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은공예의 재발견

THE SPLENDOR OF SILVERWARE

“그 [귀족의 자손 쟝 데세쌍트] 는 박태자기 (薄胎磁器)라고 부르는 이 중국제 도자기 찻잔에 액체 향수 [중국산 차]를 마셨다. 이 박태자기란 얼마나 얇고 투명한가. 그리고 이 사랑스러운 찻잔과 함께 그는 금도금된 순은제 티스푼을 사용했다. 은숟가락을 살짝 덮고 있는 닳은듯해 보이는 도금 표면은 세월로 인해 지치고 삵아드는 듯한 색조를 내뿜는다.” – 조리스-칼 위스망스 (Joris-Karl Huysmans)의 탐미주의 소설 『거꾸로 (À rebours)』 중에서.

살라 테레나 연회실에 작센-테셴 군주가 소유했던 은제 테이블웨어로 차려져 있는 연회상 모습. 황실 은세공장인 이그나츠 요제프 뷔르트가 디자인과 세공을 담당했다. 파리 개인소장 © Liechtenstein Museum. Die Fürsten Sammlungen, Wien.

우아하게 먹고 마시는 다이닝 문화는 인류 문화사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18세기 바로크 시대 유럽의 귀족들은 누가 얼마나 더 화려하고 거나한 연회와 잔치를 연출하는가를 두고 각축을 벌였다. 연회 절차는 복잡하고 수선스러울수록 연회를 주최한 주인과 초대받은 손님들의 신분이 드높이 빛났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은 손님에 대한 도리와 경의, 접대 주인의 식견과 취향은 물론이려니와 은근하게 압도하는 사교적 위력의 표현이다.

귀한 손님을 초대한 잔치 주인은 은으로 된 갖가지 식기와 연회상 장신구로 장식하는 것이 기본예의였다. 또 잔치 주인은 사려깊은 고려 끝에 초대객들의 앉을 자리를 결정했고, 전체적인 연회의 흐름에서 테이블 냅킨이 접힌 귀퉁이까지 세심하게 지휘했다. 그런 잔치를 연출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장황한 연회상의 하일라이트는 단연 금은제 다이닝 서비스 (dining service)라 할 수 있다.

그같은 전통은 오스트리아의 옛 합스부르크 황실과 귀족층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특히 독일 작센-테셴의 알베르트 공과 합스부르크의 마리 크리스틴 공주가 살았던 18세기 말은 유럽의 “예식의 황금시대 (Golden Age of Ceremony)”라고까지 불렸다. 예컨대 작년 4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렸던 ‘황실 은제의 재발견’ 전에 이어 올 봄 빈 리히텐슈타인 미술관으로 옮겨와 열린 ‘작센-테셴 알베르트 공의 은제 식기’ 전은 그 때 모습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재연출해 보였다.

이 전시에서 재현된 위풍당당했던 빈 바로크 귀족의 연회 테이블은 19세기 말 이후도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던 것들로, 안타깝게도 나폴레온 전장 때 무기로 제련되는 바람에 지금은 다수가 소실되어 버렸고 그나마 현재 흩어져 잔존하는 것들은 프랑스의 한 개인소장가가 보유하고 있다. 올해 4월 런던 서더비 옥션에서는 이 은제 다이닝 서비스를 구성했던 접시 수 점이 경매에 부쳐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컬렉션으로 낙찰됐다.

이 황실 연회용 은제 서비스는 본래 독일 작센-테셴의 알베르트 카지미르 공과 합스부르크 황실의 왕녀 마리 크리스틴(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의 결혼피로연에 쓰였던 혼수품이었다 한다. 이 은식기 세트 디자인과 수공을 맡았던 금은공 장인은 빈에서 살던 이그나츠 요제프 뷔르트 (Ignaz Joseph Würth)였는데, 만찬에 필요한 각종 순은 식기류와 테이블 장식품 일체 350점을 수공 했다. 장식미술 역사가 에드문트 브라운 (Edmund W. Braun)에 따르면 작센-테셴 은식기 서비스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금제 조식용 테이블웨어 다음으로 뜻깊은 신고전주의풍 세공예술의 결정판이라고 평가된다.

유럽 귀족들의 은에 대한 애정은 언제나 특별했다. 은은 이미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흰 금’ 또는 ‘달의 금속’이라고 불렸다. 달빛 아래서 물에 비치면 차갑고 하얗게 발광하는 은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은 장신구를 걸친 사람의 모습을 각별히 화사하게 돋궈주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 부유한 귀족들은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살균효과까지 있다는 이 은으로 동전과 가정용 식기를 만들어 썼다. 불어서 만든 유리 식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5세기까지만 해도 귀한 사람들의 술잔은당연 은컵이었다.

16-17세기 인도와 남미를 향항 동방 항해로 개척도 바로 은에 대한 유럽인들의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테이블 위를 화려하고 품위있게 장식해 주는 것도 역시 은제 테이블위어와 서비스가 되었다. 보는 사람의 시각을 즐겁게 자극하는 광채와 빛깔 때문에 가문있는 집안에서는 실내장식품, 아가용 식기, 그림을 담는 액자에 즐겨 썼다.

18세기 독일에서 활동하던 은세공 장인 요한 카스파르 3세 겔프 (Johann Caspar III Gelb)가 영국의 존 윌리엄 이거튼 제7대 브리지워터 백작 가족을 위해 이 은제 펀치 보울을 제작했다. 이 용기는 제작된 1708년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이 가문 내 친척끼리 선물로 주고받던 가보였다. © The European Fine Art Foundation.

유독 은이 그 의기양양하고 고귀한 지위를 누렸던 이유는 도자기, 목재, 유리와는 다르게 그 자체로 금전적 가치가 있는 실용적인 재료이기 때문이다. 유행이 지난 은제품을 녹여 새유행에 맞는 물건으로 개조하기 쉬웠고, 금속공예 장인들도  유동적이고 부드러워 다루기 좋은 은을 사용하기를 즐겨했다.

나라의 경제위기 시에는  응급용 화폐로도 사용되었는데, 예컨대 17-18세기 프랑스에서는 루이14세와 15세는 은 수거 포고령을 내리고 나라의 은을 모조리 거둬들여서 적자가 난 국고를 보충했다. 18세기 섭정시대 영국에서도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극도로 화려한 은제장식용품이 많이 만들어졌고, 이어 빅토리아 여왕도 은 장신구를 좋아해서 대중적 유행으로 번졌다한다.

은세공 기술과 은제 가구와 식기류 유행의 선도자는 단연 프랑스다. 17세기 후반기 루이14세 치정기 동안 베르사이유 궁 실내를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콘솔 테이블, 대가 높은 장촛대, 거울 같은 가구가 은으로 만들어졌고 점점 은을 연회상 위에 놓을 테이블웨어로 만들기 시작했다. 갖가지 음식 접대용 용기, 접시, 한 짝이 되도록 어울리게 디자인된 나이프, 포오크, 숫가락 세트가 일체로 품격있는 다이닝 테이블의 기본조건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그 때였다.

‘세르비스 알 라 프랑세스 (service à la française)’ 즉, 프랑스식 테이블 서비스가 바로 루이14세 때 17-18세기에 도입된 새로운 궁중 연회 상차림 방식이다. 테이블 위에서 가장 육중하고 값비싼 식기는 이른바 튜린 (tureen)으로 불리는 뚜껑달린 수프 그릇이다. 그릇을 떠받치고 있는 동물발 모양의 받침다리는 주로 권력의 상징인 사자발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요리의 내용물을 암시하기 위해 사슴, 생선, 또는 가재나 게 같은 갑각류 형상을 따서 만들어지기 했다.

또 그런가하면 한적한 오후 홍차나 커피를 즐겼던 귀족들 사이에서 우아하고 정교하게  디자인 세공된 은제 티와 커피 서비스(주전자, 잔과 받침대, 스푼, 찻잎걸름망, 설탕단지 포함)를 누구나 갖고 있던 필수품이었다. 특히 18세기 말 로로코 시대가 되어서는 당시의 퇴폐적 문화가 반영되어 기상천외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을 한 은제품들이 크게 유행했다.

존 싱어 사전트의 회화작품 「한 밤중의 저녁 식사 (A Dinner Table at Night)」 1884년 작 © Fine Arts Museums of San Francisco, de Young.

은세공 비용이 한결 저렴해져 대중화되기 시작한 때는 19세기 전기 은도금 기술이 발명되면서 부터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고급보석상 티파니 (Tiffany & Co) 사는 1850년대 이후부터 금속합급에 은을 입힌 은제 테이블웨어와 쥬얼리 용품을 선보여서 이른바 미국적 고전주의기라 할 수 있는 20세기 초 도금시대 (Guilded Age)에 앤드류 카네기와 J.P. 모건 같은 신흥갑부들의 대저택 식사실을 눈부시게 장식했었다. 런던의 귀족 알버트 비커즈 부부의 모습을 그린 미국화가 존 싱어 사전트의 「한 밤중의 저녁 식사(A Dinner Table at Night)」에는 신고전주의풍 은제품이 놓인 우아한 저녁식사 테이블이 등장하여 당시의 분위기를 엿보게 해 준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까지 영국 미술과 공예운동, 파리 아르누보와 아르데코, 빈 베르크슈테테 운동을 통해 생산된 근대주의 은공예를 끝으로, 20세기를 걸쳐 하이테크 산업사회가된 오늘날에 은의 금적적 가치와 장식공예적 인기는 많이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은이 지닌 유달리 탁월한 신축성과 전기 및 열에 대한 탁월한 전도력 때문에 현대인들의 필수 개인용 전자제품 (노트북 컴퓨터, 이동전화기, 디지틀 카메라 등) 부품 원료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귀금속의 맞형뻘이자 영원한 가치의 보루라는 금보다 가격변동이 심하고 투기에 쉽게 노출될 우려가 있다는 점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탁월한 디자인적 비젼과 세공기술로 만들어진 옛 은세공거장들의 은제품이 내뿜는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다. ■

※ 이 글은 본래 『크로노스』 코리아 (CHRONOS Korea) 지 2012년 9/10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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