Werner March)의 나치 올림픽 경기장은 지금도 옛 스와스티카 장식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유지한 채 보존되어 있다.이 경기장 바로 근처에는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가 설계한 위니뜨 다비따시옹 (Unite D’Habitation) 아파트 단지와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지만90년대 중반의 자하 하디드 (Zaha Hadid) 초기작으로 꼽히는 강철 구조의 아파트 건물이 스트레세만스트라세 거리상에 숨은듯 서있다.

베를린를 통틀어 가장 기이한 양식을 자랑하는 건물은 현재 베를린 주식거래소로 활용되고 있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하우스 (Ludwig Erhard Haus). 니콜라스 그림쇼 (Nicolas Grimshaw)가 설계한 이 건물은 삐죽삐죽한 형태의 알루미늄 자재를 사용해 강렬한 표현성을 강조한 첨단 하이테크 빌딩으로서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서 아르마딜로 (Armadillo)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있다.

포츠다머 플라츠 마스터 플랜을 맡은 렌쪼 피아노 (Renzo Piano)를 비롯해서 리쳐드 로저스 (Richard Rogers), 헬뭇 얀 (Helmut Jahn), 한스 콜호프 (Hans Kollhoff) 등 포츠다머 플라츠 주변에 자리한 사무실, 상점, 아파트 건물들의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가히 내노라할 만하다.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에 위치한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은 쟝 누벨 (Jean Nouvel)이, 브란덴부르크 문 뒤켠 파리저 플라츠 상에 있는 DC 은행 (DC Bank)은 프랭크 게리 (Frank O. Gehry)가, 트라이앵글 오피스 및 아파트 건물은 요제프 파울 클라이후스 (Joseph Paul Kleihues), 프리드리히슈트라세, 마우어슈트라세, 크라우젠슈트라세의 건물들은 필립 존슨 (Philip Johnson)이 각각 담당했으며, 이탈리아의 알도 로시 (Aldo Rossi)도 그 주변 주거용 아파트 건물 설계를 책임진 바 있다. 콜호프와 머피/얀 설계팀이 설계한 머피/양 타워 (Murphy/Jahn Tower)는 일명 소니 센터 (Sony Center)로도 불리는 초대형 유리 건물로서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서 건축적 자랑거리로 꼽힌다.

그 같은 베를린 도심에서 벗어나 자리한 유태인 박물관 (Jewish Museum)은 다니엘 리베스킨트 (Daniel Liebeskind) 설계로 작년에 완공되어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유태인 박물관은 여러개의 타워식 건물들로 둘러 싸여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을 끄는 것은 자우어브루흐 허튼 (Sauerbruch Hutton)설계팀의 GSW 에코 타워 (GSW eco-tower)로 독일과 영국의 건축 전통의 특유한 어우러짐을 선사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동서독의 통일 이후로 이 도시를 가로 막고 섰던 장벽의 흔적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거리 위에 장벽이 서 있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던 흔적이 이따금씩 보이지만 장벽의 물리적 존재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렇지만 동서독 간의 심리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격차는 통일 이후로 그다지 완화되지 못했음을 베를린의 옛동독 구역에 발을 디딛는 자라면 느낄 수 있다. 신고 (新古) 건축물들이 뒤섞여 한데 녹아들어 있는 서베를린과는 대조적으로 동베를린에서는 지금도 옛 나치식 건물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곤 한다.

슐로스플라츠 (Schlossplatz)에 1967년 세워진 팔라스트 데어 레푸블릭 (Palast der Republik: 공화국의 궁전이라는 의미) 동독 국회의사당 (Parliament) 본부는 하얀색 대리석과 동(銅)과 유리가 부서진채 그대로 방치되어 빈 건물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서독에서는 이미 오래전 폐기해 버린 노랑색 거리 전차가 지금도 동부 베를린의 한산한 거리를 운행하는 모습과 서늘한 시민들의 표정에서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옛동독의 과거상을 엿보게 해 준다.

* 이 글은 본래 『ASIANA』 아시아나 항공 기내지 2003년 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한 사업가로부터 듣는 미술 컬렉터 되는 법

ART COLLECTING

아트 컬렉션을 향해 바치는 한 성공 사업가의 평생 열정

하나은행 트랜스트랜드 (Transtrend) 지 2001년 가을호 기사 첫 페이지. [이 기사에 등장하는 그 어떤 실제 인물과 무관함]

하나은행 트랜스트랜드 (Transtrend) 지 2003년 가을호 기사 첫 페이지. [이 기사에 등장하는 그 어떤 실제 인물과 무관함]

왜 미술작품을 수집하시나요?
 미술 컬렉터들을 만나면 의례 ‚왜 미술작품을 수집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이면 백 의례 ‚그냥 미술이 좋아서’라고 대답을 합니다. 대답이 그러할지는 웬만큼 알만한 질문자라면 능히 미리 짐작을 할만도 합니다만, 되반복해 던지게 되는 단골 질문이자 대화를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단골 화두이기도 하지요.

경우는 이번 만나본 칼하인츠 에슬과 아그네스 에슬 부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수집해 온 미술작품들을 모아 미술관을 열어 운영할 것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미술가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어가는 동안 맘에 드는 작품들을 사 모으다보니 어느새 컬렉션의 규모가 커져 있더군요.“ 라고 차분하고 나트막한 미성의 소유자 칼-하인츠 에슬 관장은 그 특유의 겸손함으로 대답합니다.

„돈을 헛되게 낭비하거나 변덕스러운 소비에 내맡기지 말며 개인적인 부와 소유물을 여럿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삽니다.“라고 말하는 칼-하인츠 에슬 관장은 남이 시키지 않은 청교도적 공리(公利) 의식에도 민감한 인물입니다. 비엔나 미술계에서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프로테스탄트교 신앙(카톨릭 구교가 지배적인 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는 특이한 경우)을 배경으로 성장한 두 부부에게서는 여지없이 근면검소가 배어있는 옷매무새와 허식없는 자태가 풍겨나옵니다.

칼하인츠 에슬과 아그네스 에슬 부부(Agnes and Karl-Heinz Essl)는 오스트리아에서는 현대미술 분야에 한한 가장 방대한 규모의 미술작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개인 미술소장자들입니다. 역사를 더듬어보자면 오스트리아에서 부부 미술 컬렉터의 선례는 이미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장부 마리아-테레지아 (Maria-Theresia) 여왕의 아들이자 독일 작센-테셴 (Sachsen-Teschen) 지방의 군주이기도 했던 알베르트와 마리-크리스티네 공작 (Duke Albert & Marie-Christine) 부부는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는 부부 미술 컬렉터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들이 평생에 걸쳐 수집했던 서양 고전 미술품들 가운데 독일 르네상스의 대가인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의 그래픽 작품 전작 컬렉션은 오늘날 비엔나에 자리해 있는 알베르티나 컬렉션 미술관 (Albertina Collection)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이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 유산의 크나큰 자산이자 자부심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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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룽 에쓸 쿤스트하우스 2층 전시장 광경. © 2000 Photo by C. Richters.

잠룽 에슬은 현대미술을 위한 집입니다. 
1999년 11월 5일, 에슬 부부는 잠룽 에슬- 현대미술 (Sammlung Essl – Kunst der Gegenwart)이라는 개인 미술관 건물을 짓고 두 부부가 지난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모아 온 미술 작품 컬렉션을 대중에게 처음 공개했습니다. 『에슬 컬렉션 – 최초 공개 (The Essl Collection: The First View)』 展이라는 제목을 달고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 큐레이터 루디 푹스 (Rudi Fuchs, 前 네덜란드 암스텔담 스테델릭 미술관 관장)의 기획으로 부쳐진 전시였습니다.

흔히들 오스트리아 미술하면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에곤 실레(Egon Schiele), 또는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를 떠올리는 것이 고작인 현실 속에서 오스트리아적 특유의 감수성과 미적 전통을 간직한 에슬의 미술 소장품을 활용해 전시로 기획 공개하는 일은 적잖이 고무적인 사건이었다고 푹스 큐레이터는 이 첫 전시 서두에서 고백하기도 했었습니다.

20세기초 파리를 비롯한 여타 유럽의 미술 중심도시들과는 대조적으로 비엔나에서는 인상주의 (Impressionism) 사조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할 정도록 미미했습니다. 그대신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실레, 코코슈카,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 같은 표현주의 (Expressionism) 계열의 회화 사조가 두드러지게 전개되었고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각광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같은 전통은 이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전개된 오스트리아 앵포르맬 (Austrian Informel)과 행위주의 (Aktionismus) 계열 미술로 이어져서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굳건히 계승해 오고 있습니다.

이곳 오스트리아에서 이름하듯 잠룽 에슬(에슬 컬렉션이라는 의미)은 우리말로는 에슬 현대 미술관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였던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Adorno)가 지적했던 것처럼 „박/미물관(musuem)이란 과거를 보존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엄밀히 정의해 보건대, 박물관학/미술관학에서 미술관이란 역사적 시간과 학문적 검증을 거쳐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유물 (artifacts)이나 미술 작품 (works of art)을 보관하고 보존 및 복원 책임을 지며 학술적 연구를 위한 자료제공처 역할을 하는 미술품 대(大)보관창고를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미술관이라는 어휘는 어느 누군가 지적했던 것처럼 ‚미술품이 최종 도달하는 무덤’같다는 인상을 주는게 사실이지요.

반면, 현대-동시대 미술 (contemporary art)이란 고전기 미술과 근대 미술과는 달리 생존 미술작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전시 활동을 펼쳐 가며 미술사학적인 가치평가와 검증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지요. 결국 현대 미술은 ,계속 진행중에 있는 (on-going) 미술’이니만큼 미술관이라는 막다른 제도적 울타리에 보다는 전시장 (exhibition hall) 또는 쿤스트할레 (Kunsthalle)와 같이 현장감 느껴지는 공간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에슬 부부는 그들의 미술관을 ‚미술의 위한 집 (A House for Art)’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어휘 즉, 쿤스트하우스 (Kunsthaus)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고집합니다.

한 아트 컬렉터 부부의 작지만 큰 출발 
사실 이 잠룽 에슬 현대미술관이 에슬 관장의 이름을 달고 개관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은 오스트리아에서 제일 돈많은 갑부 사업가중 한 사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미술 컬렉터 칼하인츠와 아그네스 에슬 부부 Photo: Frank Garzarolli © Sammlung Essl Privatstiftung, 2009.

미술 컬렉터 칼하인츠와 아그네스 에슬 부부 Photo: Frank Garzarolli © Sammlung Essl Privatstiftung, 2009.

현재 그가 소유주 겸 최고경영인으로 운영하고 있는 회사는 바우막스 (Baumax)라는 전문 건축 자재 및 DIY 건축 주택 자재품 제조판매 업체로서,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중유럽권은 물론 동유럽권 시장에 117개 대형 체인점을 두고 있는 유럽 주택 개량 엄계의 선두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업계 재벌로 유명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꿈꿔 왔던 것처럼 지금은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칼-하인츠 에슬. 실은 그도 1970년대 동안 10여년 넘게 직장일로 바쁜 일과를 쪼개 틈틈이 짬을 내어 드로잉과 유화 수업을 받아가며 습작 활동을 했던 적 있는 그 자신 아마츄어 미술가였다고 합니다. 아내 아그네스의 경우처럼 미술을 좋아하시던 양친 덕택에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들고 집안 구석구석마다 온갖 일상 수집품들과 골동품들이 팔꿈치와 소매를 스치는 분위기에서 자랐던 것이 미술과 맺게된 오랜 인연의 출발이 되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에슬 관장은 „내 못말리는 수집병은 우리 집안 대대로 물려 받은 유전자 속에 숨쉬고 있는가 봅니다“라고 덧붙이면서 그 특유의 수줍은듯 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흔히 오스트리아인들은 그 어느 다른 나라 국민들과도 견줘도 뒤지지않을 왕성한 수집가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미술품 수집을 향한 집착욕을 순순히 시인하는 에슬 관장도 여지없는 오스트리아인인 셈이지요.

1950년대 말엽에 결혼한 에슬 부부는 1년여 동안 미국에서 지낼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아내 아그네스가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일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였지요. 아들 칼-하인츠 2세를 잉태하기전인 신혼기까지만해도 아내는 미술계에서 일하고 싶어하던 야망찬 커리어 우먼이었지요.“ 이 젊은 두 부부에게 뉴욕에서의 달콤한 밀월기가 50년대 뉴욕 미술계의 창조적 폭발력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목도할 수 있었던 일생의 전환기가 될 줄을 누구 알았을까.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을 위시로 해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던 당시 뉴욕 미술계를 보고 우리 둘은 흥분을 금치 못했지요. 그 전까지만해도 미술사에서 그만큼 파격적인 미술 운동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들은 특히 당시 뉴욕에서 전성기를 맞으며 전개되고 있던 전후 추상표현주의 계열 회화운동에 깊이 감명받았다고 합니다.그리고 그들은 과연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당시 현대 미술 조류와 대등히 견줄만한 당대 오스트리아의 자체적인 미술 사조는 무엇일까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이 분수령적인 계기가 되어 에슬 부부는 오스트리아로 귀국한 후 1960년대초부터 차츰 오스트리아 출신의 현대 화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모으자는 결심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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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쓸 컬렉션 쿤스트하우스 외관 야경. © 2000 Ali Schafler.

미술품 수집은 돈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취미 생활?
 자고로 미술 컬렉팅을 한다하면 흔히 ‚돈많고 눈이 높은 사람들이나 하는 취미 생활’이라고들 생각을 합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투가가치라는 이윤추구적 목적과 혁신적인 기업 이미지 및 홍보효과를 앞세워 미술 컬렉팅을 하는 기업기관들이 많아진 요즘같은 현실에서 미술 컬렉팅과 돈은 뗄레야 뗄수 없는 운명적 관계로 얽혀 있음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돈많고 유명한 사람들 중에는 현대미술 소장가들이 꽤 많습니다. 일례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게펜 레코드 사의 제프리 게펜, 영국의 광고 거물 찰스 사치가 아주 대표적이며, 연예계의 여왕벌 마돈나도 현대미술의 열렬한 팬이어서 벌어들이는 수입중 상당을 유명 미술작가들의 작품 구매에 쓴다고 하는 소식은 국제 미술 시장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미술 컬렉팅이란 아름다움을 수집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고 유지하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지적했던 것처럼 예술적 사물 (cultural objects)은 나와 타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을 구분시켜주는 차별화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도 ‚문화적 자본 (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들어 미술을 소유하고 보존해서 후손에서 대를 물리는 서구 전통적 행위는 아름다움과 미술 작품을 매개로 한 상류 엘리트들의 세력 대물림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미술 후원가 메디치 (Medici) 가족도 바로 그렇게 해서 도나텔로 (Donatello),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라파엘로 (Raffaelo) 같은 거장들을 발굴 후원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 발전에 막강한 기여를 했지 않습니까.

물론 미술 작품 컬렉팅이란 돈이 없이는 여간해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돈만으로 만사해결되는 간단한 취미 활동만은 아닙니다. 미술 컬렉팅이란 화랑계, 미술가 공동체, 국공사립 미술 기관이난 단체를 좌지우지하는 미술계 인사이더들과 친분 관계를 형성하고 지속적인 정보 교환을 요하는 사교 활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히 국제 미술계 사조와 맥을 같이 할만한 오스트리아 미술가와 미술 작품을 물색해야 했던 두 부부는 현대 오스트리아 미술품 수집은 곧 당시 오스트리아 미술계와의 인맥 형성과 연계가 매우 중요함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후반기 동안, 비엔나의 화랑가와 미술계는 사회민주주의 정권의 후한 재정지원과 국가주도식의 미술계 육성 정책으로 인해서 사설 화랑간이나 개인 컬렉터간의 치열한 경쟁 체제나 독자적 자생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합니다. 그 결과 비엔나 미술계와 화랑계는 소규모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아는 얼굴 빤한 공동체여서 이곳 미술계 내부 분위기는 흡사 제2차 대전이 막 끝난 뉴욕 어퍼이스트 거리상에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던 초기 뉴욕 화랑가와도 제법 흡사한 데가 많습니다.

제대로 된 미술 컬렉팅은 제대로 된 미술사의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1960년대 오스트리아의 미술계, 특히 수도 비엔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비엔나 미술계는 한창 비엔나 행위주의 (Wiener Aktionismus) 운동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제2차 대전 독일의 패망을 끝으로 정치경제적 혼란과 불안정의 분위기가 대기에 가득했던 1940년대 말엽,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는 타부와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며 이를 드로잉과 회화 작품으로 표출하여 선배 오스트리아 출신 표현주의 화가인 실레의 회화 정신을 한층 극단적인 경지로 밀어붙인 화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엽 등장한 비엔나 행위주의자 헤르만 니치 (Hermann Nitsch)와 이후 1960년대 뒤따라 등장한 귄터 브루스 (Günter Brus), 오토 뮐 (Otto Muehl), 발터 피힐러 (Walter Pichler) 등과 최근 각광받고 있는 프란츠 베스트 (Franz West)는 바로 이 비엔나 행위주의 전통 선상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미술인들입니다. 이 시기 비엔나 행위주의 운동은 오늘날 비엔나 미술전문가들과 화랑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1960년대말 미국에서 전개된 행위주의 미술과 신체 미술은 물론 가장 최근 주목받고 있는 폴 매카시 (Paul McCarthy)와 최근 영국의 데미언 허스트 (Damien Hirst)의 미술에까지 영감적 원천이 되어 준 선구적인 미술 사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후 1920-30년대 동안 비엔나 미술계에서 벌어졌던 미술 운동은 국제 현대 미술사 전개 발전과 분명 그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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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 『Georg Baselitz – Werke von 1968 bis 2012 』 전에 기하여 기자회견(2013년 1월17일)에 참석하여 연설중인 독일의 화가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모습. Essl Museum, Klosterneuburg bei Wien. Photo © Essl Museum.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에슬 부부의 현대 미술 컬렉션은 1945년 이후로 등장한 이른바 ‚전후 오스트리아 현대 회화’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건축계에서 20세기 중엽까지도 예술성 찬반논쟁에 휘말려 있던 일명 ‚사기꾼 건축가’ 프리든스라이히 훈더트바서 (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그림을 사들이는 것을 출발삼아 두 부부는 미술 컬렉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초, 개인적인 인연으로 알게 된 화가 쿠르트 몰도반 (Kurt Moldovan)의 아텔리에 처음 초대받게 되면서 그들의 미술 컬렉션이 취해야 할 구체적인 방향성을 구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인연을 실마리로 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현대 미술의 개척자 아르눌프 라이너를 비롯한 당대 주요 화가들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지요. 때마침 칼-하인츠 에슬은 아내 아그네스의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1975년 장인이 소유하고 있던 기업체를 통채로 이어받으면서 전에 없이 큰 몫의 기업자금을 책임지게 되었고, 이참에 그 전보다 훨씬 큰 기업 수익금 일부를 미술 작품 구입과 컬렉션 부풀리기에 할애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술가들과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일는 미술작품을 소유하는 것 만큼 중요합니다. 
미술품 구입은 어떤 통로와 방식으로 하느냐라는 질문에 에슬 관장은 대체로 미술가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출발로 해서 미술가-컬렉터 간의 신뢰를 쌓아가는 방법을 이용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사설 화랑이나 미술계 인사들과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전시회 오프닝식 등에 참여해 가면서 미술가들을 소개받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하지만, 우리는 우선 마음에 드는 작품을 점찍은 후 그 작가를 사적으로 접촉한 다음 그들의 아텔리에를 방문하고 친분을 구축해 나가는 편을 선호합니다. 화랑주인들의 상업적인 이해관계나 미술시장이 가하는 상업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점 때문입니다.

„화가들에 따라서는 접촉과 친분 형성이 비교적 쉬운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매우 까다롭고 장기간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 소장 작가인 스페인 화가 안토니 타피에스 (Antoni Tàpies)의 경우, 처음 연락을 취해서 서로 직접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그의 아텔리에로 초대받기까지 3년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맘에 두고 있는 화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때로는 참을성과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인내력이 필요하지요 …”



내 컬렉션은 미술가들로부터 얻은 영감을 미술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는 공간 
„ … 하지만 미술가들과의 만남과 관계 형성 과정이 어떠했으며 얼마나 수월하거나 힘겨웠든지 상관없이 그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보람있고 즐겁습니다. 미술인들은 저마다 깊고 넓은 사유 (思諭)와 다독 (多讀)을 하는 개성적인 창조인들이지요.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보면 일로 지쳤던 나의 몸과 마음에 영감과 에너지를 보충받곤 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사람이란 나이와 경험을 불문하고 끊임없이 배우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라고 에슬 관장은 덧붙이면서 16쪽짜리 미술관 행사 일정표를 건네줍니다.

그가 유독 에슬 현대 미술관 운영에서 일반 관객과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저녁 프로그램과 교육 행사 프로그램에 예산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 자신의 경험을 미술관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시공립 예산으로 운영되는 국가소유 박물관과 미술관들의 경우, 한정된 예산이나 충분치 못한 고용 인력을 이유로 해서 전시 이외의 부대 행사와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충분히 기획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슬 컬렉션은 사설 기관이기 때문에 정부 기관이나 상위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관장인 내가 원하는대로 예산을 배분하고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독자적으로 기획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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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룽 에쓸 쿤스트하우스 외관 모습. © 2000 Photo by C. Richters.

실제로 에슬 컬렉션 현대 미술관은 교육중심의 미술관임을 자랑하고 있어서, 교육 프로그램만을 담당하고 있는 전문 인력만 12명을 별도로 고용해 주별 및 월별 특별 교육 행사를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운좋은 날이면 미술관 교육 담당 직원들 외에도 에슬 부부가 직접 관객들과 만나 특별 강연 및 안내 행사를 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에슬 관장은 매분기마다 미술 관계자들과 언론기자들을 초대해서 에슬 컬렉션의 신구매 작품 목록과 미술관 운영 예산을 공개하는 등 적극적인 PR 전략을 구사해 오고 있기도 합니다.

미술품 구매 선정은 직접하고 관리와 전시 기획과 컬렉션 관리는 큐레이터가 
,1970-80년대 약 20년 동안 주력해 수집해 온 오스트리아 현대 미술에서 시야를 넓혀서 1990년대부터는 미국, 독일, 북구 유럽,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해외 현대 미술작품 컬렉션 부풀리기에 한창이던 에슬 부부는 1990년 중엽, 갑자기 4천여 점에 이르는 크고 작은 규모의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느날 미술품 창고를 둘러보다가 많은 작품들이 창고 한구석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곁에 걸어두고 보려고 산 그림들인데 창고에서 먼지에 묻혀가는 그림들을 보고는 이래서는 안돼겠다 싶더군요.“ 이렇게 해서 에슬 부부는 1995년 에슬 컬렉션 재단 (Sammlung Essl Privatstiftung)을 발족해 가브리엘레 뵈쉬 (Gabriele Bösch) 컬렉션 큐레이터의 책임하에 컬렉션을 관리해 오고 있습니다. [2013년 현재 안드레아스 호퍼(Andreas Hoffer) 선임 큐레이터]

에슬 컬렉션 현대 미술관은 대체로 일년에 4-5차례의 특별 기획전시를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 중 1-2회는 자문위원으로 있는 루디 푹스나 하랄트 제만 (Harald Szeemann) 같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거물급 큐레이터들을 초청해 새로운 주제로 외부 미술관으로부터 작품을 대여해와 전시하는 특별전시가 차지하며, 나머지 2-3회는 이미 에슬 컬렉션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들을 이용해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는 컬렉션 위주의 전시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푹스와 제만 같은 이른바 스타 큐레이터들과 빌란트 슈미트 (Wieland Schmied) 같은 미술사학자들을 자문위원으로 두고 있는 에슬 컬렉션 재단에서 자문위원들의 역할과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얼마만큼 되는가라는 질문에 „자문위원들은 주로 특별 전시 기획일을 하며 실질적인 미술품 구매와 관련한 정보수집과 의사 결정은 나와 아내 둘이서 합니다“ 라고 에슬 관장은 대답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해외 여행을 자주 하게 되는데 그럴때마다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화랑들을 둘러 보며 우리의 취향과 컬렉션에 적합하다 싶을 미술작품과 작가들을 선정하곤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의 미술 컬렉터들을 한자리에서 만나고 친분을 다질 수 있는 국제 아트 컬렉터 협회 모임 등에도 틈틈히 참여하여 정보교환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나직이 귀띰합니다.

미술 컬렉션에 관심있는 여러분께
세상에 어느 누구라도 비판으로부터 면역받은자 없는 법이지요. 에슬 부부의 미술 컬렉션 역시 비엔나 미술계 인사이더들과 언론의 비판과 지적을 면할 수는 없어서 미술관 건립 전까지만해도 그들의 컬렉션은 ‚미술가의 경륜이나 양식을 분별않고 잡다하게 모은 두서없는 마구잡이 수집물’이며 따라서 ‚개성이나 일관성없는 컬렉션에 불과’하다는 놀림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슬 관장은 그같은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는듯 합니다. „나는 한 번 관심을 뒀던 미술가는 지속적으로 작업의 수준과 양식을 관찰합니다. 대체로 한 작가당 5-6점의 작품을 시리즈 식으로 구입을 하되 서로 시기적으로나 양식적으로 연관성이 있는 작품들만을 사지요. 한 번 관심을 두었던 작가라해도 작품의 경향이나 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구입을 멈추고 더 관찰을 합니다“라며 에슬 관장을 자신의 미술품 구매 철학을 피력합니다.

„미술품 컬렉션을 시작하려면 우선 미술을 좋아하고 미술에 대한 열정을 지니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미술을 단순한 투자 가치나 매매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 미술 컬렉터들은 다소 한정된 지갑 사정 때문에 미술 작품을 투자 및 매매 가치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더군요. 돈의 여유가 없었던 젊은 시절 나는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그래픽 작품이나 수채화를 사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

“… 그러나 미술 작품의 가격대가 높든 낮든 미술품 컬렉션을 구축하기 위한 중요선결 요건은 미술 작품을 보고 좋은 작품을 선별할 줄 아는 눈 (eye) 즉, 감식안 (鑑識眼)을 키우는 일“이라고 합니다. „감식안을 갖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미술관이나 화랑을 다니면서 실물 미술품을 보고 독서를 통해서 미술사의 흐름과 이해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으로, 진지한 미술 컬렉터가 되길 꿈꾸는 이라면 누구라도 꼭 기억해야 할 사항: “화랑업자들의 상술이나 작가의 유명세에 휩쓸려 마구잡이로 작품을 사들일게 아니라 컬렉터의 개인적인 감식안과 취향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도록 분명한 방향성과 내적 일관성이 있는 컬렉션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에슬 관장은 당부합니다.

에슬 컬렉션 전시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는 행정구역상 비엔나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비엔나-니더외스터라이히주(州) 경계에 있는 소도시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로 비엔나 도심에서 고속 기차나 시외버스를 타고 15분 가량의 여행으로 닿을수 있는 거리입니다.

때문에 비엔나 도심 국립 미술관들이나 무지움스쿼르티에 (MuseumsQuartier) 시립 미술관 대단지(2001년 가을 개관)에 비하면 주중 관광객과 방문객의 발걸음이 상대적으로 뜸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말이면 도나우강을 끼고 펼쳐져 있는 숲과 맑은 공기를 만끽하며 자동차와 자전거로 에슬 컬렉션 현대미술관을 찾는 연인들과 가족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특히 사교 활동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과 성인 관객들을 위해 이 미술관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이후를 무료입장 시간으로 정해서 성인 관객들과 가족들에게 미술관 건물 내외부 공간을 무료의 향취있는 공간으로 제공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에슬 부부의 쿤스트하우스인 잠룽 에슬은 단지 과거의 미술 작품만이 모여 있는 창고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서로 어깨를 겨누며 살아 숨쉬고 있는 미술의 집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본래 하나은행 발행 문화 계간지 『Transtrend』 誌 2003년 가을호에 출판되었던 글임을 밝혀 둡니다.

로낭과 에르윙 부루엑 형제

INTERVIEW WITH RONAN & ERWAN BOUROULLEC 

부루엑 형제 작품 세계

‚80년대 필립 스탁 이후 프랑스 최고의 유망 산업 디자이너’ ‚낭만적 기능주의’ ‚심플 휴머’ – 최근 국내 프랑스에서는 물론 영국과 대륙권 유럽에서 산업 디자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로낭과 에르윙 형제를 일컫는 몇몇 형용구들이다. 이제 갓 30대에 접어든 형 로낭과 20대말의 아우 에르윙은 최근 크리스티앙 비셰이, 쟝-마리 마쏘, 크리스토프 필레, 마탈리 크라쎄, RADI 등와 더불어 90년대 프랑스 디자인을 대표하는 신세대 디자이너로 꼽히고 있다. 프랑스 디자인계는 80년대 필립 스탁의 독주 이후로 침체기를 겪다가 이들 젊은 신세대 디자이너들이 파리에서 집중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로 디자인 르네상스 시대를 맞기 시작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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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해 주방 (Cuisine désintegré)』 주방 시스템, 1998년, 이탈리아 카펠리니 사의 지원을 받아 프로토타입을 개발했다. Photo: Kreo Gallery, Paris.

형 로낭이 처음 디자인계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90년대 후반기는 유럽계 디자인 제조 및 소매 업체들이 재능있는 신진 유럽 디자이너 물색에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라는 점에서 브루엑 형제에게는 분명 행운기였다. 브르타뉴 지방 농가 가정에서 자연을 벗해 성장한 두 형제는 미술과 공예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오기까지 디자이너가 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형 로낭은 산업 디자인을 공부하던중 우연히 가구 디자인 강의를 수강했다가 디자이너로서의  진로를 발견했다. 1995년 국립 고등 장식 미술 학교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Arts décoratifs)에서 학업을 마치고 프랑스의 문화 보조금을 받아 가구와 세라믹 제품 디자인 작업을 프로토타입 전시를 지속해 가며 클라이언트 모색의 기회를 엿보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동생 에르윙은 조수로서 형의 프로젝트를 도와가며 세르지 국립 미술 학교 (L’École natioanale d’arts de Cergy)에서 순수미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둘은 아직 별다른 클라이언트의 주문이 없는 형편에서나마 1997년 특유의 간결 단순한 형태와 융통성이 결합된 공동작 『조합식 꽃병 (Vases Combinatoires)』을 발표했다. 이 제품은 흰색 폴리프로필렌 소재를 사용해 8개 꽃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친구들에게 물건을 나눠주고 그들이 제각기 사용하는 방법을 관찰하기 좋아한다는 부루엑 형제는 수 백가지 방법으로 형태를  조합분리해 변형할 수 있는 유희적 제품을 만들어보자는데에서 착상했다고 한다.

이어 1998년, 그같은 컨셉의 연장선상에서 부루엑 형제는 사용자의 취미에 맞게 변형가능한 융통성있는 『분해 주방  (Cuisine désintegré)』 주방 디자인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이사를 할 때 주방가구는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한다는 통념을 뒤엎고 서람, 조리 선반, 걸개 고리, 기초 가구 프레임 덮개 등 원하는 부분을 떼어 가지고 가 새로 이사간 집에 설치할 수 있게 한 그같은 무버블 주방 컨셉은 곧 이탈리아의 유명 제품 디자인 제조업체인 카펠리니의 눈에 띄어 파리 가구박람회에서 전시되었다. 이를 인연으로 부루엑 형제는 카펠리니 사를 위한 조명 및 세라믹 액세서리 디자인 프로젝트를 연이어 완성했다. 다시 1999년의 오텐틱스를 위한 꽃병디자인과 영국의 마이클 영이 아트디렉팅 한 SMAK을 위한 목걸이 디자인은 모두 두 형제의 공동 작업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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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침대 (Lit clos) 이탈리아 카펠리니 사의 지원을 받아 프로토타입을 2000년도에 개발했다. 당시 한정수량 8점만이 생산판매되었다. Photo: Kreo Gallery, Paris.

그러나 2000년 이후로 형제는 각자의 정체성 모색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잠시 일부 프로젝트에서 각자의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기도 했다. 이유는 „일부 프로젝트들은 둘 중 한사람의 아이디어가 지배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두 사람의 공동작으로 부르기에 불공평했기 때문“이다.

형 로낭은 기술적인 면에서 그리고 아우 에르윙은 미적 감각 면에서 각각 우월하다고 말하는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작품이 완성되고 나면 둘이 기여한 요소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서로의 아이디어가 총체적으로 녹아 어우려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지명도 높은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프로젝트를 이행해야 하는 만큼 프로젝트의 기대수준이 높을 수 밖에 없다. 자연히 두 사람은 새로운 프로젝트에 임할 때마다 아주 작은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의견을 달리하거나 충돌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하지만 디자인은 팀워크이니 만큼 „서로 의견 충돌이 클 수록 서로를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가운데 좋은 결과물이 나오곤 한다. 반대로 서로 많이 동의하는 가운데 진행된 작품은 오히려  별로였다“라고 에르윙은 대답한다.

2000년 에르윙이 혼자의 이름으로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카펠리니사 전시관에서 발표한  『닫힌 침대 (Lit clos)』는 그해 박람회 이벤트를 통틀어 최고의 화재거리 가운데 하나로 회자되었다. 당시만해도 파리 주변부 생-드니에 자리한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형의 조수로 일하고 있던 에르윙은 어린시절 나무에 지은 놀이집과 어린이용 이층침대의 기억을 더듬어 이 작품의 컨셉을 구축했다고 한다. 『닫힌 침대』 프로젝트는 나날이 비싸지는 지가와 임대료로 인해서 여러명이 한 가구에 모여 살아야하는 요즘의 서구 일상문화로부터 비롯된 지극히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아이디어이다. 상자모양의 이 침대 안에 설치된 조명등과 ‚구멍과 스프링 라운지 의자 (Hole and Spring Lounge Chair)는 형 로낭이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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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라 가구사와 개발 생산한 사무공간 및 사무가구 시리즈 조인 (Joyn).

2001년 카펠리니사를 통해 발표한 『글라이드(Glide)』 실내디자인 시스템 디자인은 부루엑 형제가 두 이름을 다시 나란히 해 밀라노 가구박람회에 선보인 작품. 학생 시절부터 좀고 값싼 임대 아파트에 살면서 수많은 친구들이 드나드는 북적거리는 생활 공간에 익숙해 있던 둘은 이 프로젝트에서 다시 한번 무버블 생활 가구 컨셉을 제시했다. 가벼운 소재를 활용, 컴팩트하고 이리저리 움직여 재구성하기 쉽게 설계된 소파 겸 침대와 선반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부루엑 형제의 작품은 일본의 패션디자이너 이쎄이 미야케 (Issey Miyake)의 관심을 끌었다.  미야케는 도쿄 A-POC 부티크를 큰 성공으로 이끈 후 2000년도에 파리 지점을 개장했다. 그는 ‚이음새없는 재단 디자인 (A Piece of Clothing)’이 주를 이루는 A-POC 매장에 부루엑 형제의 세심성과 휴머있는 디자인이 적격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수차례의 토론과 반복작업 끝에 A-POC 파리 매장은 그래픽이 곁들여진 우유색의 반투명 쇼윈도와 일명 ‚어셈블리라인’으로 불리는 실내 디자인으로 탄생했다.

약 100평방미터 가량의 매장 공간은 코리안(Corian)이 주문 생산한 옷걸이, 선반, 진열대 등이 유기적으로 장식되어 전시장과 의류는 마치 연출된 한 편의 그림을 연상시킨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한마디로 미야케 A-POC 매장은 미야케의 부루엑 형제의 동서양 퓨전 디자인의 한 예를 보여준 실례였다. 부루엑 형제는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일본 미학에 감명받고 카펠리니 의자와 발라우리스(Valauris) 세라믹 꽃병 시리즈를 제작해 추가로 A-POC 매장에 진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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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엑 형제가 디자인한 베제탈 (Végétal) 의자는 스위스의 가구생산업체 비트라에서 개발해 생산중이다. 2008년 밀라노 가구박람회를 통해서 처음 소개되었다.

작년 2002년 2월 1일부터 6월 16일까지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린 바 있는 부루엑 형제의 전시는 지난 5년여 동안 해 온 작업에 대한 중간점검이었다. 이미 2001년도 봄 뉴욕에 있는 콘란숍에서 연 『프랑스 신세대 디자인전 (Paris’s Rising Designers)』을 계기로 부루엑 형제를 눈여겨 보고 있던 테렌스 콘란 경(卿)은 지난  2002년 12월 6일부터 2003년 2월 9일까지 『드로오그 – 2002년 콘란 재단 컬렉션』(콘란 디자인 재단 후원/런던 디자인 뮤지엄 주최)를 전시중에 있다. 콘란경은 올해의 초대 큐레이터로 네덜란드의 드로오그 디자인 대표 기스 바커와 레니 라마커를 초대해 영국화 3만 파운드 어치의 디자인 제품을 구입하게 했는데, 부루엑 형제의 『TV 꽃병』(2000년 작)이 이 컬렉션에 포함되었다는 소식이다.

2002년  독일 쾰른에서 열린 비트라 오가텍 (Orgatec, 10월 22-26일) 디자인 페어와 이어서 11월 2-3일 스위스 랑겐탈에서 열린 디자이너스 새터데이 (Designers’ Saturday) 컨퍼런스에서 전격 소개된 조인(Joyn) 오피스 가구 시리즈는 일관 생활이 통합되고 상하위계 질서 대신 커뮤니케이션이 강조되는 현대 작업 환경을 반영한 디자인이다.

인터넷 환경에서 성장한 젊은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인 만큼 현대 사무실이 요하는 기술적인 융통성, 인체공학,개인적 창의력과 직원간 의사소통을 최적화한 열린 노동 공간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샛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스타 디자이너 시대, 디자인 창조의 맥락(context)를 강조하며 그에 적합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추구하는 로낭과 에르윙 부루엑의 디자인을 계속 주목해 본다.

동생 에르윙 부루엑과의 인터뷰

월간 『디자인』2002년 12월호에 실린 기사 중.

월간 『디자인』2002년 12월호에 실린 기사 중.

Q: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는가?
A: 대체로 아침 5시에 기상해서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그날 해야할 일에 바로 돌입한다.

Q: 평범한 하루 일과를 간단히 묘사한다면?
A: 그날그날 상황마다 좀 다르긴 하지만 하루일과를 보내는 특별한 방법이나 그런 것은 없다.  정해진 작업 시간이나 일과 같은 것도 없다. 스튜디오에서 일해야 하는 날이면 아침 일찌기바로 일을 시작한다. 우리는 프로토타입 워크숍이나 제조 공장에도 자주 들러야 하는 관계로 필요할 때마다 출장도 자주 다닌다.

Q: 지금부터 5년전에 무슨일을 하고 있었나?
A: 형 로낭은 이미 파리 고등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적인 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나는 아직도 학생 신분으로 순수 미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Q: 디자이너나 스승 중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 있다면?
A: 요즘처럼 디자인계의 상황이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와 이슈가 한꺼번에 공존하는 시대에 누구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이탈리아의 거장들 가운데 아킬레 카스틸리오네, 안드레아 브란찌, 그리고 에토레 솟사스의 공예성과 작품규모는 인상적이다. 미국의 60-70년대 디자인에서는의 산업화된 제품 생산 방식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본다. 최근 영국에서는  재스퍼 모리슨과 독일의 콘스탄틴 그르치치를 눈여겨 보고 있다.

Q: 여러 국제적인 프로젝트와 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해 오는 가운데 일과 개인 생활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유지하는가?
A: 우리의 경우 일과 개인 생활 간의 균형은 그다지 생각하지도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특별한 방법도 없다. 일과 생활은 그다지 구분되어 있지 않다. 스튜디오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일터에서 편하고 기분좋은 생활과 일을 함께 하려 노력한다.

Q: 두 형제가 한 팀이 되어 디자인일을 하는 것의 장점과 단점이라면?
A: 장점이라면 두 사람이 하나의 디자인 프로세스에 참여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토론과 의견 충돌을 거치기 때문에 매우 완성도높은 결과물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이라면 둘이 하나의 동일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보면 어떤 아이디어아 결과가 누구의 것이었는가 모호해진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두 사람이 강조하길 원하는 부분, 디테일, 아이디어가 서로 다른 경우도 있다.

Q: 작업에 대한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은?
A: 현대사회가 그렇듯 항상 다른 맥락(context)이 담긴 다양한 프로젝트를 완성했을 때 성취감을 느끼는 것 같다. 예를들어 작년에는 세이코 시계와 협력으로 LCD 라이오 디자인 프로젝트를 담당했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 라디오 회사의 제품 역사를 깊이 배우게 되어 깊이 감명받았다. 또 최근 비트라와 함께 진행한 „벽을 허물어라(Break the Walls) – 오피스 공간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조인(Joyn:Espéce d’espaces)》을 선보였다. 비트라와의 협력을 통해서 디자인의 워크샵에서 자주 작업하면서 디자인의 공예성을 느꼈다.

Q: 창조활동으로서의 디자인과 비즈니스로서의 디자인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유지하는가?
A: 하하(웃음)… 우리는 디자인을 창조 활동일 뿐 비즈니스적 측면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앞서 언급했지만 디자인은 여러 맥락에 따라 달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문제를 정확히 진단 파악하고 그를 해결할 수 있는 정확한 제품을 창조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디자이너들은 복잡한 맥락 속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내가 발표한 『닫힌 침대』는 실제로 유용한 디자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제작비와 유통업체 확보 문제로 인해서 아직도  대량생산 및 판매 방법을 찾지 못했다. 카펠리니사는 높은 생산비를 이유로 판매를 미루고 있다. 우리가 소속해 있는 크레오 갤러리가 고가로 매우 소량을 판매중이다. 카펠리니가 저가로 생산하여 이케아같은 대중유통망을 통해 판매하는 방법도 고려해 봤지만 아직은 실현되지 못했다.

Q: 디자인 잡지를 읽는가? 당신에 대한 디자인 비평 기사는 일일이 읽는가?
A: 잡지는 읽지 않는다. 그냥 훑어만 본다. 대중매체는 너무 자주 독자를 오도하는 경향이 있다. 책은 항상 읽는데 요즘은 공상과학 소설을 읽고 있다.

Q: 음악은 듣는가?
A: 음악은 항상 듣지만 그다지 신경써 가려 듣지는 않는다. 우리의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친구들이나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가져오는 CD가 많아서 그걸 다 듣기에 바쁘다.

Q: 지금부터 10년 후 무엇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하나?
A: 자세한 미래에 대한 계획은 우리도 갖고 있지 않다. 디자인 환경과 맥락이 변해가는 것에 따라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발견해 나가려고 한다. 의자, 꽃병, 악세서리 같이 우리가 해 온 기본적인 디자인 아이템들도 계속 디자인할 생각이다.

로낭과 에르윙 부루엑 형제 프로파일
로낭과 에르윙 부루엑 형제 (Ronan & Erwan Bouroullec)는 각각 1971년과 1976년에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현재 프랑스 셍-드니(Saint-Denis)에서 거주하면서 2인조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작업하고 있다. 카펠리니 (Capellini), 보피 (Boffi), 해비탯 (Habitat), 리탈라 (Littala), 로젠탈 (Rosenthal), 마죠 (Magio), 로셋 (Roset), 솜머 (Sommer), 라 모네 드 파리 (La Monnaie de Paris), SMAK Iceland 등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제품 디자인 생산회사 및 디자인 숍 등과 협력하여 프로젝트를 당담해 왔다.

로낭과 에르윙 형제가 디자인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1998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살롱 드 뮈블르 가구박람회에서 심사위원상 그랑프리를 거머쥐면서부터. 연이어 두 형제는 라 빌르 드 파리 디자인 공모전 그랑프리, 1999년에 ICFF 뉴욕 베스트 뉴디자이너 대상(Best New Designer Award, New York), 그리고 2001년 대표작 ‚스프링 체어’로 콤파소 도로(Compasso D’oro) 수상후보작으로 지명되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왔다.

그들의 일부 대표작들은 현재 파리 조르쥬 퐁피두 센터와 뉴욕 근대미술관 (MoMA)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2000년 이쎄이 미야케가 파리에 개장한 ISSEY MIYAKE A-POC 전시장겸 패션 부티크에 소개된 두 형제의 패션 아이템과 실내 가구 디자인은 큰 화재를 모은 바 있으며, 곧 이어 도쿄에 있는 마야케 디자인 스튜디오 갤러리 (Miyake Design Studio Gallery)에서 전시회를 열어 일본인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가장 최근 전시로는 파리의 갤러리 크레오 (Galerie Kréo)(2001년 3얼 31일-7월 28일), 런던 디자인 뮤지엄(2002년 2월1일-6월 16일), 쾰른 오가텍 2002 디자인 박람회(조인 오피스 가구 비트라 프로젝트 , 10월 22-26일), 제9회 디자이너스 새터데이(2002년 11월 2-3일, 스위스 랑겐탈)가 있다.

* 이 글은 본래 월간 『디자인』지 2002년 1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으로 최신 정보가 아닐 수 있습니다.

 

피터 빌락 타이포그라피

PETER BILĂK INTERVIEW WITH MONTHLY DESIGN KOREA

디자이너 프로파일
신세대 그래픽 디자이너 겸 디자인 디자인 평론가, 저술인, 교육자, 잡지 편집인은 물론 디자인 전시회 기획자 등 로 활동하고 있는 피터 빌락. 이제 갓 서른살을 넘긴 그는 현재 네덜란드의 행정도시 헤이그에서 작년인 2001년 봄에 설립한 피터 빌락 그래픽 타입 웹 디자인 앤 비욘드 (Peter Bilǎk : graphic, type, web design & beyond)라는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웬만한 중견 디자이너에 못지 않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디자이너다. 작년 2001년 한국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타이포잔치“ 타이포그라피 비엔날레에서도 출품한 경력이 있기도 하다.

빌락은 본래 타이포그라피 디자인을 통해 디자인계에 첫발을 딛은 후 줄곧 서구 유럽과 미국에서 국제적인 경험을 쌓아가면서 경력을 쌓은 케이스. 옛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인 그는 현재 슬로바키아에 위치해 있는 브라티즐라바 미술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타이포그라피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다. 수학 도중 국제 교환학생 과정과 인턴 수련과정을 통해서 영국과 미국에서 디자인 환경을 익힌 후 파리에 있는 국립 타이포그라피 아틀리에 (ANCT, Atelier National de Création Typographique)에서 타이포그라피 및 타이포 디자인 공부를 마쳤다. 프랑스에 있는 한 유명 타이포그라피 디자인 회사에서 1년간 일을 한 후 연구장학금을 받고 네덜란드 마스트리히에 있는 얀 반 아이크 미술 아카데미 (Jan Van Eyck Akademie)로 건너가 비디오를 통한 타이포디자인의 가독성을 주제로 한 연구과정을 2년만에 마치고 이를 인연으로90년대 중반부터 네덜란드의 유서깊은 그래픽 디자인 대행 회사인 스튜디오 둠바 (현재 헤이그 소재)에서 5년여간 그래픽 관련 디자이너로 근무했다.

슬로바키아 출신인 젊은 그가 타이포그라피 및 그래픽과 웹 디자이너로서 디자인 수준이 높기로 잘 알려진 네덜란드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유로는 빌락이 타이포그라피와 그래픽 디자인 전통이 깊은 동유럽권 출신이라는 점이 적잖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처럼 그래픽 및 서체디자인 역사가 깊은 서구 유럽의 전통과 달리 특히 근대에 접어들어 동유럽권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사회적 요구에 부합하는 효과적인 의사소통 기능과 그래픽 디자인이 요하는 특유의 예술성을 두루 만족시키는 복합적인 디자인을 창조해야 하는 숙제을 안고 있었고 바로 그같은 디자인 문화가 잠재적으로 빌락의 디자인에 영향을 끼쳐왔다고 말한다. 여기에 건축가와 디자이너란 전천후 만능인 (Jack-of all-trades)이며 따라서 고소득과 고급 지성인급 직업인으로서 대접받는 특수전문인이라는 관념이 자리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그래픽 디자인 문화에서 비추어 볼 때 빌락은 이른바 그가 알고 있는 „디자이너의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원리원칙대로 수행하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빌락이 처음 그래픽 디자인계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시기는 지난 95년경 공모전을 통해 유레카라는 서체를 응모하여 수상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이미 90년대 초엽 그가 미국에서 디자인 수련과정을 하던 중 한창 미국을 주도로 유행하기 시작한 디지틀 서체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때가 바로 이 즈음이었다. 이리저리 날뛰듯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디지틀 서체가 지니는 특성에 매료되어 서체의 비가독성 (illegibility)에 대해 관심을 갖고 폰트숍 (FontShop)에 손수 제작한 서체를 판매하기도 했던 그 대표작들이다.

이후 파리 국립 타이포그라피 아틀리에에서 공부하던 중 그는 다시 서체의 가독성과 실용성에 다시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가독이 쉬우면서도 독자 마다의 개별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서체를 제작하자는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결과 탄생한 서체가 오늘날 동유럽 언어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유레카체(Eureka)인데, 이 서체는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를 비롯한 동구유럽 문자에 많은 각종 액센트 표기와 특유의 시각적 리듬 조화가 잘 이루어진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하다.

서체 디자인이 빌락의 핵심 디자인 창조활동인 만큼 그는 독자적으로 설립한 온라인 폰트샵 티포테크를 통해서 폰트 신제품을 지속적으로 발표 판매하고 있기도 하다. 90년대 중엽의 실험적 성격이 강한 홀리 카우체 (1995년)와 챔폴리언체 (1996년)과 대조적으로 가장 최근 페드라 상스 (2001년) 및 페드라 모노체 (2002년)는 디지틀 시대를 반영하듯 단순간결한 스타일과 컴퓨터 디스플레이 최적화를 고려한 것이 특징이다.

디자인 비평과 저술활동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디자인 창조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2000년도 5월에 창간한 <닷-닷-닷(dot-dot-dot)> 디자인 전문지 편집 활동이다. 빌락 외에도 유르겐 알브레히트, 톰 운페르자그트, 스튜어트 베일리 등 총 4명이 모여 창간한 이 잡지는 현재 스튜어트 베일리와 빌락이 주요 책임 편집인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일년에 2번씩 간행되고 있다(http://www.dot-dot-dot.org)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는 이미지 위주의 포트폴리오식 편집 아니면 저널리즘 리포트식 편집이 주를 이루는 여타 기존의 대다수 디자인 잡지들에서 느꼈던 못마땅한 점들을 과감히 수정하고 현재 디자인 출판물들이 놓치고 있는 요소들을 추가하여 디자인 잡지들 간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간행물을 만들어 보자는게 <닷-닷-닷>의 창간 취지라고 그는 말한다. 일명 창조적인 비평 저널리즘을 추구한다고 하는 이 잡지는 그래서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한정된 주제 이외에도 그래픽 디자인과 관련된 각종 시각 문화 현상에까지도 관심을 두고 그에 적합한 기고를 편집에 추가한다.

다음은 피터 빌락과의 인터뷰 문답 내용:
디자인 : 당신은 디자인 창조 작업 외에도 디자인 전시 기획, 국제적인 디자인 전문지 비평 기고 활동, 강의, 직접 창간한 <닷-닷-닷>지 편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같은 비평 활동은 당신의 디자인 창조작업에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가?

빌락: 언급한 이상의 활동들은 모조리 동등한 중요성을 띠고 있으며 내 디자인 작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나에게 디자인 기고활동은 디자인 창조와 똑같이 중요하다. 일부 디자이너들은 자기네들이 ‚시각적으로 사고한다’며 글쓰기와 디자인하기를 분리하곤 한다. 하지만 디자이너란 사실상 작업에 투여하는 시간보다 자기의 작업에 대해 설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임을 염두해 본다면 디자인에 대해 사고할 줄 안다는 것은 큰 맥락에서 볼 때 여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디자인 평론가라고 자처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은 순수히 디자이너라고 여기며, 글쓰기에 임할 땐 아주 아주 느린 속도로 곰곰히 신경을 써가며 글을 쓰지만 글을 씀으로 해서 비로소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오로지 타이포 디자인 혹은 강의만을 하는 것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여러가지 활동을 동시에 하는 것을 너무 즐겁게 하고 있으며 그런 창조외 활동들이 그 모든 활동들 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디자인: 훌륭한 타이포그라피 디자이너는 동시에 훌륭한 그래픽 디자이너가 될 잠재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가?

빌락: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그같은 예는 현실에서도 흔하다. 나는 훌륭한 타이포그라피 디자이너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그래픽 디자이너이거나 그 역의 경우의 예가 없음을 언제나 이상하게 생각해 왔다. 그 두가지 재능은 두뇌의 서로 다른 부분과 연관되어 있는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뭏튼 그 둘은 미시적 대(對) 거시적 시각을 요하는 재능이며 어떤 이유에 있어서인지 몰라도 웬만해서는 동시에 겸비되지 않는다.

디자인: 슬로바키아 출신 디자이너로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것의 장점과 단점은?

빌락: 분명 단점이라면 우선 사회적 배경,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하고 법률적인 문제에 휘말리기 쉽다는 점 등이다. 타국에서 외국인으로서 여유있고 의미있는 인생을 누릴 수 있는 위치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장점이라고 한다면 양쪽 문화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키울 수 있다는 점, 보다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지역적인 편견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일 게다.

디자인: 당신은 네덜란드 외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도 교육을 받고 직업적인 경험을 쌓았는데 결국 네덜란드를 작업지로 선택한 이유는?

빌락: 사실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된 이유를 내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인생사가 그렇듯 여러차례의 우연에 결과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단지 네덜란드의 작업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꼭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디자인: 당신은 현 네덜란드의 시각문화와 비교할 때 자신의 디자인 혹은 디자인 양식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당신이 네덜란드에서 인정받는 타이포그라피 및 그래픽 디자이너로 자리잡게 된 것이 그 분야 전통이 깊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했다고 보는가?

빌락: 잘 알려져 있는 바대로 네덜란드인들은 상당히 관용적이다. 나는 내가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임이 내 직업생활에 그다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 배경을 저어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단지 어떤 특정 배경 출신이라고 해서 더 우월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그다지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내 출신은 내 선택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다만 내 능력 혹은 내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따라 인정받기 원한다. 하지만 물론 특정한 교육이라든가 성장시기 영향요소로 인해 유전받는 감성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다. 나는 체코 시문학과 네덜란드적 직접성에 두루 영향을 받았다고 여기며 이 두 작업환경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디자인: 작년 2001년 4월경 몸담고 있던 스투디오 둠바를 떠나 독립된 디자인 스튜디오를 설립한 후 성과는?

빌락: 지금 생각해 보면, 스튜디오 둠바를 떠난 것은 참 잘 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 결과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들에 열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고 싶었던 타이포 디자인과 강의에 더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좋한다. 나는 네덜란드 울타리를 벗어나 현재도 프랑스, 독일, 영국에 있는 친구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디자인: 시각을 돌려서, 당신의 활동상은 고국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 그리고 네덜란드와 동구유럽의 디자인 교류는?

빌락: 지난주 나는 내가 그래픽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던 브라티즐라바 미술 디자인 학교에 초대되어 방문했다. 매우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나는 고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편이긴 하지만 공식적인 행사로 모교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방문 동안 내가 네덜란드에서 하고 있는 작업을 설명하는 기회를 가졌다. 고국을 떠나 있음으로 해서 나는 고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더 분명하게 살필 수 있게 되었고 이상하게도 그로 인해서 고국에 더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프라하와 브라티즐라바 두 곳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정보제공, 출판활동, 전시회 등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디자인: 클라이언트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빌락: 내가 하는 작업은 매우 독특한 한정된 클라이언트의 취향을 자극하는 것 같다. 주로 그들은 친구들이나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작업하기도 쉽다. 나의 경우 내가 잘 개인적으로 알지못하는 클라이언트와 작업하는 일은 거의 없다. 상호신뢰와 존중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클라이언트와의 협력은 대부분 매우 보람있게 마무리되곤 한다.

디자인: 최근 당신의 관심을 차지하고 있는 최근 프로젝트나 개인적인 창조작업은 무엇인가?

빌락: 나는 요즘 타이포 디자인에 훨씬 시간을 많이 투여하고 있다. 오픈타입의 가능성에 매우 큰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새로운 서체개발에 계속 전력할 생각이다. <닷-닷-닷> 제5호가 지금 막 인쇄를 마치고 출간되었다. 이 잡지는 제 발이 달린듯 새 호가 출간될 때마다 자연스럽게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공동편집자인 스튜어트 베일리와 나는 현대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책을 내년까지 출간(템즈앤허드슨 간)하기 위해 집필에 한창이다. 이 책은 내가 작년 브루노 비엔날레의 행사 일부로 기획했던 현대 네덜란드 디자인 전시를 한발짝 전개시킨 창조적 기록물이 될 것이다.

디자인: 당신의 최근 지적/창조적 관심사는?

빌락 :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책읽기를 아주 많이 하고 있다. 칼비노, 카프카, 고다르, 에코 등을 읽는다. 그리고 음악, 영화, 문학 할 것 없이 여러 다양한 분야의 ‚역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는 타이포 디자인의 역사적 측면을 이해하는 매우 도움이 된다. 타이포 디자인은 필히 역사적이고 축적적인 산물이므로.

디자인: 당신의 단장기 미래 계획은?

빌락: 책읽기에 시간을 더 만들었으면 좋겠다. 최근 급격히 내게 중요한 요소이므로.

인터뷰 진행/편집 박진아

*이 글은 본래 월간 『디자인』지 2002년 10월호에 실렸던 기사를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오스트리아 라디오 백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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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Credits, ORF.

오스트리아 라디오 백년사

오늘날같은 디지틀 문화속에서, 대중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 라디오는 오래전 텔레비젼과 컴퓨터 단말기같은 시각 매체에 자리를 내주고 만 한물 간 소리상자가 되어 버렸다. 물론 택시나 버스에 올라 타거나 구멍 가게에 들어 서면 라디오 소리를 들을 수 있긴 하지만, 매체의 대중 흡입도 면에서나 현장감 전달면에서 시각 화면이 달린 매체에 비할 바가 안된다.

하지만 이미 19세기말엽부터 인류 기술발달사에서 라디오는 적잖은 기여를 했다. 미국의 새뮤얼 모스가 모스코드를 이용한 전보기를 발명한 1836년도 이후, 전자기파를 이용한 무선전신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여 20세기 전후부턴 군사용 전신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대륙을 건너서까지 전파를 주고 받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20세기 초중엽, 라디오가 처음 전세계에 보급 대중화되기 시작하면서 라디오는 대중들의 중요한 정보원 역할을 했다. 역사의 흐름과 그에 따른 시대적 필요성에 따라 라디오의 역할은 물론 외양 디자인도 변천을 겪었는데, 지난 1세기동안 오스트리아에서 전개된 라디오 변천사를 살펴보는 전시가 오스트리아의 한 북쪽 지방 (Niederösterreich)에 있는 고성(古城) 샬라부르크 (Schallaburg)에서 열리고 있어 흥미를 끈다.

오스트리아에서 라디오가 처음 탄생한 해는 1902년. 요한 프리치와 그의 아들 폴커 프리치가 전파송수신기를 만들어 실험하다가 잡음없는 소리전송수신에 성공해 오스트리아 최초의 무선통신기 기술을 탐험한 셈이었다. 그후 1904년 오토 누쓰바우머가 라이오파를 이용해 전세계로 음성을 전달하는 무선기술을 한단계 발전시켜서 드디어 1923년에 오스트리아 라디어 전파국이 빈에 설립등록을 해 1924년부터 RAVAG (라디오-교통社)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1934년 히틀러가 이끄는 민족사회당에 의해 RAVAG 건물이 장악당하고 1938년부턴 제국라디오사회라는 조직명으로 개칭하여 나치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39년 폭탄공격으로 제국라디오사회 건물이 파괴되고, 이후 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종전을 맞자 켈레멘스 홀츠마이스터의 재건축으로 빈 라디오송신국이 다시 세워져 임시 라디오 방송국 역할을 했다.

나치하의 패전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종전 즉시 약 8년 동안 러시아, 미국, 프랑스, 영국 등 4개 연합국의 통치기간을 거치면서 이상의 4개국 언어로 방송되는 4개 별도 방송국을 운영했다 (러시아의 라디오 빈, 미국의 롯-바이스-롯, 프랑스의 센더그루페 베스트, 영국의 센더그루페 알펜란트). 1953년 4개 점령국들이 철수하자 라디오 외스터라이히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인 라디오 방송을 다시 시작했고, 60년대 말부터 영국 BBC의 방송프로그램 형식을 모델로 삼아 오늘날의 Ö1 (문화전문 채널), ÖR 지방채널, Ö3 유럽 최초의 팝뮤직 방송채널로 자리잡아 왔으며, ORF 방송국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1969년에 창설되어 팝뮤직과 고전음악을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1979년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외국인 (영어권 및 프랑스어권)을 위한 블루 다뉴브 라디오가 FM4 (주파수103.8)에서 지난 20년 넘게 방송되어 왔으나 지난 2000년 보수극우 연합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예산 동결과 정책적 이견의 결과로 결국 블루 다뉴브 라디오는 사라지고 그 대신 이른 오전부터 오후 2시까지만 영어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는 청소년 대상의 문화방송국으로 전환해 해외거주자들의 아쉬움을 사기도 했다. 현재는 ORF(ORF1과 ORF2) 국립 방송국 산하 소속 Ö1, Ö3, FM4 라디오국(orf.at) 말고도 오스트리아에는 54개 사립 라디오 방송국이 있다고 한다.

* 이 글은 2002년 6월 『디자인 정글 (Design Jungle)』에 실렸던 글 [원문 보기]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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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p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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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광고 40년

REWIND 40YEARS OF DESIGN & ADVERTISING FROM THE D&AD AW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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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2중 프로젝터 실험영화 『첼시 걸스(The Chelsea Girls)』 홍보용 포스터는 앨런 앨드리지(Alan Aldridge)가 디자인해 1969년 D&AD Yellow Pencil 광고상 포스터 예술 부분 대상을 받았다.

영국의 계몽주의 철학자 새뮤얼 존슨 (Samuel Johnson, 1709-1784)이 말하기를 광고의 영혼이란 모름지기 “약속, 아주 커다란 약속 (The soul of advertisement is a promise, a very big promise)이라고 했다. 광고란  판매를 촉진하고 매출을 극대화하기 위한 효과를 노려 실제보다 과장하거나 미화해서 선전하고 선동하는 행위와 매개물을 가리킨다.

현대사회처럼 텅비고 얕은 이미지와 소리가 만연해 있는 환경에서 광고는 일상생활과 뗄레 야뗄 수 없는 일상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나아가 광고는 제품 매출 향상이라는 단순한 목적 이외에도 제품 브랜드를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전에 없던 새로운 욕구를 조장하며 그 자체만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창조하고 광고바라보고 즐기기라는 순수한 엔터테인먼트 효과까지 안겨준다.

영국 디자인 및  아트 디렉션 (British Design and Art Direction, 이하 D&AD) 협회가 광고 디자인계의 우수작품을 선정 홍보하고 광고산업 진흥을 위해 D&AD 주최 초회 공모전을 개최한 해는 1963년. 이번 전시 『리와인드 (Rewind: 40 Years of Design & Advertising from the D&AD Awards)』전은 지난 40년 동안 영국 광고사에서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되는 대표적인 작품들을 총정리해 보여준다. Continue reading

최고 품질의 제품이 곧 광고

루치안 베른하르트가 디자인한 보쉬의 자동차용 헤드라이트 광고. 사실적인 형태 묘사와 강렬한 원색과 큼직한 타입페이스가 특징적이다.

초창기부터 60년내까지 보쉬(Bosch) 광고 특별전

“광고는 제품매출의 필수요건”- 보쉬 사보 『Bosch-Zuender』는 이미 1919년, 그래픽 인쇄광고가 기업문화와 매출고에 미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철통처럼 견고하고 오래가는 가전제품 생산제조업체의 대명사 보쉬 (Bosch).

보쉬가 오는날 독일의 전자 제품 브랜드의 대명사로 자리잡기까지에는 이 회사가 100년 넘게 보유해 온 축적된 기술 말고도 시대적 분위기와 문화적 트렌드가 반영된 광고의 역할이 컷음을 지적하는 특별 기획전 『Werbung bei Bosch von den Anfängen bis 1960』이 베를린 독일 기술박물관 (Deutsches Tecknikmuseum Berlin)에서 5월 25일부터 8월 27일까지 계속된다.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정밀기계와 전자기기 워크숍을 운영하던 창업자 로베르트 보쉬 (Robert Bosch)는 1886년 Robert Bosch GmbH라는 회사명으로 본격적인 전자제품 생산 사업을 시작했다. 보쉬의 최초 성공작은 1887년 급속 점화기. 보쉬기술로 자체 개발한 자석 점화기로서 독일을 비롯한 전세계 자동차 제조업체들에 대량 공급하기 시작했다.

1913년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다시 한 번 유명해 졌고, 30년대부터는 냉장고, 라디오, 자동차 라이오를 생산하기 시작, 특히 1932년의 블라우풍크트-라디오 (Blaupunkt-Radio)와 1933년의 보쉬 냉장고는 오늘날 제품 디자인의 고전으로 여겨지는 진품들이 되었다. “기업 아이덴티티”나 “기업 디자인 (corporate design)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훨씬 전인 1909년 보쉬는 유겐트스틸 양식으로 작업하는 그래픽 아티스트인 율리우스 클링거 (Julis Klinger)를 고용, 그 유명한 “보쉬-메피스토 (Bosch-Mephisto)” 로고를 탄생시켰다. (메피스토는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율리우스 클링거가 디자인한 급속 점화엔진 선전용 그래픽 광고. 『파우스트』의 붉은 악마 메피스토는 1910년대 보쉬의 로고로 자리잡아 큰 성공을 이루었다.

1920년대는 그래픽 아티스트 루치안 베른하르트 (Lucian Bernhard)와 더불어 보쉬 그래픽 광고의 “대성황기”를 맞았다. 제품 그대로의 사실적 디테일과 외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예술적 감각이 가미된 색채사용과 타이포그라피가 특징적이다.

1920년대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아르데코 양식의 영향으로 유선형(streamline) 디자인이 지배하는 가운데, 그래픽 디자이너 해리 마이어(Harry Maier)는 ‘운전은 멋진 라이프스타일의 필수품’이라는 이미지를 고취시키는 슬로건과 우아하고 곡선적인 그래픽 광고를 제작했다.

제2차 대전 후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해야했던 50-60년대 독일은 경제 재건이라는 대명제를 반영한 그래픽 광고가 주를 이루었다. 해리 마이어는 텔레비젼의 보급에 발맞추어 TV 스폿광고 그래픽 제작을 맡았고 광고 이미지로 TV 인기 출연자의 얼굴을 이용하기도 해 미스미디어에 의한 광고 판도의 변화를 암시하기 시작했다. 보쉬 제품 광고 80년사 속에 배어있는 사회 문화적 배경을 살펴 볼 수 있는 이번 전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박물관에서 판매중인 전시 카탈로그 (29.80독일 마르크)를 구입.

현대도시의 디즈니화

LEAVE THE CITIES ALONE

관광 즉, 소비로서의 인파의 순환은 근본적으로 이미 진부해진 것을 보러가는 여가활동에 다름 아니다. – 기 드보르

Tourism, human circulation considered as consumption is fundamentally nothing more than the leisure of going to see what has become banal. – Guy Deb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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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팀첸코 (Alexander Timtschenko)작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 (Wild Wild West)』 1999년. 한 익명의 유럽 도시에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건물 분위기로 지은 주제 공원 거리를 사진으로 담았다.

현대 사회의 대도시들은 관광산업의 희생물로 전락하고 있는가? 현대 도시들은 소비와 유흥의 무덤에 불과한가? 작년 12월부터 개장한 이번 퀸스틀러하우스 (Künstlerhaus)에서의 “사이트 시잉-현대도시의 디즈니화 (Site-seeing: Disneyfication of Cities) “ 전시는 특히 오늘날의 유럽 도시들이 대중관광산업, 유흥, 쇼핑, 나이트라이프 (nightlife)라는 자본주의적 소비현상을 제공하는 디즈 공원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 현상을 진단해 보는데 촛점을 두고 있다.

고풍스런 건축물과 진한 역사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해 보라. 외국어를 쓰며 도시를 두리번거리는 관광객들을 그다지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는 현지인들은 심심찮게 눈에 띈다.  현지인들에게 관광객들은 더 이상 이국적인 손님들이 아니라 현지인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하고 싸구려 기념품을 사들고 떠날 소비자들에 불과하다. 유럽의 유명 관광도시들을 거닐다 보면 관광객용 메뉴로 호객행위하는 레스토랑과 기념품 상점들이 집중적으로 개발되있어 흡사 관광객 게토를 맴돌고 있는 듯한 불쾌감까지 경험하기 일쑤다.

한편  자본주의적 경제논리가 발달한 영국이나 독일등지에서는 지역사회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발전을 이유로 일부 도시에 대형 숙박시설, 쇼핑몰, 유료 관람 시설 등의 신건축개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기까지 하다.

그같은 유행을 본따 싱가포르, 홍콩, 일본,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도 도시 개발과 도시 이미지 쇄신 작업에서 어떻게 하면 관광객들에게 잘 팔리는 디즈니형 도시로 만들것을 지향하는 추세이다. “성공적인 도시 설계=잘 꾸며진 디즈니 도시”라는 상업적 소비주의 원칙 때문이다.

전과 달리 지난 20여년 동안 미국과 일본이 주도한  대규모 대중 관광 산업의 발달이 관광 대중화의 원인이었다. 덕분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말로만 듣던 전세계의 국제도시와 유서깊은 역사 도시들을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여행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한편 과거의 유산과 흔적을 간직한 역사의 유럽의 고도시들이나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열대섬들은 시도때도 없이 몰려드는 국제 관광객들로 인해 환경의 균형이 파괴되고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상실하는 안따까운 현실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이탈리아 거리 한구석에는 고을 아낙네나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 대신 모자와 운동화차림을 한 관광객들이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더 자주 눈에 띈다. 파리와 비엔나에서 친한 친구의 초대가 아니고서는 관광객들은 관광객 전용 술집이나 레스토랑에서 정성없이 조리된 식사로 끼니를 때우곤 한다.

그같은 현실 속에서 과연 현대 도시들은 언론이 조작하는 도시 이미지 스테레오타입에서 탈피하고 소비활동의 제공자로 전락하는 추세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전시에서는 이같은 현대사회 현상을 주제삼아 작업하는 13의 유럽출신 미술가 및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 제목 :  사이트시잉 – 현대도시의 디즈니화 | 장소 : 오스트리아 빈 퀸스틀러하우스 | 기간 : 2002년 12월 13일-2003년 2월 9일. Photos courtesy: Künstlerhaus, Wien.

* 이 글은 본래 월간 『디자인』 2002년 3월호에 실렸던 기사를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