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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도시 빈에서 한 편의 환타지아

유태인 이민자들이 건설한 백일몽 같은 근대 음악계 오늘날까지도 ’음악의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19-20세기 전환기 – 빈(Wien, Vienna)은 시기 지성사적으로나 예술사적으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폭발적인 창조적 분위기로 가득했다. 때는 17세기 이후로 지속되어 온 귀족주의 절대왕권이 제 명을 다하여 쇠퇘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하며 상업과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지위까지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신흥부유층의 부르조아 사회가 자리잡기 시작한 격동의 변화기이기도 했다.

19세기초 빈은 물론 전 유럽에서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널리 일반화되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빈은 온 도시 전체가 요한 스트라우스의 월츠 음악으로 들떠 있었다. 이제 음악은 부유한 후원자나 상류층 감상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태인 음악인 타냐 엑스타인(Tanja Eckstein)이 “빈은 생활이 넉넉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도 오페라와 연극을 보러 오페라 하우스와 극장을 찾았을 만큼 문화에 대한 집착이 강한 도시”라고 했을 정도로 음악은 일상 속에 널리 자리잡고 있었다 한다.

특히 근대기 빈 음악계에서 유태인 이민족 후손들의 활동은 매우 활발했다. 에머리히 칼만(Emmerich Kalman)과 오스카 슈트라우스(Oskar Strauss) 처럼 대중 관객을 위한 오퍼레타 음악과 통속주의 계열의 음악가들로부터 근대 음악의 선구자  말러(Gustav Mahler)와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의 파격적인 모더니즘 작곡가들에 이르기까지 유태인 문화사에서는 물론 빈 음악사에서 볼 때도 전례없던 번성기였다.

1860년부터 1900년까지 근 반세기 동안 빈 상류층 귀족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던 빈 오페라 하우스(Staatsoper)를 중심으로 해 빈 음악계 최고 오피니언 리더 겸 음악 비평가로 이름 높던 에두아르트 한즐릭(Eduard Hanlick),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스타 지휘자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와 구스타프 말러, 근대 무음조 음악에 이어 12음조 음악의 창시자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이르기까지 세기전환기 근대기 빈 음악계에서는 전에 없이 많은 유태계 음악인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유태인들이 빈 음악계를 주도하게 된 배경 오스트로-헝거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제프(1838-1916년 집권)의 유태인 포용 정책 덕택에 많은 유능한 유태인들이 합스부르크 왕국의 시민 자격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유태인 출신의 법조인과 정치 자문가들을 가까이 두고 자문을 얻곤 했던 사실은 1999년 개봉된 영화 『소넨샤인(Sonnenschein)』에서도 잘 묘사된 적 있듯이, 특히 중동부 유럽에서 이민 온 많은 유태인들은 상업, 산업, 무역 등 경제 분야에서 활동을 벌여 제국의 경제는 전에 없는 번영에 기여했다. 중산층 이상의 부유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오스트리아계 독일어권 언어와 문화에 완전 동화된 유태인 이민자 후손들에게 문화는 오스트리아인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문화적 교량이 되어 주었다. 곧 유태계 출신의 작곡가, 음악 연주자, 재정 후원자들은 점차 보다 일관적으로 빈 음악계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한 이민족이 타국·타문화로 이민와 정착하여 사회의 정당한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기여를 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빈 세기전환기 정치문화사의 선구적 학자인 칼 쇼스케(Karl E. Schorske)는 동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태계 이민자들이 빈의 주류 상류사회로 진입해 인정받기 위한 전략으로써 빈 문화계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거듭된 이민, 정착, 이산과 박해 속에서 생존해 온 유태인들은 변화에 융통성 있게 적응할 수 있는 직업분야에 전통적으로 종사해 왔다. 그러나 세기 전환기 빈 음악계를 주도했던 유태계 후손들은 은행업, 의사, 변호사 등 중상층 계급 이상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모 밑에서 안정된 경제적 여건과 독일 언어와 카톨릭 문화권 교육을 받고 성장한 ‘동화된 유태인’들이었다.

그같은 논지는 어딘가 나치주의 히틀러가 즐겨썼을 법한 반유태주의적 논리처럼 들리는데가 없지 않은게 사실이지만, 이 당시 지성계(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egenstein), 레싱(Gotthold Lessing), 저널리스트 칼 크라우스(Karl Kraus)), 과학계(심리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 문학계(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아더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를 포함한 빈 문화계는 전에 없이 많은 유태인 후손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게 사실이다.

작업중인 근대 작곡가/화가 아놀트 쇤베르크. 1940년경. Photo courtesy: Arnold Schönberg Center.

빈 유태인과 음악 메트로폴리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주제일지 모르지만 유태 민족과 과거 200여년 간의 빈 음악계의 연관관계는 음악의 도시 빈을 거론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지난 [2003년] 5월 14일부터 9월 21일까지 ‘음악의 도시’ 빈에서는 빈 페스트포헨(Wiener Festwochen) 행사의 일환으로 다양한 음악 관련 행사가 열렸다. 그 가운데 빈 유태인 박물관(Wiener Juedisches Museum)에서는 『콰지 우나 환타지아 (Quasi una Fantasia)』 전이 열려 빈 음악계에 기여한 유태인들의 업적과 그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이 『콰지 우나 환타지아』 전시의 출발점은 근대 모더니즘 운동이 시작될 즈음인 1870년대. 여러 다른 문화적 쟝르와 분야 가운데에서도 유독 음악이 어떻게 유태계 이민자 후손들이 빈 기성문화에 동화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표현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는가를 살펴 보는데서 출발하고 있다. 유태인 이민자들이 법적으로 오스트로-헝거리 국민 자격과 권리가 인정받기 시작한 1867년 보다 훨씬 전부터 음악과 극장 공연 당국은 직업적인 유태인 음악가들을 고용해 왔으며 음악 관객들도 그들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 한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895년, 빈 음악 컨서버토리에서 공부하는 음악 학생 수의 3분의 1 이상을 유태계 가정 출신의 학생들이 차지하였고, 1881년 빈 링테아터(Ringtheater) 극장에서 발생한 대화재에서 사망한 희생자 관객수 9백명 가운데 반 이상이 유태인들이었다. 희생자들은 독일계 유태인 출신 희극 오페라 작곡가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가 쓴 『호프만씨 이야기(Tales of Hoffman)』를 구경하던 관중들이었다. 구스타프 말러가 빈 궁정 오페라단의 최고 지휘자로 임명된 1897년은 빈 음악계가 본격적인 근대 음악사로 진입한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서양음악사는  평가하고 있다. 이어 알렉산더 쳄린스키(Alexander Zemlinsky)와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말러의 근대적 정신을 이어받아 한 단계 진보시킨 대표적인 두 제자들이다.

그러나 흔히 유태인 출신의 음악인들은 모조리 혁신적인 신사고 소유자로서 빈 음악계를 독주했는양 손쉽게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줄 것을 이 전시는 당부한다. 실제로 빈 음악계에서 활동하던 유태계 음악 종사가들 대다수는 획기적인 근대 음악 세계를 개척하기 보다는 바그너풍의 전통 고전 음악 계보를 고수한 전통주의자들이었거나 오퍼레타처럼 중산층 이하의 관중들의 오락을 담당하며 대중 취향에 부흥한 평범한 직업가적 작곡가, 연주가, 무대 가수들이었다.

음악의 도시 빈 산책하기 오늘날까지 빈 중심부를 장식하고 있는 순환도로식 도시 구획 모델은 근대적인 메트로폴리스 건설을 목표로 19말에 정책적으로 설계된 것이다. 고풍스럼고 장대한 양식과 화려한 장식성을 자랑하며 서있는 순환도로상의 고건물들은 모두 이 건설붐 시대에 지어진 것들이다. 일명 “순환도로의 시대(Ringstrasse Era)”로도 불리던 이 때 새로 지어진 건물들은 오스트로-헝거리 제국이 지배하던 여러 주변 국가들로부터 온 각국 이민자들의 주거지 겸 오페라 하우스, 무직페라인(Musikverein), 링테아터 극장(Ringtheater) 등 문화 공연장들이 일제히 지어졌다.

이번 전시는 빈 링스트라세 에라의 형성에 유태민족이 남긴 일상 속의 문화 흔적을 상기해 달라고 촉구한다. 당시 오페라 하우스나 음악 공연 극장 외에도 독특한 음악 공간으로 유명했던 문화공간은 바로 음악 살롱. 살롱은 아는 사람들끼리 알고 모이는 일종의 사교 공간으로서 음악을 연주하고 싶어하는 연주가와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감상자들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듣고 찾아들던 곳이었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 에스켈레스 가족 소장의 옛 음반 2점과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피아노, 후고와 브론치아 콜러(Hugo and Broncia Koller) 부부의 살롱 가구(근대 장식 미술의 대가 요제프 호프만의 디자인)는 20세기 초엽 음악 살롱의 분위기를 재현해 준다.

왜 근대 음악은 청중들로부터 외면당하나? 그처럼 20세기초 음악은 일반 청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일상 문화의 일부였으나 오늘날 사정은 많이 다르다. 예컨대, 근대기 미술 작품은 포스터나 상품으로 인쇄되어 일반 가정과 주변 환경을 꾸며 주지만 근대 음악 음반이나 CD는 잘 팔리지 않는다. 근대 음악은 난해하고 듣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인해서 일반 청중의 외면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인들 사이에서도 회피당하고 있는 현실. 이는 당시 음악을 쓰고 오퍼레타를 작곡한 비엔나 출신 작곡가들이 유태인들이었기 때문이라는게 이번  전시의 결론이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은 바로 그같은 모더니즘 음악의 대중으로부터 소외 현상을 다른다. 그래서 비유태인 출신이던 당시 작곡가 랄프 베나츠키(Ralph Benatzky)는 그의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슈트라우스, 칼만, 팔, 그라니치태테느 아이즐러..이 모든 오퍼레타 작곡가들 중에 유태인이 아닌 사람은 나와 레하르(Franz Lehar) 둘 밖에 없다. 배우나 가수도 비 유태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유태인 출신 오퍼레타 작곡가 레오 아셔(Leo Ascher)와 극작가 율리우스 브람머(Julius Brammer)와 알프레드 그륀발트(Alfred Gruenwald)가 쓴 『빈도보나(Vindobona)』(빈도보나는 유태 민족의 상상 속 히브루 도시) 오퍼레타는 빈 출신의 유태인 작곡가와 극작가들이 그들 머리속에서 상상한 환상의 빈을 그린 작품이다. 1910년에 찍은 한 무대 사진에서 유태인들은 진정 빈 음악계에 완전 통합된 존재들임을 보여준다.

작업중인 음악이론가 귀도 아들러. Photo courtesy: Tom Adler, San Diego.

1920년대에 접어들자 서서히 비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유태인들로 포화된 음악계에 대한  불만감이 만연하기 시작했으며 유태인을 향한 질시와 혐오의 감정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키키리리(Kikiriki)』 지 풍자 만화는 당시 유태인 일색의 빈 문화계를 비꼬듯 시사한다.

빈의 전통적인 유태인 게토 구역이던 제2구역 레오폴트슈타트(Leopoldstadt)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검정색 성직자 제복과 양쪽으로 땋아 내린 머리 모양의 정통 유태교 신자로 묘사된 정통 유태교 이민자들. 하지만 문화계에서 활동하던 대다수의 유태계 후손들은 유태인 게토에 모여살되 정통 유대교 신앙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교나 신교로 개종한 기독교인들었을 뿐만 아니라 “세련되고 교양있는 빈 사람”에 못지 않은 ‘교화된 유태인’이라고 여겼다. 반유태주의는 유태인들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고 하는 비판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이민 민족 내에서의 문화적 긴장과 정체성 갈등에서 일부 기인하고 있다.

양차 대전 사이(1918년-1938년) 빈과 베를린 음악계 음악의 도시로서 빈을 이해하는데 같은 시대 베를린의 음악계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920년대 베를린은 빈에서 온 고전 음악인들과 연예인들이 모이던 미팅포이트였기 때문이다. 특히 빈에서 온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는 당시 베를린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로 인정받았었다. 그는 베를린 음악고등학교(Musikhochschule Berlin)의 총장을 지낸 슈레커는 막스 브란트(Max Brand), 에른스트 크레넥(Ernst Krenek)같은 빈 출신의 젊은 음악가들을 제자로 키우기도 했다.

제1차 대전이 끝난 직후 1924년 슈레커는 빈 시립 음악 페스티벌을 개최하여 근대 음악의 대막을 열었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은 1933년 이후로 유태인 음악인들은 더 이상 베를린에서 공식적인 연주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빈에서는 1938년까지 활동이 허가되었다. 어쨋거나 1930년대부터는 음악계에서 반유태주의가 노골화되기 시작하여 유태계 출신의 음악인들의 활동이 급격하게 둔화되기 시작했다.

나치가 왜곡한 빈 음악계과 명예 회복 왈츠의 황제 요한 스트라우스(Johann Strauss, 1825-1899, 아들)가 실은 조부의 유태인 혈통을 이어받은 부분 유태인이었음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 나치 정권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그토록 자랑거리로 삼았던 작곡가 슈트라우스와 왈츠 음악이 유태인 후손에 의해 쓰여졌음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며, 나아가 월츠를 순수한 독일의 문화적 우상으로 재가공하기 위해 당시 빈 성 슈테판스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슈트라우스 가족의 혼인증명서를 위조하기도 했다.

나치에 의한 일명 ‘독일 민족의 아리아화(aryanisation) 작업’으로 인한 피해자는 또 있다. 귀도 아들러(Guido Adler, 1855-1941)는 이번 전시가 특별 조명한 체코 출신 유태인 음악이론가. 1920년대 말 아들러는 빈 대학 내에 음악학 연구소(Institut Musicologie Wien)을 설립해 음악사와 음악학 이론을 개혁한 음악 학자이나 이 분야 전문가가 아니면 대중에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을 이름이다. 아들러는 나치 시절 나치군이 단행한 독일 민족의 아리아화 작업 과정에서 사유 재산 상당 부분을 압수당하는 등 나치와 관련된 과거사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채 남아있다.

1939년 어느날 귀도 아들러는 빈 음악 협회(Wiener Musikverein)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음악 연구소로 부터의 회원 자격을 박탈한다는 이 내용의 편지는 이 전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오스트리아 유태인은 고향 비엔나로부터 영원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결국 추방되는 것으로 끝날 한낯 백일몽(quasi una fantasia) 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미 84세난 아들러는 편지를 개봉하지도 않은채 나치의 모욕 끝에 오스트리아에서 생을 마쳤다. 간신히 미국으로 피신한 아들 헤르베르트(Herbert Adler)가 훗날 고향 빈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개인소유물과 부동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견된 아들러의 개인 소장품과 기록물 일부는 아테네의 조지아 대학에 기증되었다.

또 2000년, 우연한 기회에 1905년 말러가 아들러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빈 국제 미술품 경매장에서 6십만 달러라는 가격에 아들러의 딸 멜라니의 변호인이자 아들러를 음악 연구소에서 쫏아내는데 기여했던 리햐르트 하이서러(Richard Heiserer)에게 팔려 나갔다는 어처구니 없는 보도도 있었다. 아들러의 딸 멜라니 아들러(Melanie Adler)는 나치군에 의해 민스크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며, 현재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들러의 손자 톰 아들러가 할아버지의 친필 기록 회복을 위해 법정 소송을 걸어 놓은 상태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원본 친필 기록의 복사본을 전시해 당시의 원모습을 재현해 보여줌으로써 나치에 의한 유태인 명예 회복과 역사적 재평가를 촉구하는 작은 시위를 벌이고 있는 셈이다.

1981년 빈 국립오페라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난 후 레오나르드 번스타인과 마르셀 프라비(Marcel Prawy)가 무대에서 관객을 향해 인사하는 모습. Photo courtesy: Jüdisches Museum Wien.

제2차 대전 이후 유태인이 떠난 후 빈 음악계 이 전시는 또 유태민족의 박해와 살상의 규모가 가장 크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던 1938-45년 사이 나치군의 제3제국 시대를 고찰하고 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이 주도된 독일 동맹의 제2차 대전 패망 1945년 이후 전개된 빈의 음악계을 살펴 보는 것은 여간 흥미롭지 않다.

히틀러의 나치 정권의 박해와 학살, 퇴폐 예술가라는 낙인을 피해 미국을 비롯한 제3국으로 망명한 유태인 출신 음악가들도 많다. 쇤베르크는 미국으로 망명가 작곡가 및 지휘자로서의 활동을 계속한 망명 음악가의 대표적인 예다. 그는 사망하기 전까지 빈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했다. 현재 그의 아들과 후손들이 재단 기금을 모아 빈과 로스앤젤레스 두 곳에서 공동 운영하고 있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센터(Arnold Schönberg Center)는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망명 음악인들은 대체로 매우 어려운 여건에 굴복해 음악 활동을 계속하거나 음악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치 시대 추방당한 유태인 출신 음악인들을 다시 불러들이거나 재이민 초청을 하지 않았다. 빈 음악계의 르네상스를 창출했던 말러는 생전 빈에 다시 발을 들이지 않았다. 한편 카를 뵘(Karl Boehm)이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같은 지휘자들은 나치 정권의 지원 속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전후 빈 음악계를 지배했었다는 사실은 적잖이 흥미롭다.

2차 대전 이후, 여타 예술 분야에서 그랬듯이 고전 음악 분야 또한 그 중심지를 뉴욕으로 옮겨와  발전을 계속했으며 미국에서 정착한 유태인 음악인들의 활동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예컨대 홀로코스트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한 후 20여년 만에 뉴욕에서 세계적인 명성과 예술적 성공을 거둔 레오나르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그 국제적 기세를 몰아 60,70년대 빈 음악계를 찾아와 청중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했었다. 오늘날, 유태인들이 음악 분야에서 이룩한 성취는 고전 음악만이 아니라 헐리우드 영화 음악과 현대 대중 팝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전시명 : 『콰지 우나 환타지아 – 근대 빈 음악계와 유태인』 展 / 전시 장소 : 오스트리아 빈 유태인 박물관(Juedisches Museum Wien) / 전시 기간 : 2003년 5월14일-9월21일

* 이 글은 본래 세종문화회관 회원지 월간<문화공간> 2003년 10월호에 출간되었던 것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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